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31, 2009

보수와 진보, 그리고 그 회색성에 대하여

박충구 ( http://peaceinasia.blogspot.com ) Date : 2009/03/28 Hit : 96 Recommend : 0

그래도 나는 보수는 무섭다...
나는 간혹 보수주의자들이 무섭습니다.
이번 조갑제와 그 일당들이 모여 좌파 척결을 외치자
검찰이 감동을 먹었는지 총대메고 나서서 MBC 피디를 붙잡아 갔습니다.

아래 김종휘 기자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동일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앗아간 사람을 향하여
용서할 수 있는 그런 용서는 사실 신앙이나 보수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뜻으로 쉽게 돌리는 보수신앙의 결과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보복의 원리의 한계를 인식하는 인간의 유한함에 대한 인식이거나,
교통사고를 낸 젊은이의 인간으로서의 고귀함을 인식할 수 있는 인격을 가진
이들만이 행할 수 있는 고귀한 차원의 판단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흔히 보수주의자들은 인간의 고귀함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매우
짧은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혼구원이라는 집점에 늘 머물지요.

영혼구원을 받지 못한 인간은 덜된 인간, 저주와 심판 아래 있다는 저주의 교설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왔습니다. 그러니 다른 것들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고,
더구나 비기독교 세계는 거짓 구원의 체계일뿐 적그리스도적인 존재라고 여기지요.
그래서 비기독교적인 이들의 죽음을 자신들과 동일하게 평가하지 않는 습성이
깊습니다. 이것이 독일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집단 살해를 당한 유태인들의 비극,
홀로코스트의 신학적 배경입니다.

가장 급진적인 신앙을 가진 퀘이커들은 그들의 삶의 원칙에서
보복의 원리를 제거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의 이락전쟁이 얼마나
파렴치한 것인가를 드러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2006년 평화팀을 구성하여 이락에 갔다가 이슬람 급진파에 붙잡혀
그 중 한사람이 무참히 살해 되었지요. 전신에 무려 11발의 총을 맞았습니다.
그 분의 이름이 Fox입니다.

그런데 이락 평화팀은 놓여났을 때 동료를 죽인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을 위해
미군에게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동료를 죽인 그들을 연합군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사려깊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퀘이커들은 동료의 죽음을 조용히 애도했을 뿐
그를 영웅으로 칭송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국 아프칸 단기선교팀원들은 정말 다른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놓여 난 다음에 미군들은 그 지역을 맹 공격하여
수많은 이들을 죽였습니다. 단기선교팀원들은 낱낱히 자신들이 보고
경험한 것을 증언하다시피 말했던 결과지요.
그리고 거기서 죽은 이들을 순교자로 세워주어야 했지요.

보수신앙이 제도적으로 작동할 때 어떤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는지에 대해서
역사적 반성이 없는 사고는 위험합니다.
개인적 차원에서 일어난 용서를 보수신앙의 결과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입니다.
그 결과 미국 보수주의와 부시정권에 대하여 찬양 동조를 할 수도 있다고
너스레를 떠는 것은 나로서는 참 동의하기 어려운 논리입니다.
결국 이쪽에서는 용서하고, 저쪽에서 벌리는 집단 살상에
대해서는 적당히 맹목적인 지지를 보내는 결과가 되겠지요.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용서의 낭만화는 무서운 사회악을 방관 방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 윤리 차원에서 얻은 경험을 가지고
그 연장에서 제도악의 실상을 간과하는 보수주의는 여전히 문제가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용서는 감동을 주지요. 그러나 바로 그 용서하는 자가 제도적 악을 지지하고 있다면
결국 사회악에 대한 인식과 분석 능력이 취약한 자신은 못보는 것이겠지요.

간혹 은근히 그리고 이상하게 보수를 지지하는 속성을 보이는 이들의 글을 읽으면
"이건 무엇인가?"라고 되 묻다가 이내 참 이중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보수에 대한 선호감이 소위 진보적 신앙인들이 보이는 무례함에 대한 거부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나의 경우 보수에 대한 혐오감이 더 깊습니다.
진보주의자들의 무례함이 불러오는 불쾌에 비하여 훨씬 맹목적이라는 생각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맹목은 무례함 정도가 아니라 삶의 부정에 이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기저귀차고 강단에 올라와 택도 없다!!"는 어느 보수교단 총회장의 신학대학
채플에서 행한 설교가 나를 그렇게 느끼게 합니다.
그는 아마 자기 아들을 죽인 자를 용서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여성에 대한 혐오는
버릴 수 없는 인간으로 존재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보수신앙이므로...


김종희 :: [2009/03/29] 박 교수님 견해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여기에 제 견해를 살짝 덧붙여도 될까 모르겠네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신앙적으로/사회적으로(공적 영역에서) 매우 보수적이면서도, 인격적으로/정서적으로(사적 영역에서) 매우 관대하고 관용적인 사람들이 편하더라고요.
상대방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으나 그걸 공격하는 대신에 존중할 줄 아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경우는 사적 영역에서 신뢰가 견고하면 공적 영역의 문제에 대해서 견해가 다르더라도(심지어 극과 극이어도) 금세 헤어지지 않습니다.
흔하지는 않지만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저랑 개인적으로 친한 분들 중에는 공적 영역에서 보수적인 견해를 가진 분들이 더 많습니다.
물론 저를 아는 분들 중에 저와 같은 캐릭터도 흔치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적지 않더군요.

딕 할아버지의 경우의 얘기를 조금 더 해볼게요.

며칠 전에 저희가 부부 싸움을 해서 그 집을 갈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입니다.
눈치 빠른 섀론 할머니는 아내에게 이유를 물었고, 아내는 대충 설명해주었답니다.
둘 사이에 비밀이 없다는 부부는 그 내용을 공유했습니다.
딕은 저에게 진심으로 걱정하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더 자세히 물었습니다.
미국 사람들치고는(그것도 남부 사람으로) 매우 독특한 캐릭터지요?
아내는 아내대로, 저는 저대로 각자 능력껏(영어) 할 수 있는 얘기는 다 해주었습니다.
딕은 휴대폰 번호 말고 집 전화번호를 알려주었습니다.
새벽 2시든 3시든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전화하라고요.
딕 할아버지는 섀론 할머니한테 혼이 났답니다.
아내한테 들은 얘기를 둘이 나눴는데, 그걸 다시 저한테 얘기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얘기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신뢰하니까 무슨 얘기든지 다 나눌 수 있다고,
비밀 얘기가 새어나갔다고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오히려 두 부부 화해를 시도했습니다.
네 사람은 다 함께 포옹했지요.

그리고 ---

남자들은 따로 영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오늘 나눌 내용은 제자들이 예수를 배반하고 도망하는 대목이었습니다.
딕은 제자들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우리는 얼마나 약하고 악한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너무 잘 배반하는 우리가 회개해야 한다는 식으로,
철저히 개인적인 영역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저는 견해가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이 인간적으로 약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하나님나라에 대한 그들의 기대와 예수의 모습/가르침이 어긋난 것도 그들이 약해진, 도망한 원인 중에 하나일 거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약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동상이몽이 더 큰 원인이 아니겠는가 싶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자기 식으로 하나님나라를 설정하고, 거기에 예수의 모든 것을 꿰어맞추고, 그게 아니면 배신할 인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맞는 얘기인지 틀리는 얘기인지 몰라도, 딕과 저는 이렇게 생각이 다릅니다.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생각이 다를지라도 불편한 마음을 품지 않고 다른 생각을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관계가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상대에게 강권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중요하겠지요.

진보든 보수든 누가 더 자기 신념에 논리적으로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충실한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신념을 깊은 감동으로 전염 내지 감염시켜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게 더 중요해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딕 할아버지를 감동시켜서 진보적 생각을 감염 내지 전염시킬 능력이 없습니다.

질적으로든 양적으로든 보수주의자들의 무례함. 이중성, 아무튼 부정적인 요소들은 진보주의자들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그건 비교할 가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보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무슨 힘으로 이런 사람들을 이길 수 있느냐 하는 점일 겁니다.

마지막으로,
저희가 8월초에 신학 유학생을 위한 멘토링 컨퍼런스를 준비하면서, 강사 중 한 명으로 강남순 교수님을 초청하려고 했는데,
마침 훨씬 더 중요한 프로젝트가 스위스에서 열리기 때문에 참여할 수 없겠더군요.
아쉽기는 했지만, 전화로라도 짧지만 인사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박충구 :: [2009/03/29] 김종희 기자님! 반갑습니다.
진솔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듣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이지만,
신학대학에서 근 20년을 강의해온 경험을 통해 남는 것은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의 인식론적 한계였습니다.
바로 보수적 신앙인들이 신앙의 어떤 정수처럼 느끼는 그것이
억압기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성실한 반추를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성문제가 그렇고, 정치문제가 그렇습니다.
지금 이명박 정부를 지지하는 뉴라이트들과 함께 앉아 있는 소위 기독교 지도자들을 보면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교회라는 장에서 그들은 이미 타협적인 기독교적 전승에
흠씬 젖어 있으면서도 안그런척 위선을 떨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인신론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확신범같은 것이지요.
예컨대 손양원목사나 딕/새론 부부처럼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용서와 화해를 그리스도적인 실천으로
받아들이면서 넓은 영역에서의 실천과제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지요.
부시정권을 지지하고, 오바마를 비난한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결국 미국
공화당을 지지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제국주의적 우월성을 점하기 위한
전쟁광들이 모여 있는 집단을 지지하는 것처럼 내게는 보이는 까닭입니다.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지나친 생각일까요?

또 하나의 문제는 진보주의자들이나 소위 자유주의자들 중에도 딕부부 못지 않게
개인적 차원에서의 용서와 화해와 사랑을 나누는 이들이 많습니다. 저의 글에게
Fox 예를 들었지만요.

제가 보기에는 혐오감을 불러오는 무례한 이들은 보수/진보의 차이가 아니라
사람됨의 차이라는 생각이 들고, 신앙이나 사조로 미루어 본다면
신본주의적 확신을 앞세우는 보수주의자들이 나는 더 무섭다는 것입니다.

진보주의자나 자유주의자들은 적어도 신의 이름을 빌어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는 신학적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규정된)신의 뜻을 수행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하지요. 이슬람이나 유대교나 기독교를 막론하고
모든 근본주의자들이 가지는 정치적 결집력은 여기서 나옵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런 경향의
중앙에는 매우 교활한 책략가들이 순진한 신앙인들을 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진보와 보수는 사실 교회현장에서 교파나 교단을 초월하여 형성되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장감성을 막론하고 거의 80%이상이 사실 보수주의적 신앙이 아니라면 교인으로 머물수
없는 이들일 것입니다. 합리성을 존중하는 신자들은 점점 교회를 떠나고 있는 형편이지요.

이번 학기에도 나의 학생들 중에 몇몇 사람은 나를 "좌파"로 규정하고
뒷걸음질을 치느라고 고생하고 있습니다.
평화와 인권을 옹호하는 학자들이 교회 안에서
좌파로 간주되는 것 또한 사실과 관계없이
참으로 단순한 도식에 의한 평가입니다.
이명박은 사회에서 좌파척결을 몇몇 한기총 목사들은
교회 안에서 그들이 규정하는 좌파 척결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리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으로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이런 이들이 바뀌지 않으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인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예수와 아무런 상관없이 보수적 교리가 세뇌시킨 바
영혼구원이 지상의 과제라는 그들의 평생의 확신을 지키기 위한 행동의 결과지요.

나의 선생님이었던 변선환 교수를
종교재판에서 처형하던 그들이 아이러니 하게도
오랜 동안 신학교에서 함께 지낸 벗, 동료,
선후배 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목회에 성공했고, 훌륭한 목사로 칭송을 받고 있으며
온갖 희생과 용서의 길을 걸어온 분들이기도 합니다.
과연 인간다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 주일 아침 되묻게 됩니다.

김기자님의 견해에 대부분 동의하면서 어느 한 부분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일전에 대형 목사의 성적 일탈에 대한 글에도 이견을 제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성적 이탈의 본질을 단순화하는 것도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성과 사랑을 단순 매도하거나, 법의 심판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행위에 대한 진실한 평가보다는 개인의 보수적 도덕관념을 지키기 위한
분노일 뿐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의 부도덕을 공개 비난하는 이들이
나는 그리 깨끗하고 순결한 영혼을 가진 이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공개적인 공격을 받고 있는 이의 주변인들이 가질 고통에 대하여 냉혹할 정도로
무관심한 분들이지요. 교회라는 데는 이보다 훨씬 잔혹한 논리를 융통시키기도 하지요.
이것도 위의 변선환 교수 처형 사건과 본질상 다를 바가 없습니다.

미국에 계시니 왜 미국 교회가 동성애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지를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거부함으로써 자기를 지키려고 보수주의자들은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곤 하지요. 이런 의미에서 나는 보수주의자들이 무섭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김종희 :: [2009/03/29] 박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서 동의가 되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래서 제 입장에서 다른 견해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르겠습니다, 교수님은 뭔가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받으실 수도 있겠지요.

개인적인 요즘 제 신학적 태도는 분명 한쪽으로 확 쏠려 있습니다. 시간이 가고,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그러해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걸 내놓고(공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걸 얘기하는 순간 한쪽 편으로 규정당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좌니 우니, 보수니 진보니, 뭐라 규정되는 것에 대해서 불편하게 느끼지는 않지만, 그로 인해 공적 영역에서 많은 손실을 겪게 되는 것이 내키지 않습니다.

가령, 제가 선호하고 다니면서 공부하고 싶은 신학교가 한국에 있습니다. 제가 그 학교를 나오면 그 순간부터 저는 '무엇으로' 규정됩니다. 그것이 <뉴스앤조이> 내지 '교회 개혁 운동'에 득이 될까 실이 될까를 생각해보면 답이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뉴스앤조이>를 하면서 끊임없이 요구받았던 것이 일종의 '신앙고백'입니다. 정체성의 요구지요. 우리의 신앙고백, 우리의 미션, 우리의 비전. 하지만 한 번도 그걸 얘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걸 드러내는 순간 한쪽으로 규정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공적인 일을 하는 동안은 계속 그런 고민 속에 살게 될 것 같습니다. 근데 요즘은 제 성향과는 많이 달라진 <뉴스앤조이>를 보면서 조금 어색해하기도 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요, 그것이 10년 가까이 갖고 있는 저의 관심사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 교인들의 성향을 60 : 30 : 10 이라는 비율로 얘기한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아닌데 예수 믿고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면서 사는 60%, 제대로 예수 믿으려고 애쓰는 10%,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30%. 물론 딱 맞는 비율은 아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요.

60%는 천당 가든 지옥 가든 제 관심권 바깥에 있고요, 저의 관심사는 30%와 어떻게 대화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30%는 신학적으로 대단히 보수적이지만 양심과 현실을 비춰볼 때 뭔가 잘못된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고, 누구한테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떤 변화가 두렵기도 하고,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10%) 나랑 다르다 해도 그렇게 사는 사람을 보면 존경스럽기도 하고 도와주고 싶기도 하고. 아무튼 그런 사람들이 분명 있습니다. 저도 그런 사람들 덕/도움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이 진보의 논리성, 합리성, 탁월성, 뭐 이런 것 등에서 나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보수/진보의 구분과 무관하게, 개인을 진심으로 대하는 태도, 그런 진정성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근데 그게 그리 쉽지는 않더라고요.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는 그리 실적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공적으로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박 교수님 말씀에 대한 반론은 아닙니다만, 제가 딕 할아버지에 대한 글을 쓴 것이나, 여기다가도 2개의 글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까닭은, 제 생각과 행동의 의도가 대부분 30%와 소통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고, 그들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라는 걸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얘기가 자꾸 길어집니다만, 저는 "<한겨레>의 가치를 품고 <조선일보>식 글쓰기로 대중과 소통하는 것"이 정말 불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씨름하고 있습니다. 가끔 후배 기자들에게 강간과 섹스와 딸딸이를 예로 들어서 설명합니다. 강간이야 근본주의자들이 하는 짓이고. 보수주의자들이 상대에게 약을 먹여서 정신 몽롱하게 만든 다음 섹스를 합니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강간이지요. 하지만 상대도 그럴 준비가 얼마든지 되어 있으니 경우가 조금 다릅니다만.

문제는 딸딸이입니다. 진보적입네 하면서 혼자 웅크리고 딸딸이 치는 것 같은 글을 읽을 때마다, 저렇게 퀄리티 좋은 걸 왜 지만 혼자 열을 내면서 가공의 상대방도 좋아하리라 착각하면서 땀을 흘릴까 하는 안타까움을 느끼곤 합니다. (아마 이 정도 읽고 나서 품위 없고 마초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표현들에 역겨움을 느낄 분들도 계시겠지만, 제 수준이 여기까지라서 용서를 구합니다.)

<미주뉴스앤조이>에서 성경 해석과 관련한 글을 가끔 쓰는데, 아주 어정쩡한 입장을 담은 글들입니다. 진보적 성서 해석을 하는 분들이 보기에는 똥 싸다가 만 느낌이 들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보수적인 신학에 물든 사람들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얘기이고요. 그런데 의외로 진지하게 고민하며 질문하는 메일을 제법 받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 고민은 연결해줄 만한 마땅한 곳, 적절한 사람이 제 주변에 별로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정서적으로도 그렇지만, 진보적인 곳에서는 어린애 같은 그들에게 줄 만한 부드러운 것들은 별로 없고, 딱딱한 것만 있거든요.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표현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진보는 아직 잘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관심도 별로 없어 보이고요.

60% 얘기는 더 할 필요도 없고, 그래도 30%가 분명히 있는데, 그들과 어떻게 함께 고민하고 아파하고 즐거워하고 웃고 울까 하는 과제를 안고 씨름해야 할 과제가 10%에게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10%를 향한 제 안타까운 호소는 이겁니다. "혼자 즐기는 딸딸이는 이제 그만, 상대와 함께 즐기는 유쾌한 섹스를!" 그게 이른바 '소통' 아닌가요?

오늘 밤이 지나면 결혼 12주년이 되는 날을 맞습니다. 연애를 시작한지는 꼭 20년이 됩니다. 아내가 애들을 일찌감치 재우고, 방에서 저를 부르고 있습니다. 더 이상 컴퓨터 키보드를 눌렀다가는 내일 집안 분위기 엉망 되겠습니다. 제가 먼저 실천하러, 이만 실례합니다!



박충구 :: [2009/03/29] 즐거운 필담입니다.
결혼 12주년이 아니라 연애 20주년 밤을 축하드립니다..

오늘 동기생 부친 장례식을 다녀오면서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아침에 올린 글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보수와 진보를 너무 손쉽게 말하고 있다는 생각때문이었어요.
영성과 정치를 혼합하며 테러라도 감행하는 십자군적 보수가 무서운 것인데... 하고 생각했지요.
김기자님과 나와 뭐가 그렇게 다르겠나 싶었어요.
생각해보면 보수 100%는 없을 것이라 생각되거든요.
그럴거면 스스로 돌거나 말라버릴거예요.
예컨대 나는 조갑제같은 사람은 조금은 어디가 이상해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하나 차이가 있는데요.
자위는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하나의 비폭력적인 건전한 성행위가 될 수도 있어요.
이번 학기 내가 가르치는 과목중의 하나가 "성과 사랑과 정치" 입니다.
강간과 쎅스와 자위는 다같은 성애의 표현이지만,
하나는 야만이고, 하나는 동성이나 이성이라 할지라고 둘이 성애를 나누는 것이고,
자위는 홀로 그것을 가지는 것이지요.
구지 두 사람이 가지는 사랑만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결혼하고 사랑하는 파트너를 가진 사람만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사고의 연장에 매춘이 있거나, 강간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면 돈거래 관계를 생각한 결혼도 조금 이상한 매춘이 되기도 하고,
결혼관계라도 무례하게 한편의 쾌락만을 추구할 때 강간에 가깝기도 하지요.

하나님이 태초에 자기를 닮은 인간을 만들 때 sex를 창조하셨으니까,
하나님의 sexuality 가 있는 셈이지요. 성은 생각보다 거룩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생명에 대한 강한 긍정이 있어요.
그 결과 아담과 하와간에 일어난 사회적 사건이 동침이었어요.
그런데 이 문제를 heterosexuality로만 보는 견해는 다른 입장을 혐오해 왔어요.
오늘날은 자위나 동성애도 성애적 자기 표현의 하나로 보는 입장이 강합니다.
거리에 가끔 눈에 띠는 sex shop들이나, 유럽 거리에 즐비한 sex movie shop이
그런 문화를 드러내고 있지요. 한국도 밤 12시가 넘어가면 삼류 호텔에서 틀어주던
에로 비디오를 틀어줍니다. 김기자님의 자가발전적인 진정한 sex 개념에 미달하는
류의 인간들이 퍽이나 많은 셈이지요.
사랑은 참으로 까다롭고 번거롭고, 또한 아름답고 신기하고 이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짓기 어려우니
우리를 유혹받게 만들어 놓고, 자식 생산능력을 주셨으니까...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라 다른 류의 영장류와는 달리
시도 때도 없이 즐기기도 할 수 있게 하셨으니....
참 감사한 일이지요.

결혼을 앞둔 이들이 주례를 부탁할 때면
나는 몇가지 묻습니다.
사람을 성애적으로 사랑하는 방법을 아느냐고....
그러면 대개 당황해 합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기독교인들은 미셔나리 포지션이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남성우월적인, 주도적인 성애방식이지요.
그런 경우 자위와 뭐가 다른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러다 이 홈피에서 쫒겨 나겠습니다.
그럼 즐거운 밤이 되시기를...



지강유철 :: [2009/03/29] 제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저도 늘 고민하는 문제인지라 두 분의 대화를 읽으며
느낀 점을 말씀드리고 싶어집니다.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얼마전 이 홈에서 CD음질과 MP3 음질의 차이를 놓고 생각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저는 MP3를 음질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미치는 정서상의 문제 때문에 CD를 선호한다는 점을
말씀드렸고, 공학을 공부하신 엄이재윤님과 역시 공학을 공부하고 한때 방송 장비와 관련된 일을 했던 김세진
형은 기술상 두 가지 사이에 별 차이가 없음을 역설하였지요. 저는 이론상으로 두 분의 주장을 무너뜨릴만한
지식이 없지만 할 이야기가 없진 않았습니다. 이론상으로는 두 분의 이야기가 맞을 지 모르겠지만 MP3가
유통되는 현실로 내려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저를 비롯한 대다수의 MP3소비자들은
온라인에서 유통되는, 특히 이런저런 사이트에서 손 쉽게 얻을 수 있는 파일들이 본래 CD 상태보다 어느 정도로
과감하게 압축된 것인지 잘 모릅니다. 그런 음악을 들으면 많은 문제가 생긴다는 걸 모르는 것이지요. 그냥 사용할
뿐이지요. 김세진 형이나 엄이재윤 같은 분들, 그러니까 CD와 MP3 사이에 음질 차이가 거의 없으며, 자기 스스로
질 좋은 파일들을 선별해서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저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머지 다수들은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파일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지요. 이렇게 보자면 이론상으로 CD와 MP3 사이에 별 차이가
없으니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MP3의 유통 현실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저는 두 분이 진보와 보수를 놓고 나누신 대화에도 이런 것을 적용할 수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저는 박충구 교수
님께서 무섭다고 말씀하시는 보수주의자들의 실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서워하고 경계해야 할 보수주의
자들은 대개 힘이 있고, 사회 속에서 강한 부정정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 또한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확신
에 찬 무서운 보수가 문제가 되지만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만나는 힘도 없고, 역사와 사회에 그렇게 큰 악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착하지만 무지한 보수는 나누어 보아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물론 저도 평범한 일상 속의 보수들이 자
기 아내나 자녀들, 또는 직장의 부하 직원들에게 가하는 각종 압력이나 피해는 별 거 아니라고 주장할 맘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런 보통의 보수를 무서워할 필요는 없으며, 저들에게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희망 또한 포기할 수 없다
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보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정말 위험하고 문제가 되는 보수와 일상의
평범한 보수를 구분해 놓고 대화도 하고, 대안도 찾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힘과 영향력을 가진 무서운 보수는 반대하고 비판하고 경계하되 착하기만 하여 자기가 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힘들게
하는 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쉽지 않겠지만 아군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를 포기하지 말자는 것이지요. 제가 진보(
이 부분에 대해선 저도 손 쉽게 나눌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며 조심스럽게 표현합니다) 진영 사람들에게 가끔 실망을
넘어서 좌절하는 것은 일부 힘있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확신적 보수주의자에게 퍼부어야 할 비판과 공격을 보수에 대해
별 확신도 없고 잘 알지는 못하는 일상의 보수주의자들에게 퍼부을 때입니다. 전 그런 오만이 싫습니다. 저는 어떤 경
우라도 진보는 보수보다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우위를 가지고 너무 쉽게 보통 보수
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쉽게 일반화시키거나 가르치려 들면 좋지 않습니다. 진보는 위에 있기 때문에 더 낮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보수주의자들을 자신의 겸손과 희생과 절제로 감동시키는 진보는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

그리고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조차도 여유와 너그러움을 잃을 때입니다. 저는 김종희
대표가 자신의 마지막 글에서 자기는 보수가 아니지만 딕 할아버지가, "FOX만 보자고 하면 그렇게 해줘야지. 부시 칭
찬하면 맞장구 놓아줘야지. 오바마 흉보면 같이 욕해줘야지."라며 대해 주는 게 자신감의 표현이고 너그러움의 표현이
라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자기는 종이 아니지만 종처럼 될 수 있고, 부자가 아니지만 부자처럼 될 수도 있
다고 한 표현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진보,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제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주변의 진보적 인사들
에게서 저런 여유와 너그러움, 저런 자신감은 별로 없는 듯 했습니다.

한 가지만 더. 제 생각으로는 진보는 진보이기 때문에 보수와 똑 같아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보수보다는 더 책임적
이어야 하고, 보수보다는 보다 희생적이며, 보수보다는 언제나 높은 도덕적 실천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
다면, 그러니까 그것이 빠진 진보라면 저는 보수보다 더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글이 길어져서 더 쓰진 않겠습니다만 제 정체성 혼란의 상당부분은 보수에도 진보에도 낄 수 없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러니까 보수와 진보를 아무런 계통없이 넘나드는 정신분열증적 행태로부터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보수와 진보 사이
에서 너무 종종 길을 잃습니다. 물론 진보가 볼 때 저는 너무도 보수적이고, 보수가 볼 땐 너무도 진보적이겠지만 말입니다.



박충구 :: [2009/03/30] 그렇습니다. 많은 부분 동의해요.
어제 장례식에 다녀오면서 내가 느낀 것이 바로 지강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습니다.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소위 보수적이지만 진보를 향해 열려있는 이들은
극보수들의 만행에 대한 비판이 덧입혀 질 때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고,
진보적이지만 덜 때묻은 보수신앙의 의미를 이해하려는 이에게 진보를 표방하는 진영의
무례함, 여기서 말하는 무례함이란 현실비판을 피할 수 없는 본질이 있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그 무례함에 대한 보수의 비난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이거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보수적 입장에 있는 이들의 터무니 오만을 느끼는 진보나,
진보적 입장에 있는 이의 자기 키를 넘는 비판적 태도는
서로에게 오해와 과장된 느낌을 불러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내리는 결론은
이런 갈등은 서로 배우면서 창조적으로 극복되어야 하지
그저 이해하고 지나가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수십만의 가난한 이락민들의 죽음을 불러오고,
아프칸을 내전상태로 몰아 넣은 부시정권을 지지하는
암묵적인 행위가 가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판적 인식의 부재'에 악이 기생한다는 아렌트가 생각납니다.

재밋는 일화를 소개한 것인데
이야기의 초점을 개인의 차원에서 너무 정치로 비약하여
긴장을 불러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지만
보수 기독교의 지지를 받고 정권을 잡은 이들이
일본 동해에 미군함을 불러다 놓고,
북한 미사일을 격추시키겠다고 호언을 하는가 하면
북한은 남한을 겨냥하여 보복하겠다는 오기를 부리고 있으니..
비판적 능력없는 보수 기독교인들의 무책임에
나로서는 혀를 두를 지경입니다.
선교제국주의적인, 정복주의적 기독교에 대한 반성이 없는 한
이런 역사는 반복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참으로 우울한 마음입니다.



엄이재윤 :: [2009/03/31] 메시지 4928(http://www.yucheol.com/zboard/zboard.php?id=board&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8113)의
경험적으로 얻을 수 있는 단순한 실험을 귀차니즘으로 외면하는 모습도
비판적 인식의 부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부터도 어떤 결과나 방향을 설정해놓고 생각을 끼워 맞추는 경향이 상당히 농후한 것 같습니다만
저에게 있어 대부분의 보수를 믿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박교수님께 말씀하신 것과 같은 그들의 표리부동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보수의 편을 거의 들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저에겐 무례함은 그래도 견딜만한 경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무례함은 공부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고요..
-뻘짓 메이커



이정동철 :: [2009/03/31] 어려운 문제라 끼어들기 힘들지만..
아들이 죽었고, 그 죽인자를 (비록 실수였겠지만) 용서하는 용서앞에 '보수와 진보'를 논하기 힘든것이 사실입니다. 정치적 색깔을 가지지 않는 보수 (결코 존재하기 힘들지만), 순수한 보수는 아름다울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그런 순수함을 이용해서 정치적 파워로 만들어 버리는 보수 지도자들이 욕을 먹어 마땅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순수한 보수주의자들과 대화를 통해서 변화시킨다.. 저는 별로 그런 기대를 안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건 아주 극소수 이고, 논리적으로 완벽하더라도 '감응'이 없이는 변화란 불가능 합니다.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 놓지만, 그것을 위해서 노력을 소비하는것은 낭비라고 까지 생각합니다. 변화는 그 사람의 기존 사고가 무엇이던간에.. 용기있게 한발 가서 고민하는 사람이 할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비록 진보주의자라 하더라도, 새롭게 고민하고 창조할 용기가 없다면 보수주의자와 똑같이 굳어 버리게 될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순수한 보수주의자들에게 그런 용기를 만들어 주기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봅니다. 좀 지나친 주장이며 결론이라고 생각하지만, 설득을 통해 신앙이 바뀌는 것은 제가 못 보았습니다. (제가 설득력이 부족한가요? ㅎㅎㅎ) 이곳에 오시는 분들은 많은 분들이 보수주의적 신앙교육을 받고, 진보적 사상을 접하고, 예수의 모습을 제발견 해가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늘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 논리적이기 때문에 변화 받으셨다면, 그분은 인텔리적이며, 지나칠 정도(?)로 이성적 판단을 중요시 하시는 분일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올바르지만 그길을 가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대화의 장을 만들고, 열어 두는 여유는 가지지만, 진보를 만들어 가는 변화는 새롭게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는 과정을 가야한다고 봅니다. 시간을 통해서 검증해 가는것, 그리고 새로운 나무를 키우듯.. 그래서 그 나무가 옆에 썩어빠진 나무의 물을 충분히 빨아 들일수 있어야 겠습니다. 저는 김종희 기자님의 글을 읽고 조금의 부담감이 있었는데, 지강유철님의 댓글에도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뜻을 잘 알지만, 박충구 목사님의 글을 읽고나서 제가 느끼는 그 부담감이 뭔지 명확해 졌습니다..

물론 제가 같이 일하는 친한 친구가 오바마 욕을 해도, 저는 그 친구가 좋아서 그런 정치적 논쟁에 별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 친구의 정치적 색깔에 동조하거나 상관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가야 할 길을 걸어갑니다. 평생 같은 시각을 가지지 못할지라도, 선거라는 순간에 반대편에 설지라도 (물론 저는 미국 선거권이 없습니다), 그 친구의 순수한 신앙과 착한 행실에 늘 감동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사람에 너무 치중하면 길을 잃어 버리기 쉬운것 같습니다. 길에만 너무 치중하면 사람을 잃어버리구요.. 그렇지만, 사람을 잃지 않으면서 자기길을 가는 무게가 우리의 삶에 있기를 원합니다.

엄이재윤 님의 글을 읽고 아직 (좋은 헤드폰에 없다는 핑계로) '실험'해 보지 못하고 있는 저를 보면서, 굳어져 가는 진보 또는 보수를 봅니다 . 자기가 실험하고, 주변사람들에게 또 실험시켜보고 (마루타? ㅎㅎ) 하면서 얻을수 있는 사고와 생각을 한걸을 가지도 않고 논하고 있는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 실험을 자기에게 하는 용기.. 그것이 우리를 유연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지강유철 :: [2009/03/31] 이정동철님, 댓글을 쓰고 있다가 실수로 날렸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잘 된 것 같기도 합니다. 조금 더 생각해
보고 댓글을 다시 시도해 보지요. 좋은 댓글 감사드립니다. ^^



지강유철 :: [2009/03/31] 엄이재윤님, "경험적으로 얻을 수 있는 단순한 실험을 귀차니즘으로 외면하는 모습도
비판적 인식의 부재가 아닌가 싶습니다.^^"라고 하셨는데요, 맞습니다, 맞고요. 확실히
제게 비판적 인식이 부재합니다.^^ 뭐 거기에 대해선 깨끗하게 승복하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다 쳐도, 단순한 실험을 제시받지 못한 채 오늘도 말도 안 되게 압축된
파일을 아무 생각없이 듣고 있는 수 천 수 만명의 문제는 그대로 남는 게 아닐런지요.
그건 누구해결해야 하나요? 해결이 안 된다면 그건 MP3 업자들 책임입니까, 아니면
그런 소리를 들으며 좋아라~하는 무식한 사람들의 책임입니까?^^

요즘은 그럴 대상도 별로 없고, 이젠 나이 때문에라도 남의 이야길 듣고 자신을 고치지
못하는 고집불통 5학년이 되긴 했습니다만 가장 뜨거웠던 20-30대에 제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반면교사 역할을 했던, 저를 가르친 못된 목사님과 선생님들이었습니다.
때문에 무례함이 공부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엄이재윤님의 말씀에 대해 저는 공감합니다.
저는 중고등학교 때는 물론 대학, 그리고 교회 생활에서 제가 존경하여 믿고 따르고 싶은
인생의 스승을 못 만났습니다. 그 대신 정신병자 같은 목사, 학생들을 패면서 쾌감을 느끼
는 교사들에게 시달리며 젊은날들을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제가 매달릴 수 있
는 유일한 길은 책이었습니다. 책이 아니곤 제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선생이 없었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제 삶에 가장 중요했던 시기에 저를 가르친 것은 선생같지 않은 선생,
목사같지 않은 목사들의 일탈행위였습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저를 키운 것은 이를 악물고 "나는 저 목사처럼 되지 말아야지"라고 했던 다
짐입니다. 그러나 이건 오로지 저만의 '자뻑'이고 다른 분들은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욕하며 닮
은 아들을 보는 것처럼 저의 병깨는 못된 버릇이 꼴보수 목사와 선생들을 욕하다가 배운 것이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이야기에 대한 저의 결론은 간단합니다. 무례함을 통해 배움의 기회를 얻게 되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무례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설득과 감동을 통해 배울 수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저처럼 "난 저목사처럼 되지 말아야지"하면서 이 악물고 다짐하며 배우면 얻는 것도 있
겠지만 욕하며 닮는다는 아주 못된 후유증에 시달릴 수 있거든요.^^



엄이재윤 :: [2009/03/31] 아무튼 전 제 질문에 도사님의 대답 만큼은 꼭 듣고 싶었습니다.^^
도사님과 같은 훈련된 귀와 컴퓨터 스피커로도 충분히 만족하시는 동철님과 같은 귀를 비교 분석하는 것도 재밌겠다 싶었는데
두 분 다 대답이 없으셔서 좀 냉가슴 앓았었죠..ㅋㅋ



이정동철 :: [2009/03/31] 싸구리 귀의 실력을 보여드리죠.. 그 동안 공부한 통계실력도 발휘해 보구요.. 누가 압축의 quality를 잘 구별하는지 함 해보죠.
제가 들어와서.. 멋진 토론을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네요.. 죄송합니다..



엄이재윤 :: [2009/03/31] 동철님, 그거 매트랩으로 웨이브 화일 비교 분석하고 그러면 안됩니다.ㅋㅋ



이정동철 :: [2009/03/31] ㅋㅋㅋ 6개 다 들어 봤는데.. 다 똑깥아서.. Frequency analysis 해볼려고 했죠.. 들켰다.. 그거 정말 다 틀린거예요? 아~~~ 창피..
다 똑같던데.. 이상하네.. 아무튼 다시듣고 점수 매겨 볼께요.



김세진 :: [2009/03/31] 흠, 도사님에게 살그머니 한 마디 하고 나가겠습니다.
착한 보수와 못된 진보의 차이를 구별하는 게 쉽지는 않은데, 저와 장모님의 경우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최근 문제되는 일제고사의 예를 들면 이를 반대하고 용감하게 체험학습을 시키는 부모들은 분명 보수는 아닐 것입니다.
착한 장모님과 못된 저는 그걸 보는 시각이 다릅니다.
김진홍을 좋아하고 이북 출신이시며 대를 잇는 권사이신 장모님에게는 학교와 교육당국이 시키는 일이니 일제고사는 당연한 데,
이를 반대하고 게다가 무단으로 체험학습까지 시키는 학부모와 학생은 이상한 사람들이고 반대를 일삼는 나쁜 진보입니다.
반면에 그런 아이들에게 무단결석이란 단호한 대응과 교사파면의 엄정한 칼날을 들이대는 당국은 '법'을 지키는 수호자입니다.
장모님에게는 이렇게 보수정부의 '법치'를 비판하거나 찬동하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 저를 포함해서 아주 못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일제고사정책이 만약 노무현 정부하에서 나왔다면 착한 장모님의 이런 태도는 180도 바뀌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장모님에게 노무현과 그 일당은 빨갱이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요. 하는 짓마다 다 반대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못된 저는 장모님의 이런 이중적 태도와 의견에 대해 절대 찬동할 수 없습니다. 결혼 초 10년간은 장모님에게 대꾸하면서
열심히 토론하다가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김종희 기자처럼 무조건 들어주고 맞장구 쳐 줄 여유가 없었으니까요.

도사님은 이런 '착한' 보수와 하루 종일 함께 있으면 과연 맘이 덜 불편할 수 있을까요?



엄이재윤 :: [2009/03/31] ㅋㅋㅋ 김세진 선생님.
저 또한 한때 종부세 대상이셨던 착한 장모님께서 여름에 아이들 봐주시러 저희 집에 오시면
석달 동안 참 힘든 상황이 자주 연출되곤 합니다.
천주교 신자이신 장모님은 정의구현사제단은 두둔하시면서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던 노무현 정부는 죽일 넘들이란 생각을 하시더군요.
유난히도 박근혜를 좋아하시는 장모님을 보면
박정희란 한 사람이 전국민에게 끼친 트라우마가 이런거구나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 미국 학교 가보시곤 참 좋아하시는 장모님께
이거 일년에 제가 6백만원 넘게 내는 재산세에서 얼쭈 반이 이리로 들어가서 그런 겁니다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시더군요.

종부세 대상에 들락날락하던 때에 몇백만원에 불그락 푸르락 하시더니
아파트 몇억 오른건 무척이나 좋아하시는 장모님..

딸 편하라고 김치 냉장고를 하나 사주시고
그 냉장고를 갖가지 김치로 가득 채워 놓으시고
온갖 반찬과 양념들을 몸살나게 준비해 두시고
가실 때 용돈과 함께 아이들을 꼭 끌어 안으시던 장모님.

저도 못된 진보인것 같습니다.



지강유철 :: [2009/03/31] 세진형과 엄이재윤님, 보수의 표리부동과 이중행태에 대해, 그리고 예로 드신 경우에 대해 저라고 생각이 다르겠습니까?
사람 다 똑 같지요? 저는 더 미쳐 날 뛸겁니다. 물론 장모님이나 장인어른께 겉으로 드러나겐 못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제가 22살에 세상을 뜨신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이명박과 노무현에 대해 어떤 감정을 드러냈을까 궁금합니다.
60-70년대, 그러니까 농촌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공화당과 박정희를 지지하던 때 공화당원 되기를 포기하고, 그래서 선관위
관리위원을 하셨던 양반이니 진보쪽일 것 같지만 그거야 모르는 일이겠죠. 만약 똑 같은 일을 이명박이 아니라 노무현이 했
다고 해서 난리부루스를 치셨다면 저는 신앙인으로서 그토록 존경하던 아버님을 향한 존경을 거둬 들였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일찍 돌아가신게 참 복이네요. ㅎㅎ

저라고, 제 주변에 꼭 만나지 않으면 안 될 친지나 가족 중에 보수가 없겠습니까? 당연히 있지요. 그분들에 대해 물론 저는
불편합니다. 피하고 싶고,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슬그머니 자리를 뜨지요. 저의 큰 매형 목사님이 노무현을 죽어라 싫어했
고, 유시민 끔찍해 했습니다. 전 그 분들 설득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설득이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 분들은
그렇게 사시다 죽을 것입니다.

엄이재윤님과 세진 형이 저런 예를 말씀하시면서 제게 뭘 설득하시려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설득할 필요가
별로 없는 사안같거든요. 그걸 제게 열심히 설득하려는 것 자체가 보수와 진보를 똑같이 취급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진보
가 보수보다 훨씬 좋고 건강한 이념이라 생각합니다. 때문에 제게 진보와 보수가 똑같은 위치에서 다툰다는 건 어불성설입
니다. 그래서 저는 저런 문제에 대해 답이 매우 심플합니다. 제 주변의 꼴 보수적인 어른들의 행태를 보이기 시작하면 금방은
속에서 욱하지만 이내 평심을 되찾습니다. 보수가 저렇지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언젠가도 제가 이 홈에서 고백을 했습니다만 저는 진보적인 사람들이 모인 동네에서보다는 보수적인
사람들이 모인 교회 속에서 편했습니다. 초록은 동색이 되어서 편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잘 몰라서, 또는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어서 보수적인 생각을 갖고 살던 애들이 만남에 의해 교육에 의해 변하는 걸 봤습니다. 만약 보수적인 교회에서
주구장창 기저귀발언이나 들었다면, 그것말고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면 저는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보수교단을 때려치고
기장으로 가거나 감리교나 성공회로 갔을 것입니다.

반면에, 제가 살아오면서 가장 진보적인 사람들과 교회 생활을 했거나 운동을 했던 것이 1998년 예수마을교회와 개혁연대
였습니다. 예수마을 교회는 거의 모든 교인들이 지식인 청년들이었습니다. 소위 서울대 출신이 절반을 넘었던 것 같고, 연대
나 이대 출신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모두 선교단체 출신들이었지요. 근데 이제까지 청년교역자로 살았던 25년 동안 그렇게
싸가지 없는 년놈들은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매우 진보적이고 매우 젠틀하시다는 평을 듣는 목사님도 라이센스 따지고
숫자와 자기 체면에 매여서 생각에서는 아니었지만 행동에서는 보수와 별반 다르지 않은 행태를 많이 보였습니다. 역시 개혁
연대에 대해서도 몇번 이야기했지만 제가 사무국장으로 있던 시절에 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우리가 싸웠던 세습하는
교회나 그 교회 무식한 목사나 그 목사를 추종하는 똘만이 장로나 부교역자들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시절 함께 했던 김종희 대표는 저와 생각이 달라서 그건 지강유철 당신이 잘못한 책임이 더 크다 말씀하실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대화였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생각을 바꾸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저는 진보나 보수나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합니다. 경우가 다르겠지만 진보도
서로 다른 의견일 때 죽어라 자기 고집하는 걸 보면 보수의 표리부동이나 절대 바뀌지 않는 거 탓할 처지가 못되더라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저의 경우이고, 제가 경험한 일입니다. 때문에 모든 진보가 다 저와 같은 싸기지 없는 학생들을 양산한
다고 생각지 않고, 모든 진보가 그렇게 자기 생각을 고집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정리합니다. 저는 진보가 아니지만, 아니 진보가 못 되지만 진보에 대한 기대가 보수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그래서 보수 너네 이런 거 잘 못하잖아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좀 쪼잔한 진보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진보든 보수든 얼치기
들은 매우 유사한 형태를 보이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 속에 진보를 표방하든 보수를 표방하든 결코 변하지 않을
사람들은 있다고 생각합니다(저는 이런 사람들이 용산 참사에서 보듯 자기나 자기 식구들이 엄청난 일을 당해서 꼴보수를
버리고 진보로, 운동권으로 거듭나기를 바라야 하는 것인지, 그런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보수로 살아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진보가 되는 것은 좋지만 삶의 터전을 잃고 가족이 죽는 처참한 비극을 맛봐야 그게 가능하다면 그냥 보수로
편하게 살다가 가시라고 말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저의 관심은 그밖에 사람들, 그러니 보수든 진보든 자기를
할 수만 있다면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일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야 할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사람들일지라도 진보나 보수 때문에 저들의 모든 장점에 눈감지 않는 배움의 자세와 여유, 그리고 겸손
이 전제된 당당함을 보고 싶습니다.^^



박충구 :: [2009/03/31] 강의 준비하다가 메모를 남깁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눈으로 보면 진보와 보수는 어디다 기준점을 잡느냐에 따라
보수가 진보가 될 수도 있고, 진보가 보수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수는 현실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편안해 하며 수긍하는 기질이 있고.
진보는 현실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는 점에서 안정성이 적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보는 보수의 눈에 가시가 될 수 밖에 없지요.

하지만 이 홈피 안에서 논의하는 보수와 진보는 다분히 개념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들 내 안에 진보, 내 안에 보수를 가지고 있는 회색이 짙습니다.
어떤 때는 놀라운 진보의 색깔을 보이다가도,
어떤 때는 보수의 정서를 감싸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뭐냐?" 라고 다시 묻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이런 딜레마를 피할 사람을 없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진보나 보수에 대한 사례들이 다분이 극단적이고,
변화를 원하면서도 보수의 정서를 피해 사는 이들이 대부분인 까닭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진보를 다분히 사적 경험과 감정을 가지고 싸잡아 비난하면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걸까?"라고 의심하게 되지요.
진보와 보수에 대한 판단의 기준은 사적 영역보다는 공적 영역에 대한 관심과
싸움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집단의 구조에 대한 분석과 비판,
그리고 정치 경제의 방향에 대한 정책을 묻게 됩니다.
오늘날 미국을 중심한 부유한 나라들의 이익을 전제한 신자유주의 정책,
거기서 파생된 정치 경제 정책들은 사실 약자들로 모인 집단의 희생을 불러오기 때문에
그리고 용산 참사에 대한 언론의 피해자를 재차 가해하는 가학적 논리들이 있기 때문에
진보는 악발이가 될 수 밖에 없어요.

겸손과 희생과 봉사라는 개념은 인간이라면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지켜야 할 인간다움의 조건이지만,
여전히 사적 영역에 의식의 중심을 두고 요구하는 덕목입니다.
그래서 피튀기는 현실을 보고 있는 진보의 시각에는
현실 개입을 꺼리는 보수의 "딴소리"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진보의 장점은 보다 나은 세계라는 공공의 세계를 실천의 장으로 여긴다는 점이고,
이런 인식에 미달하는 이들의 겸손한 몸짓을 간혹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마쵸적이고,
가부장적인 질서를 유지하려는 의도를 버리지 못한
복종의 윤리를 강요하는 것이라고 보는경우가 많습니다.
역사적으로 여성을 종처럼 부려 온 이들이
깊은 회오와 반성과 회개를 하기는 커녕
정서적인 불안을 느끼며 겸손한 태도를 요구하는 아이러니지요.
이런 점에서 보수는 거의 치유불가능한 자기중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보수는 겸손한 적이 없었습니다.
야만의 얼굴을 슨 프랑스 철학자 앙리 레비의 관점에서 볼 때
오히려 여전히 오만하고, 그 오만이 건드려지만 자폭하거나 야만으로 돌변하지요.

이에 비하여 진보는 보수가 보기에는 늘 괴롭히는 오만한 자들로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오만 보다는 합리성에 근거한 비판(나는 비난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보는데,
사실 그 정도를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이 주조를 이룹니다. 그 이유는 태생적
진보가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보수에서 벗어나 진보가 되기 때문이지요.
그 중요한 이유는 보수의 집단 이기성과 시대착오성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 같은 경우, 이런 보수의 문제를 한국적 정황에 맞추어 해석하는 이들이
법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높은 기준을 적용하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에
기준을 잃은 이들이지요. 그러다보니 삼성도 감싸고, 정권에 아부하고,
권력에 휘고, 그 댓가로 기득권을 누리는 데 한국적으로 만족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여기 이 홈피를 드나드는 우리는 "누구?"냐는 질문입니다.
해서 나는 해석의 공동체라고 생각해 봅니다.
하나의 해석을 강요하는 논리보다는
서로의 차이를 좀더 명료하기 밝히는 것, 요구하는 것,
그리고 간혹 그 차이를 이상하게 생각함으로써
서로 배울 수 있는 차이의 공동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이런 담론 공동체가 되려면
영어의 integrity가 요구됩니다. 간혹 전체성, 통전성, 정직성이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는 상대에게 정직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지닌 논리와 가치 판단의 통일성도 요구하게 됩니다.
여기와 저기의 기준이 달라질 때 우리는 그것을 관용이나 너그러움이라고 보지 않고
통전성이 결여된, 정직하지 못한 태도라고 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이런!
내가 또 강의를 하고 있군요.
결론은 이제 서로가 알만큼 알았으니 진보/보수로 나눌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보수 안에 진보가 있고, 진보 안에 보수가 있는 모순들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런 논의를 통하여 스스로를 점검해 볼 의미와 가치는 충분히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여간 그래도 여전히 강자에 의한 약자의 유린이 있고,
약자의 처철한 눈물이 마르지 않는 한,
그런 세계에서 보수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강자를 두둔하는
그런 세상이 지속되는 한 나는 보수를 무서워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