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윤리를 넘어서 ‘우분투’의 윤리로...”
가장 잔인한 인류 역사는 백인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저질러진 흑인 노예제도였다. 그리고 그 노예제도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잔혹하고 포악한 사건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36년간 저질러진 인종차별정책이었다. 흑인노예제도는 수세기에 걸쳐 약 4000만명의 흑인들과 그들의 가족을 희생시켰다. 남아공에서는 암암리에 시행되던 차별정책은 그것이 공식화된 후 36년간 약 150만 명의 흑인들에게 잔혹 행위를 한 포악의 역사를 남겼다. 그러나 포악의 역사는 지속될 수가 없는 법이다. 남아공에서는 흑인들의 참정권을 거부하던 인종차별 정책이 폐지되고 1994년 4월 27일 흑인들이 참여한 투표에 의하여 의회가 결성되었고, 이어 감옥에서 27년을 갇혀 있었던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만델라 정부가 직면한 가장 커다란 과제는 백인 정권이 흑인들에게 가한 잔혹의 역사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자칫 잘못하면 기존의 세력을 가지고 있는 백인들의 저항과 힘없는 흑인들의 변혁의지가 부딪혀 역사적인 참극이 일어날 수 있는 긴장된 순간이었다.
이 역사의 장면에 하나님은 성공회 남아프라카 대주교였던 데스문드 투투를 준비해 두셨다. 투투 감독은 깊고 아름다운 영혼의 사람이었다. 그는 “진실과 화해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깊은 신앙에서 우러난 맑고 투명한 통찰과 지혜로 남아공의 신생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낸 사람이다. 그는 아프리카인들의 내면 깊은 곳에 담겨있는 용서의 능력을 발견한 사람이었다. 수 십년간 흑인들을 노예로 삼고, 학대했으며 심지어는 고문하고 살해해 온 역사를 들추어내면서 그리고 무수한 흑인 여성들이 성폭력을 당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한 끔찍한 잔혹 행위들을 진실의 이름으로 불러내면서도 그는 용서만이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남아공의 미래를 열어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의 위원회는 그의 생각을 깊이 이해하고 협력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번 책을 덮었다가 다시 열었다. 인간이 인간을 향해 저지르는 잔혹함의 역사를 마치 내 목전에서 목격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인간의 존엄성이 철저히 박탈된 자리에서 죄 없이 죽어간 이들을 생각하며 나는 인간의 추함과 악의 깊이에 대하여 경악했다. 남아공의 고위 정치가들이 “처리하라”는 말 한마디가 정의를 요구했지만 아무런 힘이 없었던 흑인들에게는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포악은 포악을 낳았다. 백인 정권에 저항하던 흑인 저항 운동가들에게서도 백인들의 포악과 유사한 포악이 행해졌다. 남아공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두 가지 포악의 진실을 드러내려고 했다: 억압자들의 포악과 피억압자들의 포악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이 정치화될 때 얼마나 부도덕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라인홀드 니버의 통찰이 적중하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한 인간의 영혼이 이리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더 깊이 감격했다. 진실과 회해 위원회에 나와 증언하는 이들을 통하여 너무나 엄청난 잔혹한 인권침해 사실들을 알게 되자 잠을 못 이루며 괴로워하면서도 투투 감독은 정의의 윤리보다 용서의 윤리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프리카인들은 그들의 아들과 딸, 형제 자매에게 고문, 강간, 살인 등 짐승같이 포악을 행한 자들에게 징벌을 요구하는 대신 용서를 선택하고 복수를 꾀하기보다는 아량을 베풀며 기꺼이 그들에게 사면을 베풀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프리카 토착민들의 영혼 속에 담겨 있는 “우분투”의 정신에서 나온 관대함 때문이었다. 아프리카에서는 “저 사람 우분투가 있어” 라고 말하는 것이 최고의 찬사이다. 우분투란 용서와 아량을 베푸는 마음과 태도를 의미한다. 2차 대전 직후 유태인들이 가졌던 보복의 윤리와는 사뭇 다른 윤리다. 자신의 가족들에게 고문, 강간, 살인을 마다하지 않았던 잔혹행위자들을 향하여 아프리카인들은 “우분투”를 실천했던 것이다.
투투는 말한다. 우리는 보복을 위하여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기 위하여 진실을 규명한다고. 온통 가해자와 피해자로 얼룩진 남아공의 악몽과 같은 포악의 역사를 청산하면서 투투 감독이 추구했던 것은 가해자가 동료 인간의 권리를 무참하게 훼손했던 진상을 낱낱이 밝히고 용서를 구하면 그에게 사면을 베푸는 것이었다. 관대하여 친절하고, 남을 보살피며 자비롭게 살아야 한다는 아프리카인들의 평화와 화해의 정신, “우분투”의 정신은 자칫 남아공이 빠질 뻔했던 폭력에 의한 보복과 피의 악순환을 영원히 멈추게 한 아름다운 영혼의 힘이었다.
나는 이 책을 고통스러운 피해의 아픔을 가진 이들, 혹은 다른 이에게 고통을 준 기억으로 인하여 잠 못 이루는 밤을 새기도 하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2차 대전 직후 나치에 의하여 포악을 겪다가 죽임을 당한 동료 유태인들을 대신하여 유태인들은 정의를 요구했고, 그들은 뉴른베르크 전범 재판소에서 나치들을 처형할 것을 요구 했다. 유태인들이 타자를 향하여 요구했던 것이 정의와 보복의 윤리였다면, 유사한 고통을 겪은 아프리카인들은 정의와 보복의 윤리보다 관대함과 너그러움의 윤리를 선택하고 실천했다. 아마 어떤 이는 이러한 용서의 윤리에 대하여 정의의 부재라고 영리하게 비판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한 편으로는 정의의 윤리를 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팔레스타인인들을 향하여 불의를 행하는 유태인들에 비하여, 자신들을 가해한 이들에게 까지 관대함과 보살핌의 태도를 실천하는 “우분투” 정신이 보다 높고 고귀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그릇 행한 이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정의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우분투”의 부재일 따름이다. 그리고 간혹 우리 자신이 누군가를 가해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 또한 “우분투”의 결여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데스문드 투투 감독은 잔혹한 인종차별정책, 아파헤이트를 멈추게 하는 것은 정의의 힘으로 피의 보복을 불러와 또 하나의 미움과 원한을 남기는 길이 아니라, 그런 잔학의 폭력의 길과는 전혀 다른 길, 인간다움의 실천에서 그 비결을 찾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우분투”의 실천으로 인하여 세계의 주목과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우분투의 정신을 가진 이들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 온 지난 역사가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를 보여 주었다. 참으로 놀라운 정신의 승리가 아닐 수 없다. 보다 밝은 미래를 열어가려면 우리는 용서를 구하고, 또한 용서를 해야 한다. 이 귀한 가르침은 이 책의 내면에 흐르는 영혼의 소리이다. 이 책을 읽는 이들은 누구나 이 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 믿는다.
Monday, June 22, 2009
Desmond Tutu의 No Future without Forgiveness를 읽고...
Posted by
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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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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