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February 27, 2008

The Land of Discrimination: South Africa

*******기독교 사상 연재, 해방신학에 대해 다시 말하기 2


차별의 대륙 남아프리카의 해방신학

남아프리카와 개혁교회
1960년대 이후 출현한 해방신학은 신학적 사고 안에 해방의 과제를 숙고하도록 신학계를 자극했고, 이러한 자극은 다양한 해방의 과제들을 생산해 내었다. 특히 남미에서 번지기 시작한 해방 신학 운동은 남 아프리카에 이르러 백인 개신교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인종차별과 분리주의 반대(anti-apartheid)운동으로 전개되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남 아프리카의 인종차별 반대 운동은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를 비롯하여 그의 후계자인 알렌 보잭(Allan Aubrey Boesak)에 이르면서 구체화 되었다.
백인 경찰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흑인 학생들 편에 서서 시위에 나섰던 넬슨 만델라는 1964년 반역죄로 몰려 종신형을 선고 받고 26년을 복역했다. 1990년 출옥한 만델라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의장이 되었고 마침내 인종차별법 폐지를 이루어 내는 데 앞장을 섯고, 그 이듬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인종차별에 저항해온 흑인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형하거나 화형을 시켰던 백인들의 과거 역사를 청산하고 화해와 용서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남아프리카에서 오래 지속되어온 억압의 역사 안에서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박탈당했던 흑인들의 권리는 하루아침에 회복되지 않았다.
오히려 남아프리카의 상황은 해방은 선포되었으나 자유와 평등은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들어냈다. 차별폐지 선언은 있었으나 백인들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흑인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 보장이 사회적, 법적, 그리고 경제적으로 약속된 것은 아니었다는 인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차별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법적, 그리고 의식적인 비판과 저항과 변혁의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해방 순간은 자유의 선물이 아니라 자유를 향한 출발을 선언한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별의 땅 남아프리카
1648년 스페인과의 80년간의 전쟁을 치른 후 마침내 영국계 네델란드인들이 남 아프리카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종교개혁의 바람을 듬뿍 받았던 네델란드 개신교회가 남아프리카 식민지의 종교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남아프리카를 지배하게 된 네델란드인들은 사실상 영국계 단일 백인 인종의 후예들 이었는데, 이들의 지배 권력이 점차 굳어짐에 따라 남 아프리카는 아프리카의 유럽으로 자리를 잡아 가게 되었다. 남아프리카의 기후는 연중 온화하여 미국의 센프란시스코와 같은 날씨가 계속되고, 금과 다이아몬든 등 천혜의 환경과 자연자원이 풍부해서 유럽의 많은 이들이 아프리카에서의 삶을 동경했다.
남아프리카에서는 지난 4백여 년 동안 식민 지배자들이었던 개신교도인 백인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피식민지의 흑인들을 지배해 왔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르자 소수의 백인 선교사들이 흑인들의 노예화와 차별에 대하여 이견을 제기하고, 간혹 선교사들이나 백인들이 흑인들과 결혼을 함으로써 흑인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주장하거나 옹호하는 입장을 보이는 경우들이 있었다. 이런 반발을 의식한 아프리카 국민당(African National Party)은 1940년 이후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 정책을 공식화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인종분리정책(apartheid policy)을 적용하면서 사회 정치 경제적 분리와 지배를 공고히 하려 하였다.
1948년 의회를 통과한 인종차별과 분리정책(apartheid policy)은 대 분리정책(grand apartheid)라고 불려 졌는데 그 목표는 흑인과 백인들의 거주 지역을 분리하고, 사회안에서 백인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한편 흑인들의 권리를 제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인종차별과 분리 정책은 개신교의 칼빈주의적 전통이 강한 남 아프리카에서 인종 차별과 분리가 법적으로만이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합법화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종교적으로 재가를 받은 인종차별법은 남아프리카인들의 모든 사회 생활에 적용되었다. 이 법이 발효되면서 유색인종과 백인간의 결혼이 법적으로 금지되었고, 백인들만을 위한 직종이 분류되어 법적으로 백인들의 권리가 옹호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차별의 신학적 근거
개혁적 백인 개신교인(아프리카너)들에 의하여 입안된 인종차별 정책은 우선 지배와 복종 이데올로기를 성서에서 찾아 그들의 사회이론의 초석으로 삼았다. 이들은 창세기 1: 28절에 근거하여 정복하고(subdue) 다스리라(rule)는 말씀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해하고, 이를 땅과 토착민들, 노예들, 그리고 난관 많은 농업환경을 지배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해석했다. 그리하여 백인 식민지배자들은 성서의 명령과 축복을 따라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서 더 깊은 정복과 지배문화를 강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대지와 토착민을 향한 착취와 억압을 성서적 명령으로 이해한 이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된 선민으로 이해하는 한편 토착민들에 대한 정복과 살상과 지배를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였다.
사실상 19세기까지만 해도 남아프리카를 지배해 온 백인들은 흑인들을 그들의 유럽 중심적 관점에서 흑인들의 문화와 종교를 열등하거나 이교적인 것으로 비하하거나 무시해 왔다. 하지만 20세기를 넘어오면서 이들은 피부 색깔을 이유로 들어 인종에 대한 차별을 법제화하여 선언하였고, 백인들에 의한 흑인 지배를 성서적 전거를 들어가며 종교적으로 정당성을 재가하려 했다. 따라서 지배자 백인들은 아프리카인으로서의 긍지와 민족주의, 독립과 분리원칙을 주장하며 영국 등 외세로부터 주어지는 억압을 성서적인 이스라엘과 애급의 관계로 유비하여 극복해야 할 신앙적 과제로 해석했다. 그들은 외부로부터의 독립과 자주를 주장하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인종차별과 분리주의를 병행시켜 나갔던 것이다.
이들이 거의 확신에 가까운 차별주의자가 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 자신에 대한 성서적 이해에 가장 큰 원인이 있었다. 백인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을 선민(the chosen people)이라고 확신하고, 남아프리카에서 자신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소명이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애굽을 나와 가나안을 향했던 이스라엘과 자신들을 동일시함으로써 스스로를 아프리카너라 부르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고난을 겪었지만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가나한에 들어가게 된 성서역사를 자신들에게 적용하고, 어떠한 난관을 겪을지라도 선민의 지위와 특권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들과 구별되었듯이 백인과 흑인간의 대립과 분리와 차별을 신앙의 차원에서 정당화하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이들이 믿는 하나님은 백인들의 하나님이며, 흑인들을 차별하는 하나님이었다.

차별주의와 성서
본격적으로 차별적 정책이 만들어 진 것은 1924년 아프리카너 국민당이 정권을 잡은 직후부터 였다. 이들은 친영국 정권에 의하여 시행되고 있었던 불평등 폐지 정책이나 흑인들을 도시로 끌어들여 백인들과 일자리 경쟁이 일어나게 된 도시화 정책을 뒤엎고 흑백 분리정책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논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 분리정책의 요지는 성서적 원칙에 따라 각 인종과 족속은 자신들의 족속내부에서 발전하고 성숙해야 한다는 것이며, 신실한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성서에서 밝혀진 이 지침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혼혈 결혼은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었고, 거주 지역도 피부색깔에 따라 분리되었다.
소위 “총체적인 분리주의(grand apartheid) 정책”은 그저 단순한 분리주의 정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기간 동안 암묵적으로 실제 했던 흑백의 차별과 분리를 공식화하고 근본적인 분리를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법에 따라 1948년부터 남아프리카에서는 모든 인간은 피부색갈이라는 외양에 의하여 세 가지로 분류되었다: 백인, 유색인종, 그리고 흑인이다. 이러한 분류는 일단 외양으로 판별되었고, 부모중의 한 사람이 유색인종일 경우 그는 결코 백인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는 백인으로서의 습관, 언어, 교육 배경, 그리고 말하는 태도 등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백인으로 인정받을 수 없도록 하였다.
1951년 발효된 고향 법(Homelands)에 의하여 흑인들의 참정권은 출신지역으로 제한되었고, 그들의 지역에 막대한 정치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남아프리카의 의회에서의 참정권은 박탈되었다. 1953년 제정된 법은 흑인들에게 엄격한 법을 적용할 것을 요구하여 벌금형과 구류 그리고 채찍질을 가하는 형벌을 담았다. 이런 차별 법에 반대하여 1960년대에는 대규모의 시위가 일어나 남아프리카 정부는 계엄을 선포하고 이를 진압 했는데, 이 과정에서 69명이 죽었고 187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때 많은 이들이 법정에서 국가 반란죄로 선고를 받았는데 그 중 한명이 넬슨 만델라였다.

차별이 불러온 불평등
1978년 통계를 살펴보면 인종차별 정책에 의하여 남아프리카에서 어떻게 심원한 사회, 교육, 정치, 경제적 불평등과 부정의가 결과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남아프리카의 흑인은 1900만 명인데 비하여 백인들은 단지 450만 명이었지만, 모든 권력은 백인들이 장악했다. 전 국민의 80%의 흑인들이 전 국토의 13%만을 소유했던 것에 비하여, 20%의 백인들이 전국토의 87%를 소유하고 있었다. 국가소득의 20%도 채 못 되는 것을 전 국민의 80%인 흑인들이 나누어 가졌던 것에 비하여, 20%의 백인들은 국가 소득의 75%이상을 독차지 했다. 이런 불평등이 수십 년 동안 누적된 결과 흑인들에게는 참담하고 혹독한 불평등한 현실이 초래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흑인과 백인간 평균 소득 격차는 1: 14였다. 정치적 결정권을 가지지 못했던 흑인들은 경제적인 착취와 억압과 부정의에 시달려야 했을 뿐 아니라 의료적으로도 매우 고통스럽고 비인도적인 현실에 처했다. 흑인 유아 치사율이 도시에서는 20%에 달했지만, 의료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는 농촌에서는 40%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백인 아이들의 치사율은 2.7%였다. 불평등은 갓 태어난 흑인 아기들의 광범위한 죽음을 초래했던 것이다. 흑인들에게는 인구 44,000명에 의사 한 사람 정도가 배당되었다면 백인들은 인구 400명을 의사 한명이 돌보는 셈이었다.
흑인을 위한 교육비가 일인당 년 평균 4만원이었던 것에 비하여 백인 학생들에게는 65만원이 지출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통계만 보아도 흑인들에게는 교육 혜택이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남아프리카에서는 하루에 900명의 에이즈 환자가 생겨나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는 땅에 떨어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들은 대부분 흑인들이다. 이렇듯 백인 정권이 법제화한 인종차별과 분리정책은 결과적으로 흑인들에게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영역 등 다차원의 불이익과 불평등을 야기해 왔다. 이런 냉혹한 구조악이 개혁교회 개신교인들에 의하여 신학적으로 정당화되고 조장되어 왔다는 사실을 살펴보는 일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차별주의의 책이 된 성서
신학적으로 차별주의를 공식 지지한 사람은 멀베(Dr. W. J. van Merwe)목사인데 그는 성서적 전거를 두 부류로 나누었다. 첫째, 성서는 문화와 민족과 종족의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정당화 한다는 것, 그리고 둘째, 성서는 각개의 개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모든 종족과 족속의 개성을 독자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원칙위에 가해진 신학적 해석은 매우 인종차별적인 것이었다. 예컨대 함의 족속인 흑인들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나누어 놓으신 것이므로 이를 사람이 뒤섞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평등이론은 바벨탑을 쌓던 이들을 흩으신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으로 간주 되었다. 민족적 분리주의는 하나님께서 다양한 민족을 지으셨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정당화되었고, 사회적 분리주의는 선민 이스라엘을 택하신 하나님을 들어 해명 되었다. 유태인과 이방인간의 결혼이 금지되었듯이 백인 아프리카너들과 흑인들 사이의 결혼은 다른 족속과 피를 섞음으로써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다양성을 훼손하는 불경한 일로 간주되어 금지되었다.
1947년 네델란드 개혁교회 신약 성서학자인 E. P. Groenewald는 인종차별과 분리주의의 성서신학적인 기초를 제시하였다. 그의 논문에 의하면 다음 여섯 가지 사항이 주목 된다: 1) 성서는 인류의 일치를 가르친다. 2) 하지만 바벨탑 사건은 하나님 자신이 인류를 흩어 국가와 민족으로 지역적, 영역적으로 나누셨다. 3) 이 바벨탑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성령강림 사건(사도행전 2장), 그리고 사도행전 4: 17절로 이어진다. 4) 따라서 분리된 민족들은 분리된 채로 머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스라엘이 구별되어야 하듯이 보어민족(아프리카너)도 신명기 7장에 밝히고 있는바 “정결한 피“를 지니고 타 족속과 피를 섞지 않고 분리된 채로 남아야 한다. 5) 민족과 국가는 하나님의 분리의 뜻을 따라 머물 때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6) 갈라디아서 4장은 강한자인 백인이 약한 자인 흑인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으로 명하고 있으므로 두 족속간의 존립은 필요하다. 한편은 권위와 지배를 다른 한편은 복종과 존경을 보여야 한다.
보잭은 백인들이 단합하여 주장한 인종차별주의가 어떻게 노예제도를 정당화했는지에 대하여 네 단계를 지적한 바 있다. 거기에는 백인들의 이익을 옹호한 신학적 오용이 두드러진다. 백인들은 처음에 노예제도를 중립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다가, 흑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양심적인 저항을 받자 노예제도의 정당성을 성서에서 찾기 시작했다는 점, 경제적으로 백인들이 이익을 위하여 노예제도가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진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인들의 이익을 위하여 가장 좋은 제도로 받아 들여졌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노예들을 위한 교리문답이 별도의 내용으로 가르쳐 졌는데, 노예제도를 하나님의 뜻이라 가르친 노예를 위한 교리문답서의 일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질문: 누가 당신에게 주인과 그 부인을 주셨습니까?
대답: 하나님께서 그들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질문: 당신을 위해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대답: 농사를 지으라는 일입니다.
질문: “간음하지 말지니라“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대답: 하늘의 하나님을 섬기고, 땅의 주인을 섬기며, 감독자들에게 복종하고 무엇이라도 훔치지 말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 교회가 인종차별주의의 포로가 되었던 데에는 백인들의 차별주의적 지배규범에 따라 번역된 성서에 근본적인 소이가 있었다. 예컨대 아프리카 구역성서에서는 창세기 1장 11절을 번역하면서 “그 종류(sort)대로 열매를 맺었다“는 내용을 신역에서는 ”각기 나무마다 그 고유한 본성(nature)에 따라 열매를 맺었다“로 번역함으로써 신역이 종들의 동일성을 강조하면서 성격의 다름을 지시한 데 비하여 구역은 종의 서로 다름을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구절은 백인과 흑인 사이의 동일성보다 다양성과 차이성을 더욱 강조하여 흑백의 분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던 것이다.
또한 창세기 1: 28절을 번역하면서 구역은 "열매를 맺고 자라서 땅에 충만(fill)하라"로 번역한 데 비하여 신역에서는 ”열매를 맺어 수가 늘고 땅에 거하라“라고 번역함으로써 땅에 충만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는 의미에서 일반적인 표현인 거주하라는 용어로 바뀌었다. 이 밖에도 바벨탑사건을 하나님께서 주도하여 다양한 문화적 단위로 분리시키고 일치를 금한 것으로 해석하거나, 노아 홍수 사건을 해석함에 있어서 함의 자손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를 당연시하여 남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노예로 동일화한 것 등은 흑백 분리주의를 조장한 가치들이 유입되어 성서번역을 지배한 흔적이 역력했다.

알렌 보잭의 흑인해방신학
넬슨 만델라의 뒤를 이은 알렌 보잭은 1946년 남아프리카 카카마스에서 태어나 벨빌(Bellville) 신학교를 졸업했고 덴마크 캄펜(Campen) 대학에서 1975년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후에 “순진함이여 안녕( A Farewell to Innocence)“로 출간되었다.“ 이후 보잭은 연합민주 전선의 지도자로서 활동했고, 1982년에는 세계 개혁교회 연맹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카나다 오타와에서 열렸던 세계 개혁교회 연맹 회의에서 당시 인종차별 정책을 수용하고 있었던 남아프리카 개혁교회에 대한 이단 동의(heresy motion)를 이끌어냄으로써 백인들로 구성된 남아프리카 개혁교회의 회원권을 정지시켰다. 그는 또한 1983년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 정책을 승인하고 있는 남아프리카 헌법을 개정하기 위한 연대 서명운동을 벌려 수백만의 지지를 얻어내기도 했다. 이 서명운동은 남아프리카 인구의 80이상에 달하는 2,400만 명의 흑인들과 유색인종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제한하고 있는 법을 수용하는 한, 수용자들 역시 인종차별정책의 협조자로 남는다는 비판의식을 불러 일으켜 세계적으로 큰 공감을 얻었다. 1985년 그는 만델라가 갇혀 있었던 폴스무어(Polsmoor) 감옥으로 향하는 대규모의 시위를 일으켰고, 그 결과 백인 정부는 그를 횡령죄로 몰아 체포함으로써 지지기반을 무너뜨리려 하였다.
세계교회협의회는 1968년 인종차별주의와 기독교는 대립할 수밖에 없는 이데올로기라는 입장을 표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에서는 이를 단순한 인종차별주의적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신학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문제로 여겨졌다. 그러나 1981년 남아프리카의 흑인개혁기독자연맹(the Alliance of Black Reformed Christians in Southern Africa)은 인종차별주의를 거절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인종차별주의에 의하여 오염된 사실은 선언했다. 이 때 보잭이 앞장서서 인종차별주의를 승인하고 있었던 아프리카 개혁 교회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고, 아프리카 개혁교회에 대한 “이단” 규정이 내려지게 되는 동시에 그 회원권이 정지되었다. 이어 1983년 남 아프리카 교회 공회(the synod of the Africans Churches)는 인종차별과 분리주의는 성서의 직접적인 요구가 아니며, 교회가 인종차별주의를 정당화해 온 것은 신학적 오류였다는 선언을 함으로써 인종차별주의에 포로가 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해방 시켰던 것이다.
남아프리카의 오랜 식민 역사 속에서 식민지배자들은 주인이 되고, 토착민들은 노예와 같은 존재로 전락한 현실에서 알렌 보잭의 가슴에 끝없는 저항의 힘을 불어 넣어 준 것은 개혁 신학 안에서 침묵하고 있었던 예언자적 저항과 비판의 신학이었다. 알랜 보잭은 지난 2007년 해방 신학 컨퍼런스에서 “땅에 쳐박혔던 진리는 다시 솟구쳐 오른다”(Truth crushed to earth will rise again) 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그는 그의 강연과 저서에서 백인신학에 대립한 흑인신학(black theology)을, 분리와 차별에 근거한 백인 신학이 아닌, 인간애적인 정의와 의로움을 통한 인류의 일치를 지향하는 흑인신학을 주장하였다.

차별주의적 백인 신학
흑인 해방신학은 인종적 차별이라는 분명한 가시적 행위들을 통하여 형성된 다양한 차별과 억압을 비판하지만, 사실상 남미나 남 아프리카에서는 백인들에 의한 기독교 선교를 통하여 기독교화된 이들에 의한 자발적 억압과 차별이 일어났고, 종교 내에서 조차 차별이 보편적으로 유통되었다. 이런 정황에서 차별을 용인해 온 백인들의 종교내부의 악의 문제가 무엇보다 시급하게 규정되고 비판되어야 했다. 인종차별이 종교에 의하여 정당화될 때, 그 종교가 만들어 내는 사유구조와 신앙체계는 거룩의 이름으로 인간을 차별하는 행위를 옹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남아프리카에서도 기독교인들이 이루어 낸 식민지배 구조와 나란히 정치와 종교(theology of throne and alter)가 혼연 일체를 이루는 인종차별적 신학, 철학, 그리고 정치 경제적 논리들이 형성된 것이다. 백인들의 세계에서 흑인들의 존재를 인식하는 방법은 무엇보다도 그들 스스로와 다른 흑인들을 철저히 차별하는 것이었다. 백인들의 눈에 비친 흑인들은 자기의식도, 도덕도, 문화도 없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유럽인들은 흑인들을 자신들과 동일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아예 생각도 못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의 주장은 이런 편견을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대가 검둥이를 바로 이해하기 원한다면 검둥이들의 성품에는 인간다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니 그대가 가진 모든 존경과 도덕 그리고 감정을 제거해야 한다. 역사를 돌아보아도 아프리카란 다른 세계와 연관된 모든 목적과는 절연되어 왔다. 그것은 자기의식의 시대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존재하는 유아기적인 대륙, 어둠에 덮여 폐쇄된 곳이다. 노예제도의 본질적 원리란 검둥이들이 아직 자기 자신의 자유에 대한 자의식을 지니지 못하기 때문에 그저 단지 사물처럼 - 아무런 가치가 없는 대상이라는 사실에 있다. 검둥이들에게는 도덕 감정이란 매우 희박하며, 엄격하게 말한다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것은 인간다움의 속성, 즉 자유에 대한 자기의식과 도덕 감정을 열등하게 평가하거나 부정하는 것이다. 이런 부정을 거쳐 차별은 마침내 도덕적으로 정당화된다. 이런 부정이 종교적으로 재가를 받을 때, 차별은 심화되어 흑인들의 존재 가치가 심지어 신의 이름으로 절하되고 비하되는 것이다. “열등한 검둥이 인종” 이것이 수백 년 동안 서구의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묘사하는 당연한 표현이었다.
이렇게 백인들의 신학과 철학은 흑인들을 백인들로부터 차별 분리시키고, 또한 흑인들을 백인들에게 종속시킴으로써, 그들의 인간다움을 부정하며, 인간으로서의 존엄함과 권리를 박탈했다. 이런 차별적 인식을 가진 서구 기독교 식민지배자들은 수백 년 동안 아프리카 흑인들의 모든 것을 착취하고 도둑질하면서도 아무런 신앙양심의 가책이나 죄책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흑인들의 땅과 영혼을 도둑질 했고, 흑인들을 노예로 삼았다. 그리고 흑인들의 존재 그 자체를 사물화 했던 것이다.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사역에서도 이런 의식/무의식적 차별은 지속되었고, 학문의 세계에서도 이 차별은 정당화되었다. 그리하여 일상화된 차별과 억압에 저항할 능력이 없었던 백인신학은 정의와 평등을 요구하는 예언자적 영성에 의하여 신학 그 자체로부터의 해방을 요구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보잭은 진리가 땅에 떨어진 세계에서 진리는 다시 솟구쳐 올라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차별을 정당화해 온 강단의 목사들이나 상아탑의 학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 아프리카 선교 현장에서 고난을 겪어온 이들, 토착민속에서, 땅의 사람들의 대리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노예제도의 비인간성을 인식하고 그 비인간성에 의하여 희생이 되어 온 이들에 의하여 진리가 다시 세워 져야 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사실상 식민 지배자들이 세운 교회들은 토착민들에게는 하나님과 성서의 이름으로 억압과 차별을 수용하기를 종용하였고, 식민 지배자들과 노예 주인들에게는 그들의 정신적이며 영적인 고향이 되었다. 오랜 기간 남아프리카의 흑인들은 그런 교회에서 자신들의 영혼의 안식을 얻으려 하였다. 교회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은 대로 흑인들은 스스로를 백인들에 비하여 열등한, 제한된 존재로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노예로서의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백인들이 가르친 하나님은 지배자와 노예들 모두의 하나님이지만, 백인들에게는 지배자의 권위를 주고 흑인들에게는 노예로 살아갈 것을 명령하는 그런 하나님이었다.
이렇게 교회로부터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성을 인정받아 온 식민주의자들은 남아프리카의 승리의 전사들이 되었다. 그들은 남아프리카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다스릴 권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강단의 메시지를 듣고, 땅과 모든 족속들의 정복자가 되는 것을 당연시하였으며, 심지어는 정복자적 삶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소명으로 여겼다. 그들은 복음을 몰라 구원받을 수 없었던 아프리카 검은 대륙에 복음을 전해 준 것만으로도 아프리카인들의 영혼의 구원을 성취시켰다는 자부심과 정당성을 가지곤 했다.
그러나 그들의 하나님 이해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정한 친자식들은 바로 하나님의 이상적 인간 타입인 앵글로 색슨인들, 바로 자기 자신들이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백인들은 흑인들을 자신들과 동일한 인간이며, 영적인 평등을 나누는 존재라고 도무지 생각할 수 없었다. 이렇게 인종차별을 하나님의 뜻이며 성서적으로 정당하다고 가르쳐온 목사들은 식민 지배자들과 그들의 정권, 그리고 정착민들의 교회에 깊은 해독을 끼쳤다. 그들이 가르친 흑인들에 대한 적대감은 너무나 노골적이었다. 그들은 백인이 원주민 여성과 결혼하는 것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일 뿐 아니라 부도덕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간혹 원주민들과 결혼한 소수 백인들은 원주민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차별정책에 반발하려 했지만, 식민지배자들은 오히려 그들을 일러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반역자로 낙인찍었던 것이다.
일부 선교사들은 토착민들에게 동정심을 가졌지만 그들 역시 백인 식민주의자였다. 그들의 성서해석을 통하여 그들은 흑인들 종속을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시켰다. 그 결과 무려 400년이 지나는 동안 백인 선교사들의 복음 속에는 흑인들의 목소리가 거의 들려오지 않았다. 이런 정황에서 진리는 땅에 떨어졌고, 그 진리는 다시 살아나 새롭게 솟구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남아프리카의 흑인들의 상태에 대하여 진술하고 성서를 새롭게 해석하는 흑인 해방신학의 출현은 어쩌면 신학 자체의 구원을 위해서라도 당연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백인신학과 흑인신학
보잭은 백인신학을 대체할 흑인신학의 전재를 요구했다. 성경을 든 백인들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노예로 삼고, 그들의 모든 권리를 박탈한 역사는 곧 성서와 하나님과 신학과 강단의 메시지의 타락과 오염을 의미했기 때문에, 이런 타락과 오염은 성서 그 자체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이중적 위선과 가치를 당연시하는 백인들의 신학이 초래한 신학적 왜곡에서 연유한 것이었으므로 새로운 신학이 요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인들은 사랑을 말하면서 차별을 가르치고, 정의를 외치면서 그들만의 정의를 가리키고,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은 분리주의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복음의 타락, 하나님 말씀의 왜곡, 오용된 성서의 회복 없이 참된 진리는 떠오를 수 없을 것이므로, 보잭은 남아프리카에서의 기독교 개혁신학의 이중성에 주목한다. 백인들이 그들의 이익을 위하여 타락시킨 개혁신학이 억압자들의 이데올로기가 되었지만, 진정한 개혁신학은 우리를 참된 회개와 갱신에 이르러 참된 진리의 물줄기를 다시 불러들일 것이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따라서 보잭은 인종 차별과 분리주의를 조장한 기독교의 복음이 억압자들의 해석에서 해방되지 않고는 진정한 해방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지나간 역사에서도 복음이 지배자들의 손에서 해석될 때, 복음은 지배자의 이상에 맞추어 해석되곤 했다. 콘스탄틴 신학이 로마 제국주의를 섬겼듯이, 그리고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주의적 신학이 백인 식민지배자들의 이상을 담았듯이 그렇게 신학은 간혹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 있지 못하고 인간의 주장과 이익과 권력의 그늘 아래 왜곡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잭은 차별주의을 용인한 복음은 거짓 복음(pseudo-gospel)이며 이단(heresy)이라고 단언한다. 따라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오염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이단적 거짓복음으로부터 신학의 해방이 일어날 때 비로소 새 하늘과 새 땅일 열릴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살아나고, 출애굽의 하나님이 자유와 해방을 지시하고, 예언자들의 함성이 왜곡 없이 들려올 때 비로소 진리는 다시 하늘로 치솟아 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보잭은 또한 선언적 해방과 지속적 해방의 과제를 구별한다. 백인 정권의 몰락과 더불어 인종차별법이 폐기되고 평등에 대한 선언적 해방이 왔지만, 이러한 선언만으로 해방의 과제가 성취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도덕적 후회와 반성, 심리적 역겨움을 느끼는 차원을 넘어서서, 사과와 화해의 차원을 넘어서 제도적 갱신과 변혁에 이르는 지속적 해방의 과제를 거듭 언급해 왔다. 여기서 그는 해방의 과제에 참여해 온 많은 이들이 “과격한 자들”로 몰리는 것을 두려워하여 제도적 해방을 요구하기를 두려워하여 손쉬운 타협의 기교에 빠진다고 비판한다. 해방은 선언되었지만 과거의 유산인 제도가 유지되는 한 지속적인 억압과 착취가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보다 근본적인 제도적 회개가 요구되어야 하는 데, 손쉬운 타협에 머무르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흑인 해방의 영성
해방은 영성은 차별의 영성으로부터 해방된 하나님의 영성이다. 보잭은 남아프리카 해방신학은 성서에 샘을 둔 해방의 영성, 투쟁의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투쟁의 영성이란 정의와 자유에 대한 목마름에서 우러나는 것이며, 진정한 화해와 평등과 연대가 이루어지는 인간화된 사회를 향한 꿈을 실현해 나갈 힘을 가진 영성이다. 보잭이 마음에 그리고 있는 남아프리카의 해방신학은 무엇보다 먼저 개혁 신학의 줄기에 서 있는 해방신학이다. 보잭은 진정한 해방신학은 성서의 언어와 정치가들의 언어를 구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그는 신학을 위한 신학이나 정치적 수단이 된 신학이 아니라 진리를 위한 정치, 옳음을 선포하는 예언자적 영성을 가진 신학을 요구한다고 믿는다.
진리의 영성이 다시 솟구쳐 오를 때, 차별의 복음은 땅에 떨어지고, 자유와 평등과 인간 존엄의 신학이 다시 솟구쳐 오를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백인들의 신학이기 때문에 그릇된 것이 아니라, 차별을 조장해 온 백인 신학은 거짓 복음이기 때문이며, 정의와 자유를 잃어버린 신학이기 때문에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흑인 신학을 보잭이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흑인들의 신학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떨어진 진리를 다시 솟구치게 하는 자유와 정의의 영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흑인을 노예로 만들고 복종을 가르치며 열등함을 일러주던 신학은 더 이상 흑인 해방의 과제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흑인의 경험(the black experience)를 담은 신학을 요구한다. 사색과 관조의 신학이 아니라 실천적 신학, 백인들의 이상을 담은 신학이 아니라 고통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불러오는 신학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흑인 신학 안에서 종교적, 경제적, 심리적이며 문화적인 종속으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한 흑인들의 투쟁이 한 부분으로 자리 잡는다. 따라서 상황적일 수밖에 없다. 흑인들에게 필요한 신학은 남아프리카의 고유한 종교적 요구를 무시하고 외면했던 서구신학으로부터 벗어나 검은 대륙 흑인들의 종교적 비젼 속에 담겨 있었던 해방의 영성을 회복하고, 진정으로 “흑인성“을 받아들이는 신학이다. 보잭은 흑인신학이라는 신학적 용어가 처음 나왔던 맥락에서 백인의 인종차별로부터 흑인들을 해방시킴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백인과 흑인에게 안겨주는 보다 통전적인 ”흑인 인간성(black humanity)“을 제창한다.
보잭은 흑인 신학과 해방의 하나님, 가난한 자의 복음을 해명하면서 마침내 제임스 콘(James Cone)의 흑인 메시아사상을 수용한다. 흑인 메시아 사상이란 흑인들의 구체적 경험과 마주 닿아 있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흑인 신학적 이해를 말한다. 즉 흑인들의 고난의 자리에 임재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적 이해이다. 흑인성이란 그러므로 억압받고 가난한 존재를 이르는 메타포이다. 바로 이 흑인성의 자리에서 보잭은 흑인과 백인이 화해할 자리를 마련한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비로소 억압자와 피억압자 간의 화해가 가능하다고 그는 믿기 때문이다.

나오는 말
남미의 해방신학이 로만 가톨릭 교회가 지배세력의 이상에 맞추어 복음을 왜곡시켰던 자리에서 신학적 해방을 선언한 것이었다면, 남아프리카의 해방신학은 개신교 개혁주의 신학이 백인 식민지배자의 지배규범을 쫒아 백인들을 위한 신학을 형성하여 흑인들의 억압을 정당화해 온 자리에서 신학적 해방을 주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양자가 공히 지나간 신학의 왜곡과 한계를 비판하며 사회 윤리학적인 강한 실천적 해방을 요구한다. 어거스틴의 신학이 로마 제국주의와 결합하여 중세기 지배 세력을 대변하는 종교가 되었지만, 종교개혁을 통하여, 무수한 개혁적 실천을 통하여 해방의 동기들에 의하여 비판을 받아왔다. 로만 가톨릭교회를 향하여 개혁을 요구했던 바로 그 개혁 신학도 남아프리카에서는 스스로 그 개혁성을 상실하고 흑인들을 억압하는 신학으로 전락하여 인종차별과 분리 정책을 옹호하는 폐해를 낳았다.
보잭은 미국 유니온 신학교의 제임스 콘과 더불어 흑인 신학을 전개해 오면서 여러 가지 점에서 신학적 사상과 배경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칼빈적 개혁교회라는 그의 삶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켜온 개신교 해방신학자로서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 남 아프리카에서 개혁신학이 백인들의 이익관계에 매여 개혁의 영성을 잃고 백인들의 지배구조에 편승하며 이를 정당화해 온 오류를 날카롭게 지적하면서도 그는 개혁신학의 예언자적 영성을 굳게 믿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자유, 정의와 자유와 평등을 선포해 온 예언자적 영성, 그리고 억압 받아 온 가난한 흑인들의 경험에서 만난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는 흑인 해방신학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알렌 보잭의 해방신학을 생각하면서 일면 우리 한국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복음의 타락과 성서해석의 오류를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한국 교회 안에서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성서 해석의 오류, 지배 세력에 편승한 세속화된 정치신학,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보다 정치적 판단을 선행시키는 교회 정치가들, 그리고 성서를 해석하며 여성을 향한 차별과 비하를 서슴치 않는 성차별주의자들이 활개치는 교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제아무리 화려한 모양과 권위를 자랑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교회가 제한된 생명을 살 수 밖에 없는 인간들에 의하여 왜곡되는 것은 매우 그릇된 것이며, 언젠가는 결국 무너질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스로 그릇된 소명과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교회를 소유하고 점령한 듯 오만을 떠는 이들이라 할지라고 머지않아 그들의 생명은 이 땅에서 종식되고, 인간의 손과 사고와 해석에 의하여 포로가 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를 해방하는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는 다시 새로운 진리의 말씀이 솟구칠 것이기 때문이다. 해방신학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그릇된 인간의 편협하고 이익에 매인 해석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도구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이러한 해방 신학은 오늘도 흑인신학, 아시아신학, 여성신학, 천민신학의 이름으로, 잊혀지고 억압받아온 이들의 이름으로 옷 입고 우리를 다시 찾아오시는 그리스도의 자기 증거의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