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rch 26, 2009

"사다리를 걷어차라!"

"사다리를 걷어차라!" (Kicking out the Ladder!)
마태복음 5: 2-10

3월 24일
감신대 화요일 채플 설교
박충구 목사


1.
최근 한 웹사이트에 이런 고백적인 글이 올라온 글을 읽었습니다. 그 일부를 소개합니다.

“저는 ‘개혁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상은 근본주의를 가르치는 신학대학을 다녔습니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 탈출하다시피 졸업하고 나서, 저는 말하자면 ‘에큐메니칼 진영’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둘 사이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양자 모두 엄숙하고 진지했습니다! 그리고 양자 모두 목사님과 ‘어른들’이 언제나 공동체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양자 사이에는 단지 세련됨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었지요. 전자는 '영혼구원'의 복음으로 성도들을 위에서 아래로 누르고 있었고, 후자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으로 성도들을 위에서 아래로 누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한국교회 전체로 보면 진보적인 교회가 소수여서 그런지, 어떤 장에서는 연고주의, 학벌주의, 텃세 따위가 보수교회보다 오히려 더 심하기까지 했습니다.”

보수적 신학교를 다니다가 조금 더 진보적이라는 에뮤메니칼 진영으로 건너와서 느낀 것은 여전히 동일한 윤리적 형식이 깊이 배어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남성우월주의와 연장자 서열주의”의 포로가 되어 있는 한국 보수/진보 교회의 현실입니다. 보수진영은 하나님 말씀 앞에서의 복종이라는 개혁을 외치고 있다는 점에서 열려 있어 “말씀과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선자로서의 의식“이 있다면 진보진영은 ”말씀과 하나님의 현존보다 인간의 합리성“을 더 의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인간적인 세력을 형성해 주는 노골적인 연고주의, 학벌주의, 텃세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을 찾기 어려운 세상에서 연고를 따져 학연, 지연, 혈연의 고리를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 것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 학기 신입생들 중에서 거의 30%정도가 PC, 즉 pastor's children입니다. 감리교 세력권 안에서 이들은 성골이라고 부르지요. 성골에 다소 밀리지만 그래도 다른 친구들보다 우월한 지위를 누리는 사람들이 평신도 지도자들의 자제들인 진골입니다. 그 밖에는 모두 평민인줄 알았는데, 한 학생이 “교수님, 평민이 아니라 해골입니다!” 하더라구요. 깊은 자조감을 느꼈습니다.

이런 사회적 계층과 갈등이론이 우스운 소리로만 그치는 것이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대형교회 목사들의 자식들은 과연 성골이라 불릴만한 특권들을 누리고, 그 특권을 이어받는 자식들이 여기 저기 나타나 위세를 떨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이 성골이라 불리는 이유는 이들이 신학교에 들어오기 전에 아버지의 인맥을 타고 봉사할 교회, 후원받을 교회를 남들보다 유리하게 구하기도 하고, 졸업 후에는 아버지의 교회의 전격적인 후원을 받아 유학도 하고, 목회비를 지원받으면서 선교사역이나 목회도 하고, 심지어는 아버지가 은퇴할 때면 아버지가 이루어 놓은 목회적 업적을 송두리째 물려받듯이 계승하기도 하고, 그것이 안 되면 스리쿠션 돌리듯 아버지의 목회지를 빌미로 다른 친구보다 유리한 목회지를 선점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라는 고난의 여정을 걸어온 목회자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자신이 평생 주장해 온 복음, 정의로움, 신앙양심, 깨끗한 믿음을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그 다음 세력들은 진골입니다. 이들은 평신도 지도자들의 자식입니다. 오늘날같이 평신도의 세력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목회자가 힘을 잃으면 그 자리에 공백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여지없이 평신도 지도자가 목회자 뺨치게 목회자의 특권을 이용 합니다. 목회자의 정치적 힘이 약해질 때, 평신도 지도자들은 목회자가 행하는 악습을 동일하게 동의, 반복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들의 교회 내 지위를 이용해서 사사로운 이득을 취한다는 점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논리는 동일합니다. 이들 역시 자신의 자녀들의 미래를 위하여 헌신해 온 분들인지라 자식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줄 수만 있다면 적당히 신앙과 양심을 손쉽게 던져버립니다.

이런 류의 타락한 성골과 진골들의 신앙 속에는 매우 무서운 논리가 담겨 있습니다. 자신들의 집안의 이기성을 위하여 무엇이 정의로움이고 공정한 것인지를 묻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남이 들을까 무서워 쉬쉬하면서 그런 짓들을 했는데, 요즈음에는 이런 행태가 노골화 되었을 뿐 아니라 나팔까지 불면서 파렴치한 짓들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자신의 깨끗한 신앙양심 버리고, 자식들은 자신들의 부모가 배교의 경지에 들거나, 하나님의 교회를 찬탈하는 범죄에 가담하는 것입니다. 소위 성직세습이라는 별명을 평생 붙이고 살아야 하는 이들이 하는 변명은 “동기야 어찌하든지 목회를 잘하면 되지 않느냐“ 라고 항변하듯 주장합니다. 여기서 ”잘 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남의 것을 도둑질해서라도 ”잘 살면“ 되는 것일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을 거두면 된다는 것일까? 우리는 그런 삶을 과연 예수에게서 배운 적이 있다는 말인가? 나는 여기에 오늘의 한국 교회, 특히 감리교회의 영적 타락을 봅니다. 나의 질문은 이 것입니다: 과연 젊어서부터 이렇게 타협하는 이들이 정말 어느 순간 정의와 자유와 진리를 위하여 자기를 버릴 수 있을까? 이들이 말하는 ”잘하면 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질문입니다.

2.
오늘의 교회와 한국 사회를 바라보면 문득 성(聖)과 속(俗)이 뒤집힌 세상이 아닌가 라는 착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거룩해야 할 자리가 너무나 조야한 속된 야합이 벌어지는 자리가 되고, 우리가 이방인들처럼 바라보던 세속 사회에서 영성을 주장하는 교회의 천박성을 나무라는 소리가 울려나는 것을 듣습니다. 나는 간혹 우리 교회 안에서 영성을 말하는 이들이 영성을 운운하면서 동시에 뻔뻔스럽게도 끊임없이 노골적으로 동료 인간을 차별하고, 파당을 짓고, 연고를 따라 이익을 쫒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그리고 철저하게 세속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어서 - 부디 영성을 말하려면 최소한의 신앙양심을 지키고, 오늘의 세계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최소의 기준, 곧 정의와 평등과 자유의 의미를 이해한 후 영성을 묵상하고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때가 많습니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면서 나는 내 삶에서도 거의 비명을 지르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진리에 대하여 설교하는 자들이 신앙과 신학, 양심과 도덕담론을 떠나서 “너무나 노골적인 사악함”을 버젓이 행하는 것을 바라보며 그런 느낌을 받았고, 요즈음은 감리교 감독 선거를 바라보면서 “너무나 파렴치한 권력에 대한 탐욕”을 추구하는 집단들에 대하여 경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목사들이 진리담론도 거부하고, 도덕담론도 거부하더니 그들이 결국 담합적 세력을 만들어 하려는 짓이 결국 교단의 정치 세력 주류가 되어 하는 것입니다. 보수주의 신학교를 나온 김강기명씨는 오늘의 감리교회의 적나라한 현실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전체로 보면 진보적인 교회가 소수여서 그런지, 어떤 장에서는 연고주의, 학벌주의, 텃세 따위가 보수교회보다 오히려 더 심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미 오늘의 한국 감리교회가 깊은 병에 걸려 있다는 증명은 개 교회 안에서도 이미 충분히 입증이 되었고, 교단정치에서도 입증이 되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앞으로는 더욱 더 심각한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날 것이라고 봅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를 타락시킨 이들이 바로, 일부 진골 성골들을 낳은 사람들이고, 또 그 타락을 대대로 이어받기로 작정하고 심화시킬 이들이 성골, 진골들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종교성을 영달과 성공의 수단으로 삼는 전문 종교 꾼들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성서에 나와 있는 전문 종교꾼 엘리와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 앞에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죄는 거룩함에 대한 범죄입니다. 거룩함을 속된 욕망의 영역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감리교회를 불명예로 전락시키는 이들은 다름 아닌 몇몇의 성골들과 진골들의 부모들입니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불명예의 작품으로 인해 온 감리교회가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이들은 혈연주의적 혜택을 당연시하는 파렴치함에 대한 반성적 사고가 정지되었거나 망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이 영성의 대가인양 행세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비판과 평가가 그릇된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의 본문은 우리에게 명백한 삶의 방향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도 아니고, 베드로의 가르침도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행복론입니다. 부가적인 결과를 제외한다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 내용을 바꾸어 표현해 본다면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디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은 이렇게 불행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부유함을 사랑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슬퍼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하다.
오만한 사람은 불행하다.
이익관계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불행하다.
동료에게 잔인한 사람은 불행하다.
천박한 탐욕으로 더러운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은 불행하다.
거짓 평화를 주장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불의한 일로 성공을 거두는 사람은 불행하다.

예수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행복의 길을 제일 먼저 일러 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세상에는 불행에 이르는 길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 (마태 5: 11-12)

예수는 이 길을 갔습니다. 그의 길을 인연을 앞세워 가로막던 수제자 베드로를 향하여 일갈하며 걷어 차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서라. 너는 나를 시험하는 자로구나!" 오늘의 한국 교회에서 성과 속이 뒤집힌 까닭은 이런 정신을 가진 예언자들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예언자가 된다면 한국 감리교회는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감신이 이런 예언자들을 키워낼 수 있다면 한국 감리교회와 교회는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홍현설 학장님이 감신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을 위하여 지은 교가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예언자의 길과 자손들을 축복하는 구절입니다.

“광야에 소리치며 굽은 길 곧게 하니 그 이름은 예언자, 그 이름은 예언자....”

3.
트리나 폴러스가 쓴 동화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입니다. 그는 한 애벌래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 삶의 의미를 우리에게 넌지시 깨닫게 해주고 있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하나의 애벌래는 삶의 의미를 찾아, 희망을 찾아 모든 애벌래들이 치닫는 경쟁의 세계로 뛰어듭니다. 서로 밀고, 밀리며, 안간힘을 써서 올라가고, 추락하기도 하며 애벌래들이 정상을 향하여 천신만고 끝에 올라가 보니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도의 경쟁세계에서 살아남고, 자본주의 세계가 우리를 늘 자극하는 경쟁, 시기, 질투에 이끌려 남을 짓밟으면 올라가 보니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고, 무의미와 허무, 그리고 남을 짓밟으며 살아 온 자기만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설교 제목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한국인 경제학자 장하준 박사의 책 제목에서 따 온 것입니다. 그는 무한한 자유 경쟁을 유도하는 자본주의 세계가 자극하는 경쟁과 시기와 질투의 세계 속에 우리가 살아가는 한 우리는 결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없고, 오히려 bad Samaritans이 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작 오늘날 국가 간의 시장을 무한 개방하자는 논리를 주장하는 나라들이 지난 과거에 자신들이 오늘날 누리는 부를 얻기까지 결코 자유 방임적 자본주의를 실천한 나라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목사가 아닌데도 장하준 박사는 보다 잘살고, 행복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능가하기 위하여 사다리를 놓고 남들 보다 빨리 높은 곳에 올라가려는 이들을 향하여 그 사다리를 걷어 차 버리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인간성의 깊이에서 본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길인 까닭입니다. 오늘의 경제 위기가 이런 사실을 증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얼마 전 워렌 버펫이라는 증권가의 황제는 “자본주의라는 경쟁 논리의 파티는 끝났다. 오늘의 경제 상황은 파도가 치는 해변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이 다 똑같은 것 같지만, 파도가 지나가면 누가 수영복을 입지도 않고 수영하고 있는지가 곧 들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과연 그의 말대로 경제 공황이 다가오자 미국의 부실한 회사들의 진면목이 드러나고 막대한 공적 자금이 투자되고 있지만 그 회복 가능성이 잘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버펫은 이 세계에서 빌 게이츠 다음에 두 번째 부자입니다. 세계 제 1의 부자, 그리고 제 2의 부자라면 고도의 경쟁이라도 할 것 같은 데, 그는 그의 모든 재산을 빌 게이츠 재단에게 맡기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이유는 빌 게이츠의 자선 사업을 벌이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으로 돈을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죽으면 부인에게 재산의 1%를 주고, 자식들에게는 한 푼도 물려주지 않겠다고 이미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가난할 때 2만 5천불에 샀던 그 집에서 지금도 여전히 살고 있습니다. 탐욕스러운 성직자들이나 타락한 성골 진골들에 비한다면 거의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입니다. 나는 이들이 오히려 예수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이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타락한 성직자들은 자본주의 앞에서 예수의 정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면서도 윤리의식을 가진 이들은 오히려 타락한 성직자들에 비하여 훨씬 인간다움을 지키는 이들입니다.

학점을 받아야 하고,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에게만 장학금을 주면서 어떻게 그렇게 설교하느냐고 나를 나무랄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트리나 폴러스의 애벌래 이야기는 우리에게 한 차원 더 깊은 의미를 일러줍니다. 남보다 앞서려는 시기와 질투를 따라 남을 짓밟고 내 몰며 살아온 길에서 깊은 허무를 경험하던 애벌래는 한 마리의 나비를 만나 행복한 세상,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남을 밟고, 시기와 질투와 경쟁을 하며 사는 애벌래의 삶을 초월하는 세계, 즉 나비의 삶을 바라보고 희망하게 된 것입니다.

애벌래는 마침내 경쟁과 시기와 질투의 길을 버리고, 자기 본성의 깊은 세계를 향한 여정을 떠납니다.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을 깊이 정화하는 영성의 세계, 초월의 세계, 그리고 내면의 세계, 희망을 믿는 믿음의 세계를 품고 고치를 짓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경쟁보다는 삶의 영성, 성실성을 트리나 폴리스가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삶이 허무하고, 경쟁도 무의미하므로 아무 것도 안하는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 허무주의를 초월하는 삶의 비약을 추구하는 종교적 체험이기도 합니다. 마침내 그는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자유, 무한한 공간을 자유롭게 날아갑니다. 꽃들이 기다리는 한 마리의 나비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책 제목이 “꽃들에게 희망을“입니다.

4.
동료와 경쟁하면서 서로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하면서 우리는 결코 서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 길은 예수와 함께 걷는 길이 아닙니다. 시기와 질투를 품고서 우리는 서로 벗들이 될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카인의 흉측함만 남을 뿐입니다. 내가 수고하여 얻은 것이 아닌 것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파당과 혈육과 시기와 경쟁의 사다리를 걷어 차 버리십시오! 여러분들은 영성 운운하기를 먼저 하지 말고, 시기와 질투와 탐욕을 먼저 버리고 나서 예수를 따르고, 그 후에 영성을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성골, 진골, 평민이라는 애벌레가 아니라, 부모라는 사닥다리를 부당한 방법으로 이용해서라도 기어이 여러분들의 벗들보다 더 높은 곳에 기어이 올라가겠다는 애벌레들이 아니라, 그런 시기와 다툼의 차원을 벗어나 무한히 자유로운 영성을 가진 나비의 세계에 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감신 동산에 머무르는 여러분들이 이곳에서부터 서로를 향한 경쟁관계가 아니라, 선의의 경쟁이라는 미화된 경쟁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기와 질투와 암투가 일어나는 자리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자유혼을 가지고 내일의 감리교회에 희망을 줄 수 있는 한 마리의 나비가 되기 위하여 여러분의 내면적 성실성을 쫒아 고치를 짓는 자리로 삼으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남을 짓밟고 밀어내고, 내어쫒고, 모욕하고, 심지어는 저주함으로써 성공을 거두는 세계는 예수의 정신의 빛에서 본다면 불행한 길입니다. 우리는 오직 진실하고 성실하며,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라 살아가는 방법으로, 성공과 번영의 길이 아니라, 예수께서 빌어주신 참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쟁의 사닥다리, 연고주의, 파당주의 - 모든 기득권의 사닥다리를 걷어 찰만한, 그리스도인의 영성에서 우러나는 용기와 품위를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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