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사 "사랑합니다..존경합니다"
- 문규현 신부 -
고 김대중 토마스 모어 전 대통령님.
죄스럽습니다. 어둡고 안타까운 나라 걱정 속에 먼 길 떠나시게 해서 죄스럽습니다. 님께서 평생 동안 온 몸 온 정신을 다해 쌓아올리신 민주주의와 인권, 민족화해라는 그 장엄하고 숭고한 역사를 탄탄하게 발전시켜 더 좋아진 나라, 긍지와 희망 속에 님을 보내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님께 빚진 역사, 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 한없이 많은 저희가 이 무겁고 암담한 현실 앞에서 다시 님께 의지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통하게 보내드리고, 파괴되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광장을 바라보며 저희 마음도 자근자근 부서지고 많이 아파서 다시 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님이 희망이었습니다. 조금만 더 오래 사시라, 조금만 더 저희와 함께 하며 이끌고 품어주시라 투정했습니다. 떠나실 시간이 오고 있음을 알면서도 가지 마시라 붙잡았고, 우리 스스로 해야 하는 일에도 어쩌면 좋겠냐고 님께 기댔습니다.
님께서는 결코 국민을 탓하고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변함없이 국민에 대한 신뢰, 연민과 사랑으로 가득하셨습니다. "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다시 보고 싶다, 답답하다, 슬프다'는 댓글을 볼 때 국민이 불쌍해서 눈물이 난다."고 일기에 적으셨습니다. 걷기조차 불편하고 힘든 몸, 목소리내기조차 어렵게 날로 쇠약해지면서도 마지막 시간까지 국민에 대한 충실함, 역사적 상황에 대한 통찰과 과제 풀기를 놓지 않으셨습니다.
‘몸은 늙고 병들었지만 힘닿는 데까지 헌신, 노력하겠다.’고 매일 정성을 다해 다짐하며 마지막 한 점 한 점의 기력조차 다 내놓고 바치신 님, 부족하고 미흡하기 짝이 없는 저희를 그래도 믿으며 “후배님들, 뒷일을 잘 부탁합니다.” 하고 큰소리로 웃으신 님,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저는 님께서 대통령으로 재임 중이시던 1998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여러 신부님들과 함께 방북하였다가 돌아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투옥된 바 있습니다. 당시 방북은 1989년 8월 당시, 평양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고 있던 임수경 학생과 동행하여 남으로 내려오도록 사제단이 저를 파견한지 10주년 됨을 기념한 것이었습니다. 정부당국이 사제단 방북을 동의해주어 참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서울로 귀환한 뒤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저는 구속되었습니다. 당시 보수세력을 의식하고 달래기 위한 처사였을 겁니다. 아픈 기억입니다.
그러나 그 쓰린 사건조차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는 민족의 역사를 위해 바쳐진 작은 희생제물이었습니다. 님께서 남북정상회담을 결단하시고 마침내 남과 북 정상이 평양에서 포옹하던 2000년 6월의 역사적 순간, 6.15 남북공동선언문이 발표되던 그날 그 때, 저는 제 상처와 아픔을 다 치유했습니다.
님께선 민주주의와 민족화해, 민족통일의 큰 지도자이셨으나, 속내를 보면 우리 모두에게 참된 인생의 안내자요 다정한 스승이셨습니다. 무엇보다 님께선 진정으로 참된 신앙인, 하느님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산 참 제자이셨습니다. ‘납치, 사형 언도, 투옥, 감시, 도청 등 수없는 박해 속에서도 역사와 국민을 믿고’자 했던 힘의 원천은, ‘앞으로도 생이 있는 한 길을 갈 것이다.’라며 신념과 생명력으로 가득할 수 있었던 그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 뜻에 대한 한결 같은 충직함이었습니다.
‘긴 인생이었다. 나는 일생을 예수님의 눌린 자들을 위해 헌신하라는 교훈을 받 들고 살아왔다.’-2009년 1월 15일 일기.
님께서는 이 시대 참 신앙인의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한 순교자의 길, 순교영성을 고스란히 온전한 제자직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번듯한 말과 화려한 성당 안에 갇힌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닌, 억눌리고 고통받는 이들, 서민들, 눈물짓는 이들 현장에 머무신 예수님의 길을 끝까지 잊지 않고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님의 2009년 1월 6일자 일기를 읽습니다.
‘오늘은 나의 85회 생일이다. 돌아보면 파란만장의 일생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투쟁한 일생이었고,
경제를 살리고 남북 화해의 길을 여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일생이었다.
내가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
납치, 사형 언도, 투옥, 감시, 도청, 가택연금, 망명..., 개인의 삶에서든, 어느 역사에서든 그 무엇 하나 용납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허나 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겪으셨으니 이 나라 역사에 그 모든 인장을 자기 삶에 점점이 다 새긴 사람이 님 말고 누가 있습니까. 그 험한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도 한 점 후회 없이 이토록 담담하고 아름답게 생을 정리하는 이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고 김대중 토마스 모어 전 대통령님.
지난 6월 11일, 63빌딩에서 진행된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연설에서 하신 말씀을 또한 기억하고 기억하겠습니다.
"우리나라 도처에서 이명박 정권에 대해서 민주주의를 역행시키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은 독재자가 나왔을 때 반드시 이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지금, 그토록 안타까워하시던 남북대결과 단절이라는 상황조차 님의 서거 속에 다시 조금씩 풀리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남북 간에 하늘 길, 땅 길, 마음 길이 다시 열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야만적인 처사다. 이 추운 겨울에 쫓겨나는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 하신 용산참사 희생자 가족들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여전히 의연하게 진실을 찾기 위한 치열한 싸움의 길에 있습니다. 그들도 결국 승리할 것입니다. 님께서 언제나 믿어온 국민의 힘은 바로 이런 것인가 봅니다.
떠나시는 마지막 순간조차 국민과 민족의 운명을 안쓰러워하며 나아가야할 방향을 안내하시는 님. 님과 함께 한 정의와 평화의 여정, 화해와 통일의 역사는 참으로 행복하고 위대한 시간이었습니다. 님과 같은 지도자를 만나 저 험한 세월을 이겨온 저희 인생도 아름다웠노라고, 발전하는 역사 속에 함께 했음도 크나큰 자부심이라고 고백합니다.
님께서 온몸으로 일구고 온몸으로 가르치신 인생, 역사, 사랑, 헌신, 이제 저희 몫입니다.
후세들은 님에게서 배웁니다. 일기에 적으신 것처럼,
인생은 얼마만큼 오래 살았느냐가 문제가 아님을.
얼마만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았느냐가 문제임을.
그것은 얼마만큼 이웃을 위해서, 그것도 고통 받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살았느냐가 문제라는 것을. - 2009년 1월 14일.
고 김대중 토마스 모어 전 대통령님.
더 이상 바랄 것 없이 마지막까지 국민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이제 한 가닥 연민과 눈물의 무게조차 다 내려놓으시고 편안하십시오. 남은 역사적 과제들일랑 용기를 내어 예수님 뜻을 따르는 이들, 정의와 평화의 사도들에게 맡기고 주님 품안에서 영원한 평화와 안식에 드십시오.
‘꽃을 많이 봤으면 좋겠다.’ 하셨으니, 이제 민족의 혼, 민족의 정신이 되시어 남과 북 훨훨 자유롭게 다니시며 금수강산 온 산천 진달래랑 갖은 꽃 모두 누리십시오. 진달래 영산홍 지천일 때, 님을 보는 듯 활짝 반기겠습니다. 님의 영원한 반려자 이희호 여사의 연서를 빌어 저희도 님께 마지막 인사드립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2009년 8월 22일 문규현 신부 드림
Tuesday, August 25, 2009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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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없다
창비주간논평. 8/12/2009 9:33:52 AM Comments (0)
조광희 / 영화제작자
신문을 읽다보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프랑스어 표현을 주제로 한 칼럼들을 1년에 평균 3번 정도는 접하게 된다. 이 표현은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른바 사회지도층에게는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국민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그 예로는 각종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전하여 숨진 귀족이나 고위층 자제들의 이야기가 단골 메뉴처럼 거론된다.
이 말을 처음 들은 것은 대학신입생 설명회 때였다. 어느 교수님이 칠판에 처음 보는 알파벳을 적으면서 "여러분들은 사회에서 선택된 사람들이니 사회에 대해 더 많은 책임을 지고, 더 많이 기여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씀하셨던 것이다. 교수님이 전수해준 그 말은 이상에 가득 찬 어린 학생들에게 각별한 감정을 자아냈다. 나 또한 그것을 자긍심과 책임감이 뒤섞인 묘한 느낌으로 받아들였는데, 생각해보면 자극받은 선민의식 때문에 상기되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숭고함으로 포장된 그 감정에 무언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어딘지 석연찮은 선민의식, 그 속에 숨은 욕망과 권력
그후 나름대로 세파를 겪으면서 그 표현에 내포된 불순한 점에 대하여 좀더 자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 표현은 내게 대학입시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학생이 언론 인터뷰에서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법무부장관이 '불법시위나 파업을 엄단하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공허한 수사로 여겨진다.
물론 나는 이 표현의 의미를 진실하게 체현하고 있는 우리시대의 많은 고결한 인물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예외적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레토릭의 이면에는 집요하고 끈질긴 사회적 욕망과 권력관계가 은폐되어 있다. 이 표현의 수면 아래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과연 무엇일까.
일본의 비평가로서 사상가의 반열에 근접한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주장 중에서 인상적인 것은 근대국가를 '자본=국가=네이션'라는 삼위일체의 공식에 의하여 파악하는 것이다. 그의 논지는 자본, 국가, 네이션의 삼위일체가 완성됨으로써 근대국가가 형성되었고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중에서 '네이션'은 특히 감정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다. 월드컵 경기에서 자기 나라를 응원하는 관중들의 놀라운 열기를 보라. 그 열정은 그들이 속해 있는 네이션, 즉 국민국가에 대한 공통의 소속감에 의하여 분출되고 있다. 깊이 성찰해보면 그러한 태도는 매우 비논리적이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집요하게 작동되고 있는 것은 어떤 이유가 있으며 그것은 비논리적이라는 지적만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근대국가와 신분제 떠받치는 '교환의 양식'
한편 자본뿐만 아니라 국가나 네이션도 넓은 의미에서 경제적인 차원에 속해 있다고 주장하는 코오진은 이 세가지를 '교환의 양식'에 의하여 구별하고 있다. 즉 자본제가 '상품의 교환'에 의하여 특징지어진다면 국가는 '일방적 취득과 재분배라는 교환'에 의하여 특징지어지고 네이션은 '호수적(互酬的, 호혜적) 교환'에 의하여 특징지어진다(일상생활에서는 듣기 어려운 '호수적 교환'이라는 표현은 예를 들어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것, 부모가 아이를 댓가 없이 양육하는 것 등을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그리고 이 세가지 교환양식은 근대국가에서 서로 보완적으로 작동된다. 가령, 각자가 경제적으로 자유롭게 행동한 결과가 경제적인 불평등과 계급적 대립으로 귀결된다면, 국민의 상호부조적인 감정에 의해 그것을 완화하고, 국가가 자본의 방종을 규제하며 부를 재분배함으로써 근대국가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코오진이 말한 호수적 교환의 일면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신분제도가 유지되고 있는 사회에서 지배하는 자가 지배되는 자로부터 복종에 대한 동의를 얻기 위하여 모범을 보이려는 동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으로는 갸륵한 일이지만 사회적으로 생각하면 결국 신분질서를 공고히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지배자가 복종의 동의를 얻는 수단
어느 불평등한 사회든 지배하는 자가 힘으로만 씨스템을 유지하는 것은 버겁다. 이때 소수의 지배하는 자가 다수의 지배되는 자를 가장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은 그 지배가 정당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강자이기 때문에 지배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안하다. 그것은 지배되는 자가 힘이 더 세지면 뒤집을 수도 있다는 논리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보다 좋은 방법은 지배하는 자가 공동체를 위하여 헌신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그것만큼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을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심리적 메커니즘은 그런 것이다. 그런데 노예제 사회도 아니고 봉건제 사회도 아니고 모두가 평등하다는 이 민주공화국에서 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표현이 반복되어 소환되는 것일까. 그것은 이 사회가 사람들의 집단적 무의식 수준에서는 여전히 신분사회이며, 그 부당성과 불안정성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통해 보완되어야 제대로 작동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므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것은 좋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반드시 물어보아야 한다. 혹시 고귀한 신분을 아예 포기하고 낮은 곳으로 내려와 기꺼이 우리와 같아질 용의가 있느냐고.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존경받을 만하다. 하지만 만일 그들이 우리를 위해 헌신할 수는 있지만, 우리와 같아질 생각은 없다면 그들이 말하고 행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고차원의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커녕...
이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표현과 기제가 수상한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이끌어주는 이른바 '고귀한 신분'을 가지신 분들이 얼마나 자기희생을 하는지, 얼마나 높은 도덕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시비를 거는 내 자신이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대통령께서 재산을 헌납했지만 천하를 얻기 위한 건곤일척의 승부를 뒷마무리하는 것일 뿐이고, 어느 재벌의 사회공헌 약속은 형벌을 적게 받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희생과 헌신은 더 큰 것을 얻기 위하여 작은 것을 내놓아 마침내 자기가 가질 수 있는 것의 최대치를 얻기 위한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
정부의 고위직에 임명되었거나 임명될 뻔했던 사람들의 투기와 범법으로 점철된 삶의 궤적을 일일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걸어온 길은 저잣거리의 평범한 이들보다 낫기는커녕 일신을 위하여 각종 편법을 실천한 결과일 뿐이다. 그들은 고귀한 존재가 아니라 이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승리한 맹수이자 생존의 명수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들의 천국에 사는 그들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이 불평등한 세계에서 헤게모니를 유지하려는 궁여지책일 뿐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에게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여우의 지혜조차 없다.
그런데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지배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천만다행이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견고한 신분질서 속에서 그저 강자일 뿐인 그들을 존경까지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보다 끔찍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존경받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은 반대로 이 사회가 결국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희망에 찬 전망으로 이어진다.
공화국 시민의 의무와 법이나 잘 지켜라
대한민국은 누가 무어라든 민주공화국이다. 만일 아직 아니라면 언젠가 반드시 민주공화국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별로 그럴 생각도 없는 그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간청하지 말자. 그들은 그런 수준이 못된다. 대신에 그들에게 누구나 지키는 공화국 시민으로서의 의무나 제대로 하라고 말하자. 법이나 제대로 지키라고 요구하자. 살기 위해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을 방패로 내리찍지 말라고 외치자. 그리고 자원과 기회와 미디어를 독점하지 못하게 저항하자.
그러고 나서도 당신에게 마음의 여력이 있다면, 공화국 시민의 법과 의무도 준수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평범한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허위의식에 빠져 있는 저들을 차라리 불쌍하게 여기자.
2009.8.12 ⓒ 조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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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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