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준비
인간의 마지막 권리: <죽음을 이해하고 준비하기 위한 13가지 질문>, 이 책을 쓴 후 간간이 이곳 저곳에서 강연이나 죽음의 윤리에 대한 글을 요청받고 있다. 내일 오후엔 ‘높은 뜻 정의 교회’에서 ‘소중한 생명, 존엄한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할 예정이다.
사실, 개신교 목사이자 신학자인 나는 기독교적 죽음 이해를 가지고는 있지만, 기독교의 죽음 이해가 사람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죽음이라는 사건을 정직하게 직면하기보다 일종의 영지적 도세티즘(假現說)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고 보고 있다.
기독교와 유사하게 죽음에 대한 논의를 남긴 실존주의 철학자들, 하이덱거, 사르트르, 키에르케고어 등, 역시 몸의 사건인 죽음의 문제, 죽어감의 문제를 정신승리로 해결하려 함으로 미진함을 남겼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레비나스의 죽음 이해가 내겐 더 깊이 와 닿는다.
인간의 죽음은 결코 아름다운 것이라든지, 추한 것이라 보아서는 안 된다. 이런 시각에는 건강한 산자의 욕망이 담겨 있고, 그 욕망은 죽어가는 이에게 잔인한 폭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죽음은 자동사로 해명되는 것이 아니라 타동사로 설명되어야 한다. 레비나스의 주장대로 우리는 그저 죽는 것이 아니라 노화와 질병으로 죽임을 겪기 때문이다. 심지어 레비나스는 “모든 죽음은 몸이 살해당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인간의 죽어감은 슬픔, 고통과 고난의 과정이다. 큐블러 로스의 다섯 단계 ‘죽음 수용론’ 역시 이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
수명이 길어진 현대세계에서 우리는 죽어감의 과정을 소홀히 취급한다. 일상에서 추방하여 죽음을 외주주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가족이라는 관계의 그물망이 죽어가는 이의 고통과 외로움을 지켜주며, 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동행했었다.
그러나 수명이 더 길어져 오래 살고 이전의 사람보다 더 노화되어 죽게 될 운명을 가진 우리는, 죽어감의 시간을 서로 지켜주지 못하고, 제도적으로 전문화된 시스템으로 넘긴다. 거기서 죽어감의 시간이 더 길어질 것을 우리는 ‘쿠메의 무녀’처럼 근심하게 된 것이다.
평균수명 83세를 견주어 셈해보니 앞으로 12년, 평균 잡아 내가 살 날은 4,380일, 5,000일도 채 남지 않은 셈이다. 더 슬픈 이른 죽음과 늦은 죽음은 셈하지 않은 것이다. 이 남은 시간을 사소하게 다투고, 시기하고 미워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랑하며 정의롭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다.
사랑을 자기중심의 애욕이라 믿는 이기적인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사랑하는 이의 자유와 정의를 지켜주는 사랑이 제일 멋진 것이다. 불의와 거짓 자유는 사랑의 반대다. 그것들은 탐욕의 불손한 자식으로 자신과 타인의 소중한 삶을 무가치하게 만든다.
우리나라에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승인한 2018년 이후 100만 명 이상이 사전 의료지시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자기 죽음을 타인에게 전적으로 맡기지 않겠다는 주체적 생명 이해를 담은 서약이다.
나는 이것과 더불어 하나 더 서약서를 작성하자고 권하고 싶다. 남은 삶을 최선을 다해 품위 있고, 정의롭게, 그리고 자유롭게 살기를 자신에게 하는 약속을 담은 서약서다.
(Docetism은 초기 기독교를 영육 이원론에 빠져 신앙생활의 본질에 대해 헷갈리게 만들었던 사조다. 영성만을 강조하며 육체성을 소홀하게 여겨 인간의 배고픔, 육체적 고통, 욕망을 왜곡 소외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어서 신학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나는 오늘날 신학과 종교사를 깊이 배우지 못한 사이비 종교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사설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