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ugust 27, 2008

Who is Jesus?

한 십년 전 나는 한국신학대학 대학원에 출강을 했던 적이 있다. 가을 학기가 시작되어 한신대 교정에 들어 섰을 때 내 눈에 띠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예수는 누구인가?" // 아마도 진지하고 양심적인 신학자나 신앙인들은 우리의 예수인식에는 늘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와 동일한 물음을 가슴에 가지고 있을 것이다. // 한 잘나가는 부흥사가 뉴욕 순복음 교회에서 부처는 불교를 만들면 안되는 일이었다고 설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분이 어떤 분이기에 불교, 기독교, 예수에 대하여 다 파악한 하나님처럼 말하는 것일까. 부흥회 다니느라고 공부할 시간도 없었을텐데 어느 틈에 그 모든 것을 다 헤아려 보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소리는 사실 기독교인이라면 여기 저기서 많이 듣던 소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나는 사도 바울이 자신이 평생 해 온 학문, 신분, 자랑거리를 예수를 만난 이후 값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고백을 좋아한다. 자신의 자랑스러웠던 것들을 그리스도 앞에서 배설물로 여겼다는 바울의 고백은 결국 그가 배설물로 여겼다는 것들이 진짜 배설물이라는 소리가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담긴 고백이리라. 만일 황금을 돌처럼 여겼다는 사람의 말을 듣고 황금이 돌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말귀를 잘 못알아 듣는 사람이거나 조금 바보일 것이다. 사람의 주장에는 그의 자전적 고백이 담겨있다. 주관적 생각은 그의 사람됨을 나타낼 뿐 객관적인 사실을 바꾸어 놓는 마술이 아니다.

나의 주일학교 시절에는 아무리 큰 교회라 할지라도 예배실은 마룻 바닥이었다. 당시 나는 회기동 근처에 있었던 동안교회에 다니고 있었는 데 교회에 가서는 얌전히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당연한 의무인줄 알았다. 그 시절 나는 하나님이 아닌 것을 더 사랑하는 것은 모두 우상숭배라고 일러준 주일학교 선생님의 말씀을 천금같이 믿고 내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지낸 적이 있다.

그 선생님 이름은 잊었지만 그 분의 말씀은 아직도 나에게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주고 있다. 이 가르침은 나로하여금 무엇인가에 대한 애착과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는 삶의 태도를 주기도 했지만, 인간다움의 욕구라든지 타종교에 대한 맹목적인 비판적 시각을 가지게도 했다. 누군가를 처음 사랑하게 되었을 때 나는 하나님보다 그녀를 더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죄의식을 가지기도 했고, 가족에 대한 호혜적 사랑도 하나님 앞에서 죄스럽게 느끼기도 했다. 더구나 이런 시각은 나로 하여금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닌 다른 종교나 신을 믿는 것을 우상숭배하는 것이라 판단하게 만들었다. 해서 나는 소시적에 사찰 경내에 들어가는 것조차 하나님께 불경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고 언젠가 화계사로 소풍을 갔을때 부처상을 목격하고 고개를 돌린적도 있었다. 일제 시대에 신사참배한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구별하면서 몇 안 되는 신사참배 거부자들을 영웅적 신앙의 표상으로 인식하게 만든 목사들의 설교를 들으며 목숨을 걸고 종교적 신념을 지키는 행위가 정말 기독교적인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예수외에는 구원을 얻을 이름이 없다"는 성서적 주장과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가톨릭 교회의 주장은 이런 점에서 다른 종교가 동등하게 혹은 평등하게 공존할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주장이다. 믿음이 좋은 목사들은 이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다른 이의 인권과 생존권을 박탈하는 죄도 서슴치 않고 저지른다. 이런 목사 밑에서 신앙을 교도받은 이들, 특히 모태신앙이나 혹은 어려서부터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은 타종교인은 받지 못할 구원을 받은 특별히 선택된 자들로서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이라는 주문에 걸려있는 셈이다. 죄로 인하여 저주와 심판을 면치 못할 죄인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심판의 대상에서 왕중왕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으니 그야말로 영적 귀족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더구나 현세에도 축복을 받고 내세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기독교의 교리는 교파를 초월하여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믿고 받아들이는 신앙원칙일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자기가 믿고 있는 기독교 신앙이 최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비기독교인들을 향한 사랑과 관심을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 최상의 것은 그들이 구원을 받도록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니 장경동 목사의 발언이 오히려 속시원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종교간의 갈등이 시작된다. 알지도 못하면서 다른 종교를 비하하고, 따져보지도 않고서 다른 종교를 무가치한 것으로 매도하며, 누군가로부터 전수받고 배운 대로 다른 종교를 거짓 종교라고 을러대기 때문이다. 지난 역사에서 기독교 신앙의 수호자를 자처한 종교재판관들은 신앙의 이름으로는 오만도, 살인도, 전쟁도, 심지어는 저주를 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기독교 인종차별주의자들이 그랬던 것 처럼,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당연한 것처럼, 장경동 목사처럼, 구원받지 못한 이들을 향한 측은지심을 가지고 그리했다. 그들만의 종교가 아닌 종교는 모두 헛된 것이라고 가르쳐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세기 사람들이 어찌 불교를 알고, 다양한 종교적 전통을 알았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최고라는 헛된 교만과 자부심을 가짐으로써 타방을 두려워 했던 것이다. 최근 물의를 빗고 있는 장경동 목사의 발언은 이런 의미에서 모든 기독교인들이 습성처럼 가지고 있는 천박한 인식을 담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많은 경우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현세의 축복"과 "내세의 영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불교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저 성직자들이 가르쳐 준 대로 믿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수는 빛이요 생명이요 진리라고 하고, 또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궁극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될 계시의 총체라고 생각한다. 오직 기독교내에 계시로 인정하는 것 외의 다른 모든 계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 양 부정한다. 이런 까닭에 예수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던 유대인들은 성서시대부터 미움의 대상이 되었고, 기독교는 지난 2000년 역사 속에서 그들을 향한 증오와 저주의 문화를 유발시켰다. 이런 역사는 유럽 기독교안에 깊이 내재되어 세계 2차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이라는 범죄에 기독교가 가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중세기를 지나면서 예수가 아닌 마호멧을 믿는 이슬람권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증오는 결국 십자군 전쟁을 유발시겼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팔레스타인 갈등을 초래하고 있다. 이런 논리에서 장경동 목사의 불교폄하 발언이 나온 것이다.

기독교는 사실 그 초기에 모진 박해를 받기도 했던 종교다. 예수조차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으니 기독교는 따지고 보면 승리주의적 종교가 아니라 십자가의 종교다. 그 당시에는 최고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 오히려 고난을 수납하면서도 평화를 잃지 않는 이들의 종교였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로마 제국주의와 손을 잡기 시작하면서 제국의 세력을 향유하기 시작한 기독교는 거대한 제국의 영적 옹호자가 되고 만다. 제국주의와 교잡하여 제국의 종교로 변신한 콘스탄틴 기독교는 십자가를 싫어하기 시작했다. 제국주의는 거대한 힘을 과시함으로서 공간, 시장, 정치, 종교속에 동일한 지배 논리를 심어 놓았다. 제국주의자들은 지배와 종속, 점령과 확장, 탐욕과 착취의 주체가 되는 것을 당연시 한다. 그러므로 승리주의자들이다. 다른 이들은 지배와 점령의 대상일 뿐이었다. 이 시기에 형성된 신학이 아퀴나스-> 루터 -> 칼빈 -> 웨슬리 전통이다. 이들 속에 점증하는 시민사회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어 오고 있었지만 이들의 권력에 대한 이해는 철저하게 종교 제국주의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15세기 중엽 거대 로마의 지배가 종식되고 로마 제국주의에 의하여 해방된 유럽 각 나라의 정치 세력들은 제국주의적인 침략 전쟁을 반복해 왔을 뿐 아니라, 광활한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을 식민지화하려 했다. 아니러니하게도 이들은 한결같이 가톨릭 혹은 개신교 신앙으로 무장한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국가들이었다. 공교육이 오늘날처럼 확산되지 않은 시대에 이들을 교도한 이들은 당연히 기독교 성직자들이었다. 이렇듯 전쟁과 지배문화를 조장해 온 기독교의 역사는 깊은 악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점이 요도가 시종일관 번번히 지적해 온 문제다.

지배논리는 평등보다는 차별을, 포용보다는 배타를 조장함으로써 그 지배를 정당화하는 한편 상대에게는 피지배 상태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주체성의 혼란을 불러오게함으로써 지배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한다. 힘을 가진 이들이 힘없는 이들을 해석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 지배 이데올로기와 접착된 교리적 예수는 이렇게 이용되었다. 따라서 기독교 문명은 우월하고, 비기독교 문명은 야만적이라는 공식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건전한 기독교인들이라 할지라도 당연스럽게 가지고 있는 병든 정서다.

백인은 유색인들을 지배해야 하고, 백인은 유색인보다 우월함으로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주장에서 나온 것이 노예제도였고, 백인들의 세계에서도 정치 경제적 힘을 가진 남성들이 남성우월주의를 주장함으로써 여성을 비하하고 차별한 전통은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가 없는 사실로 남아있다. 기독교인들인데도 그리했다. 이런 논리는 오늘의 모든 사회 제도 이면에서 그리고 우리들의 심리적 바탕에서 작용하고 있다. "내가 (장)경동교를 만들지 않은 것 처럼 부처도 불교를 만들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이 말은 불교는 붙다의 실수요, 탄생해서는 안될 종교였다는 뜻이다. 장목사의 예수는 장목사를 오만하게 만들고, 그에게 시대착오적 인식이 작동하게 만드는 예수인 것이 틀림없다. 중세기에 모든 이들의 사상의 자유를 박탈하고 오직 기독교 신앙만 강요하면서 그들의 교리적 기준에서 벗어나면 종교재판을 걸어 화형에 처하던 시대와 방불한 전근대적 역사인식이 엿보이는 까닭이다. 이런 이유로 평신도였던 칼빈조차 당대에 존경받던 인문학자 세르베투스를 화형에 처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던가!

아시아 36억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영성은 기독교적 영성이 아니다. 아시아 전역에서 천주교 기독교인들을 모두 모아도 3%에 지나지 않는다. 97%는 비기독교인들이다. 나는 장목사의 주장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의 근거없는 "오만과 자기 의"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가 주장하는 예수가 팔레스타인 어느 우물가에서 삶에 지친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누다가 그녀에게 구원을 약속했던 예수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십가가에 달려 죽어가면서도 한 강도의 고백을 받아들여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그의 영혼을 보살펴 준 대자대비한 예수의 모습을 그가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주장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예수에게서는 다른 종교를 향한 배타와 저주와 심판은 없다. 오히려 거짓과 탐욕에 물든, 배타와 자기의에 가득한 거짓 선지자들과 오만한 성직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여 돈계산하는 이들을 향하여 채찍을 들고, 일곱번 저주를 선언하였을 뿐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를 방문한다면 5월이 가장 제일 좋은 계절이다. 영국식 대학의 교정에는 어디나 정원이 있다. 봄이면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 그 계절의 아름다움을 찬란하게 드러낸다. 5월에 케임브리지에 간다면 분명 푸르른 조그만 들꽃과 여기 저기 수선화들이 무리지어 피어있고, 이름모를 아름다운 꽃들이 온 도시 어느 곳에 가나 피어있는 광경을 목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이렇게 다양성과 다수성을 가진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하나님을 향한 영성의 샘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한 송이 꽃이 기독교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장미 한 송이가 피어나 모든 꽃들을 꽃들이 아니라고 선언한다면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를 부정하는 배은망덕한 오만한 행위로서 그 얼마나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일이겠는가?

팔레스타인에서 참새 한마리도, 머리터럭 한 올이라도 다 헤아리시는 그 하나님께서 아시아에서 피어난 무수한 종교들도 꽃피우게 하신 것은 아닐까? 가난한 이들을 업신여기는 장경동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는 아시아 대륙의 36억의 가난한 이들 곁을 지키고 계시는 그리스도, 그 가난한 이들의 고통앞에서 아파하는 하나님의 고통도 헤아리지도 못하는 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본주의와 승리주의, 제국주의, 그리고 반공주의와 교잡된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닐것이다. 아시아인의 영성의 뿌리가 되시는 하나님, 그들의 삶속에 동행하시는 그리스도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은 예수의 눈이 아니라 교리가 만든 인공의 각질이 우리 눈을 어둡게 한 까닭이리다. 장경동 목사의 호언장담속에 갇힌 예수를 넘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예수 과연 그 분은 누구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