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ugust 22, 2008

77 Questions Young Christians used to raise

젊은 크리스쳔의 77가지 질문 


 여기 저기서 신학을 공부하고, 10여년 목회를 한 후 교수로서 16년째 강의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동안 만났던 여러 젊은 크리스쳔들로부터 질문 받았던 물음들을 정리해 보고 있습니다. 크리스쳔의 삶에는 정확하고 완벽한 답은 없습니다. 그것은 역사와 자신의 사람됨과 그가 처한 정황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갈등과 고민을 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판단과 결정을 위하여 하나의 참고가 될 수 있기 바라는 마음입니다. 

 1.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에서 고민합니다. 

 질문: 교회의 성경공부 시간에는 하나님의 창조를 배우고 학교 생물이나 과학 시간에는 진화론을 배웠습니다. 창조론과 진화론 중에서 어느 것이 맞는 것인가요? 창조론을 받아들이자니 현대 과학을 무시하는 비이성적인 사람같고, 진화론을 받아들이자니 불신앙인이 되는 것 같아 고민입니다. 

 -> 기독교는 오래 동안 과학적 사유를 경원시 해 왔습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천둥과 번개를 하나님이 인간의 죄에 대한 경고와 징계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피뢰침을 다는 것을 일어 불신앙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한 역사적 기록도 있습니다. 종교와 과학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갈등하는 관계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종교 안에 과학이 포함된다고 보지만, 과학자들은 종교적 세계관 안에서 과학적 연구 결과가 경시되고 있다고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구나 종교적으로 가르치는 내용이 과학적 진실에 어긋날 경우 종교성 그 자체의 신뢰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중세 교회는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이라는 주장을 했고, 심지어는 지구가 둥글다는 이론을 주장하는 이들을 종교 재판에 걸어 생명을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과거의 주장을 수정해서 태양중심설이나 지구가 둥글다는 이론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오래 동안 창세기에 담겨 있는 6일간의 창조 이야기를 신학적 이해로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사실적인 진술로 해석해 왔습니다. 생각해보면 창세기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 한분이 창조하시는 세계에 대하여 누군가가 보고 진술하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구약 성서는 기원전 7 세기 경부터 시작하여 3세기까지 기록되었고, 신약성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1세기 안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시간의 제약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성서의 기록은 사실적이기보다는 신학적인 고백적 의미가 중요합니다. 이 세계의 신비를 바라보며 구약 성서의 기자들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그 순간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창조 기사는 사실적인 것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상징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창조와 관련하여 종교와 과학에 관한 논쟁은 지구의 역사에 대한 상이한 견해에서 부딪히고 있습니다. 성서의 기록을 사실로 받아들여 지구의 창조역사는 약 6000년 이라고 보는 젊은 지구론과 과학적 연구 결과 내린 결론으로서 지구의 나이가 약 45억년 되었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특히 창조 과학회에 속하는 분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사실대로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 데 이는 크게 잘 못된 견해입니다. 사실대로 믿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표현한 성서기자의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우상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에 관한 성서의 기록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 고백이 핵심이지 과학적 목격과 진술을 담은 연대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나이가 45억년이나 되었다는 것은 과학적 세계관을 가진 이들이 같은 목소리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오랜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는 계속 이어져 온 것이지요. 그래서 어거스틴 시대에도 하나님의 창조를 일회적으로 완성된 창조라는 생각만이 아니라 지속적인 창조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 세계 속에서 일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해 왔습니다. 지금도 생물학적으로 말한다면 생명계는 끝없는 변이(mutation)가 일어나는 세계입니다. 조금씩 변형되고, 생명의 교잡으로 인하여 새로운 종이 탄생하기도 하며 많은 생명의 종이 사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지구는 인간을 포함하여 약 3,000만 종의 색다른 생명이 살고 있는 생명들의 거주지입니다. 생명계의 종의 변이에 대하여 연구한 사람은 성직자였던 멘델이었습니다. 수도원 뜰 안에 핀 꽃들이 다양한 것을 보고 그 변화를 실험하며 연구했던 것입니다. 이어 촬스 다윈은 하나님의 창조가 아니라 생명이 무기물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하고, 그 생명의 발생과정에서 다양한 생명의 분화가 일어났으며, 그 생명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인간이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이 이론은 비록 과학적인 논증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사실적인 증명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장구한 시간을 걸쳐 일어난 생명의 현상에 대하여 사람의 조그만 머리로 헤아려 보는 것일 뿐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다윈의 진화론이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이론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무신론적인 주장이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기록인 성서를 인용하며 그것을 사실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데에도 무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학적 고백이고, 하나는 과학적 추정일 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가장 현명한 답을 한 사람은 <진화의 신학>이라는 책을 쓴 미국 위싱톤 디시에 있는 죠지타운 대학의 존 호트(John Haught) 박사입니다. 이 분은 하나님의 생명 주권은 지구 45억 년을 걸치며 생명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진화론이 부분적으로 옳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포함하여 진화과정 속에서 창조해 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를 일회적인 사건으로 고백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창조를 수십억 년의 시간 속에서 이루어 오신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 크리스쳔들이 기억하고 마음에 담아 둘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모든 생명을 지으시고 “참 좋았다”라고 하셨던 하나님 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적 과제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깊이 음미하고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하며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보존하여 아름답게 가꾸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구의 역사를 대략 6천년 정도로 보려는 노력은 성서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결과입니다. 이 해석보다는 하나님의 생명과 창조 주권을 45억년의 역사 속에서 고백하는 것이 보다 바른 신앙적이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더 생각해 보고 싶은 분들은 1925년대에 있었던 원숭이 재판에 관한 자료들을 찾아 잃어 보시기 바랍니다. 젊은 지구론을 주장하는 것은 과학적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있는 오늘의 세계에서 지적 타당성을 상실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의 질서와 법에 대하여 받아들여 온 전통을 가지고 있는 로만 가톨릭 교회는 이런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2. 질문: 성서의 경전적 권위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성서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일점일획도 잘못이 없다고 배웠는 데 요즈음에는 성서에도 많은 오류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불신앙인가요? 

 -> 성서의 권위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는 다양합니다. 기독교인은 성서를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입니다. 계시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열어 보여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계시를 독일어로 Offenbarung 이라고 하는 데, 이 말은 offen (열다) + beren (보다) 이라는 단어를 복합한 것입니다. 즉 성서는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열어 보여 주시는 사건이 일어나는 말씀인 것입니다. 성서를 읽음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을 받는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비록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만 성서는 천상의 언어와 손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 아니라 사람의 언어와 손에 의하여 쓰여졌습니다. 이런 까닭에 4세기 경 성서가 경전으로 확립되기 이전에는 여러 가지 성서 사본들이 있었고, 그 사본들 중에서 추려 뽑아 가장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가 있는 것을 모아 기독교의 경전(canon)으로 결정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다고 믿지만 이런 과정은 성경이 가지는 권위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교회가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던 시절에는 누구도 성서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회의를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런 행위는 신성모독적인 것으로 규정되어 심한 경우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화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가진 사법권은 현대 세계에서 종교 집단의 규정으로 제한되어 사법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향에 따라 성서의 절대권위를 주장하는 입장이 많아 약화되었고, 마침내 19세기 초를 지나면서 보다 합리적인 성서 해석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성서 본문은 여러 사람에 의하여 편집되기도 했고, 저자에 따라 형식이 다르기도 했으며, 성서의 본문 중에는 서로 충돌하는 내용들이 있다는 문제가 지적되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의 인간 창조 기록도 창세기 2장과 3장의 기사가 다소 다릅니다. 이런 비판에 더하여 현대에 와서는 성서에 담겨진 비윤리적인 지침들에 대한 비판도 일어났습니다. 구약성서의 일부다처제, 노예제도, 성차별주의, 가부장주의, 그리고 배타적 민족주의, 종교적 이유로 사형을 가하라는 지침, 어린아이와 여성들의 인권을 무시하는 이야기 등이 문제가 된 것이지요. 

만일 성서의 권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위에 언급한 비윤리적인 행위들이 모두 정당화될 수 있고, 이는 매우 반사회적이고 비윤리적인 위험한 행위를 도발할 수도 있습니다. 극단적인 성서주의의 폐해는 무시무시합니다. 미국에서는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는 이들이 성서에 “동성애자”들을 죽이라는 말씀을 비장한 신앙적 결단으로 실천하기 위하여 사람을 죽인 경우도 있고, “피를 흘린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라“ 라는 구약성서의 보복의 윤리를 실천하기 위하여 인공유산 시술을 한 의사를 살해한 기독교인도 있었습니다. 

초기 교부중 오리겐이라는 사람은 성서에 “스스로 고자된 자도 있느니라” 라는 말씀을 실천하기 위하여 자신의 성기를 자른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는 비상식적인 극단적인 것이지만 지나친 성서무오설을 주장하며 문자주의를 주장하면 기독교 신앙이 해로운 결과를 초래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성서문자주의는 성서의 권위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오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를 가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서의 문자 그 자체가 권위를 가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비록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인간의 손과 언어를 빌려 썼기 때문에 성서 저자의 시대적, 문화적 가치와 습속이 덧칠해져 있습니다. 즉 성서 본문 중에는 그 시대의 문화와 가치와 규범이 담겨있어서 문화적으로 제약되어 있는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구약성서에 흐르고 있는 유대 민족주의는 하나님 신앙을 유대인만을 위한 배타적 원리로 적용했지만, 예수님은 그 민족주의와 배타주의를 넘어서 하나님 신앙을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구약 성서는 보복의 윤리(ethics of retaliation)를 가르치고 있지만 예수님은 보복의 윤리가 아니라 사랑과 평화의 윤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구약성서의 가르침을 수정하셨습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신구약 성서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권위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주석이나 해석을 통하여 성서의 권위를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런 해석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강단에서 외치는 성직자들의 말씀의 증언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달함으로써 말씀의 권위를 행사하지 않고 그 말씀을 오늘의 시대에 적용하여 해석함으로써 하나님 말씀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목사님들의 말씀의 해석을 일러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선포라고 받아들입니다. 

 문자적 해석에 성서의 권위를 둘 경우 우리는 이단사설에 빠질 수도 있으므로 신학적인 훈련을 받은 성직자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문자주의적 성서읽기는 위험하기도 하고, 우리를 그릇된 신앙에 빠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학적으로 해석되어 읽혀져야 하고, 그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우리는 우리의 이성, 경험 그리고 교회의 전통에 비추어 보다 바른 해석을 해야 합니다. 신학적으로 바르게 해석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3. 질문: 요즈음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하면서도 목사님이 주인인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습니다. 심지어 목회 직을 아들이나 친인척에게 물려주는 경우들도 생겨 사회적 물의를 빚는 경우도 흔치 않습니다. 교회란 무엇이며 교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 교회(ecclesia)의 본질은 밖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의미를 가지는 희랍어 단어가 그 의미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불러내신 회중이라는 의미가 교회라는 희랍어 단어가 밝혀주고 있는 뜻입니다. 신학적으로 본다면 교회는 세 가지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첫째가 종교개혁 이전까지 형성된 제도(institution)로서의 교회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가톨릭교회가 가져온 개념인데 교회의 본질을 성직자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직자가 행하는 성례전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고 보기 때문에 평신도들은 교회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성직자들이 교회의 종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대신하는 제도적 교회를 이루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점에서 가톨릭교회는 성직자가 없는 곳에서는 성례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미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들은 성례를 행하고 온전히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독신을 서약하고 살아갑니다. 이런 점에서 가톨릭 교회는 성직자와 평신도간에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직자들은 교회의 법과 질서를 따라 사는 순명의 길을 걸아야 합니다. 이에 비하여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제도에 두지 않고 성도들의 공동체라(영: Community, 독: Gemeinde)는 의미에서 제도성보다는 공동성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해 왔습니다. 

이와 동시에 가톨릭 교회가 주장해 온 일곱 가지 성례( )에서 성서적 근거가 희박한 다섯 가지는 버리고 두가지만 성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또한 성직자들을 거룩한 존재로 여겨 독신을 요구했던 전통을 버리고 성직자도 ‘평신도와 다름없이 하나님의 은총없이는 설 수 없는 죄인‘으로 생각하며 결혼을 하도록 허용했습니다. 그러므로 개신교 성직자는 교회를 돌보는 공적 책임만이 아니라 가족을 부양하고 돌보아야 하는 한 사회인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교회를 섬기는 일과 가족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이 아름답게 겹쳐질 경우 덕스러울 수도 있지만 목회직이 하나의 권력과 부의 상징이 될 경우에는 가족간의 관계가 친족호혜주의(nepotism)에 빠져 부덕한 결과를 불러 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직 세습은 돈을 주고 성직을 사는 행위(simonism)와 더불어 교회가 경계해야 할 오류라고 보았던 전통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류 개신교단들이 가지고 있는 교회론의 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적인 전통을 더욱 성서주의적으로 밀고 나간 소종파(퀘이커, 메노나이트, 제세례파 등)들은 종교개혁이 교회를 개혁하면서 정치적인 개혁을 하지 못하고 교회의 자기보존의 이기성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면서 더욱 급진적인 성서적 공동체를 지향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그들의 신앙 공동체 안에서 제도적 직위를 모두 제거함으로써 평등 공동체가 세워지기를 원했고, 정치적 강제와 권위의 오용이 일어나지 않도록 권위적 행위나 정치적 행위를 제거한 평화로운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하여 소종파 신앙의 고나점에서 교회를 본다면 이는 철저히 평등과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지만 이런 소종파적 신앙은 신앙인의 개인적 결단과 선택을 중요하게 여기고, 정치적 세력화나 경제적 이익에 관심을 두는 삶의 틀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점에서 대중성이 떨어져 소수의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세가지 관점에서 본다면 오늘의 한국 개신교인들의 대부분은 개신교적 전통안에서 신앙을 가진 이들이라 할 것입니다. 개신교회의 본질은 성직자 우선주의나 제도주의에서 벗어나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 가능성을 긍정하는 데 있으므로 크리스쳔 개인의 신앙과 결단이 매우 중요해 집니다. 이를 개신교에서는 만인 사제직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또한 개신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에 의하여 죄로부터 해방을 받은 이들로 구성된 성도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공동체 안에서 최대한 평등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갈 책임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개신교회는 성직자들에게 모든 결정권을 맡기지 않고 당회, 교인총회, 혹은 공동의회와 같은 회의에서 중요한 사안들을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교회가 성직 세습으로 여겨질 만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면 교회의 민주적 절차와 과정에서 그 윤리성을 판단할 문제입니다. 성직자들에게 지나친 권위와 결정권이 주어진 대형 교회의 경우 이 절차와 과정에 성직자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매우 크고, 또한 대형 교회일수록 그 교회가 가지고 있는 전통과 성향에서 안정감을 지키려는 결속력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가지고 있는 민주적인 절차와 과정이 존중되는 가운데에서 중요한 사안이 결정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며, 신자의 책임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지만 그 교회의 미래를 결정할 책임은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문제이든지 그 교회가 결정한 내용을 미루어 그 교회의 성격을 판단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성직세습이라는 물의를 일으키는 대형 교회들을 살펴보면 신자들이 교회의 주요 결정사항에 대하여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와 관계가 적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들이 담합하여 중요한 결정을 유도할 수도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한국 교회 안에서 소수인의 이익관계가 교회 내 결정과정에 개입할 수도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문제는 신앙 공동체과 그 구성원의 참여와 책임에 관한 이해에서 우리들의 자화상 혹은 한국 기독교의 성숙도와 관련된 문제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전근대적인 권위주의가 성행하고 있는 교회에서는 성직자에게 주어진 권위가 너무 커서 남용되어나 오용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따라서 민주화된 교회일수록 목회자의 전횡이 적고, 비민주화된 교회일수록 목회자들이 권위를 오용하고 남용할 가능성이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유럽 교회들에게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참된 하나님의 교회는 영원히 설 것이지만 인간의 이해관계가 얽힌 교회들은 장구한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걸러지고 무너질 교회들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역사적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