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September 29, 2010

피스 메이커와 트러블 메이커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들에게

보수주의자들이 좋아 하는 공자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본다면

트러블 메이커는 분명 반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조용히 중용지도를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일러 덕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이런 이들은 조화로움 보다는

기존의 질서와 평화를 깨기 때문이지요. 이런 이들의 눈에 비치는 예수는 분명 트러불메이커 였습니다.

예수의 죽음 역시 그가 기존의 질서와 공생관계를 유지하지 못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요즈음 여기 저기서 평화라는 말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속기 쉽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평화란 명시적인 개념이 아니니 개념적으로 최소한 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습니다. 사실 로마의 평화, 이스라엘의 평화, 미국의 평화 - 등 이런 개념들은 제국주의적인 평화를

지시하는 것이지요. 이런 제국의 평화를 지속시키는 질서에 순응하고 복종하면 좋지만 이에 저항하면

테러리스트들로 몰리기 쉽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은 명시적인 반평화주의자들로 규정되지요.



제국주의적 질서가 팽패하여, 너나 나나 힘과 숫자의 우위에서 안도감을 느끼며 사는 습속을 가진

제국의 시민들이 되어가는 이들은 제국의 질서를 넘어서는 더 큰 평화, 정의로운 평화에 대해서는

침묵하곤 합니다. 제국의 평화가 있는 데 그 것을 넘어서 더 큰 정의로움을 요구한다는 것은 제국의

질서 속에서 용납되지도 않고 심지어 등골이 가끔 서늘해 질 정도로 보이지 않는 위협 속에 사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제국의 위압적 힘과 논리 그리고 질서를 거스려 살아남을 수 없다는 현실감이 기독교 신앙 속에

하나의 타협점으로 남아 있습니다. 죄인이라는 신학적 언어가 그런 타협을 구속론적으로

잘 포장해 주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까 기독교는 무수한 사회적 악을 멀거니 바라만 볼 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심지어 악의 출현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는

아이러니까지 불러오지요.



피스 메이커라는 말은 나 역시 믿지 못하겠다고 생각합니다. 보다 분명하게 just peace maker라는 말이

더 안도감을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수의 삶을 바라보면 당대의 지도급 인사들과는 거의 벽을

쌓고 살았고, 심지어 그들에게 수회에 걸친 저주를 퍼 붓기도 했습니다. 그런 예수가 홀로 누어 자책하며

트러블메이커가 되는 것은 아닌가 스스로를 곰씹었을지 의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그가 느꼈을 죽음의 위협과 고독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립니다.



그러나 나는 가끔 "이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야!"라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결정론적인 운명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특정한 정황에서 이렇게 반응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정의로움을

지키려는 책임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소명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불의한 상황이 끝없이 이어지는

정황에 연루된 자로서 침묵할 수 없는 자리에 처해 있다는 것은 거의 운명과 같은 것이지 싶습니다. 약삭

빠르게 기존의 질서와 정면 충돌하지 않으면서 살아가기란 성품상 불가능한 것 같기도 하구요.



정의로운 평화를 위한 노력 속에서는 트러블메이커와 피스메이커란 서로 다른 대립적인

존재들이 아니라 사실 한 편에 가깝습니다. 불의한 정황에서 정의로움을 추구한다는 것은

불의를 조장하고 유지시키는 이들의 눈에는 가시같은 존재로서 트러블메이커로 규정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트러불메이커로 규정될 때 끊임없이 스스로를 성찰해야 하는 과제는 "정의로움"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1958년 독일 출판협회가 수여하는 평화상을 수상했던 칼 야스퍼스는 진리와 자유가 부재하는 평화란

참된 평화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내적 평화없는 외적 평화없고, 자유없는 평화도 없다고 했지요.

그리고 그 자유는 오직 진리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자유와 진리가 가져오는 선물이

정의로움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피스메이커인가 아니면 트러블메이커인가 라는 이분적 질문은

우리의 사소한 그리고 중요한 다툼들이 과연 보다 나은 정의로움을 선물로 가져올 진리와 자유를 향한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성찰로 바뀌어져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