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충구의 죽음의 윤리 이야기 2
“인간 죽음의 역사”
“우리는 죽음을 재앙이나 회피해야 할 것이나 심지어 낯선 것이라 여기는 생각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 레비스 토마스(Lewis Thomas)
대만 타이난 신학대학에서 강의하던 2015년 가을 나는 한 대만 교수로부터 대만의 어느 부족은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 부친의 시신을 자신의 안방에 묻어 장사지냄으로써 초월적 존재가 된 부친의 영적인 가호를 받는다고 믿는 풍습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의 지난 역사에서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자식이 삼년 동안 상을 지내야 효자라고 여겼으니 이 또한 죽은 자와의 관계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행위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효행은 산자와의 관계에서 그치지 않고 죽은 자와의 관계를 넘어 자신과 자식 그리고 주변인에게까지 그 의미가 연장되어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곡은 효(孝)를 참된 인간됨의 본질적 요소라고 여겼고, 윤성범은 효의 연장에서 성(誠)의 신학을 구상했다. 이렇듯 인간의 죽음에 대한 태도나 생각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는 역사적 행위와 연관성을 가진다.
인간이 인간의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은 시공간을 초월하기도 하지만, 시공간의 조건 속에 한계 지어진 인간의 삶을 드러내기도 한다. 죽음의 역사에 대한 연구자들은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그 시대 사람의 삶을 읽어냈다. 연구자마다 견해가 다양하고 인류의 역사가 다양하니 그 이해의 방식도 다양하여 몇 가지로 종합하기에는 어려움이 적지 않다. 하지만 다양한 시각을 종합하여 나는 인간이 인간의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수렵채취를 하며 살아가던 시대에는 죽음이란 폭력적이며 급작스러운 것으로 이해되었고, 군집적 농경사회를 이루기 시작한 인류사회는 죽음 이후에 대한 강렬한 관심과 더불어 신화적 죽음이해로 그 의미를 확장했으며, 근세 자연과학적 지식을 가진 현대인은 재래의 죽음 이해에 더하여 생물학적인 죽음 이해가 겹쳐지는 죽음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죽음이 역사성을 가진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죽음의 의미가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생명의 역사는 무려 54억년에 이르지만 오늘날의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것은 지구의 오랜 나이에 비한다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현생 인류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탄생은 죽음 없이 일어나지 않았다. 무수한 생명이 태어나고 죽어가는 과정을 거쳐 오늘의 우리가 존재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미국의 저명한 시인 홀(Donald Hall)은 “나의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나는 나의 대체자가 지상에 도착했다는 느낌으로 인하여 전율을 느꼈다.”라고 했다. 죽음이 없다면 새로운 세대도 없을 것이고, 죽음이 없다면 생의 의미도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다. 장구한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생명은 죽음으로 종말을 맞고 새로 태어난 생명이 앞서 살아가던 이의 자리를 채워왔다.
인류학자들은 문명 이전의 오랜 기간을 지나 오늘날의 인간처럼 인류가 직립보행을 하며 사유능력을 행사하여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시점에서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약 250만년의 시간을 거쳐 인류는 지구라는 환경에 최적화된 생존능력을 가진 존재로 진화해 온 것이다. 긴 시간에 걸쳐서 인간은 지구에 생존하는 생명체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의식을 가진 존재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나는 이 과정을 하나님의 인류 창조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무수한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서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는 존재는 인간이 당연 최고다. 인간이 자신들의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은 역사 발전 과정 속에서 다른 지혜와 더불어 축적되어 왔다. 죽음은 어느 시대에서나 일어나고 있었지만 죽음의 의미는 인류가 형성해온 문명의 구조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기 때문이다. 수렵채취 생활을 하던 고대 인류는 오늘날 현대인이 죽음을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죽음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 원초적인 죽음 이해는 최초의 인류사회에서는 보편적인 것이었지만 오늘의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다소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들의 죽음은 예상할 수 없는 질병이나 물리적 공격에 의하여 급작스럽고도 폭력적으로 죽음을 맞는 것이었다. 다른 생명을 추적하여 잡아먹고 살던 그들은 이런 죽음을 자연스러운 것이라 여겼다.
자연스러운 죽음
원시상태의 인간은 대부분 기아와 고통, 그리고 질병과 신체적 기형, 영양결핍, 자연재난, 급작스러운 사고로 인하여 죽었다. 이 시대의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사나운 육식 동물의 공격이나 질병, 적의 공격, 그리고 사고로 인하여 일어나는 일상의 사건이었다. 우연한 사고와 포악한 자의 습격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던 시대에서 죽음이란 정글에서 동물이 포식자에게 잡혀 죽는 것과 유사하게 급작스럽고도 폭력적인 것이었다. 이런 죽음은 폭력적이며 급작스런 생존의 종말을 초래했다. 요즈음처럼 늙어서 죽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초기 인류는 이런 급작스러운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인류학자들은 이 시대의 사람들은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제의도 가지지 않았고, 죽은 자를 애도하는 시간도 길지 않았다고 한다.
폭력적 죽음에 관한 고고학적인 증거는 미 대륙의 그랜드 캐년(Grand Canyon) 계곡에 살던 원주민의 유골에서 그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으며, 호주 원주민 유적에서도, 그리고 브라질이나 베네수엘라 정글에 거주하던 원시인의 유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상당수 유골의 두개골은 외부의 타격에 의하여 깨져 있었다. 성인 남성 두개골의 약 30%가 돌이나 망치 같은 것에 타격을 받은 것처럼 부셔져 있었던 것이다. 이런 고고학적인 증거를 통하여 우리는 고대사회의 생존방식과 죽음의 형식을 어렴풋이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하여 수십 명 단위의 군집 생활을 하며 수렵채취 생활을 했다. 수렵채취로 생존하던 집단은 먹을 것을 충분히 얻지 못할 경우 다른 집단을 습격하여 자기 집단의 생존을 도모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단계를 거쳐 집단이 집단에 대한 생존 투쟁을 벌이던 시대다. 역사적 예증을 든다면 우리는 고대 그리스에 형성되었던 근 200여개의 도시 국가 시대를 지목할 수 있을 것이다. 생존을 위하여 이들은 야만적 전사(戰士) 문화를 기렸고, 자기 집단을 유약하게 만드는 요인을 제거했다. 유약하게 태어난 사내아이들을 내다 버리는 관습도 있었고, 태어난 아기가 여아일 경우 유기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태어난 아기가 장애를 지니고 있거나 기형일 경우 산모에게는 그 아기를 제거해야만 한다는 책무까지 부과 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오랜 동안 인류의 역사가 생존 지향적 삶의 가치를 따라 죽음을 이해했다는 사실을 일정하게 가리키고 있다.
이 시대의 죽음은 약자가 혹은 약한 공동체가 강한 자나 강한 집단에 의하여 급작스럽게 그리고 폭력적으로 죽임을 당하는(sudden and violent death) 결과였다. 홉스(Thomas Hobbes)는 그의 책 리바이어던 『Liviathan』에서 이 폭력의 시대를 일러 문명사회 이전의 상태라고 규정하고 그 시대의 사람들은 자연의 법에 따라 만인이 만인에 대한 적대적 관계 속에서 “외롭고, 궁핍했고, 더러웠으며, 잔인했고, 짧은” 생애를 살았다고 요약했다. 이들은 피차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소규모 단위의 공동체를 형성 했고, 그 공동체를 강화하기 위하여 소모적이거나 유약한 자들을 제거해 버리는 관습을 만들었던 것이다. 살기위해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수렵채취 시대를 지나 비교적 생존환경이 안정된 농경사회로 진입하면서 인류사회는 인간의 죽음에 관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죽음의 궁극성 부정
사유는 생존을 넘어서 형성된다. 일반적으로 인류사회가 정착생활을 하게 된 연대는 신석기 시대를 거쳐 청동기 시대 정도로 추정된다. 기원전 250만 년 전부터 기원전 3,300년 경 청동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친 시대를 지나면서 야만적 생존 방식에서 벗어난 인류사회는 인간의 죽음에 대하여 몸의 죽음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 가축을 키우고 농작물을 재배하면서 비교적 정착된 삶을 영위하기 시작한 인류사회는 사회적 안전의 폭을 넓히기 위하여 이전보다 더 큰 사회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그 결과 사회 계층이 형성되었다. 이 시대에서도 평범한 사람의 죽음은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지배자의 죽음은 공동체의 강력한 결속을 약화시키는 사건이었고,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지배자의 죽음을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죽음 앞에서 기존의 삶이란 하나의 환상과 같은 것으로 상대화되고, 죽음 너머에 보다 더 소중한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런 사고는 다양한 제의(祭儀)를 낳았다. 특히 공동체 안에서 특정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이의 죽음에 대한 태도에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졌다.
죽음의 역사를 연구한 스펠만(W. M. Spellman)은 이런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일어나기 시작한 시점을 약 3만 년 전 쯤으로 추정했다. 일종의 원시 제의적인 행태는 죽음 자를 모셔두는 방법에서 과거에 이해하던 죽음 이해를 넘어서는 새로운 의미를 낳았다. 구석기 시대에서는 죽음이란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죽은 자에 대한 제의나 특별한 애도의 시간을 가지지 않았지만 신석기 시대 이후로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죽음 이전과 이후의 이중성을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삶을 정지 시키는 죽음이라는 종말 너머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죽은 자와의 동거, 교류, 관계를 상정했고 이러한 생각은 의 매개를 통하여 산자와 죽은 자 간의 교류가 일어나는 제의의 형식으로 발전했다.
고고학자들은 석기 시대에 그려진 동굴의 벽화나 유적들, 대표적으로 남서 프랑스 라스코(Lascaux) 벽화에서 이런 특징을 읽어 냈다. 죽음에 관한 고대의 벽화에는 그 시대를 살아가던 이들의 삶에 대한 이해가 담겨 있었다. 융엘(Eberhard Jüngel)은 죽음이란 인간의 생명에 대한 질문과 마주 닿아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 시대의 사람은 현존을 넘어 죽음 이후까지 연장되는 의미를 찾았다. 죽음을 넘어서 보다 진실한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플라톤의 이데아 설은 아마도 이러한 사유를 담고 있는 하나의 이론일 것이다. 죽음 이후를 생각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원시 인류가 받아들였던 죽음의 궁극성 혹은 종결성을 부정하는 의식을 가졌던 셈이다.
죽음의 종결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죽음 너머의 관점을 가지고 현재의 삶의 의미를 해석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허망하게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현실을 넘어선 초월의 세계를 담아내는 다양한 종교 사상의 출발점이 되었다. 윤회설로 죽음 이후를 그려내는 것이나, 죽음 이후에도 이어질 영원한 생명에 대한 종교적 믿음은 자연의 법에 따라 죽음으로 종료된 인간의 삶을 바라보던 과거의 관점을 넘어 죽음 이후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듯 죽음 이후의 삶(afterlife)에 대한 종교적 해석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종교와 장례문화의 배경이 되었다.
칠레의 친초로(Chinchorro) 유적이나 이집트 피라미트 문화 유적은 죽은 자의 몸을 미이라로 박제하여 다음 생을 준비시킨 흔적을 남기고 있다. 삶이 살아있는 현상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넘어 초월적인 세계로 이어진다는 의식은 결국 죽음을 생의 최후(finality)라고 보는 과거의 관점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렇듯 석기 시대 말경부터 인류는 죽음을 수용하되 죽음 너머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죽은 자는 죽음으로 그의 존재 의미가 종료되지 않고 그의 영혼이나 신적 능력이 다음 생으로 이어지거나, 살아있는 이들과 관계를 가진다는 생각은 문화 전통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고 상이한 제의의 형식을 낳았다.
죽음의 개인화
아리에스(Pillipe Ariès)는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는 죽음이란 일종의 순화된 죽음으로서 현재의 생을 마치고 영원한 세계로 귀향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사람들은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의 죽음을 이해하는 것이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중세 후기로 들어서면서 삶과 죽음을 공동성 속에서 이해하던 시각이 서서히 사라지고 점차 “개인의 죽음”, 혹은 “나의 죽음”이라는 관점으로 죽음을 이해하는 시각이 좁혀졌다고 주장했다. 개인주의의 발현과 더불어 종교적 실존에 대한 개인적 평가 사상이 형성되면서 강한 최후 심판 사상이 강조되고, 이교(異敎)에 대한 정죄 문화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종교개혁 사상에 의하여 분열된 기독교 세계는 개인적 선택과 영혼의 구원과 영생이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죽음에 대한 개인주의적 이해를 강화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렇듯 인류 역사가 문명사회를 형성하면서 죽음의 궁극성을 부정하는 태도는 내세에 대한 구원과 희망과 결부되어 현생을 가늠하고 평가하는 삶의 원칙을 낳았다. 신의 심판대에 설 준비를 하는 삶, 혹은 현세는 영원한 구원을 향한 여정이라는 생각, 그리고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천상의 삶에 대한 소망은 신실한 신자들에게 죽음의 문턱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들었다. 죽음은 자연스럽고, 친숙했으며, 두려운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지나야 할 구원과 자유의 문이라 여겨졌던 것이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죽음의 준궁극성(pen-ultimate)을 넘어 보다 궁극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희망을 가지고 죽음을 받아들였다.
물론 이러한 주류의 흐름과는 달리 입증할 수 없는 종교적 희망을 따르지 않고 원자론적인 집합으로서의 생명현상과 그것의 해체로서의 죽음을 이해하는 데모크리투스(Democritus) 부류의 전통도 있었다. 에피큐러스(Epicurus)나 루크라테스(Lucrates)로 대별되는 자연주의적인 죽음 이해는 인류 초기 수렵채취 시대의 죽음 이해를 보다 합리적으로 바라보려는 죽음 이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견해는 일부 비종교적인 현대인의 사생(死生)관으로 남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죽음 이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세기 이후 자연과학적이며 생물학적인 생명이해와 더불어 새로운 차원의 죽음 이해의 지평을 열었다.
금기시 된 죽음
20세기 현대인이 지니고 있는 죽음 이해의 주조는 일종의 금지된 죽음(forbidden death)이다. 금지된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가급적 피하고 싶은 주제이며 거론조차 하지 않으려는 금기 사항이 됐다. 끔찍하고 무서운 죽음을 아예 대변하고 싶어 하지 않으므로 많은 사람이 병원에 격리된 채 죽으며, 심지어 죽는 본인 자신도 모르는 새에 기술적으로 처리되어 버리곤 한다. 죽음은 금지 사항이 됐다. 이것이 소위 금지된 죽음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현대 세계는 금지된 죽음의 문화가 지배하는 세계가 되었을까? 여기에는 사회문화적 요인과 의료과학 기술적 요인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폭력적 급습에 의해 죽음을 맞던 야만 시대를 지나, 삶을 넘어선 사후의 삶을 생각하던 시대에서의 죽음은 공동적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던 죽음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비록 권선징악적인 최후의 심판 대상으로 간주되는 개인이 두드러졌지만 적어도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인간의 죽음은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를 지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전통적으로 삶의 공동성의 근간을 유지하던 종교 및 사회적 풍습의 고리가 깨지고 산업화된 사회는 과거의 가족 중심적 삶의 공동성조차 해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여기서 가족은 핵가족화 되고, 종교에서 이탈한 개인은 삶의 공동성을 상당부분 상실했다. 삶의 공동성에서 벗어난 개체화된 인간의 죽음은 비극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하여 공공의 시선으로부터 가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죽음을 금기시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죽음을 금기시하는 문화를 초래한 또 하나의 요인은 의료과학 기술에 의한 죽음 지배 현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의료과학 기술은 인간을 개별화 했을 뿐만이 아니라 기계론적으로 신체를 분화시켜 죽음의 요인을 밝혀냄으로서 죽음과의 전투를 벌려왔다. 특히 프레밍(Alexander Fleming)이 페닌실린을 발견한 이후 인간의 생존 기간이 길어지기 시작했고, 신체 기관의 각 기능에 대한 생물학적 이해와 더불어 생명 유지를 위한 최적의 영양학적 제안들은 평균수명 40세를 조금 넘던 인류의 생존기간을 거의 배나 연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죽음은 이제 자연적인 것도 아니고, 영원한 생명으로 넘어가는 단계도 아닌, 거부하거나 싸워 극복해야 할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죽음의 가시를 제거하기 위하여 고도화된 의료체계가 준비되었고, 죽어가는 이는 삶의 현장에서 생명현상을 종식시키는 죽음의 가시들을 뽑아내는 전문 의료인에게 의탁되어 병원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특히 1차 대전과 2차 대전과 같은 세계 대전에서 무수하게 죽어나간 이들은 대부분 일반의 시선이 가려진 자리에서 처치되었다. 전문화된 의료적 저치능력과 장례문화가 인간의 죽음의 일상성을 삶의 자리에서 추방하여 떼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수명이 연장된 노화된 인간은 무수하게 병원을 오가며 죽음과의 거리를 최대한 벌리며 싸우고 있는 것이다.
선택하는 죽음
생명 현상에 대하여 충분히 해명 받지 못했던 시대의 사람들은 죽음을 운명이나 신의 뜻으로 여겼지만 생물학적인 생명 현상을 파악한 현대인은 생존의 의미를 다시 묻기 시작했다. 생존의 의미를 찾지 못한 이들이 스스로 생명을 단축시키는 살기를 포기하거나 거부하는 자살이 과거에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회는 자살을 반사회적이거나 반생명적인 것으로 금기시 했고 오래 동안 이를 범죄시 했다. 그러나 비록 일부지만 오늘의 세계에서는 법적으로 죽을 권리를 인정하는 새로운 죽음 이해, 즉 선택할 수 있는 죽음에 대한 이해가 일어나고 있다. 물론 죽을 권리를 인정하는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생존이 고통을 겪는 것이 되어버린 말기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앞당기려는 권리를 행사하려 할 때 이를 승인하는 차원에 머무르고 있지만 스위스와 네델란드에서는 더 이상 생존하기를 거부하는 “종료된 삶”(completed life)까지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2018년 5월 10일 CNN은 한 호주 식물학자가 스위스 바젤의 조력자살 기관 액지트(EXIT)에서 친지에게 둘러싸여 죽음을 맞는 장면을 보도했다. 그의 이름은 굿올(David Goodall) 나이는 104세였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앞당기기 위해 처방된 약을 스스로 삼킬 수 없어서 치명적인 약 대신 혈관 주사를 처방받았다. 그는 호주 정부가 죽기를 원하는 자신의 요구를 받아주지 않아 스위스까지 와서 삶을 마치게 된 사실에 대하여 유감을 표시하고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Ode to Joy)를 들으며 그의 마지막 순간을 평온하게 맞았다.
죽음을 받아들이기 직전 그는 “나는 나의 이야기에서 무엇인가 긍정적인 결과가 있기를 바라고, 다른 나라에서도 조력자살에 대하여 조금 더 자유주의적인 입장을 채택하게 되기를 바란다. 노인이 자기의 죽음을 선택할 자유를 주는 도구로서 내가 기억되기를 바란다. 나는 내 육체적인 능력과 시력을 상실하고 있어서 이런 상태로 더 이상 생존하고 싶지 않다”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스위스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살하는 이를 합리적으로 돕는 행위는 범죄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자살하는 이를 돕는 행위는 오직 합리적이고 간접적인 행위여야 한다. 따라서 굿올은 의사 앞에서 자신의 정신이 온전함을 입증하고, 자신의 죽음을 결과할 마지막 행위, 즉 혈관 주사 수액이 자신의 몸으로 투입되도록 튜브를 개방하는 행위를 스스로 시행했다. 그의 손자와 오랜 동안 그를 돌보았던 간호사가 그의 마지막을 지켰다.
전 세계적으로 보아 조력 자살을 허용하는 나라나 주는 약 15개다. 미국에서는 오리건주, 버몬트, 워싱턴주,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하와이 그리고 워싱턴 디시에서만 허락되고 있다. 몬타나주를 제외하고 주정부나 의료기관은 조력자살을 하는 이에게 어떤 재정적 지원도 하지 않는다. 인간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하는 이들은 조력자살 법제화를 맹렬히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고령화된 사회에서는 조력자살을 허용하는 국가가 하나 둘씩 늘어나고 있다. 조력자살을 입법화한 나라에서는 조력 자살이란 단순한 자살이 아니라, 죽음을 앞둔 말기환자가 고통을 더 이상 겪지 않으려 비참하게,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하고, 비인간적인 상황에서, 홀로 고독하게 자살하는 일이 빈번한 상황에서 “법적으로 정당하게, 인간답게, 그리고 가족들과 깊은 유대 속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마감할 수 있는 선택권”이라고 여긴다.
나오는 말
생존이 보장되어 있지 않았던 야만 사회에서의 죽음은 매우 급작스럽고도 폭력적인 공격에 의한 죽음이 대부분이었다. 죽음의 주된 요인은 원인을 규명할 수 없는 질병이거나 외부의 폭력이었다. 초기의 인류는 이러한 죽음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그 후 인류사회가 생존능력을 확보하고 문명 시대를 연 이후 근래 생물학적 생명현상이 과학적으로 규명되기까지 죽음이란 삶과 죽음 이후를 건너는 문턱과도 같이 이해되었다. 그리고 사후 영생에 대한 믿음을 일러주는 죽음 이해는 기독교적인 서구사회에서 하나의 보편적인 죽음 이해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고도의 의학적 지식을 겸비한 현대인은 죽음을 거부하거나 죽음을 감추며 자신의 죽음을 직면하기를 꺼려한다. 죽음의 수용보다는 죽음을 금기시하는 문화와 가치에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현대인은 생물학적이고도 의학적인 지혜로 죽음을 미루는 데 성공하여 배나 연장된 수명을 향유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사람들이 젊어서 죽던 시대와는 달리 대부분 그 어느 시대보다 더 오래 살아 노화된 인간이 되어 죽음을 맞는다. 여기서 삶과 죽음의 의미는 다시 새롭게 물어지게 되었고, 삶의 의미 없는 고통스러운 생존이 과연 인간다운 것인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참된 생명의 의미인지 묻게 되었다. 이런 질문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삶의 의미와 죽음을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한 번 더 깊이 숙고해야만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사상 2018년 연재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