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May 27, 2013

교회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영성적인 측면에서 말한다면 나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과 사상을 닮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고, 윤리적으로 말한다면 사랑과 평화를 나누며 생명을 사랑하는 길이다. 더욱 세밀하게 말하자면 모든 힘의 관계에서 지배적 의지보다는 섬김의 의지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경제적으로는 자기중심적인 탐욕에서 멀어져 다른 이들을 배려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욕망충족의 길이 아니라 그런 욕망을 해체하면서 자기를 낮추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겸비를 살아가는 것일 것이다.
 
최근 읽은 한스 큉의 책에서 나는 큉의 시선을 통해 교회를 보는 방법을 배웠다. 그의 책 제목이 이상하다. 책 제목이 이상하게도 “Ist die Kirche noch zu retten?" ”교회가 아직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2년 전 큰 아들과 함께 스위스 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츄리히 공항서점에서 사들고 온 책이다. 유럽의 책방에서는 신학자들의 신간이 진열되어 있는 경우를 종종 본다. 부러운 일이다. 신학자들의 책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한국 크리스챤들을 생각하면 쓸쓸하기까지 하다. 왜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책을 읽지 않는 것일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한스 큉은 이 책에서 기독교가 만성적인 질환에 걸려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가 걸린 고질병에 대하여 신자들은 일곱 가지 형태의 반응을 한다고 한다. 우선 그 중에서 일반적인 현상으로 네 가지 형태의 반응을 살펴보자. 첫째, 병에 걸린 교회를 떠나는 길이다. 유럽에서 정말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났고 떠나고 있다. 둘째, 새로운 분열을 도모하여 보다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길이 있다. 셋째, 그저 내면적인 영성에 집중하면서 침묵하는 길이다. 넷째, 외면적으로는 잘 적응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형태다.
 
큉은 여기에 더하여 세 가지를 더 말하고 있는 데, 첫째 교회가 고질병에 걸렸든 말든 그저 열심히 교회를 섬기는 태도다. 동시에 교회의 고질병을 그대로 존속시키는 부류다. 주로 교회에서 보람찬 활동을 하는 이들이다. 둘째, 그릇된 교회의 행태, 특히 권위주의적인 성직자들의 그릇된 가르침과 행태에 저항하고 비판하는 자세다. 일종의 종교개혁주의적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셋째, 교회가 보이고 있는 고질병을 학문적으로 연구 규명하여 발표함으로써 교회의 지도자나 교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경우다. 큉은 이 길이 신학자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신학은 교회를 지키는 파숫꾼과 같은 역할을 한다. 신학이 죽으면 교회의 질병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신학을 혐오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우선 두 부류를 먼저 생각해 보자. 첫째, 교회의 고질병으로 혜택을 입는 이들이다. 겉으로는 겸손을 가장한 오만한 성직자들이 이런 부류다. 그들은 현존하는 불의한 질서를 옹호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치는 이들이다. 그들의 이면에는 권력과 탐욕과 욕망이 숨겨져 있다. 둘째, 자유의 의미를 모르는 무수한 신자들이다. 스스로 사고하거나 책임적이지 못하여 늘 다른 이의 지도와 후견을 받아야 하는 미성숙한 이들이다. 수십 년 신앙생활을 했어도 여전히 초보적이다. 이들은 신학의 다중성과 다양성을 도무지 이해할 능력이 없다. 그러니 스스로 독서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염려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기의 사고와 신앙을 근거 없이 절대화하는 이들이다. 이들의 사고는 매우 유아기적이다. 그러나 매우 폭력적이다. 그래서 맹목적이다. 간혹 신학대학원 1학년 교실에서 일어나는 풍경에는 영락없이 단세포적인 사고에 익숙한 이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신학의 다양성에 의해 심각한 실존적 위기를 느끼며 저항한다. 이들은 동일성의 원리가 곧 신앙의 원리라고 생각한다. 자기 생각과 같은 것이면 안심하고, 다른 것이면 불안해한다. 합리성도 없고, 과학이성도 안중에 없다. 그래서 무지하기까지 하다. 아무리 가르쳐도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래야 안심이 되는 까닭이다. 이런 이들은 약자들을 향해서 동일성의 폭력을 행사한다. 같은 신앙을 고백하지 않으면 위기를 느끼고 갑자기 십자군적 전사로 돌변해 공격적이 된다. 야만적 행위도 불사한다.
 
한스 큉은 이런 현실을 독일에서 경험하고 있고 나는 한국에서 경험하고 있다. 그래도 나는 그가 부럽다. 아니 공항 서점에서도 그의 책이 팔리고 있는 그가 사는 세계의 문화적 역량이 부럽다. 그는 이렇게 교회의 고질병을 진단한다. 병명을 나름대로 풀어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제국주의적인 권력과 진리의 독점 주장, 2. 율법주의와 성직자주의, 3. 성과 여성에 대한 혐오주의, 4. 폭력성과 십자군 정신, 5. 은밀하게 감추어진 권력욕, 6. 진실 회피증, 7. 개혁 증오증. 내가 보기에 큉이 분석한 교회의 질병은 다름 아닌 교회의 거룩함을 무너뜨리는 요인들이다. 큉은 거룩함을 상실한 교회를 향하여 세상을 구원하기에 앞서 교회가 아직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염려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어느 부류에 속하는 이들일까?

Friday, May 10, 2013

새 책 <기독교 평화윤리학>의 결론


<기독교 평화윤리> 최종 원고를 홍성사에 넘긴지 2주가 되었습니다. 2500매 분량을 1600매 가량으로 줄였지만 아직은 말하고 싶었던 내용을 담고 있는 책으로서 충분하다고 생각 됩니다. 이 책의 결론부를 아래와 같이 매듭지었습니다.  가을 학기가 오기 전 예쁜 책의 모습으로 나오게 될 것이라 희망합니다.
 
인간의 삶과 평화는 아무리 분리시키려 해도 분리할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기독교 2000년 역사 속에서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갔던 그리스도인들도 나름대로 기독교적인 평화를 구상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역사를 연구하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첫째, 기독교가 지난 2000년 동안 추구해온 평화는 각 시대마다 폭력을 극소화 해왔다는 점에서 인류의 역사에 크게 공헌했다. 초기 교부들의 내적인 평화가 외적인 억압과 핍박 속에서 선택한 길이었다면 어거스틴 이후의 제국화된 기독교 안에서의 기독교 평화론은 로마 제국의 폭력성을 기독교적 사랑의 관점에서 국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리고 16세기 이후 소종파 신앙 운동 속에서 재현된 예수의 평화주의 사상은 기독교 역사의 가장 소중한 유산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둘째, 기독교 평화사상의 역사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지점은 기독교가 핍박받던 종교에서 권력종교로 변신하면서 하나님의 평화를 교회의 평화 혹은 국가의 평화로 잘못 해석한 지점이다. 이러한 오류의 길은 암브로우스와 어거스틴부터 시작되었다. 로마 제국을 선교적으로 끌어안으면서 그들은 로마 제국의 폭력성까지 끌어 안았다. 그들은 선교를 위하여 로마 제국의 폭력성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들은 하나님의 평화보다는 지상의 불완전한 평화를 선택하면서 정당한 평화가 아니라 정당한 전쟁 이론을 제시했던 이들이었다.
 
셋째, 어거스틴 이후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로만 가톨릭교회의 정치이론은 철저하게 강자의 이론을 대변했다. 정당전쟁론의 일곱 가지 요건은 강자가 아니면 정당한 전쟁을 도모할 수 없다는 이론이었다. 이는 사실상 기독교 세계의 영적이며 군사적인 우월성을 전제한 것이었다. 이 전통은 역사 속에서 기독교를 평화의 종교가 아닌 지배적이며 폭력적인 종교로 만들어 왔다. 종교개혁자들의 사상 속에서도 이런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그 결과 종교와 정치의 거룩하지 못한 연대가 기독교를 포악한 종교로 변모시켰던 것이다.
 
넷째, 하나님의 평화라는 지평을 상실하고 교회의 평화, 혹은 기독교 세계의 평화를 옹호해 온 기독교 전통은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이교도 징벌 등 종교재판의 역사를 점철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극심하게 짓밟았다. 이러한 기독교의 오만은 계몽주의 이후 근대화된 세계에서 형성된 인권사상과 민주사상에 의하여 부정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18세기 혁명의 시대를 지나면서 기독교가 행사하던 종교 재판권은 몰수되었다.
 
다섯째,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전개된 재세례파 신앙운동은 초기의 종말론적 기대에서 발생한 폭력성을 비판적으로 극복한 이후 메노나이트 등 소종파 평화주의 운동으로 그 명맥을 이어왔고, 18세기 영국 국교의 교권적 형식주의에 반하여 형성된 퀘이커 신앙운동은 반교권적 반권력적 기독교 평화운동으로 자리를 지켜왔다. 이들의 기독교 평화주의에 대한 증언과 실천의 중요성은 오늘의 핵무기 시대에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여섯째, 기독교 정당전쟁 이론은 세계 1, 2차 대전의 비참함을 경험한 후에도 이념적 편당성을 지원하며 각 진영의 군비경쟁의 이론적 논거를 제공해 왔다. 그 결과 지구를 수차례 초토화시키고도 남을 핵무기를 비축한 양대 진영은 지구라는 행성에 거주하는 모든 생명을 담보로 삼아 핵폭탄으로 서로를 위협하는 정황을 초래했다. 이런 위기 인식에서 독일교회는 핵평화주의를 선택했고, 미국 가톨릭 교회 역시 핵평화주의를 받아들였으며, 세계교회협의회도 정당전쟁론의 유효성을 폐기하고 정의로운 평화이론을 기독교 평화운동의 새로운 방향으로 제시함으로서 기독교 평화운동의 대전환을 이루었다.
 
일곱째, 2011년 킹스톤 평화문서에서 세계 교회협의회는 인류와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군비경쟁과 핵전쟁의 위협 앞에서 기독교가 하나님의 평화가 아니라 민족적, 국가적, 이념적 가치에 편승하며 군사 및 폭력적 수단에 동의해 온 지난 역사에 대하여 반성과 회개를 촉구했다. 오늘의 기독교가 자기 안에 있는 폭력성을 근절하고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사람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화를 위한 소명 앞에 새롭게 서야만 한다는 당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연구를 통하여 나는 오늘의 기독교 평화 운동은 단순한 정치적 평화가 아니라 개인과 사회, 집단과 국가, 그리고 동류 인간과 자연에 대한 모든 폭력을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제거함으로써 일구어 내는 평화운동으로 재규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를 위하여 세계교회협의회는 평화의 신학을 제창하고 정의로운 평화운동을 제안했다. 따라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사람의 평화나 국가의 평화, 혹은 이념적 평화를 위한 봉사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원을 넘어서서 개인, 교회, 사회, 국가 안에 기생하는 모든 폭력성을 제거함으로써 보다 정의로운 하나님의 평화의 사역자로 나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이런 결론은 핵무기 시대를 직면하여 소종파 교회들만이 아니라 주류 교회들조차도 교회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핵전쟁으로 인한 공멸과 자멸을 초래할 수 있는 정당전쟁론이 아니라 비폭력 평화주의의 길 뿐이라는 현실 인식에 합의한 것을 의미한다. 2000년의 긴 방황 끝에 주류 교회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의 가르침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이들이 복이 있다.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 울 것이다 (5: 8).“ 

목 차
 
-머리말
I. 그리스의 평화(είρήνη)이해: 에이레네
II. 로마의 평화: Pax Romana
III. 구약성서의 평화: 샬롬
IV. 예수의 평화사상
V. 초기 교부들의 평화사상
VI. 제국화된 기독교의 평화
VII. 기독교세계의 평화론 (pax christi)
VIII. 종교개혁자들의 평화
IX. 재세례파 신앙운동과 평화
X. 퀘이커 신앙운동과 평화주의
XI. 독일개신교의 평화운동
XII. 미국교회의 평화운동
XIII.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평화운동
- 맺는 말
- 참고도서목록
  
 

종말론자들의 허황된 주장...

내가 청소년 시절 나가던 교회는 새벽 기도를 매우 강조했다. 종말론 계시록을 강의하는 목사님께서 새벽마다 종말의 때를 알려주는 참 구원의 복음을 증거한다며 계시록을 강론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는 네 천사로 상징되는 4대국의 정치적 지형도를 일러주며 전개하시는 목사님의 해박한 세계정세 분석에 탄복하기도 하고 그 세력들과 사탄의 배후를 연계지어 계시록을 강해할 때 나는 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정말 머잖아 지구의 종말이 올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이십여년이 지난 후 그 교단의 우두머리가 죽으니 신자들이 모여 냄새나는 그 시체가 곧 부활할 것이라며 장사도 지내지 않고 찬송을 부르며 기도회를 이어가다가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다.

오늘 아침 한 학생이 내게 문자를 보내와 꼭 살펴 봐달라는 메세지를 보내왔다. 화일을 열어 보니 미국의 어느 한인 교회 목사가 다미선교회에서 주장하는 사이비 주장, 즉 짐승의 표를 받으면 안된다는 억지 논리를 확신있게 설교하는 내용이었다. 카나다에서 시작되고 있는 복지 프로그램의 하나로 개인의 건강관리 시스템 화일을 담은 칩을 사람의 인체에 이식하여 모든 의료보험 제도를 일원화하고 의료 및 사법 기관 사이에 정보를 공유하자는 시책에 대하여 기독교 종말론자들은 이것이야말로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받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다. 참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미신적이다.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은 목사라면 이런 주장을 할리 없다. 불행하게도 이런 설에 목사가 현혹되어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강단에서 외치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한동안 사이비 교파에서 구원받은 자의 몸에 예수의 보혈의 공로가 담겨 있으니 절대 비신자나 불신자의 피를 받아서는 안된다 하여 수혈이 필요한 병든 자식의 생명을 잃게 방치하는 어리석은 일도 있었다. 아마도그 부모의 행위와 논리는 차라리 육체가 멸한다 할지라도 영원한 구원을 받았으니 염려할 것이 없다는 영적인 계산에 따른 판단에서 나온 것이었을 것이다. 신앙과 맹신을 구별하지 못하는 부모를 둔 아이의 불행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맹신을 기독교적인 신앙의 증거라고 가르치는 목사의 어리석음에 빠진 것이 그 부모의 죄이리라.

이런 주장들은 여러 차례 있었다. 모든 국민을 주민등록화 할 때도 이런 주장이 있었다. 심지어 신용카드에 전자 코드가 들어 있으니 그것을 사용하면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이니 그런 것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주장을 하던 목사들도 있었다. 컴푸터를 사용하기 시작한 후 컴푸터 언어를 가지고 개체의 정체성을 구별해 내는 방법이 매우 쉬워졌고, 이런 기술이 물건마다 코드화되어 시장 경제와 우리 생활에 편리를 제공하는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것이 코드이든, 숫자이든, 아니면 우리 눈에 들어오는 시각적 효과이든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개체적 단위로서 구별되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구별하는 것을 거부하면 혼란과 혼돈을 참아내야 한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은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증언하고 있다.

최저의 비용으로 최고의 효율성을 재고하면서 의료보험, 이민국, 세무서, 범죄사실 등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전자칩을 개발하여 개인에게 부착시키는 일은 아마도 정부차원이나 관리자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편리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책에는 위험한 요소도 있다. 개인의 사사로운 정보를 어느 집단이나 개인이 오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편리하고 유용한 점이 더 많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느 병원에 촌각을 다투는 응급환자가 들어왔는 데 이 환자의 상태를 전혀 모르고 있는 의사의 입장에서 환자의 상태를 보여주는 의료정보를 파악하기 위하여 귀중한 시간을 보내며 검사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다가 환자의 생명을 얼마든지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개인정보가 오용될 경우 개인에 대한 공격행위나 사생활의 비밀을 노출시켜 개인의 신상에 해를 끼쳐 사회생활을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정보화 프로그램을 일러 계시록에 나오는 사탄을 암시하는 666이라든지 사탄의 코드라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괴변이다. 정보 노출의 위험보다 더 위험한 것은 일부 어리석은 목사들이 종말론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런 작업을 사탄이 배후에서 조장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종말의 징조라고 주장하는 데 있다. 이들의 논거가 위험한 것은 개인의 삶을 위태롭게 하면서도 그것을 기독교 신앙의 비밀인양 선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정부나 국가가 하는 일조차 사탄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으니 모든 것에 대하여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하고, 현대 정치 사회 문화 심지어 종교 배후에 움크리고 있는 사탄을 상상케하여 영적인 혼돈을 느끼게 함으로써 세상을 불신하고 교회를 일종의 은신처로 여겨 도피성으로 삼게 한다는 것이다. 종교인으로서는 매우 유치하고 교활한 전략이다.

이미 우리 몸에는 창조주께서 사용하신 코드들이 있다. 염색체 안에 있는 염기서열은 코드화되어 있으며, 어느 누구도 똑같은 염기서열을 가지고 있지 않다. 모든 생명이 서로 다르게 지어진 것이다. 설사 우리의 몸이 부패되어 눈으로 식별할 수 없을 때에도 유전자만 있으면 수백년이 된 미이라라 할지라도 그가 어떤 존재인지 판별해 내도록 암호화되어 있다. 초보의 과학적 사고를 동원하여 현대 사회의 의료정보 시스템을 마치 새로운 사탄의 술수인양 주장하는 종교인들의 상상력에 우리는 기만당하지 말아야 한다. 근본주의 신앙에 젖은 이들일수록 이러한 사이비 논리에 쉽게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맞지 않는 모든 것 배후에는 사탄의 역사가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신학적 판별능력이 없는 신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좋은 목회자를 만나는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목사의 주장을 논박할 수 없는 신자의 입장에서 목사가 확신을 가지고 주장하는 내용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확한 한 가지 사실은 이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부정할 수 없는 근거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격적인 것이며 우리의 전인격적인 응답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과학의 시대에 초등학문정도의 과학적 지식을 이용하며 마치 심오한 비밀을 풀어내는 지혜있는 자처럼 주장하는 이들을 멀리해야 한다. 심지어 창조과학회라는 무리들이 나서서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비밀을 모두 해명하겠다는 듯이 주장하며 그것이 바른 신앙이라고 우기는 행위 역시 우리를 비이성으로 인도하고 맹신에 빠지는 어리석은 자로 만들어가는 헛된 교설이라는 것도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사이비 종파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성서를 근본주의적으로 해석하면서 마치 그들의 주장이 성서적인 것인양 선전한다. 그리고 상대의 논거들이 비성서적인 것이며 불신앙 적인 것이라고 호도하는 데 약삭 빠르다. 그러나 우주를 보고, 과학의 세계를 보라. 우리는 그것들을 해석할 권한을 주장하기 보다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이 옳다. 죽음과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는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는 세계와는 달리 생명이 존재하다가 사라져버린 세계가 더 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주의 잔인한 법칙을 생각하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이성적 이해능력의 한계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조그만 지혜들은 창조주의 세계의 핵심을 파악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다. 부디 신학적으로 무지하여 오만한 목사들의 경박한 논리에 빠지지 말고 보다 겸허하게 주어진 자기 삶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하자.

Wednesday, May 8, 2013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내가 사는 곳 가까이 심학산이 있다. 진달래가 한창이더니 철쭉들도 이젠 제철을 잃어간다. 그러나 모든 나무들이 이제는 앞다투어 새싹을 티워 연초록 봄이 한창이다. 연초록 새싹들을 키워내는 저 나무들은 누구를 위하여 저리도 열심히 사는 것일까? 살아있는 나무인 것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온 산이 새싹으로 꿈틀거린다.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신비하고 아름답다. 생명이란 참 신비한 것이다. 그러니 귀하다. 숲이 하루 하루마다 짙어지고 있다. 매일 아침마다 숲이 궁금해진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한 벗이 세상을 떠났다. 벗의 죽음은 나에게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있는 존재임을 상기시켜 준다.

생명을 독자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이 힘이다. 그러니 힘이 치솟는 봄이다. 생명의 독자성을 훼손하는 것이 폭력이다.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모든 것이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 사람도 생명이니.. 생명을 존중한다는 것은 독자적 판단과 사고, 삶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 처럼 폭력이란 생명의 힘을 빼앗는 것이어서 죄스러운 것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생명력을 빼앗긴 것들은 힘이 없다. 그래서 의존적인 존재가 된다. 모든 폭력 이면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죽음을 영원한 폭력이라고 불렀던 시몬느 보바르. 그렇다 생명의 힘을 모두 빼앗아가는 죽음이야말로 무서운 폭력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을 것이다. 폭력을 이기는 길은 살아있는 동안 생명을 지키고, 생명들을 지켜주는 일이다. 비록 죽을 지라도 생명의 힘을 잃지 않는 길이 예수가 일러준 "나는 길이요 생명"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힘들이 모여서 생명을 복돋우는 힘으로 작용하게 하는 것이 사랑과 정의라면, 그 모여진 힘을 가지고 편파적으로 다른 이의 생명력을 빼앗거나 훼손하는 것이 구조적 폭력이나 억압일 것이다.

진화론적 신학을 쓴 존 호트는 생명세계의 비극을 이겨낼 수 없는 긍정의 힘에 기댄 신학의 어리석음을 지적했다. 알수없는 신비로 가득찬 우주 세계에서 마치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섭리하고 계시다는 가설적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비극 앞에서 무력해 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도덕 기재로서의 하나님도 심판자로서의 하나님 표상도 선악에 기반한 가치판단도 그저 인간의 사유의 산물일 뿐이다. 비극앞에서 무릎을 끓는 불가지적 복종은 인간이 비극을 수용하는 방편이기도 하지만, 호트는 자연현상 속에서 일어나는 종의 몰살을 보면서 무력하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멈추어 선다.

과학의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승리와 섭리의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세계의 고통에 눈물흘리시는 무력하신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만이 마치 죽어가는 아이를 품에 안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 아이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부비며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사랑과 같은 사랑으로 우리 곁을 끝까지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너머의 것들은 신앙인의 가슴으로 희망하는 것이다. 승리의 그리스도, 하나님의 전사, 혹은 영원과 빗대어 표상하는 우리의 모든 언어들은 브르디에의 말을 빌리자면 어쩌면 신앙인의 장에서 형성된 아비투스에 지나지 않는다.

언젠가엔 하나님의 은총안에서 나의 죽음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 인간은 참으로 무력하다. 삶의 문화적 구조 속에 갇혀서 관계를 맺고 사랑하며 다투다가 마침내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것같지만 결국 사랑하는 이, 아이들, 그리고 자신의 젊음, 건강, 자신을 보살필 힘... 모든 것을 떠나보내고 마침내 자기 자신을 향하여 "안녕"이라고 말해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런 과정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런 무력한 순간에 우리 곁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은 승리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가을이 오고 차가운 겨울이 오면 모든 잎들과 작별을 해야 하는 나무들은 매년 생명과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리라. 계절이 바뀌는 시제에 따라 부지런히 생명력을 드러내는 저 숲의 모든 생명들처럼 우리도 살아있는 이 아름다운 계절에 남을 해하지 않고, 저마다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옳다. 삶의 계절을 따라 생명을 예찬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행복해 하며, 축제를 즐기면서, 사랑하며 사는 것이 생명으로서 살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그러니 사는 것이 짐이 되지 않도록 나이가 들수록 조금씩 욕심을 털어내며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