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9년 10월 8일-9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연수원에서 개최된 <한독 민주시민교육 심포지움>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도표가 웹에 잘 나오지 않으니 첨부화일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독일 다문화사회 이행과정이 한국사회에 주는 함의
German Multiculturalism and Its Implications for Korean Society
Prof. Dr. Park, Choong Koo
Professor of Social Ethics, Methodist Theological University
- 목 차 -
1. 들어가는 말
2. 다문화 사회로의 이행기에 처한 한국사회
3. 한국에서의 다문화성에 대한 토론과 연구
4. 한국 다문화 사회의 성격
5. 선진사례로서 독일의 다문화 사회적 경험
6. 독일 다문화 정책에 대한 평가와 다문화 한국 사회의 미래
1) 통합정책과 다문화 정책의 거리
2) 다문화 성에 대한 확장적 이해
3) 타인종 공포증과 다문화적 애매성
7. 독일 다문화 정책이 한국 사회에 주는 함의
8. 나오는 말
“다문화사회란 모든 거주민들이 그들의 성, 종족, 문화, 언어적 출처, 그들의 종교와 사회적 계급에 불문하고 동일한 법을 향유하는 일종의 구성체이다. 그곳은 다수자와 소수자간에, 내국인과 외국인간에, 그리고 국민과 비국민을 법에 따라 자별하지 않는다. 거기서는 ‘국민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모든 개별자를 차별하는 외국인 법이 없다. 거기서는 노동, 거주, 사회적 안전, 교육, 더 나아가 비록 그들이 동화되기를 꺼려한다 할지라도 노동이주자들, 망명자들, 그리고 난민들을 위하여 정치참여가 원칙적으로 가능하다.“
1. 들어가는 말
독일 본(Bonn) 대학교의 사회윤리학자 마틴 호네커는 현대 사회를 일러 Eine Gesellschaft als totaler Verblendungszusammenhang 라고 명명한 바 있다. 모든 것이 섞여 혼재되어 있는 사회라는 의미다. 19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이해하던 인간의 삶은 국가, 국민, 국경, 언어, 민족 등과 같은 개념에 일정부분 제한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을 지나면서 우리는 새롭게 전개되는 문명사적 변화를 우리가 종전에 이해하던 방식으로는 담아낼 수 없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전 지구를 일일권으로 묶어놓은 교통과 소통방식의 발달은 국경과 언어를 초월하고 있으며, 세계 도처로부터 국경과 인종과 언어를 넘어 이주하는 노동인구의 증가로 인해 전통적인 문화적 단일성과 통일성을 해체하고 급격히 다중문화적인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정황을 일러 나는 종교의 후견 아래 미성숙한 영역으로 이해되던 세속사회가 중세의 종교적 세계관이 가르쳐온 해석지평을 넘어 합리적 이성의 자율성을 획득함으로써 근대세계로의 이행이 이루어졌던 16세기 이후 서구 정신세계가 그 패러다임을 바꾼 변화와 유사하게 오늘날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들의 종교, 국가, 민족, 사회 등의 제 영역에서 새로운 문화적 패러다임에로의 이행을 강요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문화 사회적 강요(ein kutureller, geselschaftlicher Sachzwang)다.
이런 사회적 강요는 후기산업사회에로의 이행기에 일어난 인구구조의 변동과 더불어 일어났다. 20세기 중엽을 지나면서 선진 사회 구성원의 삶의 질을 높여온 경제적 번영과 발전의 논리는 새로운 노동인구의 수요를 급증시켰고, 개인주의적 삶의 질을 향유하려는 사회 구성원 대중들은 저출산, 고령화의 길을 택했다. 그리하여 피할 수 없이 외국인 노동자들을 산업현장으로 불러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외국에서 유입된 새로운 노동인구는 단순한 노동력이 아니라 그들도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존재들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을 때 선진 사회들은 다문화성을 긍정하는 새로운 정책을 추구해 왔다. 반면 이주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토착 문화, 종교적 전통을 옷 입고 이국 땅에 정착하면서 새로운 문화적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또한 유입된 노동인구가 동반해온 그들의 가족과 자녀들의 삶을 이방인으로 바라보는 본토인들의 문화적 주체 역시 혼란과 혼동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이방인의 유입으로 인해 문화 주체가 겪어야 할 혼란에 비하여, 또 하나의 서로 다른 문화적 주체인 이방인이 겪어야 하는 혼란은 더욱 복합적이고 광범위한 것이었다.
양자의 근본적인 성격은 문화정책의 입안자로서의 주체적 시각과 그 정책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소수 객체의 시각이라는 점만이 아니라, 다수집단과 소수집단, 능동적 주체와 수동적 주체, 사회경제적 기득권세력과 취약세력이라는 편차를 낳는다. 이러한 시각의 편차에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 인종 및 종교적 편견, 경제적 불평등과 같은 요소들이 더해지면 그 편차는 필연적으로 다양한 사회적 갈등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다문화 사회란 일종의 문화적 충돌이 불가피하게 일어나고 있는 갈등 사회를 의미한다. 이런 충돌을 예방하고 치유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함으로써 상호 인간다움과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려는 것이 각 사회가 추구하는 다문화 사회 정책의 중요한 목표라고 판단된다.
2005년 유엔의 국제이주기구(IOM)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 약 2.9%가 새로운 문화권으로 이주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가장 외국인의 유입이 많은 미국이나 카나다를 제외하고, 전 세계에서 타문화권의 노동인구 유입이 가장 많은 나라들 중의 하나가 독일이다. 독일은 고령화와 저출산 현상으로 인해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이주노동자들을 받아들였지만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인 다문화 정책을 펼치지 못하다가 마침내 1998년 이민국을 신설하고, 2000년에 신이민법을 마련함으로써 다문화 정책의 쇄신을 기해 왔다. 이런 변화는 1990년대를 전후하여 독일 사회를 단일민족 사회로 보던 시각을 버리고, 다문화 다인종 사회로 보아야 한다는 관점들이 설득력을 가지면서 시작되었다. 케슬러(G. E. Kessler)는 다문화 사회에 대하여 “다양한 사회에서 서로 다른 언어, 전통, 종교적 고백, 가치표상, 국적, 교육, 사회화, 그리고 삶의 스타일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실제적인 관계를 받아들이는 정치 사회학적 개념”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독일만이 아니라 경제 사회적 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세계라면 어디서든지 우리는 피할 수 없이 다문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고 보아도 틀린 것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좋거나 싫거나와 상관없이 필경 다문화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 글은 다문화 사회에로 진입단계에 처해 있는 한국사회의 다문화적 미래를 생각하면서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된 독일의 다문화적 정황에 대한 독일 사회의 주요 대응 정책들을 살펴 우리가 무엇을 얻고 무엇을 달리 생각해야 할 것인가를 찾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다문화 현실을 진단하고 선행사례로서 독일의 다문화 정책을 거울삼아 한국의 사회의 다문화적 과제를 가늠하려 한다. 이러한 논의를 전개하기 위하여 이 글은 1) 한국과 독일의 정신문화적 특성을 살펴보고, 2) 다문화 사회로 전환되고 있는 독일의 다문화 정책의 제요소들을 긍정/부정의 측면에서 진단하는 과정을 통하여, 3) 다문화 사회로의 진입단계에 있는 한국사회가 독일의 사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함의를 찾아보려 한다.
결론부에 이르러 본 논문은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문화 사회로의 이행은 일종의 현실적인 강한 요구(Sachzwang)임을 밝히고, 이주민의 온전한 인간성을 옹호하기 위한 정책으로서 이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적 적응, 혹은 문화적 통합 과제를 넘어서 한국민들의 민주적, 인권론적 의식의 성숙을 위한 시민사회 운동의 과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주민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상대화하거나 부정하게 만드는 단일민족 이데올로기와 그 우월성의 논거, 이를 이용하는 정치적 포풀리즘, 그리고 민족주의와 연관된 종족 종교적(henotheistic) 배타성과 같은 요소들이 이주민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논리를 지속시키고 있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현대 민주주의 이론과 인권론의 시각에서 그 허구성을 비판 극복할 수 있는 세계시민적(cosmopolitan)교육과정의 중요성을 제안하려 한다.
2. 다문화 사회로의 이행기에 처한 한국사회
현대 사회의 특징을 일컫는 용어들이 있다. 20세기 이전에 이해하던 시공간적 거리가 무한히 좁혀진 이후 지구는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될 뿐 아니라, 가속화된 경제활동은 세계화(globalization)를 더욱 가속시켜 이제는 피할 수 없이 문화적 상대주의를 불러들였다.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 및 후기 식민주의이론들은 이전의 세계가 세계를 전쟁터로 만들던 민족, 이념, 집단적 가치에 대한 집착의 허구성을 드러냈다. 이에 부수하여 전통적 가치의 붕괴와 더불어 성과 사랑과 가족에 대한 재래의 관념이 힘을 잃고 개인적인 자유와 삶의 질을 마음껏 향유하려는 현대인의 요구는 급기야 저출산/고령화라는 사회현상을 초래했다. 그 결과 산업인력의 수요가 급감하여 국경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결과를 불러왔다. 국제적 상품이동을 원활하게 하면서도 노동력의 이동을 억제하고 있었던 국경의 의미가 바뀌었다. 상품만이 아니라 국경을 넘어 노동자들의 국제적 유입도 증대되는 사회로 변모해 왔기 때문이다.
오래 동안 단일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던 사회에서는 유입되는 외국인들의 수가 증가하면 할수록 다양한 문화, 언어, 종교의 유입이 필연적으로 뒤따를 뿐 아니라, 외국인의 사회적 지위와 삶의 질에 대한 국가적, 교육적 관심이 점점 고조되고 있다. 그 이유는 다문화 사회 속에서 주민과 이주민간의 공존과 상생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당위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다문화 사회에 대한 논의는 한 사회가 다문화적 정황에 놓이게 된 시점이 언제냐에 따라 각기 다르다. 독일은 2차 대전 당시까지만 해도 아리안민족의 우수성에 대한 정치적 환상이 강해 다양한 문화적 주체들에 대한 불관용 정책을 감행했던 나치 정권이 존재했던 사회였다. 하지만 전후 급격한 산업화와 더불어 독일 내 노동인구의 수요가 급증하는 데 반해 전쟁의 여파와 저출산 현상으로 인하여 총 노동력의 감소가 일어나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을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이주민의 수는 점차 증가하여 오늘날 전 국민의 8.83%를 구성하고 있다. 카나다나 미국, 호주, 스위스 등 이미 선진 다문화 사회로의 이행과정을 겪는 여러 나라들이 있지만, 독일은 사회문화적으로 우리나라와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선진사례로 살펴볼 충분한 가치가 있는 사회다. 무엇보다 여타 유럽 나라들과 비교해 볼 때 독일은 근대국가로의 형성기가 다소 지체되었을 뿐 아니라, 게르만/아리안 민족 이념을 앞세워 배타적인 민족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으며, 세계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이념적인 분단을 경험한 나라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므로 독일이 경험해 온 다문화 사회로의 이행과정은 이제 막 다문화 사회에로 이행기에 접어든 우리에게 하나의 선진 사례로서 다양한 의미를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사회학자들은 우리나라는 독일에 비하여 외국인들이 전 국민의 2% 미만에 지나지 않지만 유엔의 예측을 따라 2020년에는 5%, 2050년에는 21.3%의 외국태생의 이주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런 예측은 우리 사회가 현재 보이고 있는 저출산 고령화 현상에 이상이 생기지 않는 이상 현실로 다가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다문화 사회에로의 이행기에 접어든 우리 사회는 미구에 다가올 변화에 대처하기 위하여 보다 나은 다문화 정책과 장기적인 교육적 지평을 가늠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고 생각된다.
3, 한국에서의 다문화성에 대한 토론과 연구
한국사회에서 다문화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05년 4월 노무현 정부가 ‘혼혈 및 이주민 사회 통합 지원방안,’ ‘결혼 이미자 사회 통합방안’ 정책을 마련하기 시작한 시점에서부터이다. 이런 시점에 맞추어 교육인적자원부는 종래의 홍익인간 이념을 앞세워 단일민족으로서의 우수성을 강조하던 교육정책에서 다문화․타인종에 대한 관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교육정책을 선회시키는 지침을 세웠다. 같은 맥락에서 법무부는 이주민들의 이민정책을 지원하기 위하여 외국인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위한 법적 지원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이런 초기의 대응은 외국인이라는 존재를 인식하고 정부차원에서 공식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지만, 그 정책의 방향은 외국인의 한국사회에로의 적응과 동화를 돕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특히 이 시점부터 한국 여성정책연구원은 결혼이주여성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다차원적인 정책을 강구하는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다문화적 평등, 인권, 다양성, 다원성을 상호적으로 인식하려는 노력으로서는 많이 미흡한 것이었다. 당시 노무현 정부가 다문화 사회라는 새로운 주제를 정책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07년 8월 18일 UN의 인종차별철폐위원회(Committee on the Elimination of Racial Discrimination)는 한국정부에게 한국사회가 다민족적 국가(multinational nation)라는 성격을 인정할 것과 이런 실제 사회현실에 모순되는 단일민족국가 이미지와 인종적 우월성의 관념이 있으니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권고 했다. 이런 유엔의 권고는 이주민이나 이주노동자들을 한국사회에 동화 적응하도록 돕는다는 국가의 동화정책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요구하는 것일 뿐 아니라 다문화사회에 대한 한국정부의 자기이해에 있어서 새로운 차원에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었다.
국가의 초기 정책이 이주자들로 하여금 한국사회에로의 동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지만, 시민사회 구성원들은 다문화 사회에 대한 선진 사회의 이론들을 탐구하며 그 이해의 폭을 넓혀가고 있었다. 다문화 사회에 대한 이론적 탐색과 더불어 다문회적 정황을 폭넓게 살핀 연구는 사단법인 ‘국경 없는 마을‘이 후원하여 펴낸『한국에서의 다문화주의 현실과 쟁점』이다. 이 논문집은 우리사회의 국수주의적인 단일민족 이념부터 이주민의 종교적 정체성, 그리고 동양 사상을 통한 다문화성의 수용 가능성까지 논의하고 있다. 정부의 정책이 주로 계몽주의적인 서구담론의 사회 경제적 평등과 자유를 지향한 것이었다면 시민사회가 바라보는 다문화성의 요구는 사회 종교 정치적 맥락에 따라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려는 다원적 윤리론(plural ethical theory)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인정의 정치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내용을 더욱 구체화시켜 다문화사회에서의 교육과제를 제시하고 있는 연구서를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국제이해 교육원에서 펴냈고, 2009년 한국사회이론학회의 계간지, 『사회이론』은 다문화 시대의 사회윤리 이론을 학술적 토론의 주제로 삼기도 했다.
최종렬은 계몽주의적 다문화주의는 근대성이 성취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의 원리를 자국민을 넘어서 소수민족집단에까지 확대하고자 한다고 보면서, 그 핵심은 정의, 즉 계급, 젠더, 성별, 지역, 문화에 상관없이 모든 개인이 자유와 평등을 누려야 한다는 것이 규범이 되고 있다고 파악한다. 여기서 정의는 주로 절차적 정당성을 의미하며 그 적용범위는 보편적이어서 자신이 지닌 고유의 가치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모든 개인은 이를 따라야만 한다는 당위를 내세우는 것이다. 따라서 출신성분이 어떠하든 모든 개인은 평등하게 인권을 보장받아야 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기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의 삶의 기회를 평등하게 만드는 계급정치학, 재분배의 정치학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와는 달리 계몽주의적인 다문화 이해에 대항하는 견해는 원자적 개인관을 수용하지 않고 한 개인을 문화집단의 구성원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그가 속한 문화집단 안의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는 인정의 정치학 혹은 정체성의 정치를 주장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최종렬은 바람직한 다문화주의 정책이란 이 두 가지 이론지평을 융합하여 양자택일의 태도가 아니라 통합적 적용의 관점을 요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문화적 정체성을 상호 인정하는 삶의 공간이 다문화 사회라는 것이다. 이런 사회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탈영토화된 영역이다. 전통적인 사회, 국가, 민족 이해를 넘어 새로운 논리와 대응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흥순은 탈식민적 관점을 응용하여 현대 식민후기적 논의의 관점에서 다원적 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려 한다. 문화 정치적 우월성을 자긍하는 문화적 주체의 기준에 의하여 문화적 객체의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식민주의적 사고는 문화 지배적 주체와 객체를 동시에 비인간화 해 왔다. 그 결과 탈식민적 관점에서 볼 때 식민주체는 객체를 비정체화시키는 부작용과 더불어 객체를 진정한 동료인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기폐쇄를 불러왔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고 보고 이런 비인간화의 과정을 상쇄시키기 위하여 다문화 사회는 정신의 탈식민적 지평을 요구하는 영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체문화의 폭력적 획일화는 이주민의 이중적 정체성을 파괴하게 됨으로 이런 폭력을 상쇄시킬 수 있는 다문화란 차별이나 우월성을 앞세우는 단일문화가 아니라 문화적 코드의 다중성을 인정하는 문화로서 문화간의 상호의존과 침투를 통하여 일어나는 문화적 혼종 가능성까지 긍정하는 문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문화 사회는 다중적 언어, 문화, 종교 등의 요소들이 공존하는 공간으로서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 주민, 이주민, 이주 노동자를 포함하여 모두가 평등한 인간으로서 온전한 인간다움을 누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가진다. 하여 다문화 사회는 다양한 차이를 상호 인정하면서 온갖 차별과 지배논리의 극복을 위한 사회정책과 시민교육이 요구되는 사회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다문화 사회 이론은 단순히 이주민이나, 외국인, 혼혈인만이 아니라, 주․객체를 막론하고 사회 내 소수자와 약자들의 온전한 인간다움을 존중하는 폭넓은 문화적 환경형성을 위한 사회정책을 요구한다. 이런 맥락에서 다문화 정책과 교육내용이란 현대 인권론과 민주주의 이론과 내면적 일치를 이루며 조우하지 않을 수 없다.
4. 한국 다문화 사회의 성격
서구 사회의 다문화적 상황이 대부분 서구 제국주의와 식민 역사와 관련이 깊고, 서구의 사회적 성격은 종교와의 결합도가 높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권신장의 이행 정도가 우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진척된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정황과는 매우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다. 또한 민주주의에로의 이행과정을 오랜 기간 경험한 서구 사회들에서는 정치권력의 신화적 권위는 다분히 세속화되고 상대화되었다.
이러한 서구 다문화 사회의 특징들에 비하여 한국 사회는 민주화와 인권신장의 정도가 과거에 비하여 비교적 높아 졌지만 아직도 내부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한국 사회의 종교 인구는 상당히 높은 편이지만 그 성격이 서구와는 달리 매우 다원적이다. 또한 전근대 사회로부터 근대사회로의 이행과정 자체가 서구에 비하여 매우 늦어 전근대, 근대, 근대 이후의 가치들이 공존하고 있는 사회라 할 수 있다. 특히 36년간의 일본 식민 지배를 경험한 한국 사회는 다소 지체된 민주주의/인권이해에 더하여 민족주의적인 자기 정체성에 대한 관념이 강할 뿐 아니라, 단군신화와 홍익인간 이념을 필두로 하는 백의민족 관념은 민족주의적 배타성을 지속적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한국 사회에서의 다문화주의란 서구의 사회 문화 종교적 맥락과 다르고, 역사적 경험이 다르다는 결론을 낳는다.
따라서 한국 사회의 다문화 정책은 최종렬의 주장대로 실질적으로는 민주의식과 인권 사상의 보편적 적용과제와 더불어 문화, 언어, 종교적 차이를 가진 이주민들에 대한 상호 인정의 정치를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는 요구를 가지게 된다. 민주화와 인권신장이라는 한국 사회의 지속적인 과제에 더하여 다문화적 신규과제가 생긴 셈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지난 노무현 정부부터 시작된 국가적 차원의 다문화 정책은 아직 만족할만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다양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비판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지적은 한국 정부가 기조로 삼고 있는 순혈주의적이며 가부장적인 서열적 통합정책에서 많은 문제가 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9년 6월 18일 발족된 <국회 다문화 포럼> 출범식에서 한국의 다문화 정책을 분석한 김성희는 한국의 다문화 정책의 임의성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한국의 다문화 정책을 살펴보면 그때그때의 대중요법에 머무르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3D 업종의 일자리 부족을 메우기 위해 외국인 노동차들 받아들이는 산업연수생 제도를 시행하고, 이주노동자의 인권이 문제가 되니까 고용허가제로 전환하고, 이중국적 연예인의 병역기피가 사회문제가 되니까 이중국적을 원천봉쇄하는 국적법을 만들고, 결혼 이민자의 인권 등의 문제가 되자 다문화 가족지원법을 제정하는 식이다.”
그는 2008년 한국 정부가 세운 ‘외국인정책 기본계획“은 한국의 다문화 정책의 명제만 나열했지 구체적인 대안이 결여된 것이며, 주관 부처를 법무부로 정한 것은 정책과 예산 편성의 실효성을 거둘 수 없을 수밖에 없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다문화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할 수 있는 사령탑의 신설이 매우 긴급히 요구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재한 외국인 처우 기본법에 담긴 불명료한 영주권 문제, 이중국적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국적법, 범위를 좁혀 놓은 다문화 가족 지원법, 취업 후 귀환을 예상한 외국인 고용에 관한 법률(2005)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다문화 다인종 관련자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다문화 기본법의 제정이 요구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상과 같은 한국 정부의 다문화 정책의 현실을 살펴볼 때 몇 가지 문제점들이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다. 1) 정부 스스로가 한국 사회가 다문화 사회로 이행과정에 있다는 사실인식의 결여, 2) 다문화 사회에 대한 사회 정책의 결여, 3) 다문화적 흐름에 대한 포스트모던/후기 식민주의적 관점의 결여, 4) 다문화 사회로의 이행이 한국 사회에 미칠 영향에 대한 전망의 결여, 5) 순혈주의와 민족주의적 관념에 대한 대안적 교육지침 결여, 6) 구체적이고 현실성 있는 정책의 결여 등으로 인해 한국의 다문화 정책은 형식적인 구조만 가지고 있을 뿐 실질적이고 변혁적인 특성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들이 지적되고 있다.
5. 선진 사례로서 독일의 다문화 사회적 경험
우리 사회에 앞서서 다문화 사회적 경험을 가진 국가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선진사회에 속하는 사회들이다. 특히 이민자들로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캐나다, 호주, 미국 등과 같은 나라들은 다문화 사회를 국가 형성의 문화적 본질로 삼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반면, 역사적으로 종족적 정체성을 중시해 온 문화적 배경을 가진 나라들, 대표적으로 독일,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는 각기 다문화 사회에로의 이행과정을 격고 있지만 그 단계와 구조가 각기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독일은 앞서 말했듯이 우리와 가장 유사성이 많은 사회일 뿐 아니라, 우리보다 앞서서 다문화사회로의 이행을 겪은 경험을 지닌 나라이다. 독일과 한국사회의 연관성은 무엇보다 1) 양국이 단일민족 이념을 고수해 왔고, 2) 이념에 의한 분단 상황을 겪어 왔을 뿐 아니라, 3) 저출산 고령화 사회로의 진입으로 말미암아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주하게 되었고, 4) 다문화사회에로의 이행과정에서 빗어진 이주자들에 대한 사회 정책적 혼란을 경험했다는 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임운택은 이주노동자를 중심하여 다문화 사회로 이행되어 나간 독일의 다문화 정책을 차별배제 유형(exclusionary model)로 이해하면서 프랑스의 동화모형이나 미국, 호주, 캐나다와 같은 다문화주의 모형과 구별한다. 주로 혈통주의를 채택하는 유럽의 국가들(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일본 한국, 대만)이 채택하는 입장으로 분류될 수 있다고 보는 까닭이다. 이러한 분류 유형론은 일반화의 위험이 있지만 대략적인 이해를 위하여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유형들이 다소 변형되어 진화되어 가고 있는 유형들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차 대전 직후 다문화사회에로의 진입이 시작된 독일은 그동안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독일이 초기 대응 단계에서 다문화 정책을 쉽게 수용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요인들이 지적되었는데, 특히 순혈주의에 근거한 국민정신(Volksgeist)이라는 독일인 집단의식 속에 담겨있는 비기독교, 타인종에 대한 공포(xenophobia)가 잠재되어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고, 이는 지금도 이따금 독일의 극우 성향을 가진 인사나 젊은 세대들의 의식 속에서 반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외국인에 대한 혐오와 불편함을 느끼는 성향은 어느 민족에게서나 찾아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독일의 경우 단일민족 순혈 이데올로기를 중시해온 전력으로 인해 독특한 독일인의 집단 배타성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최근 SPD 정당 대변인이 “독일어로의 동화를 거절한다면 당신들은 이곳 독일을 잘못 택한 것이다“ 라고 공공연하게 이주민을 비난한 사실이 지상에 보도된 적도 있었다. 비록 소수에 지나지 않지만 나치 후기적 징후를 보이는 사례로서 1965년에 결성된 독일 민족당(NPD: Nationale Partei Deutschlands)은 매우 노골적인 외국인 혐오 정책을 공공연하게 표방하고 있다. 이런 극우적인 사례로 독일 사회를 대변할 수는 없지만, 독일 사회가 다문화 사회를 받아들이는 과정에는 일면 이런 우파적 사고와 행태의 영향이 없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독일에서의 다문화 사회로의 이행과정은 몇 가지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독일 외국인 등록청 통계에 의하면 1951년 독일 안에 거주하는 외국인 수는 전 국민의 1%정도인 50,6000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10년 후에는 외국인들이 약 283만 명으로 늘어났고, 1970년대를 지나면서 전 국민의 7.2%에 달하는 445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통계는 지속적인 경제 성장과 질 높은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독일이 많은 부분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점점 더 의존된 노동구조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2009년 현재 외국인이 2% 정도에 달하는 수치를 가진 우리 사회에 비해 독일이 외국인을 2% 정도 받아들인 시점이 1965년대 가량이라고 볼 때, 독일 사회는 우리 사회에 비하여 40년 앞서 다문화적인 경험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시작된 독일의 다문화 사회 이행과정은 독일 정부가 취한 초기 대응 단계에서 노동 이주자들을 임금을 주고 ‘빌려 쓰는 인력‘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안이하게 대처했던 결과 다양한 문제들을 거듭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초기 대응단계에서 독일 정부가 외국인 노동자들이 독일사회에 정착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하여, 일정 계약 기간 노동 후 귀환조치 한다는 원칙을 세웠지만, 결국 이 예측은 빗나갔다. 유입 노동인구가 일정기간 고용되었다가 귀환하는 것이 아니라 독일 사회에 정착하기를 원하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인구가 자국보다 독일에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점과 독일 사회 역시 여전히 외국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동인력의 정착이 구조적으로 심화되었던 것이며, 이에 대한 새로운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독일내 외국인 수는 지난 50년 동안 전 인구의 1%에서 근 9%에 이르기까지 약 9배가 늘었다. 독일 다문화 사회 정책 변화의 다음 단계는 외국인 노동자를 소위 Gastarbeiter로 자국민과 다른 존재, 손님 대접하던 정책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외국인 노동자“로 보던 시각을 바꾸어 독일 사회에 정착할 이주민”으로 보아야 한다는 새로운 관점이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독일 당국은 손님, 이주민, 자국민이라는 세유형의 대상들에 대한 세밀한 차별적 정책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한 편에서는 불법이민자를 막는 정책이 진행되었고, 다른 편에서는 이주민을 독일 사회로 받아들일 수 있는 동화정책이 세워졌다. 또 다른 편에서는 이주민들은 자국민과 구별하여 참정권을 제한하고 새로운 동화과정에 참여해야 할 이주민들의 의무조항들이 신설되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독일 정부가 다문화․다인종 사회의 현실을 인정하고 소수의 비지배적 집단이 겪고 있는 차별적 정황을 치유함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극소화하려는 정책을 세운 과정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는 이주민을 독일 자국민과 같은 “우리“에 속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위 표에서 볼 수 있듯이 독일 내 소수 이주자들은 영원한 타자가 아니라 자신들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이 독일인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시점은 1980년대를 지나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이런 인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사회의 단일민족주의적인 성향은 이주민들을 향한 새로운 정책의 지체 혹은 갈등을 불러오는 장애적 요인들이 되기도 했다. 이는 1) 무엇보다 독일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독일민족의 단일성에 대한 관념이 다양한 배타와 차별을 방임내지 조장했고, 2)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들이 비선진 국가로부터 유입되는 데에서 비롯되는 바, 동일인들이 가지는 자국에 대한 우월의식과 외국인들에 대한 혐오를 촉발하는 문화적 요인들도 있었다. 3) 더구나 비기독교권에서 이주해 온 인종집단에 대한 종교적 혐오는 독일 기독교와 이슬람 세계간의 오래 된 갈등구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독일 사회가 향유해온 경제 및 사회적 안정을 지속적으로 기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 연후에 비로소 독일은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단일국민국가에서 ‘다문화 ․ 다인종 사회’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독일은 다문화 가족 지원정책의 일환으로 이민자 본인에게는 시민권 및 국적을 부여하고, 노동시장 접근 및 통합․ 차별시정․ 정착지원․ 사회보장을 제공하는 한편, 가족 2세대에게는 언어교육․ 학교교육 및 직업교육을 보장하려 노력하고 있다.
독일에서의 다문화 사회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모두 살피기에는 지면과 시간의 한계가 있다. 그러나 정부 차원에서의 노력을 실질적으로 지원해 온 장기적인 교육정책과 종교정책의 일부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한 일이다. 독일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전통은 마틴 루터의 삼각대 이론(Dreistaendelehre: 정부, 가정, 교회)으로서 정부는 대외적인 국가의 권위를 행사함으로써 통제와 억압적 방법으로 공동선을 지향한다면, 종교는 독일인들의 내면적인 세계에서 질서를 형성함으로써 공동선에 기여한다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가정은 이러한 공동선을 실천하는 기초적인 공동체라 볼 수 있다. 이런 종교적 관점을 오늘의 세속화된 독일 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종교공동체의 교육적 영향력은 학교교육과 병행하여 독일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민주적 기초가치를 형성하고 진작시키는 데 크게 공헌해 왔다. 그리하여 독일에서는 다문화 사회에로의 진입을 준비하기 위하여 정부와 종교, 그리고 교육구조를 통한 입체적인 다문화 정책과 교육들이 시행되어 왔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6. 독일 다문화 정책에 대한 평가와 다문화 한국 사회의 미래
1) 통합정책과 다문화 정책의 거리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독일은 무정책 시대를 지나, 다문화 사회에 대한 방어적 정책을 거쳐, 동화(assimilation)내지는 통합(integration)정책을 사용해 왔다. 그러므로 독일에서의 다문화 정책이란 이런 일련의 정책 변화의 과정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실질적으로 독일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문화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노력을 보여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비판적 견해들은 독일이 진정한 의미에서 다인종적, 다문화주의(multiethnic, multiculturalism)가 아닌 통합(integration) 정책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통합 규범은 여전히 기독교 서구의 유산(Christian occidental heritage)이라는 점이 지적되고 있기도 하다.
1990년대를 지나면서 독일은 독일 사회에 대한 자기 이해로서 다문화 사회라는 사실을 긍정하는 것 같은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보수적 정치가들은 이 사실을 애써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이런 입장은 이중의 관점을 형성하고 있다. 독일국민들의 입장에서는 다문화주의란 어쩔 수 없이 강요된 선택이 되는 한 편, 이주민들에게는 불충분한 다문화주의에 적응하라는 요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주민들은 독일 사회에 오래 동안 형성된 규범 문화 속으로 편입되던지 아니면 타자로서 그 사회에 존재해야만 한다. 이는 결국 독일 사회가 1980년대 노동자 정책에서 벗어나 사회통합 정책 시대를 거쳐 1998년 이후 그 정책 기조를 다문화 사회 정책으로 전환 시켜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다문화 정책에 대한 해석과 적용의 문제가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2009년 9월 12일 독일의 주간 잡지, Die Welt의 언 라인 설문 조사에 의하면 94%의 독일인들이 독일 이주민 통합정책이 결점이 있고 불충분한 것(magelhaft und ungenuegend)이라고 답하고 있다.
2) 다문화성에 대한 확장적 이해
단일민족 신화를 오래 동안 유지해 왔던 독일 사회가 문화적 동질성(cultural homogeneity)을 넘어서 문화적 이질성을(cultural heterogeneity) 긍정 하려면 문화적 동질성을 강조해온 독일 사회가 존속시켜 왔던 순혈주의적 민족주의 판다지에 대한 자기비판과 더불어, 새로운 자기 이해를 진작시켜야 한다. 독일에서 다문화주의에 대한 토론이 고조되었을 당시 균터 슐쩨(Guenther Schultze)는 통합정책과 더불어 다차원적인 과제를 제시했는데, 그 내용은 1) 사회 구조적 차원에서 이주자들이 중요한 사회적 자원의 일부가 되고, 2) 사회의 중요한 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것, 3) 그리고 인식능력의 활성화를 위하여 언어교육과 더불어 사회규범에 대한 이해를 촉진시키는 과제, 4) 사회적 차원에서는 독일 사회 안에서의 소통과 토착화된 관계들을 촉진하는 것, 5) 그리고 정체성의 차원에서는 이주민을 받아들인 공동체에 대한 정서적 연대의 범주, 국적부여 등의 중요성을 담고 있다. 이런 균터의 이해는 독일인 주체와 이주자 객체간의 동일화가 이루어지는 차원이 이주민을 독일 사회의 규범과 특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회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다고 보는 관점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독일인 집단의식 자체의 변화 과제는 별로 심각하게 고려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994년 국회의장이었던 리타 슈스무트(Rita Suessmuth)는 이주법 개정안을 변론하면서 1913년 독일 사회가 혈연공동체라고 규정했던 법안은 이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밝혔다. 이는 문화적 출처가 다른 소수 이주자들에 대한 관용과 배려의 문제 이전에 독일 사회 스스로가 다문화적 현실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자기 이해를 바꿔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다문화적 정황이라는 공간 안에서 여전히 문화적 충돌과 전쟁이 일어나고 있고, 이러한 갈등을 피하기 위하여 주체문화에로의 유입, 동화, 통합을 요구하는 것은 지배문화를 공격하거나, 회피하거나, 조정하려 하려들거나, 혹은 변형시켜 공동의 문화를 창출하려는 네 가지 패턴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한다. 결국 이 문제는 다문화주의란 지배 문화의 동질성(homogeneity)에로의 환원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이질성(heterogeneity)을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 다원성에로의 체질개선과 개방을 요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확장적 관점을 요구한다. 1994년 “독일 사회는 다문화 사회다“라고 선언했던 리타의 명제는 ”우리는 이제 모두 다문화주의자들이다“(We are all muticulturalists now)라는 명제와 아직 퍽 먼 거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3) 타인종 공포증과 다문화적 애매성
다문화주의 현상은 피할 수 없는 현대 사회의 요구다. UN통계에 따르면 2005년 현재 전 세계에서 약 19,100만명이 출생국이 아닌 곳에 살고 있는 데 이 수치는 1975년의 두 배다. OECD 통계에 의하면 이주민들의 비율은 오스트랄리아(24%), 스위스(24%), 뉴질랜드(19%), 카나다(18%), 독일(13%), 스웨덴(13%)이다. 유입된 이주민의 언어, 문화, 종교, 사회적 가치 등이 거주민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경우 문제의 소지가 적지만, 결정적인 차이들이 드러날 때 지정학적인 정체성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거주국의 시민권을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 혹은 가질 수 있게 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예민한 정치적인 문제가 된다. 시민권은 세 가지 차원에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게 하는 것인데, 1) 법적 지위와 법적 권리, 그리고 2) 그 사회에서 정치적이거나 여타의 참여권을 가진다는 의미이고, 또한 3) 소속감을 부여하는 공인(公認)적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런 시민의 유입이 이루어질 때 국민국가(nation state)의 정체성에 대한 수정 내지는 새로운 이해가 요구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변화를 위험으로 인지하거나 타인종의 침입으로 인식할 때 타인종 혐오와 공포증이 유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독일은 다원사회 정책의 일환으로 국적법을 개정하여 귀화하는 이들에게 국적을 부여하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독일국민 자신의 국민국가의 성격에 대해서 그 틀을 바꾸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별로 없다. 따라서 국민국가로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독일은 다문화 사회의 요구들을 수용해야 한다는 관용과 인정의 정치의 주체의 논리를 전개할 뿐, 주체 자체의 변화에 대해서는 애매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까닭에 간혹 정치가들은 국민국가의 이념을 되살림으로써 대중 속에 있는 다문화지향성에 대한 반감을 이용하기도 한다. 특히 독일의 통독 이후 나타난 현상중의 하나였던 타인종 공포(xenophobia) 징후는 문화다원주의에 대한 독일인들의 적대적인 심리를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마이클 버커트는 “독일에서의 다문화주의의 실패”라는 글에서 독일인들이 가지고 있는 무슬렘 문화 적대감이 결국 다문화주의의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기독민주당(CDU)의 에드문트 스토이버(Edmund Stoiber)가 유럽공동체, 특히 독일 안에 있는 무슬렘들을 향하여 공개적으로 반다문화주의적인 태도를 보인 사실을 인용한 바 있는 데, 스토이버는 “당신들이 독일적인 가치, 독일 문화, 독일적인 삶을 당신들의 것으로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이 나라를 잘못 택한 거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는 2002년 선거에서 걸 슈뢰더(Gerl Schroeder)에게 패하고 말았지만 이런 사례는 아직도 독일의 정치적 환경 속에서 외국인 혐오 내지는 반(反)다문화적인 정서가 잔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2005년 독일 내 다문화 정상회담을 소집했으나 가장 큰 4개의 터기 이주민 그룹이 참가하기를 거절했던 현실에 직면하여 CDU Angela Merkel 독일 수상은 “다문화주의는 실패했다”고 선언하는 한편 “우리는 무슬렘 외국인들이 수천만의 독일인들의 삶을 재구성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갈등은 다문화주의가 일종의 경사면(slippery slope)과 같이 명료하게 규정되기 어려운 정황을 초래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정황은 독일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주민을 향해 어디까지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개방해야 할지 애매하고, 이주민의 입장에서 본다면 독일인에 비하여 여전히 차별받는 자신들의 지위와 관계를 받아들이기 애매하다는 관계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일인들이 단일민족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집단적인 정신적 징후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독일에서의 다문화주의는 여전히 애매한 지평을 남기며 갈등을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특히 이슬람 전통을 가진 터키인들이 독일 시민권을 얻게 된다 할지라도 그들이 자신들의 이슬람적 정체성을 버리고 독일인의 정체성을 가지기를 거부하는 이상 다문화주의를 통합이나 동화정책으로 간주하는 정책은 결과적으로 끊임없는 갈등을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수적 우파들은 장기간에 걸친 다문화 정책이 필연적으로 국가의 통일성을 파괴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붕괴시키며, 개성 있는 종족 문화를 소멸시킴으로서 전지구적 통합을 초래할 수 있어서 결과적으로 다문화는 무문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하는 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민족이나 종족이라는 개념이 하나의 과정적 개념이라면 몰라도 궁극성을 지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오히려 이런 우파적 견해는 다문화가 불러오는 새로운 차원의 문명사적 변종성의 도래를 두려워하고, 또한 타인종과의 관계를 두려워하는 심리적 징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7. 독일 다문화 정책이 한국 사회에 주는 함의
다문화주의는 저출산 고령화의 길을 걸으면서 전통사회의 구조에 근본적인 변형을 초래하는 사회들이 직면한 현실이다. 우리 사회에 비하여 약 4-50년 앞서 다문화 사회로 진입해 들어간 독일은 우리사회와 종교 문화적 배경은 다르지만 정신적으로 단일민족 순혈주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현대국가 사회에로의 이행기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하여 다소 늦었으며, 또한 분단의 경험을 겪었다는 점에서 우리가 하나의 선진 사례로 여길 수 있는 사회다. 이런 점에서 특히 카나다, 오스트렐리아, 혹은 미국과 같이 다인종 국가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와는 다소 다른 점이 있다. 다인종국가의 정체성에서 다문화성을 찾아간 나라들은 대부분 모자익형 다문화 정책을 기조로 하는 경우가 많으나, 단일민족에 소수인종들이 유입해 들어오는 구조를 가졌던 독일은 동화 내지는 통합 정책을 다문화 정책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한국 사회가 급속도로 다인종․다문화 사회로 이행되어 감에 따라 2050년경에는 독일사회와 유사한 인구구조를 가질 것으로 예견되는 바, 지금부터 다문화 사회에 대한 정책을 세우고, 시민교육을 통하여 다문화성을 이해․수용할 수 있는 토양을 형성하는 일은 매우 중차대한 과제라고 생각된다. 독일이 선진 사례 없이 다문화 정책을 부단히 모색해 왔다면 우리는 독일 등의 선진 사례를 참고하면서 보다 효율적이고, 보다 개선된 다문화 정책을 세워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다행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독일 사회가 전반적으로 기독교적 문명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데 비하여 우리 사회는 이미 다종교적인 상황을 경험해 왔으므로 다문화성에 대한 수용가능성이 다소 더 수월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에는 장단점이 있는 데, 독일의 종교가 다문화적 상황을 수용하고 이를 종교적 네트웍을 통해서 다양한 의식화 작업을 해왔다는 점이 장점이라면, 다문화성이 불러오는 다종교성을 직면할 경우 종교적 신앙고백적 차원에서는 여전히 갈등을 초래해 왔다는 점이 단점이라고 지적될 수 있다. 반면 우리 사회는 종교집단들이 병행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므로 새로운 종교나 신앙고백의 자유를 수긍할 수 있는 데 비해 종교 집단들의 다문화성의 확대를 위한 교육적 기능을 담당하기에는 아직 미숙함이 많다고 생각된다.
또한 독일 사회 구성원의 일부가 여전히 타인종 공포증후적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은, 크게 보아 단일민족 우월성에 기반한 국민국가 관념에 정서적인 일치를 느끼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듯이, 우리 사회도 단일민족국가 관념을 벗어나지 못할 경우 배타적인 민족주의적인 정서와 자기 이해가 다문화적 현상에 대한 거부감과 더불어 인종차별적인 외국인 공포 내지는 혐오감을 촉발할 수도 있을 것이라 우려 된다. 이 문제는 독일의 사례를 살펴볼 때 끊임없는 갈등의 근원이 되어 왔다. 따라서 이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보다 심층적으로 전개되는 시민교육, 새로운 문화적 패러다임 개발, 그리고 인권교육과 민주교육이 조기에 실시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독일이 동화와 통합이라는 다문화 정책을 세우면서 자국민에게는 관용과 수용의 태도를 넘어, 단일민족문화 구조에서 다인종 다문화성에 기반한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취약했다고 우리가 평가한다면, 우리 사회는 조금 더 서둘러 다인종․다문화성에 기반한 한국인의 자기 정체성을 새롭게 모색하는 정신적, 철학적, 종교적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새로운 다문화 상황에 토착화된 민족, 국가의 정체성을 새롭게 규명하지 못할 경우 독일 사회와 같이 주류문화와 유입문화 간에 갈등이 점점 증폭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다문화현상을 거부하거나 비하하는 국수주의적이거나 민족주의적 비판담론을 보다 성숙한 차원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이주민들의 구체적인 요구들을 수용할 수 있는 정책이 세워져야 할 뿐 아니라, 독일이 독일인들에게 제공하는 모든 사회 복지적 혜택을 이주민과 그 가족들에게 제공하는 과제와 더불어 체계적인 언어교육, 사회보장제도 보장, 교육적 혜택, 직업 훈련과정을 제공함으로써 이주민들의 정착과정을 돕고, 장기적으로 이주하여 거주하는 이들에게는 내국인과 동일한 권리를 부여할 수 있는 법적 사회적 장치의 마련하려 노력한 과정을 살펴 우리도 그러한 구체적인 정책이 세위지고, 실시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런 절차는 독일의 사례로부터 얻을 수 있는 바, 이주민의 인간다움을 보장하기 위해 요구되는 필연적인 과정일 뿐 아니라, 민주사회의 보편적 책무라 보아야 할 것이다.
8. 나오는 말
한스 큉은 (Hans Kueng) 포스트모던한 세계, 식민후기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세계윤리(Global ethic)을 제안한 바 있다. 자유 없이 정의 없고, 정의 없이 평화 없다는 그의 관점은 다문화 시대에서 종족적, 국가적 정체성을 중시해 오던 근대적 유산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지를 제안하고 있다. 평화 교육 없이 대화능력이 주어질 수 없고, 대화능력이 없이는 공존의 윤리를 모색할 수 없다는 큉의 논제들은 다문화적 곤경에 빠진 사회를 향하여 다소 이상적이지만 매우 설득력 있는 실천지평을 제시하고 있다. 포스트모던한 사회의 정치 경제적 구조 안에서 전근대적인 정치적 중심을 찾거나 자기 민족만을 위한 배타적 이해관계만 추구할 수는 없다. 세계 자유무역의 열풍만이 아니라 국가 간에 거대 블록을 형성하고 있는 현실을 이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에 더하여 전지구적인 재난의 징후들도 나타나고 있다. 경제적 관심을 앞세워 삶의 질을 높여온 개발과 발전 이데올로기는 급기야 인류의 환경세계를 파괴해 온 실상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은 독일의 초기 다문화 사회 정책 입안 과정에서는 별로 다루어지지 않았던 문제이다. 다문화 사회 논의가 대체로 지역국가, 혹은 지역단위의 내부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정의와 평등의 윤리, 혹은 인권과 민주화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전지구적인 생존의 문제에 대해서는 사실 이차적인 관심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다문화 정책을 세워야 하는 우리 나라의 입장에서 본다면 독일 사회에서 야기된 다문화 현실 인식과정, 대처과정, 비판과정들은 우리의 논의에서 한 단계 새로운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과제가 될 것이라고 본다.
나는 이런 과제에 더하여 좀 더 포괄적인 평화와 인권사상에 기반한 다문화 논의가 새롭게 전개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한스 큉이 제안한 세계윤리의 여섯 가지 논제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큉의 논제들은 다양성의 긍정과 새로운 종합을 통한 혼종성을 긍정할 수 있는 문화적 혹은 사회 윤리적 환경을 형성하기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과제들이 무엇인지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사회에 비하여 인권의 수위와 민주화의 수위가 다소 취약한 한국사회를 생각한다면 큉의 제안을 통하여 서구사회에서 수렴된 경험을 농축시킬 수 있다. 큉은 인간다움(Das Humanum)이 인류사회의 보편적 척도가 되기 위하여 민주적 보편가치를 긍정하는 문화 속에서 다양한 교육과제를 제시하고 있는 데 이를 다문화적 정황에 적용한다면 다음과 같은 논제들, 즉 1) 자유만이 아니라 정의의 윤리, 2) 평등의 과제만이 아니라 다원성의 윤리, 3) 가부장적 가치 넘어선 파트너쉽의 윤리, 4) 공존을 넘어선 평화의 윤리, 5) 생산성의 가치를 넘어선 환경적 연대의 윤리, 그리고 6) 관용과 용서의 윤리를 넘어선 보편주의(ecumenism), 곧 지구윤리가 제안될 수 있다.
다문화적 경험을 가진 선진 사례들 그리고 다문화적 정황에서 수렴되고 개선된 제안들을 살펴보면서 다문화 사회에로의 이행기에 들어선 우리 한국 사회는 이제 하나의 실험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동화정책이 되든, 통합정책이 되든, 혹은 다문화주의 정책이 되든, 나아가 다인종․다문화 정책이 되는지 우리는 이제 피할 수 없이 다인종, 다문화적 정황에서 새로운 평화와 공존의 길을, 민주적으로/시민주체적으로, 하나의 문화민주주의(Demokratie der Kulturen)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이런 길목에 서서 이 모든 인류사회의 지혜로운 경험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소화해서 우리 정황에 응용하고 실천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우리가 서 있는 셈이다.
-끝-
Friday, October 9, 2009
다문화사회를 준비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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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 1 조
지난해 촛불을 천민민주주의니 선동포퓰리즘이니 하면서 집시법 등의 위반이니 모두 구속하자는 자들에 대항해 헌법 1조를 노래했을 때만큼 헌법에 대한 사랑이 큰 적이 있을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90년 전의 독일 헌법 1조를 그대로 옮긴 이 조항에 대해 당시 독일의 브레히트는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권력이 과연 어디로 가고 국민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물으며 1조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슬프게 노래했다. 그의 노래대로 독일 헌법 1조는 민주공화국이라는 이름 아래 국민을 짓밟고 결국은 ‘나치’로 끝났다. 나치가 끝난 뒤 헌법은 바뀌었다. 지금 독일 헌법 1조는 “인간의 존엄성은 침해할 수 없다.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기구의 의무다”라는 것이다. 브레히트가 살아 있다면 이 조항도 환상이라고 비웃을지 모르겠지만 나치에 의해 짓밟힌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한 것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우리 헌법 1조를 노래한 우리도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혔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헌법 1조는 환상이 아닐까? 그 1조에 의해 무엇이 이루어졌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혀 무자비하게 붙잡혀 간 것 외에 무엇이 남았을까? 그것은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고작 1년이 지난 지금 환상의 신기루로 착각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차라리 독일 헌법 1조처럼 바꾸는 것이 옳지 않을까? 개헌 논의가 야단법석이지만 그 중 헌법 1조를 바꾸자는 주장은 없다. 제헌헌법부터 지금까지 61년간 변한 적이 없다.
인간의 존엄성 짓밟는 권력
앞으로도 촛불을 들 때 우리는 1조를 노래해야 할까?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히고 무자비하게 붙잡혀가야 할까? 나 같은 자들이 수년간 아무리 외쳐도 무시된 것이 헌법재판소 한마디에 바뀌는 것을 보면 대단한 힘을 가진 듯한 헌법재판소가 헌법 1조를 근거로 삼아 촛불을 헌법합치라고 인정하는 결정을 내리는 세월이 언제 올 수 있을까?(그러나 나는 헌법재판소의 다른 결정에는 대부분 반대한다.) 이미 야간집회를 금지한 집시법은 헌법불합치라는 묘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잘못이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니 그것을 이유로 잡혀간 사람들은 모두 당장 풀어주고 집시법 적용도 당장 그만두어야 헌법이 나라의 근본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온 나 같은 자들의 체면, 존엄성이 아니라 최소한의 체면이라도 서지 않겠는가? 아니 최소한의 인간성을 모독당했다는 굴욕감을 느끼지는 않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나는 여전히 추상적인 냄새가 나는 독일 헌법 1조보다 더욱 구체적인 프랑스 헌법 1조가 좋다. “프랑스는 비종교의, 민주의, 사회의, 나눌 수 없는 공화국이다.프랑스는 출신, 인종, 종교의 구분 없이 모든 시민에 대해 법 아래 평등을 보장한다.” 우리 헌법에도 9조에 유사한 평등조항이 있지만 분명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평등이 헌법 1조에 규정된 것은 우리와는 큰 차이가 있다. 나아가 평등은 그 앞에 ‘민주 사회공화국’이라고 한 사회민주주의라는 정체의 가장 중요한 원리라는 점이 더욱 더 큰 차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사회민주주의라고 해도 국가보안법을 들먹일 정도로 천박한 인간들이 지금도 있지만 그것은 이미 61년 전 제헌헌법에서부터 우리 헌법의 원리였다. 물론 그런 원리에도 불구하고 그 실천은 전혀 반대였다. 헌법에 충실했던 조봉암 같은 사회민주주의자가 대통령 선거에서 두 차례나 이승만을 위협하자 간첩이라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졌다. 지금은 그 정도로 야만일 수는 없지만 권력이 저지른 용산참사를 권력이 아닌 당사자 문제라며 모른 체하고, 국가명예훼손이라는 이유로 시민운동가에게 엄청난 액수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몰염치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문제는 그나마 지난 10년의 이른바 두 ‘진보’ 정권이 평등권을 보장하는 사회민주주의 흉내를 처음으로 겨우 조금 내려 한 것을 두고 야단법석이고 그 흉내조차 깡그리 부정하면서 불평등의 나라로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환상
이를 두고도 헌법재판소가 헌법 1조 위반이라고 결정할 시대는 오지 않으리라. 아니 그런 시대는 차라리 오지 않는 것이 좋다. 어둠이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다시 촛불을 켜는 것 외에 아무런 대안이 없다.
<박홍규 | 영남대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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