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ne 23, 2021

기독교 차별주의자

 기독교 차별주의자


1.

겹겹이 싸여있는 동성애 혐오 문화가 한국교회에 깊이 배어있다.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일수록 그 깊이가 매우 깊다. 그들의 동성애에 대한 평가는 마치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가르는 기준처럼 이용되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보수 신앙을 가르치는 교회라는 공동체가 동성애를 향한 편견과 증오를 조장한 결과일 것이라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이들이 동성애자에게 던지는 평가를 살펴보자. 

- 동성애는 죄다.

- 동성애는 올바른 사랑이 아니다.

- 동성애자는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수 없다.

- 성경은 동성애를 부정하고 정죄한다. 

- 동성애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이 말의 뜻은 동성애자는 “자신이 동성애를 택한 것이다“라는 의미이므로 선택한 행위로서 판단과 책임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다. 즉 비난 받을 짓이라는 의미다. 

- 동성애자는 소아 성애자와 같은 부류다. 이 말은 동성애자는 성범죄자인데 왜 안 잡아넣느냐라는 주장과 같다. 

- 동성애는 더럽고 난잡하다.

- 동성애는 에이즈 확산의 통로다.

- 동성애로부터 우리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 

이런 논리가 모두 옳다면 “하나님은 동성애자를 혐오하고 증오한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2.

나는 위에 나열한 모든 판단은 성윤리의 관점에서 근거가 박약한 편견을 담은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은 집단으로 이런 판단을 유통하면서 “우리는 동성애자를 차별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동성애자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들을 회개시켜 구원을 받게 하려고 그러는 겁니다.”라고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공공연히 주장한다.”우리는 동성애자를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해요“라며 차별적 발언을 공공연하게 하는 이들은 보면 정말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다. 조목조목 차별하면서 차별하지 않는다는 이들의 부정직함은 깊이가 매우 깊다. 이들은 도대체 왜 기독교 차별주의자들이 된 것일까? 

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 보수적인 신앙을 교사하는 교회를 다닌 이들은 합리성을 상당부분 상실하는 자아의 죽음을 일종의 순교적 행위로 일상화 한다. 이들은 합리성을 배반하거나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지킨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자기가 자신의 자아를 죽이는 일종의 부분적 자살행위다. 이 정도면 이들에게는 차별을 일상화하면서도 순교라도 할 것 같은 우월적 신앙을 옷 입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보수 신앙의 우월성을 버리면 하나님 신앙이 파산상태에 이른다고 생각한다.  

- 신앙의 파산은 이들이 가진 종교적 공포다. 종교적 문헌 속에 담겨있는 종교적 상징 언어나 표현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받았기 때문에 이들은 동정녀 탄생설, 일회적 창조설, 성서무오설과 같은 비이성적 주장을 목숨을 걸고 지키려 든다.   이런 지경에 빠지면 지성인이 아니다. 독선을 부리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이런 독선적 존재를 지키는 일을 이들은 신앙을 순교적으로 지키는 행위라고 서로 가르친다. 사교가 따로 없다. 이렇게 훈련받은 이들이 서로 배설물도 먹으라고 하고, 구타도 당하면서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비이성을 우월한 신앙의 증거인양 주장하고 유통하기 때문이다. 

- 이들이 가진 내면적 논리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그러므로 연구하거나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왜 그럴까? “두렵기” 때문이다. 이들은 오늘날 해방적 인간론이 점증하는 세상이 두려운 것이다. 우리사회에서는 해방이라는 말만 사용해도 펄쩍 뛰는 인간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기쁨을 누렸듯이 해방이란 기쁜 일이다. 왜냐하면 해방이란 지난 날 우리를 부당하게 얽어매던 것들로부터 놓여나 자유를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제를 그리워하고 일제에 감복하는 인간들이 적지 않는 것과 같이 지난 “과거의 질서”에 만족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는 이들이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게 된다. 그럼 무엇이 우리를 서로 다른 생각으로 이끄는 요인인가?

- 가부장적 질서의 근원적 원인인 이성애다. 이성애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남성 우월주의로 구성하고 여성을 남성과 동일한, 평등한 인간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 나는 이런 점에서 가톨릭교회나, 여성 안수를 거부하는 교회는 나쁜 교회라고 생각한다. 가부장적 질서는 남성 신을 하나님으로 여기고, 남성이 지배하는 문화를 존속시켜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가부장적 남성 중심의 교회로 계속 머무르는 것에 대하여 나는 반대한다. 가부장적 질서는 남성중심주의를 받아들인 인간(여자 포함)들에 의하여 존속된다. 

- 가부장적 질서를 옹호하는 논리 역시 매우 단순하다. 가부장적 질서는 남성 성기 숭배의 논리가 담겨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가부장적 문화가 채색된 세계에서 드러나는 우월성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나는 별 것 아닌 남자가 그 남자라는 이유 하나로 여성을 함부로 대하는 인간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그리고 그런 남자를 멋있다고 여기며 사는 인간 역시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남성성이 질서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성성 중심의 질서를 파괴하는 자, 그들은 가부장적 문화의 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문화는 이성애를 규범화하고, 가부장적 질서를 강화하며, 여성 인간을 억압한다. 차별하지 않는다고? 여성을 가부장적 문화의 대리자, 곧 성직자에서 배제하면서도 이들은 뻔뻔스럽게도 우리는 차별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참 한심하다.

- 그렇다면 가부장적 문화가 만들어 내는 사회적 얼개는 무엇인가? 그것은 양성질서를 혼인규범으로 삼는 것이다. 즉 우리 사회의 모든 안정성은 우리를 지금까지 지탱해준 성관계에서 오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해방은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라 인식되고, 동성애는 그들이 살아온 방식이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일시에 상대화되는 모욕이 되는 것이다. 이런 감정에서부터 이들은 증오와 혐오를 내뿜는다. 이들은 자유롭기를 원하는 여성의 요구를 부정하고 끊임없이 가부장적 질서에 부역하는 것을 미덕으로 가르치려 든다. 한동안 이들은 여성을 마녀로 몰았듯이 요즈음에는 동성애자를 마녀로 몰고 있다. 마녀로 몰린 여성들을 향해 성적 혐오감을 살인적 증오 수준으로 끌어올리던 당시 종교 재판관이나 동성애 혐오자의 얼굴은 동일하다. 이들은 거짓을 밥 먹듯이 주장한다. 심지어 소아 성애자와 동성애자를 동격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동성공포증”(homophobia)에 오염된 교회를 만든다.

- 동성애를 혐오하는 이들은 대부분 동성 공포증 환자들이다. 이들은 불교 혐오증, 부처공포증 같은 병에도 쉽게 걸린다. 사찰에 숨어들어가서 불상을 훼손하는 반문화주의자들은 사실 가련한 부처 공포증, 이교 공포증에 걸린 환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이 환자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인분을 먹으면서 거룩한 훈련이라고 생각하도록 교사당한 사람들이 왜 나오겠는가? 일찍이 자기살해, 더 정확히 말하면 이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인용하며 자기 이성을 살해하도록 보수적인 선생에게 교사 받았기 때문이다. 사실 보수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아까운 일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사랑의 길이 아니라, 종교적 자아의 훈련을 위한 자기 부정을 왜곡하여 자기혐오, 자기 살해로 여기는 그 경박한 오류를 알아채는 이들이 거의 없다. 

- 왜 그럴까? 끼리끼리 모여 있기 때문이다. 클라우스 테벨라이트는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에게 신체적 공포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성애자에 대한 선입견과 공포적 혐오가 오도된 것”이 호모포비아의 요인이라고 분석하였다. 동성애자가 문제라기보다 정신적으로 오도된, 그러니까 정신병적 질환을 가진 인간이 바로 호모포비아에 걸린 인간이라는 말이다. 초기의 정신질환자는 자신의 문제를 다소 인식할 능력이 있지만 만성적 정신질환자는 문제 인식 능력이 상당부분 붕괴되어 있다. 동성애 공포증을 유발하는 목사들은 일면 이런 속성에서 멀지 않다고 나는 보고 있다. 이들은 자신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동성애자를 향하여 마치 인류의 공적이나 되는 것처럼 악평하고 다니면서 우스꽝스럽게도 스스로를 거룩하다고 여긴다.  

3.

- 이들은 왜 동성애를 증오할까? 그것은 그래야 그들의 불안한 영혼이 안식을 얻기 때문이다. 증오와 혐오를 품어야 자기가 옳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언어를 살펴보면 “틀렸다.”, “올바른 것이 아니다.” “죄악이다.” 라는 표현을 입에 달고 산다. 그리고 곁들인다. 이들이 “우리 자녀들을 타락시키고, 가정을 파괴할 것이며, 나아가서 우리 교회를 파괴하고, 우리 사회를 파괴할 것이다. “ 이런 주장을 진리처럼 외치고 다니는 공포증 환자들이 내놓을 수 있는 입증자료는 불행하게도 없다. 

- “자료가 없다고? “ 내가 연구한 결과로는 그렇다.  기독교가 잘못 가르친 미몽의 역사를 해체한 두 가지 결론이 있다. 47년 전 세계 정신의학자들의 모임인 미국 정신의 학회(APA)는 동성공포증의 원인이라 여겨지던 동성애를 정신적 질환에서 제외시켰다. 이 말의 뜻는 인류사회가 , 특히 인간을 정신적으로 관찰해온 정신과 의사들이 동성애는 질병이라고 주장했던 성직자들의 허황된 주장을 부정했다는 의미다. 더 이상 성경을 들고 동성공포증을 조장하는 목사들에게 속지 않겠다는 의미다. 이들이 밝힌 이유 한 문단만 인용한다. 

“We will no longer insist on a label of sickness for individuals who insist that they are well and demonstrate no generalized impairment in social effectiveness.” 

- 무려 47년 전이다. 동성 공포증을 아직도 떠들고 다니는 목사와 신자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그대들을 불성실하거나 부정직하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1973년 이전까지 장구한 인류의 역사 속에서 목사들은 동성애자들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다음 두 가지다.

1) 비정상(abnormal) 그래서 병든 영혼이라고 여겨 치료하면 된다. 여기서 온갖 상상력이 가해져 동성애자를 증오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1968년만 해도 정신과 의사 중에는 동성애자를 사이코패스라 규정하기도 했으니……. 그 박해의 역사를 다 여기 적을 수 없다. 

2) 미성숙(Immaturity)한 인간이라서 그렇다. 그러니 얕잡아 보아도 되고, 천박하게 여겨도 된다. 우리가 잘 가르치면 된다. 이탈리아에서는 동성애자를 교회 지하에 묶어두고 미성숙한 인간이 성숙한 인간이 되도록 매질을 하기도 했다.  가르쳐야 되니까. 

- 1973년은 동성애를 이해하는 기조를 바꾼 해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보고 위의 두 가지 관점을 가치고 고쳐보려고 1973년까지 노력했지만, 사실 알고 보니 비정상이나 미성숙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세계 심리학회에서도 1975년 동일한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이 때부터 동성애는 기존의 이성애와 다른 사랑의 감정이며, 인간의 한 속성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다르다”는 마치 백인과 흑인이 다르듯이 다를 뿐이지, 다른 것을 이유로 열등하다든지, “덜된 인간”, “잠재적 범죄자”라고 여기는 차별적 사고를 야만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본 것이다. 

5.

시간이 없어 결론을 내려야 하겠다. 어떤 이는 나를 향하여 목사인데 왜 성경에 있는 말씀을 인정하지 않느냐고 따스한 비난을 하시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정치적 성향에는 동의하지만 동성애에 대한 이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신다.  그 이유까지 애써 내가 감신 출신이라는 데에서 찾으신다. 이런 분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보수 신학을 먹고 자란 분들이다. 

사실 감리교 목사라고 하여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얼마 전엔 감리교에서는 동성애를 옹호하는 이를 정죄하겠다는 문서까지 나왔다. 연합감리교회는 이 문제로  교회가 거리를 두는 두 편으로 나뉠 지경에 처해있다. 나는 어느 출신 때문이 아니라 나의 학자적인 양심과 지성을 희생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일 뿐이다.  사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너무나 많은 문서들이 나와 있다. 그러니 연구를 하지 않으면, 이 문제와 관련하여 되돌이표를 만나 매번 제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 반복은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다. 


정말 그대의 신앙의 문제, 자식의 문제, 교회나 우리 사회의 위기를 불러오는 문제라면 정신적 나태에서 벗어나 그대가 이제부터 연구해 보시라.  왜 유럽 전역을 포함하여 미국, 호주 등등 소위 선진의 공적 영역에서 세계가 생각을 바꾸었는지, 왜 세계 정신의학계와 심리학계가 생각을 바꾸었는지 살펴보시면 된다. 다만 16세기 신학자들이 주장했던 유치하거나 상투적인 주장을 반복하지 말고, 반드시 정직하게 살펴보시기 바란다. 세상은 진실에 문을 닫고 편견에 찌들어 점점 정신세계가 쪼그라드는 교회와는 다르다. 복음을 전하기 전에 악성 기독교 차별주의자에서 스스로 해방되는 일이 일어나기 바란다. 나는 이런 일은 예수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우리가 사람을 차별하는 신자, 목사에서는 벗어나야 하지 않겠나 싶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눅 4: 1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