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bet Rabrang, 2008년 3월 14일
제국주의의 행패에 의하여 아시아의 고난이 깊어진다. 내게는 작년 미얀마 사태로 인해 무수한 시민들과 수도승들이 살육을 당했던 일에 대한 기억이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다. 강에 부유하는 스님의 시신을 찍은 사진을 보면서 죽인 것도 모자라 강에 내다 버려 유기한 사람들의 섬듯한 악에 대하여 놀란 마음이 가시지도 않았는 데 이번에는 티벳이다. 미얀마는 부패한 군부 독재 통치가 이어지고 있고, 티벳은 중국의 꼭두각시 정부가 지배하고 있다. 티벳은 중국 공안의 지배 개입이 티벳 정부의 반민중적 억압 통치를 강화하고 있다면 미얀마 역시 중국정부의 지지와 방조의 산물이다. 아시아에서 미국 제국주의만 나무랄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제국중의 하나인 중국의 제국성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주의적인 해방으로 모자란다 하여 사회주의적 해방을 주창했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해방론은 결국 죽써서 개준다는 속담처럼 제국주의적인 거대 악마를 키워내고 그 통치 세력에 의하여 자유주의 세계보다 훨씬 못미치는 가난과 억압과 인권유린의 현실을 세계 도처에 남겼다. 중국과 국경을 마주한 약소 국가들은 충분히 자결권을 행사 할만큼 정치 경제적 역량을 갖추지도 못했다. 이런 세계에서 민주와 독립을 외친다는 것은 정신의 힘이 무력의 힘과 맞서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요구하는 일이다. 그러나 염려하는 바는 중국의 새 정부가 장개석을 밀어 낸 1949년 이후 티벳의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들은 인도로 밀려나 있고, 내부의 정치세력을 키워낼만한 민주 세력의 구심점이 없다는 점이다. 현실 정치에서 대안적 방안이 없을 경우 혁명과 변혁의지는 잠간 불타오르다가 사그러드는 불꽃과 같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 세계에서 주장하는 개인의 자유와 자결권을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지난 50년의 냉전체제하에서 우리가 무수히 보아왔던 일이다. 체코의 봄이 무참이 쏘련군에 의하여 짓밟혔던 일이나 이념 전쟁터가 되어버린 캄보디아, 베트남, 필리핀, 한반도, 대만, 미얀마 등의 나라가 가지는 오랜 내적 갈등은 바로 인간을 섬기지 않는 냉혹한 이념성 때문이다. 자유주의를 외치는 이들이 자유의 이름으로, 그리고 사회주의의 복지이념을 외치는 이들이 사회주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여왔던가? 러시아 혁명을 전후로 근 2000만명이 죽임을 당한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여 수천만명을 죽인 자들이 살아남아 문명을 이어가는 21세기는 과히 폭력과 야만의 세기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티벳 사태만 보아도 거대한 경제제국을 꿈꾸는 중국이 앞으로 아시아 평화의 주축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자국의 국민들의 인권을 존중하지 못하는 정부가 더 높은 인권 기준을 가지고 아시아인들의 인권을 옹호할 능력이 없는 까닭이다. 나는 티벳의 독립과 자결권을 존중하라는 전 세계인들의 염원과 기도가 중국의 포악한 정치를 지양시키고, 주변 국가들을 향한 정치 군사 보안적 개입을 스스로 억제할 수 있는 정치적 도덕성을 가질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연대하여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와 동시에 중국제국주의의 인권억압적 행태에 대한 비판이 정중하게 제기되어야 한다고 본다. 중국은 서구권에 대립한 제국적 일치를 위하여 종교의 자유를 공안 통치아래 두며 탄압해 온 나라다. 인류의 20% 이상을 끌어안고 있는 중국이 인권의 수위를 높일 수 있다면 그것은 중국정부의 성공이기도 하고 아시아인들의 고난을 줄이는 방편이기도 할 것이다.
세계의 가장 높은 산을 가진 티벳이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라마의 추상적 지도력으로 새로운 세기를 견디어 낼 수는 없을 것 같다. 현실 정치에서 사회 구조의 변화에 따라 정치적 공백이 커져 정치적으로 약소국가가 되든지 아니면 강한 나라의 속국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경제적으로 궁핍한 세계일수록 자국민들에 의한 야만적 인권침해도 그 수위가 심각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해방의 기준이 정권획득이라는 목표에 그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비교적 상대적인 정치적 자율권을 행사하고 있는 나라들일수록 자국의 정치권력에 의한 민중억압과 수탈이 도를 지나치는 경우가 아시아에서는 허다하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미얀마, 캄보디아, 북한 등은 지식인들이 살아남을 수 없는 억압의 땅이다. 민주와 해방적 의식을 가진 사회 운동가들이 한 해에 7-800명씩 무참히 살해당하는 야만의 사회에서 우리가 말하는 자결권이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스스로 물어볼 수 있어야 한다.
역사는 무참하게도 무수한 민중의 피를 삼킨다. 정치도, 종교도, 이념도 민중을 지켜주지 않는다. 오직 민중을 지켜온 것은 인간의 존엄함에 대한 확신을 가진 대중의 힘이 세운 정치가 가능할 때이다. 서구 로마 세계가 주변국가들을 향하여 벌린 천년의 수탈이 서구 사회의 원천적 부를 증가시키고 중세 봉건사회를 가능하게 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들이 이루어온 인권의 수위를 아시아가 따라 가려면 서구세계가 그 제국성을 버리고 아시아와 연대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서구 제국주의 세계와 아시아 제국주의가 경제 정치 군사적 경합을 벌리기 시작한다면 아시아는 여전히 빈곤과 포악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의 문제는 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아시아제국, 곧 중국에 의한 제국주의적 지배를 종식시키려 한다면 서구 제국주의가 정치적 지배와 경제적 포악성을 버리고 평화로운 지구체제를 만들려는 진심을 보일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미국이 오끼나와에 거대한 군사기지를 세우고, 뒤이어 한반도 평택에 거대한 군사기지를 세운다면 이는 곧 중국을 경제하려는 군사적 우월성을 먼저 점하려는 전략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의 경제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거대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라, 약소국가를 교두보로하는 긴장과 대립이 더욱 심화될 것이 나는 두렵고 염려된다. 더구나 향후 화석 연료가 고갈되고 새로운 에너지원의 확보가 시급한 이 때 약소빈국들이 자국민들을 위하여 최소의 생존조건을 공급할 수 있는 능력조차 확보활 수 있을 것인지 나는 염려한다. 국민을 섬길줄 모르는 정치권력은 결국 가난한 대중의 비인간적 삶의 현실을 외면하는 빈익빈 부익부의 극한 상황을 존속시키고, 가진 자 편에서 가지지 못한 자들의 요구를 억압하는 세계가 되어 허다한 아시아인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악몽이 더 깊이 재현될 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아시아의 평화는 제국주의 유산을 청산하는 일과 더불어 인간의 존엄함을 차별없이 적용하려는 보편적 가치의 확산에 달려있다.
해발 2000m가 넘는 외로운 고원의 땅 티벳에 평화가 깃들려면 세계의 평화가 더불어 이루어져야 한다. 인구 600만에 지나지 않는 조그만 나라 티벳의 자유와 민주를 향한 여정에 평화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빈다. 중국은 티벳민들의 평화와 인권을 지켜주는 도덕적인 지도력을 행사해야 한다. 티벳인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포악한 군사개입은 중국의 웃는 얼굴 이면에 어두운 악마의 웃음을 감추고 있다는 경고를 주변에 하는 셈이다. 이 포악이 장차 어디까지 미쳐질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세계 평화는 약소국의 평화가 보장될 때 가장 아름답게 꽃필 것이다. 티벳의 저항이 이런 꽃을 피우는 봄꽃이 되기를 기원한다. 비록 눈서리가 내린다 할지라도 봄이 오면 화려한 벗꽃과 개나리가 차가운 겨울의 빈들판을 이겨내고 화려하게 만개하듯이 나는 티벳에서도 하루속히 인권의 봄꽃이 활짝 피기를 기원한다.
Thursday, April 3, 2008
Peace in Tibet and Worl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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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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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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