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인들이 세운 마카오성에서>
오늘 이현주 목사의 글을 읽고 60이 넘은 그가 가진 아기같이 착한 마음을 본 듯하여 반가웠다.
이 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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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는 어디에나 있다.
교회 안에도 있다. 이상한 일이지만 사실이다.
삼가 조심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그러나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가짜를 분별하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는 말에 속지 말고,
그들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음식을 먹으며 어떤 집에 살고 있는지를 찬찬히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수상하면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
기도 : 주님, 이 바쁜 세상 살면서 가짜한테 속아 허송세월하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주님, 가짜한테 속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저 자신이 가짜가 되는 일만큼은 결단코 없어야겠습니다. 부디 저를 지켜주시고 조금이라도 그럴 기미가 보이거든 가차없이 일깨워주십시오. 제가 저를 비우고 그 자리를 당신으로 채우면 가짜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으리라는 것, 잘 압니다. 모든 일에 저를 앞세우지 말고 당신 뒤에 서도록 주님, 저를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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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곳 저곳을 여행하며 벽을 만날 때가 있다. 성주들이 살던 곳에는 여지없이 벽이 있다. 그리고 부자들이 사는 동네의 벽은 참 높다. 험하게 철조망도 치고 어느 곳에는 유리조각들을 심어 놓았다. 자기를 지키기 위하여 사람들은 벽을 쌓는다. 그래도 그들은 그 어느 곳에 문을 만들어 둔다. 그 벽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기 위해서다.
나는 가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는 사람을 본다. 그는 마치 아주 다시는 그 자리에 오지 않을 것처럼 자신의 길을 스스로 막아버리는 사람이다. 이런 이들은 작별의 예식이 아름답지 못하다. 그러나 삶의 긴 여로를 걷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이 스스로 막아 놓은 길에 막혀 스스로 갇히고 마는 경우를 본다.
우리 작별을 한다면 아름답게 하자. 다시는 보지 않을 사람처럼 배반하지는 말자. 배반은 스스로의 길을 막는 것, 그리고 훗날을 생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제 아무리 분노가 치밀어도 스스로의 길을 막아버리고 떠나지는 말아야 한다. 비록 자유와 정의를 위한 싸움에 나설지라도 사람과 싸우기 보다는 제도와 싸우자.
그 어느 누구를 향해서도 평화를 선언하는 것, 그것은 물이 흐르듯 어느 곳으로나 스스로의 자유를 개방하는 것이리라. 누군가가 쌓아 놓은 높은 벽을 바라보며 나는 스스로를 지킨다는 것은 곧 스스로를 가두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넓은 세상을 모두 자기만의 벽으로 쌓고 숨어 살 수는 없는 일이니 자유롭게 살려거든 벽을 쌓지 말 일이다.
Saturday, November 10, 2007
Do not build a well against your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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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ee scenes you can notice the real face of a person...
<사진: 마카오의 예수, 마카오 어느 성당에서>
얼핏 스치는 세 가지 순간에 대하여
나는 무심코 얼핏 스치는 순간으로 인하여 깊은 실망이나 반가움을 경험한 적이 있다. 아마도 가장 자연스러운 그러면서도 본색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정중한 예의가 비치는 순간, 깊은 동정과 연민을 드러내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잔인한 품성을 드러내는 순간, 상식과 예의를 버린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야만적인 기색이 연연한 순간, 역겨움을 드러내는 순간 - 교양과 체면과 허위의식으로 꾸미고 있던 표정에서 본색을 드러내는 순간이 있다. 감추고 싶은 모습이지만 감추어 지지 않는 순간이 있는 법이다. 자신의 인격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런 순간 자연스러움이 허식이 아니라면 그는 참으로 온전한 인간이리라.
어느 평론가의 글에서 읽은 내용이다. 사람의 인격을 판단할 수 있는 세 가지 순간이 있다 한다: 첫째는 먹이가 걸려든 순간, 둘째 작별할 때, 셋째 적이 급소를 보였을 때이다. 진지한 인격은 자기 먹이를 양보하고, 초면의 친절보다는 작별의 예의를 중시하고, 상대가 급소를 보이면 전의가 연민으로 바뀐다. 그러나 비열한 인격은 자기 먹이를 절대 축내거나 양보하는 법이 없으며, 초면의 아첨을 작별의 순간 적의로 돌려놓고, 상대가 급소를 보이면 이쑤시개로라도 찌르고 만다 한다. 재미있는 이야기다. 이 판단의 순간들은 우리의 일상에 가리어져 비열함과 진지함의 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인격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적 통찰에 의하면 개인이 가진 가치 판단의 습성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삶의 연장선을 길게 그어보면 곧 진면목이 드러나게 된다.
우정과 사랑을 나누다가도 어느 순간 배반과 실망을 거쳐 적대적인 관계로 돌입하는 경우를 허다하게 경험하게 되면 진지한 인격은 자기 스스로의 인격에 허물이 있는지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비열한 인격은 상대의 허물을 들추어냄으로써 자기를 변명한다.그렇다면 기만과 거짓 앞에서 자기반성과 비열한 공격의 차이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진지한 인격은 기만자의 기만을 들여다보면서도 그에 대하여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비열한 인격은 거짓과 조작을 일상화함으로써 자신의 본색을 감춘다. 진지함과 비열함의 차이는 그러므로 인간관계에 대한 인간적인 관심을 가진 이인가 아닌가에서 드러난다. 진지한 인격은 거짓을 들추어냄에 있어서 고통스러워하고 미안해 하지만, 비열한 인격은 거짓을 지어내면서도 미안해하지 않는 것이다. 한 편은 서로를 존중하는 인간으로서 남아야 할 이별의 예식을 준비하지만 다른 한 편은 적의를 던짐으로써 상대와 자신의 인격을 깊이 훼손한다. 진지한 인격은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의 인간다움을 지켜주려 하지만, 비열한 인격은 피해자의 인간다움을 무참히 짓밟는 동시에 자신이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가해자로 몰아놓고 마침표를 선점함으로써 약삭빠르게 상황의 종료를 선언한다. 그리함으로 심리학적인 폭력을 가중시킨다.
간혹 인간다움의 핵심은 이성적 합리성이라고 한다. 이성적 합리성이란 자신의 감정과 행위에 대한 합리적 설명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술에 취하거나 마약에 취하는 이들은 이성적 합리성을 상실하지만, 정신이 올바른 사람은 이성적 합리성을 무시할 수 없다. 진지한 인격은 자신의 신념과 이해능력을 동원하여 상대를 설득하려 하지만, 비열한 인격은 합리성보다는 폭력적 수단을 동원하여 상대를 제압하려 든다. 폭력적 수단에는 물리적 폭력, 관계적 폭력, 심리적 폭력 그리고 제도적 폭력이 있다.이성적 합리성이란 개인이나 집단이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이성적 합리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충동과 욕망과 탐욕에 의하여 합리성이 지켜지지 않을 때 우리는 폭력을 동원함으로써 비합리적 욕망충족을 기하는 비열한 인격이 되던지, 혹은 폭력을 정당화함으로써 비합리적 정황에 대처한다. 그러나 나는 양자가 모두 폭력적 방법에 의존하여 합리성의 회복을 기한다는 점에서 진지한 인격을 유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폭력적 방법은 인간 행위의 인격적 진지함을 수용하지 못한다. 오히려 인간의 이성적 합리성에 의하여 모든 인간이 시행할 수 있는 행위의 도덕성을 평준화시킨다. 이성적 합리성이란 간혹 "너도 나도 공유하고 있는 비열한 욕망과 탐욕과 쾌락과 만족"조차도 합리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도 하는 까닭이다. 이 점에서 임마누엘 칸트의 도덕률은 높은 덕스러움과 진지한 인격을 지원하지 않는다. 합리적 보편성이라는 공통분모를 수용함으로써 간혹 폭력적인 비열한 행위들을 예찬하게도 하는 까닭이다.그러므로 진지한 인격은 자신의 욕망충족의 논리를 합리화할 경우 덕스러움과 인간다움의 품위를 포기하고 비열함을 수용하게 된다. 정당방위의 논리를 사용하며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치명적 약점을 골라 외과(外科)적 폭격을 가하는 미군의 이라크 폭격의 비열함을 정당화하는 교회의 정당전쟁 이론은 바로 이런 오류를 수용한 까닭이다.
이로써 상대를 비합리적인 존재로 만들어 가면서 가하는 폭력의 순진한 희생자들이 있어도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보편적 합리성은 어쩌면 인류를 평균치로 절개해 낸 도덕성 이상을 옹호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덕스러움이란 조소의 대상이거나 영웅적인 것으로 예찬되기도 한다. 덕스러움의 영웅적인 행위는 결국 영웅이 아니고서는 행할 수 없는 완전주의적 결벽증의 산물이라 폄하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편적 가치란 간혹 우리의 고결한 사랑을 지켜내도록 돕기 보다는 평균치적 욕망과 쾌락에 집착하게 함으로서 사랑의 아름다운 향기를 일순간 무가치한 것으로 폄하하는 쾌락과 욕망의 유혹을 패스시킨다.
어느 신학자가 모든 사랑은 정당하다고 선언을 했다. 과연 그럴까? 합리성의 유혹에 빠지면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더 큰 쾌락을 얻기 위하여 진지한 인격적 사랑을 포기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모든 사랑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때 말하는 사랑은 한 얼굴의 인간으로서는 견뎌내기 어려운 부하가 걸리는 배반과 기만과 거짓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격적 신뢰를 배반당하고 기만당한 이의 주장이 아니라 배반하고 기만한 이의 평균치적 도덕성이 낳는 불행한 결론이다.그러므로 합리적인 사유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다만 평균치의 남남북녀(南男北女)의 논리를 후원할 뿐이다.
따라서 간혹 합리적 사유는 종교적인 삶의 가치를 부인하는 행위로 우리를 유도한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의 도덕 철학은 비종교적인 것이며 궁극적으로 종교적 이상을 이성적 합리성속에 가둔 논리이상이 아니다. 여기서 나오는 평화론은 인간 개인과 집단 간에 상호억제를 가능하게 하는 자율성이 작동하는 경우만 논리적으로 가능하지만, 실인즉 평화가 깨진 정황에 직면하면 지극히 무책임하다. 즉 비열한 인격이 산출하는 폭력 앞에서는 한없이 무능한 것이다.따라서 나는 비열함을 긍정하는 합리적 도덕성의 폭력을 승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비록 현실이 어둡고 침침하다 할지라도 비열함을 거절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합리성에 근거한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종교적 직관과 체험에서 나오는 법열(法悅)이나 사랑의 힘을 믿는 데 있다.
그러므로 종교윤리는 이성적 합리성에서 스스로를 해명하지 않는다. 다만 종교적 직관과 체험에서 주어지는 imperative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든 생명이 아름답고 귀하다는 믿음은 합리적 판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판단이다. 만일 사랑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려면 모든 사랑이 아니라, 오직 진지한 인격에서 나오는 사랑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수정해야 한다. 비열한 인격에서 나오는 사랑과는 달리 진지한 인격에서 나오는 사랑에는 가슴 저미는 양보, 상대의 치명적 약점을 가려주는 동정과 연민이 있어 아름답다. 진지한 인격을 버린 비열한 사랑은 자기만족의 먹이를 양보할 줄 모르고, 작별의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 다만 치밀한 쾌락의 경제론에 스스로의 진지한 인격을 팔아 가지게 되는 아첨과 비열함의 두 목소리를 갖추었을 뿐이다.
예수는 떡 그릇에 함께 손을 넣는 유다의 손을 바라보면서 연민을 느낀다. 십자가에 달린 그를 찌르는 로마 군병들의 창에 찔리면서도 그는 그들을 향한 용서를 빈다. 이 예수에게서 우리가 구원을 경험하는 것은 이성적 합리성에 따른 결론이 아니라, 그에게서 참된 인간을 본 까닭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 예수가 우리에게 요구한바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라는 요구를 번번이 거절한다. 우리의 합리성이 해명하는 "인간다움"에 우리의 신앙을 불행하게도 볼모 잡힌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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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to Okinawa, another Japan

<사진: 오끼나와의 恨의 碑>
오끼나와를 다녀와서
오끼나와를 다녀오기 위하여 집을 나설 때에는 마음이 무거웠다. 비행기를 타는 것이 많이 귀찮고, 또 오끼나와의 평화 운동가들이 미국의 거대한 밀리터리즘과 맞서 싸우는 모양이 편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타이페이를 거쳐 오끼나와 나하 공항에 저녁 시간에 도착했다. 타까시 미즈노씨가 공항에 마중을 나와 우리는 반갑게 5년 만에 해후하였다. 그는 평화봉사단원으로 일본에 왔던 영국 퀴이커와 결혼하여 그의 삶 대부분을 필라델피아 접경 뉴져지에 있는 농장에서 평생을 산 사람이다. 가을 농사를 끝내면 오끼나와로 돌아와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친구들과 사귐을 가지다가 겨울이 다가오면 다시 뉴져지로 돌아가는 일을 수년 동안 하고 있다.
그를 알게 된 이후 그는 미국 퀘이커들의 인종갈등 위원회의 회원으로 봉사하면서 그가 겪는 일들을 내게 늘 알려왔고, 오끼나와 평화 운동가들의 활동에 대한 자료들을 보내주었다. 이런 인연들이 있어서 그가 이번에는 오끼나와의 현실을 보고 그곳의 평화운동가들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을 한 것이다. 오끼나와는 생각보다 덥지 않았다. 상쾌한 바닷 바람이 불고 거리는 깨끗했다. 하늘은 구름으로 덮여 있었지만 이곳저곳의 숲들은 매우 평화로워 보였다.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타까시와 함께 인근 식당에서 식사를 한 후 우리는 조용한 찻집에서 오래 환담하였다. 퀘이커 영국인과의 삶에서 그가 경험해온 일들에 대하여, 삶과 죽음에 대하여, 그리고 평화운동에 대하여 우리는 의견을 나누었다. 나는 나의 “theology of dispowering" 대하여 나의 생각을 나누었다. 오끼나와에 머무는 동안 그는 비폭력 평화주의 운동과 권력지향성의 포기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여러 차례 depowering 혹은 dispowering에 대한 이해에 대하여 되물었다.
둘째 날 아침 일본 오끼나와 평화단체의 젊은 멤버인 지에가 자동차를 가지고와 하루 종일 오끼나와를 함께 둘러 보게 되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후 일본으로 돌아와 직장 생활을 하면 평화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조용하고 예의바른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끼나와의 구석구석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먼저 카데나 미 공군 기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우리나라의 오산 미군 비행장이 있지만 이곳 기지는 실로 엄청나게 큰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자동차로 근 삼십분을 가는 동안 우리는 여전히 한쪽이 철조망으로 가려진 기지 주변을 달리고 있었다.
미군이 오끼나와로 진주할 때 일본 정부는 오끼니와 주민들에게 포로가 되어 수치를 당하지 말고 자살할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무사들은 해변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나와 서로 죽였고, 많은 이들이 바닷가 절벽에서 투신을 하였다 한다. 국가주의가 국민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다. 일본 문부성은 이 사실을 역사 교과서에 기록하는 것을 방해하고, 심지어는 역사에 대한 서술을 점점 줄여 최근에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종전을 앞두고 오끼나와인들의 대량 학살과 자살을 불러왔던 천황의 명령에 대한 역사적 기록 자체를 말살 은폐하려 하고 있다. 이런 사실에 항거하여 오끼나와 전체 인구의 10%가 넘는 10만명 이상이 모여 시위를 했던 사실을 지애가 설명해 주었다.
일본 본토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오끼나와의 사람들은 일본 군국주의와 군사주의의 희생물이 되어 온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하며 일본의 재무장, 일본의 우파 국가주의를 매우 강하게 비판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국의 정부에 의하여 버림을 받고 죽임으로 내 몰린 세대들의 비극을 그들을 가슴에 묻고 있는 이들이기도 한 까닭이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한국인들의 전쟁 성노예나 강제노동으로 끌려온 수십만의 한국 청년들의 고통을 쉽게 알아보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 본토보다 한국인들의 억압과 수탈의 경험에서 자신들과의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 같았다. 더구나 오끼나와 섬의 10분의 1을 미군에게 내주어 아시아에서 가장 거대한 미군 기지를 세우게 한 일본정부는 수백명의 오끼니와 인들이 대대로 살아오던 땅을 강제로 빼앗아 미군에게 내어주었다며, 타카시는 아직도 보상받기를 거절하고 농토의 반환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나는 평택 대추리가 바로 이런 과정에 편입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끼나와 지방 정부에서 지었다는 반미군기지 운동본부 건물에 올라가 카덴나 미 공군기지를 내려다보니 광활한 평야 위에 무수한 바라크들이 그리고 전투기 격납고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활주로에는 B29 폭격기가 항시 대기하고 있고 무수한 전투기들이 이착륙을 하고 있어 수시로 굉음들이 하늘을 갈랐다. 지에로부터 시도 때도 없이 수시로 이륙하는 비행기 소음으로 인해 오끼나와에서는 여름에도 집집마다 문을 닫고 살아야 하는 답답함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외부의 공격에 대비해 수시로 사이렌을 울려대는 바람에 늘 소음에 시달리며 사는 오끼나와 인들의 분노를 나는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일본정부의 묵인아래 행해지는 미군 병사들의 치외 법권적 범죄는 오끼니와인들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주었다.
무려 60년이 넘게 지속되어온 낮선 점령군인 미군들과의 강제 동거는 무수한 오끼나와 여인들의 강간과 성희롱를 불러와 오끼니와인들에게 수치를 안겨주었고, 일부 가난한 오끼나와 여성들은 직간접적인 미군들의 위안부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거대한 미공군 기지와 유류 저장소를 바라보면서 엄청난 제국의 폭력의 힘을 느꼈다. 제국주의는 거대한 무력을 드러내 보이는 것만으로도 피지배자들의 자발적인 복종과 협력과 동의를 얻어낸다는 알렌잔드로 콜라스의 제국의 질서 개념이 떠올랐다. 누가 감히 초현대 무기로 무장한 이 거대한 공군 기지를 향하여 싸움을 걸겠는가? 오끼니와 인들의 좌절이 느껴져 내게도 깊은 억압의 감정들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제국은 강한 강제력으로 복종과 동의를 유도하고 자신들의 질서로 정복자들을 편입시키므로 토착민들의 자유와 희망을 빼앗는다. 간혹 이들은 안전을 보장한다는 명분으로 우리의 안전을 송두리째 자신들의 질서 개념에 볼모잡는 것이다. 자동차를 타고 그곳을 떠나오는 동안 끝없이 쳐진 긴긴 철조망을 바라보면서 도무지 저 철조망에서 벗어나지 못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마치 내가 미군들의 철망 안에 갇힌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이어 지애와 타까시는 나를 “한(恨)의 비(碑)“로 안내했다. 일본군에 징용으로 왔던 한국의 젊은이들의 죽음, 강제노동으로 불러온 무수한 조선인들의 죽음, 그리고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온 조선 여인들의 한을 기억하며 이곳 오끼나와 평화 운동가들이 세운 ”한의 비”이다. 골목마다 오래 전에 붙여 놓았을 것 같은 낡은 안내판이 바람에 흔들거리고, 키 높은 갈대들이 부는 바람에 스산하게 머리카락을 날리는 듯한 둔덕을 지나 공동묘지 지역으로 들어갔다. 휘휘한 버려진 숲, 화산재들이 엉켜있는 둔덕 한 편 커다란 나무 밑에 한의 비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이 일본 땅에서 일본 군국주의에 의하여 생명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인간의 존엄이 짓밟혀 죽어간 오빠들과 누나들의 한이 엉켜있는 큰 덩어리를 보는 듯 했다. 나는 묵념을 한 후 한의 비 옆에 새겨진 시를 큰 목소리로 읽었다.
이 시는 아사토 에이코씨가 쓴 것이다. 일부만 옮긴다.
....
오끼나와 사람들은
아직도 군화에 짓밟힌 채로 있는
오빠 언니들의 영혼에
깊이 머리를 숙인다.
일본군 성노예로서 짓밟힌 언니들
징용자로서 희생당한 오빠들께 깊이 머리를 숙인다.
머지않아 굳게 맺힌 봉선화씨가 터져
서로 바다 건너 꽃피우기를 믿으며
오빠언니들이여 그대들이 겪어 오신 고난을 전해가며
지구상에서 전쟁과 군대를 뿌리 뽑을 것을
이 땅에서 돌아가신 오빠언니들의 영혼 앞에서
우리는 맹세한다.
화산재들이 엉킨 땅 한 편에 누운 듯 세워진 한의 비를 바라보면서 나는 약소국 국민의 서러움과 더불어 한 인간으로서의 못다 산 삶의 한을 깊이 느꼈다. 둔덕에는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고 있었다. 이 한의 비 앞에서 타카시는 오끼나와 인들이 이 한의 비를 세운 1 주년을 기념하며 만든 자료집 “희망(希望)”을 내게 건네주었다. 서문을 보니 “일본은 아시아태평양 전생과 오끼나와 전쟁 당시 조선반도에서 100만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강제 연행했으며, 이들을 일본군의 성노예로, 혹은 전쟁을 위한 일꾼으로 노역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우리는 사람이 찾지 않아 잡초가 무성한 둔덕을 내려와 차를 타고 오끼나와 인들의 대량 자살로 몰고 갔던 벼랑가에 세워진 등대로 향했다. 미군이 오끼나와에 상륙하기 직전 천황의 명에 의하여 어른들은 스스로 자결할 수 없는 어린 아이들을 죽이고 자신들은 자결하거나 해변 벼랑에서 몸을 던져 죽음을 택했던 곳이다. 우리는 해변으로 향하는 넓은 사탕수수 밭을 지나 흰 물보라가 날리는 화산암이 널리 펼쳐진 해변에 도착했다. 등대에 오르니 양편으로 해안이 검게 펼쳐져 있고 거대한 바다는 흰 물보라를 흩으며 요란하게 파도를 벼랑으로 내 몰고 있었다. 지에는 바로 저 곳에서 많은 오끼나와 인들이 투신을 강요받아 온 가족들이 죽음으로 내몰렸던 곳이라고 일러주었다. 바라보기에도 무서운 검은 벼랑에 선 그들이 도대체 무슨 힘에 의하여 자신들을 바다로 내 던질 수 있었는지 생각하니 한없는 참담함이 울컥 목을 메운다.
때 마침 오끼나와 섬에서는 축제의 날이 시작되었다. 그 현의 시의원이자 평화운동가인 쇼이치 지바나씨를 만나니 손수 구운 고구마를 건넨다. 그는 타카시의 친구이기도 하다. 고구마 속이 자줏빛 푸른색이어서 신기했지만 맛은 동일했다. 그는 젊은 축제 때 국기 게양대에 달려 있는 일장기를 떼어내 불태웠던 사람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지방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이 되었으니 오끼나와 사람들이 일본의 국가주의에 동조하지 않는 성향을 다소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집에서 잠을 자고 아침식사를 나누며 오끼나와 평화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평화운동은 평화가 아닌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운동이라고 했다. 나는 그와 대화를 나누며 오끼나와 인들을 향한 미군에 의한 대지의 점령, 하늘의 점령, 그리고 의식의 점령을 느꼈다. 그들의 조상 대대로 농사짓던 땅을 몰수 당하고, 맑고 아름다웠던 평화의 섬 오끼나와 하늘은 미군 전투기들의 무대가 되고, 수시로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그들의 일상의 의식을 정지시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신지체인 딸을 두고 있었다. 그녀는 스물이 넘은 나이임에도 지능은 매우 낮아 어린 애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사람이란 불행 할 수록 불행한 이를 헤아려 알아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바나씨는 지체아를 둔 불행을 넘어 미국의 군사주의에 의하여 점령된 오끼나와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싸우는 일에 앞장서왔다. 무수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없을 때 그는 이 싸움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지만 멈출 수 없는 싸움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의 평택 대추리 사람들 소식을 듣고 알고 있다며 내일 한국에서 반미군기지 운동을 하는 이들이 일주일간 오끼나와를 방문하기 위하여 그의 집으로 온다고 한다. 이곳에 와 보니 미군기지가 남기는 오끼나와 인들을 향한 보이는 보이지 않는 피해가 참으로 막대하다는 것은 느꼈다. 평택에 미군기지가 건설되면 그 땅에서 우리는 또 어떤 곤경들을 겪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 온다.
그 집을 떠나려니 지바니 씨의 어머니가 손수 만든 전화기 링을 두 개 건네주며 하나는 옥상에게 가져다주라고 하신다. 한국의 어머니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는 차이보다 같음이 더 많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어 오끼나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예배 후 가진 대화모임에서 나의 강연과 대화가 이루어 졌다. 교회에는 약 2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였는데 대부분 나이가 든 분들이었다. 그 중에는 영어를 하는 분들이 여러분 계셔서 내심 놀랐다. 나의 영어 강연을 일본어로 통역한 분은 그 지방 대학의 교수였다. 사람마다 자기를 소개하며 오래된 친구같이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모임 이후 그들은 한결 같이 한국의 드라마에 대하여 이야기했고, 드라마 덕분에 누구나 한 두마디씩 한국말을 하고 있었다. 아시아 어디를 가나 한국 드라마는 늘 화제거리가 되곤 한다.
오끼나와를 떠나기 전 타카시는 나를 토착 영화관으로 데리고 가서 내게 일본 단편 영화를 보는 기회를 마련했다. 주일 오후라서인지 영화관은 거의 만원이었는 데, 상영되는 영화들은 아마츄어 작가들이 만든 것으로서 그 주제는 평화였다. 거친 언행과 무력을 사용하는 편과 평화스러운 태도와 언어와 행위를 하는 이들 간에 일어나는 에피소드들을 엮는 것들이었는데 매우 인상적이었다. 폭력을 가하는 이에게 비폭력적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장면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폭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더 큰 폭력을 사용하는 우리의 일상의 허를 찌르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장면을 어린 소년의 눈으로 읽어내고 있었다.
공항에서 타까시와 헤어지면서 우리가 또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지는 못하지만 언제 어디에서든지 다시 만날 기회를 가지기를 약속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이박 삼일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나의 가슴에 남는 것들은 많았다. 책의 세계에서처럼 정리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삶과 생명, 그리고 자유와 평화를 지키려는 오끼나와 사람들의 연대와 노력들이 그들의 평범한 일상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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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we need to hold hope together with anger and courage...
November 10, 2007
I have kept a homepage for my center, the center for contemporary social ethics research, for more than 10 years. Recently I renamed it "Center for Human Rights and Peace in Asia" (CHRPA) after having experiences of being in Asian countries. There I found many accumulated social ethical problems, poverty, misuse or abuse of power, militarism, dictatorship, torture, corruption, out of juridical killing, sexism, AIDS, sex tourism, and violence. Asia comes to me as a suffering land with suffering people.
I am very much grateful that I could have wonderful opportunities to have time for further studies both in Germany and the United States during my young days. Thereafter I was invited to many universities as visiting scholar for my research and teaching. Through my past experiences as a social ethicist, I used to think with what I have learned from the western scholars. However, when in their teachings I noticed a long silence about Asian suffering people, I felt that I am obliged to speak for Asian suffering people.
I was forced to have an exile due to my protest against an unfair treatment of two female scholars in the Methodist Theological Seminary in Seoul. It was really painful experience because the incident was a clear evidence of sexism in an educational institution. It was a bitter incident inflicted upon those who were expelled to the street, particularly me because it was made by my life long old friends and colleagues. As I was in the situation, I cannot refrain myself from speaking out.
Now I am realizing that the domineering people are using counter propaganda based on false and arbitrary information, and filing unjust suits against the protesters. Even the victimizes are using violence against the victims. When I read the human rights report, "The Sate of Human Rights in Eleven Asian Nations - 2006," I found the same repressive things are happening to the victims in Asian countries.
When I visited the office of the Asian Human Rights Commission in Hong Kong, I was introduced to the many tasks we have to resolve. I was almost shocked to find the facts that in Philippines 750 were killed out of juridical process during the last year, and in Sri Lanka the number is much bigger which is 850. In some Asian countries there still exist killing fields. I wonder why world greatest theologians did not pay their attention to this grime situation of Asia.
This is why I open this new blog. I named my blog "Peace in Solidarity" because it is my experience that without sharing solidarity there is no peace among people. Human history itself is full of stories about the long sage of people's struggling against various violence. One of Sri Lankan human rights activist in Hong Kong said to me, "where were the theologians when Sri Lankan people were suffering?"
Before going to have a forced exile I had to resolve the legal sue filed by the former president of my seminary. He filed a sue, accusing me of dishonoring him because I openly criticized him of his abuse of power. He filed the case with 12 items with his arbitrary interpretation of the situation, denying his intention to get rid of two female scholars from the seminary. But most of them were not identified not valid in the court. And the Korean National Human Rights Commission identified that his role and involvement in the incident resulted in a clear discriminating against two female scholars, therefore a clear violation of human rights.
However the trustee committee consisted of mostly patriarchal males, his staffs, and the student represents were in support for him. They tended to keep institutional value and authority rather than personal human rights deeply violated by the institutional decisions. Sexism was to them a common fallacy. Until now my seminary did not accept the recommendation from the Korean Human Rights Commission to reinstall the expelled. For this reason, I was asked to have an exile for three years.
Retrospecting the three years I am very much grateful to God. During the period I was offered to have wonderful opportunities for studying and teaching by many institutions. I had to spend infertile time to defend myself from the suit filed by the former president of my seminary. After resolving the legal sue, I was accepted to a Quaker Peace Center for Study and Contemplation: the Pendle Hill in Philadelphia where I could practice meditation and have research on peace. I was lucky to be near the Peace Libray of the Swarthmore College in Philadelphia.
After studying at Pendle Hill, I was invited to the 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Manila, Philippines. I taught there two classes: Methodology of Christian Social Ethics, Peace and Christian Ethics. Thereafter I was invited to the Tainan Theological College and Seminary. There I met many international students from Austria, USA, Kiribati, Thailand, Burma and Taiwan. I had many occasions being invited to the Annual Conference of Taiwan Presbyterian Church, Taipei Theological Seminary, Chai Presbytery and Taiwanese churches. I met there many foreign scholars including Prof. Choan Sang Sung. We did have wonderful dialogues about ding theology in Asia.
For the Fall semester of 2007, I was invited to the religious and cultural department of the Chinese University of Hong Kong. The director of divinity school, Dr. Lo has been my friend since we had a conference on religion and science in 2000. He provided me a good apartment and wonderful conditions as visiting scholar. For this divinity school, I have taught two classes: Christian social ethics and bioethics tutorial for graduate school students.
Being abroad brings me not only a sense of being alienated but also many insightful moments. However unlike my experience in Germany, the United States, and UK, being in Asia is little bit different because we all look alike. I am not really looking as a foreigner in Asia unless I expose myself as a Korean. In Japan, Hong Kong, Taiwan, even in Philippines many confused me with their people. However, as a foreigner I could see what they do not see. Moreover I could learn many things from their thought which is different from my tradition.
According to Augustine hope has two daughters: anger and courage. Anger to what is, courage to change what is into what ought be. As long as we look for a meaningful life, I think we need both sound anger and courage. Today I open this blog to talk about why we have to hold our hope, with anger and courage, a hope for peace in solidarity.
Wishing you all be guided by the Light!
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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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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