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November 2, 2008

혁명적 용서: 세계화 시대의 종교, 포악 그리고 치유

Revolutionary Forgiveness
Religion, Atrocity and Healing in an Age of Globalization

Marc H. Ellis

혁명적 용서
세계화 시대 속에서의 종교, 포악 그리고 치유
마크 앨리스 Marc H. Ellis


세계화에 대한 논의들은 많고도 다양하다. 그 논의들은 전형적으로 세계화의 범위와 그 구체적인 효과와 관련되어 있다. 이 논의들은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세계화의 논의의 확장은 전통의 주체들과 지적 생산활동에 맞닿아 있다. 세계화의 언어인 영어 조차 비판과 조롱을 불러오고 있다. 물론 세계화와 관계된 수많은 주제들처럼, 언어는 적어도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뉜다. 먼저 보호받아 온 영토의 침입자, 그리고 이미 언어학적 장벽에 의해 분리된 사람들을 연계시켜주는 것으로 나뉜다.

세계화에 관련된 모든 주제들 중에서, 가장 적게 논의되는 것이 종교다. 세 가지 유일신론적인 종교들인 유대주의, 기독교, 이슬람은 세계 종교로 불리어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 왔다. 그리고 그 어떤 이들도 세계 전반에 퍼져 있는 불교, 유교, 힌두교의 중요성에 대하여 의심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화의 상황 속에서 이러한 종교들의 중요성도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종교가 논의될 때에, 이러한 종교들에 대한 논의가 허용된다 할지라도 정치적인 영역에서 보는 권력이나 영향력에 관한 관심 없이는 그 전제가 다소 부적절하다. 또한 종교들은 “퇴보”하면서 사회에 대하여 역행하는 그것의 영향력 때문에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여 지기도 한다. 종교에 대한 후자의 비판은 많은 사회 과학자들의 선입관을 반영하기도 하고 세계의 여러 곳에서 세계화와 근대화의 과정에 적합하지 않은 종교가 그 사회를 규정하는 한 요소가 되고 있다.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여기 종교에 대한 다른 견해가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종교의 역할은 긍정적이거나 파괴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개인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분위기와 고난과 빈곤을 직면하고 있는 공동체에서 종교는 긍정적이다. 물질적인 부요함보다 더 고차원적인 진리가 요청되기도 하고, 반면 초월적인 원리들 안에 뿌리박고 있는 사회와 문화 가치 체계를 파괴할 때에는 풍요로움이 거절되기도 한다. 종교성의 파괴적인 측면은 세계화의 동력이라 할 수 있는 사회 안에서 여실히 발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유럽과 미국의 경우, 부와 권력의 불공평한 분배에 대한 비판에서 더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계질서를 찾기 위한 종교적 원리들이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기존 질서를 바꾸는) 전복적 종교성은 모든 사회와 종교들이 지닌 존엄함과 모든 이들의 평등함을 주장하기 위하여 국경과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세계화가 평화와 정의의 세계 질서를 증진시키는 한 어떤 사람도, 어떤 국가도, 그리고 어떤 공동체도 우위에 있거나 열등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세계를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나누는 한 세계화는 거부되고 있다.

비록 복잡한 세계화와 종교의 현실이 논쟁의 표면 아래에 있었을지라도, 이러한 논의 안에서 종교의 두 측면은 자주 논쟁적인 용어와 권력에 관련되었다; 파괴자로서 그리고 방어벽으로서의 종교는 세계화를 경험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종종 함께 병립해 있게 된다. 여기서 이슬람과 기독교는 흥미로운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한편에서 이슬람은 유럽과 미국의 힘에 대항하는 방어벽으로 보여지지만, 유럽과 미국은 기독교 정서와 많은 부분에서 동일시 된다. 서구 세계 안에서 일련의 기독교인은 이러한 동일화에 반대하고, 실제로는 기독교와 동일시되는 서구문화의 여러 측면들을 거부하고 있다. 세계화의 동력을 지닌 유대적 일체감 속에서 훨씬 더 복잡한 상황이 발견되기도 하고, 일부 유대인들이 비서구적 세계에 맞서는 유대교-기독교의 연합이라는 사고에 대해 반대를 제기하는 것도 볼 수 있다.

문명 충돌은 종교의 충돌로 재해석 될 수 있다. 이제 문명처럼, 종교들은 다양하기도 하고 그들 안에서 대립(충돌)하기도 한다. 만일 우리가 여기에 종교와 종교성의 긴장이 고조되어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는 시점에서, 9/11 사태로 인한 혼란, 중동의 매우 악화된 상황이 계속된다면, 그때엔 세계화와 종교를 구별하기가 어려워 지는 데 이는 그 복잡함과 해소 책이 점점 많아 지기 때문이다.

콘스탄틴적 종교성

어떤 종교를 하나의 세계 종교라고 단언한다는 것은 본래 흥미로운 일이다. 많거나 적든 간에 엄격한 의미에서 사실 세계종교란 존재하지 않는다. 숫자를 따진다면, 유대교는 “세계적이다”라는 말을 거의 할 수 없다. 근 70억에 이르는 세계 인구 중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을 추종하는 이들이 각각 10억 명 이상 된다. 세계 종교의 위치에 있어서 기독교와 이슬람이 주장하는 것은 - 또는 아마도 불교까지도 - 각각의 종교 안에서의 다양성에 의해 더욱 복잡해진다. 비록 예배의식이 유사하고 심지어는 교리조차도 그저 적은 차이를 지니고 있을지라도, 비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차이는 거의 대수롭지 않은 것이지만, 이렇게 세계 종교들이 문화적으로 구체화된 모습들은 결국 그것들이 지역적이며 시대에 한정된 바 국지적인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종교들의 내용과 상황이 시간이 지나갈수록 변한다는 것이다. 17세기와 18세기에 대해 언급하는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 처럼, 기독교도들과 무슬림들에 의해 요구되는 연속성도 있지만, 매우 동일한 공동체와 신앙구조에 속해 있는 오늘날의 신자들이 가진 신앙의 형태와 속성에 관한 사회적인 연구는 그들의 연속성만큼 더 많은 불연속성을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어 예수와 모하메드가 오늘날 초기의 모습으로 존재하거나, 혹은 그렇게 존재했었다는 개념은 종교 사회학자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이론적인 확장이다. 그러나 기독교나 이슬람전통 안에 있는 신앙인들조차도 초기 예언자들의 모습이 역사적인 논쟁에 싸여져 있다는 사실과 그들의 모습들이 서로 다른 시대 속에서 해석되고, 또 다시 재해석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는 있다.

세계 종교로서의 종교를 구체화 과정 속에서 여러 다른 질문들이 무시되어지기도 한다. 유대주의와 기독교와 이슬람은 중동지역의 토착적 지역 종교로서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들의 예언자들과 그들의 초기 추종자들이 사용하고 구체화 했던 행동과 언어와 사고의 형태를 본다면 그들은 더욱 더 지역적인 영역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기원은 단순히 지역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종교들은 본질적으로 같은 이야기와 문화 속에서 나타났으며, 적어도 그들의 이야기와 문화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어머니로서의 유대교는 지역적인 이야기와 문화 속에서 태어났고, 토착적인 유대주의로 진화하면서 생겨났던 세례주기나 삶을 변화시키는 요소들과 얽혀있는 그 지역의 이야기와 문화 속에서 태어났다. 논의를 더 뒤로 밀고 들어가 보면,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창시자라고 여겨진 사람들은 - 모세, 예수, 모하메드 - 의도적으로 종교를 설립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응답하는 사람들을 위한 메시지를 가지고 역사 속에서의 어떤 시점에 나타난, 지역적인 인물이었고, 자신의 생각을 구두로 전했던 예언자들이었다.

이러한 예언자들과 초기에 그들을 추종했던 이들의 생존했던 기간이 지난 후 일어난 것이 바로 이러한 종교들의 탄생과 성장이었고, 또 하나의 이야기로서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일반적인 어휘인 세계종교가 된다는 것은, 그리고 유대적인 이야기가 이러한 종교들의 원천이 된다는 것은 바로 메시지의 힘이며, 그 메시지가 종교적인 증언, 제국적이며 식민지적인 권력을 통하여 퍼져나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종교적 증언은 그 자체가 복잡하다. 두 종교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전통으로부터 생겨나게 되었고, 그 성장에 자양분을 제공한 문화적인 요소들을 통합해 온 것이다. 종교적인 증언이 식민지적이고 제국적인 힘을 통하여 퍼져나갔기 때문에, 증인들을 외국 영토와 문화로 실어 나르는 제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마침내 기독교와 이슬람은 오늘날 잘 알려진 종교가 되었고, 제국이라는 맥락 안에서 강력한 종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이슬람의 역사는 복잡하다. 그들의 역사는 종교적 성장과 식민지주의와 제국주의에 야합하려는 경향을 회피하기가 너무나 어려웠던 것이다. 기독교의 경우에 있어서, 콘스탄틴 제국은 기독교의 세계화를 위한 도구였다.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콘스탄틴적 종합으로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것처럼 기독교가 태어난 것이다. 콘스탄틴 기독교는 오늘날 우리에게 무수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진실과 다른 이들을 위한 유산을 남기고 있다. 이런 역사가 오래 지난 후, 신약성서 속에서 확증된 기독교로부터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20억명의 이상의 사람들에 의하여 실천되고 추종되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구별해 낸다는 것은 쉽지 않다.

이제 콘스탄틴적 기독교는 국가와 근본적인 야합을 가진 종교가 되었기에 거의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제국의 종교가 된다는 것은 그 보상으로 국가의 권력과 정책에 축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항상 확장되는 세계 종교에 맞추어 그 지역 예언자들의 증인들을 변형시켜야 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여기서 콘스탄티니즘은 다양한 양태들을 취하고, 또한 모든 종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권력과 국가에 동화 종속되었다는 의미에서, 콘스탄틴 종교와 종교성은 일종의 종교적 규범이 된 것처럼 보인다.

일면 콘스탄틴주의는 본디 겉모양으로는 다른 종교에 속해있는 사람들에게 유사한 길을 제시하는 종교일는지 모른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오늘날에도 다양한 형태의 콘스탄틴적 이슬람도 있다. 그리고 오늘날 유대교 역사에서 최초로 생겨난 콘스탄틴 유대교는 이스라엘과 미국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콘스탄틴 종교성이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사회적 질서와 문명의 진보에 본질적인 것으로서 주요 독점적인 종교들을 바라보는 많은 이들이 존재하고 있다. 콘스탄틴 종교는 실질적으로 시민종교이거나, 아니면 시민종교에 커다란 기여를 했거나, 다양성을 함께 묶는데 기여를 했거나, 공통의 목적을 명확히 표명하거나, 개인과 사회와 정치적인 분열의 경향을 억제시키기도 한다. 전혀 종교가 없는 것보다는 권력의 자리 근처에서 야합하는 종교를 가지는 것이 보다 낫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종교와 국가를 두 개의 경쟁하는 종교적인 구조로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고, 시민에 대한 복종과 충성을 위해 경쟁하는 두 개의 체제 종교와 국가를 생각하는 것도 가능하다. 비록 타협되어 국가의 승인과 권력이 필요한 가치들이 오래 된 본문과 제의적인 아름다움과 깊이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둘로 갈라진 충성의 대상을 가지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콘스탄틴 기독교와 이슬람은 예언을 선포하고, 예언이 중요하다는 것을 선포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예언을 봉인해 버린다. 국가와 야합한 종교에게서 예언이 자유롭게 된다거나, 그것이 예언과 직면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예언은 고대에 있었던 것일 뿐, 모하메드와 예수는 지나갔고, 이제 그들은 종교적인 권력구조에 의해 해석될 뿐이다. 권력구조는 계급구조 자체와 국가 권력과의 관계성을 의문시하는 예언이 가진 힘에 거슬러, 예언을 감독할 책임을 지닌다. 이점이 바로 종교가 가지는 계급구조와의 야합에 대하여 예언이 자주 경고한 것이다. 이리하여 그리도 잘 단장한 비밀스러운 제의와 해석학적인 책략들이 콘스탄틴 종교성에 넘쳐나는 것이다.

믿음과 투쟁에 대한 예언과 광범위한 전통

적어도 사회학적으로는, 콘스탄틴적 종교성이란 문화적이고 지질학적인 경계선들을 교차하는 것으로 예측 가능한 것이다. 표면적으로 다른 종교들도 그런 행위의 유사한 형태들을 보여주고 있어서 그 종교들은 다른 상징 구조를 지니고 있는 그것과 동일한 종교로 받아들여진다. 만일 그러한 분석이 너무 광범위하다면, 콘스탄틴 기독교와 콘스탄틴 이슬람의 차이점은 자주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종교들은 국가를 위하여 동일하게 타협해온 가치들과 부패로 얼룩진 충성을 바치고 있다.

예언이 콘스탄틴 종교 안에서 선언되었기 때문에, 그 예언은 쓸만한 가치가 있고, 모든 시대를 걸쳐서 그 종교 추종자들 중 소수가 그 유용성을 취하게 된다. 그래서 모든 시대에 예언은 선언될 뿐 아니라, 최소한 소수에 의해 살아남고, 종종 그 소수는 종교 권력의 고삐를 쥐고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박해를 받게 된다. 콘스탄틴적 종합은 이러한 박해를 필요로 하고, 언제나 국가는 예언자들을 종교적으로 훈련시켜 길러내거나, 그들의 견해와 행동에 있어서 그 사회에서 변절자로 간주되는 이들을 외면하는 것이다. 너무나 흔히, 종교 영역 안에서 예언을 지나치게 심각하게 생각하는 증언자를 허용하고, 그를 함정에 빠뜨리는 특정한 자리가 만들어진다. 그리하여 예언은 영적인 것으로 바뀌고; 예언적 증언은 칭송을 받기도 하고, 제한 받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예언은 그 핵심에 있어서 여러 측면들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정의가 선포되고 평등 공동체가 선포된다; 다른 한편에서는 예언된 것을 지키기를 거절하는 행위를 강하게 징벌하는 하나님의 승인권을 행사한다. 예언적 영감은 예언자적 징벌과 균형을 잡게 된다. 그러나 콘스탄틴적 종교성은 영감을 선포하며 영감을 봉인한다. 그 종교성은 신적인 징벌 위협을 수단 삼아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삶을 지배한다. 이것이 바로 국가에 의한 사회적인 명령이 종교적인 사명으로 간주되는 이유고, 종교가 그 사명을 돕는 까닭이 된다. 콘스탄틴적 종교성 안에서 예언의 훈련 그리고 국가는 기이하고 강력한 협력작용을 불러오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를 깬다는 것이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다.

종교 자체의 기적은, 적어도 그 다양성에 있어서 예언이 종교와 국가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하도록 유지하는 데에 존재한다. 역사 속에서 일부 양심적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들이 지속적으로 출현하고 있다는 사실은 후대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으로 생성된 것이 무엇인지 밝혀주는 근원적 증언에서 얻을 수 있는 예언적 영감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다. 흔히 이렇듯 양심적인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종교와 국가에 의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다.

만일 서로 다른 상징 체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이러한 콘스탄틴적 종교들의 예언자들이 동일한 종교와 종교적인 의식을 실천한다면 사람들은 의혹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예언자들은 사상과 행위에 있어서, 그들이 서로 상호 협력하는 종교인이 되는 것을 넘어, 아마도 그들의 운명에 있어서 조차 서로에게 더 가깝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들은 아마도 경계와 담을 넘어서 믿음에 충실하기 위한 싸움을 더욱 깊게 하는 전통, 곧 신앙의 유산과 공동체를 형성하는 기도와 행동 속에서 기억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시각으로부터 양심적인 유대교인과 기독교인과 무슬림을 바라본다면 이들은 세계 종교들로서 집합적으로 알려진 콘스탄틴 종교성 안에서, 그리고 이를 넘어서는 투쟁과 믿음의 더욱 광범위한 전통 안에 존재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그들의 양심적 실천 안에서 서로가 가지고 있는 유사성을 인식하면서 일어나는 색다른 류의 세계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연대성과 정의를 종교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인 이러한 양심적인 사람들이 권력에 의하여 그리고 권력을 가진 이들에 의하여 지배당하는 종교, 정치적 세계를 향하여 과연 진리를 증언할 수 있을까? 양심적인 종교인들은 전 지구적 경제, 정치 그리고 종교적 제도에 대하여 주장하는 자리와 같은 양심의 영역을 벗어나 어떤 논리적 근거를 주장할 수 있을까?

하나의 책략은 이러한 양심적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인들을 더 커다란 콘스탄틴적인 체계 안에서 바라보는 것인데, 거기에는 이중적 감수성이 존재한다. 서로에게서 힘을 얻고 서로에게 말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이 그 속에서 살아가고 형성된 더 커다란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가지는 것이다. 이렇게 붙어있는 이중 담론은 콘스탄틴적 책략에 반해서 일종의 파괴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더 광범위한 믿음과 투쟁의 전통은 그것이 발견되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콘스탄틴주의와 갈등하게 되고, 문화와 정치, 경제적인 자리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투쟁으로부터 얻은 자원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보다 넓은 신앙과 투쟁의 전통 안에서 계속 수행된 예언은, 독점과 통일성을 요구하면서도 편협하게 구조화되어 둔중하게 된 종교 제도들과 부딪히게 된다. 종교 제도 안에서 예언자적인 목소리는 유대적인 것인 동시에 무언가 그와 다른 것으로서 기독교, 그리고 뭔가 다른 것을서 무슬렘, 그리고 뭔가 더 다른 무슬렘으로 존재한다. 물론 어떤 종교 제도도 그 자체로 존재할 수는 없다; 정통주의적인 것이라고 인식하지만 사실 자주 임의로 변조된 그 본래의 자원들을 우리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요구된 다양한 자원들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로 존재하는 대부분의 제도들은 권력을 가지고 그 종교를 돕는 바, 그 종교제도가 선포하고 봉인하는 예언적 음성에 더욱 충실한 사람들을 유독 관련시킨다.

양심적 종교인들이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예언자적인 증언을 양육시키는 바로 그 차이를 흔히 잘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콘스탄틴 종교의 지도자들이 혐오스러운 용법을 이용하는 수사법에만 의지하고 있는 양심에 대하여 옳다고 주장할 때, 대다수의 양심적 종교인들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차원에서 종교계 안에 있는 세계화에 대해 연구해 왔다. 정의와 훈계라는 예언의 이중적 본질은 그들만의 기반에서 논의되었다. 과연 이러한 기반이 양자 중에서 더욱 약한 편을 위한 가능성을 견지하고 있다고 믿을 근거가 있겠는가?

콘스탄틴 종교 담론은 중요하지만 제한적이다. 하나의 전략으로서 그것은 이해가능하기도 하지만 역시 점점 정직하지 않은 것이 된다. 양심적 유대인과 기독교인과 무슬림은 스스로가 달라진 종교로 행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처음에는 그들이 그들의 종교의 예언의 연원에 더욱 가까워 보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연원과 공동체의 현재적 실천에서 점점 더 멀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까닭이다.

더욱 광범위한 믿음과 투쟁의 전통은 항상 발전하는 예언자들의 공동체 속에서 시원적 예언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 전통은 예언의 결정적인 것으로서 어느 예언자에게도 매여있지 않고, 실제에 있어 어느 예언자도 최후의 예언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더욱 광범위한 믿음과 투쟁 속에 있는 사람들은 경전의 한계들과 시원적인 예언자들의 결점들에 대한 비판적 이해를 가진다. 이와 유사하게 유대, 기독교, 이슬람 공동체의 설립에 있어서 폭력의 역할과 계급구조에 대한 인식은 이렇게 새롭고 다양한 공동체의 중심에 콘스탄틴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를 두는 것이다.

콘스탄틴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는 현대적인 개념 속에서 비평 전통의 연속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역시 그저 근대-후기의 해석으로서만 규정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콘스탄틴 종교는 일반적으로는 종교의 유산을, 특수하게는 믿음의 가능성을 단단히 거머쥐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양심적 유대인과 기독교인과 무슬림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들이 그들 자신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새로운 범주와 지형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계약의 궤 속에 있는 무장 헬리콥터

이러한 범주와 지형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세계 속에서 새롭고도 효과적인 방식으 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들은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콘스탄틴주의를 넘어서서 우리들을 거만한 엘리트들로 나누어 놓는가? 결국 그러한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경제적인, 정치적인, 그리고 문화적인 엘리트들이다. 여기서 제1세계/ 제3세계라는 명칭은 거의 완전히 붕괴된다.

사실상 제삼세계에서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사회에서 같은 견해를 가진 제1세계 출신 사람들보다 더욱 엘리트들이다. 이들은 사회와 종교의 규범을 깨는 견해를 지닌 것이 엘리트주의자인가? 이런 견해를 고통 당하는 사람들 편에서 표명하는 이들이 엘리트인가?

확실한 믿음과 투쟁의 방법으로 더욱 광범위한 전통이 가지고 있는 유용성은 폭로와 교육의 기능이라 할 수 있지만 과연 이러한 연계 가능성을 우리는 엘리트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마찬가지로 주변부에서 싸우는 사람들이 지닌 너그러움과 관대함 속에서도 찾아질 수 있는 것인가? 콘스탄틴 종교성은 권력과 국가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에 믿음과 투쟁의 더욱 광범위한 전통을 잇는 다리로서 작용하는가? 이것은 1960년대에 라틴 아메리카에서 형성된 해방신학을 담고 있는 비옥한 토양과 같다. 그 토양은 종교를 포함하여서 모든 차원에서 일어난 폭력과 고통에 의하여 예비된 것이었다. 해방신학자들이 발견한 기독교는 토착적 삶과 신앙의 파괴자였고, 새로운 투쟁과 가능성의 시작이었다. 요약하자면 문제는 기독교적인 것이기보다는 식민지주의와 복음화의 상황 속에서 정의의 지평에 관한 것이었다.

정의의 지평은 하나님의 지평이다. 두 가지는 가능성으로서, 투쟁할만한 가치로서 “이후에, 사후에, 미래에로” 어렴풋이 함께 드러난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실현 되어야만 하는 것과는 달리, 종종 최소한 단기간에 걸쳐 실패할 운명에 처해져 있다. 정의의 꿈들이 결핍되고, 바로 그런 종교들이 그들의 중심에서 정의가 버림을 받을 때, 여기서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고통이 드러난다. 예언은 모든 결점과 한계를 지닌, 그리고 그 두 그룹들의 모든 위선을 지니고 있는 엘리뜨들과 비엘리뜨들 속에 살아남는다. 믿음의 구조에서 그들의 외양의 차이가 무엇이든 간에, 그리고 그들 자신의 기반을 위협할 수 있는 다른 권력을 향한 그들의 적대성이 무엇이든 간에, 종교와 국가의 힘은 예언에 대립하여 정렬하고 있다.
만일 예언이 우리 시대에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그리고 동일한 종교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버림을 받을 운명에 처하여 언제나 초월적인 것이라면, 그리고 만일 예언이 정의와 억압으로 나누어진 쌍방향을 향하는 길이라면, 우리는 왜 예언을 모두 폐기해 버리지 않는 것일까? 폭력과 포악의 순환을 불러오면서도, 아무런 폭력과 포악의 포기에 대한 약속도 없는, 그런 종교 범주들을 우리는 왜 버리지 않는 것일까?

이런 질문은 스스로를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들 모두에게 주어진다. 이 질문은 답변 될 수 없는 것으로, 단지 그렇게 살아가야만 답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전략을 넘어서서 그리고 전략 안에서, 모든 알려진 종교를 넘어서서 그리고 그 종교들 안에서, 그들이 배척하는 것조차 진리임을 주장하는 교리와 원리를 초월해서, 바로 이 질문이야말로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본질적인 통찰이다. 예언의 생존, 세계 속에서 구현된 예언, 시간을 지나고 경계를 넘어서서 “현재”는 언제나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예언을 세상에 전달하는 바로 그 사람들, 유대인들인 우리 민족은 기독교와 이슬람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예언을 남겨준다. 이제 우리가 주장하는 예언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억압 속에서 오늘날 소모되고 있다. 이 점은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정의의 지평과 하나님의 지평이 계약 안에서 발견된 이유로 계약은 유대인들에게 먼저 주어졌지만, 유대 백성들은 그것으로부터 도망쳐 버린 것이다. 전 세계의 회당 안에 있는 계약 법궤에서 우리는 토라, 히브리 성경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제 그 속에 찬양과 예배의 대상이 되는 무장 헬리콥터를 담고 있다는 표현이 과연 더욱 적절한 것이 아닌가? 계약은 불의와 영원히 일치하지 않는다. 불의는 불의를 저주하면서 참다운 말씀과 음성을 주장하는 사람들 그리고 불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피해 달아난다. 콘스탄틴 유대주의가 벌리는 불의에 대한 축복은 단순히 그 자매 종교의 행태를 따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위험은 어디에서든지 높지만, 여기서는 더욱 높다. 왜냐하면 만일 최초의 계약의 수행자들이 진실한 세계 종교의 지위에 대한 현실을 혼란스럽게 하고, 쇠퇴하도록 용인해 왔다면, 최소한 숫자로 보아 유대주의는 여전히 콘스탄틴주의에 굴복해 왔고, 완전한 예언과 계약적인 깨달음은 손상을 받아온 것이다. 많은 방식에서 예언의 담지자들이 정복자의 수준에 굴복해왔을 때에는 되돌아 갈 수 없는 지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유대 공동체 안에서 내전이 일어난다. 이스라엘과 미국에서, 유대국가를 재건하는 중심에서 포악과 폭력을 행하면서도 자신들의 무죄성에 대해 예언적인 주장을 펼칠 때에, 그 폭력에 대항하는 다른 무엇이 기대될 수 있겠는가? 저주스러운 형상들이 강해지고 이러한 형상들에 대항하는 방어 역시 똑같이 강해진다. 고로 유대 이견자들은 조롱으로 위협받고, 반역의 책임이 물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유배를 강요 받는 것이다. 유배가 내려질 때, 유대 공동체는 폭력과 침묵에 머물게 되고; 일치라는 말은 유대인들에 대하여 감히 다른 말을 하려는 사람들을 적대하는 표어가 된다.

이렇게 되면 자기를 증오하는 유대인들 그리고 반유대주의적인 비유대인들에 반해서 물어지는 책임이 거의 유대적 정체성의 총체가 된다. 마치 한때 우리를 가해했던 것처럼 우리가 다른 이들을 가해하는 경향에서 면책을 받은 것처럼, 유대인들의 희생만은 영원하고, 마치 예언이 한때 우리들을 박해했던 콘스탄틴적 체제와 같은 류의 사고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처럼 여길 때, 홀로코스트는 이스라엘 국가정책과 미국 유대인들의 체제에 의한 이스라엘 정책 지지에 반대하는 비판을 재갈물리는 장벽으로 이용된다.

그리고 기독교인과 무슬림들이 종종 주장했던 바, 마치 그들이 다른 종교에 대해 비판을 했던 한계와 실수조차 피할 수 있듯이 꾸며진 우월감처럼 순진한 것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1500년 이상 유럽에서의 고통의 여정을 통하여 주장되었던 유대적 우월성에 대한 주장의 몰락과 더불어, 바른 신앙과 행위에 관한 여타 종교들의 모든 주장들은 결국 정지되었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정지”는 하나님과 관련되어 특별한 요구를 가지고 시작하는 모든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경고이다. 이것은 주장들이 논박 받는 자리에서만 진리를 주장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한편이 확신을 가지기 어려운 것을 동일한 어려움을 직면한 다른 편이 받아줌으로써, 새로운 연대를 통하여 비판을 굴절시키는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에큐메니칼한 거래(에큐메니칼 대화에서 일어나는 상호 편안함을 취하기 위한 적당주의적 타협: 역자 주)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 새로운 연대감을 통하여 교묘히 비판을 피해가기를 추구한다. 서구에서는 적어도, 이런 일이 다른 사람의 종교성에 대한 개방을 선언하는 그릇된 겸비함을 가지고 행해진다. 결국에는 이런 거래에 의하여 시종일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과 포악에 대한 역사적이고 동시대적인 해석을 찾으려는 내 외적인 비판을 징벌하는 것이다.

오직 유대교만이 그 증언의 중심에서 폭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 속에 있는 것을 다른 종교에 투사하는 것일 수 있다. 불의와 폭력에 도전하지 않는 상태를 허용하는 것은 사실 순진함으로 퇴각하는 것이다. 세계화는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서 폭력의 한 형태이며, 종교는 그것을 따라가기도 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폭력적 세계화의 산물이다. 세계화에 관한 비판적 대화는 종교자체가 그 복잡성 속에서 공모자라는 것을 이해할 때에 비로서 진전될 수 있다. 오직 그때에만 콘스탄틴 유대교, 기독교와 이슬람 안에서 내적인 대화가 가능해 질 것이다. 그때에 비로소 믿음과 투쟁의 더욱 넓은 전통 안에서 내적인 대화가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화는 연대성과 공감의 운동 안에서 나타난다. 진실한 대화는 오직 그런 운동 안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우리가 세계에 대하여 말하고 그 속에 있는 우리의 위치에 대하여 말하는 한, 인간으로서 우리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이 실제적인 것들이 될 때, 이런 움직임 안에서 비로소 진실한 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런 대화는 더욱 공정한, 새로운 세계질서를 추구하려는 책무를 수행할 때에, 그리고 수행한 이후에 이루어 진다. 이러한 운동은 우리를 겸허하게 한다; 비록 논의의 주제들이 위협적인 것들; 즉 종교적이거나 문화적인 우월성, 타자에 대하여 무죄하다고 보는 구속사적인 길, 궁극적인 계시로서의 계시, 이 모든 것들은 검증을 받아야 할 이상들이다.

계약 법궤 안에 이제는 무장헬리콥터가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고리 안에는 동등한 상징적인 표지들이 있다. 이스라엘 안에서 모든 종교적인 예식들은 중지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향한 공격이고, 억압의 표지이며, 범죄를 가려주는 무죄주장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종교 예식과 절기들인, 성만찬과 라마단은 역사와 현시대적인 삶을 담고 있는 우리의 평가가 진실하게 때까지 과연 유보되어야만 할 것인가?

이러한 종교적이고 예전적인 사건들 중 어느 것이 그것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위선에서 살아남는 것인지 우리는 궁금하다. 믿음과 투쟁의 더 광범위한 전통 속에서 그것들이 살아남게 될지, 혹 더 차고 넘칠지 누가 알겠는가? 만일 그것들이 살아남게 된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그것들은 개혁될 것이다. 믿음과 투쟁의 더 광범위한 전통은 대부분 드러나지 않았거나 유배 상태에 있다. 이러한 전통을 정체성으로 삼는 사람들 역시 유배 상태에 있다. 그들은 과연 새로운 디아스포라를 형성할 수 있을까? 유배자들이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모이는 곳은 어디인가? 각 전통의 파편들이 가치와 희망으로 새로운 종합을 일으킬 곳은 어디인가?

기독교와 이슬람 안에서도 동일한 구출 작전들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이 지나갔듯이 무장헬리콥터로부터 계약의 법궤를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많은 시간이 지나갔다. 그런 구출이 없다는 것, 예언자적인 목소리가 종교 안에서 심판을 받도록 운명 지어 졌다는 것, 예언자들이 귀을 막고 있는 이들에 의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몰락하고, 예언자들의 이름으로 또 한 판 벌려진 폭력 속에서 그들의 희생이 이용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쯤 알게 될 것인가?

불운한 예언자는 공동체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자리이지만, 한때 지역적이고 이제는 세계적인 종교가 된 고대 종교들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자리가 없다. 아이러니는 세계 종교의 참다운 승리 그 자체가 바로 그들의 실패의 일부라는 것이다. 저항의 아성(牙城)들이 모든 종교 안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그 저항의 소리들은 진면목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을 실천하기 위한 주장을 통하여, 사실상, 아직 드러나지 않는 색 다른 길, 새로운 디아스포라 안에서 유배를 시작하게 된다.

유배가 일어나는 동안 자유로운 예언과 한정될 수 없으며 누군가에 의해 소유될 수도 없는 계약이 존재한다. 자유로운 예언의 실천에 관한 특성 그리고 우리 시대에 신실하기 위한 투쟁을 가능하게 만드는 적절한 영성은 있다. 더 넓은 공적, 지구적 토론을 이어받을 수 없는, 자유로운 예언에 대한 비판은 의심할 여지없이 옳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문제가 제기된다: 다른 개입의 형태들이 과연 성공한 적이 있는가?

전략은 세계 안에서 그 자리를 가진다. 그리고 살아남은 콘스탄틴 종교와 국가는 전략을 요구한다. 그러나 마침내 권세들이 압도하면, 양심적인 이들을 위하여 단지 타협적인 항복이 가능할 뿐이다. 이런 항복에는 수치감이 없다. 왜냐하면 미래에 대하여 그리고 압제자의 변화에 대한 기대 조차 열려 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의 지평, 정의의 지평이 하나님의 지평이 되는 경우에만, 그 항복 속에서 혁명적인 용서가 나온다.

비록 더 커지고 더욱 힘을 가지게 될지라도 세계 종교들에게 있어서 종말은 멀지 않다. 남아 있는 것이란, 지금 이순간에도 그리고 언제나, 종말이 올 때까지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는 문제다.

유배와 새로운 디아스포라

유대적인 폭력이 다른 종교들에 의하여 용납된 폭력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논쟁거리이기도 하고 또 당연히 논쟁을 불러와야 한다. 무죄한 체하는 것도 여실히 동일하다. 오늘날 에큐메니칼 거래에 의하여 추가되고 부추겨지는 이런 폭력에 대해 특이한 침묵이 있을지라도, 모든 종교적인 사상가와 행동가를 향한 교훈은 동일하다: 비록 세계 종교가 정의와 불의, 평화 운동과 폭력에 대한 승인을 담고 있을지라도, 분명 이러한 주제들을 넘어서서 그들 안에서의 내전, 그리고 언제나 가장 오래된 것과 순수한 것을 되찾으려는 시도는, 종교와 연계된 자유든지, 아니면 사회학적이며 비판적인 종교 이해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유산에 대하여 새로운 관점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상, 다원주의적인 공동체는 정확하게 말해 같은 생각을 가진 개인들의 공동체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편린 전통들을 어떤 하나의 특별성이 지배할 수 없는, 근본적으로 전통이 그 자체를 변화시키는 방법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서로 다른 전통들로 형성되는 자리로 가져간다. 이것은 21세기에 특별히 옳은 이해가 될 것이다. 전체적이고 배타적인 것으로서 종교적인 전통의 회복을 향한 운동은 부분적으로 종교다원주의자들에 의해서만 저지될 수 있다. 이것이 진실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종교의 배타적인 이해와 정치권력 사이의 친밀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또한 세계종교가 다원주의에 대해 심각하게 불만할 수 있는 경우도 된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은, 그러나 힌두교와 불교와 같은 다른 종교에서도 또한 진리일 수 있는 사실로서, 사회에서 소수자의 위치를 가질 때, 그리고 그들이 정치적이고 군사적이고 경제적인 권력에 의하여 주변부로 밀려나갈 때 다원주의와 손을 잡는다.

이런 사례들은 많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유럽에서 사회를 형성할 자신의 능력을 단순하게 양보하지 않았고, 부과 군사력도 포기하지도 않는다. 콘스탄틴 기독교는 그런 권력을 위해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서 싸웠고, 여러 방식에서 개신교 개혁자들은 이러한 통제와 권력을 다시 회복시켰다. 폭력과 포악의 순환은 지난 수 천년 동안 유럽 기독교 안에서 행해졌고 세계 전체에 걸쳐서 널리 퍼졌다. 기독교를 세계종교라는 지위에 올려 놓은 제국주의와 식민지주의의 지나간 흔적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중앙 아메리카에서 일어난 지난 수 십 년에 걸친 투쟁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제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이것들이 지난 투쟁들이나 새로운 범위의 시작인가? 이슬람은 이런 측면에서 매우 다른가? 이슬람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세계적인 투쟁이 그 목적인가? 아니면 이슬람의 부흥인가? 이러한 부흥을 수반하는 내적 투쟁이 지금 시작되고 있는가?

유대인과 유대주의는 이러한 관계에서 논의할 가치가 있다. 모순들은 놀랄만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한편에서 본다면 미국의 유대인은 다원주의를 환영하기도 하고, 실제로는 주요한 언론의 논평자들이거나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하는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들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 국가로서 이스라엘은 군복무와 땅을 사는 능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능한 방식에서 유대인 됨을 규정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소수자들은 관용되고 있지만 땅도 국가도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세계 도처의 유대인들은 복귀할 수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국가가 전세계 유대인들의 국가가 되기를 바라는 바에 따라 금방 이스라엘 시민이 될 수 있기도 하다. 완전한 평등을 논하는 그리고 민족적, 인종적, 종교적 배경에 대하여 차별이 없는 시민의 권리를 논하는 미국 유대인들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모순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유대 국가를 지지하는 논쟁을 벌인다. 그들은 또한 다원주의적 노선을 따라가며 논하는 다른 이들을 향해, 유대인들과 비유대인에게, 신조나 종교 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시민권에 의해 보호받는 종교의 자유와 평등을 가르치려 든다.

오늘날의 논쟁거리인 이런 점은 또한 고대의 논쟁거리였다. 갱신이란 운동을 보다 더 진척시킬 수 없지만, 최소한 한동안은 고대종교들 안에 있는 배타적 이해들을 부드럽게 만들거나 부드럽게 되도록 노력한다.

다원주의자들의 진실성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들은 이러한 전통의 측면들에 대하여 배타성을 취하는 이들처럼 주장한다. 확실히 양편 모두 위선을 지니고 있다. 배타적인 것으로서 이러한 전통 안에서 믿는 사람들이 자극을 받고 있는지, 아니면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권력을 위하여 종교를 사용하려고 하는지를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원주의자들이 종교를 단순하게 논의하는지, 아니면 오늘날 넘쳐나는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전쟁에 대해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이러한 의도들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양편에 대해서 모두 복잡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반면, 종교적인 전통의 주류와 권력에 대한 그 순응은 다원주의자의 승리가 그럴듯하지 않게 만든다. 가장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란 후속적인 세대들 속에서 협상을 이루어낸 일련의 타협안들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러한 투쟁은 종교와 문화와 정치적인 전선에서 싸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어느 편의 승리이든지 그것은 미래를 위하여 위대한 결과가 된다. 그러나 만일 다원주의자가 종교적인 성향이 배타적인 사람들에게 더 큰 권력을 부여한다면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전통에 대하여 갱신을 추구한다는 것이 과연 실제로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 권한을 부여하는 것일까?

대안은 생각하기 어렵다. 그리고 의심의 여지없이 종교와 종교성의 중심을 향한 투쟁은 중요하다. 여기에 여전히 영적인 질문이 남아있다. 이러한 투쟁이 다른 편의 영성을 깊게 하는가? 신앙심에 대한 질문들이 소홀히 여겨지고 있는가? 전통의 전반에 대해 믿는 척할 수 있을까? 부숴진 파편들만 남아있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언제야 깨닫게 될 것인가?

진리 안에서 종교적 다원주의는 유배의 가장자리에 있거나 아니면 이미 거기에 있다. 다원주의자들의 공동체는 그들이 존경할만한 전통 속에서 다른 유배상태에 있으며 또한 다른 전통으로부터도 유배상태에 있다. 유배의 중심은 영성을 수립하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돌보심과 관심의 포괄적인 성격과 예언자적인 소명의 대한 강조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본성과 예언자적인 소명을 포괄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미 다른 전통들로부터 빌려온 것들이 있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다원주의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새로운 전통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다원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을 기독교인, 유대인, 무슬림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이미 그들은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바로 어디엔가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그 이름이 온전히 인식된다면 계속해서 미래 속에 자리를 잡는다. 새로운 디아스포라 안에서 유배의 공동체를 개혁하는 것이란 바로 이 이름 짓기에 다름이 아니다. 바로 거기서 흩어진 전통들의 파편들이 모아져서 하나의 새로운 현실 속에서 융합될 것이다.

유배와 디아스포라는 종교의 역사에 있어서 지속적인 주제이다. 그것은 20세기의 예언자적인 공동체의 재탄생을 위한 재료이다: 만일 21세기 안에 동일한 포괄적인 종교가 있게 된다면 유배와 디아스포라의 궤도가 이름 지어질 필요가 있다. 유배와 디아스포라 안에서 약속되었던 복귀는 그 길을 열어왔지만; 21세기에는 복귀란 없을 것 같아 보인다.

종교자체는 그 자신의 기원을 숨기는 경향이 있다. 사실상 모든 종교는 위기와 유배의 상황 속에서 출현했다; 그것들은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형성된 산물이다. 확립되고 규명된 전통들과 더불어 종교의 성향은 옛 것 안에서 새로운 형성체들을 보게 된다. 이는 마치 종교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언제나 진화하는 광대한 조망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과 같다.

수세기 동안 이런 경우가 존재해 왔고 적어도 그럴 것이라 여겨져 왔다. 그러나 갱신에 대한, 갱신의 변화를 위한 전통의 능력을 고갈시켰을 때에 일어난 것은, 혹은 변화라는 것이 실제에 있어 하나의 위장수단이었을 때, 다른 시대의 생존을 위한 전략적 책략이었을 때에 일어난 것이 과연 무엇이었던가? (이런 종교적)게임이 끝났을 때, 종교적 변화에 참여했던 이들은 그들이 전통 사이에 존재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 바깥에 이미 있었다는 것을 의식했을까? 참여자들이 제안한 변화를 초래하기 위하여 전통의 능력을 넘어서서 움직이고 있을 때, 그리고 그들이 제안한 참다운 변화가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이지만, 사실상 불의와 폭력을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우리가 가지는 에큐메니칼한 대화의 요지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종교 다원주의자와 그들이 참여하는 일치 운동이 깊이가 없다는 것은 그들의 나쁜 의도 때문이 아니다. 그 반대로 그들의 의도는 고상하다. 그러나 깊이의 결핍은 무능력으로부터 흘러나온다. 그것이 아니라면 종교적인 상황 자체를 직면하려는 의지의 결핍에서 나오는 것이다; 최고의 추론을 위하여 돌아갈 길은 없다; 그러나 영적인 길은 언제나 우리 앞에 있다; 전통의 배타성이 오해되었거나 아니면 그 전통적인 요구가 오도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회의실에서의 책략은 거짓된 것은 아니다.

여기 교육적인 하나의 실례가 있다: 유대교에서, 신에게 선택되었다는 주장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땅처럼 전통의 내부에 깊숙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주장과 약속 사이에 위대한 미학이 있고;
또한 폭력과 포악이 있다. 약속의 땅에 대한 의무는 명료하고 예언자들은 애매함이 없다.

히브리 성서의 하나님은 정의와 공감의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속히 분노하시며 징벌하시는 질투의 하나님이다. 물론 이러한 분노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일어난다. 어떤 경우에는 바깥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하나님의 선택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향한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이스라엘 내부를 향하기도 한다.

이것이 유대적 다원주의자들과 에큐메니칼 대화에서 볼 수 있는 히브리 성서의 하나님일까? 에큐메니칼 대화에 참여한 유대인들이 언제 하나님의 약속과 책망을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들의 상황에 관련시켜 왔는가? 언제 유대인 참여자들이 팔레스타인을 멸망 받아야 할 아말렉으로 분류하거나 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들을 함부로 다룬 것으로 인하여 유배를 당할 징벌을 받아야 한다고 했던가? 언제 기독교 참가자들이 이러한 질문을 그들의 유대인 동료들에게 제기했었는가? 혹은 마치 유대교의 하나님이 선택과 의무에 있어 중립적인 분으로 오해되는 것처럼 유대 전통에 관한 이런 핵심적인 논의의 주제들이 “극단주의자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일까?

예수에 대한 해석은 마찬가지로 이런 관점에서 흥미롭다. 대부분의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예수의 생애와 그의 자기 인식이 우리에게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예수의 삶의 의미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소명에 대한 숙고를 위하여 색 다른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신약성서는 과연 무엇이 되었는가?

복잡성들과 연관된 것은 예수의 유대성, 예수의 초기 추종자들의 신앙, 신약성서가 되는 본문의 포괄성과 배타성이다. 기독교가 천년왕국을 연기해 왔다는, 예수가 메시야 라는 신앙과 그 신앙 저편에 구원이 있다는 근원적인 주장을 제거하는 것은 어렵다. 신학적인 전략이 초래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기독교 공동체만을 위한, 그리고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 중요하지도 않을지 모르지만, 기독교 공동체 밖에 있는 타자들을 고려하는, 구원자를 개념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는 동안 이루어지는 전통의 확장은 신학적인 논쟁 속에서 유지되기 어렵고 제도적으로 유지하기에는 더더욱 어렵다. 주류 개신교가 미국에서 쇠퇴하는 것은 이점에서 사례가 된다. 진보 신학들은 신학적 자산과 그 기독교적 이해에 있어서 서로 무척 다른 하나의 기독교로부터 얻은 제도적 유산에 기생해 살아 왔다. 이제 이런 신학들은 그들 자신의 자원과 충성심을 발생시키는 데에 어려움을 직면하고 있다.

교회 협의회(NCC)의 운명은 캐나다 연합교회의 운명처럼 교훈적이다. 양자 모두 기독교에 대한 그들의 (에큐메니칼한)이해를 통해 기독교를 하나의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해석해 주는 데 실패했다. 이러한 이해를 가진 사람들은 교회 제도, 종교의 힘, 그리고 성직자를 가진 하나의 종교인 기독교를 버리고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 종교적 다원주의를 받아들이는 평신도들은 진보적인 신학과 평신도들보다 기독교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공적인 영역에서 더욱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혹은 이러한 기독교인들은 아마도 기독교의 종말을 보고 있거나, 그들의 믿음에 대한 또 다른 해명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와는 다른 경우다. 지난 200년 남짓 유대인들이 뚜렷한 확신을 가지고 그들의 종교적인 의무를 외면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기독교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는 환영 받았지만, 그러나 그 정황에서 잊혀진 것은 유대인들 역시 마찬가지로 유대인 권위자들에 의한 내적인 통제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한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은 유대적인 종교적 실천을 위하여 유대주의 안과 밖에서 종교 다원주의를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유대주의를 종교로부터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요구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종교로부터, 특히 배타적이건 다원주의적이건 간에 전통적인 종교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종교적인 강요와 위선을 참아내지 못하는 유대인의 능력은 그 근원을 토라에 두고 있었는 데, 계몽주의와 근대 국가 안에서 시민의 권리에 대한 이해를 통해 걸러졌을 때 그 결과는 명백해 졌다: 회당에 적을 두고 있는 유대인들의 수가 오늘날처럼 더 낮아진 때를 찾아보는 것은 매우 어렵고, 만일 회당에 적을 두는 일을 엄격한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수는 하찮은 것이 될 것이다. 이런 논리는 물론 에큐메니칼 거래에서도 반영된다. 기독교인 참여자들은 종교적인 기독교인이 되지만, 그들의 유대인 대화 파트너의 종교적 입장이 종종 문제가 되거나, 최소한 유대인들의 종교성이 다른 용어로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이런 문제는 에큐메니칼한 거래에서도 반영되고 있다.

여기 에큐메니칼한 만남 속에 또 다른 만남의 자리가 있다. 폭력과 포악으로 점철된 그들의 역사를 통하여 일해온 종교적인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종교적인 존재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독교 제도 세계에 한 발을 딛고 있는 동시에, 유배상태에도 한 발을 딛고 있다. 유대인들은 대부분은 콘스탄틴 기독교를 피해 달아나고; 그들은 오늘 날 콘스탄틴 유대교로부터 도망친다. 바로 이런 사실은 자신의 역사에 대하여 비판적이면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하여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는 기독교인들과, 정의를 추구하면서도 종교적 경건과 위선을 견디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이어주는 것이다. 이런 만남에서 우리는 배타/포용 유형을 넘어서서 하나의 미래를 열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미래는 유배 속에서 진화한다; 새로운 디아스포라가 성장하는 곳에 이런 진화의 기초가 세워진다. 두 세계에 발을 딛는다 함은 에너지를 약화시키고, 요구되는 명확성과 21세기의 정의와 종교성의 현실을 규명하는 일을 가로막게 될 것이므로 우리는 모든 진실함을 가지고 이런 가능성을 직접 대면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이렇게 유리한 자리에서 다원주의와 그 입장을 지켜온 전통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투쟁을 인지하는 것은 일종의 후방위 투쟁이라 할 수 있는데, 이 투쟁은 전략과 조정을 요구하고 있다: 즉 전통 내부와 타종교의 지도자들과의 토론에서 지배적으로 드러나는 구시대적인, 온전히 믿어지지 않는 종교적 이미지의 사용이 의미하는 바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실제에 있어 자기 전통에 반하여 이견을 지닌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는 타종교 지도자들을 인정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정의에 대해 지속적으로 질문하며 그런 입장으로 인해 대가를 치러온 이들이 어떻게 불의와 포악에 참여하는 종교 지도력과 타협하고 받아들이는 이들과 연대를 나눌 수 있겠는가?

새 디아스포라는 오직 진리 문제가 공공의 세계에 증언될 때 형성되고 규명된다. 실제적으로 그 계산을 늦추는 다원주의자는 반대자들을 주변으로 밀어내고, 그들에 대해 모든 신앙 공동체들의 에큐메니컬한 거래자들의 분노를 사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문제에서 드러나는 유대 이견자들의 운명이 아닐까? 기독교 다원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유대 반대주의자들과 같은 견해를 가지지만, 유대인들을 위하여 목소리를 높이는 행위의 결과를 두려워한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지도력과의
관계가 깨지는 것, 그리고 그 결과 그들 자신의 기획의 일부를 상실할 것을 두려워해 왔다.

이제 남아 있는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굴종이 종교 다원주의와 종교적 관심을 여하간의 더 깊은 방법에서 촉진해 왔는가의 문제이다. 평화는 정의보다 더욱 선호되어 왔다. 동시에 기독교 공동체 내부의 이견자들은 그들이 너무 많은 것을 너무나 급하게 요구했기 때문에 반역자들로 간주되어 왔다. 이런 거래는 각 각의 전통 속에서 종교 다원주의자들의 좌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외부의 존재로 소외 시키거나 혹은 박해 받게 하는 두 길로 나누어졌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이슬람과 무슬림의 세계와 함께 나누어온 지속적인 대화에서 생생하게 드러난다. 유대인과 기독교 다원주의자들이 동의와 타협의 공간을 이루어 낸 것처럼, 이슬람과의 만남은 이미 언급한 실책들이 남긴 어려움들을 더욱 어렵게 할 것 같다.

유대인과 기독교 다원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인을 위한 존재라는 것에 대하여 동의해 왔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나 메시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제 그러한 합의는 수년간의 대화와 비판적 학문과 분노에 찬 역사적 고발을 통해 이루어졌다. 무수한 기독교인들에게 받아들여진 유대공동체는 예수의 구원적인 본성에 관한 기독교적 신앙을 훈련 받았다. 이런 일이 이제 이슬람 전통 속에서 모하메드의 자리에서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도 모하메드를 궁극적인 계시로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이 이제 무슬림들의 신앙으로, 그리고 에큐메니칼 한 대화의 비타협적 측면에서 수용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신앙으로부터 이탈한 무슬림들에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들은 곁으로 밀려나 자신의 공동체와 에큐메나칼한 대화에 참여한 다른 참여자들에 의하여 박해를 받게 되지나 않을까?

무슬림은 종교적 다원주의자들의 해석처럼 아브라함 전통의 한 부분으로서 환영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틴 이슬람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경악해 하며, 그것은 극단주의의 한 형태라고 여겨 당장 거부할 것이다. 그리고 콘스탄틴적 이슬람과 일종의 종교다원주의적 이슬람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지점을 일러주는 그런 무슬렘들은 배척될 것이다.

예언과 종교 다원주의

종교 다원주의의 중요성에 대한 질문만큼 중요한 질문은 없다. 종교 다원주의는 차이에 대한 관용과 인식을 향한 필수불가결한 단계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 안에서 책임과 자유를 규정하면서 민주주의와 시민권의 역할을 지향한 현대적인 운동을 보완하고 있다. 다원주의는 정확히 그 근원을 고대 전통에 두고 있다. 그 전통은 종교적이며 관용적이라는 주장은, 언제나 그리고 어디에서나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일러준다. 다원주의는 무수한 신앙인들이 그들의 믿음과 다른 이들의 믿음을 수용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존재해 왔고 존재할 것이다.

모든 종교는 그 전통이 가지고 있는 감수성과 영역권을 확장하듯이, 분명 그것의 기원에, 그리고 그것의 내부에 다원주의를 지니고 있다. 종교다원주의는 부분적으로 다원주의를 허용하고, 실제로 필요로 하는 제국주의적 역사다. 어떻게 다른 종교들이 정복되고, 종교성과 그들에 의하여 재구성된 상징들의 유형들로 동화될 수 있었을까?

다른 종교와의 접촉조차도 대부분 제국 안에서 그리고 제국으로 인해 이루어 진 것이다. 시대를 넘어 대립해왔고, 패배해 온 것은 다른 시대 속에서 다시 타협을 받아 들였다. 기독교와 유대주의의 역사는 그러한 만남으로 가득하다. 현재의 에큐메니칼 대화는 그러한 역사의 산물이며 에큐메니칼 거래는 일종의 계속되는 타협이라고 보아야만 한다.

이슬람은 기독교와 유대교와의 만남처럼 그 자신의 확장의 내적인 역동성, 분리, 폭력과의 지속적인 만남의 일부다. 일종의 오래된 그리고 동시대적인 만남의 자리로서 아브라함 전통에 대한 집중된 관심은 신화에 근거해 있다. 누군가가 심각하게 이러한 종교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발생되었다거나, 아니면 그 종교들의 공통적인 근원인 아브라함에게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믿고 있을까? 이런 일을 하는 것은 거의 일종의 기본적이며 명확한 구조를 거부하는 것과 같이 매우 복잡한 역사들을 내 던져 버리는 것이다.

역사의 증언은 우리에게 종교적 다원주의는 중요하지만 제한적인 것이라고 말해준다. 그것은 일종의 다른 영역으로 가는 정거장이다. 이런 종교들이 그렇게 세워져 강력해 졌다는 사실은 폭력과 포악에 물들기 쉬운 그런 전통의 부분들을 대면해야 하는 종교적 책임성이 무한히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행히도 대면의 투쟁이 더 깊은 영성을 대체할 수도 있고; 종교다원자가 일러주는,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수용하려는 미래의 영성을 지체시키는 일을 돕기도 한다. 아무튼지 다음 세대는 현 세대의 열광주의와 싸우려는 입장을 취할 것이라고 기대되지는 않는다. 한 세대의 반역은 다음 세대 자신이 다루어야 할 문제들을 안고 있는 이미 수용된 규범이 되기도 한다.

다원주의자들의 후예들은 그 반역을 수용 가능한 현실로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영성은 다른 신앙을 가진 다원주의자들 속에서 이루어진 이 새로운 환경에서 형성될 것이다. 만일 종교적 배타주의자들의 테러에 대항하여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더불어 싸운다면, 그것은 정치적인 투쟁처럼 단순하게 규정될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공적인 영역에서 해명된 그들의 종교성은 침묵을 강요당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의 최전선에서 그들은 어딘가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영성의 미래는 이미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 대부분 비제도적이고, 절충주의적이며, 다소 뉴 에이지적인 것으로서의 그 영성은 영성적이며 정의지향적인 사람들로 구성된 조그만 공동체 안에서 찾아질 수 있다. 전통의 파편들은 여기저기서 모아지고 때로는 골라 내어지고, 맥락이 드러나고, 대부분 우리가 그리도 많이 논의해 온 종교들에게는 낯선 감수성과 태도들의 덩어리 속에서 재결합되는 것이다.
이렇게 파편들을 절충적으로 모으는 데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 이런 공동체들 중에서 미래를 가진 공동체는 거의 없으며 그들의 이상 중에 어떤 것은 이미 유대교와 기독교 안에 모아져 있다. 적어도 종교의 자유, 민주주의와 시민권이 당대의 요구가 되는 한에서 이런 일은 이슬람과 다른 종교에게서도 시대를 걸쳐 일어날 것이다.

서구에서는 적어도 모든 종교들은 전도를 위한 것이 된다. 모든 종교들은 그들의 평화를 군사주의와 근대성의 다양한 형태 속에서 나타나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주의와 더불어 만들어 낼 것이다. 오늘날 하나의 진정한 세계종교는 근대성이기 때문에, 종교성의 미래에 대한 논의는 근대성 안에서 발견된다. 혹자는 종교적 다원주의가 근대성 안에서 의미를 가질 것이며, 다원주의는 이러한 새로운 제국 안에서 자리를 잡으려 한다고 말할 것이다.

여기서 예언이 다가온다. 예언은 종교 이전이다; 적어도 예언은 유일신론적인 믿음을 위하여 그 주변에 종교 그 자체가 세워지는 핵심이다. 일단 종교가 세워지면, 예언은 폐해진다. 규정되고 다시 규정되어서 예언이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될 때까지 제의와 종교의 힘에 사로잡히고 성직자와 학자들에 의하여 해석되는 것이다.

종교 간의 대화는 예언에서 멀어져 가는 이러한 궤도에서 절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정확히 돌파가 가능하다. 세계종교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주의를 통하여 확장된 지역종교를 크게 이용한 것이다. 세계종교들은 그들의 세계적 감각 안에서 이제는 거의 인식할 수 없게 된 토착종교들이다. 이 기원에서조차 자주 묻혀지고 숨겨지는 것을 통해 요령 있게 남게 된다. 정의와 자비에 대하여 그들이 지니고 있는 관심의 가장 큰 의미를 본다면 그 종교들은 명백하게 예언적이라는 것이다. 유대인의 편에서 본다면 이런 종교는 토라와 탈무드를 가지지 않은 하나의 예언적 현실이다. 기독교의 편에서 본다면 이것은 신약성서, 교회 그리고 성직제도 이전에 있었던 예수 주변의 공동체인 것이다.

이러한 예언적인 토대들의 견고함은 의문의 여지없이 근대성의 종교와 일치하기 어렵다. 그리고 고대의 여정을 근대의 것으로 만드는 상황신학의 요구는 불합리하다. 하지만 다원주의자/근대성 패러다임의 취약성은 종교적 배타주의와 종교적 다원주의간의 끝없는 투쟁과 마찬가지로 예언의 날카로움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예언을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미성숙한 판단에 대하여 경고를 보낸다

실제로 근대성 안에서 예언을 심사 숙고한다는 것은 우리가 배운 것들 중에 많은 것들, 특히 종교적인 가르침들을 내어 버리는 것이다. 그 배움은 우리들을 예언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더러운 배타주의자들과, 덜 배운 형제와 자매들에 대한 승리감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실수란 우리가 그렇게도 우리의 적들 한 가운데에서 비난했던 바로 그 동일한 전략적 제휴 안으로 우리도 빠져드는 데 있다.

세계종교에 대항하면서 예언서를 읽는다는 것은 겸비에 대한 교훈이다. 예언은 우리 자신들의 궤변으로 만들어진 안전한 항구를 포함하여 우리의 은신처를 버리고 떠날 것을 강요한다. 우리의 특수성은 더 날카롭게 되고 불편해 진다. 그러나 바로 그 거리 때문에 우리의 공동 인간성을 더 깊이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예언은 우리들을 진보의 환상으로부터, 우리 자신의 궤변적인 전통으로부터, 우리 자신들의 논쟁으로부터 그리고 끝없어 보이는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전쟁으로부터 우리를 놓아준다. 만일 종국에 우리가 위의 것 모두에 참여한다면 - 우리가 우리의 유산, 교육과 독특성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 우리는 적어도 더 깊은 차원에서의 묵상과 영성은 그저 피상적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 무관심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예언이 없다면 영적이고 종교적인 것에 무슨 중요함이 있겠는가? 예언 없이 종교적인 대화에 무슨 중요한 점이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우리는 예언적인 소명에 유의하는 데 실패했고, 진실에 있어서 예언의 내용을 따라 살기 원치 않고, 예언을 고의적으로 멀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적 배타주의자들과 합의할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더욱 정직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대가는 세계 종교들과의 대화 위에 그리고 그 주변에서 자란 전문가들의 희생을 포괄하는, 다양한 전선에서 엄청난 양이 될 것이다.

종교적 대화를 제도화하는 것 자체는 위험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종교들과 문화들을 이해하고 평화롭게 순응시키기 위한 대화에 대한 긴박한 요구는 역사적으로나 문헌적으로 넘쳐난다. 그것은 유사한 교회 - 혹은 회당이나 모스크 – 일종의 자기발생적이며 자축적인 것으로서 다원주의 공동체가 비판하는 구조들인 대안적 권력구조가 될 수 있다.

거듭 말하자면 자기교정이란, 종교가 되어버린 이러한 고대의 운동들을 담고 있는 지역성과 예언이라 할 수 있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문제를 피할 수 없다: 우리가 과연 예언이나 종교를 구체화하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우리 자신의 분별력의 지속성을 추구하는가, 아니면 우리는 우리가 화가 나서 우리의 방향을 바꾸게 만드는 그런 훼방을 용납하고 있는가?

우리시대의 갈등을 초월하는 자리가 있는 데 역설적으로 그 곳은 문제의 한 가운데 우리를 정위 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감수성들은 각기 다르고 거래가 되어버린 에큐메니칼 대화는 종교 다원주의 문제가 버려지는 것처럼 외면 받게 된다.

그 안에 존재하는 우리 자신들이란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 즉 일종의 새로운 디아스포라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 유배중에 있는 공동체인 것이다. 예언과 현대 세계와의 대화 속에서 우리 전통의 파편들은 일종의 색다른 역동성으로 돌입한다. 우리가 그것에 이름을 지어줄 용기가 있다면, 이 역동성은 언젠가 이름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름과 상관없이 기실 그것은 이미 여기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화 시대와 혁명적 용서

이미 여기에 현존한다는 새로운 디아스포라의 감각은 우리에게 영성의 진정한 소명을 기억나게 하고, 예언은 상처를 치유하며 새로운 상처가 나지 않도록 막아준다. 이러한 상처들은 다양하다; 유약성은 그 자체로서 인간의 여정을 드러낸다. 본성과 질병을 직면하고 있는 인간의 유약성과 인간에 의해 야기하는 폭력에서의 유약성 사이에 있는 차이는, 완전히 분리되었을 때 더욱 더 그릇된 차이가 된다. 우리의 지구에서 일어나는 포악은 더욱 더 상호 연관되어 있어서 인간과 자연은 오늘날 운명적인 결속을 가지고 있다. 교란하고 파괴하며 경제정책을 뒤흔드는 이들은 바로 군사적 정복정책을 손아귀에 쥔 이들이다. 제국 안과 밖에서 제국을 추구하는 이들은 서로 야합한다. 그러므로 제국에 의하여 행해지는 포악은 역사적인 것을 포함해서 다양한 수준들과 연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이유로 다양한 시각에 의해 규명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비록 그 포악이 지역적으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것은 본질상 지구적이다. 대량학살이 이곳 저곳에서 일어난다; 식량 공급이 끊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죽임을 당한 사람들; 강제 이주를 당하고 난민촌으로 보내지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폭력의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폭력은 범법자들에 의한 폭력이다. 침해 받은 이들을 보호하는 이들에 의해 일어나는 폭력도 있다. 이렇게 폭력과 포악의 순환은 전 역사를 거쳐 20세기를 거쳐 21세기에도 지속되고 있다. 20세기에는 강제수용소(구소련), 홀로코스트, 캄보디아와 르완다에서; 21세기에는 다포지역, 이라크와 레바논에서 이미 그 포악이 증언되고 있다. 세계화가 포악의 형태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핵에 의한 대학살에만 견줄 수 있는 크기의 포악들이다. 아마도 핵에 의한 대학살과 세계화의 현실 양자는 기술적이며 사회적인 조직과 관료체제에서 일어나는 동일한 진보를 통하여 가능해지는 것일 것이다. 버섯구름과 지구온난화는 동전의 양면이다.

포악 이후에 과연 치유가 있는가? 어려운 질문이다. 이제 이 질문은 여전히 더 어려워진다. 포악 이후에 포악은 여전히 지속되고 지평선위에 더 많은 포악이, 정확히 동일한 장소가 아니라도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후에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에도 일어나는 포악과 더불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 요약하여 묻는다면,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재에도 일종의 포악의 세계가 있는데, 만일 모든 것이 규명되고 종료된다면, 우리의 미래를 규정할 수 있도록 돕는 것으로서, 거기 하나의 미래가 있을 것인가?

과연 포악이 없는 미래가 있을까? 인간성의 근원에 기여하는 종교적이고 세속적인 열성가의 위대한 희망, 바로 이 희망 역시 사회적, 경제적인 불의를 근절하기 위하여, 세계에 자유를 주기 위하여, 비문명화된 이들을 문명화시키기 위하여, 진실한 종교를 설파하기 위하여, 포악을 종식시키겠다는 투쟁 속에서 수 백만 명을 죽음에 넘겨줄 수 있다 - 이 모든 것들은 역사학도 들이나 현 시대의 사건들을 추종하는 이들에게 있어 익숙한 십자군 전쟁들이다.

이것이 폭력과 포악의 순환고리 속으로 세계를 끌어들이는 바, 다양하게 규정된, 더 나은 세계를 위한다는 바로 그 욕망이란 말인가? 아니면 보다 나은 세계를 바라는 것이란 그저 단순히 상처 입기 쉬운 세계에 자신들의 제국적인 구조를 부당하게 끼어 넣기 위하여 권력을 행사하기 바라는 모든 이들이 이용하는 기만의 술책인가?

우리의 능력 안에 가지고 있는 선택이란 다름 아니라 비록 그 수단의 복잡함이 있지만 그저 단순히 바라 보는 것이다: 우리의 개인적인 삶 한 가운 데이거나 혹은 집단적인 노력 속에서 우리는 제국, 아니면 공동체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 양자(제국이나 공동체를 추구하는 노력)의 성취란 거의 불가능해 보이지만 제국 아니면 공동체를 지향하거나 멀리하는 방향만은 그 안에서 구별해 내는 것이 가능하다. 바로 이 제국이나 공동체를 지향하는 방향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사회적이고 그리고 종교적인 것이다. 그 선택은 우리 시대에 일어난 사건, 역사적인 사건 이후나 그 기간과 그 전에 우리의 선택 영역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충격에 있어서는 결정적인 것으로서 어느 한 시대에, 그리고 모든 시대에 적용될 수 있는 간섭주의적 입장으로서, 마치 나쁜 의도를 가지고 취한 바른 행동을 안내하는, 최선의 의도들을 가지고 행동을 교정하도록 안내하는, 분별력과 같다. 이러한 간섭은 우리들의 개인적인 통제 안에 있다 - 우리는 모든 시대에 이것을 할 수 있는 데, 작은 공동체에서부터 국가적이고 국제적인 행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단계에서 연합하여 논의할 수 있어 응용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국과 공동체에 대한 문제에는 개인적이며 제도적이고 측면이 있는 것이다. 제국과 공동체를 선택하는 데에 있는 일종의 항구적인 측면은 우리가 언제나 개인적이며 집단적인 것들을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불가능하지 않은 것이라 해도 포악 이후에 용서 한다는 것은 어렵다. 만일 정의를 추구하려는 책임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용서라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포악 이후에도 정의가 있을 수 있지만, 죽은 자들을 되살려 낼 방도는 없다. 포악을 행한 사람들에 대한 육체적인 처벌조차도 죽은 사람들을 되살릴 처벌이 되지 못하는 것이고, 설령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고작 범죄 그 자체에 가장 가깝게 있었거나, 그 최 측근에 그칠 뿐이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나 그 범죄를 실천에 옮기도록 한 사람들은 흔히 멀리 숨어있고, 권력과 종교에 의하여 보호받으며, 역사적인 힘에 의하여 투사된다 – 그들 모두는 징벌의 범주 밖에 있는 것이다. 게다가 범죄의 현장 뒤에 있던 이들은 그들의 유쾌한 삶의 방식을 지속하며, 무죄한 척하고, 법을 만들어 다른 이들이 복종하게 하고, 그 법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을 처벌하려 하는 것이다. 그들이 지닌 폭력과 포악의 순환고리에 적용되지 않는 법이란 그저 출생권과 같은 것뿐이다.

특히 그들의 권력이 포기되거나 공유되어짐 없이 힘있는 자가 용서를 받는 자리에서 용서가 경건이 될 때, 항상 일깨워지고 이해되는 방식에서의 용서란 여기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이러한 용서는 죄책의 양심에 의하여 제한되지 않는 방식으로 권력이 움직이는 것을 허용한다. 그러한 용서는 폭력과 포악의 순환이 지속되도록 그 길에 용기를 불어 넣는다; 그리함으로 동시에 이 고리에 상처 입기 쉬운 사람들을 더욱 상처 입을 사람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정의 없는 용서는 폭력과 포악의 순환을 조장하는 사람들을 독려하는 것이며, 그것은 분노를 씻어내는 것으로서, 그리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길로서 용서를 말하는 종교에서의 경우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분노는 이해할 만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며, 또한 포악의 결과를 치유할 수 있는 운동에 해를 끼치는 것이다. 비록 용서라는 것이 제국의 유능한 행위자로서 허락되어서는 안될 것이지만 - 정의에 대한 책임이 없는 용서 – 분노는 비판의 방법으로서 그리고 포악이 없는 세계를 향한 가능성의 확증으로 사용될 수 있는 데, 그 세계는 곧 제국으로부터 이탈하여 공동체를 지향하는 세계라 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포악의 결과에서 나오는 혁명적인 부분, 전혀 다르게 살아갈 책무, 폭력이 삶의 방식이 된 세계를 거절하는 것, 그리고 구체적인 삶을 통하여 어느 날 우리들의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을 규정하는 하나의 요소로서, 일종의 평화로운 여행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를 이룰 가능성을 수용하는 것이다.
혁명적인 용서란 폭력 세상을 만드는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는 제국과 싸우면서, 배제하기 보다는 포괄하는 개입과 투쟁적인 대안적 삶을 살아가며, 폭력과 포악의 순환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며, 주변에 머무르는 이들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에서, 우리가 주변부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렇게 생각하고 실천하는 공동체 안에서 제국에 대한 우리의 반대와 제안은 개방되는 것이다; 혁명적 용서가 정의와 고상함을 일상의 삶으로 제안하는 한 그것은 혁명적인 것이다. 이 일상의 것이란 모든 시대에서 그리고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종교적 제도 안에서 예외 없이 기려져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예외없음”을 이해하는 것은 그것이 모든 제도와 세계 이해를 존엄성과 인격에 구속된, 그리고 이 존엄성에 충격을 주는 한에서만 이데올로기와 종교 안에서 초월을 허용하는 감각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혁명적인 것이다. 그리고 더 나가서 용서는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상태를 초월하려 하지 않는 한도 안에서, 이념과 종교를 심판한다. 용서는 어떤 사상 체계나 제도일지라도 가장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 제도들이 모든 수준에서 모든 이들을 포용하는 데 뿌리를 내리는 동안 과연 세워지고 유지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분명히 인간의 존엄성에 이렇게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구호를 외치기 보다는 실천할 때 비로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종교 조직의 모든 특수성에 도전을 제기한다. 유대교, 기독교과 이슬람은 모든 특수한 것에 근거를 두고 있어서 일단 보편화되면 포용하고 배제하며, 정의와 불의 ㅡ 평등과 불평등에 대한 이유를 밝히고, 모든 것을 고정시키고, 그들이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하나님에 의하여 후원을 받는다. 혹은 우리를 알시고 이 땅에서 총애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책임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법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혁명적인 용서 개념을 내세우면서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은 과연, 요구되어지기도 하고 주어지기도 하는 우리들의 충성심을 풍요롭게 하는 것인가?

혁명적인 용서를 위한 연구는 새로운 디아스포라의 중심에 있을 것이다; 분명 이 용서야말로 우리가 상속받은 공동체로부터 유배를 당하는 원인이다. 혁명적인 용서는 우리가 머무는 곳이나 모든 곳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을 향하는 마음과 정신과 육신을 담은 심오한 운동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 자아의 가장 깊숙한 부분에로의 복귀이다. 여기서 타자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니다. 저 밖에 있는 타자와 이 안에 있는 타자는 새로운 형상을 향하여 움직여 나간다. 우리의 삶의 외부는 도전 받고; 또한 우리 삶의 내부 역시 도전을 받는 것이다.

안팎으로 움직이며 새로운 역동성이 일어나고 수용된다. 이러한 역동성은 지속적이고, 안과 밖으로 넘나들면서 우리 내부에 있는 권력과 외부에 존재하는 권력에 도전하며 언제나 움직이고 있다. 폭력에 대한 유약성은 남아있다; 아마도 혁명적 용서의 역동성이 정지되면 그 유약성은 더욱 약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약성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죽는 방식까지 선택하도록 움직이고 있다. 역사는 빠르게 지속된다. 우리의 지속적인 간섭은 우리의 통제를 그리고 우리가 경험한 것과는 다른 현재와 미래를 향한 육체와 정신과 마음의 자리를 초월하는 세력에 대한 우리의 해설이다. 혁명적인 용서는 역사를 멈추거나 그 과정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마치 불의한 권력에 의하여 유포된 조각들을 모아 맞추는 것처럼, 버림을 받은 이들에게, 힘있는 자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처럼 소리 높여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여기 또 다른 방식이 있다.

그러므로 치유란 유능하게 만드는 것이거나 혁명적인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용어다. 누군가에게 적대적으로 또 하나의 과정을 허용하는 제국 안에서의 치유란, 마치 그리스도인과 서구의 유대인처럼 서로를 향하여 화해를 하기로 동의한 후, 힘을 모아서, 타자에게 적대적으로 그 힘을 행사하는 것과 같다. 에큐메니즘과 종교간의 협력은 종종 이러한 제국과의 거래로서 역사적 적대성과 유혈학살을 관심에서 제외시킴으로써 또 하나의 새로운 십자군 전쟁을 벌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화해란 정의가 없는 용서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몇몇 사람들간에서만 이루어진 정의는 현재 속에서 갱신된 무죄성과 더불어 불의가 일어나게 한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화해는 이러한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종교적인 신뢰성과 권력관계를 묻어버리는 용서; 그때나 지금이나, 비판적인 대화자 없이 정치권력의 축복과 종교적 감수성을 버려두자는 합의; 현재의 기독교 희생자와 현재의 유대교 희생자를 협상하는 회의 자리에 버려두는 것이다.

누군가의 구원이 다른 이들의 고통을 불러올 때에는 구원이 될 수 없다. 누군가의 치유나 다른 편의 치유로 인해, 그 때 다른 이가 고통을 당한다면 과연 치유일 수 있겠는가? 타자의 고난을 불러오는 치유라는 것은 정의 없는 용서처럼 하나의 덮개고, 비록 언어는 달라질지라도 제국의 감수성을 전략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하나의 경건이 아닌가? .

제국인가 공동체인가라는 가장 탁월한 종교적인 질문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종교를 지속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 질문은 우리들의 삶 속에서 결정적인 것처럼 지속된다. 우리가 제도에게 바치는 충성이라는 의미는, 유대인 예수, 혹은 모하메드가 타자를 위한 길이 되어 우리 자신의 길을 인도하는 핵심적인 종교적 감수성과 인물들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도적인 관계로부터 분리 혹은 충성심은 다른 것들의 발단이 되고, 심지어 더욱 어려운 도전이기도 해서; “진정한” 유대적인, 기독교적인, 무슬렘의 길을 되찾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여정을 포기하기도 하는 것이다.

종교 안에서 본래성을 향한 탐구는 끝이 없고, 얽혀있으며, 필요하고 제한적이다. 확실히 끝도 없다. 만일 우리가 외부의 타자들을 위하는 동시에, 안에서는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려 한다면, 사회에서의 일상적인 삶과 개인적인 행로를 자유롭게 놓아두면서, 일치보다는 다양성을 표어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 다양성이란 여기서 다양한 것을 하나로 묵는 것이나, 다양성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일치를 예찬하는 방식으로서 여겨질 수 없는 것이다. 다양성과 일치라는 두 가지 이해는 혁명적인 용서를 향한 여정의 첫걸음이다; 그것들은 전반적인 것에 걸쳐 해명하는 신학적 구조 없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다양성과 일치에 대한 인식을 일러주는 지표들일 뿐이다.

우리가 힘겹게 걸어온 종교적인 경로는 우리의 출처, 그리고 정돈되지 않는 세계를 정리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고; 타자들도 이런 경로들, 해체와 교차의 단면들에 나타나 자신의 입장을 말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하거나 공표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경로들과 다른 길들 역시 우리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의 경로에서 우리측이나 타방의 측면에서 찾아질 수 밖에 없는 경로들은 사실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길의 바깥과 안에서, 그리고 앞을 향하여 방황하면서 찾는다. 이는 우리의 길은 단일하거나 좁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우리의 모든 길들은 절충적인 것이고, 모아진 이미지들이며, 의식적이며 무의식적인 잡다한 것들이 모인 것이고, 간혹 우리 안이나 밖에서 권위자들에 의하여 통제를 받기도 하지만, 여전히 자유롭고, 자유롭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루어 내는 치유의 일부가, 우리 삶, 그리고 이런 자유 없이는 이루기 어려운 용서를 지향한 운동에 스며드는 폭력에 대한 분노를 포함하여, 모든 수준에서 자유로운 연합을 지향하는 운동일 수 있을까? 자유로운 연합, 이미지와 에너지의 노출은 그 자체로 시금석이며,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치는 질서다. 이것이야 말로 공동체의 길, 특히 모든 문화와 종교에서 만들어지는 유배들을 위하여, 우리 존재 가장 깊은 곳에 지니고 있는 이러한 파편들, 우리의 유산의 파편들을, 다시 한 번 안과 밖에서 방황하도록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부서진 것을 온전케 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온전한 것을 깨진 것으로 만드는 것은 환상이다. 그러나 모든 이들을 위한 정의를 추구하기 위하여 깨어진 것을 사용하면서 깨어 진 것과 더불어 움직인다는 것은 화해와 용서의 근거가 된다.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는 최소한 화해와 용서의 가능성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 삶에 파고들어 새로운 결정체를 만드는 폭력과 포악을 행한다는 것은, “여기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억과 행위로 구성된 바, 색 다른 도표 속에 존재하고 있는, 또 하나의 리듬을 찾으라는 폭력에 대한 기억을 허용하는 것이다.

폭력의 기억, 실로 고통의 기억은 정의의 운동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폭력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폭력의 반복성에 반대하는 경고로서, 그리고 누구도 폭력을 겪어서는 안 된다는 책무로서 항상 어디에든지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형상 속에서 연이어 다가오는 폭력과 포악의 순환고리는,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폭력에서, 가해자를 배제시키는 정의에 대한 책임 속에서, 가해자에 의하여 해가 입혀지는 그 악순환을 배제하는 기억이 된다. 그러므로 압제자와 억압자라는 전자의 관계는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면서, 양측을 보호하기 위하여, 양자가 불의에 대한 기억을 이용하면서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희망이란,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혁명적 용서가 지닌 역동적인 것이다: 폭력에 의한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는 정황, 그러나 폭력을 이용하며 자신과 타자들을 위하여 폭력을 넘어서는 자리로 나아가는 정황을 마련하는 것이다. 포악자는 그리하여 제국에서 나와 공동체로 회심할 여지를 가진다; 제국에서 공동체로의 회귀함으로써 폭력과 포악의 순환은 그 안에서 도전을 받게 된다. 이런 도전이 전지구적 의미에서 폭력의 순환을 종식시키기에 충분한지 아닌지의 문제는, 이에 관여된 개인이나 공동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질문이다. 여기서 일어나는 것은 그러한 종국의 가능성에 대한 증언이고, 그 종국은 여기서 지금 경험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과연 이러한 증언보다 더 중요한 그 무엇을 후세에게 남겨줄 수 있겠는가?

종교는 이러한 치유에 도움이 될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 화법으로 말해 이런 치유에 반대하게 될 것인가? 더 넓은 신앙과 투쟁의 전통이 과연 혁명적 용서를 위한 투쟁을 향해 그 자신을 개방할 수 있겠는가? 폭력과 포악의 순환고리로부터 나오는 종교적 전통의 실패 때문에, 그리고 그들 자신이 이런 폭력의 순환을 불러오기 때문에, 더 넓은 신앙과 투쟁의 전통은 다양한 방법으로 존재해 왔다. 세계화의 세계 속에서 그리고 그 세계화를 돕는 종교와 더불어 더 넓은 믿음과 투쟁의 전통이 세계화의 충격을 둔화시키고 전복시키는 과제에 과연 이르고 있는가? 유배와 새로운 디아스포라는 폭력과 포악의 순환고리의 산물이다. 그것들이 과연 이러한 세계화를 되돌릴 수 있겠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증언이란 고작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 하나의 희망 없는 희망, 하나의 공백일 뿐인가?

우리는 미래를 향한 질문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뒤돌아 보며 심판할 우리를 위한 질문들도 있다. 우리의 과제는 개인적이며 집합적인 삶을 위한 토대로서 공동체가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러한 토대와 같은 공동체가 없다면, 적어도 이 세계의 미래 제국에 도전하고, 지속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동체의 생존요소들을 위한 구조물을 마련하는 것이다. 혁명적 용서는 인간의 존엄성의 가치에 힘을 불어넣고 권력을 가로막는 치유를 향하여 퇴로와 진로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