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갑자기 뛰어 든 무리들에 의하여
곳곳마다 반동을 느끼는 2008년 이었습니다.
가난과 복잡한 사색을 싫어하는 국민성이 불러들인 무리들입니다.
저들이 먼지내며 소용돌이 치고 가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요.
정치나 교회나 매 한가지 입니다.
한 해를 정리하려 책상에 앉았습니다.
교회에 의하여 축제화되고,
장사군들에 의하여 상업화된 성탄절에 시달리다가
문득 새해 첫 날을 내다 봅니다.
이해인 시인처럼 내 마음에 감추어져 있는
"희망"을 불러 냅니다.
가톨릭적 영성이 묻어있는 그녀의 시는
나에게 간혹 일상의 영성과 만나는 길을 찾게 해 줍니다.
새해 첫날의 소망
- 이해인
가만히 귀기울이면
첫눈 내리는 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 같은
하얀 새 달력 위에
그리고 내 마음 위에
바다 내음 풍겨오는
푸른 잉크를 찍어
희망이라고 씁니다
창문을 열고
오래 정들었던 겨울 나무를 향해
'한결같은 참을성과 고요함을 지닐 것'
이라고 푸른 목소리로 다짐합니다
세월은 부지런히
앞으로 가는데
나는 게으르게
뒤처지는 어리석음을
후회하고 후회하며
올려다본 하늘에는
둥근 해님이 환한 얼굴로
웃으라고 웃으라고
나를 재촉합니다
너무도 눈부신 햇살에
나는 눈을 못 뜨고
해님이 지어주는
기쁨의 새옷 한 벌
우울하고 초조해서 떨고 있는
불쌍한 나에게 입혀줍니다
노여움을 오래 품지 않는 온유함과
용서에 더디지 않은 겸손과
감사의 인사를 미루지 않는 슬기를 청하며
촛불을 켜는 새해 아침
나의 첫마음 또한
촛불만큼 뜨겁습니다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어디서나 평화의 종을 치는
평화의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모든 이와 골고루 평화를 이루려면
좀더 낮아지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겸허히 두 손 모으는
나의 기도 또한 뜨겁습니다
진정 사랑하면
삶이 곧 빛이 되고 노래가 되는 것을
나날이 새롭게 배웁니다
욕심 없이 사랑하면
지식이 부족해도
지혜는 늘어나 삶에 힘이 생김을
체험으로 압니다
우리가 아직도 함께 살아서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며 주고받는
평범하지만 뜻 깊은 새해 인사가
이렇듯 새롭고 소중한 것이군요
서로에게 더없이 다정하고
아름다운 선물이군요
이 땅의 모든 이를 향한
우리의 사랑도
오늘은
더욱 순결한 기도의 강으로
흐르게 해요, 우리
부디 올 한 해도
건강하게 웃으며
복을 짓고 복을 받는 새해 되라고
가족에게 이웃에게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노래처럼 즐겁게 이야기해요, 우리
Wednesday, December 24, 2008
새해
Posted by
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at
11:51 AM
0
comments
Sunday, December 7, 2008
불안
불안의 출처는 무엇일까? 하이덱거는 기투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 했다. 우리 존재가 의무와 인식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인 까닭이다. 블로흐는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우리 존재는 항상 열려있어 불안하다고 했다. 희망의 정서가 위협을 받을 때 우리는 불안하다. 그런데 알랑 드 보통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은 존재의 불안이 아니라 관계의 불안이라는 것이다.
"엄청난 축복을 누리며 살아도 전혀 마음이 쓰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보다 약간 더 나을뿐인데도 끔찍한 괴로움에 시달리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한다. 우리의 준거집단에 속한 사람들만 선망한다는 것이다.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다."
인간의 사회 정치 경제적 지위에 대한 민감한 반응이 불안을 불러 온다는 그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단순한 삶의 범주에 제한된 시야와 이해의 협소한 공간안에 포로가 되어 있는 우리 감정의 체계는 사실 오래된 습관의 결과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기보다는 시기와 질투와 경쟁 속에서 자기를 확인하는 습관을 가진 까닭이다. 불안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의 길은 이러한 불안한 관계로부터 자기를 해방시키는 길이다. 보통은 철학과 예술, 정치와 종교, 그리고 방랑의 길에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주 단순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철학과 예술과 종교는 얼마나 다양하고 상대적이며 따라서 불안한가? 그것들은 우리를 새로운 열등감으로 불러들이는 통로들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를 왜곡함으로써 우리를 불안에서 해방시키던지, 관계로부터 이탈시킴으로써 불안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희랍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 처럼 우리가 사는 동안 불안을 벗어나 살 수는 없을 것이라고 본다. 종교를 비롯한 그 무엇도 우리의 불안한 삶을 안정되게 정박시키는 평화의 닷이 될 수 없다.
다만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과 상대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존중의 눈으로 가까운 이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사는 길만 남아 있다. 나와 너를 극단적으로 분리시켜온 주체의 불안을 벗어나는 길은 나의 주체 속에 너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고도의 밀도 높은 감정을 가질 때 가능한 사랑이 아닐까? 이것은 부버의 thou라거나, 타자의 얼굴에서 소외를 이겨내는 레비나스의 이해이기도 하고, 헤셀의 행함의 경이로움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런 길에서 장애가 되는 것은 너를 버리고, 나의 성공을 바라는 것이고, 나의 성공을 나만의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너에 대하여 오만해지는 것이다. 우리 삶의 무수한 비극은 여기서 온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되면 처절한 경쟁과 배제의 싸움에서 피투성이가 된 자신만 남는 것이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밤새 고투한 노인이 건져올린 거대한 고기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앙상한 고기의 뼈대만이었다는 이야기는 바로 우리 삶의 종국이 이러한 장면으로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경쟁과 성공의 논리에서 벗어난 거리 만큼 우리는 덜 불안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벗어나려 노력하다가 다시 그 논리로 돌아갈 때의 비참함은 우리를 더욱 초라하게 할 것이므로 벗어나려는 노력조차 안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와 철학, 일시적 방랑과 유희를 택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한다. 기존의 자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자기가 있는 셈이다. 아니면 자기를 바꾸어 놓고 싶은 자기가 있는 것이리라.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긍지를 가질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남과 비교함으로써 우월함의 근거를 가지고 자긍한다. 그 근거가 박약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든지 혹은 아프리카 사람이 아닌 한국인이라든지 혹은 병든 친구와 같지 않은 자기, 남보다 조금 나은 자기를 인식함으로써 자긍하기 때문이다. 남보다 조금 혹은 훨씬 낫다는 생각때문에 평화를 느낀다면 우리는 얼마나 가학적이며 폭력적인가?
오늘 아침 AFN에서 로벗 슐러의 설교를 들으면서 "proud of yourself!"를 외치는 장면을 보았다. 적극적 사고방식이 겸손과 오만을 어떻게 교활하게 연계시키는지를 느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거대한 힘을 가진 제국의 구성원들에게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목사가 설교한다면, 그들이 범한 무수한 죄악을 회개할 필요도 없고 또한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이 아닐까? 과연 이런 종교에서 불안이 극복될 수 있을까? 더 큰 제국의 폭력을 부추기는 소리로 들려 내 마음이 불안했다.
Posted by
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at
9:55 AM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