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anuary 28, 2017

분노에 대한 신학적 고찰


2016년 12월 1일
사회이론학회 발제문


                                           분노에 대한 기독교 신학적 고찰

                                   

1. 분노(Anger, Wrath)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감정중의 하나다. 유쾌하지 못한 감정의 색조를 지니고 있는 분노는 심리적이면서 육체적인 긴장을 불러온다. 분노는 일종의 보복적 감정이기도 하다. 분노로 인한 정신적, 심리적, 육체적 긴장의 해소는 보복적 행위를 충동 유발시키기도 한다. 분노가 내면으로 향할 때는 고뇌와 분노, 좌절, 우울, 죄책감 등의 감정을 유발하지만 외적으로 타인을 향해 표출될 때는 폭력적이거나 공격적인 행위를 촉발하는 까닭이다.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는 분노란 자기 파괴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서 분노조절(anger management)의 대상으로 보는 경향이 짙다.

2. 서구에서 인간의 성품에 관심을 가졌던 이들은 분노에 대하여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전적인 철학자들은 불의를 인지함으로써 일어나는 분노에 대하여 다소 긍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분노의 본질은 무엇인가 올바르지 않은 동기에 의하여 촉발된, 과도하거나 모자라는 덕의 결과, 즉 악덕의 하나로 간주했다. 정제되지 않은, 절제가 결여되어 야기하는 산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스토익주의자나 에피큐러스도 분노를 “신으로부터 축복받은 삶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Ep. Herodot,77)이라 여겨 역시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으로 이해했다. 세네카 역시 “분노를 일러 광기로 이어지는 것”(Ep. Mor. 18.12)이라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분노란 참된 행복에 이르는 조화롭고 덕스러운 삶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3. 이러한 입장은 서구에서 기독교 수도원주의와 닿아 있다. 고대 그리스의 지복주의적 전통을 이어받은 기독교 초기 사상에서도 분노는 긍정적으로 평가되지 않았다. 4세기 경 이집트의 에바그리스수(345-399)는 분노를 포함하여 대죄를 논하기 시작했고, 이어 카시아누스(360-435)는 그의 책 “The Monastic Institutes”에서 서방 수도원주의의 경건을 위한 실천적 덕을 논하면서 분노를 “분노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으로 대죄 중의 하나로 발전시켰다. 8세기 그레고리 대제는 분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건주의 사상을 일반 교회에 적용함으로써 분노는 기독교인의 삶에서 멀리해야 할 하나의 악덕으로 일반화되었다. 이런 이해는 성서본문(창 4: 4-8; 마 5: 22; 갈 5: 20-21)과 함께 성서적인 원칙으로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여기서 내릴 수 있는 소결론은 분노는 통제해야할 악이라는 것이다(신원하, 2012: 86.).

4. 13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서적 전통과 그리스 철학 전통을 종합하면서 분노를 이중적으로 해석했다. 아퀴나스는 인간이 가지는 감정을 크게 나누어 열망하거나 분노하는 것으로 (concupiscible/irascible) 나누어 이해했다. 열망하는 감정이란 사물에 대하여 선호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감정을 유발된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이 무엇인가에 의하여 차단되었을 때 일어나는 감정이 일종의 분노의 감정이다.

일단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감정은 존재의 목적, 즉 생명을 지키고 행복을 누리려는 것에 의하여 선호가 갈린다. 아퀴나스는 인간이나 동물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 목적을 일러 행복이라고 여긴 맥락에서 인간이 행복을 느끼고 생명에 대한 존중과 경외를 불러오는 것, 혹은 그런 의도에 대하여 느끼는 선호의 감정(사랑, 증오, 욕망, 염오, 기쁨이나 슬픔 등)이 일어난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감정은 단순히 정신적이거나 심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우리 육체에도 변화를 불러온다.

따라서 근원적인 목적(telos), 행복을 향한 우리의 감정이 차단되거나 방해를 받을 경우 일종의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분노의 감정은 열망하는 감정(concupiscible emotions)의 수호자나 완성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분노는 전통적인 철학자들이나 종교적인 부정적 이해와 크게 다르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인간이 사물을 인지하고, 자신의 경험을 기억으로 축적하고 있는 존재로서 사물에 대한 종합적이며 지성적 판단을 한다 할지라도 분노의 감정을 이성으로 통괄하지 못할 경우 원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행위, 즉 죄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ST. I-II. 23.).

이런 논의에서 아퀴나스는 분노를 다시 둘로 나눈다. 하나는 전통적인 부정적 이해로서 파괴적이고, 이기적이며, 보복적인 감정이나 행동을 유발시키는 감정으로 보았던 수도원적 악덕이다. 이러한 분노는 존재의 목적에 일치하도록 돕는 이성의 도움을 받아 최선을 다해 잘 다스려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불의에 대한 저항과 항거의 동기가 되는 감정으로서 일종의 의분(righteous wrath)을 말하는 데 이러한 의분은 사회적 악과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로운 상태를 회복하는 힘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ST I-II. 23.1; I. 81.2.).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이해를 자기 사상의 한 축으로 받아들인 아퀴나스의 이성적 해명에 의하면 분노는 도덕적으로 덕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5. 루터(1483-1546)는 어느 수도사의 이야기를 통해(Luther, Weimar Edition 1, 465) 인간의 성정에 분노가 깊이 배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분노를 다스리기 위한 수도사적인 삶의 중요성을 그도 인정했다. 하지만 루터는 분노의 필요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간혹 적절한 분노를 품을 필요도 있다고 그는 생각했는데 그 적절성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사랑에 의하여 동기화된 분노로서 죄를 적대하면서도 당사자에게는 친절한 것으로 어느 누구도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분노”일 경우다. 루터는 우리 자신을 위한 분노를 요구받지 않으나 하나님을 위한 분노는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우리의 품성은 죄로 인해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한 분노를 품는다는 것 자체도 매우 위험하다고 보았다. 오직 성령께서 우리의 품성과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실 때에만 바르게 분노를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분노가 잘 조절되고, 바르고 적법한 용법아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심성에 심어주신 자연적인 감정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루터는 분노란 하나님의 창조적인 행위와 목적에 연원을 두는 것이지 인간의 죄성에서 기인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본 것이다. 그는 주장하기를 “내가 글을 쓰고, 기도하며 설교를 잘 하려면 나는 분노보다 더 좋은 방책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분을 품어야 한다. 그리고 내 몸의 모든 피를 쏟아 분노를 신선하게 하고 나 마음은 예리하게 함으로써 모든 유혹을 떨쳐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설교자로서 지녀야 할 악과 죄를 향한 의분을 영적 지도자의 덕목으로 여긴 듯 하다.

6. 칼빈(1509-1564)은 인간의 죄스러움에 대한 깊은 인식으로 인해 분노를 품는 삶의 위험을 더욱 강조했다. 그는 감정이나 욕망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우리의 감정을 억압하고, 재갈물리며, 묶어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바울 서신 주석(Commentaries on the Epistles of Paul to the Galadians and Ephesians, 281-82)에서 분노의 세 가지 형태를 논한 바 있다. 분노는 1)사소한 원인이나 개인적인 손실 혹은 공격행위에서 비롯되거나, 2) 주어진 한계를 넘어 절제하지 못하여 과도하게 행동하는 데에서, 그리고 3) 우리 자신 혹은 우리의 죄를 향한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제시한 대 원칙은 에베소서의 말씀대로(엡 4: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라는 것이었다.  칼빈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심어 주신 감정의 하나로 분노를 이해하면서도 인간의 죄성으로 인하여 마땅한 분량을 넘어서지 않도록 경고했다.

7. 요한 웨슬리(1703-1791)는 분노를 완악하고 부패한 심성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온유함의 반대로 간주했다. 비록 온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분노를 경험할 수는 있지만 분노를 발하는 것은 죄라고 여겼다. 진정으로 온유하고 겸손한 이에게는 분노가 자리를 잡을 곳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모든 분노가 모두 악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특히 개인의 성결과 성품의 온전함을 강조해온 완전주의적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전통에서는 사회 정치적 불의에 대한 저항과 비판을 금기시하는 경향을 보이는 비정치적 입장을 강화하기도 했고, 이러한 경향은 교회와 정치의 건전하지 못한 연대 속에서 묵인되어 왔다.

8. 이렇듯 주요 개신교 사상가들은 인간의 죄성으로 인하여 분노를 재갈 물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었다. 다만 그 분노의 방향이 자기반성, 죄악, 그리고 사회적 불의를 향할 때 긍정적 측면이 있을 수 있으나 인간의 죄스러운 성품에 의하여 지배받게 될 것을 우려했다. 이러한 속성은 라인홀드 니버가 일찍이 지적했던바 기독교 정통주의 전통은 인간의 어두운 죄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인간이 지난 정의를 향한 가능성을 극소화하는 결과를 불러왔고, 그 여파로 18세기 이후 야기하는 민중의 분노와 혁명의 역사 속에서 소극적이거나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게 하여 기독교가 사회 정치적인 역사적 책임에 대하여 방관자가 되거나 소극적이었다는 평가를 남겼다.

9. 18세기를 지나면서 분노를 정의와 연관하여 재평가하기 시작한 이들이 소위 자유주의신학자들이었다. 크리스토프 불룸하르트, 레온하르트 라가츠, 왈터 라우센부쉬 같은 이들은 성령의 역사가 개인의 성품을 변화시키는 것과 같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분노에 대한 정신분석학적인 이해는 인간의 생존과 삶의 가치를 지키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힘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특히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 서남동의 한의 신학(민중신학), 베버리 해리슨의 여성신학 등 일련의 정치신학은 분노가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동기적 능력이 될 수 있다고 재평가했다. 이러한 이해는 지난 역사 속에서 사회, 정치, 젠더, 경제적 억압기재로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억압, 차별, 착취적 관계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는 정의로운 분노로 이해되었다.

10. 초기 기독교 전통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예언적 신학적 사유 속에는 언제나 개인적 성결이나 경건을 넘어 사회정의와 평등, 평화를 요구하는 강한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그러나 성서에 담겨있는 예언적 메시지는 현실 정치와의 타협 속에서 대부분 침묵 속에 가두어졌다. 이러한 예언적 메시지의 토대는 “하나님의 분노“ 혹은 ”예수의 분노“에 대한 성서적 증언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아모스나 호세아의 메시지 속에 담긴 내용은 하나님의 분노는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할 것이며, 심판 이전에 정의로움을 회복하라는 것이 주요 요지였다. 그러나 예언자적 전통이 아닌 제사장적 전통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를 종교적으로만 해석하여 사회 정치적 정의가 아닌, ”종교적으로 충실한“ 구원의 조건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 결과 하나님의 분노는 단순한 종교적 분노로 이해되고 현실사회로부터 멀어지는 대신 정의롭지 못한 인간을 향한 구원론 혹은 속죄론에서 해소되었다. 이러한 경향을 벗어 버리지 못하는 개신교적 전통은 오늘날 소위 ”근본주의적 보수주의“로 자리잡고 있다.

11.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분노의 문제는 “사랑에 의해 동기화된 분노,“ 혹은 ”믿음에 의하여 동기화된 분노“로 해석되기 시작했는데 이런 논의의 지평에 참여한 이들은 폴 틸리히, 에밀 부룬너, 그리고 라인홀드 니버 같은 신학자들이었다. 이들의 논의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한결같이 ‘온유함을 요구하는 사랑’과 ‘불의에 대한 저항을 유발하는 분노’에 의하여 촉발된 정의를 향한 갈망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보다 기독교적인 것인가라는 물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견해를 포괄적으로 이해한다면 사랑과 정의가 존재론적으로나 혹은 관계론적으로 연계되어야만 정의를 향한 분노가 보다 하나님의 정의에 근접한 것으로 신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12. 하나님의 분노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로움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인간의 분노의 분량은 인간의 상대적 정의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인간의 정의는 언제나 하나님의 정의에 미달하는 것일 수밖에 없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정의나 분노는 인간의 정의를 향한 분노의 근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언제나 인간의 정의를 심판하는 종말론적인 테제가 된다. 여기서 인간의 분노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최선의 정의를 지향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정의로부터 소외된 인간의 정의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인간의 분노를 하나님의 분노와 동일시함으로써 인간의 신격화, 혹은 (인간의) 정치의 신성화라는 신성모독적인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종교는 정치적 목적에 의하여 악용될 수 있다. 하나님의 정의는 인간의 정의를 변형시키는 것이지 동일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3. 이러한 이해를 통하여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분노란 언제나 치명적인 죄가 아니라는 것, 오히려 분노는 인간의 생존과 생명 가치를 지키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모든 해방의 동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긍정적 이해가 교회 안에서 오랜 동안 간과되어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근대적 사회 조건 속에서 기독교가 겸손과 희생과 봉사를 강조해온 습성을 우리가 면밀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분노를 치명적인 죄로 간주해 왔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방향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하나의 사회적 조건 속에 담겨있으며, 그 사회적 조건의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의 분노와 인간의 분노를 우리는 언제나 새롭게 해석해야할 과제 앞에 서있기 때문이다.

14. 5세기의 어거스틴은 일찍이 이런 말을 남겼다. “희망은 예쁜 두 딸을 두고 있는 데 그들의 이름은 분노와 용기다. 분노는 현존하는 것들을 향한 것이고 용기는 현존하는 것들이 그대로 존재하지 않기를 꿈꾸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기존의 것을 향한 분노와 새로운 것을 향한 기투적 용기에서 비로소 희망이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본 셈이다. 희망의 철학자 블로흐 역시 분노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며 새로운 것을 향한 충동이라고 보았다. 분노의 어두운 자기 파괴적인 힘을 제어하면서 긍정적인 새로움을 향한 충동으로 운용해 나간다면 분노는 새로운 희망, 보나 나은 것을 향한 미성의식(Noch Nicht Bewusstsein)의 산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분노의 부정적 측면을 넘어서서 분노의 긍정적 기능은 새로운 것을 향한 희망으로부터 치솟는 정의로운 생명력을 담은 것으로도 재평가되어야 하리라 본다.  -끝-
                       

 


삶과 죽음의 길: 예수의 세 가지 유혹

 <본질과 현상> 발제 원고, 2017. 1. 23

삶과 죽음의 길: 예수의 세 가지 유혹
(마태복음 4: 1-11)

1. 전제들
예수가 경험한 유혹을 기록하고 있는 이 성서 본문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매우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본문 중의 하나다.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공관 복음서 중에서 마태와 누가의 기록은 예수가 세례를 받고 하늘의 인증을 받았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마 3: 13-17; 눅 3: 21-22) 반면 마가복음은 1장 12-13절에서 예수가 광야에서 40일 동안 머물렀다는 것과 사탄의 유혹을 받았다는 것을 두 절로 요약하여 간단히 밝히고 있다.

마태복음과 병행기사로 볼 수 있는 누가복음은 마태복음과 거의 동일한 내용을 보고하고 있지만 두 번 째와 세 번째 시험의 순위가 바뀌어 있다. 광야에서 성전마루로 그리고 온 천하를 바라보는 지점으로 그 시험의 장소가 점점 넓어진다. 누가는 아마도 하나님의 성전이 세상을 모두 바라볼 수 있는 지점보다 더 높은 자리라 여긴 듯하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동일하게 예수가 (마귀, 혹은 사탄, 혹은) 유혹자에 의하여 세 가지 시험을 받았으며 이를 예수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쳤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유혹자의 시험인 동시에 성령에 의한 연단과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광야에서의 40주야는 이스라엘이 광야를 헤맨 40년(민 14),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머문 기간 (출 34), 엘리야의 고된 호렙산 여정 40일( 열상 19)과 같이 시련의 기간으로 상징되고 있다.

예수가 겪은 유혹은 그의 “하나님의 아들“됨과 밀접하게 연관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이라는 칭호는 묵시문학적 메시아 칭호이기도(마 24; 눅 4; 요 20: 31; 롬 1, 3-4) 하지만 성서에서 사용되는 가장 폭넓은 의미는 그리스도인 혹은 하나님의 사람을 의미한다(마 5: 9; 6: 9). 따라서 성서기자는 예수의 시험을 통해 인간이 겪는 보편적인 유혹을 말하고 있다고 본다. 인간의 삶은 간헐적으로 유혹자의 시험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 본문은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마태는 예수를 유혹했던 유혹자가 예수 곁을 떠나갔다고 증언하지만 누가는 일시적으로 떠났다고 함으로써 예수의 생애에 다가올 또 다른 유혹이 있을 것을 암시하고 있다.눅 4: 13).

이 성서 본문을 이해함에 있어서 많은 경우 사실적 진술로 이해하는 성서주의적 입장은 이 본문이 담고 있는 시간이동, 장소이동, 그리고 환상적 비젼을 모두 사실화하는 무리수를 두게 된다. 예컨대 첫 번째 시험은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요구를 마술적 가능성의 요구로 이해할 수도 있다. 또한 두 번째 시험에서 마귀는 예수를 거룩한 도시의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는 순간 이동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시험에서도 마귀는 높은 산으로 예수를 데리고 올라가 세상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언급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사실 그 어느 곳에서도 세상 모든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마련해 주는 정점은 없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이해하려면 이 본문이 인간의 삶에 다가오는 유혹의 양태를 상징하는 의미를 찾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따라서 나는 이 본문을 사실적 진술이 아니라 성서 기자의 창작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선호한다. 동시에 사탄 혹은 마귀, 혹은 유혹자로 상징되는 유혹의 주체를 객체화하는 데에는 신학적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이는 마치 죽음을 인격화하고 존재(存在)화하여 죽음의 사자라 타자화하여 부르는 것과 유사하다. 사탄의 유혹은 사탄이라는 신화적 존재의 유혹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주체에서 일어나는 유혹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심오한 신앙을 가진 이들 중에는 흉측한 마귀의 형성을 보았다는 진술이 간혹 있지만 이런 이해는 문화적으로 덧입혀진 것으로서 종교 심리학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사탄의 존재를 객체적으로 인정한다면 우리 모든 인간은 각자의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든지 아니면 사탄의 다중적 무소부재(無所不在)론을 불러들인다. 그러므로 이 성서 본문의 비신화화는 본문을 오해하기 쉬운 유혹에서 벗어나는 매우 중요한 전제가 된다. 이 성서 본문은 그러므로 신화적 현실이라는 모순을 담은 사실적 이야기가 아니라 특정한 삶의 현실을 드러내는 의미를 담고 있는 스토리로 보아야 한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이 본문을 예수의 공생애의 시작에서 언급하고 있다. 예수가 광야에서 경험한 유혹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 3: 17)라는 예수에 대한 하늘의 인증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일어난 사건이다. 우리는 하늘의 인증 이후에 이어지는 예수의 유혹에 관한 성서의 증언을 읽으며 예수는 하늘의 인증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것일까? 왜 그는 성령에 이끌려 40일 동안 광야에 나가 금식하며 머물렀을까?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하늘의 인증을 받은 그가 왜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았을까? 라는 물음을 가질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됨, 하늘의 인증을 받는 것 그것이 예수의 삶의 종료, 혹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깊은 종교체험에서 경험되는 순수한 영성적 차원과 영성적 관심에서 거리가 있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이중적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현실과 세상 나라 현실 사이에 벌어진 틈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이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와 악의 현실이 겹쳐지고 있는 세상 나라로 이해하였다. 우리의 깊은 종교 체험은 얼핏 얼핏 경험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맛보기, 혹은 순간적인 바라봄(erlebten Augenblick)과 같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간혹 순간적으로 우리에게 인식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불충분하고 온전하지 않다. 바울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희미한 것이다(고전 13: 12). 따라서 여기와 그곳, 지금과 그 때, 세상과 하나님 나라라는 이중성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동시에 경험할 수밖에 없는 신앙의 지평이다.  

예수가 광야에서 40일간의 금식의 시간을 가지고 유혹자의 시험을 받은 것에 대하여 마태복음 기자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건임을 암시한다. 육체적으로 본다면 40주야의 금식은 인간이 지난 육체의 한계를 시험하는 고된 고행의 시간이다. 영적인 측면에서는 영혼의 깊은 밤을 경험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전적으로 의존하는 친밀성의 시간이다. 육체적 한계와 하나님과의 영적인 깊은 교제 한 가운데에서 유혹자의 유혹이 시작된 것이다. 이로서 예수의 영성이 시험을 받는 것이다. 예수를 향한 유혹자의 시험의 성격은 예수의 인간성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 시험은 예수의 인간성의 약함을 영성적 능력으로 해소해 보라는 요구였다. 그리고 유혹자는 단서를 달았다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증을 받았던 예수에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명하게 입증하라는 요구다. 육체적인 배고픔의 해소, 하나님의 사랑의 입증, 온 세상의 권세를 상속라는 요구다. 이 요구는 명료하게 인간성의 한계와 결핍을 파고드는 시험이다. 생존을 위협하는 배고픔도 결핍이고, 현실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명료하게 입증할 수 없는 신앙조차도 일종의 결핍이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권세를 획득하지 않은 상태도 결핍이다. 그런데 유혹자가 수단으로 삼은 이 결핍은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이르지 못한 우리의 상태를 파고드는 유혹이다. 배고픔과 불안과 억압의 구조 속에서 해방받지 못한 우리 존재의 현실을 파고드는 유혹인 것이다. 유혹자는 하나님의 자녀의 영성적 능력을 이 인간성의 결핍을 선명하게 극복하는 수단으로 삼으라고 요구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배고픔을 해소하고, 안전을 보장받고, 세상의 권세를 누리라는 것이다. 왜 이러한 요구가 유혹일까? 이런 것이 유혹이라면 오늘의 한국 교회는 유혹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의 한국 기독교가 약속하는 하나님의 축복은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닌가? 여기에 이 본문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이유가 있다.

유혹자의 유혹은 하나님과의 영성적 교제의 빈틈을 타고 찾아온다. 영성적 삶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확신을 우리의 일상에서 확인하는 것이 과연 영성적 삶과 병행하고 있는 굶주림의 해소,  하나님 사랑의 실증적 확증, 그리고 세상의 지배력의 소유와 같은 성격일까? 만일 이 본문의 저자가 이러한 성격에 동의했다면 예수는 매우 현실적이고도 놀라운 마술을 부리는 예수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본문의 저자의 신학적 윤리사상은 이러한 성격에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이 지닌 결핍은 유혹의 조건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 신앙의 깊이, 곧 영성의 깊이를 드러내는 기회라고 본 것이다. 이것이 이 본문이 존재하는 이유다.

2. 첫째 유혹: 빵만의 죽음

첫째 유혹은 결핍, 모자람을 지닌 인간성을 이용한 유혹이다. 부정할 수 없는 인간성의 취약성, 결핍에 대한 인식을 파고들어서 유혹자는 예수에게 돌을 들어 빵을 만들어 먹으라 요구한다. 신적 능력을 행사하는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라는 유혹은 에덴 동산의 뱀의 유혹과 유사하다. 뱀은 하나님이 지으신 동산에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열매 앞에 서있는 이브를 향하여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될 것”(창 3: 5)이라 유혹했다.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유혹자는 굶주린 예수에게 배부름의 만족을 취하라고 요구한다. 그의 결핍을 자극하고 욕망을 불러내어, 그것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존재 증명이 될 수 있다고 유혹한 것이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면 우리의 삶에서는 이러한 결핍이 기적처럼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될 수 없는 우리를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유혹, 완전할 수 없는 삶에서 완전한 것을 요구하는 유혹, 선명하지 않은 삶에서 선명성을 실증하라는 유혹이다. 불완전한 우리의 삶을 완전한 것으로 만들라는 요구다. 영성을 통해 번영과 성공을 이루라는 번영 신학인 셈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영성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결핍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영성적 삶에 있어서 근본적인 장애가 된다. 그것은 우리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여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똑같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다. 그것이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즐거운 것이든 고통스러운 것이든, 그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의로운 사람들은 더도 덜도 아니게, 다시 말해 하나를 다른 것과 똑같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수가 유혹자의 시험을 이긴 것은 바로 이러한 동일성의 신학이다. 어거스틴이 선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선하다고 주장하며 하나님의 선하신 본성을 믿었던 것과 같다. 이런 전통은 세계내적 신비주의 신앙을 전승했던 켈트 신비주의자들이나 알버트 슈바이처의 “아래로의“ 신학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다.

놀랍게도 예수는 유혹자가 보는 결핍만을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다른 결핍, 즉 영적인 결핍을 더 큰 위기로 생각한다. 예수는 빵만의 삶은 하나님 말씀의 결핍이고 따라서 빵만의 죽음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도로테 죌레도 빵만의 삶이 아니라 빵만의 죽음을 설교했다. 빵만의 삶은 곧 빵만의 죽음인 것이다. 생존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영성적 의미없는 삶은 곧 우리에게 있어서 의미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육체적 삶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마술적 능력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 말씀을 통한 자유와 정의와 사랑의 지평이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이며, 이런 지평이 결여된 빵만의 삶을 살라는 유혹자의 요구는 인간다운 의미의 죽음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결핍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유혹자가 보는 인간성의 취약성에서 나오는 배고픔이다. 그러나 또 다른 결핍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결핍이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인간의 삶에서 진보를 불러온 모든 계기를 결핍이라고 보았다. 무엇인가 “아직 아닌 것으로(noch nicht)” 결핍되어 있다는 인식은 곧 그것의 충만함을 그리워하는 희망의 동인(動因)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핍은 희망의 자리가 될 수도 있다. 이 희망의 지평은 의미의 지평을 연다. 우리가 존재하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진보가 싹트고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낮 꿈이 꿈꾸어지는 것이다.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지평의 끝에 하나님 나라가 다가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향한 꿈은 역사적 과정을 지나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진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의 영성은 이러한 영성적 지평의 결핍을 결핍이라 보는 것이지 빵의 결핍을 결핍이라고 보지 않았던 셈이다.

역사는 실로 배고픔의 극복과정이며,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세상을 향한 것이고, 인간의 지배를 넘어선 하나님의 지배가 이루어지는 세상을 향한 과정이다. 그런데 유혹자는 이 과정을 생략하는 마술을 부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먹는 마술적 능력을 행사하라는 것이다. 헛된 희망을 가지라는 요구다. 역사와 종말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이렇듯 유혹자는 역사적 과정과 종말의 거리를 제거한다. 기다림과 역사적 순화의 과정 없는 성취, 그것은 사탄의 유혹의 본질이다. 결핍은 희망의 동인일 경우 신앙인의 현실적 삶에 의미를 낳는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생존이 인간됨의 의미가 아니라 생존의 의미를 가지야 인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빵만의 삶은 이미 죽은 것이다. 유혹자는 이런 삶으로 예수를 불러들이려 했다. 예수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생존의 의미 없는 생존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3. 둘째 유혹: 안전만의 죽음

둘째 유혹은 믿음의 보상으로서 안전을 요구하는 유혹이다. 유혹자는 예수를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리라 한다.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 하나님의 아들의 안전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을 입증하라는 것이다.” 이 장면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향해 조롱했던 무리들의 요구와 흡사하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찌라.“(마 27) 예수를 향하여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그대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라’는 요구와 이 본문에 담긴 유혹자의 유혹의 방식은 매우 흡사하다.

이 본문은 또한 2007년 한 교회의 선교단이 기독교에 적대적인 이슬람 세력 한 가운데로 들어가면서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을 믿는다“는 고백을 하던 이들의 모습을 클로즈업 시키는 본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실 것이라는 신앙고백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아우스비츠의 경험과 동남아시아의 쓰나미, 세계 1, 2차 대전이 일어난 이 병든 세계에서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 주시는 분이라고 믿는 것은 겉으로는 멋진 신앙과도 같지만 실제에 있어서 하나님 신앙과 상관없는 우리의 기대의 투사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그들의 신앙 고백과는 달리 23명 중 2명은 살아 돌아오지 못하고 무모한 믿음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런 너의 믿음을 실증하라는 유혹자의 태도는 마치 하나님이 숨어 계시는(deus absconditus) 이 땅과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 사이의 거리를 부정하라는 것과 같다. 죄와 악이 교차하는 역사를 살아가는 인간과 하나님의 주권이 온전하게 지배하는 천상의 삶을 동일시하라는 요구다. 숨어계신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가 해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을 우리가 깨고 우리가 하나님을 소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성모독적인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주술로 불어 내고 조정하는 자가 되겠다는 이교적 오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안전에 대한 욕망은 우리의 모든 욕망을 자극한다. 소유, 권력, 그리고 관계의 안전은 곧 우리 삶의 안전과 밀접하게 관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우리는 언젠가에는 죽음조차 홀로 맞아야 하는 존재다. 위험한 세계를 안전한 세계로 만드는 책임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단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죽음 조차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맞아야 한다. 안전한 세계,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어가는 이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어질 것이라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이런 지평을 신앙의 한 축으로 가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안전에 하나님 신앙을 걸어두면 안전하지 못한 우리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존재가 부정될 수도 있다. 유혹자는 이 점을 들어 안전을 보장하는 하나님 신앙을 실증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예수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의 삶은 안전하지 않았다. 그는 공중의 새보다, 들판의 짐승들이 누리는 안전을 부러워하기도 했다(마 8: 20; 눅 9: 58). 예수는 헤르몬 산의 영광에 만족하며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라며 머물기를 소원하는 제자들의 청원도 물리치고 문제가 많은 세상 속으로 하산한다. 예수에게는 소명을 잊은 안전만의 삶은 죽은 것이었다. 안전은 좋은 것이나 안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이 그에게는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빵만의 죽음이 있다면 안전만의 죽음도 있다. 빵만의 죽음이 의미 없는 삶을 뜻한다면, 삶의 의미 없는 안전만의 삶도 죽은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성전 꼭대기에 서서 ‘내가 위험한 지경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이 나의 안전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오만 그 자체를 예수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불신앙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예수는 안전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자신을 안전하지 않은 자리, 곧 십자가에 내 놓았다. 그는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릴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가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렇듯 예수가 보여준 신앙의 길은 안전보장의 길이 아니다. 예수를 따르는 신앙의 길, 그것은 예수가 말씀하신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다.

아마도 자본주의적인 남한 사회에서 중산층 이상의 안락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매사에서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하심을 간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도 억압 통치 속에서 생존과 희망을 보장받지 못한 채 신음하는 북한 주민들이 있다. 아프리카에는 열악한 위생시절과 영양실조로 인하여 죽어가는 무수한 아이들이 있다. 안전의 요구가 신앙의 본질이 라면 북한과 아프리카에서는 하나님의 존재증명이 불가능한 것이 된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우리의 욕구는 참된 하나님 신앙의 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유혹은 더욱 클 것이지만, 북한과 같은 동토의 땅에서는 안전은 신앙의 조건이나 증거 조차 될 수 없을 것이다.

 일본의 문학가 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1966)은 인간의 고통과 죽음의 현실에서도 침묵하는 하나님을 만난 인간의 고뇌를 다루고 있다. 슈사쿠는 이 소설에서 우리 삶의 현실은 하나님이 무섭도록 침묵하는 현실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그려주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기서 슈샤쿠는 인간의 생명을 지키는 편에 서는 것이 배교로 개념화한 신앙보다 낫다고 말하는 예수를 고백한다. 그는 배교로 개념화된 성화판을 밟아도 좋다고 말하는 예수를 본다. 자기를 밟으라는 예수를 만난 것이다. 슈사쿠는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를 버리는 예수를 보았다. 유혹자가 선택한 안전의 욕망은 스스로를 버리는 예수를 유혹할 수 없었다.

4. 셋째 유혹: 권력만의 죽음

유혹자는 예수를 온 천하를 바라 볼 수 있는 높은 곳으로 데려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유혹했다. 지배와 소유 권력의 유혹이다. 예수의 생애에서 권력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성서적 진술은 여러 곳에 있다. 소유와 지배 권력에 대한 욕망은 예수 주변의 사람에게도 있었다. 제자들은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가 큰 권세를 잡을 것이라 짐작하고 제자 중에 누가 큰 자인지 다투기도 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에게 찾아와 자기 아들 형제를 예수의 우편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원을 할 정도였다(마 20).

그러나 예수는 권력의 욕망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권력만의 죽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소유만의 죽음, 권력만의 죽음은 하나님의 길이 아니었다. 예수는 땅의 부요함의 어리석음을 간파했고, 권력을 가진 헤롯을 여우로 비유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의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 25-28).

이  유혹은 예수의 삶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게 만들려는 유혹이었다. “인자가 이 땅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다“는 그의 소명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허무주의의 그늘 아래에서 생의 의지를 견고하게 하여 초인적 삶의 지평을 열어나가는 권력의지를 주장했던 니체는 현실 정치에 이용당해 나치의 권력의지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오용되었다. 권력의지는 자기 강화의 의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와 정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권력의지가 아니라 생명을 돌보고 섬기는 희생의 길에서 더 강한 생의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교회의 역사 속에서 종교권력은 언제나 세속권력과 거룩하지 못한 연대를 이루어 지배 권력에 편승해 왔다. 어쩌면 오늘의 종교는 유혹자의 종교가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는 명료하게 말한다. 사람이 예배할 분은 창조주 하나님 한분이시다 라는 선언이다. 초기 퀘이커 신앙을 가졌던 윌리암 펜(William Penn)은 오로지 그리스도만이 그의 주님이시므로 오직 그에게만 복종할 것을 약속했다. 따라서 세상의 권세를 잡은 영국 국왕을 향하여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그 일로 인하여 그가 국왕을 모욕했다는 죄로 런던탑에 갇혔을 때 그는 (1682) 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 6장에서 오만이란 과도한 자기 영광과 영예를 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권력을 향한 유혹은 오만한 자가 걸려 넘어지는 유혹이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 섬김의 길은 오만의 길이 아니라 겸비의 길이라 말하신다. 

유혹자는 예수의 길과는 다른 탐욕과 권력을 향한 욕망을 자극했다. 탐욕과 권력의 유혹에 빠지면 우리는 경배의 대상을 하나님에서 유혹자로 바꾸게 된다. 결국 유혹자를 향해 엎드리는 길은 하나님 신앙을 배반하는 것이다. 이런 길을 가는 이는 신앙의 댓가가 소유와 권세의 강화로 이어져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다. 하지만 예수는 탐욕의 윤리나 지배 윤리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제자들에게 겸비의 길에서 하나님을 향한 복종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의 길을 가르치셨다. 예수는 탐욕과 권력의 유혹을 하나님 신앙에서 찾은 겸비와 희생의 영성으로 이기신 것이다.

5. 결론

예수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가 40일간의 시험 기간을 거쳤고, 이 시험에서 승리함으로써 공생애의 길로 나가셨다. 그는 유혹자의 유혹에서 빵만의 만족에 담겨있는 빵만의 죽음, 안전만을 요구하는 삶 속에 담긴 안전만의 죽음, 그리고 지배 권력의 소유 이면에 묻어있는 권력만의 죽음을 이긴 것이다. 유혹자는 예수에게 하나님 신앙의 영성에서의 이탈과 배반을 요구했다. 그러나 예수는 유혹자의 유혹에 담긴 불신앙의 본질을 간파할 수 있는 영성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영성은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면면히 흘러 전승되어 오던  죽음의 유혹에 단호히 저항하는 영성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주류 기독교는 어거스틴 이후 도덕폐기론에 오염되면서 빵의 유혹, 안전의 유혹, 권력의 유혹을 거부하지 못하는 종교로 전락했다. 에른스트 트뢸취의 분석에 의하면 기독교 역사는 대중을 얻기 위하여 세속적 가치들을 교회 안으로 수용해 들이는 타협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처방으로 타세계적 구원의 은총론을 강화했다. 소유와 안전과 권력을 향한 의지만의 죽음, 곧 죄스러운 삶은 내세의 구원 약속으로 처방을 받아 온 셈이다. 이 문제는 비록 복음이라는 명제로 포장되어 있지만 구체적인 삶에서의 영성적 투쟁을 약화시킨 것으로서 비판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경험한 유혹자의 시험은 곧 사람으로서의 인간이 겪는 시험이며, 오늘의 그리스도인도 예외일 수 없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성서적 메시지가 교회의 가르침과 교리로 인하여 약화되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일상에 다가오는 유혹의 본질을 알아보지 못하는 데 있다. 일상을 지배하는 빵만의 삶은 의미의 죽음을 의미하고, 실증적이며 효용론적 신앙이 요구하는 안전장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거래로 전도시켜 불신앙에 빠지게 만든다. 그리고 소유와 지배 권력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예수의 겸비와 자기희생의 길과는 정 반대의 방향을 향하게 한다.

우리가 오늘날 일상의 광야에서, 성전에서, 그리고 소유와 권력으로 유혹하는 세상 앞에서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바로 이 예수의 따라 사는 imitatio christi의 길을 의미하며, 이 길은 예수를 닮은 영성적 분별력을 가진 이들에게만 허용되는 것이다. 광야의 시험에서 승리한 예수의 공생애는 잠자는 신앙을 가진 이들을 향하여 “회개하라!”(마 4: 17)는 외침으로 시작되었다. 500년전 루터의 종교개혁도 그의 명제 95개 항목의 시작도 “회개하라“는 재촉에서 시작되었다. 빵만의 죽음, 안전만의 죽음, 권력만의 죽음의 그늘 아래 있는 우리를 향하여 오늘도 주님은 명하신다: ”회개하라!”




한국교회의 위기 2 : 강단의 위기

뉴스엔죠이 기사, 2017. 1.28


강단의 위기는 어디서 오나?

말씀의 종교

내가 본 가톨릭 교회 중 가장 아름다운 교회가 로마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이라면 개신교의 가장 아름다운 교회는 독일 베를린에 있는 베를린 교회(Berliner Dom)가 아닌가 싶다. 성 베드로 성당의 중심은 모든 시선을 사로잡은 영광의 제단이라 할 수 있으나 베를린 교회의 중심은 역시 금관처럼 꾸며 놓은 강단이다. 베드로 성당으로 들어가는 좌우의 문 옆에는 베드로와 바울이 서 있다. 반면 베를린 교회에는 교회를 받치고 있는 기둥 곁에 루터, 쯔빙글리히, 칼빈, 멜랑히톤이 서 있다. 이 교회는 특별히 루터와 쯔빙글리히를 강단 좌우에 배치해 놓았다. 구교가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된 베드로와 말씀의 증언자로서 사도가 된 바울을 신앙의 모범으로 보았다면 개신교는 개신교 신학의 기초를 놓은 인물들을 중시했다. 또한, 베를린 교회의 강단 위쪽에는 성서적 사건의 중심이 된 인물이 두 명 부조되어 있다. 하나는 돌을 맞고 있는 스데반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하신 예수다. 당시 베를린 교회를 짓던 이들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기둥 삼아 현실에서의 고난을 수납하고 미래의 지평에서는 부활의 영광을 내다보는 의미에서 개신교 신앙을 고백한 셈이다.

카톨릭 교회의 제단에는 사제가 홀로 서는 경우는 별로 없다. 가톨릭 교회의 미사를 집전할 때 사제를 곁에서 돕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개신교 강단에 서는 이는 설교자 한 사람뿐이다. 카톨릭 교회의 미사 중에도 강론이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중앙에서 준비된 메시지를 낭독하거나 사제가 무엇인가 그것에 덧붙여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목사의 경우 홀로 설교를 준비하고, 준비된 설교문에 기초하여 말씀을 증거하는 경우가 원칙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가톨릭 교회가 눈의 종교라면 개신교는 귀의 종교라고 말한다. 사제가 중심이 되어 진행되는 예배에서 예배자들은 사제의 제의적인 행위를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성체에 참여하는 성찬을 나누는 데 예배의 초점을 둔다. 그러나 개신교는 바라보는 눈의 종교가 아니라 귀의 종교, 들음의 종교다. 이런 이유에서 베를린 교회의 1,650개의 좌석은 설교자가 서 있는 강단을 향해 바라보도록 설계되어 있고, 설교자가 서서 말씀을 증언할 강단은 고귀한 왕관처럼 꾸며져 있다.

귀의 종교

귀의 종교인 개신교는 이렇듯 말씀의 증언자가 예배의 중심이 된다. 따라서 말씀 증언자의 영적이며 신학적, 도덕적인 능력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개신교의 생명이 달려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말씀 증언자의 기초 신학적 훈련은 신학대학에서의 훈련과정에서 상당 부분 이루어진다. 하지만 말씀 증언자로서의 성서에 대한 궁구와 영성적 훈련, 그리고 언어적 소통을 위한 인문학적인 훈련은 평생 이루어져야 할 과제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는 질 높은 연구와 영성적 훈련과 독서를 병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증언자로서 주어진 소명을 제대로 감당하기 어렵다. 이러한 과제들을 수행할 것이라는 믿음이 전제되었기에 개신교는 강단의 자유를 목회자에게 맡긴 것이다. 따라서 강단의 증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데 있어서 그의 신앙 양심은 무한한 자유를 가진다. 그러나 그가 그 자유를 행사하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그의 소명의 전제로서 신학적인 것이며, 그것은 교회의 전통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7년 현재 전국의 교회는 약 78,000개다. 편의점 수가 25,000개인데 비하면 전국의 편의점 한 개 있는 곳에 교회가 3개 세워져 있는 셈이다. 매주 예배 시간이 되면 최소한 78,000명의 설교자가 강단에 올라 말씀을 증거 할 것이다. 아마 이 모든 장면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볼 수 있다면 참으로 장엄한 광경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말씀의 증언자가 선 강단은 몇 가지 요소에 의하여 치명적으로 위협을 받고 있다. 그 첫째는 말씀 증언자의 인문학적인 인식능력, 곧 넓은 의미에서 지성의 위기다. 둘째는 말씀 증언자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는 생존의 위협에서 오는 소명의 위기다. 셋째는 개교회주의로 인한 연대성을 상실한 경쟁으로 인한 윤리적 위기다.

지성적 위기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지성적 위기를 맞고 있다. 목사가 주어진 소명을 감당하려면 는 영성적 능력도 필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지성적 능력도 요구된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 교회는 지성을 무시한 영성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런 흐름을 조장하는 신학적 성향은 반지성주의를 조장하는 근본주의 신학이다. 무수한 목회자들이 근본주의 성향에 동조하는 근본 원인은 그들의 매우 낮은 학문적 능력 때문이다. 정규 신학대학교를 나온 이들에게도 문제가 많지만 근 400여 개에 이르는 무인가 신학교에서 양산되는 목회자들은 너무나 쉽게 반지성주의라는 흐름을 선택한다. 이런 흐름에 편승하여 정규 신학대학에서도 학력의 저하는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신학대학 입학생들을 분석해 보면 중 고등학교나 대학에서의 학력이 전국 백분율의 10% 하위에 속하는 이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은 신학대학이 오늘의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준비한 커리큘럼을 제대로 소화할 능력이 없을 정도다.

최근 강남에 지어진 화려한 교회의 담임 목회자가 학력을 세탁한 사실로 인하여 교계에 추문이 된 사실이 있다. 그는 학위 논문을 표절하고, 학력을 과대 포장함으로써 자신의 학문적 능력의 취약성을 감추려는 부정직한 행위도 마다치 않았다. 이와 같은 사례는 부지기수다. 심지어 심혈을 기울여 공부하지도 않은 사람이 박사학위를 남발하는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박사학위 명패를 걸어두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입으로는 반지성주의를 외치는 영적 지도자임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평균 이하의 학력을 감추기 위하여 허위 학위를 돈 주고 사는 예도 있다. 이런 모든 양태는 형식과 허례, 명분과 체면 문화가 조장하는 과시 욕구를 이겨내지 못하는 목사들의 자화상이다.

이렇듯 허위의식에 가득 찬 이들이 지키는 강단의 자유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성실성 없는 반지성주의와 더불어 도덕성이 없는 강단의 권위는 결국 복음의 근본을 파괴한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 앞에서 정직하지 못한 이들이 세워진 강단에서 어떤 복음이 울려 퍼질 수 있겠는가? 나는 이런 이들은 개신교 전통이 목사에게 맡긴 강단의 자유를 지킬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영성적 지도자가 지녀야 할 통전적인 성실성의 의무와 정직의 의무를 아랑곳하지 않는 성직은 결국 강단을 타락시킨다. 정직이라는 것은 상식임에도, 정직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이 자리 잡은 강단에서 상식 이하 수준의 설교로 인하여 하나님 말씀의 위기가 찾아오고, 부도덕한 그들의 의식에서 기독교의 도덕적 위기가 일어나고 있다. 지성적 위기는 결국 강단의 도덕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교회에 대한 일반의 신뢰도가 수년간 20%에도 못 미치는 원인은 목회자의 수준 이하의 지성적 능력과 도덕적 판단 능력에서 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변증자로서의 목회자는 신학적 훈련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 신학 훈련에 게으른 이들이 바른 신앙의 길로 신자들을 인도할 리가 없다. 또한,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목회자는 지성적 능력을 갈고닦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성 능력의 미달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저학력 비지성적인 이들이 그 상태를 감추기 위하여 반지성적 영성 운운하며 신자들을 우둔함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한국 기독교의 미성숙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하디도 한다. 지성적이며 인문학적인 인식능력이 평균 이하인 목사일수록 다른 이의 설교를 우왕좌왕 표절하고, 일반의 비판을 피해 영성을 강조하며 반지성주의적 설교를 남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경우 이들은 복음의 전파자가 아니라 복음의 장애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생존의 위기

개신교 교회의 강단이 개신교 신학과 영성, 그리고 인문학적 이해 능력이 미숙한 목사들에 의하여 이끌려지고 있다는 것은 한국교회의 근본적인 위기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 상태를 더욱 극심하게 조장하는 요소는 근 80%에 이르는 목회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생존의 위기다. 1990년 이후 한국 기독교의 교인 수는 정체되어 있다가 2010년 이후부터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반면 쏟아지는 인가 비인가 신학교 졸업생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2013년 기준으로 감리교회의 수는 6,518개인데 목사는 10,725명이고, 예장합동의 경우 교회 수는 11,593개인데 목사 수는 22,216명이며, 예장 통합의 경우 8,592개의 교회에 17,468명의 목사를 두고 있다. 3개 교단만을 종합해 본다면 26,783개의 교회에 40,409명의 목사가 있다. 이에 더하여 매년 약 4,000명이 정규, 약 6,000명의 혹은 비정규 신학교를 졸업한다. 그런데 이들은 과연 말씀을 궁구하고 독서를 통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 말씀의 증언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무임 목사를 차치하고서라도 전국 78,000개의 교회 중 약 80%에 이르는 교회의 목회자들은 정부 기준 기초생계비를 받지 못하는 극빈 목회자들이다. 교단마다 교회 연 예산 3500만 원, 혹은 3000만 원이라는 미자립교회의 기준이 다르지만, 현실에 있어서 목회자의 기초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는 교회는 전체 교회의 약 20%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교단마다 교인 수는 줄고 있고 목사의 수는 여전히 늘고 있다. 이런 극빈의 상태에 처하는 목회자를 양산하는 구조는 과도한 성직 소명감을 조장하는 목회자들의 그릇된 인식이다. 지상에서 목사직을 최상의 소명으로 여기며 이를 영예스럽게 여기는 성직 제일주의가 보편화하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길을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저학력자라도 누구나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될 수 있는 신학교육 구조의 허점 때문이다. 정규학교가 안 되면 무인가 학교라도 가면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될 수 있는 더 쉬운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양산된 목사들의 신학적, 지적 훈련의 극심한 결핍이다. 결국, 이들 중 소수의 성공(?)적 인물을 제외하고 대다수는 매우 비참한 현실에 처하게 된다.

저학력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성직자의 길은 고도의 경쟁사회에서 낙오한 이들의 출구로도 간주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현실은 이들이 강단의 자유를 지킬 수 있는 자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목회지를 가지지 못한 무임의 목사들이 증가하고 있는 한편,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는 미자립 교회의 목사들은 전체 교회의 8할에 이르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결국, 오늘날 한국 기독교 안에서 무수한 설교자들이 기초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수입으로 근근이 생활하고 있다. 치솟는 전세 임대 보증금으로 인하여 가난한 목회자의 삶의 자리는 더욱더 열악해질 수밖에 없다. 요즈음에는 목회자들이 마지못해 다른 부수적인 직업을 가지는 경우도 빈번하다. 내가 아는 이들 중에는 대리운전 기사를 하는 이, 조그만 커피 가게를 운영하는 이, 노동 현장에서 막노동하는 이도 있다. 물론 이러한 이중직업도 도시 인근에 거주할 때만 가능하다. 대부분의 목회자는 이중 직업의 기회를 가질 여건도 없는 자리에 머물고 있다. 심지어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아예 목회를 접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이런 현실은 목회자 간에 심각한 경쟁구조를 유발하기도 하며, 목회지를 선점한 이들의 뿌리박기도 이어진다. 나아가 자연스럽게 더욱 안정된 목사의 생활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교회를 향한 약진과 이동을 선호하는 적자 생존적 성향을 조장하고 있다. 여기서 목회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궁구하고 심혈을 기울여 강단에서 전할 메시지를 준비할 시간과 공간, 그리고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이와 그렇지 못한 이가 갈리게 된다. 일반적으로 부유한 교회를 향한 약진의 길은 대부분 목회자에게 있어서 고도의 경쟁의 길이다. 이 경쟁의 가도에서 유리한 이들은 역시 강력한 교권을 가진 큰 교회 목사와의 근친성을 가진 이들이다. 대형 교회의 부목사들은 담임 목사의 영향권 안에서 경쟁 관계가 아닌 특혜를 입을 기회를 더 많이 얻는다. 그러기에 대형교회 부담임 목사들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그 교회의 명성을 부러워하는 장로들이 기다리는 중형 교회로 이동하곤 한다.

이렇게 찾아간 자리는 다음 자리를 위한 징검다리가 되고, 더 나은 교회로의 이동할 수 없을 경우 그 교회를 향한 무형의 소유권을 행사하듯 뿌리를 내린다. 여기서 누구보다도 유리한 이들은 대형 교회 목사의 자제들이다. 그들은 교단 정치의 대가인 아버지의 그늘 아래 남다른 특혜를 얻을 수 있다. 그러한 특혜 중 하나가 소위 교회 세습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렇게 성공한 이들을 포함하여 생존의 위협에서 벗어난 목사들은 겨우 20%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생계를 위협받고 있는 목사, 강단을 가지지 못한 목사가 오늘의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강단의 자유를 지키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들에게 목사로서의 신학적 독서, 지성적 독서, 그리고 시대정신과 대화할 능력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빈곤한 목회 현실은 강단을 더욱 부실하게 만들어 강단의 위기를 심화하고 있다.

공동성의 위기

가난한 목회자도 깊은 영성의 소유자가 될 수 있고, 사회적 여건과 목회자의 성실성이 있다면 미자립 교회를 부흥시켜 큰 교회를 이루어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적자생존의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는 야만적 관계를 승인하는 것이다. 미자립 교회를 부흥시켜 큰 교회를 이룬 성공적인 목사들은 지극히 소수이며, 이들은 대부분 개척자 주권증이라는 질병에 걸린다. 한 교회에 오래 머문 목사일수록 그 주권증의 정도가 극심해진다. 그리고 그 교회를 떠날 시간이 되면 목사 주권을 돈으로 바꾸거나 자기 자식에게 넘겨주는 가장 비신학적이며 비윤리적인 자의가 유통된다. 한국 기독교는 교단을 막론하고 이런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승인하는 우매함에 빠져있다.

서구나 미주의 교회들 역시 이러한 우매함에 빠진 적이 있었다. 서구에서도 대형 교회의 목사들은 자신이 세운 교회를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을 영예스럽게 여기는 것을 은사적 지도력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 교단에서는 이런 행태가 불가능하다. 교회를 향하여 목사가 주권을 행사하는 행태는 배교적 행태로서 신학적 정당성이 없다. 배교적 행태일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부자간에 사사화(privatization) 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향하여 목사가 개척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찬탈하던 습성을 융통시킨 엘리 집안의 범죄와 같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공교회라 여기지 않고 목사와 장로 소수가 한 교회와 그 교회에 드려진 헌물과 재화를 독점하여 지배하는 데 있다. 교단의 교리와 교회법도 그들을 통제할 수 없도록 비대해지면 그 교만은 하늘을 찌른다. 강남의 대형 교회 몇을 예로 들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결국 이러한 현실은 하나님 말씀의 자유보다 교회 정치가 소수자의 특권과 지위를 지키고 나누는 데에서 강단의 자유가 제한되고, 특정한 이들이 강단을 자의에 따라 점유 배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귀의 종교가 개신교의 본질인데, 정작 교회의 중추가 강단의 말씀이 아니라 친족간의 유대가 지배하는 교회 정치에 모아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외양이 제아무리 거대하고 화려하다 하여도 하나님의 교회라 불릴 수 없다. 한 편에서는 가난으로 인하여 강단의 위기가 오고, 다른 편에서는 교회 정치가 강단의 위기를 불러오는 것이 작금의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한 편에서는 금수저들의 잔치가 있고, 다른 편에서는 흙수저들의 빈곤이 있는 것이다. 교회와 성직자 간의 연대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서구의 교회들에서 배울 수 있다. 독일이나 미국의 주류 교단의 교회에서는 목사의 주권주의가 뿌리를 내릴 수 없도록 철저하게 제약되어 있다. 개 교회주의가 불러오는 목회자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교단적 중재와 재분배 노력으로 최저생계비를 보장하는 공동성을 이루기 때문에 모든 교회 간의 우애적 공동성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목사 임기제를 둠으로써 목사가 한 교회를 점유하여 뿌리를 내리고 일평생을 주인처럼 지배하는 형태의 목회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목사는 명목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개 교회의 주인처럼 행세할 수 없다. 합리적 제도를 통하여 교단 내 목사들이 강단의 자유를 지킬 수 있도록 최저 생계비를 보장하고, 교단이 목사의 수급을 조절함으로써 잉여 목사들이 양산되는 폐해를 미리 방지하고 있다. 부유한 교회들은 더 많은 부담금을 내어 약한 교회 목사들의 최저생계비를 보장하는 교회의 공동성을 지켜나가는 데에서 교회 일치라는 에큐메니칼한 정신을 지키는 것이다. 이로써 목사들은 일정 기간 소임을 마치면 그 자리를 떠나 새로운 교회를 섬기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종”으로서의 자기의식을 지킬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한 교회에 걸터앉아 주인 행세하는 목회는 불가능하다.

공동성의 위기는 결국 일치의 정신은 커녕 고도의 경쟁구조를 유발하고, 교회 간의 경쟁, 교인 간의 경쟁이나 교인 쟁탈전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소형 교회들의 교인들을 빼앗아 부유하고 거대한 교회를 이루어 내는 데에서 목회의 성패가 갈리는 것이다. 거대한 교회를 이루어내면 그 교회에서 바쳐지는 모든 헌금은 개교회의 것이 되고 마는 부조리가 당연시되고 있고, 부유한 교회는 문어발처럼 거대한 프로젝트를 벌리고, 화려한 건물을 지음으로써 부유한 교회를 경쟁적으로 더욱 비대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결국, 목사와 그 목사를 조력하는 교인들의 왕국을 이루어 나가는 것을 성공적인 목회라고 여기고 자기들끼리 우선 순위 다툼을 하는 것이다. 이런 구조 안에 있는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할 수 있느냐는 근본적인 신학적 질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공동성의 위기는 강단의 일치를 깨고 강단을 사유화함으로써 기독교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

강단의 위기를 넘어서려면

제아무리 목사가 복음적 소명과 굳건한 신앙이 있다 하여도 78,000개의 교회에는 약 15만 명의 목회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한국 기독교의 현실은 비정상이다. 목회자의 저학력, 빈곤, 빈익부 빈익빈 현상이 오늘의 한국교회의 참모습이다. 여기에서 가나안 신자들이 생산된다. 그런데도 마치 무한한 잠재성이 있는 양 허세를 부리며 오늘도 젊은이들을 무작정 신학대학이나 신학교로 무책임하게 몰아가고 있다. 교회는 목회 후보생을 가려 뽑아 훈련해야 하고, 신학교육은 사교육이 아니라 교단적 공교육이 되어야 한다. 교단마다 목사 수급계획을 세우고 그들의 최저 생계비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목사 주권증이라는 역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개교회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려면 결국 이판사판의 교단정치를 하루 속히 청산해야 하고 교단 정치가들의 책임성과 도덕성이 먼저 제 자리를 잡아야 한다. 머뭇거리면 결국 교회들의 몰락 길에서 더는 성직을 소명으로 여기지 않는 세속화에 교회가 점령당할 수도 있다. 올해에는 신학대학마다 지원자 미달 사태다. 이제는 결단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영성과 지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목사가 강단에 서는 일이 비일비재 하다면, 이미 말씀의 종교, 귀의 종교에서 강단의 위기는 시작된 것이다.

한국교회의 위기 1 : 권위주의

한국교회와 죽음의 그림자

[이제는 바꿔야 할 교회 윤리] ①저항과 비판이라는 생명력

  • 박충구
  • 승인 2017.01.09 20:51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기독교윤리학적 관점에서 교회 개혁의 과제를 생각해 보는 격주 연재 칼럼을 마련했다. 1월부터는 박충구 교수가 필진으로 참여한다. 박충구 교수는 감신대 교수(기독교윤리학)로 25년 동안 재직했으며, 현재 생명과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저술과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기독교윤리사>(대한기독교서회) 3부작, <종교의 두 얼굴>(홍성사) 등 다수가 있다. - 편집자 주
권위가 작동하는 두 방식
미국 백악관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 청소부와 친구처럼 서로 손바닥을 부딪치며 하이파이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박근혜 정권의 장관이나 수석비서관이 대통령 앞에서 두 손을 얌전히 모으고 긴장하며 서 있는 모습에 익숙한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신기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세계 제1의 강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 대통령의 권위와 나라가 분단된 나라의 대통령의 권위 행태는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한편이 평등주의적이며 합리적인, 탈권위주의적 성격을 가진다면 다른 편은 불평등한, 비합리적인 권위주의의 성격이 짙어 보였다.
권력을 가진 이는 중대한 일을 결정할 권한을 가진다. 권한을 행사하는 힘이 권위라면, 특정한 집단이 내리는 중요한 결정과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그 집단이 지닌 권위에 대한 이해 방식을 파악할 수 있다. 권력 행사에 있어서 합리적 권위가 존중되는 민주적 방식과 비합리적 권위가 행사되는 전근대적 방식은 매우 다르다.
민주적 방식에서는 옳고 그름에 대한 토론 문화가 수용될 수 있음으로, 토론을 허용하지 못하는 권위주의적 방식보다 더 좋은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전근대적 권위주의적 방식에서는 권력에 대한 비판과 저항 대신 굴종과 아부의 문화가 형성되기 쉽다. 따라서 권위주의가 판치는 사회에서는, 민주 사회와 달리 비판과 저항을 통한 변화와 개혁의 지평이 폐쇄된다.
전근대적 세계에서 근대 세계로 넘어오면서 진보된 사회는 신분과 권력 세습의 특권을 폐지했다. 권력을 가진 이가 다른 이의 사상의 자유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자의적으로 재단했기 때문이다. 민주 사회는, 권력자의 독단보다는 토론을 통하여 다수의 지혜를 모으는 합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사회다.
그러나 전근대적 습성에 젖어 신분적 특권을 지속시키려는 이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 민주 사회의 걸림돌로 기능하고 있다. 기회주의적으로 근대적인 권력 세습, 재산 세습, 그리고 심지어 교회 세습을 도모하며 이를 당연시하는 이들이다.
권위주의가 불러온 폐단
전근대의 유산인 세습 문화가 지속되고 있는 까닭은 공적인 권력과 권위를 쉽게 사유화하는 전근대적 습성 때문이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여 권력을 쉽게 사유화할 수 있는 사회는 권력 세습을 허용하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재산을 사유화할 수 있는 사회에서는 재산을 세습한다. 마찬가지로 교회 권력을 사유화할 수 있는 교회는 세습된다. 공적 세계의 사유화는 권위의 사유화라 할 수 있는 권위주의와 밀접히 관련된다.
전근대 세계에서는 권력과 권위가 혈연을 통하여 무비판적으로 세습될 수 있었다. 하지만 민주 사회에서의 권력의 사유화나 세습은 마땅히 불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민주 사회에서는 권력이란 그 본질이 공적인 것이며, 국민이 공직자에게 제한적으로 위임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교회도 사유화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루어진 공교회(公敎會)로서의 성격이 원래 교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유화할 수 없는 것을 버젓이 사유화하는 병폐가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박근혜 정권의 위기 역시 이런 병폐가 초래한 결과다. 국민에 의하여 선출된 대통령이 민주적 원칙을 무시하고 권력을 사유화했고, 국가의 중대사를 헌법 정신이 아닌 자의를 앞세워 권위주의적으로 결정해 왔기 때문이다.
민주적 사회의 기본인 헌법 정신을 버리고 자의를 유통시키는 권위주의 정권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 중차대한 국가적 사안에 대하여 대통령의 주장에 합리적 비판이나 이의를 제기할 경우 그에게 밉보여 즉각 관직에서 퇴출당하는 사례를 번번이 경험한 각료나 비서관들은 아마도 대통령의 권위나 심사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관료로서 장수하는 비결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이런 정권에서 어찌 보다 나은 대한민국을 위한 비판과 저항, 그리고 책임 있는 토론이 가능했겠는가?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 최고의 권력 집단 속에서도 권위에 대한 전근대적인 이해가 여전히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민주 사회는 신분제와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 평등주의를 전제한다. 따라서 특권의 세습은 민주 사회에서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권력의 세습, 재벌의 세습, 심지어 교회 세습까지 정당화하거나 당연시하는 전근대적 풍조가 넘쳐 나고 있다.
나는 이런 풍조의 산실이 바로 전근대적인 권위주의 행태라고 생각한다. 권위주의가 팽배한 세상에서는 공공의 영역이 손쉽게 사유화되고, 심지어 세습까지 이루어진다. 이런 세상에서는 합리적 비판과 토론의 검증 문화가 차단되고 권력자의 특권을 강화해 주는 일사불란한 상명하복의 질서가 형성된다. 이렇게 되면 권력자의 자의적(恣意的) 욕망이 필연적으로 법질서를 유린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우리 사회가 상당 부분 근대화되고, 민주화되었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우리가 가지는 관계망의 실상에서는 전근대적인 가치 구조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유구한 전통을 가진 이화여자대학교에서도 교육법과 대학 규정을 무시하는 권위주의적 행태가 암암리에 유통되었으니 다른 대학들은 어떠하겠는가?
생명력 파괴하는 권위주의
정치권력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언론의 감시와 비판에서 벗어나 있는 종교계는 어떠할까? 오늘날 권위주의적인 목사들이 지배하는 목회 현장에서 그들의 천박한 비리를 찾는 일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이렇듯 공적 권위를 부여받은 이가 법과 원칙을 무시하고, 자의에 따라 특권을 유통시키는 비리는 청와대만이 아니라 대학 사회에서도, 종교 공동체 안에서도 만연해 있다.
권위주의의 폐해는 악성 박테리아처럼 국가 사회나 대학 사회, 그리고 종교 공동체를 부패시킨다. 무엇보다도 권위주의는 무능하고 부도덕한 자에게도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무비판 지대를 형성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각료들과 대면하여 토론할 능력이 없는 대통령도 그의 권위에 맹종하는 무리들에 의하여 얼마든지 옹립될 수 있었던 이유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속설은 권위주의 사회의 허상을 잘 드러내 주는 말이다.
하지만 무능한 자에게 권위를 옷 입혀 주고 그의 자의에 의하여 중요한 사안들이 결정되는 집단의 운명은 오래잖아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어 몰락할 수밖에 없다. 더 나은 것을 위한 저항과 비판을 거부하며 토론 능력을 결여한 집단이 어찌 이 시대를 뛰어넘는 생명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나라는 최순실에 휘둘린 박근혜 정권의 배후에서 저질러진 무수한 비리로 인한 위기를 직면하고 있다. 최순실의 수하에서 묵종하던 관료들과 대학 총장, 그리고 교수들부터 시작하여 심지어 이 나라 최고 통치자인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지위를 박탈당하고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이런 국가적 수치를 초래케 한 것은 바로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행태 때문이다. 그간 박근혜 정부 안에서는 비판과 저항의 검증 과정을 거부하고 합리적 토론 절차를 생략한 상명하달의 수직적 명령 체계와 이에 대하여 맹종하는 체제만 작동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이런 체제는 사실 대통령이 누구인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대통령 자리에 최순실이 들어앉아 지배 조종해도 그 권위주의적 통치 체제는 수년간 무비판적으로 지속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박근혜 정권의 위기를 바라보면서, 이것이 권위주의적 목사의 자리를 그의 자식이 세습해 주어도 아무런 이상 없이 굴러가는 교회의 현실과 겹쳐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박정희의 후광을 입고 대통령이 된 박근혜와 아비의 후광을 입고 교회를 세습한 자식은 정말 닮은꼴이지 않은가? 권위주의적 목사의 지배와 그에 맹종하는 무리들로 이루어진 교회와 권위주의적 대통령과 그에게 맹종하는 관료들로 이루어진 정권은 정말 닮은꼴이다. 박근혜의 권위주의적 통치 체제의 손발이 되어 무비판적인 맹종과 칭송의 송가를 불렀던 주요 인물들이(황교안, 서창원, 이정현 등)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과 권리를 존중하는 민주 사회에서 권위주의는 우리의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사회악의 근원이다. 권위주의는 필경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형성되어야 할 평등한 관계를 거부하고 보편적인 인간의 권리를 무시하는 억압적 행태를 결과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박근혜 정권의 문화계 인사 블랙리스트 작성 사건이다.
문학과 예술적 상상력이 그 생명력을 유지하는 비결은 현실을 뛰어넘으려는 비판과 저항의 정신에 있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은 문학과 예술의 생명력을 이해하고 소화해 낼만한 철학조차 지니지 못했다. 오히려 그 생명력을 억압하기 위하여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국가의 지원을 차단함으로써 그들의 문학과 예술혼을 고사(枯死)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렇듯 권위주의 정권은 저항과 비판의 생명력을 파괴하는 죽음의 문화를 확산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죽임의 문화의 수족이 된 이들이 바로 전근대적 질서 속에서 상명하복에 명을 걸고 살아온 군 출신과 정치 검사들이었다. 이들은 서열적 질서 속에서 저항과 비판의 생명력, 그리고 합리적 토론의 여백을 이해하지 못한다.
박근혜 정권에 나타난
기독교의 죽음
지난 늦가을부터 전국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한 촛불은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인 군왕적 대통령에 의한 권위의 오남용에서 빚어진 부정부패에 대한 저항과 비판의 정신을 담고 있다. 부패한 현실을 거부하고 보다 나은 세상을 바라는 우리의 희망 속에 타오르는 촛불에는 그릇된 것을 거부하는 힘, 곧 생명력이 담겨 있다.
일부 정치가들은 대통령제 자체가 군왕적 대통령을 낳는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 인과관계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권력의 의무와 한계를 명시하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결여된 사람이 최고 권력자가 되어 주어진 권력과 권위를 무책임하게 남용하거나 오용해도 이에 비판을 제기하거나 저항하지 못하는 문화가 문제의 중심이다. 이런 그릇된 체제를 유지시켜 온 것이 바로 전근대적인 권위주의 문화이며, 기독교는 일면 이런 권위주의 문화라는 악성 박테리아를 키워 온 숙주 중 하나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서 권위주의 문화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보다 나은 정치를, 보다 나은 종교를 기대하기 어렵다. 나는 우리 사회 정치 영역이나 교육 영역, 그리고 종교 영역에서 보수나 진보를 막론하고 상당한 지위가 부여되어 특정한 권위를 행사하는 이들 중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를 민주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 것인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어떠할까? 교회의 자락을 조금만 들추어 보면, 국가 사회나 대학 사회보다 더 깊이 곪아 있는 권위주의적 습성과 불투명한 행태들이 교회에 만연하다는 현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종교는 관료적 권위를 행사하는 국가 사회나 진리 탐구의 자리로 간주되는 대학과는 달리 특정한 영적 권위를 행사한다. 그러므로 종교적 권위는 강제력을 행사하는 국가권력에 비하여 비폭력적이어야 하고, 진리 탐구의 합리성에 기반한 대학 사회의 권위를 초월하는 영성적 특성을 가져야 한다. 국가 사회의 권위가 법치에 예속되고, 대학 사회의 권위는 합리적 지성에 예속되어야 한다면, 종교 집단의 권위는 양심과 영성의 깊이에 의존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언어를 빌린다면, 정치와 대학은 속(俗)의 아름다움으로서 정의와 진리를 위해 봉사하고, 종교는 영성적 아름다움으로서 사랑과 구원을 위해 봉사한다. 따라서 신학자들은 종교가 성성(聖性)을 견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종교가 참된 종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성성은 결코 회칠한 무덤 같은 권위주의를 옷 입지 않는다.
따라서 종교의 본질은 속성(俗性)과 구별되는 성성(聖性)에 있다. 그런데 만일 종교가 그릇된 욕망을 향한 저항과 비판의 생명력을 상실하여 성(聖)과 속(俗)이 전혀 차이가 없다면, 아니 성과 속이 뒤바뀌어 전도(顚倒)되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속된 종교, 종교의 죽음을 의미한다. 권위주의를 옷 입고 있는 종교는 생명력을 상실한 죽음의 종교, 예수가 말했던 회칠한 무덤 같은 종교다. 내가 박근혜 정권의 위기에서 한국 기독교의 죽음의 그림자를 보는 이유다.
박충구  newsnjoy@newsnjo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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