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충구 ( http://peaceinasia.blogspot.com ) Date : 2009/03/28 Hit : 96 Recommend : 0
그래도 나는 보수는 무섭다...
나는 간혹 보수주의자들이 무섭습니다.
이번 조갑제와 그 일당들이 모여 좌파 척결을 외치자
검찰이 감동을 먹었는지 총대메고 나서서 MBC 피디를 붙잡아 갔습니다.
아래 김종휘 기자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동일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앗아간 사람을 향하여
용서할 수 있는 그런 용서는 사실 신앙이나 보수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뜻으로 쉽게 돌리는 보수신앙의 결과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보복의 원리의 한계를 인식하는 인간의 유한함에 대한 인식이거나,
교통사고를 낸 젊은이의 인간으로서의 고귀함을 인식할 수 있는 인격을 가진
이들만이 행할 수 있는 고귀한 차원의 판단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흔히 보수주의자들은 인간의 고귀함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매우
짧은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혼구원이라는 집점에 늘 머물지요.
영혼구원을 받지 못한 인간은 덜된 인간, 저주와 심판 아래 있다는 저주의 교설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왔습니다. 그러니 다른 것들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고,
더구나 비기독교 세계는 거짓 구원의 체계일뿐 적그리스도적인 존재라고 여기지요.
그래서 비기독교적인 이들의 죽음을 자신들과 동일하게 평가하지 않는 습성이
깊습니다. 이것이 독일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집단 살해를 당한 유태인들의 비극,
홀로코스트의 신학적 배경입니다.
가장 급진적인 신앙을 가진 퀘이커들은 그들의 삶의 원칙에서
보복의 원리를 제거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의 이락전쟁이 얼마나
파렴치한 것인가를 드러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2006년 평화팀을 구성하여 이락에 갔다가 이슬람 급진파에 붙잡혀
그 중 한사람이 무참히 살해 되었지요. 전신에 무려 11발의 총을 맞았습니다.
그 분의 이름이 Fox입니다.
그런데 이락 평화팀은 놓여났을 때 동료를 죽인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을 위해
미군에게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동료를 죽인 그들을 연합군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사려깊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퀘이커들은 동료의 죽음을 조용히 애도했을 뿐
그를 영웅으로 칭송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국 아프칸 단기선교팀원들은 정말 다른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놓여 난 다음에 미군들은 그 지역을 맹 공격하여
수많은 이들을 죽였습니다. 단기선교팀원들은 낱낱히 자신들이 보고
경험한 것을 증언하다시피 말했던 결과지요.
그리고 거기서 죽은 이들을 순교자로 세워주어야 했지요.
보수신앙이 제도적으로 작동할 때 어떤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는지에 대해서
역사적 반성이 없는 사고는 위험합니다.
개인적 차원에서 일어난 용서를 보수신앙의 결과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입니다.
그 결과 미국 보수주의와 부시정권에 대하여 찬양 동조를 할 수도 있다고
너스레를 떠는 것은 나로서는 참 동의하기 어려운 논리입니다.
결국 이쪽에서는 용서하고, 저쪽에서 벌리는 집단 살상에
대해서는 적당히 맹목적인 지지를 보내는 결과가 되겠지요.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용서의 낭만화는 무서운 사회악을 방관 방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 윤리 차원에서 얻은 경험을 가지고
그 연장에서 제도악의 실상을 간과하는 보수주의는 여전히 문제가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용서는 감동을 주지요. 그러나 바로 그 용서하는 자가 제도적 악을 지지하고 있다면
결국 사회악에 대한 인식과 분석 능력이 취약한 자신은 못보는 것이겠지요.
간혹 은근히 그리고 이상하게 보수를 지지하는 속성을 보이는 이들의 글을 읽으면
"이건 무엇인가?"라고 되 묻다가 이내 참 이중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보수에 대한 선호감이 소위 진보적 신앙인들이 보이는 무례함에 대한 거부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나의 경우 보수에 대한 혐오감이 더 깊습니다.
진보주의자들의 무례함이 불러오는 불쾌에 비하여 훨씬 맹목적이라는 생각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맹목은 무례함 정도가 아니라 삶의 부정에 이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기저귀차고 강단에 올라와 택도 없다!!"는 어느 보수교단 총회장의 신학대학
채플에서 행한 설교가 나를 그렇게 느끼게 합니다.
그는 아마 자기 아들을 죽인 자를 용서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여성에 대한 혐오는
버릴 수 없는 인간으로 존재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보수신앙이므로...
김종희 :: [2009/03/29] 박 교수님 견해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여기에 제 견해를 살짝 덧붙여도 될까 모르겠네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신앙적으로/사회적으로(공적 영역에서) 매우 보수적이면서도, 인격적으로/정서적으로(사적 영역에서) 매우 관대하고 관용적인 사람들이 편하더라고요.
상대방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으나 그걸 공격하는 대신에 존중할 줄 아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경우는 사적 영역에서 신뢰가 견고하면 공적 영역의 문제에 대해서 견해가 다르더라도(심지어 극과 극이어도) 금세 헤어지지 않습니다.
흔하지는 않지만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저랑 개인적으로 친한 분들 중에는 공적 영역에서 보수적인 견해를 가진 분들이 더 많습니다.
물론 저를 아는 분들 중에 저와 같은 캐릭터도 흔치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적지 않더군요.
딕 할아버지의 경우의 얘기를 조금 더 해볼게요.
며칠 전에 저희가 부부 싸움을 해서 그 집을 갈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입니다.
눈치 빠른 섀론 할머니는 아내에게 이유를 물었고, 아내는 대충 설명해주었답니다.
둘 사이에 비밀이 없다는 부부는 그 내용을 공유했습니다.
딕은 저에게 진심으로 걱정하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더 자세히 물었습니다.
미국 사람들치고는(그것도 남부 사람으로) 매우 독특한 캐릭터지요?
아내는 아내대로, 저는 저대로 각자 능력껏(영어) 할 수 있는 얘기는 다 해주었습니다.
딕은 휴대폰 번호 말고 집 전화번호를 알려주었습니다.
새벽 2시든 3시든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전화하라고요.
딕 할아버지는 섀론 할머니한테 혼이 났답니다.
아내한테 들은 얘기를 둘이 나눴는데, 그걸 다시 저한테 얘기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얘기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신뢰하니까 무슨 얘기든지 다 나눌 수 있다고,
비밀 얘기가 새어나갔다고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오히려 두 부부 화해를 시도했습니다.
네 사람은 다 함께 포옹했지요.
그리고 ---
남자들은 따로 영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오늘 나눌 내용은 제자들이 예수를 배반하고 도망하는 대목이었습니다.
딕은 제자들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우리는 얼마나 약하고 악한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너무 잘 배반하는 우리가 회개해야 한다는 식으로,
철저히 개인적인 영역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저는 견해가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이 인간적으로 약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하나님나라에 대한 그들의 기대와 예수의 모습/가르침이 어긋난 것도 그들이 약해진, 도망한 원인 중에 하나일 거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약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동상이몽이 더 큰 원인이 아니겠는가 싶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자기 식으로 하나님나라를 설정하고, 거기에 예수의 모든 것을 꿰어맞추고, 그게 아니면 배신할 인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맞는 얘기인지 틀리는 얘기인지 몰라도, 딕과 저는 이렇게 생각이 다릅니다.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생각이 다를지라도 불편한 마음을 품지 않고 다른 생각을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관계가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상대에게 강권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중요하겠지요.
진보든 보수든 누가 더 자기 신념에 논리적으로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충실한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신념을 깊은 감동으로 전염 내지 감염시켜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게 더 중요해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딕 할아버지를 감동시켜서 진보적 생각을 감염 내지 전염시킬 능력이 없습니다.
질적으로든 양적으로든 보수주의자들의 무례함. 이중성, 아무튼 부정적인 요소들은 진보주의자들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그건 비교할 가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보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무슨 힘으로 이런 사람들을 이길 수 있느냐 하는 점일 겁니다.
마지막으로,
저희가 8월초에 신학 유학생을 위한 멘토링 컨퍼런스를 준비하면서, 강사 중 한 명으로 강남순 교수님을 초청하려고 했는데,
마침 훨씬 더 중요한 프로젝트가 스위스에서 열리기 때문에 참여할 수 없겠더군요.
아쉽기는 했지만, 전화로라도 짧지만 인사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박충구 :: [2009/03/29] 김종희 기자님! 반갑습니다.
진솔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듣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이지만,
신학대학에서 근 20년을 강의해온 경험을 통해 남는 것은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의 인식론적 한계였습니다.
바로 보수적 신앙인들이 신앙의 어떤 정수처럼 느끼는 그것이
억압기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성실한 반추를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성문제가 그렇고, 정치문제가 그렇습니다.
지금 이명박 정부를 지지하는 뉴라이트들과 함께 앉아 있는 소위 기독교 지도자들을 보면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교회라는 장에서 그들은 이미 타협적인 기독교적 전승에
흠씬 젖어 있으면서도 안그런척 위선을 떨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인신론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확신범같은 것이지요.
예컨대 손양원목사나 딕/새론 부부처럼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용서와 화해를 그리스도적인 실천으로
받아들이면서 넓은 영역에서의 실천과제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지요.
부시정권을 지지하고, 오바마를 비난한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결국 미국
공화당을 지지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제국주의적 우월성을 점하기 위한
전쟁광들이 모여 있는 집단을 지지하는 것처럼 내게는 보이는 까닭입니다.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지나친 생각일까요?
또 하나의 문제는 진보주의자들이나 소위 자유주의자들 중에도 딕부부 못지 않게
개인적 차원에서의 용서와 화해와 사랑을 나누는 이들이 많습니다. 저의 글에게
Fox 예를 들었지만요.
제가 보기에는 혐오감을 불러오는 무례한 이들은 보수/진보의 차이가 아니라
사람됨의 차이라는 생각이 들고, 신앙이나 사조로 미루어 본다면
신본주의적 확신을 앞세우는 보수주의자들이 나는 더 무섭다는 것입니다.
진보주의자나 자유주의자들은 적어도 신의 이름을 빌어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는 신학적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규정된)신의 뜻을 수행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하지요. 이슬람이나 유대교나 기독교를 막론하고
모든 근본주의자들이 가지는 정치적 결집력은 여기서 나옵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런 경향의
중앙에는 매우 교활한 책략가들이 순진한 신앙인들을 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진보와 보수는 사실 교회현장에서 교파나 교단을 초월하여 형성되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장감성을 막론하고 거의 80%이상이 사실 보수주의적 신앙이 아니라면 교인으로 머물수
없는 이들일 것입니다. 합리성을 존중하는 신자들은 점점 교회를 떠나고 있는 형편이지요.
이번 학기에도 나의 학생들 중에 몇몇 사람은 나를 "좌파"로 규정하고
뒷걸음질을 치느라고 고생하고 있습니다.
평화와 인권을 옹호하는 학자들이 교회 안에서
좌파로 간주되는 것 또한 사실과 관계없이
참으로 단순한 도식에 의한 평가입니다.
이명박은 사회에서 좌파척결을 몇몇 한기총 목사들은
교회 안에서 그들이 규정하는 좌파 척결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리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으로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이런 이들이 바뀌지 않으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인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예수와 아무런 상관없이 보수적 교리가 세뇌시킨 바
영혼구원이 지상의 과제라는 그들의 평생의 확신을 지키기 위한 행동의 결과지요.
나의 선생님이었던 변선환 교수를
종교재판에서 처형하던 그들이 아이러니 하게도
오랜 동안 신학교에서 함께 지낸 벗, 동료,
선후배 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목회에 성공했고, 훌륭한 목사로 칭송을 받고 있으며
온갖 희생과 용서의 길을 걸어온 분들이기도 합니다.
과연 인간다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 주일 아침 되묻게 됩니다.
김기자님의 견해에 대부분 동의하면서 어느 한 부분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일전에 대형 목사의 성적 일탈에 대한 글에도 이견을 제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성적 이탈의 본질을 단순화하는 것도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성과 사랑을 단순 매도하거나, 법의 심판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행위에 대한 진실한 평가보다는 개인의 보수적 도덕관념을 지키기 위한
분노일 뿐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의 부도덕을 공개 비난하는 이들이
나는 그리 깨끗하고 순결한 영혼을 가진 이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공개적인 공격을 받고 있는 이의 주변인들이 가질 고통에 대하여 냉혹할 정도로
무관심한 분들이지요. 교회라는 데는 이보다 훨씬 잔혹한 논리를 융통시키기도 하지요.
이것도 위의 변선환 교수 처형 사건과 본질상 다를 바가 없습니다.
미국에 계시니 왜 미국 교회가 동성애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지를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거부함으로써 자기를 지키려고 보수주의자들은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곤 하지요. 이런 의미에서 나는 보수주의자들이 무섭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김종희 :: [2009/03/29] 박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서 동의가 되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래서 제 입장에서 다른 견해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르겠습니다, 교수님은 뭔가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받으실 수도 있겠지요.
개인적인 요즘 제 신학적 태도는 분명 한쪽으로 확 쏠려 있습니다. 시간이 가고,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그러해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걸 내놓고(공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걸 얘기하는 순간 한쪽 편으로 규정당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좌니 우니, 보수니 진보니, 뭐라 규정되는 것에 대해서 불편하게 느끼지는 않지만, 그로 인해 공적 영역에서 많은 손실을 겪게 되는 것이 내키지 않습니다.
가령, 제가 선호하고 다니면서 공부하고 싶은 신학교가 한국에 있습니다. 제가 그 학교를 나오면 그 순간부터 저는 '무엇으로' 규정됩니다. 그것이 <뉴스앤조이> 내지 '교회 개혁 운동'에 득이 될까 실이 될까를 생각해보면 답이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뉴스앤조이>를 하면서 끊임없이 요구받았던 것이 일종의 '신앙고백'입니다. 정체성의 요구지요. 우리의 신앙고백, 우리의 미션, 우리의 비전. 하지만 한 번도 그걸 얘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걸 드러내는 순간 한쪽으로 규정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공적인 일을 하는 동안은 계속 그런 고민 속에 살게 될 것 같습니다. 근데 요즘은 제 성향과는 많이 달라진 <뉴스앤조이>를 보면서 조금 어색해하기도 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요, 그것이 10년 가까이 갖고 있는 저의 관심사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 교인들의 성향을 60 : 30 : 10 이라는 비율로 얘기한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아닌데 예수 믿고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면서 사는 60%, 제대로 예수 믿으려고 애쓰는 10%,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30%. 물론 딱 맞는 비율은 아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요.
60%는 천당 가든 지옥 가든 제 관심권 바깥에 있고요, 저의 관심사는 30%와 어떻게 대화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30%는 신학적으로 대단히 보수적이지만 양심과 현실을 비춰볼 때 뭔가 잘못된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고, 누구한테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떤 변화가 두렵기도 하고,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10%) 나랑 다르다 해도 그렇게 사는 사람을 보면 존경스럽기도 하고 도와주고 싶기도 하고. 아무튼 그런 사람들이 분명 있습니다. 저도 그런 사람들 덕/도움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이 진보의 논리성, 합리성, 탁월성, 뭐 이런 것 등에서 나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보수/진보의 구분과 무관하게, 개인을 진심으로 대하는 태도, 그런 진정성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근데 그게 그리 쉽지는 않더라고요.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는 그리 실적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공적으로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박 교수님 말씀에 대한 반론은 아닙니다만, 제가 딕 할아버지에 대한 글을 쓴 것이나, 여기다가도 2개의 글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까닭은, 제 생각과 행동의 의도가 대부분 30%와 소통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고, 그들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라는 걸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얘기가 자꾸 길어집니다만, 저는 "<한겨레>의 가치를 품고 <조선일보>식 글쓰기로 대중과 소통하는 것"이 정말 불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씨름하고 있습니다. 가끔 후배 기자들에게 강간과 섹스와 딸딸이를 예로 들어서 설명합니다. 강간이야 근본주의자들이 하는 짓이고. 보수주의자들이 상대에게 약을 먹여서 정신 몽롱하게 만든 다음 섹스를 합니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강간이지요. 하지만 상대도 그럴 준비가 얼마든지 되어 있으니 경우가 조금 다릅니다만.
문제는 딸딸이입니다. 진보적입네 하면서 혼자 웅크리고 딸딸이 치는 것 같은 글을 읽을 때마다, 저렇게 퀄리티 좋은 걸 왜 지만 혼자 열을 내면서 가공의 상대방도 좋아하리라 착각하면서 땀을 흘릴까 하는 안타까움을 느끼곤 합니다. (아마 이 정도 읽고 나서 품위 없고 마초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표현들에 역겨움을 느낄 분들도 계시겠지만, 제 수준이 여기까지라서 용서를 구합니다.)
<미주뉴스앤조이>에서 성경 해석과 관련한 글을 가끔 쓰는데, 아주 어정쩡한 입장을 담은 글들입니다. 진보적 성서 해석을 하는 분들이 보기에는 똥 싸다가 만 느낌이 들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보수적인 신학에 물든 사람들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얘기이고요. 그런데 의외로 진지하게 고민하며 질문하는 메일을 제법 받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 고민은 연결해줄 만한 마땅한 곳, 적절한 사람이 제 주변에 별로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정서적으로도 그렇지만, 진보적인 곳에서는 어린애 같은 그들에게 줄 만한 부드러운 것들은 별로 없고, 딱딱한 것만 있거든요.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표현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진보는 아직 잘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관심도 별로 없어 보이고요.
60% 얘기는 더 할 필요도 없고, 그래도 30%가 분명히 있는데, 그들과 어떻게 함께 고민하고 아파하고 즐거워하고 웃고 울까 하는 과제를 안고 씨름해야 할 과제가 10%에게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10%를 향한 제 안타까운 호소는 이겁니다. "혼자 즐기는 딸딸이는 이제 그만, 상대와 함께 즐기는 유쾌한 섹스를!" 그게 이른바 '소통' 아닌가요?
오늘 밤이 지나면 결혼 12주년이 되는 날을 맞습니다. 연애를 시작한지는 꼭 20년이 됩니다. 아내가 애들을 일찌감치 재우고, 방에서 저를 부르고 있습니다. 더 이상 컴퓨터 키보드를 눌렀다가는 내일 집안 분위기 엉망 되겠습니다. 제가 먼저 실천하러, 이만 실례합니다!
박충구 :: [2009/03/29] 즐거운 필담입니다.
결혼 12주년이 아니라 연애 20주년 밤을 축하드립니다..
오늘 동기생 부친 장례식을 다녀오면서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아침에 올린 글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보수와 진보를 너무 손쉽게 말하고 있다는 생각때문이었어요.
영성과 정치를 혼합하며 테러라도 감행하는 십자군적 보수가 무서운 것인데... 하고 생각했지요.
김기자님과 나와 뭐가 그렇게 다르겠나 싶었어요.
생각해보면 보수 100%는 없을 것이라 생각되거든요.
그럴거면 스스로 돌거나 말라버릴거예요.
예컨대 나는 조갑제같은 사람은 조금은 어디가 이상해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하나 차이가 있는데요.
자위는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하나의 비폭력적인 건전한 성행위가 될 수도 있어요.
이번 학기 내가 가르치는 과목중의 하나가 "성과 사랑과 정치" 입니다.
강간과 쎅스와 자위는 다같은 성애의 표현이지만,
하나는 야만이고, 하나는 동성이나 이성이라 할지라고 둘이 성애를 나누는 것이고,
자위는 홀로 그것을 가지는 것이지요.
구지 두 사람이 가지는 사랑만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결혼하고 사랑하는 파트너를 가진 사람만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사고의 연장에 매춘이 있거나, 강간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면 돈거래 관계를 생각한 결혼도 조금 이상한 매춘이 되기도 하고,
결혼관계라도 무례하게 한편의 쾌락만을 추구할 때 강간에 가깝기도 하지요.
하나님이 태초에 자기를 닮은 인간을 만들 때 sex를 창조하셨으니까,
하나님의 sexuality 가 있는 셈이지요. 성은 생각보다 거룩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생명에 대한 강한 긍정이 있어요.
그 결과 아담과 하와간에 일어난 사회적 사건이 동침이었어요.
그런데 이 문제를 heterosexuality로만 보는 견해는 다른 입장을 혐오해 왔어요.
오늘날은 자위나 동성애도 성애적 자기 표현의 하나로 보는 입장이 강합니다.
거리에 가끔 눈에 띠는 sex shop들이나, 유럽 거리에 즐비한 sex movie shop이
그런 문화를 드러내고 있지요. 한국도 밤 12시가 넘어가면 삼류 호텔에서 틀어주던
에로 비디오를 틀어줍니다. 김기자님의 자가발전적인 진정한 sex 개념에 미달하는
류의 인간들이 퍽이나 많은 셈이지요.
사랑은 참으로 까다롭고 번거롭고, 또한 아름답고 신기하고 이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짓기 어려우니
우리를 유혹받게 만들어 놓고, 자식 생산능력을 주셨으니까...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라 다른 류의 영장류와는 달리
시도 때도 없이 즐기기도 할 수 있게 하셨으니....
참 감사한 일이지요.
결혼을 앞둔 이들이 주례를 부탁할 때면
나는 몇가지 묻습니다.
사람을 성애적으로 사랑하는 방법을 아느냐고....
그러면 대개 당황해 합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기독교인들은 미셔나리 포지션이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남성우월적인, 주도적인 성애방식이지요.
그런 경우 자위와 뭐가 다른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러다 이 홈피에서 쫒겨 나겠습니다.
그럼 즐거운 밤이 되시기를...
지강유철 :: [2009/03/29] 제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저도 늘 고민하는 문제인지라 두 분의 대화를 읽으며
느낀 점을 말씀드리고 싶어집니다.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얼마전 이 홈에서 CD음질과 MP3 음질의 차이를 놓고 생각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저는 MP3를 음질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미치는 정서상의 문제 때문에 CD를 선호한다는 점을
말씀드렸고, 공학을 공부하신 엄이재윤님과 역시 공학을 공부하고 한때 방송 장비와 관련된 일을 했던 김세진
형은 기술상 두 가지 사이에 별 차이가 없음을 역설하였지요. 저는 이론상으로 두 분의 주장을 무너뜨릴만한
지식이 없지만 할 이야기가 없진 않았습니다. 이론상으로는 두 분의 이야기가 맞을 지 모르겠지만 MP3가
유통되는 현실로 내려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저를 비롯한 대다수의 MP3소비자들은
온라인에서 유통되는, 특히 이런저런 사이트에서 손 쉽게 얻을 수 있는 파일들이 본래 CD 상태보다 어느 정도로
과감하게 압축된 것인지 잘 모릅니다. 그런 음악을 들으면 많은 문제가 생긴다는 걸 모르는 것이지요. 그냥 사용할
뿐이지요. 김세진 형이나 엄이재윤 같은 분들, 그러니까 CD와 MP3 사이에 음질 차이가 거의 없으며, 자기 스스로
질 좋은 파일들을 선별해서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저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머지 다수들은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파일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지요. 이렇게 보자면 이론상으로 CD와 MP3 사이에 별 차이가
없으니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MP3의 유통 현실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저는 두 분이 진보와 보수를 놓고 나누신 대화에도 이런 것을 적용할 수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저는 박충구 교수
님께서 무섭다고 말씀하시는 보수주의자들의 실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서워하고 경계해야 할 보수주의
자들은 대개 힘이 있고, 사회 속에서 강한 부정정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 또한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확신
에 찬 무서운 보수가 문제가 되지만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만나는 힘도 없고, 역사와 사회에 그렇게 큰 악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착하지만 무지한 보수는 나누어 보아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물론 저도 평범한 일상 속의 보수들이 자
기 아내나 자녀들, 또는 직장의 부하 직원들에게 가하는 각종 압력이나 피해는 별 거 아니라고 주장할 맘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런 보통의 보수를 무서워할 필요는 없으며, 저들에게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희망 또한 포기할 수 없다
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보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정말 위험하고 문제가 되는 보수와 일상의
평범한 보수를 구분해 놓고 대화도 하고, 대안도 찾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힘과 영향력을 가진 무서운 보수는 반대하고 비판하고 경계하되 착하기만 하여 자기가 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힘들게
하는 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쉽지 않겠지만 아군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를 포기하지 말자는 것이지요. 제가 진보(
이 부분에 대해선 저도 손 쉽게 나눌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며 조심스럽게 표현합니다) 진영 사람들에게 가끔 실망을
넘어서 좌절하는 것은 일부 힘있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확신적 보수주의자에게 퍼부어야 할 비판과 공격을 보수에 대해
별 확신도 없고 잘 알지는 못하는 일상의 보수주의자들에게 퍼부을 때입니다. 전 그런 오만이 싫습니다. 저는 어떤 경
우라도 진보는 보수보다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우위를 가지고 너무 쉽게 보통 보수
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쉽게 일반화시키거나 가르치려 들면 좋지 않습니다. 진보는 위에 있기 때문에 더 낮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보수주의자들을 자신의 겸손과 희생과 절제로 감동시키는 진보는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
그리고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조차도 여유와 너그러움을 잃을 때입니다. 저는 김종희
대표가 자신의 마지막 글에서 자기는 보수가 아니지만 딕 할아버지가, "FOX만 보자고 하면 그렇게 해줘야지. 부시 칭
찬하면 맞장구 놓아줘야지. 오바마 흉보면 같이 욕해줘야지."라며 대해 주는 게 자신감의 표현이고 너그러움의 표현이
라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자기는 종이 아니지만 종처럼 될 수 있고, 부자가 아니지만 부자처럼 될 수도 있
다고 한 표현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진보,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제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주변의 진보적 인사들
에게서 저런 여유와 너그러움, 저런 자신감은 별로 없는 듯 했습니다.
한 가지만 더. 제 생각으로는 진보는 진보이기 때문에 보수와 똑 같아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보수보다는 더 책임적
이어야 하고, 보수보다는 보다 희생적이며, 보수보다는 언제나 높은 도덕적 실천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
다면, 그러니까 그것이 빠진 진보라면 저는 보수보다 더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글이 길어져서 더 쓰진 않겠습니다만 제 정체성 혼란의 상당부분은 보수에도 진보에도 낄 수 없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러니까 보수와 진보를 아무런 계통없이 넘나드는 정신분열증적 행태로부터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보수와 진보 사이
에서 너무 종종 길을 잃습니다. 물론 진보가 볼 때 저는 너무도 보수적이고, 보수가 볼 땐 너무도 진보적이겠지만 말입니다.
박충구 :: [2009/03/30] 그렇습니다. 많은 부분 동의해요.
어제 장례식에 다녀오면서 내가 느낀 것이 바로 지강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습니다.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소위 보수적이지만 진보를 향해 열려있는 이들은
극보수들의 만행에 대한 비판이 덧입혀 질 때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고,
진보적이지만 덜 때묻은 보수신앙의 의미를 이해하려는 이에게 진보를 표방하는 진영의
무례함, 여기서 말하는 무례함이란 현실비판을 피할 수 없는 본질이 있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그 무례함에 대한 보수의 비난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이거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보수적 입장에 있는 이들의 터무니 오만을 느끼는 진보나,
진보적 입장에 있는 이의 자기 키를 넘는 비판적 태도는
서로에게 오해와 과장된 느낌을 불러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내리는 결론은
이런 갈등은 서로 배우면서 창조적으로 극복되어야 하지
그저 이해하고 지나가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수십만의 가난한 이락민들의 죽음을 불러오고,
아프칸을 내전상태로 몰아 넣은 부시정권을 지지하는
암묵적인 행위가 가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판적 인식의 부재'에 악이 기생한다는 아렌트가 생각납니다.
재밋는 일화를 소개한 것인데
이야기의 초점을 개인의 차원에서 너무 정치로 비약하여
긴장을 불러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지만
보수 기독교의 지지를 받고 정권을 잡은 이들이
일본 동해에 미군함을 불러다 놓고,
북한 미사일을 격추시키겠다고 호언을 하는가 하면
북한은 남한을 겨냥하여 보복하겠다는 오기를 부리고 있으니..
비판적 능력없는 보수 기독교인들의 무책임에
나로서는 혀를 두를 지경입니다.
선교제국주의적인, 정복주의적 기독교에 대한 반성이 없는 한
이런 역사는 반복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참으로 우울한 마음입니다.
엄이재윤 :: [2009/03/31] 메시지 4928(http://www.yucheol.com/zboard/zboard.php?id=board&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8113)의
경험적으로 얻을 수 있는 단순한 실험을 귀차니즘으로 외면하는 모습도
비판적 인식의 부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부터도 어떤 결과나 방향을 설정해놓고 생각을 끼워 맞추는 경향이 상당히 농후한 것 같습니다만
저에게 있어 대부분의 보수를 믿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박교수님께 말씀하신 것과 같은 그들의 표리부동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보수의 편을 거의 들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저에겐 무례함은 그래도 견딜만한 경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무례함은 공부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고요..
-뻘짓 메이커
이정동철 :: [2009/03/31] 어려운 문제라 끼어들기 힘들지만..
아들이 죽었고, 그 죽인자를 (비록 실수였겠지만) 용서하는 용서앞에 '보수와 진보'를 논하기 힘든것이 사실입니다. 정치적 색깔을 가지지 않는 보수 (결코 존재하기 힘들지만), 순수한 보수는 아름다울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그런 순수함을 이용해서 정치적 파워로 만들어 버리는 보수 지도자들이 욕을 먹어 마땅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순수한 보수주의자들과 대화를 통해서 변화시킨다.. 저는 별로 그런 기대를 안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건 아주 극소수 이고, 논리적으로 완벽하더라도 '감응'이 없이는 변화란 불가능 합니다.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 놓지만, 그것을 위해서 노력을 소비하는것은 낭비라고 까지 생각합니다. 변화는 그 사람의 기존 사고가 무엇이던간에.. 용기있게 한발 가서 고민하는 사람이 할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비록 진보주의자라 하더라도, 새롭게 고민하고 창조할 용기가 없다면 보수주의자와 똑같이 굳어 버리게 될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순수한 보수주의자들에게 그런 용기를 만들어 주기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봅니다. 좀 지나친 주장이며 결론이라고 생각하지만, 설득을 통해 신앙이 바뀌는 것은 제가 못 보았습니다. (제가 설득력이 부족한가요? ㅎㅎㅎ) 이곳에 오시는 분들은 많은 분들이 보수주의적 신앙교육을 받고, 진보적 사상을 접하고, 예수의 모습을 제발견 해가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늘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 논리적이기 때문에 변화 받으셨다면, 그분은 인텔리적이며, 지나칠 정도(?)로 이성적 판단을 중요시 하시는 분일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올바르지만 그길을 가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대화의 장을 만들고, 열어 두는 여유는 가지지만, 진보를 만들어 가는 변화는 새롭게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는 과정을 가야한다고 봅니다. 시간을 통해서 검증해 가는것, 그리고 새로운 나무를 키우듯.. 그래서 그 나무가 옆에 썩어빠진 나무의 물을 충분히 빨아 들일수 있어야 겠습니다. 저는 김종희 기자님의 글을 읽고 조금의 부담감이 있었는데, 지강유철님의 댓글에도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뜻을 잘 알지만, 박충구 목사님의 글을 읽고나서 제가 느끼는 그 부담감이 뭔지 명확해 졌습니다..
물론 제가 같이 일하는 친한 친구가 오바마 욕을 해도, 저는 그 친구가 좋아서 그런 정치적 논쟁에 별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 친구의 정치적 색깔에 동조하거나 상관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가야 할 길을 걸어갑니다. 평생 같은 시각을 가지지 못할지라도, 선거라는 순간에 반대편에 설지라도 (물론 저는 미국 선거권이 없습니다), 그 친구의 순수한 신앙과 착한 행실에 늘 감동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사람에 너무 치중하면 길을 잃어 버리기 쉬운것 같습니다. 길에만 너무 치중하면 사람을 잃어버리구요.. 그렇지만, 사람을 잃지 않으면서 자기길을 가는 무게가 우리의 삶에 있기를 원합니다.
엄이재윤 님의 글을 읽고 아직 (좋은 헤드폰에 없다는 핑계로) '실험'해 보지 못하고 있는 저를 보면서, 굳어져 가는 진보 또는 보수를 봅니다 . 자기가 실험하고, 주변사람들에게 또 실험시켜보고 (마루타? ㅎㅎ) 하면서 얻을수 있는 사고와 생각을 한걸을 가지도 않고 논하고 있는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 실험을 자기에게 하는 용기.. 그것이 우리를 유연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지강유철 :: [2009/03/31] 이정동철님, 댓글을 쓰고 있다가 실수로 날렸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잘 된 것 같기도 합니다. 조금 더 생각해
보고 댓글을 다시 시도해 보지요. 좋은 댓글 감사드립니다. ^^
지강유철 :: [2009/03/31] 엄이재윤님, "경험적으로 얻을 수 있는 단순한 실험을 귀차니즘으로 외면하는 모습도
비판적 인식의 부재가 아닌가 싶습니다.^^"라고 하셨는데요, 맞습니다, 맞고요. 확실히
제게 비판적 인식이 부재합니다.^^ 뭐 거기에 대해선 깨끗하게 승복하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다 쳐도, 단순한 실험을 제시받지 못한 채 오늘도 말도 안 되게 압축된
파일을 아무 생각없이 듣고 있는 수 천 수 만명의 문제는 그대로 남는 게 아닐런지요.
그건 누구해결해야 하나요? 해결이 안 된다면 그건 MP3 업자들 책임입니까, 아니면
그런 소리를 들으며 좋아라~하는 무식한 사람들의 책임입니까?^^
요즘은 그럴 대상도 별로 없고, 이젠 나이 때문에라도 남의 이야길 듣고 자신을 고치지
못하는 고집불통 5학년이 되긴 했습니다만 가장 뜨거웠던 20-30대에 제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반면교사 역할을 했던, 저를 가르친 못된 목사님과 선생님들이었습니다.
때문에 무례함이 공부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엄이재윤님의 말씀에 대해 저는 공감합니다.
저는 중고등학교 때는 물론 대학, 그리고 교회 생활에서 제가 존경하여 믿고 따르고 싶은
인생의 스승을 못 만났습니다. 그 대신 정신병자 같은 목사, 학생들을 패면서 쾌감을 느끼
는 교사들에게 시달리며 젊은날들을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제가 매달릴 수 있
는 유일한 길은 책이었습니다. 책이 아니곤 제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선생이 없었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제 삶에 가장 중요했던 시기에 저를 가르친 것은 선생같지 않은 선생,
목사같지 않은 목사들의 일탈행위였습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저를 키운 것은 이를 악물고 "나는 저 목사처럼 되지 말아야지"라고 했던 다
짐입니다. 그러나 이건 오로지 저만의 '자뻑'이고 다른 분들은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욕하며 닮
은 아들을 보는 것처럼 저의 병깨는 못된 버릇이 꼴보수 목사와 선생들을 욕하다가 배운 것이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이야기에 대한 저의 결론은 간단합니다. 무례함을 통해 배움의 기회를 얻게 되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무례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설득과 감동을 통해 배울 수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저처럼 "난 저목사처럼 되지 말아야지"하면서 이 악물고 다짐하며 배우면 얻는 것도 있
겠지만 욕하며 닮는다는 아주 못된 후유증에 시달릴 수 있거든요.^^
엄이재윤 :: [2009/03/31] 아무튼 전 제 질문에 도사님의 대답 만큼은 꼭 듣고 싶었습니다.^^
도사님과 같은 훈련된 귀와 컴퓨터 스피커로도 충분히 만족하시는 동철님과 같은 귀를 비교 분석하는 것도 재밌겠다 싶었는데
두 분 다 대답이 없으셔서 좀 냉가슴 앓았었죠..ㅋㅋ
이정동철 :: [2009/03/31] 싸구리 귀의 실력을 보여드리죠.. 그 동안 공부한 통계실력도 발휘해 보구요.. 누가 압축의 quality를 잘 구별하는지 함 해보죠.
제가 들어와서.. 멋진 토론을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네요.. 죄송합니다..
엄이재윤 :: [2009/03/31] 동철님, 그거 매트랩으로 웨이브 화일 비교 분석하고 그러면 안됩니다.ㅋㅋ
이정동철 :: [2009/03/31] ㅋㅋㅋ 6개 다 들어 봤는데.. 다 똑깥아서.. Frequency analysis 해볼려고 했죠.. 들켰다.. 그거 정말 다 틀린거예요? 아~~~ 창피..
다 똑같던데.. 이상하네.. 아무튼 다시듣고 점수 매겨 볼께요.
김세진 :: [2009/03/31] 흠, 도사님에게 살그머니 한 마디 하고 나가겠습니다.
착한 보수와 못된 진보의 차이를 구별하는 게 쉽지는 않은데, 저와 장모님의 경우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최근 문제되는 일제고사의 예를 들면 이를 반대하고 용감하게 체험학습을 시키는 부모들은 분명 보수는 아닐 것입니다.
착한 장모님과 못된 저는 그걸 보는 시각이 다릅니다.
김진홍을 좋아하고 이북 출신이시며 대를 잇는 권사이신 장모님에게는 학교와 교육당국이 시키는 일이니 일제고사는 당연한 데,
이를 반대하고 게다가 무단으로 체험학습까지 시키는 학부모와 학생은 이상한 사람들이고 반대를 일삼는 나쁜 진보입니다.
반면에 그런 아이들에게 무단결석이란 단호한 대응과 교사파면의 엄정한 칼날을 들이대는 당국은 '법'을 지키는 수호자입니다.
장모님에게는 이렇게 보수정부의 '법치'를 비판하거나 찬동하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 저를 포함해서 아주 못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일제고사정책이 만약 노무현 정부하에서 나왔다면 착한 장모님의 이런 태도는 180도 바뀌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장모님에게 노무현과 그 일당은 빨갱이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요. 하는 짓마다 다 반대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못된 저는 장모님의 이런 이중적 태도와 의견에 대해 절대 찬동할 수 없습니다. 결혼 초 10년간은 장모님에게 대꾸하면서
열심히 토론하다가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김종희 기자처럼 무조건 들어주고 맞장구 쳐 줄 여유가 없었으니까요.
도사님은 이런 '착한' 보수와 하루 종일 함께 있으면 과연 맘이 덜 불편할 수 있을까요?
엄이재윤 :: [2009/03/31] ㅋㅋㅋ 김세진 선생님.
저 또한 한때 종부세 대상이셨던 착한 장모님께서 여름에 아이들 봐주시러 저희 집에 오시면
석달 동안 참 힘든 상황이 자주 연출되곤 합니다.
천주교 신자이신 장모님은 정의구현사제단은 두둔하시면서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던 노무현 정부는 죽일 넘들이란 생각을 하시더군요.
유난히도 박근혜를 좋아하시는 장모님을 보면
박정희란 한 사람이 전국민에게 끼친 트라우마가 이런거구나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 미국 학교 가보시곤 참 좋아하시는 장모님께
이거 일년에 제가 6백만원 넘게 내는 재산세에서 얼쭈 반이 이리로 들어가서 그런 겁니다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시더군요.
종부세 대상에 들락날락하던 때에 몇백만원에 불그락 푸르락 하시더니
아파트 몇억 오른건 무척이나 좋아하시는 장모님..
딸 편하라고 김치 냉장고를 하나 사주시고
그 냉장고를 갖가지 김치로 가득 채워 놓으시고
온갖 반찬과 양념들을 몸살나게 준비해 두시고
가실 때 용돈과 함께 아이들을 꼭 끌어 안으시던 장모님.
저도 못된 진보인것 같습니다.
지강유철 :: [2009/03/31] 세진형과 엄이재윤님, 보수의 표리부동과 이중행태에 대해, 그리고 예로 드신 경우에 대해 저라고 생각이 다르겠습니까?
사람 다 똑 같지요? 저는 더 미쳐 날 뛸겁니다. 물론 장모님이나 장인어른께 겉으로 드러나겐 못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제가 22살에 세상을 뜨신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이명박과 노무현에 대해 어떤 감정을 드러냈을까 궁금합니다.
60-70년대, 그러니까 농촌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공화당과 박정희를 지지하던 때 공화당원 되기를 포기하고, 그래서 선관위
관리위원을 하셨던 양반이니 진보쪽일 것 같지만 그거야 모르는 일이겠죠. 만약 똑 같은 일을 이명박이 아니라 노무현이 했
다고 해서 난리부루스를 치셨다면 저는 신앙인으로서 그토록 존경하던 아버님을 향한 존경을 거둬 들였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일찍 돌아가신게 참 복이네요. ㅎㅎ
저라고, 제 주변에 꼭 만나지 않으면 안 될 친지나 가족 중에 보수가 없겠습니까? 당연히 있지요. 그분들에 대해 물론 저는
불편합니다. 피하고 싶고,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슬그머니 자리를 뜨지요. 저의 큰 매형 목사님이 노무현을 죽어라 싫어했
고, 유시민 끔찍해 했습니다. 전 그 분들 설득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설득이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 분들은
그렇게 사시다 죽을 것입니다.
엄이재윤님과 세진 형이 저런 예를 말씀하시면서 제게 뭘 설득하시려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설득할 필요가
별로 없는 사안같거든요. 그걸 제게 열심히 설득하려는 것 자체가 보수와 진보를 똑같이 취급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진보
가 보수보다 훨씬 좋고 건강한 이념이라 생각합니다. 때문에 제게 진보와 보수가 똑같은 위치에서 다툰다는 건 어불성설입
니다. 그래서 저는 저런 문제에 대해 답이 매우 심플합니다. 제 주변의 꼴 보수적인 어른들의 행태를 보이기 시작하면 금방은
속에서 욱하지만 이내 평심을 되찾습니다. 보수가 저렇지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언젠가도 제가 이 홈에서 고백을 했습니다만 저는 진보적인 사람들이 모인 동네에서보다는 보수적인
사람들이 모인 교회 속에서 편했습니다. 초록은 동색이 되어서 편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잘 몰라서, 또는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어서 보수적인 생각을 갖고 살던 애들이 만남에 의해 교육에 의해 변하는 걸 봤습니다. 만약 보수적인 교회에서
주구장창 기저귀발언이나 들었다면, 그것말고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면 저는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보수교단을 때려치고
기장으로 가거나 감리교나 성공회로 갔을 것입니다.
반면에, 제가 살아오면서 가장 진보적인 사람들과 교회 생활을 했거나 운동을 했던 것이 1998년 예수마을교회와 개혁연대
였습니다. 예수마을 교회는 거의 모든 교인들이 지식인 청년들이었습니다. 소위 서울대 출신이 절반을 넘었던 것 같고, 연대
나 이대 출신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모두 선교단체 출신들이었지요. 근데 이제까지 청년교역자로 살았던 25년 동안 그렇게
싸가지 없는 년놈들은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매우 진보적이고 매우 젠틀하시다는 평을 듣는 목사님도 라이센스 따지고
숫자와 자기 체면에 매여서 생각에서는 아니었지만 행동에서는 보수와 별반 다르지 않은 행태를 많이 보였습니다. 역시 개혁
연대에 대해서도 몇번 이야기했지만 제가 사무국장으로 있던 시절에 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우리가 싸웠던 세습하는
교회나 그 교회 무식한 목사나 그 목사를 추종하는 똘만이 장로나 부교역자들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시절 함께 했던 김종희 대표는 저와 생각이 달라서 그건 지강유철 당신이 잘못한 책임이 더 크다 말씀하실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대화였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생각을 바꾸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저는 진보나 보수나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합니다. 경우가 다르겠지만 진보도
서로 다른 의견일 때 죽어라 자기 고집하는 걸 보면 보수의 표리부동이나 절대 바뀌지 않는 거 탓할 처지가 못되더라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저의 경우이고, 제가 경험한 일입니다. 때문에 모든 진보가 다 저와 같은 싸기지 없는 학생들을 양산한
다고 생각지 않고, 모든 진보가 그렇게 자기 생각을 고집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정리합니다. 저는 진보가 아니지만, 아니 진보가 못 되지만 진보에 대한 기대가 보수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그래서 보수 너네 이런 거 잘 못하잖아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좀 쪼잔한 진보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진보든 보수든 얼치기
들은 매우 유사한 형태를 보이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 속에 진보를 표방하든 보수를 표방하든 결코 변하지 않을
사람들은 있다고 생각합니다(저는 이런 사람들이 용산 참사에서 보듯 자기나 자기 식구들이 엄청난 일을 당해서 꼴보수를
버리고 진보로, 운동권으로 거듭나기를 바라야 하는 것인지, 그런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보수로 살아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진보가 되는 것은 좋지만 삶의 터전을 잃고 가족이 죽는 처참한 비극을 맛봐야 그게 가능하다면 그냥 보수로
편하게 살다가 가시라고 말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저의 관심은 그밖에 사람들, 그러니 보수든 진보든 자기를
할 수만 있다면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일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야 할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사람들일지라도 진보나 보수 때문에 저들의 모든 장점에 눈감지 않는 배움의 자세와 여유, 그리고 겸손
이 전제된 당당함을 보고 싶습니다.^^
박충구 :: [2009/03/31] 강의 준비하다가 메모를 남깁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눈으로 보면 진보와 보수는 어디다 기준점을 잡느냐에 따라
보수가 진보가 될 수도 있고, 진보가 보수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수는 현실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편안해 하며 수긍하는 기질이 있고.
진보는 현실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는 점에서 안정성이 적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보는 보수의 눈에 가시가 될 수 밖에 없지요.
하지만 이 홈피 안에서 논의하는 보수와 진보는 다분히 개념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들 내 안에 진보, 내 안에 보수를 가지고 있는 회색이 짙습니다.
어떤 때는 놀라운 진보의 색깔을 보이다가도,
어떤 때는 보수의 정서를 감싸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뭐냐?" 라고 다시 묻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이런 딜레마를 피할 사람을 없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진보나 보수에 대한 사례들이 다분이 극단적이고,
변화를 원하면서도 보수의 정서를 피해 사는 이들이 대부분인 까닭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진보를 다분히 사적 경험과 감정을 가지고 싸잡아 비난하면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걸까?"라고 의심하게 되지요.
진보와 보수에 대한 판단의 기준은 사적 영역보다는 공적 영역에 대한 관심과
싸움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집단의 구조에 대한 분석과 비판,
그리고 정치 경제의 방향에 대한 정책을 묻게 됩니다.
오늘날 미국을 중심한 부유한 나라들의 이익을 전제한 신자유주의 정책,
거기서 파생된 정치 경제 정책들은 사실 약자들로 모인 집단의 희생을 불러오기 때문에
그리고 용산 참사에 대한 언론의 피해자를 재차 가해하는 가학적 논리들이 있기 때문에
진보는 악발이가 될 수 밖에 없어요.
겸손과 희생과 봉사라는 개념은 인간이라면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지켜야 할 인간다움의 조건이지만,
여전히 사적 영역에 의식의 중심을 두고 요구하는 덕목입니다.
그래서 피튀기는 현실을 보고 있는 진보의 시각에는
현실 개입을 꺼리는 보수의 "딴소리"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진보의 장점은 보다 나은 세계라는 공공의 세계를 실천의 장으로 여긴다는 점이고,
이런 인식에 미달하는 이들의 겸손한 몸짓을 간혹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마쵸적이고,
가부장적인 질서를 유지하려는 의도를 버리지 못한
복종의 윤리를 강요하는 것이라고 보는경우가 많습니다.
역사적으로 여성을 종처럼 부려 온 이들이
깊은 회오와 반성과 회개를 하기는 커녕
정서적인 불안을 느끼며 겸손한 태도를 요구하는 아이러니지요.
이런 점에서 보수는 거의 치유불가능한 자기중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보수는 겸손한 적이 없었습니다.
야만의 얼굴을 슨 프랑스 철학자 앙리 레비의 관점에서 볼 때
오히려 여전히 오만하고, 그 오만이 건드려지만 자폭하거나 야만으로 돌변하지요.
이에 비하여 진보는 보수가 보기에는 늘 괴롭히는 오만한 자들로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오만 보다는 합리성에 근거한 비판(나는 비난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보는데,
사실 그 정도를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이 주조를 이룹니다. 그 이유는 태생적
진보가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보수에서 벗어나 진보가 되기 때문이지요.
그 중요한 이유는 보수의 집단 이기성과 시대착오성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 같은 경우, 이런 보수의 문제를 한국적 정황에 맞추어 해석하는 이들이
법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높은 기준을 적용하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에
기준을 잃은 이들이지요. 그러다보니 삼성도 감싸고, 정권에 아부하고,
권력에 휘고, 그 댓가로 기득권을 누리는 데 한국적으로 만족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여기 이 홈피를 드나드는 우리는 "누구?"냐는 질문입니다.
해서 나는 해석의 공동체라고 생각해 봅니다.
하나의 해석을 강요하는 논리보다는
서로의 차이를 좀더 명료하기 밝히는 것, 요구하는 것,
그리고 간혹 그 차이를 이상하게 생각함으로써
서로 배울 수 있는 차이의 공동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이런 담론 공동체가 되려면
영어의 integrity가 요구됩니다. 간혹 전체성, 통전성, 정직성이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는 상대에게 정직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지닌 논리와 가치 판단의 통일성도 요구하게 됩니다.
여기와 저기의 기준이 달라질 때 우리는 그것을 관용이나 너그러움이라고 보지 않고
통전성이 결여된, 정직하지 못한 태도라고 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이런!
내가 또 강의를 하고 있군요.
결론은 이제 서로가 알만큼 알았으니 진보/보수로 나눌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보수 안에 진보가 있고, 진보 안에 보수가 있는 모순들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런 논의를 통하여 스스로를 점검해 볼 의미와 가치는 충분히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여간 그래도 여전히 강자에 의한 약자의 유린이 있고,
약자의 처철한 눈물이 마르지 않는 한,
그런 세계에서 보수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강자를 두둔하는
그런 세상이 지속되는 한 나는 보수를 무서워할 것 같습니다.
Tuesday, March 31, 2009
보수와 진보, 그리고 그 회색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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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March 26, 2009
"사다리를 걷어차라!"
"사다리를 걷어차라!" (Kicking out the Ladder!)
마태복음 5: 2-10
3월 24일
감신대 화요일 채플 설교
박충구 목사
1.
최근 한 웹사이트에 이런 고백적인 글이 올라온 글을 읽었습니다. 그 일부를 소개합니다.
“저는 ‘개혁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상은 근본주의를 가르치는 신학대학을 다녔습니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 탈출하다시피 졸업하고 나서, 저는 말하자면 ‘에큐메니칼 진영’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둘 사이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양자 모두 엄숙하고 진지했습니다! 그리고 양자 모두 목사님과 ‘어른들’이 언제나 공동체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양자 사이에는 단지 세련됨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었지요. 전자는 '영혼구원'의 복음으로 성도들을 위에서 아래로 누르고 있었고, 후자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으로 성도들을 위에서 아래로 누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한국교회 전체로 보면 진보적인 교회가 소수여서 그런지, 어떤 장에서는 연고주의, 학벌주의, 텃세 따위가 보수교회보다 오히려 더 심하기까지 했습니다.”
보수적 신학교를 다니다가 조금 더 진보적이라는 에뮤메니칼 진영으로 건너와서 느낀 것은 여전히 동일한 윤리적 형식이 깊이 배어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남성우월주의와 연장자 서열주의”의 포로가 되어 있는 한국 보수/진보 교회의 현실입니다. 보수진영은 하나님 말씀 앞에서의 복종이라는 개혁을 외치고 있다는 점에서 열려 있어 “말씀과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선자로서의 의식“이 있다면 진보진영은 ”말씀과 하나님의 현존보다 인간의 합리성“을 더 의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인간적인 세력을 형성해 주는 노골적인 연고주의, 학벌주의, 텃세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을 찾기 어려운 세상에서 연고를 따져 학연, 지연, 혈연의 고리를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 것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 학기 신입생들 중에서 거의 30%정도가 PC, 즉 pastor's children입니다. 감리교 세력권 안에서 이들은 성골이라고 부르지요. 성골에 다소 밀리지만 그래도 다른 친구들보다 우월한 지위를 누리는 사람들이 평신도 지도자들의 자제들인 진골입니다. 그 밖에는 모두 평민인줄 알았는데, 한 학생이 “교수님, 평민이 아니라 해골입니다!” 하더라구요. 깊은 자조감을 느꼈습니다.
이런 사회적 계층과 갈등이론이 우스운 소리로만 그치는 것이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대형교회 목사들의 자식들은 과연 성골이라 불릴만한 특권들을 누리고, 그 특권을 이어받는 자식들이 여기 저기 나타나 위세를 떨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이 성골이라 불리는 이유는 이들이 신학교에 들어오기 전에 아버지의 인맥을 타고 봉사할 교회, 후원받을 교회를 남들보다 유리하게 구하기도 하고, 졸업 후에는 아버지의 교회의 전격적인 후원을 받아 유학도 하고, 목회비를 지원받으면서 선교사역이나 목회도 하고, 심지어는 아버지가 은퇴할 때면 아버지가 이루어 놓은 목회적 업적을 송두리째 물려받듯이 계승하기도 하고, 그것이 안 되면 스리쿠션 돌리듯 아버지의 목회지를 빌미로 다른 친구보다 유리한 목회지를 선점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라는 고난의 여정을 걸어온 목회자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자신이 평생 주장해 온 복음, 정의로움, 신앙양심, 깨끗한 믿음을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그 다음 세력들은 진골입니다. 이들은 평신도 지도자들의 자식입니다. 오늘날같이 평신도의 세력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목회자가 힘을 잃으면 그 자리에 공백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여지없이 평신도 지도자가 목회자 뺨치게 목회자의 특권을 이용 합니다. 목회자의 정치적 힘이 약해질 때, 평신도 지도자들은 목회자가 행하는 악습을 동일하게 동의, 반복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들의 교회 내 지위를 이용해서 사사로운 이득을 취한다는 점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논리는 동일합니다. 이들 역시 자신의 자녀들의 미래를 위하여 헌신해 온 분들인지라 자식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줄 수만 있다면 적당히 신앙과 양심을 손쉽게 던져버립니다.
이런 류의 타락한 성골과 진골들의 신앙 속에는 매우 무서운 논리가 담겨 있습니다. 자신들의 집안의 이기성을 위하여 무엇이 정의로움이고 공정한 것인지를 묻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남이 들을까 무서워 쉬쉬하면서 그런 짓들을 했는데, 요즈음에는 이런 행태가 노골화 되었을 뿐 아니라 나팔까지 불면서 파렴치한 짓들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자신의 깨끗한 신앙양심 버리고, 자식들은 자신들의 부모가 배교의 경지에 들거나, 하나님의 교회를 찬탈하는 범죄에 가담하는 것입니다. 소위 성직세습이라는 별명을 평생 붙이고 살아야 하는 이들이 하는 변명은 “동기야 어찌하든지 목회를 잘하면 되지 않느냐“ 라고 항변하듯 주장합니다. 여기서 ”잘 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남의 것을 도둑질해서라도 ”잘 살면“ 되는 것일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을 거두면 된다는 것일까? 우리는 그런 삶을 과연 예수에게서 배운 적이 있다는 말인가? 나는 여기에 오늘의 한국 교회, 특히 감리교회의 영적 타락을 봅니다. 나의 질문은 이 것입니다: 과연 젊어서부터 이렇게 타협하는 이들이 정말 어느 순간 정의와 자유와 진리를 위하여 자기를 버릴 수 있을까? 이들이 말하는 ”잘하면 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질문입니다.
2.
오늘의 교회와 한국 사회를 바라보면 문득 성(聖)과 속(俗)이 뒤집힌 세상이 아닌가 라는 착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거룩해야 할 자리가 너무나 조야한 속된 야합이 벌어지는 자리가 되고, 우리가 이방인들처럼 바라보던 세속 사회에서 영성을 주장하는 교회의 천박성을 나무라는 소리가 울려나는 것을 듣습니다. 나는 간혹 우리 교회 안에서 영성을 말하는 이들이 영성을 운운하면서 동시에 뻔뻔스럽게도 끊임없이 노골적으로 동료 인간을 차별하고, 파당을 짓고, 연고를 따라 이익을 쫒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그리고 철저하게 세속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어서 - 부디 영성을 말하려면 최소한의 신앙양심을 지키고, 오늘의 세계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최소의 기준, 곧 정의와 평등과 자유의 의미를 이해한 후 영성을 묵상하고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때가 많습니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면서 나는 내 삶에서도 거의 비명을 지르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진리에 대하여 설교하는 자들이 신앙과 신학, 양심과 도덕담론을 떠나서 “너무나 노골적인 사악함”을 버젓이 행하는 것을 바라보며 그런 느낌을 받았고, 요즈음은 감리교 감독 선거를 바라보면서 “너무나 파렴치한 권력에 대한 탐욕”을 추구하는 집단들에 대하여 경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목사들이 진리담론도 거부하고, 도덕담론도 거부하더니 그들이 결국 담합적 세력을 만들어 하려는 짓이 결국 교단의 정치 세력 주류가 되어 하는 것입니다. 보수주의 신학교를 나온 김강기명씨는 오늘의 감리교회의 적나라한 현실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전체로 보면 진보적인 교회가 소수여서 그런지, 어떤 장에서는 연고주의, 학벌주의, 텃세 따위가 보수교회보다 오히려 더 심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미 오늘의 한국 감리교회가 깊은 병에 걸려 있다는 증명은 개 교회 안에서도 이미 충분히 입증이 되었고, 교단정치에서도 입증이 되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앞으로는 더욱 더 심각한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날 것이라고 봅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를 타락시킨 이들이 바로, 일부 진골 성골들을 낳은 사람들이고, 또 그 타락을 대대로 이어받기로 작정하고 심화시킬 이들이 성골, 진골들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종교성을 영달과 성공의 수단으로 삼는 전문 종교 꾼들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성서에 나와 있는 전문 종교꾼 엘리와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 앞에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죄는 거룩함에 대한 범죄입니다. 거룩함을 속된 욕망의 영역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감리교회를 불명예로 전락시키는 이들은 다름 아닌 몇몇의 성골들과 진골들의 부모들입니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불명예의 작품으로 인해 온 감리교회가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이들은 혈연주의적 혜택을 당연시하는 파렴치함에 대한 반성적 사고가 정지되었거나 망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이 영성의 대가인양 행세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비판과 평가가 그릇된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의 본문은 우리에게 명백한 삶의 방향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도 아니고, 베드로의 가르침도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행복론입니다. 부가적인 결과를 제외한다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 내용을 바꾸어 표현해 본다면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디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은 이렇게 불행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부유함을 사랑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슬퍼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하다.
오만한 사람은 불행하다.
이익관계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불행하다.
동료에게 잔인한 사람은 불행하다.
천박한 탐욕으로 더러운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은 불행하다.
거짓 평화를 주장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불의한 일로 성공을 거두는 사람은 불행하다.
예수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행복의 길을 제일 먼저 일러 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세상에는 불행에 이르는 길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 (마태 5: 11-12)
예수는 이 길을 갔습니다. 그의 길을 인연을 앞세워 가로막던 수제자 베드로를 향하여 일갈하며 걷어 차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서라. 너는 나를 시험하는 자로구나!" 오늘의 한국 교회에서 성과 속이 뒤집힌 까닭은 이런 정신을 가진 예언자들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예언자가 된다면 한국 감리교회는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감신이 이런 예언자들을 키워낼 수 있다면 한국 감리교회와 교회는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홍현설 학장님이 감신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을 위하여 지은 교가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예언자의 길과 자손들을 축복하는 구절입니다.
“광야에 소리치며 굽은 길 곧게 하니 그 이름은 예언자, 그 이름은 예언자....”
3.
트리나 폴러스가 쓴 동화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입니다. 그는 한 애벌래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 삶의 의미를 우리에게 넌지시 깨닫게 해주고 있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하나의 애벌래는 삶의 의미를 찾아, 희망을 찾아 모든 애벌래들이 치닫는 경쟁의 세계로 뛰어듭니다. 서로 밀고, 밀리며, 안간힘을 써서 올라가고, 추락하기도 하며 애벌래들이 정상을 향하여 천신만고 끝에 올라가 보니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도의 경쟁세계에서 살아남고, 자본주의 세계가 우리를 늘 자극하는 경쟁, 시기, 질투에 이끌려 남을 짓밟으면 올라가 보니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고, 무의미와 허무, 그리고 남을 짓밟으며 살아 온 자기만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설교 제목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한국인 경제학자 장하준 박사의 책 제목에서 따 온 것입니다. 그는 무한한 자유 경쟁을 유도하는 자본주의 세계가 자극하는 경쟁과 시기와 질투의 세계 속에 우리가 살아가는 한 우리는 결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없고, 오히려 bad Samaritans이 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작 오늘날 국가 간의 시장을 무한 개방하자는 논리를 주장하는 나라들이 지난 과거에 자신들이 오늘날 누리는 부를 얻기까지 결코 자유 방임적 자본주의를 실천한 나라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목사가 아닌데도 장하준 박사는 보다 잘살고, 행복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능가하기 위하여 사다리를 놓고 남들 보다 빨리 높은 곳에 올라가려는 이들을 향하여 그 사다리를 걷어 차 버리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인간성의 깊이에서 본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길인 까닭입니다. 오늘의 경제 위기가 이런 사실을 증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얼마 전 워렌 버펫이라는 증권가의 황제는 “자본주의라는 경쟁 논리의 파티는 끝났다. 오늘의 경제 상황은 파도가 치는 해변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이 다 똑같은 것 같지만, 파도가 지나가면 누가 수영복을 입지도 않고 수영하고 있는지가 곧 들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과연 그의 말대로 경제 공황이 다가오자 미국의 부실한 회사들의 진면목이 드러나고 막대한 공적 자금이 투자되고 있지만 그 회복 가능성이 잘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버펫은 이 세계에서 빌 게이츠 다음에 두 번째 부자입니다. 세계 제 1의 부자, 그리고 제 2의 부자라면 고도의 경쟁이라도 할 것 같은 데, 그는 그의 모든 재산을 빌 게이츠 재단에게 맡기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이유는 빌 게이츠의 자선 사업을 벌이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으로 돈을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죽으면 부인에게 재산의 1%를 주고, 자식들에게는 한 푼도 물려주지 않겠다고 이미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가난할 때 2만 5천불에 샀던 그 집에서 지금도 여전히 살고 있습니다. 탐욕스러운 성직자들이나 타락한 성골 진골들에 비한다면 거의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입니다. 나는 이들이 오히려 예수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이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타락한 성직자들은 자본주의 앞에서 예수의 정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면서도 윤리의식을 가진 이들은 오히려 타락한 성직자들에 비하여 훨씬 인간다움을 지키는 이들입니다.
학점을 받아야 하고,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에게만 장학금을 주면서 어떻게 그렇게 설교하느냐고 나를 나무랄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트리나 폴러스의 애벌래 이야기는 우리에게 한 차원 더 깊은 의미를 일러줍니다. 남보다 앞서려는 시기와 질투를 따라 남을 짓밟고 내 몰며 살아온 길에서 깊은 허무를 경험하던 애벌래는 한 마리의 나비를 만나 행복한 세상,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남을 밟고, 시기와 질투와 경쟁을 하며 사는 애벌래의 삶을 초월하는 세계, 즉 나비의 삶을 바라보고 희망하게 된 것입니다.
애벌래는 마침내 경쟁과 시기와 질투의 길을 버리고, 자기 본성의 깊은 세계를 향한 여정을 떠납니다.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을 깊이 정화하는 영성의 세계, 초월의 세계, 그리고 내면의 세계, 희망을 믿는 믿음의 세계를 품고 고치를 짓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경쟁보다는 삶의 영성, 성실성을 트리나 폴리스가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삶이 허무하고, 경쟁도 무의미하므로 아무 것도 안하는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 허무주의를 초월하는 삶의 비약을 추구하는 종교적 체험이기도 합니다. 마침내 그는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자유, 무한한 공간을 자유롭게 날아갑니다. 꽃들이 기다리는 한 마리의 나비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책 제목이 “꽃들에게 희망을“입니다.
4.
동료와 경쟁하면서 서로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하면서 우리는 결코 서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 길은 예수와 함께 걷는 길이 아닙니다. 시기와 질투를 품고서 우리는 서로 벗들이 될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카인의 흉측함만 남을 뿐입니다. 내가 수고하여 얻은 것이 아닌 것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파당과 혈육과 시기와 경쟁의 사다리를 걷어 차 버리십시오! 여러분들은 영성 운운하기를 먼저 하지 말고, 시기와 질투와 탐욕을 먼저 버리고 나서 예수를 따르고, 그 후에 영성을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성골, 진골, 평민이라는 애벌레가 아니라, 부모라는 사닥다리를 부당한 방법으로 이용해서라도 기어이 여러분들의 벗들보다 더 높은 곳에 기어이 올라가겠다는 애벌레들이 아니라, 그런 시기와 다툼의 차원을 벗어나 무한히 자유로운 영성을 가진 나비의 세계에 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감신 동산에 머무르는 여러분들이 이곳에서부터 서로를 향한 경쟁관계가 아니라, 선의의 경쟁이라는 미화된 경쟁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기와 질투와 암투가 일어나는 자리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자유혼을 가지고 내일의 감리교회에 희망을 줄 수 있는 한 마리의 나비가 되기 위하여 여러분의 내면적 성실성을 쫒아 고치를 짓는 자리로 삼으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남을 짓밟고 밀어내고, 내어쫒고, 모욕하고, 심지어는 저주함으로써 성공을 거두는 세계는 예수의 정신의 빛에서 본다면 불행한 길입니다. 우리는 오직 진실하고 성실하며,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라 살아가는 방법으로, 성공과 번영의 길이 아니라, 예수께서 빌어주신 참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쟁의 사닥다리, 연고주의, 파당주의 - 모든 기득권의 사닥다리를 걷어 찰만한, 그리스도인의 영성에서 우러나는 용기와 품위를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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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March 24, 2009
어느 예술가의 진면목
경악! 음악가 정명훈이 쏟아낸 말들
"계집애들이말야, 한밤중에 찾아와서"
"해고해도 하루면 5백명 모여…미국에 구걸하던 사람들이 촛불을?"
2009년 03월 23일 (월) 00:15:11 목수정
파리에 있는 진보신당 당원들은 하루아침에 유례없는 방식으로 전원 해고된 한국의 국립오페라단 합창단 소식을 접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통해 그들의 복직을 위한 연대활동을 벌이고 있다.
우리가 이곳에서 만난 거의 모든 사람들 - 공연예술노조 위원장, 파리 오페라 합창단 단원들,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 단원들 등 - 은 우리의 설명을 들은 지 3분 만에 정황을 파악하고, 이 놀라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연대와 지지의 뜻을 즉각 표했다.
▲ 지난 2월 국립오페라합창단원들이 공공-운수-건설 노조 결의대회에 나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사진=공공노조)
프랑스 예술가들의 조언
공연예술노조에선 하루 만에 지지 성명서를 발표해 주었고, 바스티유 오페라의 합창단원은 거의 대부분 주저 없이 서명해 주었으며, 한국 오페라 합창단 단원의 복직을 지지하는 거리콘서트에 대한 논의도 자체적으로 진행중이다.
그리고 그 모든 프랑스 예술가들은 한결같이 정명훈을 만나서 지원을 호소할 것을 조언했다. 그들이 보기에도 정명훈은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예술 권력자의 한사람이었기에.
그가 2004년 국립오페라 합창단과 까르멘 공연을 한 후, 자기가 만난 최고의 합창단이라고 극찬했던 바로 그 합창단의 해체 소식에 예술가의 양심을 발휘해주기를 우린 바랬다. 정명훈은 또한, 1994년 그를 부당 해고한 오페라 바스티유극장 측과 힘겨운 소송을 했던 경험을 갖고 있기도 하다.
당시 오페라 바스티유 극장의 노조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으며 뼈아픈 경험을 이겨낸 그였기에, 비슷한 사안에 대하여 그가 충분히 이해하고 자신의 힘을 보탤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비록 이명박과 막역한 사이이긴 하나, 예술가의 순진함에 기인하는 불행한 사건일 것이라고 애써 짐작하며.
3월 20일, 그를 만나기 위해 그가 지휘하는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보러 샤틀레 극장에 갔다.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된 그 콘서트는 완벽하게 우리를 고무시켰다. 나와, 함께 간 성악을 공부하는 학생당원은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사람의 정신이 맑지 않을 수 없고, 정의와 진리를 담지 않을 수 없다는데 전적으로 동의했다.
정명훈의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
공연이 끝나고, 극장 뒤편으로 가서 그를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린 한국 사람들이고 선생님께 간곡히 부탁을 드리고자 하는 일이 있어서 찾아왔다고 운을 떼자, 그는 대뜸 비서를 불러서 그 사람한테 말하라고 했다.
그의 비서에게 우리가 가져간 서명운동 용지를 보여주며, 한국에서 일어난 사태를 설명했다. 그녀는 정명훈이 아마도 이 사실들은 모를 것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오페라 합창단원들이 그의 형을 통해 정명훈의 지원을 호소했던 것을 우린 알고 있었지만, 그 비서의 말을 믿고 싶었다.
그가 다음날 아침 비행기를 타고 떠나기 때문에, 이 내용을 전달해 주고 그에게 서명하도록 할테니 아침에 호텔에 와서 찾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불어로 된 문서를 보고, 한국어였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고 언질을 주었다.
한국의 합창단원들은 문화부, 오페라단과 담판을 벌이는 중요한 날인 다음 주 화요일까지 이 모든 서명을 받기를 원하고, 그는 내일 아침 떠나고... 우린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근처 사이버까페에 가서 한국어 본을 출력하여 밤에 호텔에 전달하기로 했다.
서명보다 더 중요한 건 그의 생각이고, 지지의 발언이다. 중요한 사람들과 중요한 저녁식사 약속이 있어서 갔다는 정명훈씨가 지금쯤 와 있으리라 생각하고, 뫼리스 호텔에 도착했더니 그는 1층 레스토랑에서 몇몇 사람들과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호텔서 쫓겨날 뻔하다
기왕 온 김에 단 3분이라도 그에게 우리의 육성으로 절박한 현실을 전하고 그의 예술가적 양심에 호소하고 싶었기에, 우린 그에게 전달할 문서를 들고 기다렸다. 그러다가 호텔의 한 직원이 우리에게 누구와 약속이 있냐고 묻고, 그렇지 않다면 나가달라고 요구했다.
돈 많은 현대의 귀족들의 충실한 심복 같은 그들은 물리적으로 우리를 쫓아낼 판이었다. 실랑이 끝에 겨우 정명훈에게 남길 메시지와 한글로 된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는 문서를 남기면 호텔측에서 그 문서를 전달하기로 하고, 글을 거의 다 쓸 무렵, 마침 그들의 긴 만찬이 끝이 났다. 정명훈은 우릴 발견하자마자 다가왔다.
조금 전 비서에게 전한 문건을 손에 쥐고 흔들어 대며, “도대체 이게 뭐예요. 이게 뭐하자는 일이예요?” 나는 그의 말을 한국에서 일어난 사태의 경악스러움에 대한 표현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그건 완벽한 오해였다.
그는 도대체 왜 그깟 합창단 하나 없어진 일이 뭐가 대수라고 지금 여기까지 자길 찾아와서 우리가 이러고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 기자도 아니고, 에이전시도 아니고... 도대체 우리를 어떤 사람들로 분류할지를 모르는 듯했다. 단 한 번도 누군가가 사회적 연대 따위를 요청해 온 일은 없는 사람처럼.
약간의 설명 끝에 대충 감 잡은 그는,
“이 합창단이 없어졌다고, 그 합창단을 살려야 되겠다고 지금 여기 와 있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이기에. 그 사람들을 꼭 구해야 돼요? ”
"도대체 얼마나 노래를 잘 하기에"
“선생님이랑 함께 공연했고, 2004년에 프랑스에도 없는 최고의 합창단이라고 극찬한 바 있는 합창단입니다. 그냥 합창단 하나가 아니라, 국립오페라단에 있는 한국에선 유일한 상설 오페라 합창단이 없어진다는 사실이 안타까워서 그 상황을 전하고 선생님의 도움을 청하고자 온 것입니다.
이 합창단을 없애고, 더 좋은 사람들을 뽑겠다는 것도 아니고, 아예 상설합창단을 없애고, 앞으로 모든 공연을 건별로 대학생 단체 같은 곳과 계약해서 공연하기로 한답니다.”
오페라 합창단이 간직하고 있는 그의 찬사는 지나가는 립서비스였는지 그는 자신의 그 합창단에 대한 칭찬을 기억초자 하지 못했다.
▲ 지난 3월 문광부 앞에서 복직촉구 집회 중인 국립오페라단원들(사진=공공노조)
“뭐요? 언제 같이 공연했다구요? ”하고 되물었다.
“한국은 합창단 해체해도 다음 날이면 노래 잘하는 사람 500명 금방 모입니다. 한국에서는 합창단 때문에는 아무 문제없어요. 그런데 대체 왜 해체했다는 겁니까, 이유가 뭐래요? ”
“그야 물론 경영효율, 예산 절감이 이유죠. 표면적인 이유는 상설 합창단을 둘 수 있는 규정이 없다는 거고.”
“거봐요. 예산이 없다는 거 아닙니까. 그 예산 당신들이 어디서 만들 거예요? 다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하는 건데. 당신들이 나서서 지금 뭐하는 거예요?”
"당신들이 나서서 지금 뭐하는 거예요?"
“아니요. 오히려 오페라단 예산은 올해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돈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예산 집행의 우선 순위를 잘못 두고 있는 게 문제죠.”
“이봐요. 내가 서울시향에 있는데 거기서 일 년에 5~6명씩 해고당해요. 여기만 해고당하는 사람들 있는 거 아니예요. 지금 온 나라가 다 그러구 있는데, 합창단 하나 없어졌다고... 이 사람들이 여기까지 와서...그리고, 도대체 나더러 뭘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 서명하라구?”
우린 오페라 바스티유에서 단원들이 서명한 서명지를 보여주며, 거의 모든 합창단원들이 서명했다, 한국에서 국회의원들이나 정부에서 오로지 프랑스에서 진행되는 서명운동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프랑스에서의 지원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 같다고 말했다. 6페이지에 빼곡히 담긴 바스티유 오페라단원들의 서명을 보면서도 그의 태도에는 티끌만한 변화도 없었다.
“그거 백날 해봐야. 아무 소용없어요. 내가 한국 가서 이거 알아 볼 거예요. 오페라 단장한테 물어보죠. 어떻게 된 건지.”
그의 말이 맞다. 그가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서명을 (할리도 없겠지만) 한다한들 아무 의미도 없다. 이제 그의 본심을 알았으니, 우린 더 기대할 것이 없다. 그리고 그가 사건의 정황을 묻게 될, 해고 당사자 오페라 단장한테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는 너무나 뻔했다. 그는 그들의 세계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터이다.
"촛불시위, 그게 말이나 됩니까"
늦은 밤이니 빨리 투숙할 것을 종용하는 동행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어했다. 우리가 초반에 자기 소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한 번 남의 일을 위해 한밤중에 그에게 달려온 우리를 외계인을 보듯하며, 왜 남의 일에 나서서 이러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했다.
우리는 운동을(militant)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국 오페라의 발전을 위해, 예술가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으며 함께 일하는 세상을 위해서 연대하고 있다고 말하자, 그제서야, 그는 우리의 정체를 알아차렸다는 듯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그 100만 명이나 촛불 들고 거리에서 서서 미국 쇠고기 안 먹는다고 시위하는 그런 사람들이란 말이죠? 40년 전에는 미국에서 뭐 안 갖다주나 하면서 손벌리고 있더니, 이제 와서는 미국산 쇠고기 안 먹겠다고 촛불 들고 서 있는 그 사람들. 그게 옳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말이나 되는... 알았어요. 알았어.”
촛불을 든 시민들을 천민으로 묘사한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의 망언이 언뜻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그의 말투와 어휘는 한나라당 의원들에게서 익히 접해오던 그것과 닮아있었다.
“그렇게 불쌍한 사람들 돕고 싶으면 저기 아프리카나 가서 도와줘요. 여기서 그러지 말고.”
이 대목에선 우린 둘 다 경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저 사람이,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온 위대한 예술가 정명훈인지, 바로 조금 전 우리의 영혼을 황홀하게 감싸주던 음악을 선사하던 그 지휘자가 맞는지.
정명훈과 주성영
잠시 멍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과 같은 예술가들을 거리의 불쌍한 걸인 취급하는 저 인간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내 눈빛에는 어쩔 수 없이 그에 대한 무한한 경멸이 담길 수 밖에 없었다. 그 눈빛을 읽었는지, 정명훈은 제대로 역정이 났다.
“도대체 제 정신을 좀 차리세요. 공부 좀 하란 말이야. 세상이 그런게 야니야. 이 계집애들이말야. 한 밤 중에 찾아와서.”
비속어까지 서슴지 않는 그를 향해, 나는 그에게 제대로 적합한 말인 “정신차리라”는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당신이나 정신 차리세요!”
그는 거의 우리를 때릴 듯이 씩씩거리며 “불쌍한 사람들 돕고 싶으면 아프리카에나 가라구.” 다시 한 번 아프리카를 들먹이며 코앞까지 다가와서 소리 질렀고, “기도하라구, 기도” 하는 말을 끝으로 올라갔다.
그의 마지막 말.
“기도하라”.
그에게도 이명박이 서울을 봉헌했던, 그래서 그를 도왔던 하느님이 있었나보다.
"기도하라구, 기도"
나와 성악하는 학생은 분노와 충격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걸었다. 그녀는 울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그 예술가가 저토록 상상할 수 없는 사상의 오물을 잔뜩 머리에 품고 있다는 그 사실을 우린 소화하기 힘들었다. 예술 전체에 대해, 인생 전체에 대해 거대한 사기를 당한 듯한 기분이었다.
▲ 지난 3월 문광부 앞에서 복직촉구 집회 중인 국립오페라단원들(사진=공공노조)
문득 호텔로 오기 전, 샤틀레 극장 주변 까페에서 만난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말이 생각났다. 우린 거기서 만난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한국에서의 사태를 설명했고, 그들은 모두 경악하였으며, 적극적으로 서명운동을 전개해줄 것을 약속했다.
우리가 혹시 정명훈에게 당신들이 동참을 호소할 순 없느냐는 제안에는 단호히 불가를 표명했다. 정명훈은 정치적 사안에는 늘 거리를 두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곁들이는 말이, “당신들 지금처럼 파업하면 한국에선 감옥에 가.”라고 정명훈이 라디오 프랑스 단원들에게 말했다는 거다.
그동안 어떻게 저 고매한 예술가가 이명박과 손발이 맞아 수년간 파트너십을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한 방에 해결되었다.
그는 세상에 태어나서 도대체 어떤 책들을 읽었을까? 그는 연대나 인권, 노동자의 권리 따위의 개념을 송두리째 결핍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합창단원이나 오케스트라단원은 그저 자신의 위대한 예술을 위한 사소한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듯한 발언. 다 갖다 버려도 다음날 얼마든지 손쉽게 충전할 수 있는 건전지라도 되는 듯.
그 사고의 경박함은 이명박, 유인촌, 이소영과 그가 한 치의 차이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사상의 '오물종합세트'
물론 우리가 늦은 시간까지 그를 기다린 결례를 범하긴 했다. 그러나 조용히 옆의 로비에서 기다렸고, 그가 우리를 마주친 시간이 1시였던건, 그들의 긴 만찬이 끝난 시간이 1시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짧은 시간에 자료를 읽어야 할 그가 한국어로 된 자료를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는 초반에 “한국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약속도 안 잡고 무례하게 무조건 사람을 기다리고 끼어든다”면서 우리를 한참 나무랐다. 언짢았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잠시 3분 정도 우리의 설명을 듣고, 알겠다 읽어보겠다고 하며 서명지를 들고 객실로 올라갔어도, 우린 그의 수면을 단지 3분 정도 지체시킬 뿐이다.
긴 얘기를 한 건 그였고, 우린 그가 쏟아내는, 사상의 오물 종합선물세트 같은 공포극을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우린 너무 빨리 넘어갔고, 그것의 연출가가 같은 사람이란 사실에서 정신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은 엄청난 혼란을 느꼈다.
1994년 바스티유 오페라에서 부당하게 해고당했을 때, 그는 노조의 지원을 받아 함께 싸웠고 그래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현재 지휘하는 서울시립합창단에는 노조가 없다. 그가 취임하면서 “음악하는 사람들이 무슨 노조냐”면서 노조에 대해 못을 박았기에 단원들은 감히 노조를 만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무노조 경영 삼성과 비슷하다.
그가 현재 지휘하는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에도 그가 지휘했던 바스티유 오페라에도 강력한 노조가 있다. 한국에서 가진 제왕적 권력이 거기에선 당연히 없는 탓이다. 2007년, 오페라 바스티유는 열흘이 넘는 강도 높은 파업을 하기도 했다. 무려 4만9천명에 달하는 고객들에 대한 환불사태가 있었다.
노조 안되는 한국 예술가, 노조 되는 프랑스 예술가?
이곳의 예술가들이 지금의 안정적인 대우를 받으며 -합창단 연봉은 한화로 약 8천5백만원 내외, 오케스트라 단원은 1억원 내외이며 은퇴까지 맘 편히 일할 수 있는 정규직이다 - 세계 최고 수준의 음악을 안정적으로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은 예술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창작기반을 위협하는 경영자의 어떤 요구에도 당당히 맞설 수 있는 강력한 연대와 투쟁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정당히 대우하는 이 사회의 예술노동자에 대한 존중이 수반되었던 까닭이다.
가장 강력한 지원을 기대했던 정명훈을 통해 전원해고 사태를 가능하게 했던 문화 통치자들의 사고의 핵심을 오히려 들을 수 있었다. 문득, 그가 정직하고 양심있는 예술가였더라면, 지금까지 한국에서 일어난 그 수많은 문화예술계에서의 사건에서 그 어떤 입장 표명도 하지않고 지내올 순 없었을 것임을 상기시킬 수 있었다
정명훈은 아름다운 소리를 이끌어내지만 그 소리의 구체적인 주체는 연주자들과 합창단들이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한 예술가로 대우하지 않고, 소모품 정도로 간주하는 그는 더 이상 존경을 바칠 수 있는 예술가가 아니다.
그는 권력자의 그늘 아래 안거하면서, 그가 나눠주는 달콤한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며, 세상의 어두운 구석에 대해서는 외면하는 우리 시대가 만든 신화의 슬픈 이면이었다. 우리가 쇼크를 받는 수고를 감수했을지언정, 그럴싸하게 포장된 무관심을 드러내기보다, 촛불 발언부터 '계집애' 발언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자신의 가면을 벗어준 정명훈이 차라리 고맙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줄 막강한 권력자의 마술지팡이 같은 것은 없다. 그 어떤 친절한 권력도 우리에게 보다 나은 삶을 선물해 주진 않는다. 예술노동자들 스스로가 보다 넓은 연대의 틀에서 그것을 쟁취하려고 나서지 않는 한. 연대의 정신으로 적극적으로 서명에 동참했던 모든 프랑스 예술가들이 정명훈의 발언을 접하였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몹시 궁금하다.
정녕 예술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나
정명훈이 일하는 라디오프랑스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그가 아프리카 아이들과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이 보인다. 유네세프 친선대사로 있으면서 그는 여기저기서 불우한 아이들을 위한 음악회를 가지기도 했다.
불우한 아이들을 위한 콘서트를 여는 자비를 베풀수 있을지언정, 수십 명의 예술가들이 일을 할 수 있는 터전을 빼앗기고 거리에 나앉아도 채워 넣을 예술가들이 얼마든지 있으니 아무상관 없다는, 구세계의 모순에 온전히 빠져있는 자기중심의 거룩한 예술가. 어마어마한 질문 하나가 남는다. 정녕 예술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단 말인가.
출처: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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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March 18, 2009
신영철이 알려준 진실, "법은 허구다"
[창비주간논평] 법관의 화법, 우리의 청취법
기사입력 2009-03-18
재판장을 부를 때, 그냥 "재판장님"이라고 하는 것보다 "존경하는 재판장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이 글을 읽거나 읽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시민을 상대로 한 권고가 아니다. 미래에 속한 법률가들, 사법연수생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이다.
실물 활자의 확인 충동을 억누를 길이 없는 사람은 '알기 쉬운 사법연수생 예절'이란 제목의 교재 21면을 보면 된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라고 매도할 일만은 아닐 터이다. 나름대로 영어권 국가에서 의원이나 법관의 호칭 앞에 '아너러벌'(honorable)이라 붙이는 관습을 번역하여 흉내낸 에티켓이다.
보통 사람들에겐 예사롭지 않은 호칭의 유래나 근거보다 법관들은 왜 그렇게 불리기를 바라는지 더 궁금하다. 자신들의 전문지식과 교양과 인품에 걸맞은 합당한 대우의 요청일까. 어쩌면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실체를 가리기 위하여 분에 넘치는 공경을 강요하는 것일까.
그래도 신분의 무게가 부여하는 체면 때문에 차마 호칭에 관한 그 우아한 욕망을 법정 문앞의 안내판에 게시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주기를 원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법관이 존경받는다면, 혹은 존경받을 가능성이라도 기대할 수 있으려면, 오직 재판이라는 행위를 통해서일 것이다.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법관도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 인간의 한 유형인데, 어떻게 판결로만 말하라고 구속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의 근거는 법의 속성에 있다.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
법은 인간을 꼼짝 못하게 옭아매는가 하면, 새처럼 자유롭게 만들기도 한다. 법치주의라는 말 대신 "법대로"라는 한마디는 삶의 격투장에서 언제든 써먹을 수 있는 무기다. 권리의식의 고양과 법률 수단의 대중화는 개인의 애정문제부터 정치적 싸움까지 모든 분쟁을 소송화하고 있다. 인생과 사회와 우주의 모든 고민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바야흐로 법에 넘겨주려 하고 있다. 법과 법감정의 인플레이션 시대다.
그런데 법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 스스로 생식작용을 통해 탄생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생명력을 형성해가며 인간 제도에 끼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입법자들의 입김이 묻어 있다 하더라도 그 기간이 그다지 길지 않다. 따라서 법전이란 창고에 쌓여 있는 법을 그대로 법정에 가져다 사용하기만 하면 '법대로' 되는 게 아니다.
법관의 전문적이고 기능적이며 진지하고 인간적인 해석과 적용 노력이 곁들여져야만 제구실을 할 수 있다. 법관은 그리하여 법을 매개로 법정의 마당에서 인간과 사회를 향해 수많은 말을 할 수 있고, 영향력을 행사한다. 법관이 입을 다물고 있어도 할 말을 할 수 있는 구조가 거기에 있다.
하지만 법관도 사람이고 판사도 관료적 직업인지라, 기회만 있다면 다른 방식으로도 말하고 싶어한다. 자신의 전문적 기능과 제도적 신분에 자부심과 애정을 가질수록 지위를 상승시키고 유지하려는 욕망을 뿌리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름대로 정치적 판단과 처세의 필요성을 은근히 느낀다.
평소 판결 바깥에서 말할 수 있는 수단과 기회를 확보한 법관은 법원장이나 대법원장 같은 사람들이다. 사법행정 작용을 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기 때문이다. 재판과 사법행정 사이의 경계에서 곡예만 잘하면, 직업세계의 성역과 그곳을 바라보는 세속의 사람들 모두가 부러워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아마도 그 경지에 이르면 눈치있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그의 직책 앞에 '존경하는'을 붙일 것이다.
사법행정권과 재판 간섭 사이에서의 줄타기
성공을 향해 치닫던 법관이 추락 위기에 놓인 모습이란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는 신영철 대법관과 관련된 저간의 사정은 그래서 더 복잡하게 보인다. 안타깝기도 하고, 분노를 일으키기도 한다.
지난해의 촛불집회는 단순한 집단시위가 아니라, 정치사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큰 사건이었다. 새 정부는 심각한 위협까지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그와 관련된 수많은 피고인들을 재판하는 행위는 정치적 의미를 많이 함축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사건을 나누어 맡은 판사들은 제각각 재판을 통한 발언권을 행사하고 있는 셈이었다. 거기에 법원장이 뛰어들어 사법행정권의 발동과 재판 간섭 사이에서 줄타기를 감행했다.
동료 대법관이 단장이 된 진상조사단은 신 대법관의 법원장 시절의 행위를 적절한 사법행정권 경계의 밖으로 내몰아버렸다. 조사단의 결정이 아니더라도, 이번 사건이 불거졌을 때 당사자들은 처음부터 솔직하지 못하였다. 대법원장과 대법관과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거짓말을 하였다. 고위 법관들의 거짓말은 서로의 존경심을 위한 불가피한 방어 수단이었을까?
법이 그렇고, 법관이 그렇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기 때문에 법과 문학의 담론에서 양자의 공통점으로 허구를 들고 있다. 소설은 그렇지, 그런데 법이 픽션이라고? 법이나 소설이 허구라는 진술은 결코 궤변이나 과장이 아니다.
엄청난 숫자의 법은 저마다 어떤 이상적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 입법자들이 나름대로 싸우고 양보한 끝에 우리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최선의 방책이라고 내놓은 것이니까. 그런데 그러한 법이 제대로 지켜진 적이 있는가? 만약 법이 제대로 지켜지기라도 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상적으로 바뀔까? 아무도 그렇게 믿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허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치적 법관들에게 사법불신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법이 허구라면, 법을 허구로 만든 주역은 바로 정치적 법관들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재판은 법관의 고유한 말하기 방식이다. 물론 유일한 방식은 아니지만 말이다. 재판 대신 행정책임을 맡은 법관은 개별 법관의 고유한 말하기를 보장하기 위해 사법행정의 권한을 부여받는다. 그 직무를 함부로 행하다 보면, 법의 허구성을 심화하여 천하에 드러내는 꼴을 당하고 만다.
우리는 비록 허구의 제도 속에서 산다는 사실을 자각하더라도 낙담할 이유는 없다. 허구라고 아무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상과 상상의 뼈대로 제작하는 것이지만, 현실을 규정하는 하나의 모델이 된다. 그 허구를 근거로 우리는 인간의 문화를 구축해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법의 허구는 문학의 허구와 유사하고, 허구 자체는 거짓말과 다르다.
불신의 행동을 한 법관에게 법의 허구성에 대한 책임은 없다. 오직 거짓말에 대한 책임을 물을 뿐이다.
/차병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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