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une 19, 2012

나가사키 카톨릭 순교지 여행







34일의 나가사키 여행을 다녀왔다. 16세기 가톨릭교회의 선교지였던 일본은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외부를 향해 개방했다. 해상을 통한 교역은 활발했다. 상업용 해상로를 따라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들이 선교사로 유입되었고, 일본인들은 선교사들의 삶과 신앙을 보고 그들을 따라 하나님 신앙을 가지기 시작했다. 일본 문화 구조 속에서 가톨릭 신앙을 가진 이들이 갈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황제숭배와 신토이즘때문이었다. 신토이즘은 일본식으로 토착화된 정치와 종교가 야합한 권력구조다. 서양 종교를 가진 이들은 권력이 요구하는 범주안에서 이해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종교가 정치와 만나면 두 가지 사회 현상중 하나가 나타난다. 권력종교로 살아남든지 아니면 박해를 받는 것이다. 정치와 종교가 잘 만나면 정치는 종교를 이용하고, 종교는 정치를 이용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낸다. 로마제국 안에서 기독교가 취했던 방식이었다. 그러나 정치와 종교가 잘 만나기 이전에는 충돌이 일어났다. 이런 충돌이 일어날 경우 언제나 약자 편에 선 이들에게서 피의 역사가 뒤따랐다. 권력에 길들여지지 않는 종교일수록 피를 많이 흘렸다. 로마 제국 안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던 초기 기독교 역사가 순교의 역사였던 것이 그 사례라면, 어거스틴 이후의 기독교는 오히려 비기독교 세계를 박해하는 권력종교가 되었다. 종교개혁자들도 자신과 견해가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을 죽이거나 추방하는 일을 당연시 했다. 
 
16세기에서 비롯하여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에서의 가톨릭교회 선교는 억압과 핍박의 대상이었다. 교토에서 사로잡힌 천주교인들을 850 킬로나 떨어진 나가사키까지 끌고 와 참형에 처한 역사를 들었을 때 나는 인간의 잔인함에 대하여 탄식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톨릭 교회가 이교도들이나 악령에 사로잡혔다고 간주했던 이들을 고문하고 죽이던 방식과 유사했다. 그들은 인간에게 행할 수 있는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고문을 가하고, 잔인하게 처형했기 때문이다. 낮선 아시아 땅에 찾아와 죽음을 당했던 선교사들, 그리고 그들이 전해 준 새로운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던 많은 순교자들의 죽음이 숙연함을 주었다. 종교는 종교의 이름으로 죽임을 당한 이들에 대한 기억의 제의를 가지지만, 종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이들에 대한 기억은 역사 속에서 소리없이 지워지곤 했다. 
 
그렇게 많은 순교의 피를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의 기독교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소수의 사람들만 기독교인일 뿐이다. 주일을 맞아 찾아갔던 교회에는 노인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래된 낡은 교회에 와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한국교회에 비하여 일본교회는 일본에서 권력종교로서 자리 잡지 못했다. 일본의 천황체제와 결탁한 신토이즘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본에서는 종교권력구조가 천황체제를 부정하는 곳에서 형성될 수 없었기 때문이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번영신학도 자리 잡지 못했는데 이 또한 신토이즘이 히노데이즘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대체효과가 없었다고나 할까. 그에 반해 우리 나라의 토착 종교들은 정치권력과의 밀접도가 매우 약했다. 개신교가 정치권력과 밀착될 수 있는 좋은 조건들이 있었던 셈이다.
 
순교자들이 죽임을 당했던 자리는 종교들에 의하여 성지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은 신앙으로 치장되고 미화되어 선명한 영웅적 신앙으로 투사되곤 한다. 이런 문화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생명보다는 죽음을 예찬하는 종교가 될 수 있다. 어느 신학자의 주장대로 죽음을 사랑하는 종교(necrophilia religion). 그런 느낌이 들어서인지 우울했다. 권력과 종교가 조우하여 일어난 박해가 억압자와 박해자는 무죄방면 하듯 흘려보내고 죽임을 당한 이들에 대한 기억을 담아 신앙의 영웅으로 흠모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해자는 없고, 고난을 겪은 피해자도 없고, 다만 제도권 종교가 칭송하는 신앙의 영웅들만 남은 듯 하였다. 생사를 넘나드는 온갖 고뇌와 고통 속에서 비극적으로 죽어간 이들에게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들은 현세에 대한 미련을 포기한 이들이다. 그들은 초월적 신을 위하여 결혼도 하지 않고, 소유도 가지지 않으며, 더구나 권력의지도 포기한 이들이다. 그러므로 박해와 순교의 순간이 다가오면 신명(神命)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평범한 신자들은 그들의 모범을 보고 순교의 길을 뒤따랐을 것이다. 개신교 성직자들은 이런 가톨릭교회의 타세계적, 혹은 세계를 초월하는 성격의 신앙을 비판해 왔다. 그 대신 그들은 세속적인 삶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삶을 누리며 살아간다. 이들은 권력 투쟁도 하고, 살아남기 위하여 동류 교회와 경쟁도 한다. 승리를 얻기 위하여 상대방의 몰락을 의도하기도 한다. 개신교 전통의 세속화된 가치체계 안에서 내세에 대한 희망만을 남기고 자신의 육신을 내어주는 순교의 길을 걷기에는 한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사키는 19458911시경 원폭이 투하되었던 곳이다. 우리 일행은 원폭 현장과 평화공원을 찾았다. 비가 내리는 평화공원에는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한 편으로는 수평선을 가리키는 팔의 모양을 한 거대한 남성 상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하늘과 주변, 그리고 그 폭탄에 의하여 죽어간 이들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인류 역사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원자폭탄의 위력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기념관을 가지고 있다. 나가사키 상공 약 500미터 즈음에서 터진 원자폭탄은 순식간에 나가사키 중심부를 날려 버렸고, 수만의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어머니의 젓을 물고 있었던 아기부터 일상으로 밥을 짓던 아낙까지 순식간에 죽임을 당했다. 그들은 죽어야 할 아무런 이유없이 죽임을 당했다. 제국주의의 망령에 자식들을 전선에 보내고, 서구 제국주의의 원자 폭탄에 의하여 영문없이 죽임을 당했다.  
 
나가사키 여정은 내게 무고한 이들의 죽음, 그리고 그들에게 죽음을 가져온 이들에 대한 망각을 일깨워 주었다. 여행 내내 줄기차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나는 매우 우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기록들을 살펴보며 나가사키 주변을 다녔다. 나가사키 중심부, 나가사키 항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는 외국인으로서 무역을 하던 한 유럽남성과 사랑을 나누었던 게이샤에 대한 기억을 남기고 있는 동산이 있었다. 푸치니의 오페라 쭈쭈(나비)부인의 작품상 무대가 되었던 곳이 바로 나가사키다. 서양 남자를 사랑했던 한 게이샤의 낭만적 사랑은 끝없는 기다림 끝에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나타난 사람으로 인하여 비극적으로 막을 내린다.  일편단심 기다림을 아는 동양여인의 사랑에 비하여 이미 그런 사랑에 어울리지 않는 서양남자의 사랑은 여인에게는 비극의 결말을 예고할 수 밖에 없었다. 서구를 향하여 일찌기 문호를 개방하여 서양문물을 제일 많이 받아들였던, 그리고 서양 종교를 수용했던 바로 그 자리가 서양인들이 만든 원자폭탄에 의하여 피폭된 자리가 되었다는 것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나가사키 서단 소토메 언덕에는 일본 천주교 박해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 침묵의 작가 엔도 슈샤쿠 문학관이 있다. 신학교 시절 읽었던 그 책에서 나는 예수의 초상을 밟고 살아남는 한 연약한 인간을 그리고 있는 슈샤쿠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내세와 초월을 위하여 기꺼이 현세를 내던질 수 있으리라 스스로 여겼던 로드리고 신부, 그리고 그 신부 곁을 맴돌면서 현세의 구원과 내세의 구원을 교차하며 희구하면서도 배교를 서슴지 않는 기치지로, 배교를 하면서도 살아남는 인간을 향하여 나를 밟으라“ ”밟아도 된다고 하는 예수초상의 음성이 내게 남아 있었다. 수난자들에게 주어진 내재적 그리스도론은 배교를 침묵으로 감싸주는 예수를 이해하게 했던 작품이다.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소토메 앞 바다의 정경은 아름다웠다. 그 바다를 바라보던 슈샤쿠는 주여 인간은 이리도 슬픈데 왜 바다는 저리도 푸르른 것입니까?“라는 글을 침묵 시비에 남기고 있었다.
 
그렇다. 신은 침묵하신다. 인간의 가슴이 아프고 절절해도 하나님의 침묵은 계속된다. 아우슈비츠에서도, 나가사키에서도 침묵하셨다.  수난의 계절에도 순교의 자리에서도 신은 침묵하셨다. 고난과 수난의 계절에 일본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신의 침묵을 배웠다. 그러나 고난과 죽임이 없는 곳에서 인간들은 신을 대리하여 신의 소리를 발한다. 거기서 신은 침묵하는 신이 아니다. 거기에는 너무나 말이 많은 신, 사람에 의하여 강요당한 언어를 내뿜는 우상만 존재한다. 아마도 우리 삶의 깊은 고뇌의 순간, 우리 죽음의 순간에서도 신은 침묵할 것이다. 우리 일행 중 침묵을 배운 일본 그리스도인들에게 회개를 요구하는 소리도 나왔다. 나는 그의 요구에 동의할 수 없었다. 공항으로 돌아오면서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순교지 숙연한 죽음의 자리에서 계속되던 신의 침묵에 대한 우리 내면의 물음은 각자의 가슴 속에 가라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