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과 사람됨.
삶은 참으로 복잡다단하므로 너무나 다양한 이해와 판단을 요구한다. 사람의 판단능력을 평가하는 데에는 몇 가지 중요한 범주가 있다. 그 첫째는 사람됨이다. 그의 판단이 사람다운 따듯한 판단인지 아닌지를 느끼게 해 주는 요소다. 판단에는 그의 인품과 성품이 배어 있어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판단 형식을 통하여 자기를 밖으로 보여주게 된다. 아무리 그 판단이 정확하고 진실하다 할지라도 그 판단의 동기가 자신의 성품을 통하여 걸러지지 않았을 경우 간혹 우리의 판단은 시기와 질투, 증오와 원망, 고의적인 악감정이나 특정한 목적에 의하여 동기화되기 쉽다. 정의를 주장하면서도 그 정의가 맹목적으로 적용될 경우 우리는 그 판단이 정직하고 진실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 데 그 까닭은 그의 주장이 이미 악의나 고의성을 가진 공격의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 사람의 성품이나 인격이 왜곡되었을 경우, 그는 끊임없이 유사한 사건을 늘 벌리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성품을 통하여 여과되지 못한 의도들이 공론과 정의를 주장하는 과정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나는 예수의 판단형식을 볼 때마다 감동한다. 예수의 행위는 결코 악의에 의하여 동기화되지 않는다. 악마에 이끌려 시험을 받을 때 그는 자신의 판단을 유도하는 악마의 숨은 동기에 쉽게 유혹받지 않는 단호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판단형식에 배어있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다. 그것은 사실을 진실하게 보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의도가 앞선 판단은 특정한 사실에 대하여 판단을 내림에 있어서 그 행위의 오류를 과도하게 정죄하거나, 외삽법적으로 뜬금없이 천상의 가치를 대입하는 경우를 본다. 타인의 오류를 지적함에 있어서 의도가 앞설 경우 자신도 모르게 객관적 판단기준이 흔들리는 이들이 있다. 그리하여 공정하지 못한 도덕주의적인 판단을 생산한다. 이 문제는 현대 윤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분석 대상이 되고 있다. 도덕적 판단이란 사실을 판단할 수 있는 인식론적 능력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기준은 자연적으로, 혹은 본질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직관적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 중에는 옳고 그름에 대한 본능적 판단기준을 믿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 대부분의 판단형식은 우리의 지난 경험에서 산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판단은 그 사람이 사실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질, 혹은 능력을 함축하게 된다. 판단자의 인식능력이 협소할 때 우리는 그의 판단에 동의를 보내기 어렵고, 판단자의 판단이 지극히 한 부분만을 확대할 경우 역시 동의를 보내기 어렵다. 진실한 판단은 사실에 대한 깊은 이해가 동반된 판단이어야 한다. 간음한 여인을 앞세운 무리들이 다가 왔을 때 예수는, 그 상황 전반, 그 여인을 정죄하여 손에 돌을 든 자의 가슴 속까지 헤아린다. 그리함으로 그는 한 두 가지 사실만을 미루어 한 가련한 여인의 전존재를 싸잡아 부정하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우리의 판단의 또 다른 성격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판단할 경우 그것에 대하여 신중하며 책임적이어야 한다. 사람의 판단이 공공의 세계에 밝혀질 때 거기에는 매우 선명하게 “판단하는 자”와 “판단 받는 자”가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판단이 어떤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판단을 하게 된다. 공공의 세계에 드러난 판단은 자칫 잘못하면 부차적인 명분싸움으로 전락하기 쉽다. 상대를 그릇되었다고 공공의 세계에 고발한 이는 “상대의 그릇됨”을 필연화하지 않으면 자신의 판단이 오류라고 증명되기 때문에 자신의 명분을 위하여 상대의 오류를 더욱 집요하게 들추어내려 든다. 또한 공적인 세계에서 비난을 받은 이는 그 비난을 통하여 자기 전존재가 너무나 단순하게 요약된다는 사실에 분노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깨닫게 된다. 우리가 벌리는 공적인 다툼들이 간혹 본의보다 더 커다란 사건으로 비약되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악의에 의하여 동기화된 공격자들은 언제나 문제를 확대하고, 과장하며, 상대의 인격과 존재를 부정한다. 예수의 투명하고 맑은 눈 앞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의 죄와 허물이 보였을 것인가? 나는 이런 모습을 예수에게서 찾지 못한다. 예수는 진리의 이름으로 자유를 주려하는 분이었지, 진리의 이름으로 진리에서 벗어난 이들을 정죄하려 드는 심판자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교회의 역사는 그를 최후의 심판자로 묘사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런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는 판단이 결과하는 세 가지 현상이 있다. 정의논쟁, 지위논쟁, 자격논쟁, 그리고 권력투쟁이 한창인 요즈음 많은 이들이 침묵하고 있다. 침묵은 금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마틴 루터 킹은 “적들의 침묵”보다 “벗들의 침묵”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에 대하여 글을 쓴 적도 있다. 우리는 말해야 할 때도 분명 있다. 그러나 만일 침묵을 깨려면 우리는 우리의 성품을 다하여, 우리의 인식능력을 동원하여 신중하게, 그리고 공공의 세계에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진실한 예측을 가늠하는 판단을 해야 한다. 우리가 민주사회의 구성원이라면 우리는 민주적 절차와 원칙을 지켜야 한다. 비록 우리 논쟁의 적대자라 할지라도 그의 전존재를 부정하는 행위나 표현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토론 과정에서 가해지는 도덕적 판단은 제아무리 사실적 판단에 근거한 주장이라 할지라도 그 성격은 아직 추정적 판단일 수밖에 없다. 객관성이 결여된 까닭이다. 교회와 교단, 혹은 대학사회에서 공공의 유익을 위한 민주적 토론과 비판 원칙을 지키려면 우리는 불평과 비난과 비판을 가릴 줄 알아야 한다. 불평이란 부당한 사실에 대한 무책임한 평가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인가 옳지 못한 것에 대하여 불평하는 이들은 그 그릇됨을 시정하려는 노력에는 가담하지 않는다. 살다보면 우리 주변에서 불평을 토로하여 다른 이들을 움직이게 해놓고서, 자신은 전면에서 슬그머니 숨어버리는 이들도 있다. 비난은 옳음을 선택하기 위하여 상대를 비하하거나 그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비난을 할 경우 우리는 상대의 인격과 삶의 귀중함을 송두리째 몰수하기 쉽다. 이 경우는 공공의 이익보다, 그리고 지금 논쟁하고 있는 근본 원인, 즉 그릇됨을 시정하려는 공동의 책임의 자세가 아니라 상대를 몰락시키려는 악의에 더욱 크게 지배를 받는 경우다.
우리는 합리적 비판을 수용할 수 있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보다 나은 삶을 구성하기 위한 우리의 논쟁이 불평이나 비난이 아닌 비판적 견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민주시민이라면 대부분 합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사회가 보장하는 양심과 표현의 자유, 혹은 결사의 자유는 이렇듯 민주적 합리성과 인격성을 전제한 것이다. 그러므로 극단적인 매도와 악의에 찬 비난, 그리고 지나치게 무례한 공격적인 언사는 상대의 인격과 명예를 극단적으로 훼손하는 악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사실이 아닌 주장을 유포하는 경우, 매우 악의적인 거짓이나 자의적인 판단에 따른 허위진술을 담을 경우 그 책임의 정도는 더욱 커진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 판단을 넘어서서 자의적 가치판단을 섞는 행위는 매우 위험할 뿐 아니라 상대에게 굴욕을 안겨주고,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민주사회는 무한정의 자유를 누리는 세계가 아니라 합리성에 근거한 비판이성에 의하여 통제를 받아야 한다. 만일 일방적인 해석과 공격적인 행위들이 빈번할 경우 그 집단은 도덕적으로 저급한 집단이 되기를 자초하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민주적 질서와 합리성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세계에서는 합리성을 가장한 공격적 행위의 폭력성이 지나칠 경우도 많고, 그 반대로 권위를 가진 이들이 그 권위를 오용하거나 남용하여 폭력화되는 경우도 많다. 이럴 경우 우리는 합리성을 상실한 집단이 되어 좌충우돌 비약과 무책임 사이를 오가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 공동체를 전제하고 있는 우리들의 삶은 성서적 규범과 민주사회의 최소규범을 지켜야 한다. 성서적 규범은 우리가 복음의 의하여 자유를 얻었으므로, 그 자유를 가지고 이웃 사랑의 길에 나서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민주사회의 최소규범은 법정적 판단이 내리기 전에 아무리 미워도 상대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권리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들이 복음에 의하여 모든 죄에서 자유함을 받은 이들이라면, 그것이 진실한 우리의 고백이라면 우리의 최대 관심은 “나”나 “우리”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교회, 신앙 공동체에 있어야 하며, 조금 더 확장한다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공동적 삶의 자리” 즉 우리 한국 사회를 섬기는 데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죄로부터 자유한 존재”로서의 자기인식이다. 사리사욕이나 개인적 감정, 혹은 집단이나 파벌의 이익에 사로잡히거나 그것들에 의하여 동기화되는 행위는 제아무리 기독교적인 모양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기독교적 행위를 유발할 수는 없다. 나는 이런 행위를 기독교적인 행위라고 조장하는 예수를 상상할 수조차 없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생명과도 같이 여기는 그들의 선민의식과 혈연관계를 초월하여 하나님 나라라는 삶의 공동성을 확장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협소한 민족주의나 국가안보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반민주적 악법 철폐를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을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가 사소한 이익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명분을 걸고 이전 투구하는 것이 예수 앞에서 어찌 옳겠는가? 정의를 주장하고, 정직함을 주장하기 위하여 폭력을 동원하는 일도 옳지 않다. 간음한 여인을 앞에 두고 보여주신 예수의 모습에서 나는 선명한 메시지, 즉 인간이 먼저이지 정의가 먼저일 수 없다는 메시지를 듣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큰 정의이고, 무엇을 위하여 우리가 싸워야 하는가?
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 되는 자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신앙과 민주사회의 이념이 공유하고 있는 영역이 침해받을 때 우리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의 고귀한 존엄성과 권리가 무시되거나 침해를 받는 현장에 우리가 서 있을 경우, 우리가 복음을 증언하고, 인간에 대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인간 생명의 존귀함과 그 권리를 지키는 일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의 존엄함이 그 어떤 이유에서든지 부정되고 있다면, 그리고 그 인간의 존엄함을 지키기 위하여 민주세계가 합의한 인간의 권리들이 누군가에 의하여, 혹은 어떤 이기적인 집단에 의하여, 혹은 정치권력에 의하여 침해되는 현장이라면 양심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침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영성과 명상적 삶을 살아가면서 침묵을 깨뜨려야 할 경우가 있다면 나는 이런 원칙에서 시작된 사랑과 자유의 해방운동의 지평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지극히 적은 자를 돌보라는 예수의 메시지를 우리가 성서에서 지워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강자보다, 약자를 돌보며 살라는 구약성서의 계약법전의 정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는 오래 동안 정당한 이유가 있을 경우 전쟁조차 벌릴 수 있다고 가르쳐 왔지만, 나는 그런 윤리는 예수의 사상에서 배태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이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주구가 되어 온 사상의 전형이다. 그러므로 집단의 존속과 유지를 위하여 한 인간의 생명의 존엄함을 외면하면서 희생 제물로 바치는 입다의 제의는 불의한 것이다. 이런 기독교의 전력을 새삼 들추지 않더라도, 역사 속에서 상대적인 정의가 이기는 순간, 그간 불의한 행위에 가담한 이들이 약자로 전락할 때라도, 그들조차 기독교적인 이웃사랑의 대상에서 제외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신앙인으로 우리가 거듭나는 것이 옳을 것이다.
Saturday, September 13, 2008
The Personhood in One's Moral Judg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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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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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6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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