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pril 19, 2008

Prophetic Spirituality



<청암논단 원고>

행동하는 신앙에 앞서 우리는 생각하는 신앙인이 먼저 되어야 한다. 좋은 신자일수록 많은 경우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거의 맹목적인 신뢰를 가진다. 신앙은 이성적 판단 영역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근거를 가진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 안에 악이 무성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지나간 기독교 역사를 되돌아보면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행한 악들이 적지 않다. 칼빈은 샴벨 형장에서 당대의 존경받던 인문학자 세르베투스의 처형에 가담했고, 청교도들은 지혜로운 여성들을 마녀로 몰아 화형에 처했다. 그런가하면 요즈음에도 자신의 신앙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사회적으로 처형하려드는 이단시비도 계속되고 있다. 성서에 담겨진 주장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여 이를 실천하려는 이들 중에는 성서 속에 담긴 배타주의와 차별주의, 그리고 사형을 가하라는 명령을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동성애자나 이교도들을 향한 성서적 저주와 심판의 명령들은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존엄성을 부인하게 하는 오류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는 오래 동안 사형 제도를 지지하고 찬성해 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기독교 신앙이 역사적으로 부정적 기능만을 수행해 온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헌신적이며 자기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게 했다. 악과 폭력이 범람하는 사회에서 선과 정의를 실천하며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지켜온 기독교의 역할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사랑과 희생, 봉사와 헌신, 그리고 정의와 평화를 위한 기여에 못지않게 미움과 이기, 착취와 억압의 도구가 되기도 했다. 기독교는 오랜 동안 노예제도를 존속시키는 데 합의했고, 여성을 차별하는 문화를 지속시켰으며, 타종교인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습성을 키워왔다. 예수의 이름으로만 이라는 배타적 구원론은 기독교인들의 구원이외에 다른 종교와 문화의 가치에 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기독교 우월주의적인 사고는 정치 경제적으로 지배와 정복과 승리주의를 당연시했다. 그러므로 이런 악습을 신앙의 이름으로 반복하려드는 행동하는 신앙은 매우 위험할 뿐 아니라 반기독교적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들의 기독교인 됨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Christian identity)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는 신앙인이 먼저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행동하는 신앙인의 존재에 대한 해명은 그 이후의 과제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오늘의 신앙인들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를 많은 부분 상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예수의 가르침에 나타난 근본적인 요소들의 상실이다. 몇 가지만 들어서 이러한 주장의 근거를 밝혀보자. 첫째, 기독교 사상은 이 땅에 궁극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 사상에서 배태되었다. 예수의 복음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 나라였고, 그 하나님 나라는 당시의 로마 제국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어거스틴 이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은 사라지고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어 기독교 신앙은 지극히 세속화되었다. 여기서 상실한 것은 이 땅의 것들의 본질이 하나님나라의 영원성에 비추어 잠정적인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나님 나라 사상이 증발한 자리에서 현실적인 가치들이 중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앙 안에 로마의 제국주의적인 요소가 유입되었다. 제국주의가 무력을 앞세운 폭력 문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듯이 기독교도 제국의 폭력에 의하여 보호받고, 그 폭력성을 통하여 선교하는 정복주의적 신앙이 자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강하고 능한 기독교 신앙이 고취되었고, 고난과 희생을 수납하는 신앙적 태도는 약화되기 시작했다. 교회 안에 강하고 능한 자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으면서 성직자들은 강한 지배자들과의 관계 유지를 중시하게 되었고, 기독교 본유의 차별 없는 사랑의 과제는 특정한 차원에만 적용되었다. 즉 이교도들에 대한 저주와 심판과 살상이 정당화되는 한 편 기독교인들 간에도 서열과 계급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기독교 스스로 사랑의 과제를 제한하고 축소함으로써 미움과 폭력과 전쟁의 역사를 벌려왔던 것이다.

오늘날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론이 기독교 신학안과 밖에서 일어나고 있다. 기독교 제국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약한 나라들을 억압하고 착취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한 억압과 착취행위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해석해 온 기독교 신앙은 오늘날 무수한 비판에 직면해 있다. 그런데도 이런 방향으로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려 한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방향을 수정하려면 우리는 교리적 신앙을 넘어서서 예수에 대한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예수는 사랑과 평화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예수가 우리에게 일러준 하나님 나라는 사랑과 평화의 나라다. 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우리는 이 땅을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것이 옳다. 하지만 제국주의는 그 본질이 사랑과 평화가 아니라 폭력과 권력에 의한 지배를 통해 제국의 이익과 유익을 얻기 위하여 약소국들을 희생시키는 일을 당연시 해왔다. 로마 제국이나, 일본제국주의나, 중국대륙, 미국제국주의의 제국성을 보면 그 우리는 그 행적을 경험했을 뿐 아니라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제국주의적인 것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서구 기독교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콜롬부스가 아메리카에 상륙한 1492년 이후 전체 기독교 세계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를 식민지화했던 전력을 가지고 있다. 식민지배의 앞잡이가 되어 온 서구 제국의 지도자들이나 병사들이 한결같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끊임없는 활력을 불어 넣어 주었던 이들이 바로 기독교 목사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사랑과 평화와 의를 행하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나그네 처럼 이 땅의 것에 마음을 모두 빼앗기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성서적 가르침보다는 식민 지배세력을 향하여 기독교는 자신들만의 부와 권력과 성공의 윤리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1945년 이후 우리는 노골적인 정치적 식민 세력을 찾기가 쉽지는 않다. 공간의 개념을 뛰어넘어 식민주의는 문화, 경제, 정치적 지배 영역으로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에게 학습받은 오늘의 기독교인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가치는 서구 식민지배자들의 종교가 남긴 바 이 땅에 집착하며 부와 성공과 정복의 윤리를 반복하고 데에서 두드러진다. 그 결과 우리는 사랑과 평화의 길보다는 간혹 종교의 이름으로 미움과 폭력의 길을 묵시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자랑스럽게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들이 되고 있다. 하나님 나라를 여는 길이 아니라 닫는 길이 된 셈이다.

둘째,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상을 넘어서서 예수의 제자들이 받았던 가르침은 단순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단순한 삶이란 세상의 물질적 가치에서 안정과 평화를 얻는 삶과는 다른 묵상과 명상, 그리고 평화와 사랑의 길을 걸으며 사치와 안일과 쾌락에 마음을 두지 않고 정결한 삶을 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는 우리에게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을 길을 걷기를 요구했고, 청빈한 삶을 가르쳤다. 이런 삶의 본질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속하는 세계는 이 땅이 아니므로 이 땅의 가치에 궁극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에 기초한다. 예수가 그렇게 살았고, 그의 제자들이 그렇게 살았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보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려는 욕망을 신앙으로 정당화함으로써 고도의 경쟁사회를 만들어가거나 유발시키는 데 참여하고 있다. 단순한 삶에서의 경쟁이 아니라 더 많이 가지고 소유하며, 더 누리기 위하여 모두 다 질주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어느 목사의 “저 윗 자리는 비어 있다!”는 설교제목에서 보듯이 곧 최상의 지위와 권력을 향유하기 위하여 신앙의 힘을 사용하라는 메시지가 남발되고 있다. 기독교인이 사회적 지위를 독차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많은 기독교인들이 장로 대통령을 연호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섬김의 종교를 가르친 예수와는 달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배의 종교가 되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런 태도는 두 가지 심각한 기독교 신앙의 위기를 불러온다. 무엇보다 이런 류의 성공과 승리를 지향한 신앙적 지침은 우리가 이 땅에 나그네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그리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과 승리에 집착하여 정신을 팔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 대가는 권력과 부유함을 통한 쾌락이다. 예수는 권력과 부유함을 칭송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망각한 기독교가 되어 교회 안에 권력과 부유함을 가진 이들이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고, 진실한 신앙고백은 구축되고 만다. 그 결과 예언자적 메시지가 증발하거나 침묵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참된 예언적 메시지를 전하는 이들을 박해하고 내어 모는 기독교가 될 수도 있다. 이런 행위에 참여하면서 행동하는 신앙인이라 스스로 여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십자군 전쟁에 나서는 이들은 자신의 목숨이라도 기꺼이 바치겠다는 결연한 각오를 앞세우고 결과적으로 비기독교도들을 살육하는 살육자들이 되고 말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맹목적 신앙을 가르쳐온 결과다. 그리고 맹목적인 신자가 되어 상대 속에서 인간의 존엄함을 보지 못하는 무서운 기독교도들이 된 것이다. 단순한 삶이란 경멸의 대상이 되고,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이들에 대한 예찬이 이어지는 세속집단으로 자리를 잡으면 집단 이기가 꽃피기 시작한다.

셋째, 세속적 성공주의와 승리주의를 표방하면서도 많은 이들이 위선적으로 영적구원을 기대한다. 영적 구원이란 이 세상을 떠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에 들이신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일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열려 있는 것이지 폭력과 미움을 동원하고, 이 세상에서 즐길 것을 다 즐기면서 살아간 이들에게 보험처럼 약속된 것은 아니다. 간혹 세속적 가치들을 유입시켜 세속화된 교회일수록 영성적 구원론을 강화시킴으로써 그 세속성을 가리고 기독교 신앙을 영적인 것으로만 대치시키는 경향이 짙다. 참된 영성이란 다름 아닌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삶을 따라 사는 길이지 교리적으로 명문화된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이 오늘날 지극히 세속적인 가치로 범벅이 된 혼탁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간다. 신앙을 통한 정화가 일어나지 않는 교회들이 한 둘이 아니다. 무수한 반목과 질시와 다툼으로 가득한 교회가 바로 이런 현장임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유리된 영성이란 허구와 거짓이며 위선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이들은 하나님 나라가 권력과 물욕으로 충만한 세계가 아니라는 것은 최소한 알아야 한다.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가 없어서 탐욕과 오만을 부리고, 자기중심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복음에 의하여 구원을 받아야 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들이 탐욕과 권력과 욕망과 야망으로 뭉쳐져 성서의 예수를 왜곡하면서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하나님 신앙을 수단으로 삼는다면 거기에는 희망이 없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면서 다른 이의 구원을 위한 봉사와 헌신을 주장한다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이런 이들에 의하며 하나님의 선교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사실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경우가 될 것이다. 이런 경우를 예측하였는지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이런 사실을 미리 우리에게 일러주셨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신앙을 가진 행동하는 신앙인은 교리주의에서 구원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서 구원의 길을 찾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개신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가톨릭 교회의 위선과 교리를 깨뜨리고 하나님 말씀을 신자들에게 안겨주며 직접적인 하나님 신앙과 체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 온 것이다.

넷째, 신앙이 세속화되면 행동하는 신앙은 역선교적인 기능을 불러온다. 세속화된 신앙인들의 행태로 인하여 기독교 신앙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믿을 가치가 없는 종교로 오인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모순은 중세기의 타락상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데 있다. 교회가 사고 팔리며, 성직이 세습되고, 교회가 사유화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 땅의 것들에 대한 집착이 평신도들 차원을 넘어서서 성직자들의 의식세계까지 점령하고 있다는 증거다. 교단적 정치 세력을 가진 이들이 연대하여 카르텔을 형성하고 그릇된 교회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을 봉쇄하고, 심지어 예언자적 소명을 수행하는 이들을 박해하기도 한다. 교회의 수장들이 된 이들은 대부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꾼들이다. 그들은 돈으로 표를 사며 파벌을 만들어 권력을 나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나 있는지 나는 그들을 의심한다.

부유하고 안락한 삶에 익숙한 성직자들은 그런 안락한 자리를 떠날 용기가 결여된 이들이 된지 오래된 이들이다. 동시에 그들은 그들을 거스르는 예언자의 소리를 침묵시키는 세력에 가담하고 있다. 그들은 교회를 사유화하고 지배하기 위하여 비성서적인 수단과 방법들을 동원함으로써 하나님의 교회가 지녀야 할 고귀한 영성 그 자체를 붕괴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 그들도 초라한 죽엄이 되어 사라지고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사라질 들의 풀과 같은 존재들인 까닭이다. 예수는 구약의 율법을 갱신하면서도 예언자적 전통을 소중히 따라 산 사람이었다. 그는 세속주의를 옷입고 권력 다툼을 하던 제사장들과는 소원한 삶을 살았고 마침내 그들의 음모에 걸려 처형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이 시대의 예언자들은 추방과 유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도 성문 밖으로 추방을 당했고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의 적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으며, 선교의 장애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타락에서 오고 있다.

비록 일수 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지만 성직자가 수억원짜리 최고급 차를 타고 다니며 수백억 원대의 재산을 보유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인친척에게 교회를 물려주며 교회에 대한 지배권을 마지막까지 쥐려는 이들은 이 시대의 거짓 선지자다. 두렵고 무서운 것은 성직자들이 모두 그들을 부러워하며 본받으려 한다는 데 있다. 비록 그들의 입술은 매끄러울지라도 그들은 예수를 파는 자들이요, 복음을 거역하는 자들이며, 기독교 안에 있는 무신론자들이다. 비록 우리 스스로 온전하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이런 자들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 이들은 하나님 보다 자신의 욕망을 더 믿는 자들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런 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 21-23) 거룩한 것을 속된 것과 바꾸는 물신주의에 그들의 영혼을 판 까닭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영성 위기의 시대를 꿰뚫고 나가야 할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이 돌파의 길은 다름 아니라 성서적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며, 예언자적 혼을 되찾는 일이다. 시대정신이 타락하여 하나님과 세상을 구별하지 못하게 만들 때 보다 선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준 이들이 바로 예언자들이다. 이들은 제사장 계급들과는 달리 정치적 이해관계나 물질적 탐욕을 초극하며 살아온 영성의 소유자들이며, 자신의 안락에 연연해하지 않는 이들이었다. 자신의 삶의 안락을 돌볼 줄 모르는 이들이었으므로, 하물며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 만연한 제자식의 안락한 삶을 보장하기 위하여 교회 물려주기를 시도하는 이들과 나란히 천박한 정신의 나누는 이들이 아니었다. 이 세상의 모든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자유로운 정신을 소유한 자들만이 하나님 나라의 메신저가 될 수 있다는 적나라한 사실을 보여준 이들이 바로 예언자다.

예언자적 영성이 결여된 세계에서는 타협과 모략과 중상과 시비가 끝없이 일어나거나 자발적 복종과 침묵이 이어진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영성이 사라진 하나님의 교회는 세속화되어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로 존재하지 않게 된다. 십자가 아래에서 제비뽑기를 하며 예수의 걷옷을 나누던 이들과 다를 바 없이 하나님앞에 드려진 헌물을 나누고 가지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자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언자적 영성을 결여한 행동하는 영성이란 자칫 잘못하면 폭력적이고, 집단 이기적이며, 탐욕과 권력싸움에 동원된 영성일 수도 있다. 이런 영성에 고무받은 이들은 덕과 도덕적 판단과 법적 질서조차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들이 지닌 신앙적 영성이 이 새상에서 가장 우월하다고 교육을 받은 까닭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된 영성은 결국 아전인수적 신앙의 해석을 불러와 교회를 집단 패거리 싸움의 아수라장으로 만들기도 한다. 교회가 영성의 왜곡을 통하여 세속적인 세상의 상식도 지키지 못하는 지경이 된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다른 것도 아니고 새로운 것도 아니다. 예수의 평화의 영성, 사랑의 영성, 이 땅의 주인이 아니라 초대받은 손님처럼,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던 나그네처럼 조심스럽게 강도만난 이들을 돌보며 살아가는 나그네의 영성이다.

기독교회의 역사는 다양한 신앙의 표현형을 남기고 있다. 이 땅의 주인이 되어 점령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을 부여받았다고 가르쳐온 영성을 따라 포악을 행할 수도 있다고 믿게 만든 신앙도 있다. 이 땅을 교리적 소명의 자리로 여겨 온 땅을 복음으로 정복하라는 지상과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영성도 있다. 제국의 종교가 서구 기독교 우월주의를 감추고 있었던 방법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이런 가르침은 예수의 사상과 행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예수는 하나님나라에 마음을 두고 이 땅을 살아갈 것을 명하셨다. 지상에 국가를 세우고 권력을 잡고 지배자가 되라는 요구는 예수의 요구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이 땅의 부요함에 마음을 두지 말고 의와 진리를 행하고, 평화와 사랑의 길을 걷기를 요구하였다.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경고하면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던 예수, 이 예수의 영성이 오늘날 우리 교회안에서는 침묵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려면 어느 부자 청년의 고민에서 우리가 읽었듯이 탐욕과 권력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한다. 최소한의 요구이다.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을 걸어야 한다. 저마다 자기 십자가도 져야 한다. 부유함으로 치장한 성직자들의 입에서 어찌 정의와 평등이 외쳐지고, 청빈하고 단순한 삶에로의 부름의 소리가 울려나겠는가? 그것은 오늘날 연목구어인 셈이다. 그런데도 부유함에 찌든 성직자들의 교회로 무수한 대중이 몰려드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의 가르침은 재미있고, 적당히 건전하며, 여러모로 부담이 되지 않는 까닭이다. 은근히 탐욕과 교만을 가르치고, 욕망충족을 자극하는 하나님의 축복이란 사실 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짧은 삶을 살아가면서 사랑과 평화를 위하여 일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고, 조금 일하다보면 어느덧 인생의 석양이 찾아오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밤이 오기 전에 부지런히 일하는 일꾼으로 살아야 한다. 예수를 따라 평화와 사랑의 길을 걷고, 예언자들의 길을 따라 살며 정의와 평등을 살아온 이들에게는 예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나는 믿는다. 그들에게 약속대로 하나님 나라가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