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의 악
“선한 상상력이 결핍되어 편견에 찌든 차별주의자는 있어도, 선한 차별주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1.
차별은 왜 일어나는 것인가? 차별은 인간의 지적 오류인 편견의 결과다. 편견을 연구 주제로 삼은 고든 알포트(Gordon W. Allport)는 그의 명저 <The Nature of Prejudice>에서 편견은 두 가지 속성을 가진다고 했다. 편견은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하여 고정된 태도를 가지게 만드는 동시에 확신(Einstellung und Ueberzeugung)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편견은 간혹 칭찬과 격려와 연대, 그리고 높은 인간애와 사랑을 촉발하기도 하지만 보다 많은 경우, 정 반대로 중상 비방, 접촉 회피, 차별 감정, 신체적 폭력, 심지어 특정인을 향하여 그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고 존재 자체를 아예 제거해 버리려는 악의를 조장하기도 한다. 독일 제 3 공화국에서 나치 정권이 동성애자들을 박멸하려 했던 T4 프로그램이 하나의 사례이고, 이런 악습은 오늘날에도 경건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 신앙의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모든 형태의 차별은 교묘한 지성의 오류를 통해서 형성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베르너 베르그만(Werner Bergmann)의 정의에 따르면 편견은 우리의 일상에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판단을 하게 만들고, 특정 대상을 향하여 일종의 개인적 태도를 정당화하게 만든다. 이 정당화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지적 오류는 “차이”를 “다른 것”이라 여기지 못하고, 그 “차이”를 쉽게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자기중심의 습성, 관습, 의식, 논리, 사고, 감정, 법제도 등을 통해 사회적으로 유통하는 것이다. 열등한 것은 이 유통 과정에서 이내 도덕적으로는 부도덕적인 것으로 규정되기도 하고, 정치적 위협으로 해석되기도 하며, 집단의 이익을 저해하는 불순(不純)으로, 또는 경건에 반하는 불(不)경건, 자연을 거스르는 비(非)자연으로도 해석된다. 여기서 악의 제거, 위협으로부터의 방어, 그리고 불순의 제거라는 슬로건이 매우 당연한, 정의로운 실천이라는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이렇게 정치화된 제거 프로그램은 차별의 악이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하는 기만적인 기재(器材)다.
이렇듯 편견은 사회-정치 심리학적으로 기능하면서 개인이나 집단에게 특정 사안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만들고, 그 확신에 따른 개인적 혹은 집단적 태도를 유발시키는 것이다. 모든 차별 현상의 이면에는 개인이나 집단 안에서 일어나는 편견의 지배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 그리고 개인이나 집단 속에서 형성된 편견은 개인과 개인 혹은 집단과 집단을 통해서 쉽게 전이되는 특징을 가진다. 편견이 낳은 차별의식은 다양한 형태의 사회, 정치적 이해관계와 만나면서 진화하고 교묘하게 변종을 일으키면서 일종의 정당한 도덕적, 정치-사회적, 종교적, 제의적 행위나 제도, 혹은 법으로 포장된다. 이런 점에서 나는 차별을 일종의 정치적 현상, 즉 크고 작은 권력 관계에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어느 편이 일방적으로 재현하는(representing) 행위라고 여긴다.
차별 행위는 사실의 왜곡을 통해 일어난다. 차별은 정치적 약자에 의하여 주도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대부분 강자가 약자를 이해하고 판단하는 방식에서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습성, 생각, 사고, 의식, 감정, 이해관계를 통해 약자를 해석하는 재현하는 행위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 비틀려진 왜곡이다. 오직 강자만 왜곡할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난 역사 속에서 백인이 흑인을 차별하고, 남성이 여성을 차별하고, 이성애자가 동성애자를 차별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는 부정확하다. 모든 차별은 강자가 약자를 왜곡함으로써 차별하는 방식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백인이 백인을 차별하고 흑인이 흑인을 차별하며, 여성이 여성을 차별하는 행위도 비일비재하다. 이렇게 강자가 약자를 차별하는 양태는 이내 상투적 행위와 언표 혹은 가치판단에서 일상화 된다.
2.
일상에서 일어나는 차별 행위는 사람이 다양한 만큼 각기 다양하다. 다양한 형태의 차별은 각기 특정한 현실에 대한 행위자의 사유와 판단의 형식을 통해서 상투적으로 표현된다. 서열적 사고, 우등한 것과 열등한 것을 나누는 판단, 선과 악에 대한 이해, 선호의 느낌, 그리고 지연, 혈연, 학연, 신분 등 출신에 따른 친소(親疎) 관계 등은 우리 안에 있는 차별적 사유를 아주 상투적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주된 요인이다. 이 차별적 사유가 집단 속에서 기능할 경우 그 결과는 매우 무섭다. 집단은 집단의 이익에 더욱 천작하는 구조를 피하기 어렵기 때문에 차별 행위를 매우 강력하게 유통시키는 힘을 행사한다. 남아공에서 오랜 기간 존치되고 있었던 인종 차별 법, 1960년대까지 지속된 미국의 인종 차별 법, 지금도 서슬 시퍼렇게 적용되고 있는 아프리카의 동성애자 사형 법 같은 것이 그 예다. 차별이 법과 제도를 옷 입을 경우, 차별 행위는 국가나 사회, 그리고 그 국가나 사회의 신성한 영역을 해석하던 종교의 권위에 의해서도 옹호, 조장된다.
차별이 보편화된 사회나 집단 안에서 차별을 거부하는 행위는 터부시되어 반사회적인 행위로 규정되고 처벌을 받게 된다. 한국 감리교회에서 동성애를 증오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동성애자를 향하여 축복을 빈 행위를 터부시하여 기피하지 않은 한 목사를 증오하는 무리가 종교 재판을 벌인 것도 이런 논리의 연장선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런 사건은 부끄럽게도 그저 단순히 한국 감리교회의 집단 지성, 혹은 신학적 윤리학의 바탕이 지성의 저항을 파괴하고 저속하고 저질화된 상태에 이른 실상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인류사회는 사실 오랜 기간 이렇게 차별적 행위를 법과 질서, 사회 제도, 그리고 종교적 제의를 통하여 유통하며 존속시켜 왔다. 인류의 지적 실패의 사례들이 편견을 통하여 사회적으로 전승되고 법과 제도 속에 천작해 왔다는 사실은 오늘날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사회는 20세기에 들어서서도 집단 학살 싸움을 그치지 않았다. 이미 세계 2차 대전 중에 나치에 의하여 저질러진 홀로코스트의 실상을 직면하고 경악했음에도 불구하고 크고 작은 패싸움은 여전히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멀게는 르완다의 인종학살, 아프가니스탄의 학살, 아르메니안 학살, 가깝게는 전두환군부의 광주 학살 사건, 이승만 정권의 제주 4.3 학살 역시 정치적으로 동기화된 편견에 지배를 받아 인간을 죽이는 차별 행위를 한 것이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전개된 “홀로코스트 이후의 신학”은 홀로코스트 이전의 신학이 지닌 무능과 오만과 편견을 비판했고, 신학이 생산한 그릇된 질서 신학의 관계적 오류를 바로잡아 왔다. 현대 신학의 내적 논리를 이끈 신학적 윤리 담론은 정치신학, 해방신학을 거치면서 권력과 물욕에 빌붙어 기생해온 기생(妓生)신학을 청산하는 일에 매진해 왔다. 그런데. 이런 논리와 신학적 담론과는 정말 아무런 상관도 없이, 세계 지성사에서 상당 부분 극복해온 차별의 논리와 제의를 2000년대에 들어선지 한참이 지난 오늘날 한국 감리교회 안에서 버젓이 감리교회 주류의 논리로 재현되고 있다. 지성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매우 부끄러운, 나태한 한국 감리교회의 실상이다.
차별의 연원을 연구한 학자들은 차별의식은 문화 내지는 문명의 틀 속에 내재되어 변이되고 전승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우리가 심원하게 영향을 받아온 문화 구조 속에서 차별적 의식과 가치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익혀왔기 때문에 우리는 대부분 차별을 하면서도 차별적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나, 혹은 그런 행위를 하는 자기 자신이 “그릇 되었다“라고 깨닫지 못한다. 오히려 차별행위를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남보다 더 단호한 도덕적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믿거나, 사회 상규에 더 적합한 행위를 하고 있다고 여기는 인식의 오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경우가 흔하다.
차별받는 사람들은 차별의 악을 “직접” 경험한다. 차별 행위가 유발하는 배제, 소외, 불이익, 무시, 괴롭힘, 추방의 제의를 넘어서 차별자가 자신을 향하여 두려움이나 공포, 혹은 혐오, 증오까지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면 차별을 받는 이는 더욱 깊은 심리적, 사회적, 그리고 물리적 공포를 느끼게 된다. 실상이 이러한데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차별의 악을 제대로 파악하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주류 사회 구성원이 되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직접” 차별을 받아 본 경험이 없어서이다. 설령 실제로 차별을 받아도 자신이 그 차별로 인하여 심각하게 고통을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별을 받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대부분 자기 자신이 누군가를 차별하고 있다는 사실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차별주의자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지극히 정상적이며 심지어 선량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이런 현상에서 우리는 집단 안에서 유통되는 왜곡된 인식을 정상으로 인식하는 지적 착각이 문화화 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차별의 악이 광범위하게 지속되는 이유는 바로 이렇듯 “선량한 사람”의 실상이 차별주의자라는 데에 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을 일러 다소 형용 모순의 표현이지만, 김지혜 교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창비, 2019)”라고 불렀다. 차별 행위를 하면서도 그 악을 인지하지 못하여 스스로를 선량하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심지어 차별 반대를 가르치고 주장하는 이들 중에도 자신이 선명한 차별 행위를 하면서 그것을 차별이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이런 이들이 적지 않다는 증거는 제도적 차별을 합법화해온 역사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차별 행위자가 선량한 사람일 수 있을까? 왜 우리 주변에는 사람을 차별하면서도 스스로를 선량하다 여기는 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본 모습은 사실 선량한 것이 아니라 무섭고 악한 것이다. 다만 그 스스로 우둔하여 악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 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이 알던 모르던 누군가에게 지속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크리쉬나무르티는 사람을 일러 “편견 덩어리(a bunch of prejudices)”라고 지칭했다. 그에게 찾아와 대화를 청하는 이들을 향하여 크리쉬나무르티는 “그대가 나에게 무엇을 묻기 이전에, 내 앞에서 무슨 주장을 하기 전에, 자신이 편견 덩어리임을 먼저 인정하라”고 권했다. 자신이 산출하는 질문 자체가 편견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진실을 찾겠다고 논거 점을 잡는다면, 이 경우 이미 그 논거 점 자체가 비틀려 있어 진실한 대화를 이어나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편견 덩어리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야, 그래야 비로소 편견에서 놓임을 받은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참된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크리쉬나무르티의 지혜로운 권고는 사실 우리 모두에게도 필요하다. 겉으로는 매우 신앙이 깊어 보이고, 교양이 있어 보이며, 지성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이도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 주장, 존재 그 자체도 무수한 편견으로 얼룩져 있다. 심지어 우리에게 영향을 끼쳐온 부모, 교수, 목사, 그리고 우리의 이웃과 벗, 모두가 살아온 사회가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동일하게 어느 정도 편견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인지하는 것은 차별의 악과 싸우려는 이들이 가져야 하나의 요건이다.
3.
인류의 역사가 매우 장구하지만, 차별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인류 사회는 너무나 오랜 기간 차별을 정당한 것이라고 여기는 편견을 유통하며 차별 사회를 형성하고, 차별하거나 차별받는 것을 당연시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이들이 만들어온 기독교 세계에서도 오랜 동안 노예 제도를 하나님이 주신 질서라 여기며 정당하다고 여겨왔고, 유색 인종을 차별하는 일에서도 그 오류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성경과 전통을 근거로 삼아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여기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아는 무리도 있다. 우리 주변에는 인식에서는 평등, 실천에서는 차별을 일상화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학자들 대부분은 차별적인 세계 속에서 특혜를 누리면서 그들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차별을 파악하지도 못했고, 문제 삼지도 않았다. 오히려 신실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 차별적 오류를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하거나 신학적으로 당연한 것이라 여겨 옹호하기도 했다.
차별의 악이 종교 안에서도 지속되어온 까닭은 차별 의식이 신학에 의하여 교묘하게 하나님의 질서로 포장되고, 합리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간과된 것은 신앙 집단, 신학적 논리, 그리고 목회 지침에 의하여 누군가를 가해하고 소외시키며 피해자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신앙 집단은 가해자 집단이 되는 동시에 피해자를 향해서는 “더럽고, 추하고, 악하거나, 혹은 열등한 존재, 심지어 악마적인 존재”로 낙인을 찍음으로써 피해자를 향해 냉혹한 태도를 가지도록 부추겼다. 이런 가르침에 이끌려진 종교는 다소 불명예스러운 판단이지만 대부분 차별의 온상이다. 종교가 차별의 온상으로 전락하게 된 하나의 이유는 종교인들이 타방의 악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지적, 비판하면서도 자기 집단 내부의 악이나 인식의 오류에 대해서 인정하기를 꺼려하는 왜곡된 전통을 고수하면서 이런 전통을 마치 신앙 공동체의 통일성, 열정, 뜨거움, 일치를 위한 것인 양 해석해온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교도들을 향하여 근거 없이 비하한 전통, 마르틴 루터가 터키인들을 향하여 개처럼 여긴 전통, 캘빈이 비(非)교리적 인간을 혐오한 전통, 기독교 세계가 유대인들을 학대하고 증오해온 전통이 이어져 낙관적인 기독교 세계의 종말을 불러온 홀로코스트를 초래하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기이한 차별적 전통을 내장한 기독교 일부는 아직도 적반하장 차별 행위를 참된 신앙을 고수하는, 확신 있는 신자의 행위인양 영웅시하며 가르치고 있다. 차별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을 교회가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극복하려 노력해 온 것은 사실 기독교 일부일 뿐이며, 그 기간도 얼마 되지 않는다. 모든 전쟁의 이면에서 기독교가 다양한 이유를 제시하며 포악을 지지하고 독려해온 역사를 생각하면 끔찍한 생각이 들 정도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세계 교회협의회가 핵전쟁의 위협을 직면하면서 오랜 동안 고수해오던 정당 전쟁론을 버리고 정의로운 평화론으로 그 입장을 바꾼 사실도 모르고 있다. 신실하면 할수록 한국 기독교인들은 핵으로 무장한 세계에서 전쟁이 아직도 정당한 행위가 될 수 있다고 믿는 무책임하고 호전적인 신자로 되어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가르침이 전능하고 정의로운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편들어 승리가 보장될 것이라고 허황되게 믿고 있다. 다양한 사회, 정치, 경제, 과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가공할 전쟁 행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면서, 사람이 사람을 대량 학살할 수 있는 것도 신앙 안에서 수용할 수 있다는 주장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인간을 과학무기를 동원하여 대량으로 학살할 수 있는 전쟁을 지지하는 그 논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면 사람을 죽이지 않고 교묘하게 차별하는 행위 정도는 쉽게 관용하거나 간과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큰 악이 보편적으로 융통되면 사소하거나 적은 악은 쉽게 인지되지 않거나 간과되는 법이다.
기독교 안에서 신앙을 가르치고 배우는 문화 구조를 통하여 폭력적 행위가 유통되고, 차별이 마치 거룩한 질서인 것처럼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진 그 근원적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교사해온 집단이 성서를 해석하면서 자기 집단의 안전과 우월성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들의 이익과 욕망을 충족하면서, 자신들의 특정한 이해관계를 보장하기 위해 편견을 조장하고 이를 하나님 신앙으로 포장해 왔기 때문이다. 노예제도를 옹호한 역사가 노예 주인의 관점에서 나온 성서 해석의 결과였다면, 성차별의 역사를 옹호한 무리들은 남성 중심적이며 가부장적인 집단의 구성원의 눈으로 성서를 해석한 것이고, 인종 차별을 옹호해온 역사는 자기 인종 집단의 우월성을 확보함으로써 사회, 경제, 정치적 이익을 공유해온 집단의 눈으로 상대를 본 것이다. 성소수자를 향한 차별 행위를 죄스럽게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성소수자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것이 마치 참된 신앙인양 가르치는 목사들이 우리 주변에 부지기수인 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일러 하나님 신앙과 아무런 상관없이 기독교적 질서, 성 윤리의 해석자요 수호자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적 오류, 즉 편견과 편견이 낳은 차별적 사고를 보수(保守)하는 데에서 자신의 특출한 신앙이 입증될 수 있다는 망상에 빠져 성소수자를 박해하고, 혐오하고 증오하는, 포악하고 열광적인 신앙인의 얼굴을 가지는 것이다.
이들은 도대체 언제부터 차별주의자로 살아가게 된 것일까? 차별을 합리화해온 주체는 대부분 사회에서 약자가 아니라 강자, 소수자가 아니라 다수자, 즉 권력을 가진 자들이다. 인간은 강한 권력을 가진 집단에 속할 때 더불어 차별주의자가 되기 쉽다. 기독교도 사회 안에서 세력을 가진 다수자가 되면서 차별을 심화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다수에 속하면 그 집단 속에서 보호와 안전의 강도가 더욱 강력해짐으로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하여 타방을 비하, 규정하는 것을 넘어서서 성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먼, “불순하고 더러운” 존재로 간주하는 일이 매우 쉬워진다. 루터의 종교 개혁 성지 비텐베르크 마을 교회 외벽에 새겨진 한 부조(浮彫)물에서 우리가 보듯이 경건한 종교 개혁의 후예들은 유대인을 사람이 아닌 돼지(Schweine)라 여기는 편견을 유통했다.
이런 편견에 사로잡힌 다수자의 종교 집단 문화가 형성되는 것과 동시에 그 다수자는 자기 집단의 이기성을 노골적으로 옹호하려는 심리 상태를 가지게 됨으로써 다수자의 소수자를 향한 차별적 행위가 개인의 행위나 판단을 넘어서 제도나 종교적 제의로 굳어지고 강화되었던 셈이다. 따라서 차별적 행위는 지난 역사, 우리의 사회 구조, 우리 자신의 욕망까지 담겨진 사회 심리학적 배경도 가지고 있다. 차별 행위는 개인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종교, 사회, 정치적 현실의 반영이기도 한 것이다. 차별 행위를 하는 이들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의 “왜곡된 의”를 충족하기 위하여 누군가를 부당하게 희생양으로 삼는 제의에 참여한다. 동류 인간을 희생양으로 삼는 차별 행위자가 “선한” 차별주의자일 수 없는 이유다.
4.
인간 공동성은 인간을 품위 있고 정의롭게 성숙시키는 순기능도 있지만, 동시에 편견과 차별 의식을 배양하는 숙주가 되기도 하고, 이를 유통, 전승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갓 태어난 인간은 언어와 관습, 가치와 도덕, 질서와 지배, 안정과 평화, 문화와 문명, 철학과 문학, 옳고 그름... 등에 관하여 무지한 문화적 야만 상태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무지 가운데에서 태어난 인간은 인간 공동성을 통해 지,정,의를 키워나가면서 자신과 세상을 잇고 관계하는 방법을 학습한다. 어린 생명은 문화적으로 접속하게 되는 가족 공동성을 통해 신뢰와 믿음, 사랑과 연대감을 배우면서 삶의 의미와 보람, 그리고 행복을 감지하는 능력을 키우게 된다. 모든 생명은 앞선 인간들이 형성해온 문화 구조에 적응하기 위하여, 그 문화가 중시하는 가치와 질서를 획득 모방함으로써 한 사회인이 되어간다.
이렇게 전통적 질서에 적응하고 통합되어가는 과정은 간혹 자신의 삶을 근본에서 위해하고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과거의 전통 속에는 다양한 자기 파괴의 폭력성도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쟁 영웅 신화에 세뇌된 청년이 전쟁터에서 영웅적 행위를 하려다가 참살될 수도 있었고, 인도의 수티(suttee, sati) 힌두 제의에서는 남편이 사망할 경우 그의 처가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하고 사망한 남편과 함께 화장되는 것을 예찬하는 끔찍한 전통도 있었다. 인간 공동성에는 삶을 풍성하게 하는 생명력도 전승되지만, 간혹 약자의 삶을 무화시키려는 죽음의 힘도 함께 전승된다.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의 삶의 자리에는 아직도 제거되지 못한 반생명적인 폭력의 산물들이 다양한 차별 의식과 행위로 잔존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라면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다른 이를 젖히고 더 우월한 사회적 지위를 가져야 하며, 남보다 높은 소득을 얻는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누구보다 유리한 고학력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다 나은 경쟁력을 가지고, 소유와 지배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우월성을 가져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어려서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2년 전에 4명의 학자들이 오랜 연구 끝에 공저한 ”인간의 행복의 연원에 대한 연구“(The Origins of Happiness, 2018)에서 저자들은 인간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돈이나 성공이나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행복을 창안하고 느낄 줄 아는 정서적 능력에 크게 의존하게 된다고 결론을 짓고 있다. 행복은 소유나 지위나 학식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신뢰와 타인을 향한 신뢰를 잃지 않은 이들에게서 더 깊고 짙다는 것이 이들의 사회학적 연구 결과였다.
우리의 정서는 합리적 사유나 이성적 논리에 앞선다.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 이유를 “자신이 부유하지 않아서”, 혹은 “성공하여 높은 지위를 가지지 못해서”, 혹은 “공부를 많이 못해서”, “좋은 배우자를 만나지 못해서”라는 등등의 이유를 대지만, 더 근원적인 원인은 행복을 누리고, 나누며, 만들어 갈 수 있는 능력, 정서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인간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당사자가 유아기에서 중등학교를 마칠 정도의 시기에 어떤 세계를 경험했는가에 크게 좌우된다는 공통된 견해를 내 놓았다. 어릴 때 신뢰를 경험한 아이와 신뢰를 배우지 못한 아이, 어릴 때 행복을 느끼며 살아온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의 차이,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의 정신세계는 성장한 후에도 그의 행복과 삶의 의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에 심원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 아이가 자라온 가정, 학교, 그리고 교회, 사회에서 경험하는 신뢰 관계를 포함한 심리적 환경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가 그 안에서 학습하고 삶을 나누어온 삶의 공동성의 구조는 어떤 것이었을까? 가정이라는 공동성, 학교라는 공동성, 교회라는 공동성, 우리 사회라는 공동성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신뢰하고, 믿고, 배우며, 우리의 안전과 행복, 그리고 우리의 욕망을 충족하며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배웠을까? 물론 이런 공동성의 환경에서 우리는 옳고 그름의 기초를 배우고, 사람과 관계하는 형식을 배우고, 신뢰의 관계를 학습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은 과연 우리를 야만의 속성에서 해방되어 다양한 차별적 관계로부터 우리를 충분히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우리의 욕망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누군가를 파당지어 배타하고, 혐오를 드러내고 비판하며, 비열한 평가를 가하여 배제하면서 안도감을 느끼는 그런 관계였을까?
우리 안에 있는 차별의 현실은 우리가 학습하며 살아온 삶의 공동성을 통해서 지양(止揚)되지 않은 차별 감정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증명이다. 차별은 하나의 판단이므로 그 차별을 결과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 우리 안에 이미 하나의 판단으로 착색되어 내재하고 있는 어떤 “당위, 혹은 질서”다. 당위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는 의무와 강요적 성격을 가진다면, ”질서“는 하나의 정형화된 서열적 관계에 대한 승복을 요구한다. 즉 ”선한 것, 좋은 것, 당연한 것, 아름다운 것, 바람직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논리에 앞서 우리 안에 감정적 정서를 가지고 있고, 또한 그러한 정서를 뒷받침하는 논리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것들은 대부분 한 개인이 스스로 알아서, 찾고, 배우고, 경험하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삶의 공동성을 통해 사회적으로 이미 누군가가 경험하고 판단한 내용을 간접적으로 학습하여 얻은 것이다.
이는 마치 구전(oral tradition)을 통해서 하나님 신앙을 전수받았던 고대 이스라엘 집단의 공동성을 연상하게 한다.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를 선대하라는 인류애적 가르침도 그 속에 담겨 있었지만, 다른 편에서는 이교도를 비인간화하여 태중의 아기까지도 참살하라고 가르치는 무서운 죽음의 윤리와 차별 감정도, 바로 그 공동성을 통하여 전수되고 학습 되었다. 태중의 아기까지 진멸하라는 요구는 사실 하나님 신앙보다는 적으로부터 보복의 가능성을 제거하려는 고대 포악한 전쟁의 논리와 동일한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더해진 것이 성 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공격적인 태도다. 이런 것들이 모두 하나님 신앙이라는 박스 속에 담겨 전수되어온 셈이다.
5.
사회적으로 학습한 것은 실제에 있어서 개인이 책임적으로 내린 순수한 판단의 결과가 아니라, 그 사회를 통일시키고 유지, 보존하기 위하여 이미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판단의 형식에 순응하거나 적응함으로써 형성된, 후천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차별적 인간이 가진 차별 의식은 이미 “누군가에 의하여 판단되거나 규정된 내용”, 즉 “앞서서 판단한 내용”을 이어가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편견(prejudice)이다. 그리고 이 편견은 상식적인 차원에서 유통되는 상투적 가치 판단(stereotyping)을 옷 입는다. 어의적으로 편견이란 사유와 관찰을 통합하여 개인지 그 진실함과 오류를 판단하기에 "앞서서(pre)" 미리 "판단된 것(judged)을 의미한다. 인간은 야만으로 태어나서 가정에서는 부모, 학교에서는 선생, 교회에서는 목사, 사회에서는 권력자가 중심이 되어 형성되는 여러 사회적 원 안에서 삶의 공동성을 나누고, 이 원 안에서 과거에 형성된 “앞선 판단”을 획득한 셈이다. 그 결과 우리는 “편견 덩어리“가 될 운명에 갇혀 있다. 차이가 있다면 편견에서 더 많이 해방된 삶의 공동성에서 자란 사람이 있고, 해방되지 못한 삶의 공동성 속에서 자란 사람이 있을 뿐이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그 이유 그 한 가지를 가지고 인류사회는 수천 년 동안 동류 인간을 차별하다가 비교적 근래 1960년대를 지나면서 비로소 인종차별을 극복하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그 뿌리는 여전히 왕성하게 남아 있다. 여성을 남성과 동일한 권리를 가진 인간이라고 여기지 않는 성차별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정치적 평등,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경제적 평등, 그리고 오늘날에 와서는 인권론적인 평등론을 확산하며 부단히 극복해 왔지만 아직도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차별적 현실이 제거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다. 지난 2000년을 전후하여 유엔과 세계 교회 협의회가 전 세계적으로 20년 동안 여성을 향한 다양한 차별적 폭력을 극복하자는 운동을 펼쳐왔지만, 2020년 현재 아직도 주류 남성들에 의한 여성 차별은 다양하고 교묘한 이유로 지속되고 있다. 지금도 인류 사회는 매년 11월 25일을 “여성을 향한 폭력 반대의 날“로 지정하고 여성을 향한 폭력과 차별을 제거하자는 성차별 반대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유럽과 미주에서는 다양한 차별이 상당부분 극복되어 사회의 지배 권력에 소수자의 참여를 중시하는 평등주의적 관점이 정치적 진보의 상징이 되고 있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대학 교수는 물론, 신학대학 교수직에도 동성애자가 차별 없이 임용되기도 하고, 캐나다와 미국, 유럽에서는 성소수자가 높은 지위를 가지고 일하는 경우도 생기기 시작했다. 최근 미국의 46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바이든 대통령 당선자는 지난 12월 15일 피트 부티지지(Pete Buttigieg) 전 인디애나 주 사우스벤드 시장을 교통부 장관으로 공식 지명함으로써 그의 정부 각료로 초대했다. 그가 최종 임명되면 미국 역사상 ‘성소수자 1호 장관’이 된다. 이런 현상을 진보라 여기지 않고 타락이라고 읽는 보수주의자들도 있다. 하지만 인권 선진국에서는 진보를 타락이라 읽는 우둔함은 결코 보편적인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성소수자(LGBTQ)에 대한 차별이 수천 년 동안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가 새로운 이슈로 떠오르고 격렬한 윤리적 논쟁을 거쳐 서서히 청산되어가는 현상의 하나라고 나는 보고 있다. 성소수자 차별은 다수자들이 이성애자의 기준을 가지고 자신들과 다른 성적 성향을 가진 소수자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를 정당하게 여기는 야만성에 그 본질이 있다. 내가 야만성이라 지칭하는 까닭은 성소수자를 향한 차별행위가 매우 원시적이고 사악하기 때문이다. 차별주의자들은 소수자의 성적 성향이 다르다는 사실을 고의로 무시하려 들거나, 심지어 물리적 폭력이나 종교적 주술을 가하여 제거하려 하고, 지속적으로 괴롭혀 자살로 몰아가기도 했으며(스티븐 스프링클은 성소수자 혐오 범죄로 죽임을 당한 이들에 관한 기록을 책으로 남겼다, <누가 무지개 깃발을 짓밟는가>, 2013), 성소수자의 삶을 엿보고 감시하거나, 직장이나 학교에서 따돌리며 불이익을 주고, 생존권과 거주권을 박탈하려 들기도 하며,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부인하는 등의 혐오와 증오 행위를 지속적으로 저지른다. 이런 부류의 차별 행위는 “성소수자의 인간성의 부정“이라는 점에서 나치가 범한 홀로코스트의 다른 버전이거나 그 연장선상에 벌어지는 것과 같은 성격의 범죄라고 규정되어야 마땅하다. 대부분 사회의 주류에 속하는 이들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증오 범죄다.
6.
합리적인 성소수자 이해를 위한 자료는 매우 다양하다. 즉“성서 신학적 해명”, “성성(sexuality)에 대한 윤리적 해명”, “인간 성성(sexuality)에 대한 임상학적인 설명”, “현대 심리학적 해명”, “정신 의학적 해명”등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차별주의자들은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 의식에서 쉽게 해방되지 못한다. 특히 스스로 경건한 기독교 신앙인이라 여기는 경우 더욱 심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기독교 신앙 공동체의 교도자들이 신자들을 미성숙하게 여겨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사안을 살펴보고, 합리적으로 사고하며, 보다 나은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킨 결과이며, 동시에 일방적으로 “그러한 편견“을 주입시키며 교도해 왔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 신자들은 ”은혜와 감동을 받는 중에“ 자신도 모르게 심각한 차별주의자로 길들여지고 있는 셈이다. 도대체 하나님 신앙을 가지고 살려는 우리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차별주의자가 되어 살아가게 된 것일까? 나는 이런 왜곡의 과정은 바로 우리 자신이 사회의 주류가 되어 살기를 바라는 속성에 크게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의 주류에 속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차별받기보다는 차별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사회의 주류(main stream)를 대변한다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언제나 우월한 지위를 점하기 때문에 도리어 도덕적 위기에 처하게 된다.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가 우리에게 일러준 지혜는 힘 있는 주류 집단에 속하게 되면 도덕적 자각이나 반성 혹은 성숙의 기회가 오히려 더 적어진다는 사회심리학적 통찰에 담겨있다. 사회 주류에 속하는 이들은 소수가 아니라 다수의 지지와 옹호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므로 이들은 더 많은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결정 권한을 행사한다. 다양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주류 세력을 집단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결속을 도모하고, 전통을 강조하며, 비판적 자각보다는 복종과 일치를 요구하게 된다.
따라서 주류 세력은 차별과 편견을 시정하고 교정할 기회보다는 이를 유포하고 전파함으로써 이견을 약화시키고 집단의 힘을 강화하려는 속성을 가진다. 다수이면서 동시에 권력을 가진 집단, 이것이 차별주의자가 속한 집단의 사회적 특징이다. 이런 까닭에 차별 행위는 대부분, 다수에 의한 소수 차별, 혹은 힘 있는 집단에 의한 힘없는 이들을 향한 일종의 공격 행위, 증오와 혐오를 동반한 억압적 권력 행사가 된다. 기독교 인구가 다수가 되고, 주류가 되는 문화를 형성하면, 거기서 소수를 향한 혐오와 박해가 일어나기 쉽고, 이러한 혐오와 박해를 정당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순수 논쟁이 등장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이단 재판은 이런 식으로 일어난다.
나는 모든 차별 행위는 야만으로 태어나 야만의 본성을 극복해온 인류의 역사와 진보의 방향에 역행하는 구태(舊態)라고 여긴다. 야만의 속성을 벗겨내지 못한 차별 행위는 모든 사회 구성원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상상력이 결핍한 자리에서 쉽게 일어난다. 사람을 차별하는 이는 차별 대상자가 자기 자신과 같은 “동류 인간”이라는 인식을 거부하거나 결여한, 적대적 불화를 내면화한 인간이다. 즉 차별 행위자는 차별 대상자와의 관계가 이미 단절되고 파괴된 관계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들은 일종의 사이코패스 환자의 징후를 보이게 된다. 그가 비록 제아무리 화려한 언변을 동원하고, 동정과 연대, 사랑과 연민이라는 어휘를 사용한다 할지라도 이미 “냉혹한 판단”을 수용한 야만, 즉 관계의 단절, 곧 차별 의식을 그의 정신세계 속에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별주의자들은 흔히 자신들의 야만성을 감추기 위하여 두 가지 논리를 유포한다. 첫째는 차별 대상자를 뚜렷한 근거 없이 악마화 하는 것이다. 악마가 아닌 인간을 악마화 하려는 노력에는 거짓과 과장, 허위와 모략이 동원된다. 동시에, 둘째, 자신들을 의의 편에 선 자로 가장, 과시하는 것이다. 차별주의자들이 흔히 동원하는 것이 성경, 윤리와 도덕, 혹은 신앙과 믿음이다. 하지만 이들이 동원하는 무기는 “도덕주의“라는 틀 안에 갇혀있는 특성을 피하지 못한다. 도덕주의란 도덕을 무기 삼아 상대를 공격하는 수단이다. 도덕론을 앞세우는 차별주의자들은 이미 그들 내면에 “자기 의”에 빠져있는 냉혹한 야만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의 도덕 논리는 상대를 정죄하고 증오와 혐오를 발산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렇게 차별주의자들은 상대를 악마화 하는 거짓 선전, 과장, 비하, 악의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자신을 신앙과 의의 수호자라 간주하는 자기 의라는 오만의 덧에 걸려 있는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류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차별주의를 배양해온 숙주가 바로 주류 종교, 특히 기독교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종교는 차별을 신앙화하고, 신의 뜻으로 포장하며, 의의 싸움이라는 표어를 내 걸면서 혐오를 정당화 한다. 역사 속에서 열광주의적인 차별주의자의 이면을 살펴보면 대부분 종교에 의하여 증오심과 혐오가 동기화 되었다. 열광주의적인 종교인의 특징은 인권도, 민주적 가치도 이해할 도덕적 능력이 없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심지어 이들은 무책임한 종말론으로 무장하기도 하며, 말세의 묵시적 선악 대결구도를 대입하기도 하면서 차별적 세계관을 과장하여 해석하기도 한다. 이 정도까지 나가면 차별주의자들의 눈에는 동성애자란 인간이 아니라 악마, 사탄, 교회를 허무는 사악한 존재로 영화(靈化)된다. 종말론적이거나 묵시적 증오를 동원하면 차별주의자는 자기 자신과 다른 인간을 종교나 영성의 이름으로 악마화 하는 흉측한 인간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7.
옳고 그름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윤리적 사유의 근본적인 구조다. 여기서 판단의 옳고 그름의 내용을 정하는 것은 자기가 자의(恣意)를 따라 “미리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확인”하는 이성적이며 비판적인 절차(reasoning)를 요구한다. 이 절차에 더하여 필요한 것은 그 확인된 사실을 “상대적인 중립적 위치”에 놓는 신학적 작업이다. “중립적 위치란 없다”라는 이론도 있지만 나는 그 중립적 위치라는 것은 바로 억압과 지배력에서 거리가 가장 먼 해방 신학적 방법에 있다고 본다. 즉 누군가의, 혹은 강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모든 자력(磁力)을 중화한 지점을 이르는 말이다. 우리는 유한하여 하나님의 뜻을 명료하게 말할 수 없는 인간이다. 하지만 내가 상상하는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이 중립적 지점에서 가장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이 중립적 위치에 가깝다면 우리는 어떤 이익 집단으로부터, 간접적으로, 획득한 판단이 아니라(not acquired), 자기 자신이 스스로 성소수자에 대한 현실을 살피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사람이 될 것을 요구받는다. 그래서 성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스스로 공부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여러분은 (편견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편견에서 해방된)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 하도록 하십시오.”(로마서 12: 2)
이 성서 구절에 비추어 차별을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의 윤리적 요건은 무엇일까? 편견에서 해방된 마음과 언제나 생각이 새로운 인간이다. 차별 반대를 운동 차원에서 하는 것도 좋고, 집단행동으로 표현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차별적 편견에 지배받지 않는 “자유 하는 신앙인의 주체적 지평”에서 나오는 차별 반대의 힘이다. 그 신앙인이 서 있는 토대는 자신이 메인 스트림을 형성하여 완성되거나 굳어지는 지평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이 열려있는 주체로 설 때만 항상 열리는 지평이다. 다시 말해 답을 얻어 이미 굳어진 주체가 아니라 새로운 것(das Novum)을 향하여 열려진 주체가 만나는 새로운 지평이다. 이런 주체는 새로운 것을 상상할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럼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가진다.
나는 성소수자 차별 행위를 옹호하는 집단에 반하여 결성한 이 모임의 구성원들이 “정치적”이기를 바란다. 모든 신앙행위는 정치적 행위로 이어져야 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정치적이란 말은 가치를 제도화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즉 차별을 제도적으로, 법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차별 행위를 지원하는 제도나 법을 차단하기까지 실천적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런 정치적 행위는 그 행위의 구성원의 통전적 인격이 담보될 때에만 진실하고 설득력이 있고 힘이 있다. 따라서 이 운동이 힘이 있으려면 모든 참여자들이 사실에 적합한 인식을 위하여 부단히 연구하고, 편견에서 해방되어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결집된 힘을 가지고 그릇된 제도와 법을 바꾸고 바로 잡아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존엄한 권리를 지켜내는 능력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1958년 야스퍼스가 받았고, 1967년 에른스트 블로흐가 받았던 독일 출판협회 평화상(Friedenspreis des Deutschen Buchhandels)을 2016년 수상한 카롤린 엠케(Carolin Emcke)는 여성이며 성소수자다. 그녀는 그녀의 책 <Gegen den Hass, 2018>(직역하면 “증오에 반대하여“라고 할 수 있지만 번역자는 이 책을 ”혐오사회“라고 정했다.)에서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증오하는 사람은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한 상상력이 결핍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했고, “누군가를 증오할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이들의 다양한 논리를 분석해 다분히 알고 있지만, 그저 오직 한 가지 이유로 성소수자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침해하는 이들을 거부 한다. 그들이 우쭐대며 제아무리 수백 가지 이유를 들이댄다 해도, 나는 “사람을 증오하고 미워할 그럴 권리는 인간에게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상상하는 세상은 무척 무섭기 때문이다.
차별은 인간성을 거스르는 악이다. 선한 상상력이 결핍되어 편견에 찌든 차별주의자는 있어도, 선한 차별주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