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가정 교회
지난 토요일부터 주일까지 나는 중국의 중국인들이 모여 예배를 보는 가정교회 한 곳을 방문 했습니다. 아무런 공식적인 증표도 없이 무명의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교회 지도자로 성장하는 그런 모임 이었습니다. 중국은 삼자교회가 중국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대변하고 있지만 삼자교회는 중국의 국가이념의 틀 안에서 선교적 과제를 이해하는 사회주의 국가교회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가정교회들은 국가교회가 가지고 있는 국가권위에 복속된 우상 숭배적 성격으로 인하여 삼자교회에 속하지 않고 스스로 가정 교회의 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야말로 자생적이며, 자발적이고, 자기희생적 입니다. 나는 몇몇 중국인들의 기도와 신앙 고백을 들으면서 그들의 믿음이 참으로 절실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간판도 없고, 주보도 없습니다. 제도와 조직이 없는 이름 그대로 가정교회입니다.
외국인들은 중국 법에 의하면 중국인들을 선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중국내에 있는 자국인들을 위한 한국인 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인도할 수는 있습니다. 삼자교회와 관련하여 이런 저런 행사에 초청받을 수 있지만 사실상 선교의 자유는 원칙적으로 배제되어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많은 기독교 선교사들이 공식적인 루트를 통하기 보다는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서 직간접적인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선교사가 파송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대부분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일하며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말에 의하면 과거보다는 감시와 감독이 약해진 것 같지만, 중국 공안당국의 감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회주의 국가의 정보망이 국민의 사상을 감시하는 셈입니다.
중국은 우리 한국에 비하여 선교 역사가 오래 된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중국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다만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이후 기독교를 박해했고, 선교의 문을 닫았습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순교적 신앙을 지킨 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몇몇 분의 중국인 목사들에 대한 순교적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나는 중국인들의 타협없는 신앙의 정신과 정치적 억압에 평화적으로 저항해온 정신을 느꼈습니다. 이 21세기 한가운데 중국이라는 이 큰 대륙에서는 신앙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국가교회에 속하여 사상적 검열을 받는 교회가 될 것인가 아니면 국가의 억압과 박해를 받더라도 신앙의 자유를 지킬 것인가는 그들이 선택해온 두 길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중국인들이 노동현장에서 한 달에 벌 수 있는 돈은 중국 돈으로 1000위안(한화 약 12만원) 미만입니다. 사회주의 경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부작용이 있지만, 최소한의 삶의 조건들은 기업주가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법적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가 권력이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그 생활의 기준은 이루 열악하기 짝이 없습니다. 일부 공장에서는 식당이나 식탁도 없이 식사를 서서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생존은 가능하지만, 삶의 질은 보편적으로 확대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는 부유층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최고급 수입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빈부의 거리와 격차가 극심해지는 중국 사회를 중국 정부가 어떻게 대처해 나갈런지 궁금해 졌습니다.
중국에는 거대한 대도시가 많습니다. 즐비하게 세워진 고층 아파트들은 정부가 지은 것이 대부분이고, 입주자들은 정부로부터 융자를 받아 자기 소유로 할 수 있지만 여성은 60세, 남성은 65세가 될 때까지 그 융자를 갚아야 합니다. 요즈음은 중국 대도시의 아파트도 서울의 아파트 못지않게 비싸졌다고 합니다. 비싼 경우 평당 2500만원이 넘는 것도 있다고 하니 중국의 일부 부유층은 세계적 수준에서 보아도 상위권의 부유함을 누리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경제적인 자유는 보장하되 사상적 자유는 제한하겠다는 중국 공안당국의 정책에서 나는 모순을 느꼈습니다. 결국 이들은 서구 사회의 종교와 가치를 거부해 왔지만, 경제적인 이해관계는 도모하되 정신적인 긴장과 대립은 유지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중국 친구들의 안내를 받아 인근 유료공원을 가 보았습니다. 입장료는 우리나라 돈으로 15,000원이나 하는 비싼 곳입니다. 노동자 4-5일의 임금에 해당하는 비용이지만 많은 이들이 그 공원에 세워진 위락시설과 문화시설, 소수민족의 풍습을 실연하는 공연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토속 전통적인 가치들을 압도하는 화려한 쇼들이 이 공원의 주요 테마가 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내가 본 쇼는 내가 보았던 파리의 쇼나, 한국의 워커힐 쇼보다도 더 화려했고, 쇼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키가 늘씬한 미녀들이었습니다. 다만 의상 디자인이나 등장하는 인물들이 입고 있는 전통의상들은 과거의 것들이 아니라 과거의 유산을 현대화하여 극도의 화려함으로 채색한 것이었습니다. 과거의 초라한 유산과 자본이 투입되어 화려하게 바뀐 무대 위의 현실은 결국 중국인들에게 지난 역사에 대한 회상을 매우 화려하게 수놓은 것이었습니다.
지난 과거를 재현한 자리에서는 초라함과 조야함이 묻어 있지만, 지난 과거를 상상하는 곳에서는 하나의 찬란한 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공원의 이곳저곳 살피며 다수 인종을 존중하는 뜻을 읽을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지난 역사가 보잘 것 없음, 그리고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잔재로서 그려져 있는 반면, 중국인들의 감흥을 불러오는 것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화려하게 채색된 고급스러움과 서구적 팔등신의 아름다움을 최상의 가치로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원형은 중국적이지만, 이미 그 변형은 너무나 서구적인 이미지를 느꼈습니다. 인류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우리가 과거를 현재의 눈으로 볼 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과거의 그 초라함“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이 삶도 그리고 내가 쓴 글들도 누군가의 눈에 비칠 때 저리 초라할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민족들의 풍습을 살펴보면서 그들에게는 세 가지 주제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느꼈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제단을 중심한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주술적이거나 원시적인 구복신앙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그들의 삶의 중심부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신과의 관계, 남녀의 사랑이야기, 그리고 전사들의 모습입니다. 신들의 존재를 이해하고, 삶의 한 가운데로 신을 불러들인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유약함을 넘어선 신의 뜻과 의지에 따라 살겠다는 경건과 격률을 지닌 삶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어느 곳에서나 사람을 감동시키고, 흠모하게 하는 삶의 이상을 불러오고, 전쟁은 이러한 평범한 이들의 삶을 할퀴고 지나가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평민들은 평화를 사랑하지만, 권력을 가진 이들은 권력과 탐욕의 확장을 위하여 그들을 전사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주일 아침 나는 중국인들과 둘러 앉아 말씀을 증거하고, 점심식사를 함께 나눈 후 두차례의 강연을 했습니다. 한번의 강연을 준비해 갔는데 그들이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 열망이 크고, 듣는 자세가 너무나 진지하고 목말라 하여 열시 반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세 강의를 한 셈입니다. 예수의 윤리사상, 세상의 가치와 예수의 가치, 그리고 구약성서와 계약법전의 윤리사상에 관하여 알기 쉽게 강의했습니다.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들처럼 공범이 되어 창을 닫고, 포장을 친 후 강의를 하고 들었습니다. 이들에게 말씀을 증거 하면서 나는 내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말씀을 증거 하는 순간마다 깊은 동의와 긍정의 태도를 보이는 이들의 신앙이 맑고 아름답다는 것은 느꼈기 때문입니다. 중국 대륙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는 날이 하루 속히 오기를 기약하고 그들의 가정 교회를 떠나왔습니다. 그들은 순전한 마음으로 말씀을 나누고, 음식을 나누며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었습니다.
탐욕과 권력과 이해관계가 개입하지 않은 순전한 신앙 공동체를 경험한 것 같아 가슴이 평안했지만, 자유의 결핍이 불러오는 억압의 그림자를 느껴 돌아오는 길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속히 선교와 찬양의 자유가 중국 땅에도 주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한 조선족 처녀는 말씀을 듣고 공부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5일간의 긴 여행 끝에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그녀가 이곳에서 신앙의 동지들을 만나 말씀을 나누는 공동생활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나에게 주어진 자유가 참으로 감사하고 소중하다는 것은 느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자유가 없는 저들을 보면서 나는 자유를 그저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기만 한 나의 삶이 부끄러웠습니다. 우리의 자유는 소중하기보다 오히려 방종에 가깝도록 남용되고 오용되는 바가 많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순결하고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를 경험한 것이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바라보면서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고, 나는 더 큰 나의 의무와 책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Monday, December 3, 2007
House Church in China
Posted by
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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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2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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