
아! 불량 기독교 그리고 불량 사회
- 시오니즘를 거부했던 한나 아렌트 -
사람이 사소한 이익에 집착하다 보면 대의를 그르칠 경우가 있다. 공자는 사소한 이익에 집착하여 대의를 그르치는 이를 소인배라고 보았고, 이익보다 대의를 존중하는 이를 군자라고 여겼다. 그러나 간혹 사소한 이익이나 대의를 구별해 낼 객관적인 기준이 애매해 질 경우가 있다. 시장판에서 장사하는 사람의 경우 조그만 이익을 소홀히 하다가는 자신의 가업이 기울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정치적인 긴장관계 속에서 강한 자 편에 서지 않을 경우 간혹 냉혹한 차별을 받는 수모를 겪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사익과 대의를 나누는 논리에 앞서 무엇보다도 사익을 택할 수도 있고 대의를 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삶의 조건이 우선해야 한다.
나는 우리 사회가 이런 자유를 박탈당한 사회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누구든지 자신의 양심과 지성적 판단에 따라 사안을 결정해도 될 자유가 도무지 없기 때문이다. 즉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이미 누군가에 의하여 구획되어져 있는 셈이다. 거대한 편견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양심의 법을 지킨다는 것은 이 편견을 조장하고, 이 편견에 의하여 이익을 도모하는 집단의 미움과 감시를 받는 처지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판단에 신뢰를 가지기보다 누군가의 판단에 스스로를 맡기는 도덕적 자아의 상실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칸트는 자유를 가진 인간은 양심의 법에 따라 보편적 격률을 실천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만일 이미 사회적 압력이 무거운 짐처럼 내려 누르고 있는 정황, 곧 일정부분 자유가 박탈당한 정황에서 답을 내려야 하는 강요된 상황은 보편적인 격률보다 집단의 요구와 이해관계에 천작하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개인의 존엄과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세계 속에서 집단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은 결국 소외와 차별과 배제를 당할 것이라는 예측을 불러온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집단의 폭력이 암시하는 가치판단의 구조가 작동한다. 마치 깡패들이 눈짓만 해도 입을 다물고 머리를 조아리는 양상과 유사하다.
한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기독교인은 누구보다도 양심의 자유를 이해하고 있는 존재다. 그는 죄로부터의 자유를 경험하고 의로운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신앙 안에서 이미 굳게 세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의미가 이와 같지 않다는 데 있다. 의로운 삶보다는 안전과 행복과 축복을 추구하는 삶의 연장 선상에서 영적인 안전망을 확보한 존재라는 자기이해를 가지는 경우가 십중 팔구인 까닭이다. 조용기 목사의 삼중축복론은 아예 대의와 사욕을 구별할 능력이 없는 불량 기독교인을 양산하는 체계로 작동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축복은 대의와는 상관없이 오직 나의 교회에 대한 헌신의 질에 정비례한다고 믿게 되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불량 기독교인들은 대의와 의로움의 지평에 대한 자각과 인식에 있어서 매우 후진적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성직자들에 의하여 교도받기를 즐겨하며 길들여진 존재가 된다. 성직자들과의 거리는 안전의 척도처럼 이해되고, 성직자의 요구라면 거절할 수 없는 요구로 해석된다. 이를 거절하는 것은 결국 삶의 안전와 축복망을 상실할 위기를 초래하는 까닭이다. 영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성숙한 성직자를 만날 경우 불량 기독교인이 직면할 위기는 적다. 하지만 저질의 성직자를 만나는 경우 어떤 기독교인들은 깊은 불만과 더불어 공포와 두려움을 가진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자유를 행사할 주체적 의식이 심각하게 약화되어 의존성을 버릴 수가 없다. 이럴 경우 그들은 선과 악, 대의와 사익을 구별하지 못한다. 다만 성직자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그들의 지시에 따라 깃발을 들고 움직일 뿐이다.
불량 성직자에 의하여 길러진 불량 신자의 경우 신앙인으로서의 자유와 희열, 깊은 자각과 은총에 대한 감격, 그리고 사죄의 복음이 주는 평화를 일면 가지지만 그 신학적 해석 지평은 매우 편협하다. 나와 내 가족과 내 교회가 그들 신앙의 축이 된 까닭이다. 이런 점에서 트뢸치가 이해했던 기독교 사상의 핵심인 급진적 개인주의도 없고, 에큐메니칼한 보편성도 결여되어 있다. 급진적 개인주의가 있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과 자기 집단의 위기를 인식하고 이의 갱신과 변혁의 힘을 불러오는 힘이 된다. 그러나 축복을 통한 삶의 안정망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변혁과 개혁이란 종교적 회심일 수는 있어도 옳고 그름에 대한 삶의 판단구조의 변혁이 되기는 매우 어렵다.
이미 그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위기로 몰아가는 순화의 종교적 경험을 축복과 획득의 구조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버림과 자기 부인의 이름을 가졌으나 그들의 시선은 이미 약속된 축복에 가 있다. 그리하여 자기 버림의 좁은 길이 아니라 축복의 증거를 가진 신앙의 승리자가 되기를 갈망한다. 불량 기독교인은 이렇게 그 본래의 이기적 동기를 포기하지 못한다. 오히려 신앙의 이름으로 그 이기성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강화하려는 것이다. 어느 교회 버스에 쓰여진 광고 문구를 보고 나는 참으로 놀란 적이 있다: “우리 교회에 나오시면 부자 되십니다.” 갈데까지 다 간 불량 기독교다.
오늘 미국에 계신 홍상설 목사님으로부터 성탄메시지를 받았다. 그 메시지 안에는 노목사님의 우려가 담겨 있었다: Lewis Mumford 의 경고가 떠오릅니다. '한 때는 인류의 한 부분으로 하여금 어둠 속에서도 바르게 걸어가기를 가르쳐 주던 교회가 오늘 또 하나의 암흑시대를 이기고 전진할 만한 능력을 불러일으키기에 실패할지도 모른다.’ 지난 날 기독교의 성장과 발전은 교회나 신자가 우리 사회의 모범이 될 수 있다는 사회적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과연 기독교가 사회적 신뢰를 받고 있는 종교인지 심각하게 의심하게 되었다. 대의를 잃고 이기성에 빠진 개인으로서의 불량 교인, 불량 집단이 되어가는 교회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기성에 빠진 집단은 이기성을 내려 놓으라는 권고를 거절한다. 따라서 사소한 이익을 넘어선 희생과 봉사의 대의를 무시한다. 적선을 하고 동정을 하면서도 그는 심리적 혹은 사회적 대가를 기대한다. 교회 주보들이 나열하고 있는 위선도 대단하다. 학문적 성취를 통하여 얻은 학위가 아님에도 박사임을 광고하고, 박사가운을 입고 강단에 서기를 즐겨한다. 이런 가치들이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다는 것은 결국 이미 하나님의 교회가 사소한 이익관계를 일상적인 가치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익관계를 비판하고, 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그 집단에 의하여 따돌림을 자초하는 것과 다름없게 되었다.
나는 근래 들어 홀로코스트 이후 유대인 집단 속에서 유대인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 교회, 그리고 대학, 그 어느 곳에서든지 개인이 사회적 지위와 권리를 누리려면 그 소속 집단의 가치와 충돌하는 일을 피해야 한다. 소속 집단의 질서를 존중해야 하고, 소속집단의 전통을 인정해야 하며, 소속 집단의 결정에 이의를 달거나 토를 달아서는 안 된다. 만일 이런 원칙을 지키지 않을 경우 집단으로부터 눈흘김을 당하며 무언의 비판과 배제와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 더구나 힘없는 개인이 왕따를 당하고 있는 특정인의 편에 선다는 것은 스스로 왕따를 초래하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집단이 정직하고, 대의를 지키며, 스스로를 부단히 갱신함으로써 도덕적 우월성과 정당성을 재고할 경우 이 집단은 양심적인 진실의 소리를 수용하고, 이를 통하여 더욱 진실한 가치를 형성해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집단이 그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보편적인 가치를 외면하고, 불의를 행하며 불투명한 결정을 해 나갈 때 그 집단으로부터 생존의 조건을 부여받고 있는 그 집단의 구성원은 자기 판단을 포기하고 집단의 불의한 의식에 동조 참여하거나 심한 경우 앞장서서 불의를 조장하기도 한다. 이런 연유에서 무수한 양심적인 지식인들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수자를 희생시키는 제의를 묵인하거나 소극적인 참여자가 된다.
그러나 양심이 지지하는 보편성을 상실하는 것을 방임할 경우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매우 무거운 형벌로 되돌아 오게 된다. 자각과 인식구조의 붕괴가 일어나 그 스스로도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낮추어 잡게 되는 까닭이다. 그릇된 관행을 반복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도덕적 자아의 붕괴를 드러내고 있다. 양심과 진실, 투명성과 정의가 없는 삶에 찾아오는 것은 결국 불의와 억압과 배제와 차별의 논리가 되고, 이런 삶에 젖어든 이들은 이내 불의한 판단의 주체자가 되어 그 불량집단을 불량한 방법으로 존속시키는 것이다. 도덕적 보편성이 결여된 집단 안에서 힘을 가진다는 것은 더 큰 이익관계를 얻기 위해 집단의 힘을 강화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 최고의 엘리트들을 양산해 내는 대학과 그 대학 출신들이 포진하고 있었던 대기업들의 몰락은 바로 이렇게 보편성을 상실한 집단의 유희에 너무 깊이 빠져들었던 까닭이다. 대우와 신동아의 몰락에 이어 삼성의 비자금 사건들은 이런 사실이 우리 사회에 버젓이 통용되고 있다는 증거다. 그들은 우리 사회 권력기관에 뇌물을 정기적으로 보내주며 그들의 불투명성과 불의를 묵인받아 왔다. 그들로부터 뇌물을 받아온 검찰은 사건이 보도된 지 한 달이 지나도 아무런 수사 결과를 발표하지 않고 있다. 이렇듯이 우리나라는 참 이상한 나라다. 물론 게중에는 정직과 투명함을 기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직과 투명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예찬하는 사회인 것이 이상하다. 결국 정직과 투명함을 지키는 이들이 소수자로서 예외로 취급을 받는 불량 사회가 된 것이다.
나는 이번 대통령 선거를 바라보면서 한 후보에 대하여 너무나 많은 의혹과 문제가 제기되어도 이에 개의치 않겠다는 우리 사회의 의식에 놀라고 있다. 두 차례에 걸친 개혁 정권에 대한 비난을 일삼는 깡패신문 조중동에 시달려 온 국민들은 자신도 모르게 개혁정권 기피증에 감염된 증상을 보이고 있다. 조석으로 애써서 정부를 비방해온 신문들이야말로 그들의 전력을 살펴보면 결단코 우리사회의 목탁이 될 만한 양심과 지성과 도덕성을 확보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권력에 기생해 온 천박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일제에 아부했으며, 독재를 옹휘했고, 상업주의에 길들여져 있다. 이런 신문들이 중앙지가 되어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신문들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대중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의와 진실, 그리고 투명한 사회 공동체를 위한 노력에 대하여 이들은 조소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권위주의이며, 권위주의 정권의 시녀가 됨으로써 누리는 특권의 향유와 더불어 그들의 본질적 성격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민주적, 평등적, 탈권위적인 정책을 좌파라 몰아 세웠고. 적색 알러지가 있는 국민들은 좌파라는 말만 들어도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소리높여 매도하기 십상이었다. 이들은 그간 전 국민을 세뇌시키더니 선거철이 되자 반민주적, 특권적, 권위적 지배세력을 양성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상대의 조그만 흠은 잡아 늘이고, 그들이 선호하는 이의 결점은 철저히 덮어 주는 기가 막힌 행보를 거듭하고 있다. 나는 공정한 잣대를 버리고 굽은 펜을 든 이들이야 말로 우리 민족의 미래를 망치는 반민족적 집단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지는 우리사회가 과거로의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FT.COM) 권위주의적 권력을 옹휘 함으로써 그 권위의 국물을 나누는 집단의 이기성이 전 세계적인 보편적 정신의 기틀을 무시하고 있다. 나는 이번 선거에서 드러나고 있는 과거로의 회귀가 결국 가진자. 특권을 누리는 자, 그리고 권력 근친성을 가진 자들의 꿈이라고 생각한다. 어리석은 민중은 그들의 선전과 책략에 춤추고 있을 뿐이다. 나는 이런 점에서 민중의 어리석음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조작과 선동에 의한 착취와 억압을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거대한 권력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과거로의 회기를 재촉하는 집단이기를 자처하고 있다. 이런 기독교 안에서 어떻게 미래를 위한 새로운 예언의 메시지가 나올 수 있겠는가? 권력과 재산을 가진 자들 편에 서는 정권이 가져오는 부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이겠는가? 나는 극명한 집단간의 갈등을 드러내고 있는 사례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관계에서 본다. 이스라엘은 자기 집단의 안전과 평화를 위하여 팔레스타인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이중기준의 윤리를 담은 정책을 앞세워 팔레스타인의 희망을 빼앗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우리 사회에서 팔레스타인인과 같은 운명에 빠질 수밖에 없는 민중들이 오히려 강압적인 이스라엘을 편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민중의 자기혐오와 배반이다. 그 대가는 적지 않을 것이다.
유태인 해방신학자인 마크 엘리스는 이스라엘 사람으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스라엘 정부를 거역하는 강연을 하고 글을 쓴다. 즉 그는 유태인으로서 유태인들의 집단 의식을 해체하고, 그들의 특권을 거부하며, 유태주의의 반보편성을 비판해 왔다. 정의와 평화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한, 유태주의는 고립될 수밖에 없으며, 나치가 벌렸던 시대착오적인 오류를 반복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까닭이다.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일본과 싱가포르가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보편적인 민주적 의식 없이 경제적 특수를 누리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증오하는 자기증오의 덧을 놓아야 한다. 권위적 권력에 의하여 통제를 받고, 도덕적 이상은 버려야 하며, 이기적인 동물들이 되어 단지 좀 더 나은 우리 안에 가두어지는 것을 행복이라 여겨야 한다.
나는 지난 10월 엘리스 교수의 해방신학 모임에서 비록 시오니즘을 비판하는 양심적 지성인의 길을 걷고 있을지라도 그의 신념의 타당성에 동조하는 많은 유대인들을 만나 볼 수 있었다. 그 중에는 팔레스타인 인들의 집을 파괴하는 이스라엘 정부에 저항하며 스스로의 몸을 팔레스타인인들의 집에 묶어 놓고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여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지키려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참된 인간의 얼굴이란 강한 힘과 소유의 크고 적음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익, 우리의 이익보다 더 큰 보편적인 진리를 위하여 나를 포기하고 우리도 포기함으로써 더 큰 평화의 연대를 이루어 나가는 데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집단의 오류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경험한 적이 있다. 집단의 이익에 집착하는 이들은 자기 집단을 의롭게 여기고, 그 집단을 비판하는 개인을 사적 이익에 집착하는 자라고 몰아 세운다. 사적 이익에 집착한다면 그가 바보가 아니고서야 왜 집단에게 저항하겠는가? 삼성의 비리를 제보한 김용철 변호사를 비난하는 이들이 많은 사회 - 나는 이것이 우리의 자기혐오, 혹은 자기증오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옳은 것을 주장하는 이를 싫어하는 행위는 곧 자기 안의 옳지 못함을 인식하고 있는 자기를 혐오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다. 집단의 몰매를 맞아 본 사람은 권력과 이익에 앞서 옳고 그름에 예민할 수 밖에 없다. 예수도 바로 그렇게 집단의 몰매를 맞았던 이가 아닐까.
예수를 죽인 유태인들 처럼, 우리는 양심의 갈등을 회피하기 위하여, 그리고 더 가지기 위하여 과거의 권위주의 정권으로 우리 사회의 방향을 되돌리는 어리석은 국민이 되고 있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이 명박 씨 같은 기독교인, 무수한 의혹을 안고 사는 그에게서 정치적 메시아를 보려하는 목사들을 보아도 참 슬프다. 불량 기독교인, 불량 성직자들이 다량으로 생산된 한국 교회 현실을 바라보면서 나는 성서의 구절을 기억한다. 가라지와 알곡을 함께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 가라지와 알곡이 언젠가는 나누어지고 구별될 날이 올 것이라는 말씀에서 위로를 얻지만, 그 때까지 견디고 참아야 할 일이 벌써부터 염려된다.
Friday, December 14, 2007
Immoral Christian and Immoral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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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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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ies About Liberation Theology in the 21st Century 1
# "영성일기의 허망함"을 썼더니 몇 분이 의분에 차서 매우 혹독한 비난을 내게 던져 오셨다. 물론 더 많은 분들이 동의해 주셨고, 수백분이 이 글을 가져가 나누셨다. 뭘 알고 나무라면 내가 경청하겠으나, 신학의 세계를 이해할 능력도 없는 이들이 공연한 분노를 배설하듯 비난을 던지는 것은 그저 ‘목사 잘못만난 까닭’이라고 나는 본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욕설을 하는 것이 의로운 것인 양 배웠으니, 그렇게 가르친 자들이 문제지, 그들은 사실 무례하기는 하지만 큰 죄가 없다. 이 글은 14년 전 2008년 <기독교사상> 신년호에 실렸던 글이다. 텍사스 왜코, 베일러 대학에서 열린 해방신학 컨퍼런스에 초대되어 참석했다가 내가 쓴 참가기다. 근본주의 신앙을 배운 신자들은 세 상 넓은 것을 깨닫고 조금은 겸손했으면 한다.
긴 글이지만 관심 있는 분들은 한 번 읽어주시기 바란다.
“현대 해방신학의 동향과 그 흐름에 대하여/ 박충구”
남미 식민지화와 나란히 이루어진 가톨릭의 선교 역사를 살펴보면 식민지배와 선교가 동일한 이해관계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남미 식민지 선교 역사를 연구한 자료를 읽다가 나는 “행진하는 군사들 뒤에서 열정에 불타는 선교사들이 걷고 있었다.”라는 구절을 보았다. 그들은 군사적 정복과 영적 승리주의를 함께 나누고 있었고, 식민지민을 향해서는 군사적 우월감과 영적 우월감을 당연한 것인 양 주장했다. 심지어 맥시코를 점령했던 헤르난 코르테는, “우리는 하나님과 왕을 섬기려 이곳에 왔고, 그리고 또한 금을 얻으러 왔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했다.
이렇게 시작된 남미 가톨릭 선교 역사는 그 지역의 문화적 가치를 열등한 것으로 여겨 송두리째 부정했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인이 정복했던 마야, 아츠텍, 그리고 잉카(Maya, Aztec, Inca) 문명은 열등한 신을 섬기는 이교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여지없이 파괴되었다. 기독교 정복자들은 토착민을 노예로 삼았고, 토착민은 서구에서 찾아온 이들이 가지고 온 수두와 같은 전염병으로 떼죽음도 겪었다. 가톨릭교회는 196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지난 식민 정복의 잔혹한 역사에 대하여 사실상 침묵하고 모른 척했다. 이런 까닭에 해방신학은 500여년에 걸친 남미 가톨릭 선교 역사에 대한 비판적 반성을 기조로 삼고 있다.
해방신학은 가난과 억압의 현실에 침묵해 온 교회, 그리고 교회의 침묵을 깨뜨린 예언자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1970년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이 출간된 직후 교회와 신학의 영역에서 세계는 직간접적으로 해방신학에 대하여 스스로의 입장을 해명해야 했다. 해방신학은 방법론적으로 막스주의적 경제철학을 빌어 현실을 분석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에 순수한 신학적 사유가 아니라는 비판도 있었다. 또한 영혼 구원이야말로 교회의 책무라고 여겨온 복음주의적이며 보수적인 교회들은 해방신학이 교회 안에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를 갈라놓고 갈등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교회에 적대적인 것이라 간주하기도 했다. 심지어 도처의 독재 정권은 현존하는 질서의 사회 경제 정치적 정당성에 깊은 의혹을 제기하는 해방신학을 반체제적인 신학이라고 규정하고 해방신학 서적 판매금지는 물론 해방신학에 관심하는 이들의 사상을 감시 통제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 박정희 독재 정권은 구띠에레즈의 <해방신학>을 독서 금지 불온 도서로 규정 했었다. 지금도 필리핀이나 남미에서는 해방신학을 반체제적인 막스주의자들의 혁명 전략의 일환으로 규정되고 있다.
해방신학을 필두로 하여 지난 20세기는 다양한 해방신학의 장르를 생산해 냈다. 신학적으로 아시아 신학 담론이 서구 신학이 축으로 삼아온 서구적 경험, 즉 서구의 시간과 장소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사상적 지평을 열었다면, 이어진 후기 식민 담론과 제국주의 비판 이론은 권력과 지배의 본질을 해체해 드러내는 시각을 제공해 왔다. 특히 페미니즘은 지난 역사 속에서 모든 학문 영역을 지배하고 있었던 남성중심적이며 가부장적인 문화와 가치 체계로부터의 해방 담론을 불러왔다. 식민담론, 제국주의 이론, 그리고 페미니즘은 하나의 사유방식이라기 보다는 20세기 해방 신학적 과제의 확대 과정에서 분기(分岐)하여 출현한 것으로서 방법론적인 유사성과 연대구조를 나누고 있다. 해방 신학과 맞물려 유럽에서 논의되었던 정치 신학은 신학의 정치적 중립성과 애매성을 넘어서서, 기독교의 정치적 책임성을 논구하기 시작했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히틀러 정권의 형성과 존립과정을 복기하면서 교회의 역할에 대한 비판적 반성이 일어났고, 이어 요한 메츠(Johann Baptist Metz), 유르겐 몰트만(Juergen Moltmann) 등이 전개한 유럽 정치신학과 더불어 미국에서는 60년대를 지나면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시민권 운동은 인종 차별의 사슬에 묶여 있었던 흑인 인권을 재조명하는 흑인 해방 신학으로 이어졌다.
이런 일련의 흐름은 아시아의 신학적 인식구조에도 영향을 끼쳐 1970년대 한국 민중 신학 운동을 불러왔으며, 인도의 달리 신학, 일본의 천민 신학 등으로 진화해 왔다. 이런 흐름에서 본다면, 1960년대 이후 대두된 해방신학은 전통 신학이 결여하고 있었던 ‘사회윤리학적인 취약성’을 비판 신학 담론을 통하여 극복함으로서 신학의 시대착오적인 억압성을 해소하려는 시도였다. 이런 시도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기존의 제도화된 교회의 신학이 지나치게 지배 권력과 결탁하여 억압받는 사람들, 착취를 당하고 있는 가난한 이들, 차별을 받아온 계층과 성에 대하여 냉혹할 정도로 무관심했던 까닭이다.
이를 달리 말한다면 교회는 ‘가진 자들과 지배자들의 요구를 담아내는 신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신앙의 이름으로 가진 자와 억압자에게는 정당성을 부여하고, 착취와 억압을 당하며 신음하고 있는 이들을 위한 사회적 구원, 즉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해방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보수적인 교회일수록 인간의 죄스러운 경향성을 강조함으로써 억압받는 이들이 벌이는 저항과 비판을 죄인들이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려드는 불신앙으로 규정하기까지 했다. 문제는 이런 규정의 배리는 인간의 죄성의 깊이를 오직 억압받는 이에게만 적용하고, 가진 자와 억압하는 자를 향해서는 적용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교회는 억압자 편에 서있었고, 억압받는 자들을 종교 메시지로 침묵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오랜 악습은 기독교인들이 꿈꾸는 하나님의 나라를 궁극적인 해방인 동시에 참된 구원의 지평을 여는 타세계적인 것으로 교도함으로써, 현실에서 직면하고 있는 불의와 억압을 방관하며, 이를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함으로써 종교를 통한 억압과 지배의 강화를 일삼아 온 것이다. 성서의 하나님, 해방의 하나님, 인간을 자유하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입고 있는 인간의 존엄함을 강조하면서도, 교회는 권력을 가진 이에게는 억압적 기능을 승인해주고, 권력이 없는 이들을 향해서는 복종과 순종의 미덕을 가르치는 이중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성서에서 가리키는 해방의 지평은 현실세계에서는 도무지 열릴 수 없는 꿈일 뿐, 사후 천국에서나 궁극적인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가르쳐 온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반해방적 신학은 지나치게 제도적 신앙에 스스로를 묶어 두고 있었다고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해방신학이 나온 것이다. 따라서 해방신학은 제도화된 기독교의 신학적 구조를 제공해 온 ‘유럽 신학으로부터의 신학적 해방’을 요구하며 “비판적 성찰(critical reflection)"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서구 신학의 이론적 체계의 타당성을 일체 거절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구 신학의 형성 과정에서 깊이 반영된 서구인들의 인식과 경험이 만들어 놓은 ‘기존 질서 옹호적, 체제 옹호적 신학’에 대한 비판을 전개함으로써 해방신학은 그 정당성을 찾으려 하였다. 해방신학자들은 서구 신학이 침묵하며 왜곡하고 있었던 신학적 이해를 수정하거나 재해석함으로써 기독교 신앙과 체험을 보편적인 하나님의 해방적 사역에서 해명하려고 하였다. 여기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역사적 예수 이해 방법이 해방 신학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교리보다 역사적 실천이 강조된 까닭이다.
구티에레즈와 보니노(José Míguez Bonino), 보프 형제(Clodovis Boff, Leonardo Boff) 등이 전개한 초기 해방신학은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페루, 주로 남미의 정치경제적 상황에 맞물려 억울린 자들의 해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 당시 남미의 정치 경제적 상황은 중앙화된 권력이 개발을 가열차게 촉진하려는 전략을 최우선시하는 ‘개발 독재’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무수한 사람들의 노동을 착취함으로써 자본주의적 발전을 위한 희생양으로 삼고 있었다. 제 3세계의 가난한 농민과 도시의 노동자들은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이익을 위하여 희생되고 있었지만, 제 3세계의 지배계급들은 서구 자본주의 지배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자국의 국민의 노동을 착취하는 저임금 정책으로 일관하면서 과도한 노동을 요구하고 있었다.
자본과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들은 국민들의 저항을 극소화시키고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국가안보’라는 이데올로기를 창출하였고, 이를 정치적 억압기재로 사용함으로써 경제적 착취에 더해 정치적 억압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교회와 신학은 이러한 정황을 충분히 파악할 능력도 없었고, 상당수는 영적 과제만 중시한다는 명분을 앞세우며 아예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교회는 지배계층과 밀접히 연계되어 정치 경제적으로 억압받고 있었던 민중의 가난과 고통을 외면하며 오로지 영적인 고결함과 지복을 가르치는 일만 반복하고 있었다.
1960년대 이후, 세계 교회 일각에서는 서서히 ‘기독교의 사회책임’이라는 과제를 인식하기 시작했고, 소수의 신학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민중 억압의 현실에 대한 교회의 무감각과 무책임성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억눌린 자를 위한 교육>이라는 책을 쓴 파울로 프레리가 제창한 ‘억압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불러오는 비판 교육이 도처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전통적인 신학에 대한 반성과 패러다임 변화가 다양하게 요구되기 시작했다.
이런 요구들은 당연히 서구신학 일변도의 신학적 해석에 대한 의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하여 해방신학자들은 일종의 신학 방법론으로 “의심의 해석학"(hermeneutics of suspicion)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난과 억압, 그리고 차별에 침묵해온 신학에 대한 비판적 반성을 담은 신학이 담긴 책이 바로 구스타보 구티에레즈가 쓴 <해방신학>이다. 이러한 신학적 작업은 대부분 가톨릭 교세가 주조를 이루는 남미에서 수행되고 있었다. 반면, 개신교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대부분 해방 신학을 막스주의에 경도된 좌파 신학이라고 규정하고 정죄했을 뿐, 해방신학에 담긴 예언자적 전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구티에레즈와 같은 초기 해방신학자들은 전통적인 신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해방의 과제를 밝히려 애썼지만, 사회, 정치, 그리고 경제적 현실 분석은 신학적 방법만을 가지고 그러한 문제들을 해명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해방신학자들은 가능한 사회 경제 이론을 동원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다양한 경제이론을 빌어 억압과 착취의 현장을 비판적으로 규명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궁극적인 과제는 경제학적인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것이었으며, 정치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성서의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약속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언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억압과 불의를 향해 비판의 소리를 발해온 예언자적 전통을 다시 규명 하려 했으며, 가난하고 약한 자들 편에 서기를 요구하는, 성서의 계약법 사상에 나타나는 하나님을 증엉하려 하였다. 이는 마치 한국의 민중 신학자들이 성서해석을 통해, 그리고 민중의 역사적 전거를 밝히면서 민중 해방을 추구했던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다만 대부분의 초기 해방신학자들은 가톨릭 신학이 지배적인 지역, 그리고 가난과 억압이 뿌리 깊은 남미라는 상황에서 민중의 자유와 해방을 하나님의 뜻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이러한 일련의 지성사적인 흐름과 맞물려 신학외의 사회과학 분야에서의 심화된 연구 성과들이 해방 신학적 관심을 더욱 강화시켜주었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문화 분석은 서구 사상가들의 정신세계 속에 뿌리 깊게 각인된 서구우월주의의 뿌리와 식민 지배를 정당화해온 부끄러운 서구인의 자화상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여 주었다. 서구에서는 로마제국주의가, 아시아에서는 중국 제국주의가 오랜 기간 자기 영역을 지배 해온 사실에 대하여, 기독교는 사실상 이십세기에 이르도록 침묵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침묵했을 뿐 아니라, 제국주의를 정당화했고, 이에 편승한 선교이론을 전개해 온 사실들도 드러났다. 이런 과정에서 신구교를 막론하고 기독교가 과도한 기독교 우월주의에 빠져 다른 세계 현실을 진실하게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기독교는 오랜 기간 정복주의적인 선교정책을 펴왔으며, 성서적 가르침에서 벗어나 무수한 오류투성이인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해방신학은 전통적인 신학이 안고 있었던 교리적 선교 개념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기독교의 사회 윤리적 책임의 지평을 중대한 선교지평으로 받아들이기를 요구 하였다. 이런 점에서 해방신학은 서구 정통신학이 지니고 있었던 주요 논제들을 비판적으로 수정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비인간화된 이들(non-persons)의 경험에서 나온 해방의 틀을 가지고 새로운 신학적 해석학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해방 신학적 해석학에서는 교리적 정론(orthodox)에 앞서 바른 실천(ortho-praxis)을 규명해내는 과제를 우선시하는 입장을 취했다. 기존의 교리적 예수나 하나님 이해보다 잊혀 졌거나 생략된 하나님의 뜻을 성서 해석을 통하여 되찾는 일에 주력한 것이다.
따라서 바른 실천을 위하여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말해온 정통 신학은 해방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결코 바른 실천을 낳는 하나님을 해명하지 못한 실패작이었다. 가난과 억압과 착취와 차별에 눈을 감은 신학은 그러므로 비판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불가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까닭에 구띠에레즈는 ‘신학은 가난한 자와의 연대 속에서 정의를 위한 실천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제부터 신학은 가진 자, 힘 있는 지배자, 억압과 착취의 주인공의 눈과 경험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이들의 경험에서 나오는 신학이어야 한다고 그는 믿는다. 가난하고. 억압받고, 차별 받아온 이들의 하나님에 대한 설명은 해방신학 이전에 자리 잡고 있었던 기존의 신학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그는 지배자들의 신학이 아니라, 피지배자의 신학, 부유한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신학이 아니라, 억압받고 착취를 겪어온 가난한 이들의 신앙과 실천이 해방신학의 기본 성격을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해방신학의 근본적인 과제는 계급적 혹은 계층적 대립을 초래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의 관점에서 억압과 착취와 차별하는 이들을 바로 잡고, 억눌린 이들의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목적과 맞물려 있다. 해방신학은 편파적인 어느 한 편이 아니라 ‘모두의 해방’을 지향한다. 이런 해방적 신학의 기능은 단순한 해방신학의 형성과 전개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복음 선포의 지속적 과제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론(正論)보다 정행(正行)을 중시하는 해방신학은, 신학의 주된 주제로서 신학하기(doing theology)를 ‘예수를 따라 사는 삶’과 연관 짓는다. 하나님의 신비는 이론적으로 이해되거나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라 사는 삶에서 경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삶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은총으로 경험하고 받아들이는 행복을 담는다. 이 행복은 해방의 감격과 경험이며, 거저 받은 은총이므로, 거저 나누어 주어야 할 과제, 곧 해방적 과제와 직결되는 것이다.
구티에레즈는 이 해방적 과제는 가난하고 천대받았던 갈릴리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바로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선포하는 과제가 되어야 하고, 동시에 하나님은 가난하고 멸시 받는 이들 편에 단호하게 서시는 하나님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편파적 사랑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이들의 하나님이시므로, 억압받고 가난하고 천대받는 이들의 편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건강한 사람보다, 병든 이에게 의원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다.
고난과 착취와 차별의 현장에서 하나님에 대해 증언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티에레즈는 여기서 이중의 언어를 강조한다. 묵상의 언어와 예언의 언어가 그것이다. 묵상의 언어(language of contemplation)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랑의 신비로부터 유래함을 드러내지만, 예언의 언어(language of prophecy)는 라틴 아메리카의 가난한 이들이 경험한 불의와 착취의 정황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의 언어가 없는 묵상의 언어는 무능할 수 있고, 묵상의 언어가 없는 예언의 언어는 경박할 수가 있다. 묵상의 언어가 없는 예언의 언어는 하나님의 구원의 지평을 협소하게 이해하는 오류를 불러오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학과 신앙의 언어는 두 가지를 균형있게 모두 갖추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감사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정의로움으로 지키는 일은 기독교인의 실존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두 언어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길을 열어가는 두개의 축이다. 고난과 죽음이 있는 이 세계에서 생명과 부활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삶은 반드시 우리들의 믿음이 정의를 만나는 해방의 지평으로 이어져야하는 것이다.
1990년을 전후하여 세계 신학계에서 “해방신학“에 대한 관심은 유행에 따라 점차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2007년 전 세계에서 해방신학 컨퍼런스는 하나만 열렸다. 지난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미국 택사스 왜코에 있는 베일러 대학교(Baylor University)에서 열린 해방신학 컨퍼런스가 그것이었다. 이 모임에 초대된 나는 전 세계에서 모인 60여명의 신학자들을 만나고 발제와 토론을 통한 대화를 이어갔었다. 특히 남미 해방신학자의 저작들은 후속 세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이고, 해방의 주제는 다변화되어 기독교 사회 윤리학이나 페미니즘적인 해방신학으로 진화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뚜렷했다. 최근에는 해방신학 관점에서 복음과 인간해방의 과제를 생명윤리학의 지평에도 적용하는 이론도 나오고 있다.
해방신학이라는 명사적 주제는 신학 지평에서 다소 사라지고 있지만, 해방적 실천 과제들을 담은 ‘동사적 신학’은 더욱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었던 셈이다. 해방적 지평은 새로운 컨텍스트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전개되고 있다. 포스트모던 신학들은 서구중심의 신학이론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면서 세계현실 속에서 서구신학의 해체와 더불어 다양한 신학적 논의를 불러왔다. 이런 논의들은 결국 지정학적인 자리에서 해방적 구체성을 찾는 노력으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초기 해방신학이 사회 경제적 해방에 관심을 가지며 촉발되었다면 오늘날의 해방신학의 과제는 사회윤리적인 간학문적인 과제로 진화하고 있다. 예컨대 만델라를 중심으로 남아프리카에서 일구어낸 흑인 해방 운동이 정치적 자유와 해방을 불러왔지만, 경제 사회적 불평등과 법적 책무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이름뿐인 해방으로 그치는 현상도 있었다. 여기서는 보다 구체적인 법적, 사회 공동체적 해방의 합의를 찾는 데 그리스도인들의 힘이 모아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노력은 사회 경제적인 이해를 넘어서서, 문화 종교적 지평에서의 해방적 인식변화와 실천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복음의 선포는 인식의 변화와 사회 문화적 변혁으로, 그리고 제도적 정의로 이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오래된 억압 구조는 이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금 남아프리카에서 보고 있다.
해방신학적 견해를 가진 이들은 보다 인간화된 정의와 진실의 세계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기존 질서의 혜택을 받고 있는 이들에 의하여 미움과 증오의 표적이 되기 쉽다. 특히 해방신학자들은 기존의 종교 지도자들과 비판적 거리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소외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 이번 컨퍼런스에서 중요한 토론의 주제이기도 했다.
로즈메리 류터(Rosemary Ruether)는 70이 넘은 여성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왜 해방신학이 죽지 않았는가? 그리고 누가 해방신학을 죽이려는가?”라는 역동적인 제목의 강연을 했고, 만델라(Nelson Mandela) 뒤를 이어 남아프리카에서 해방 운동의 과제를 이어가는 개혁신학자인 알렌 보잭(Allan Boesak)은 “땅에 부딪친 진리는 다시 솟구쳐 오른다 : 21세기 해방신학의 필연적 요청”(Truth crushed will rise again: The Necessity of Liberation Theology in the 21st Century)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했다. 나는 “한국 민중신학의 역동성과 그 한계”에 대하여 강연했다.
이번 컨퍼런스에서는 이슬람권의 해방운동,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해방운동, 전 지구적 지평에서의 영성과 정의, 아프리카에서의 해방신학 등의 소주제에 따른 다양한 발제들이 이어져 전 세계적으로 각기 구체적인 정황에서 가난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적 실천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다양한 주제를 접하면서도 나는 이 컨퍼런스에서 아시아 해방신학의 과제들이 누락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늘날 전 지구상에서 가장 곤경을 겪고 있는 나라들은 주로 아시아 지역에 있다. 스리랑카나 필리핀, 인도네시아, 그리고 방글라데시의 경우 가난하고 힘없는 국민들은 대다수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사법 행정 관료들의 부패 또한 극심한 형편이다. 작년 한해만 해도 필리핀에서는 약 750명이 정치적인 이유로 암살당했고, 스리랑카에서는 850명가량이 작년 한해 재판 없이 죽임을 당했다. 법은 있으나 법적 보호 장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현실이 있다. 그런데도 필리핀의 가톨릭교회는 성황을 이루고 있으며 심지어는 시끄러운 쇼핑 몰에서도 공개 미사를 드릴 정도로 열심이다.
민중의 고난을 외면하는 교회는 남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에도 있다. 억압과 가난과 차별의 현실은 우리나라에도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여성들이나 소수자들이나 어린 아이들이 보이게 보이지 않게 차별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신학은 신학으로 존재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지 않다. 억압과 차별의 세계를 예언자적인 영성을 가지고 정의와 동정의 세계로 바꾸는 데 진정한 해방신학의 목적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가난과 억압으로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을 해방시키는 사역은 모든 교회들이 동참할 사회 윤리적인 선교 사역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선교의 힘을 부여받은 우리 한국 교회가 ‘묵상의 영성’에 더하여 ‘예언자적 영성’을 더욱 깊이 키워 나간다면 향후 우리 이웃들의 해방, 아시아 해방의 과제에 좀 더 적극적으로 그리고 책임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향만이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의 현장에서 거리가 먼 “묵상의 영성과 영혼 구원”만을 되뇌며 억압자와 착취자를 축복하는 부도덕한 영성가의 길이 아니라, 불의한 억압자과 착취자 편이 아니라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이들 편에 서서 성서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약자보호법의 전통”을 이어가는 예언자적 영성가가 많아져야 한국 기독교의 영성적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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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December 8, 2007
송유미의 시 한편
-대만 현대 박물관에서 본 획일화된 대중-
산더미같이 쌓여진 그릇을 씻기 위해 개수대 앞에 선다
밥공기들을 하나하나 ‘퐁퐁’을 묻혀 닦아내다가
문득 씻지도 않고 쓰는 마음이 손바닥에 만져졌다
먹기 위해 쓰이는 그릇이나 살기 위해 먹는 마음이나
한 번 쓰고 나면 씻어두어야
다음을 위해 쓸 수 있는 것이라 싶었다
그러나 물만 마시고도 씻어두는 유리컵만도 못한 내 마음은
더럽혀지고 때 묻어 무엇 하나 담을 수가 없다
금이 가고 얼룩진 영혼의 슬픈 그릇이여,
깨어지고 이가 빠져 쓸 데가 없는 듯한 그릇을 골라내면서
마음도 이와 같이 가려낼 겄은 가려내서
담아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 한다
누릉지가 붙어서 좀처럼 씻어지지 않는 솥을 씻는다
미움이 마음에 눌어붙으면
이처럼 닦아내기 어려울까
닦으면 닦을수록 윤이 나는 주전자를 보면서
씻으면 씻을수록 반짝이는 찻잔을 보면서
영혼도 이와 같이 닦으면 닦을수록
윤이 나게 할 수는 없는 일일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릇은 한 번만 써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뼈 속까지 씻으려 들면서
세상을 수십 년을 살면서도
마음 한 번 비우지 못해
청정히 흐르는 물을 보아도
때 묻은 情을 씻을 수가 없구나
남의 티는 그리도 잘 보면서도
제 가슴 하나 헹구지도 못하면서
오늘도 아침저녁을 종종걸음치며
죄 없는 냄비의 얼굴만
닦고 닦는 것이다
- 송유미 ‘냄비의 얼굴은 반짝인다’
*
선거판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자꾸 한 숨만 쉬게 됩니다.
군사독재 박정희를 그리워하는 사회,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현실주의적 이기성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습니다.
지난 몇년 동안 전 국민이 조중동 세 신문에 의해 세뇌를 당했나 봅니다.
예언자가 없는 시대의 어둠이 짙어 가슴 깊이 두렵고 몸서리가 쳐집니다.
우리의 눈도 침침해지고 더러워져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고, 맑은 것을 보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오늘 이 시 한 편을 읽으면서
일상을 살아가면서 스스로를 살피며,
영혼을 맑게 가꾸려는 마음이 느껴져 반가웠습니다. P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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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December 3, 2007
House Church in China
중국 가정 교회
지난 토요일부터 주일까지 나는 중국의 중국인들이 모여 예배를 보는 가정교회 한 곳을 방문 했습니다. 아무런 공식적인 증표도 없이 무명의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교회 지도자로 성장하는 그런 모임 이었습니다. 중국은 삼자교회가 중국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대변하고 있지만 삼자교회는 중국의 국가이념의 틀 안에서 선교적 과제를 이해하는 사회주의 국가교회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가정교회들은 국가교회가 가지고 있는 국가권위에 복속된 우상 숭배적 성격으로 인하여 삼자교회에 속하지 않고 스스로 가정 교회의 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야말로 자생적이며, 자발적이고, 자기희생적 입니다. 나는 몇몇 중국인들의 기도와 신앙 고백을 들으면서 그들의 믿음이 참으로 절실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간판도 없고, 주보도 없습니다. 제도와 조직이 없는 이름 그대로 가정교회입니다.
외국인들은 중국 법에 의하면 중국인들을 선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중국내에 있는 자국인들을 위한 한국인 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인도할 수는 있습니다. 삼자교회와 관련하여 이런 저런 행사에 초청받을 수 있지만 사실상 선교의 자유는 원칙적으로 배제되어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많은 기독교 선교사들이 공식적인 루트를 통하기 보다는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서 직간접적인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선교사가 파송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대부분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일하며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말에 의하면 과거보다는 감시와 감독이 약해진 것 같지만, 중국 공안당국의 감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회주의 국가의 정보망이 국민의 사상을 감시하는 셈입니다.
중국은 우리 한국에 비하여 선교 역사가 오래 된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중국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다만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이후 기독교를 박해했고, 선교의 문을 닫았습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순교적 신앙을 지킨 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몇몇 분의 중국인 목사들에 대한 순교적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나는 중국인들의 타협없는 신앙의 정신과 정치적 억압에 평화적으로 저항해온 정신을 느꼈습니다. 이 21세기 한가운데 중국이라는 이 큰 대륙에서는 신앙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국가교회에 속하여 사상적 검열을 받는 교회가 될 것인가 아니면 국가의 억압과 박해를 받더라도 신앙의 자유를 지킬 것인가는 그들이 선택해온 두 길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중국인들이 노동현장에서 한 달에 벌 수 있는 돈은 중국 돈으로 1000위안(한화 약 12만원) 미만입니다. 사회주의 경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부작용이 있지만, 최소한의 삶의 조건들은 기업주가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법적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가 권력이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그 생활의 기준은 이루 열악하기 짝이 없습니다. 일부 공장에서는 식당이나 식탁도 없이 식사를 서서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생존은 가능하지만, 삶의 질은 보편적으로 확대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는 부유층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최고급 수입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빈부의 거리와 격차가 극심해지는 중국 사회를 중국 정부가 어떻게 대처해 나갈런지 궁금해 졌습니다.
중국에는 거대한 대도시가 많습니다. 즐비하게 세워진 고층 아파트들은 정부가 지은 것이 대부분이고, 입주자들은 정부로부터 융자를 받아 자기 소유로 할 수 있지만 여성은 60세, 남성은 65세가 될 때까지 그 융자를 갚아야 합니다. 요즈음은 중국 대도시의 아파트도 서울의 아파트 못지않게 비싸졌다고 합니다. 비싼 경우 평당 2500만원이 넘는 것도 있다고 하니 중국의 일부 부유층은 세계적 수준에서 보아도 상위권의 부유함을 누리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경제적인 자유는 보장하되 사상적 자유는 제한하겠다는 중국 공안당국의 정책에서 나는 모순을 느꼈습니다. 결국 이들은 서구 사회의 종교와 가치를 거부해 왔지만, 경제적인 이해관계는 도모하되 정신적인 긴장과 대립은 유지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중국 친구들의 안내를 받아 인근 유료공원을 가 보았습니다. 입장료는 우리나라 돈으로 15,000원이나 하는 비싼 곳입니다. 노동자 4-5일의 임금에 해당하는 비용이지만 많은 이들이 그 공원에 세워진 위락시설과 문화시설, 소수민족의 풍습을 실연하는 공연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토속 전통적인 가치들을 압도하는 화려한 쇼들이 이 공원의 주요 테마가 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내가 본 쇼는 내가 보았던 파리의 쇼나, 한국의 워커힐 쇼보다도 더 화려했고, 쇼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키가 늘씬한 미녀들이었습니다. 다만 의상 디자인이나 등장하는 인물들이 입고 있는 전통의상들은 과거의 것들이 아니라 과거의 유산을 현대화하여 극도의 화려함으로 채색한 것이었습니다. 과거의 초라한 유산과 자본이 투입되어 화려하게 바뀐 무대 위의 현실은 결국 중국인들에게 지난 역사에 대한 회상을 매우 화려하게 수놓은 것이었습니다.
지난 과거를 재현한 자리에서는 초라함과 조야함이 묻어 있지만, 지난 과거를 상상하는 곳에서는 하나의 찬란한 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공원의 이곳저곳 살피며 다수 인종을 존중하는 뜻을 읽을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지난 역사가 보잘 것 없음, 그리고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잔재로서 그려져 있는 반면, 중국인들의 감흥을 불러오는 것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화려하게 채색된 고급스러움과 서구적 팔등신의 아름다움을 최상의 가치로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원형은 중국적이지만, 이미 그 변형은 너무나 서구적인 이미지를 느꼈습니다. 인류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우리가 과거를 현재의 눈으로 볼 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과거의 그 초라함“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이 삶도 그리고 내가 쓴 글들도 누군가의 눈에 비칠 때 저리 초라할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민족들의 풍습을 살펴보면서 그들에게는 세 가지 주제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느꼈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제단을 중심한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주술적이거나 원시적인 구복신앙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그들의 삶의 중심부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신과의 관계, 남녀의 사랑이야기, 그리고 전사들의 모습입니다. 신들의 존재를 이해하고, 삶의 한 가운데로 신을 불러들인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유약함을 넘어선 신의 뜻과 의지에 따라 살겠다는 경건과 격률을 지닌 삶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어느 곳에서나 사람을 감동시키고, 흠모하게 하는 삶의 이상을 불러오고, 전쟁은 이러한 평범한 이들의 삶을 할퀴고 지나가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평민들은 평화를 사랑하지만, 권력을 가진 이들은 권력과 탐욕의 확장을 위하여 그들을 전사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주일 아침 나는 중국인들과 둘러 앉아 말씀을 증거하고, 점심식사를 함께 나눈 후 두차례의 강연을 했습니다. 한번의 강연을 준비해 갔는데 그들이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 열망이 크고, 듣는 자세가 너무나 진지하고 목말라 하여 열시 반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세 강의를 한 셈입니다. 예수의 윤리사상, 세상의 가치와 예수의 가치, 그리고 구약성서와 계약법전의 윤리사상에 관하여 알기 쉽게 강의했습니다.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들처럼 공범이 되어 창을 닫고, 포장을 친 후 강의를 하고 들었습니다. 이들에게 말씀을 증거 하면서 나는 내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말씀을 증거 하는 순간마다 깊은 동의와 긍정의 태도를 보이는 이들의 신앙이 맑고 아름답다는 것은 느꼈기 때문입니다. 중국 대륙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는 날이 하루 속히 오기를 기약하고 그들의 가정 교회를 떠나왔습니다. 그들은 순전한 마음으로 말씀을 나누고, 음식을 나누며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었습니다.
탐욕과 권력과 이해관계가 개입하지 않은 순전한 신앙 공동체를 경험한 것 같아 가슴이 평안했지만, 자유의 결핍이 불러오는 억압의 그림자를 느껴 돌아오는 길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속히 선교와 찬양의 자유가 중국 땅에도 주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한 조선족 처녀는 말씀을 듣고 공부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5일간의 긴 여행 끝에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그녀가 이곳에서 신앙의 동지들을 만나 말씀을 나누는 공동생활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나에게 주어진 자유가 참으로 감사하고 소중하다는 것은 느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자유가 없는 저들을 보면서 나는 자유를 그저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기만 한 나의 삶이 부끄러웠습니다. 우리의 자유는 소중하기보다 오히려 방종에 가깝도록 남용되고 오용되는 바가 많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순결하고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를 경험한 것이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바라보면서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고, 나는 더 큰 나의 의무와 책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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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December 1, 2007
U.N. Secretary General Calls Global Warming a Priority

Depletion of Glaciers
By Colum Lynch
Washington Post Staff Writer
Friday, March 2, 2007; Page A14
UNITED NATIONS, March 1 -- U.N. Secretary General Ban Ki Moon argued Thursday that global warming poses as great a threat to the world as modern warfare, and he vowed to make reduction of greenhouse gases one of his tenure's top priorities.
Ban's remarks -- made in a speech in the U.N. General Assembly Hall addressing a high school conference on global warming -- were the most detailed public account of his views on climate change. They also hinted that the new U.N. chief will try to push the Bush administration to join international initiatives to combat global warming.
Ban privately urged Bush in a White House meeting in January to support international efforts to curb emissions of greenhouse gases. But Bush expressed doubts about the effectiveness of the preeminent international treaty calling for reductions in such emissions, the Kyoto Protocol, because it exempts some of the world's largest emitters, including China and India, according to sources familiar with the meeting.
In outlining his concerns, Ban described global warming as a "grave and growing problem," echoing language used by Bush to justify the 2003 U.S. invasion of Iraq. "For my generation, coming of age at the height of the Cold War, fear of nuclear winter seemed the leading existential threat on the horizon," Ban said. "But the danger posed by war to all humanity -- and to our planet -- is at least matched by climate change."
Ban said that global warming is "an inescapable reality" and warned that the destruction it inflicts -- including the loss of arable land to droughts and coastal flooding -- is likely to be a "major driver of war and conflict" in the coming decades.
The stakes in confronting global warming were bolstered last month when an international panel of 113 climate scientists concluded that human activities are heating the planet at a dangerous rate. The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concluded that it is 90 percent certain that human-generated greenhouse gases account for most of the global rise in temperatures over the past half-century.
The United States, the world's leading emitter of greenhouse gases, came under fire Thursday from representatives of the Canadian Inuit community, who charged the U.S. contribution to global warming violated their human rights, the Associated Press reported. The group petitioned the Inter-American Commission on Human Rights to assist them in "obtaining relief" from the effects of global warming on their artic habitat.
Ban said that he would press the Group of Eight industrialized powers -- the United States as well as Russia, Britain, France, Germany, Japan, Canada and Italy -- during their June summit in Germany to take steps to reduce emissions. He has also been seeking to devise a diplomatic strategy for securing international support for a new treaty to replace the Kyoto Protocol when it expires in 2012.
Ban provided few details Thursday on how governments should address the crisis, beyond urging support for "green technologies and smarter policies." He also pressed states to back U.N. efforts to promote a "more coherent system of international environmental governance."
"We are all complicit in the process of global warming," Ban said. "Unfortunately, my generation has been somewhat careless in looking after our only pl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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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November 30, 2007
The Tragedy of the Decadent Liberals
<마카오 포대에서>
퇴폐적 자유주의자들의 비극
보수와 진보간의 갈등은 어느 사회, 어느 집단에서든지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보수는 기존의 현실에 대하여 점진적 개혁을 원하고, 기존의 가치가 급속도로 바뀌는 것을 기질적으로 싫어한다. 반면 진보는 기존의 질서와 가치에 혐오를 느끼고 가능한 한 신속히 변화가 이루어질 것을 요구한다. 건강한 보수와 진보사이의 갈등은 일면 서로가 지향하는 목표나 방향에 대한 비판적 긴장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어느 한편의 전횡이나 타락과 추락을 막는 시너지 효과도 불러온다.
우리 사회와 같이 사회 경제적인 변화가 빠른 사회 안에서 일부 지식인들 중에는 자유의 이름으로 보수와 진보사이를 오가는 이들이 있다. 자유라는 이름이 거의 방종에 가까운 원칙상실의 퇴폐까지 불러오게 되면 이 경우는 구제불능이다. 세속적 자유주의자들은 진보의 이념을 입으로는 표방하면서 구시대의 특권을 즐기는 일에 능숙하다. 보수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성실성을 자유의 이름으로 비웃고, 진보주의자들의 개혁의지에는 참여하지 않는 데카당트 지식인들이 바로 이들이다.
도덕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자유주의자들의 진면목을 파악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새롭고 화려한 용어와 가치들을 주장하는 그들의 사고는 빈약한 지식인들에게는 신조어를 공급하는 루트가 된다. 보수주의자들은 신조어를 만들어 내는 일이 취약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은 신조어를 만들어 내는 자유로움을 행사한다. 따라서 그들의 지적 설득력은 화려한 수사와 유행에 민감하며, 개인적 자유를 자극하는 용어들이 있으므로 매우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의 공동의 가치를 변화시키려는 연대와 실천의 과제를 수행하는 일에는 매우 인색하다. 그런 과제들로 인해 그들만의 특권과 자유를 빼앗긴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반면 이들은 개인주의적인 자유를 연장하여 방종과 타락도 자유의 이름으로 옹호한다. 방종과 타락이란 개인의 쾌락원리를 쫒아 사회규범의 구속력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이들의 단골메뉴이다. 그러나 이들이 가지는 전형적인 도덕적 오류는 자신의 자유를 방종과 도덕적 타락으로 연장시키는 이들이 다른 이의 자유를 훼손하고 무시하는 특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은 반사회적이고, 공동성을 자유의 이름으로 파괴하는 이들이다. 이들이 감추고 있는 이중성은 바로 그들의 이기성에 의하여 정당화된다. 나의 경우는 자유이지만 너의 경우는 규범 이탈이라고 을러대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의 이름이 지시하듯 이들은 과거의 규범으로부터 대부분 자유하기를 원하는 이들이다. 여기에는 얼마간의 정당성이 있다. 왜냐하면 과거의 가치 판단 구조들은 과거의 권위, 억압을 구조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의 가치판단 구조 모두가 그렇게 억압적인 것은 아닌 까닭에 과거의 가치판단 구조에는 가슴에 새겨둘만한 중요한 가치들도 담겨있다. 정직과 성실성과 책임성 그리고 인격성을 삶의 공동성 안에서 해석하는 까닭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반적으로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은 성실성과 책임성에 있어서 자유주의자들보다 훨씬 낫다. 이런 까닭에 사회는 다소 보수적인 흐름에 잠겨있는 것이다.
이기적 욕망을 중시하여 사회적 책임에 둔감한 퇴폐적 자유주의자들의 비극은 그들 스스로 보수주의자들의 과거 지향적 시대 착오성을 비웃으면서도 정작 과거의 가치보다 더 나은 가치창출로 나가지 못하는 무책임함에 있다. 이들은 전형적으로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초래할 새로운 사회 가치의 창출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낮추며 복속시키는 것을 두려워하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이미 자유주의를 선택한 그들은 보다 나은 새로운 사회적 가치에 대한 기여가능성을 아마 일찍부터 포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을 일반에게 불러온다.
일부 현대 소설들을 읽다보면 바로 이런 자유주의자들의 퇴폐를 인간미로 채색하려는 소름끼치는 허무를 본다. 그들의 인간다움의 가면을 벗기면 절제하지 못한 온갖 추한 욕망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허무하게 보이는 까닭은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이들처럼 스스로 맺은 사회적 약속들에 대한 무책임한 망각을 당연시 하는 데 있다. 그들은 사소한 쾌락을 위하여 자신의 인격도 사회적 책임도 망각한다. 여기서 일어나는 오류는 삶의 내면적 긴장과 정신적 고양의 가치를 무기력한 것으로 여기고, 오직 자기 존재를 상대화시키며 순간의 쾌락과 만족에 스스로의 넋을 팔아넘기는 자유의 오용이다.
사실상 인류가 추구해온 자유의 정신은 무제한의 비약을 허용하는 것으로서 무서운 상대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즉 상대에 의하여 규정되는 자기를 거부하는 규정받지 않음의 자유이다. 정치적으로는 억압, 경제적으로는 착취, 사회적으로는 차별을 거부하는 것이 자유의 골격이다. 그러므로 자유란 숭고한 인간의 존엄함을 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책임을 통해 균형이 잡혀야 한다. 하지만 타락한 자유주의자들은 그들만의 자유는 줄기차게 요구하면서도 그 자유의 보편적 적용을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차별과 억압을 생산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소한 쾌락을 위하여 기존의 약속 관계를 붕괴시키는 것이다.
지식인의 도덕적 타락과 방종은 그들이 지닌 천박한 정신의 발현일 뿐 해방적 실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유는 해방을 불러오는 혼이므로, 그 혼을 지키려면 자유의 보편정신을 지키려는 책임을 요구 한다. 이 책임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존재로서 나와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자유주의자들은 이 공동 책임의 영역에 선듯 나서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본질이 이기적이며 쾌락주의적인 까닭이다. 자유에 대하여 예민한 지식인들이 퇴폐적 쾌락을 추구하는 까닭은 결국 과거 특권층들이 구가하였던 본디 이기적이며 차별적인 특권을 향유하려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입으로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진정한 해방적 과제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반사회적이며 이기적인 퇴폐적 쾌락과 자학적인 방종을 불러 들인다. 따라서 그들의 삶은 깊은 허무의 그늘로 덮여 있다. 이 허무의 그늘을 벗겨내려면 우리 역시 필연적으로 책임의 공동성을 수납하는 길로 나가야 한다. 그것은 오랜 종교들이 가르쳐온 사랑의 길이며 자비의 길이고, 인(仁)의 길이다.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 잔재하고 있는 낡은 가치들을 청산하는 과제는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낡은 가치들이라 하여 도매금으로 폐기하려는 것은 어린 아기를 목욕시킨 후 목욕물을 버리려 하다가 아기까지 내던지는 격이 될 수도 있다.
퇴폐적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역사적 억압의 피해자라 항변하며 억압 기재에 대한 증오를 당당히 주장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정작 그들의 삶의 고귀한 품격이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의 피해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삶 그 자체가 숭고하고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억압이 해체된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는 우리 인간다움의 조건을 지키기 위한 노력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만일 그들이 해방 이후에 진실과 정직, 그리고 책임과 성실성에 미달할 경우, 그들은 방종과 추악함을 너무나 쉽게 불러 들이는 비극을 연출한다.
저항적 기질을 가진 해방적 지식인은 보다 나은 정의와 자유를 꿈꾼다. 정의와 자유로움을 꿈꾸는 이들은 인간성을 모욕하는 행위와 가치와 제도에 대하여 분노하게 되고, 이에 저항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타락한 자유주의자들의 약점은 오직 "자신들만"의 정의와 자유를 구가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그들은 해방적 지식인들의 저항에 연대하지만 “우리“의 정의와 자유를 위한 투쟁에는 나서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 혁명 세력들이 부패하는 까닭은 바로 이런 사이비들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특권을 누리려 하는 이들은 공공의 세계를 어려워 한다. 왜냐하면 협소한 특수의 자리에서 그들이 누리는 쾌락에 집착하여 보다 넓은 책임과 보편성의 가치들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이비 퇴폐 지식인들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모름지기 정의와 자유에 기초한 인식과 실천의 지평을 보편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자유의 개념이 브르죠아들의 것으로 고착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퇴폐적 자유주의자들은 그들의 생래적 이기성으로 인하여 아는 대로 실천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 만족적인 쾌락을 선호하기 때문에 보편적 가치보다는 특수한 가치를 선호하는 귀족적 특권과 기질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까닭에 그들은 위선적이다. 인류의 역사는 종교 및 정치권력 귀족들의 특권을 부정한 프랑스 혁명을 넘어, 보편적 인권의 지평을 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스스로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적어도 이런 류의 데카당트 자유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얼마만금 진보적인 목사들에게서도 이런 이중 규범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들은 입과 글로는 정의와 평등을 외치면서도 여전히 그들의 몸과 정신은 자신들의 이기적 특권과 이권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입이나 글만 보지 말고 그들이 살아가는 삶을 보아야 한다는 주장은 옳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런 이중적 위선을 벗어나는냐 못벗어나느냐의 문제는 그가 사상적으로 견고한 인식을 가진 자인지, 아닌지에 달려있다. 성직자로서 권력을 탐하고, 치부하며, 권위를 부리는 자들은 사상적 진보를 이용하며 신도들을 깨우치면서, 자기 스스로는 구원의 길과는 다른 저주의 길을 가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퇴폐적 행위를 행하면서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값싼 즐거움에 스스로 영혼을 파는 일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누리는 소유의 특권과 쾌락은 결국 누군가의 존엄함을 유린하는 행위와 연계된다. 따라서 그들은 바로 해방적 작업에 참여하던 얼굴과는 다른 흉측한 또 다른 얼굴을 사적 영역에 내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킬과 하이드를 통하여 인간의 이중성의 적나라함을 드러내 보인 바 있지만 이는 결국 삶의 공공성을 소화해 내지 못하는 자유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퇴폐적 개인주의의 진면목일 것이다. 이것이 비극인 것은 그들의 이중성으로 인해 자신에게도 그리고 사회에도 해악을 끼칠뿐 아무런 선을 이루지 못하는 허무에 지배를 받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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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November 23, 2007
"No Thanks for Thanksgiving" Like this One...

(I was glad to find this artcle in my son's homepage. The Sunflower picture is from one of Sanmaru Letters.)
By Robert Jensen
One indication of moral progress in the United States would be the replacement of Thanksgiving Day and its self-indulgent family feasting with a National Day of Atonement accompanied by a self-reflective collective fasting.
In fact, indigenous people have offered such a model; since 1970 they have marked the fourth Thursday of November as a Day of Mourning in a spiritual/political ceremony on Coles Hill overlooking Plymouth Rock, Massachusetts, one of the early sites of the European invasion of the Americas.
Not only is the thought of such a change in this white-supremacist holiday impossible to imagine, but the very mention of the idea sends most Americans into apoplectic fits -- which speaks volumes about our historical hypocrisy and its relation to the contemporary politics of empire in the United States.
That the world's great powers achieved "greatness" through criminal brutality on a grand scale is not news, of course. That those same societies are reluctant to highlight this history of barbarism also is predictable.
But in the United States, this reluctance to acknowledge our original sin -- the genocide of indigenous people -- is of special importance today. It's now routine -- even among conservative commentators -- to describe the United States as an empire, so long as everyone understands we are an inherently benevolent one. Because all our history contradicts that claim, history must be twisted and tortured to serve the purposes of the powerful.
One vehicle for taming history is various patriotic holidays, with Thanksgiving at the heart of U.S. myth-building. From an early age, we Americans hear a story about the hearty Pilgrims, whose search for freedom took them from England to Massachusetts. There, aided by the friendly Wampanoag Indians, they survived in a new and harsh environment, leading to a harvest feast in 1621 following the Pilgrims first winter.
Some aspects of the conventional story are true enough. But it's also true that by 1637 Massachusetts Gov. John Winthrop was proclaiming a thanksgiving for the successful massacre of hundreds of Pequot Indian men, women and children, part of the long and bloody process of opening up additional land to the English invaders. The pattern would repeat itself across the continent until between 95 and 99 percent of American Indians had been exterminated and the rest were left to assimilate into white society or die off on reservations, out of the view of polite society.
Simply put: Thanksgiving is the day when the dominant white culture (and, sadly, most of the rest of the non-white but non-indigenous population) celebrates the beginning of a genocide that was, in fact, blessed by the men we hold up as our heroic founding fathers.
The first president, George Washington, in 1783 said he preferred buying Indians' land rather than driving them off it because that was like driving "wild beasts" from the forest. He compared Indians to wolves, "both being beasts of prey, tho' they differ in shape."
Thomas Jefferson -- president #3 and author of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which refers to Indians as the "merciless Indian Savages" -- was known to romanticize Indians and their culture, but that didn't stop him in 1807 from writing to his secretary of war that in a coming conflict with certain tribes, "[W]e shall destroy all of them."
As the genocide was winding down in the early 20th century, Theodore Roosevelt (president #26) defended the expansion of whites across the continent as an inevitable process "due solely to the power of the mighty civilized races which have not lost the fighting instinct, and which by their expansion are gradually bringing peace into the red wastes where the barbarian peoples of the world hold sway."
Roosevelt also once said, "I don't go so far as to think that the only good Indians are dead Indians, but I believe nine out of ten are, and I shouldn't like to inquire too closely into the case of the tenth."
How does a country deal with the fact that some of its most revered historical figures had certain moral values and political views virtually identical to Nazis? Here's how "respectable" politicians, pundits, and professors play the game: When invoking a grand and glorious aspect of our past, then history is all-important. We are told how crucial it is for people to know history, and there is much hand wringing about the younger generations' lack of knowledge about, and respect for, that history.
In the United States, we hear constantly about the deep wisdom of the founding fathers, the adventurous spirit of the early explorers, the gritty determination of those who "settled" the country -- and about how crucial it is for children to learn these things.
But when one brings into historical discussions any facts and interpretations that contest the celebratory story and make people uncomfortable -- such as the genocide of indigenous people as the foundational act in the creation of the United States -- suddenly the value of history drops precipitously and one is asked, "Why do you insist on dwelling on the past?"
This is the mark of a well-disciplined intellectual class -- one that can extol the importance of knowing history for contemporary citizenship and, at the same time, argue that we shouldn't spend too much time thinking about history.
This off-and-on engagement with history isn't of mere academic interest; as the dominant imperial power of the moment, U.S. elites have a clear stake in the contemporary propaganda value of that history. Obscuring bitter truths about historical crimes helps perpetuate the fantasy of American benevolence, which makes it easier to sell contemporary imperial adventures -- such as the invasion and occupation of Iraq -- as another benevolent action.
Any attempt to complicate this story guarantees hostility from mainstream culture. After raising the barbarism of America's much-revered founding fathers in a lecture, I was once accused of trying to "humble our proud nation" and "undermine young people's faith in our country."
Yes, of course -- that is exactly what I would hope to achieve. We should practice the virtue of humility and avoid the excessive pride that can, when combined with great power, lead to great abuses of power.
History does matter, which is why people in power put so much energy into controlling it. The United States is hardly the only society that has created such mythology. While some historians in Great Britain continue to talk about the benefits that the empire brought to India, political movements in India want to make the mythology of Hindutva into historical fact.
Abuses of history go on in the former empire and the former colony. History can be one of the many ways we create and impose hierarchy, or it can be part of a process of liberation. The truth won't set us free, but the telling of truth at least opens the possibility of freedom.
As Americans sit down on Thanksgiving Day to gorge themselves on the bounty of empire, many will worry about the expansive effects of overeating on their waistlines. We would be better to think about the constricting effects of the day's mythology on our minds.
from http://www.alternet.org/story/28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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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November 22, 2007
Thanksgiving for my journey with the beloved ones...

My mother and two sons
When I drove to my son’s school about 15 years ago, I told my son, “let us think that this is the worst day of your life, and tomorrow will be a little better! Let us believe in it!” It was really hard time for my sons who brought back to Korea when they were not able to speak Korean due to the long period of stay in abroad. My older son went to a middle school, and the other went to a private elementary school. This was a third new start for them. The first was when I brought them to Germany in 1984, and the second was when my family decided to move to New Jersey from Bonn, Germany. Whenever they had to restart, the fundamental problem was language. They have experienced of being foreign to others many times. The most troblesome experience was in Korea. When they were foreigners in Germany and America, there were many who volunteered for helping improve their languages.
However when they came back to Korea, it was not like that. One of the chief teachers told my son in front of me that “you are so unlucky to have such parents!” And he said ro me again, “From my experience your son has no hope.” I was terrified that the person who said such mean opinion was an educator in a public school. Since then my two sons began to struggle for their survival in Korean schools. My younger used to call home when he arrived at a phone booth which was located a half mile away from my home, and say “please call the police if I am not arriving in 10 minutes.” I am still painful that he was feeling that his being was seriously threatened by the world which had been totally not friendly to him. For a boy most of whose life spent in abroad, it was really a hard time to adjust himself to his homeland.
As they were not able to understand Korean, I had to teach them how to follow up schooling in Korea. In the third year of our struggle, I decided to send them to English speaking world because I was not convinced with myself about their mental status. There were two incidents of suicide. Two of my colleagues had to suffer due to their son’s suicide. They and I were in the almost same situation because each of us came back Korea after having a long journey of studying in abroad. Their children were also not able to speak Korean fluently. In school, teachers and their classmates made fond of them. Even sometimes they harassed or mocked the singled out new comer in the class. Maybe the new comer looked weird because he was not able to pronounce Korean properly. Murmuring and hesitating with weird gestures might be funny to them. But they did not feel any humane duty to help the new comer. Rather they enjoyed making fun of him. Even the teachers did not pay attention to the new comer. Instead they used to get angry when his class record got behind of other classes due to the low grades of the new comers.
Hearing the two news that two of my colleagues lost their older sons, I was afraid of myself for my understanding of my sons. I reflected over and over and finally come to a conclusion to send them to Australia. At that time I thought even though I might be not well prepared for my retirement I had to support them studying in Australia. So they had to restart their life in Australia again. After finishing the first semester, they came back home with almost all As. They looked different, with dyed long hair, free clothes. We spent a wonderful winter vacation together. When they were about to go back to Australia, they made a decision not to go back there. They told me, they want to live with family. Actually we did not say each other that we missed each other too much. I am still very much thankful to my sons for their wonderful decision at that important moment. I am always happy that they treasured the time being together.
Now my older son left home for his further study. But I feel not so much lonesome because he was with me as long as he could. My younger son will leave me again soon. Even though I may miss them I am very much thankful to God for having wonderful sons who have dreams in their hearts. As I left my parents for my study in Germany and America along time ago, my sons are now having a season for making a journey for their further study respectively. This morning I looked myself and glanced at the shape of my father in the mirror. My age is near to the age of my father when I left him. I am so grateful to my God for letting me have my journey in the past, and to see my sons who are making their own journeys. Occasionally I am sitting near the window, looking the forest out of my window, thinking of my father and mother. I am so regretful that I was not a good son for them because I was not able to accept their limitations. They were totally not capable to support my study. However, I never forgot my mother’s prayer for me. But for my mother’s prayer, I might not be the person as I am. I am so much grateful to God for giving me wonderful mother and sons.
This morning when I read the sojourners’ letter from Jim Wallis, I found the phrase said by Thomas Merton that “in the end, it is the reality of personal relationships that saves everything.” Yes, I totally agree with Thomas! Regardless What you accomplished in this life, in the end you have to confront with the reality of personal relationships which will reveal the true nature of your life. I really wish my sons will treasure personal relationships in a wider world beyond the temptation of anonymity. My Quaker brother Bob sent me an e-mail this morning and wished me a good thanksgiving. I have good memory of his sincerity in making relations, supporting the weak, and making always available for others what he owns. When we were at Pendle Hill, in a morning I saw him weave something in the backyard of the library. I asked him, “what are you doing there.” He replied me, “I am weaving an eye of God.” In my study, I have an eye of God woven with beautiful colors. We are weavers of the eye of God which guides us in the Light till the end of our journey. Even though I have lost many things, I am still so deeply thankful to God for my being as it is. If possible, for the rest of my life, I would like to commit myself to live out more in the practice of simplicity, integrity, and compa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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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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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November 20, 2007
The Lives of Others...
영화 "타인의 생명" 을 보고
오늘 나는 중국 비자를 받기위해 시내에 나갔다가 영화를 한 편을 구입해 돌아왔다. 제목은 “타인(他人)의 생명(Das Leben der Anderen)" 원작이 독일어라서 독일어로 보았다. 이 영화는 1984년을 배경으로 동독의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한 작가인 게오르그 드라이만과 아름다운 배우 크리스타 마리아의 사랑, 그리고 그들을 감시하던 베테랑 정보원 게르트 위슬러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그렸다.
냉혹한 도청 및 취조 기술자인 위슬러는 자유주의 사상을 드러내는 작가 게오르그의 반사회적 언행에 의심을 가지는 윗선의 명령에 따라 게오르그의 집에 도청장치를 설치하고 하루 24시간 감시한다. 그의 상관은 인간이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을 가진 자이다. 위슬러는 게오르그와 그의 애인 마리아의 삶을 엿본다. 감시자의 눈을 가지고 그들의 대화와 일상을 엿보던 위슬러는 점차 게오르그와 마리아를 향한 감시자의 눈을 버리고 은밀한 보호자로 변해 간다.
게오르그와 그의 친구들이 모여 반정부 문서를 작성 발표하기로 모의하고 그들은 문서 작성을 게오르그에게 맡긴다. 이 과정을 엿들어 온 위슬러는 게오르그에게 불리한 사실들을 도청 보고서에 담지 않는다. 마침내 반정부 문서가 작성되어 발표되었을 때 정보국은 발칵 뒤집히고 문서작성자를 색출하기 위하여 이 문서를 작성한 타자기 색출 작업에 나선다. 그것은 게오르그 집 마루 밑에 감추어져 있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위슬러는 정보국장의 의심을 받게 된다.
마침내 정보국장은 마리아를 잡아들여 위슬러에게 취조를 맡긴다. 위슬러의 취조를 받은 마리아는 위기가 가까이 다가 왔음을 알고 체념하여 그 타자기가 집안에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윽고 정보원들이 들이 그들의 아파트에 들이 닥쳐 그 타자기가 있던 자리를 지목하는 순간 게오르그는 마리아에게 강한 의혹의 눈빛을 보낸다. 마리아는 게오르그의 눈길을 피한다. 타자기가 있던 바로 그 자리를 색출자들이 들쳐냈을 때 거기 있어야 할 타자기는 없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지 못한 마리아는 숨겨둔 타자기가 발각되어 게오르그가 체포될 것을 알고 거리로 뛰쳐나가 트럭에 치인다. 피투성이가 된 마리아를 품에 안은 게오르그는 그녀를 의심했던 눈초리를 보냈던 자신을 후회하며 마리아에게 용서를 구한다.
한편 정보국의 의혹을 받게 된 위슬러는 좌천되어 미래를 잃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베를린 장벽이 마침내 무너졌다는 방송을 듣게 된다. 그나마 정보원 직을 잃은 위슬러는 우편배달부가 되어 편지를 배달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어느날 게오르그는 전직 고관을 만나 자기의 아파트가 완벽하게 도청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그는 자기의 아파트 곳곳에 설치된 도청장치들을 뜯어내며 놀라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를 도청한 자료들을 찾아내 그것들을 읽어 가면서 HGW XX/7이라는 암호명을 가진 그 도청자가 바로 자기를 지켜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게오르그는 그 도청자의 이름이 위슬러라는 것을 알아내고, 그를 찾아가 그가 편지를 배달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다.
어느 날 위슬러는 편지를 배달하다가 게오르그가 쓴 신간, “선한 사람의 소나타“ (Eine Sonata des guten Menschen) 포스터를 보고 서점에 들어가 그 책을 펼쳐본다. 그 책 표지를 넘기다가 "이 책을 HGW XX/7에게 바칩니다“라는 구절을 발견한다. 그는 ”선물로 포장 할까요?“라고 묻는 점원에게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나를 위해 산거예요.”라고 말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 영화는 언어보다 의미있는 순간과 표정들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영화이다. 한 정보원의 가슴에 따듯하게 움튼 인간에 대한 관심, 타자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려는 배려는 사실과 정직의 세계를 넘어 간다. 위슬러의 차가운 표정 이면에 담긴 따스한 인간애는 제도도 이념의 장벽도 이미 넘어선 것이었다. 누군가를 배려하고 관심을 가지는 행위가 스스로에게 커다란 위험이 될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위슬러가 게오르그와 마리아를 지켜주기 위하여 손에 들고 있었던 보고서를 감추는 장면에서 영화의 반전이 시작되고 그가 잔인한 고발자가 아닌, 한 아름다운 인간임을 드러낸다.
누군가의 감시를 받고 있는 삶은 언제나 위기에 처한다. 감시자의 보고서에 의해 그 존재가 결정되고,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는 우리는 일거수 일투족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오르그와 마리아를 바라보면서 감시자 앞에서 여지없이 그러나는 그들의 벌거벗은 모습에서 거듭 거듭 위기를 느낀다. 그러나 감시자가 그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안도하게 되지만, 그 감시자를 감시하고 있는 또 다른 감시의 힘을 인식하고 더 크고 조직적인 감시의 힘에 불안해 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게오르그의 편에 서 있다가, 다시 그를 감싸는 감시자의 안전을 염려한다. 그 더 큰 감시자는 일사불란한 색출자들을 앞세운 냉혹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삶의 이중성, 천진난만한 삶을 감시자의 눈으로 볼 때 위급하기 짝이 없다. 삶의 모든 권리를 빼앗길 위험에 처하는 피감시자를 바라보는 감시자의 눈, 그 눈이 인간성으로 옷입을 때 그 눈은 더이상 잔인한 감시자의 것이 아니라 따스한 보호자의 눈이 된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생각했다. 이 영화에서 위슬러에게서 느낄 수 있듯 개인은 인격성에 기반한 인간다움을 자기희생을 마다않고 지킬 수 있으나, 제도와 집단의 권력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인간은 인간다움보다 이해관계에 치밀하다는 니버의 생각은 일면 옳고 정당하다.
그러나 개인은 잔인한 집단의 위협에 처할 경우 자기희생보다는 자기보존의 생존을 모색하기도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나는 이 영화에서 그리도 서로 사랑하는 게오르그와 마리아 사이에 일어나는 배반과 의혹의 이중주를 보았다. 위험을 예견하며 감시자의 눈을 의식하고 살아가던 마리아는 정보국에 연행되어 갇혀 있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라 생각하고 타자기가 있는 곳을 밝힌다. 위기를 견디며 사랑해 온 게오르그에 대한 배반이다. 반면 색출자들이 들이 닥쳤을 때 게오르그는 자기가 사랑해 온 여인 마리아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낸다. 배반과 의혹,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그것들 보다도 훨씬 크고 진한 것임을 우리는 안다. 존재의 위기를 불러오는 강요된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일식인 까닭이다.
그녀의 배반이 그녀의 사랑인 게오르그를 위험에 빠뜨리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그녀로 하여금 견딜수 없는 존재의 폭발을 불러왔다. 트럭에 치인 사랑하는 여인을 품에 안고서 게오르그는 끝까지 신뢰하지 못한 그의 의혹에 대하여 용서를 빈다. 한 사람은 목숨을 한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잃는 순간이다. 사랑한다는 것만으로 모든 배반과 의혹이 없어야 한다는 우리의 기대를 이 영화는 충족시켜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에 배반도 의혹도 있으나 그 배반과 의혹은 그들의 진실한 사랑의 힘에 의해 뻔뻔스러움으로 이어지지 않고 결국 고통으로 되돌아 온다. 그들의 사랑은 배반과 의혹을 넘어 진실했기 때문이다. 정작 그들이 배반과 의혹의 힘을 막아 준 사람은 바로 위슬러였다. 그가 타자기를 치워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하나님의 눈을 생각했다. 그 분의 눈 앞에 비치는 우리들의 삶은 얼마나 위험한 곡예와 같을 것인가. 이 삶의 고비 고비 마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그런 우리는 바라보는 하나님의 눈은 징벌과 색출의 눈을 가진 감시자가 아니라, 우리가 예지하지 못하는 삶의 위기에서 우리를 감싸고 지키주시는 따스한 눈이 아닐까. 그러므로 나는 사랑의 하나님이란 어거스틴이 말한 바, 사랑이 하나님의 속성이기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죄스러운 실존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인간을 향한 연민과 사랑을 가지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며 감시자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감시를 받기도 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 처럼 감시자의 눈이 냉혹한 시선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따스한 인간의 눈이 될 때, 오히려 그 감시자가 우리의 허물을 감추어 주는 은밀한 수호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리라. 누군가가 우리를 지켜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어려운 정황에 처해 있을 것이다. 그가 나의 어머니이든, 나를 사랑한 사람이든, 아니면 하나님이든...
취조전문가로 명성을 날리던 위슬러의 가슴이 따스해 질 때 그는 잔인한 취조자가 아니라 타인의 생명을 배려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구원한다. 게오르그가 위슬러를 통하여 구원을 받은 것은 인간성을 되찾은 위슬러의 변화가 먼저 이루어진 까닭이다. 나는 나의 삶을 지금까지 가리고 지켜준 HGW XX/7는 누구일까 생각해 본다. 집단의 이름을 앞세워 개인의 삶을 파괴하던 차가운 취조자, 감시자, 고발자의 길보다는 따스한 가슴을 가지고 타인의 생명을 지켜주는 길이 바로 스스로의 인간다움을 지키는 길이라는 하나의 진실을 이 영화는 조용히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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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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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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