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May 10, 2013

종말론자들의 허황된 주장...

내가 청소년 시절 나가던 교회는 새벽 기도를 매우 강조했다. 종말론 계시록을 강의하는 목사님께서 새벽마다 종말의 때를 알려주는 참 구원의 복음을 증거한다며 계시록을 강론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는 네 천사로 상징되는 4대국의 정치적 지형도를 일러주며 전개하시는 목사님의 해박한 세계정세 분석에 탄복하기도 하고 그 세력들과 사탄의 배후를 연계지어 계시록을 강해할 때 나는 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정말 머잖아 지구의 종말이 올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이십여년이 지난 후 그 교단의 우두머리가 죽으니 신자들이 모여 냄새나는 그 시체가 곧 부활할 것이라며 장사도 지내지 않고 찬송을 부르며 기도회를 이어가다가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다.

오늘 아침 한 학생이 내게 문자를 보내와 꼭 살펴 봐달라는 메세지를 보내왔다. 화일을 열어 보니 미국의 어느 한인 교회 목사가 다미선교회에서 주장하는 사이비 주장, 즉 짐승의 표를 받으면 안된다는 억지 논리를 확신있게 설교하는 내용이었다. 카나다에서 시작되고 있는 복지 프로그램의 하나로 개인의 건강관리 시스템 화일을 담은 칩을 사람의 인체에 이식하여 모든 의료보험 제도를 일원화하고 의료 및 사법 기관 사이에 정보를 공유하자는 시책에 대하여 기독교 종말론자들은 이것이야말로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받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다. 참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미신적이다.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은 목사라면 이런 주장을 할리 없다. 불행하게도 이런 설에 목사가 현혹되어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강단에서 외치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한동안 사이비 교파에서 구원받은 자의 몸에 예수의 보혈의 공로가 담겨 있으니 절대 비신자나 불신자의 피를 받아서는 안된다 하여 수혈이 필요한 병든 자식의 생명을 잃게 방치하는 어리석은 일도 있었다. 아마도그 부모의 행위와 논리는 차라리 육체가 멸한다 할지라도 영원한 구원을 받았으니 염려할 것이 없다는 영적인 계산에 따른 판단에서 나온 것이었을 것이다. 신앙과 맹신을 구별하지 못하는 부모를 둔 아이의 불행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맹신을 기독교적인 신앙의 증거라고 가르치는 목사의 어리석음에 빠진 것이 그 부모의 죄이리라.

이런 주장들은 여러 차례 있었다. 모든 국민을 주민등록화 할 때도 이런 주장이 있었다. 심지어 신용카드에 전자 코드가 들어 있으니 그것을 사용하면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이니 그런 것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주장을 하던 목사들도 있었다. 컴푸터를 사용하기 시작한 후 컴푸터 언어를 가지고 개체의 정체성을 구별해 내는 방법이 매우 쉬워졌고, 이런 기술이 물건마다 코드화되어 시장 경제와 우리 생활에 편리를 제공하는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것이 코드이든, 숫자이든, 아니면 우리 눈에 들어오는 시각적 효과이든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개체적 단위로서 구별되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구별하는 것을 거부하면 혼란과 혼돈을 참아내야 한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은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증언하고 있다.

최저의 비용으로 최고의 효율성을 재고하면서 의료보험, 이민국, 세무서, 범죄사실 등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전자칩을 개발하여 개인에게 부착시키는 일은 아마도 정부차원이나 관리자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편리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책에는 위험한 요소도 있다. 개인의 사사로운 정보를 어느 집단이나 개인이 오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편리하고 유용한 점이 더 많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느 병원에 촌각을 다투는 응급환자가 들어왔는 데 이 환자의 상태를 전혀 모르고 있는 의사의 입장에서 환자의 상태를 보여주는 의료정보를 파악하기 위하여 귀중한 시간을 보내며 검사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다가 환자의 생명을 얼마든지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개인정보가 오용될 경우 개인에 대한 공격행위나 사생활의 비밀을 노출시켜 개인의 신상에 해를 끼쳐 사회생활을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정보화 프로그램을 일러 계시록에 나오는 사탄을 암시하는 666이라든지 사탄의 코드라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괴변이다. 정보 노출의 위험보다 더 위험한 것은 일부 어리석은 목사들이 종말론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런 작업을 사탄이 배후에서 조장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종말의 징조라고 주장하는 데 있다. 이들의 논거가 위험한 것은 개인의 삶을 위태롭게 하면서도 그것을 기독교 신앙의 비밀인양 선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정부나 국가가 하는 일조차 사탄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으니 모든 것에 대하여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하고, 현대 정치 사회 문화 심지어 종교 배후에 움크리고 있는 사탄을 상상케하여 영적인 혼돈을 느끼게 함으로써 세상을 불신하고 교회를 일종의 은신처로 여겨 도피성으로 삼게 한다는 것이다. 종교인으로서는 매우 유치하고 교활한 전략이다.

이미 우리 몸에는 창조주께서 사용하신 코드들이 있다. 염색체 안에 있는 염기서열은 코드화되어 있으며, 어느 누구도 똑같은 염기서열을 가지고 있지 않다. 모든 생명이 서로 다르게 지어진 것이다. 설사 우리의 몸이 부패되어 눈으로 식별할 수 없을 때에도 유전자만 있으면 수백년이 된 미이라라 할지라도 그가 어떤 존재인지 판별해 내도록 암호화되어 있다. 초보의 과학적 사고를 동원하여 현대 사회의 의료정보 시스템을 마치 새로운 사탄의 술수인양 주장하는 종교인들의 상상력에 우리는 기만당하지 말아야 한다. 근본주의 신앙에 젖은 이들일수록 이러한 사이비 논리에 쉽게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맞지 않는 모든 것 배후에는 사탄의 역사가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신학적 판별능력이 없는 신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좋은 목회자를 만나는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목사의 주장을 논박할 수 없는 신자의 입장에서 목사가 확신을 가지고 주장하는 내용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확한 한 가지 사실은 이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부정할 수 없는 근거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격적인 것이며 우리의 전인격적인 응답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과학의 시대에 초등학문정도의 과학적 지식을 이용하며 마치 심오한 비밀을 풀어내는 지혜있는 자처럼 주장하는 이들을 멀리해야 한다. 심지어 창조과학회라는 무리들이 나서서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비밀을 모두 해명하겠다는 듯이 주장하며 그것이 바른 신앙이라고 우기는 행위 역시 우리를 비이성으로 인도하고 맹신에 빠지는 어리석은 자로 만들어가는 헛된 교설이라는 것도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사이비 종파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성서를 근본주의적으로 해석하면서 마치 그들의 주장이 성서적인 것인양 선전한다. 그리고 상대의 논거들이 비성서적인 것이며 불신앙 적인 것이라고 호도하는 데 약삭 빠르다. 그러나 우주를 보고, 과학의 세계를 보라. 우리는 그것들을 해석할 권한을 주장하기 보다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이 옳다. 죽음과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는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는 세계와는 달리 생명이 존재하다가 사라져버린 세계가 더 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주의 잔인한 법칙을 생각하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이성적 이해능력의 한계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조그만 지혜들은 창조주의 세계의 핵심을 파악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다. 부디 신학적으로 무지하여 오만한 목사들의 경박한 논리에 빠지지 말고 보다 겸허하게 주어진 자기 삶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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