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une 6, 2009

벌거벗은 임금님

한 사회 안에서 교수 집단은 지식인 상층부를 구성하는 위치에 있다. 교수들은 다른 이들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지식을 계발하여 현실 세계 이해의 폭을 더욱 넓힐 뿐 아니라 보다 심원한 차원에서 정신적 사회적 자유를 확대해 나가는 소명을 가진 집단이다. 그런데 대학 사회를 바라보면 가관이다. 가난한 제자들로부터 향응을 제공받는 이들, 은밀히 사소한 선물 받기를 즐겨하는 이들, 심지어는 연구비 착복도 서슴치 않는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지극히 일부 몰지각한 지식인들의 경우다. 대다수 교수들은 교수로서의 품위와 자존심을 지키며 학문하기에 모든 힘을 쏟는다. 오랜 기간 국내외적으로 학문을 연마해 온 교수들에 비하여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다듬을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한 법관들은 어떠할까?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나라 검찰과 법원의 비인격성에 대하여 깊은 회의를 가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직무를 감당해 낼만한 도덕적, 이성적, 학문적 깊이가 없다는 생각이 나의 편견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타나는 현상들을 보면 그 행태들이 졸렬하기 그지없고 사소한 이해관계에 천작하는 가벼운 존재들이 많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지난 2년 전 난생 처음 내가 근무하는 대학의 총장의 고소로 검사를 만났을 때, 나는 그가 가지는 비인격적 태도에 깊이 놀랐다. 대학 교수인 나를 마치 어린아이 취급하듯 눈을 부라리기도 하고, 은근히 자기 견해를 쫒지 않으면 버릇없는 청소년처럼 역정을 내면서 은근히 위협적인 언사도 마다 않았다.

나보다 나이가 열다섯은 아래일 것 같은 그 젊은 검사는 그가 가진 권력이 공권력이라는 사실을 잊은 듯 했다. 그에게 주어진 공권력이 마치 그의 개인적인 권력인 것처럼 그는 인간으로서 한 인간 앞에 매우 우월한 자세와 태도로 일관했다. 처음 검사를 만나고 돌아온 그 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무슨 깊은 함정에 빠진 듯한 답답한 느낌이 나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서로 옳음을 주장하는 두 편의 주장을 듣다보면 어느 한 편이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혹은 더욱 간교한 방법으로 거짓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나의 기대는 총장과 교수라는 신분의 차이를 계급적으로 인정하는 그 검사의 시선에 의하여 차단되고 있었다.

국가 권력은 권력을 독점한다. 비록 민주사회라 할지라도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받은 기관이 사법기관이다. 대대수의 선진국에서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을 박탈하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사형제도를 포기하지 않고 있으므로 사법부는 실상 특정한 경우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권한까지 가진 무서운 존재다. 사실상 법원은 법을 지키기 위하여 존재한다. 법은 인간을 지키는 것이라는 전제를 가질 때 이 명제는 타당하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면 정권의 개 같은 법관들이 버젓이 활동하던 시대도 적지 않다. 아무 죄도 없는 이들을 잡아다가 사상범으로 몰기위하여 죄를 조작하고, 법관들은 사형을 선고하기도 했던 것이다. 참으로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헌법기관이 저지르기도 한다.

이명박 정권이 국가권력을 장악한 후 권력을 지키기 위해 국민들의 입과 귀를 막고, 장벽을 치며 자신들만의 요새를 만들 모양이다. 세종로에서 컨테이너로 민의의 통로를 막더니 이번에는 시청광장을 경찰 버스로 둘러막는 모양이 어쩌면 그리도 미련한지 모르겠다. 노무현 정권에 비하여 하는 모양이 나라의 체면과 양식과 품위를 고려하기에는 역부족인 무리들처럼 보인다. 민주와 인권에 눈을 뜬 많은 젊은이들은 이 시대착오적인 현상을 바라보며 이명박 정권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다. 반민주적인 정권이다. 이런 반민주적인 정권의 양태들을 모른 척 눈감고 있는 검찰, 그리고 두드려 패고 막는 이들을 옹호하는 정권, 민주적 사유의 확산을 위하여 노력하던 시민 운동가들을 잡아 가두기 위한 정치사찰의 망령이 되 살아난 느낌이다. 이 반민주적인 역류에 편승하여 정치검찰은 노무현 가치를 분쇄하기 위하여 전정권의 도덕성을 표적 삼았다.

나는 오로지 고시에 매달려 젊음을 소비하던 이들이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스스로의 인격과 교양을 위한 노력에 그들이 과연 얼마나 시간을 사용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김두식 교수의 최근 책 불멸의 신성가족은 법관들이 권력이 주어지는 순간부터 사법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저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정작 섬겨야 할 국민들은 잊어버린 전근대적인 집단의 양태를 보이고 있다는 실상을 그리고 있다. 이렇게 평생을 산 법관들의 “정의에 대한 의식“이 얼마나 현실주의적인 것일 것인가에 대하여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나는 검찰의 교양 없음 위에 얹어진 절대 권력을 염려한다. 그리고 더 큰 권력을 향한 유혹이 거기에 더해질 때 자진하여 정권의 개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을 이가 얼마나 될까?

나는 노무현의 탈권위적 정치에 대하여 지지를 보냈던 사람이다. 그의 교양 없음보다 나는 그의 신념이 더욱 귀해보였고, 그의 교양 없음이 그의 신념을 비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권을 버리고 낙향하여 농사를 지으며 한 국민으로서 민주의식의 확산과 참여에의 권리를 행사하던 그를 검찰이 표적으로 삼은 것은 검찰이 보수 여론에 혐의 사실을 과장 확대하도록 나발을 불던 그의 혐의 때문이 아니라 한 정치가의 사상과 신념의 깊이를 헤아릴 줄 모르고, 그 사상의 소중함을 인식하지도 못하며, 그러므로 존중할 능력이 없었던 검찰의 천박함 때문이다. 노무현의 영전 앞에 머리를 숙인 무수한 남남북녀들을 노무현을 파렴치하게 몰아가던 검찰이 어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정권의 개가 된 일부 검찰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인권을 보호할 수 있는 법적이며 절차적인 합의가 가능할 때만 제대로 기능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제아무리 99%의 지지를 받는다 하여도 인권을 보장할 능력과 자신이 없으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독재이거나 권력의 전횡 곧 야만이 되는 법이다. 나는 이명박 정권의 입과 경찰 수뇌의 입과 검찰의 입이 어쩌면 그리도 닮았는지 경이로움을 느끼고 있다. 저들이 국민 앞에서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것은 저들이 진실하지 못한 까닭이다. 입으로는 국민을 섬긴다고 하면서 섬기기는커녕 국민의 입과 귀를 틀어막고, 민주적 대화와 소통의 길을 폐쇄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판적 표현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는 절대권력을 허용하지 않는 민주사회의 필수 조건이다.

함량미달의 정권이 결국 노무현을 죽였다는 생각을 나는 버릴 수 없다. 그러나 노무현은 자신의 죽음으로 노무현의 신념과 가치를 지켰다고 나는 생각한다. 노무현의 죽음 이후 지난 두 주간 나의 가슴에는 비가 내렸다. 나의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난 후의 슬픔은 오래되지 않아 지나갔지만, 노무현의 죽음 앞에서 나를 찾아온 슬픔은 쉽게 나를 떠나지 않았다. 노무현 정권 5년 동안 육두문자를 써가며 그를 줄창 비난해 대던 언론의 자유를 보장했다면, 이명박 정권은 정권을 잡자마자 국민들의 귀를 통제하고, 문화를 통제하며, 소통을 감시하는 권력이 되었다. 노무현 정권이 이해하던 권력과 이명박 정권이 이해하던 권력은 이렇듯 다르다. 누가 국민을 존중하고 진심으로 섬긴 사람인가? 노무현인가 이명박인가?

청와대 뒷산에서 무수한 촛불을 바라보며 반성했다는 그가 촛불을 진화하기로 작정한 것이 과연 반성의 증거인가 아니면 입따로 몸따로 국민들 앞에서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쟁이의 진면목인가? 어떤 이는 노무현이 너무나 이상주의자였기에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모든 권력기관을 놓아 주었기 때문에 아무런 힘이 없는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래서 이명박 정권처럼 집권하자마다 친 노무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굿판을 벌리고, 언론을 장악하고, 민주시민들의 언로를 막은 것이 당연한가? 노무현은 노무현을 마음껏 비판하도록 바보처럼 허용했다. 그러나 이명박은 언론과 인터넷을 사찰하면서 그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소리들을 가려내어 축출하려 든다.

우리 사회 여기저기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독재정권이란 그 근본이 민주적 의식의 결여라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자유로운 토론이 결여된 세계에는 아부와 첨언을 일삼는 무리들에 둘러싸인 벌거벗은 임금의 행차가 빈번해질 뿐이다. 어린 아이 눈에 벌거벗은 알몸을 보이고 있는 데도 임금은 민주주의를 옷 입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사실 벌거벗은 임금이란 권력을 탐하여 권력에 도취된 집단의 희생물이다. 길거리의 어린 아이도 손가락질하는 벌거벗음을 인식할 통로를 잃어버린 것은 그의 아둔함의 결과이기도 하다.

권위주의적 정권이 빠지는 함정은 도덕적 판단능력을 권력의 위하력으로 대신한다는 점에 있어서 언제나 오류에 빠진다. 그리고 이런 정권은 그 본질이 반민주적일 수밖에 없다. 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후에 국민적 합의와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권력을 힘으로 장악하려 드는 독재적 본성이 표출되기 때문이다. 어떤 정권이라 할지라도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려 든다면 그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런 불행을 막으려면 사법부가 국민의 기본권을 명료하게 옹호해야 한다. 사법부가 정권의 개가 되면 애꿎은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막대한 정신적 물리적 비용을 물게 된다.

이런 점에서 나는 정치가들보다 법관들이 한 수 위의 도덕적이며 민주적인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벌거벗은 임금을 칭송하는 우스꽝스러운 사법부가 아니라 국민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벌거벗은 임금이 벌거벗었다고 말할 수 있는 기관이기를 바랄 뿐이다. 여기저기서 이명박 정권의 반민주적 작태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고 있다. 불행하게도 오늘의 검찰은 농부로 돌아간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몬 검찰이 되었다. 전직 대통령의 인권을 지켜주기는커녕 온 사회의 희롱거리로 만드는 검찰이 힘없는 국민을 과연 두려워하고 있을 것인지 나는 의문한다. 이런 자들에게 정의의 칼을 맡겨 놓은 우리의 현실이 나는 참으로 불안하기만 하다.

벌거벗은 임금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뒤늦게 대통령 재임시절 노무현의 사심 없는 삶의 태도, 그의 신념과 가치를 되새기고 있다. 투박한 진실을 천하다고 여기던 이들이 벌리는 우스꽝스러운 벌거벗은 임금의 행차가 진행되고 있는 오늘의 정치현실을 바라보며 우리 모두는 아마도 노무현의 거짓 없는 진실을 외면하고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던 거짓된 진실의 진면목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노무현이 보여준 탈권위, 탈권력정치는 반민주 정권에 대한 비판을 불러오는 위험한 기억을 우리에게 남기고 있다. 탈권위, 탈권력적인 정치란 정권의 한계를 명시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없으면 실천될 수 없는 것이다. 노무현이 남겨준 민주주의에 대한 기억을 안고 있는 우리 국민들에게 있어서 벌거벗은 임금이 강요하는 억압정치의 포악성은 이제 더이상 이해되거나 수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