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November 10, 2007

Three scenes you can notice the real face of a person...


<사진: 마카오의 예수, 마카오 어느 성당에서>


얼핏 스치는 세 가지 순간에 대하여


나는 무심코 얼핏 스치는 순간으로 인하여 깊은 실망이나 반가움을 경험한 적이 있다. 아마도 가장 자연스러운 그러면서도 본색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정중한 예의가 비치는 순간, 깊은 동정과 연민을 드러내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잔인한 품성을 드러내는 순간, 상식과 예의를 버린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야만적인 기색이 연연한 순간, 역겨움을 드러내는 순간 - 교양과 체면과 허위의식으로 꾸미고 있던 표정에서 본색을 드러내는 순간이 있다. 감추고 싶은 모습이지만 감추어 지지 않는 순간이 있는 법이다. 자신의 인격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런 순간 자연스러움이 허식이 아니라면 그는 참으로 온전한 인간이리라.


어느 평론가의 글에서 읽은 내용이다. 사람의 인격을 판단할 수 있는 세 가지 순간이 있다 한다: 첫째는 먹이가 걸려든 순간, 둘째 작별할 때, 셋째 적이 급소를 보였을 때이다. 진지한 인격은 자기 먹이를 양보하고, 초면의 친절보다는 작별의 예의를 중시하고, 상대가 급소를 보이면 전의가 연민으로 바뀐다. 그러나 비열한 인격은 자기 먹이를 절대 축내거나 양보하는 법이 없으며, 초면의 아첨을 작별의 순간 적의로 돌려놓고, 상대가 급소를 보이면 이쑤시개로라도 찌르고 만다 한다. 재미있는 이야기다. 이 판단의 순간들은 우리의 일상에 가리어져 비열함과 진지함의 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인격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적 통찰에 의하면 개인이 가진 가치 판단의 습성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삶의 연장선을 길게 그어보면 곧 진면목이 드러나게 된다.

우정과 사랑을 나누다가도 어느 순간 배반과 실망을 거쳐 적대적인 관계로 돌입하는 경우를 허다하게 경험하게 되면 진지한 인격은 자기 스스로의 인격에 허물이 있는지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비열한 인격은 상대의 허물을 들추어냄으로써 자기를 변명한다.그렇다면 기만과 거짓 앞에서 자기반성과 비열한 공격의 차이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진지한 인격은 기만자의 기만을 들여다보면서도 그에 대하여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비열한 인격은 거짓과 조작을 일상화함으로써 자신의 본색을 감춘다. 진지함과 비열함의 차이는 그러므로 인간관계에 대한 인간적인 관심을 가진 이인가 아닌가에서 드러난다. 진지한 인격은 거짓을 들추어냄에 있어서 고통스러워하고 미안해 하지만, 비열한 인격은 거짓을 지어내면서도 미안해하지 않는 것이다. 한 편은 서로를 존중하는 인간으로서 남아야 할 이별의 예식을 준비하지만 다른 한 편은 적의를 던짐으로써 상대와 자신의 인격을 깊이 훼손한다. 진지한 인격은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의 인간다움을 지켜주려 하지만, 비열한 인격은 피해자의 인간다움을 무참히 짓밟는 동시에 자신이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가해자로 몰아놓고 마침표를 선점함으로써 약삭빠르게 상황의 종료를 선언한다. 그리함으로 심리학적인 폭력을 가중시킨다.

간혹 인간다움의 핵심은 이성적 합리성이라고 한다. 이성적 합리성이란 자신의 감정과 행위에 대한 합리적 설명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술에 취하거나 마약에 취하는 이들은 이성적 합리성을 상실하지만, 정신이 올바른 사람은 이성적 합리성을 무시할 수 없다. 진지한 인격은 자신의 신념과 이해능력을 동원하여 상대를 설득하려 하지만, 비열한 인격은 합리성보다는 폭력적 수단을 동원하여 상대를 제압하려 든다. 폭력적 수단에는 물리적 폭력, 관계적 폭력, 심리적 폭력 그리고 제도적 폭력이 있다.이성적 합리성이란 개인이나 집단이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이성적 합리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충동과 욕망과 탐욕에 의하여 합리성이 지켜지지 않을 때 우리는 폭력을 동원함으로써 비합리적 욕망충족을 기하는 비열한 인격이 되던지, 혹은 폭력을 정당화함으로써 비합리적 정황에 대처한다. 그러나 나는 양자가 모두 폭력적 방법에 의존하여 합리성의 회복을 기한다는 점에서 진지한 인격을 유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폭력적 방법은 인간 행위의 인격적 진지함을 수용하지 못한다. 오히려 인간의 이성적 합리성에 의하여 모든 인간이 시행할 수 있는 행위의 도덕성을 평준화시킨다. 이성적 합리성이란 간혹 "너도 나도 공유하고 있는 비열한 욕망과 탐욕과 쾌락과 만족"조차도 합리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도 하는 까닭이다. 이 점에서 임마누엘 칸트의 도덕률은 높은 덕스러움과 진지한 인격을 지원하지 않는다. 합리적 보편성이라는 공통분모를 수용함으로써 간혹 폭력적인 비열한 행위들을 예찬하게도 하는 까닭이다.그러므로 진지한 인격은 자신의 욕망충족의 논리를 합리화할 경우 덕스러움과 인간다움의 품위를 포기하고 비열함을 수용하게 된다. 정당방위의 논리를 사용하며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치명적 약점을 골라 외과(外科)적 폭격을 가하는 미군의 이라크 폭격의 비열함을 정당화하는 교회의 정당전쟁 이론은 바로 이런 오류를 수용한 까닭이다.

이로써 상대를 비합리적인 존재로 만들어 가면서 가하는 폭력의 순진한 희생자들이 있어도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보편적 합리성은 어쩌면 인류를 평균치로 절개해 낸 도덕성 이상을 옹호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덕스러움이란 조소의 대상이거나 영웅적인 것으로 예찬되기도 한다. 덕스러움의 영웅적인 행위는 결국 영웅이 아니고서는 행할 수 없는 완전주의적 결벽증의 산물이라 폄하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편적 가치란 간혹 우리의 고결한 사랑을 지켜내도록 돕기 보다는 평균치적 욕망과 쾌락에 집착하게 함으로서 사랑의 아름다운 향기를 일순간 무가치한 것으로 폄하하는 쾌락과 욕망의 유혹을 패스시킨다.

어느 신학자가 모든 사랑은 정당하다고 선언을 했다. 과연 그럴까? 합리성의 유혹에 빠지면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더 큰 쾌락을 얻기 위하여 진지한 인격적 사랑을 포기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모든 사랑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때 말하는 사랑은 한 얼굴의 인간으로서는 견뎌내기 어려운 부하가 걸리는 배반과 기만과 거짓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격적 신뢰를 배반당하고 기만당한 이의 주장이 아니라 배반하고 기만한 이의 평균치적 도덕성이 낳는 불행한 결론이다.그러므로 합리적인 사유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다만 평균치의 남남북녀(南男北女)의 논리를 후원할 뿐이다.

따라서 간혹 합리적 사유는 종교적인 삶의 가치를 부인하는 행위로 우리를 유도한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의 도덕 철학은 비종교적인 것이며 궁극적으로 종교적 이상을 이성적 합리성속에 가둔 논리이상이 아니다. 여기서 나오는 평화론은 인간 개인과 집단 간에 상호억제를 가능하게 하는 자율성이 작동하는 경우만 논리적으로 가능하지만, 실인즉 평화가 깨진 정황에 직면하면 지극히 무책임하다. 즉 비열한 인격이 산출하는 폭력 앞에서는 한없이 무능한 것이다.따라서 나는 비열함을 긍정하는 합리적 도덕성의 폭력을 승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비록 현실이 어둡고 침침하다 할지라도 비열함을 거절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합리성에 근거한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종교적 직관과 체험에서 나오는 법열(法悅)이나 사랑의 힘을 믿는 데 있다.

그러므로 종교윤리는 이성적 합리성에서 스스로를 해명하지 않는다. 다만 종교적 직관과 체험에서 주어지는 imperative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든 생명이 아름답고 귀하다는 믿음은 합리적 판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판단이다. 만일 사랑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려면 모든 사랑이 아니라, 오직 진지한 인격에서 나오는 사랑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수정해야 한다. 비열한 인격에서 나오는 사랑과는 달리 진지한 인격에서 나오는 사랑에는 가슴 저미는 양보, 상대의 치명적 약점을 가려주는 동정과 연민이 있어 아름답다. 진지한 인격을 버린 비열한 사랑은 자기만족의 먹이를 양보할 줄 모르고, 작별의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 다만 치밀한 쾌락의 경제론에 스스로의 진지한 인격을 팔아 가지게 되는 아첨과 비열함의 두 목소리를 갖추었을 뿐이다.

예수는 떡 그릇에 함께 손을 넣는 유다의 손을 바라보면서 연민을 느낀다. 십자가에 달린 그를 찌르는 로마 군병들의 창에 찔리면서도 그는 그들을 향한 용서를 빈다. 이 예수에게서 우리가 구원을 경험하는 것은 이성적 합리성에 따른 결론이 아니라, 그에게서 참된 인간을 본 까닭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 예수가 우리에게 요구한바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라는 요구를 번번이 거절한다. 우리의 합리성이 해명하는 "인간다움"에 우리의 신앙을 불행하게도 볼모 잡힌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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