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엘리스 교수 초청 강연>
불안과 위기의 시대와 하나님에 대한 물음
일시: 2008년 11월 11일 오후 2시-6시
장소: 감리교신학대학교 웨슬리 채플
기독교 사상 초청 / 감리교신학대학교 후원
박 충구(감신대 교수)
마크 엘리스 교수
마크 엘리스 교수는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제자인 루벤슈타인 문하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뉴욕 메리놀 대학에서 12년간 교수했고, 현재는 미국 텍사스 베일러 대학의 유태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그는 미국 대학들이 당대의 특출한 사상가를 초청하여 대학의 교수(University Professor) 지위를 부여하고, 강의보다는 전 세계적인 강연자로서 활동하도록 하는 특권을 베일러 대학으로부터 부여 받았다. 그는 미국만이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 남아프리카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학술 강연의 연사로 초청을 받고 있다. 이렇게 그가 초청을 받고 있는 까닭중의 하나는 그가 현대 유대 사상사들 중에서 매우 독특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데 크게 기인한다.
엘리스 교수는 현대 유대 지식인들을 정통주의 유대인, 진보적 유대인 그리고 양심적 유대인으로 대별하고, 유대인 대학살 사건 홀로코스트와 1948년 이스라엘의 재건에 대하여 그의 독특하고도 예리한 비판적 통찰을 보이고 있다. 유대학(Jewish Studies)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그는 현대 세계에 커다란 지적 영향을 끼진 유대인 지식인들의 사상에 대하여 심도깊은 연구를 통하여 마르틴 부버,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한나 아렌트, 엘리 위젤과 엠마누엘 레비나스에 대한 그만의 독특한 견해와 평가를 담은 강연을 해왔다. 이번에 기독교 사상 지령 600호 기념 강연회에 그가 초청된 것은 바로 이러한 그의 강연을 기독교 사상 독자들과 그 외의 관심있는 이들이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엘리스 교수는 특히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에 대한 특출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데, 그의 입장은 정통유대주의자들이나 시온주의자들, 그리고 진보적 유대 지식인들과 견해를 달리하는 것으로서 팔레스타인 인들의 영토에 대한 주권과 생존권 및 인권을 옹호하는 데 깊은 관심을 표명해 왔다. 그의 관점은 오늘의 이스라엘의 대외 정책은 유대주의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스라엘이 이방인과 소외자들을 배려하라는 명령을 담고 있는 성서의 계약사상이나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보다 높은 정의의 수준을 요구해 온 예언자들의 정신을 훼손하는 것으로서 유대인들의 종교적 정체성과 정치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는 평가에 잘 담겨있다.
그는 유대해방신학(A Theology of Jewish Liberation Theology)로 일약 유명해 졌으며, 종교와 정치의 거룩하지 못한 연대에서 일어나는 포악(atrocity)을 고발하는 현대의 예언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엘리스 교수는 이번에 광주 가톨릭 신학대학의 초청으로 내한하게 되었고, 한국을 방문하는 중 <기독교 사상> 초청으로 11월 11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불안과 위기의 시대, 하나님에 대한 물음들” 이라는 주제 하에 세 차례 연속 강연을 할 계획이다. 장소는 서대문 냉천동에 있는 감리교 신학대학교 웨슬리 채플이다.
강연초
이번 강연에서는 앞서 말한 현대 정신 세계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친 유대 사상가들, 즉 부버, 헤셀, 아렌트, 위젤과 레비나스의 사상을 섭렵하면서 엘리스 교수는 이 불안과 위기의 시대에 종교의 본질과 하나님 신앙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그의 견해를 밝힐 것이다. 엘리스 교수는 특히 히틀러 나치 정권에 의한 유태인 대학살 사건을 구약의 번제를 뜻하는 라틴어 단어에서 만들어진 “홀로코스트“라는 개념으로 바꾸어 부른 홀로 코스트 신학자 리챠드 루벤슈타인의 사상적 계보를 따라 다섯 명의 위대한 유대 사상가들이 유태인 대학살 사건 전후, 그리고 이스라엘 건국 이후에 표명한 신학적, 철학적, 정치적 견해들을 분석하면서 본유의 유대 사상의 관점에서 그들을 새롭게 평가한다.
이번 강연회에서 다룰 주제들은 <타고난 예언자적 인물 마르틴 부버>, <근대성 이후와의 만남: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의견이 다른 유태인과의 만남: 한나 아렌트>, <홀로코스트와의 조우: 엘리 위젤>, 그리고 <유대인들의 미래를 만나기: 엠마누엘 레비나스>이다.
마틴 부버는 히틀러 치하에서 독일을 떠나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의 사회철학 교수로 살았는 데 그는 그의 유명한 책 <나와 너: Ich und Du>로 잘 알려져 있고, 사회운동의 측면에서는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의 공존 가능성을 매우 적극적으로 모색했던 사상가였다. 그는 “조직화된 종교는 본래적인 요소를 잊거나 우리를 세상에 순응시키는 실천적인 요소들을 통해 진정으로 본유의 것들을 가려 버린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만남이란 모든 교육의 핵심이다. 만남에서 “세대 간의 간극을 뛰어넘는 불꽃이 인다“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르침은 이론적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런 만남을 가로막고 파괴하는 것이 나와 그것(Ich und Es)의 관계다. 인격성을 상실한 관계에서 나타나는 그것이란 하나님도 될 수 있고, 종교도, 이웃도 될 수 있다. 다만 그것은 그것이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가공되지 않은 관점이고, 여과되지 않은 원초적인 감수성을 지닌다. 그러나 그것이란 우리의 비전과 길을 가로막는 대상들의 축적이다. 이런 나와 너의 관계는 유대 신비주의에 깊은 연원을 두고 있는 데, 오늘날 이 관계는 생명과 생태지향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우리가 그것의 세상에서만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것의 세계 안에 있는 너, 즉 주체를 외면하게 된다. 그것의 세계는 이용과 남용의 세계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너의 세계는 관계의 세계다. 우리는 너를 객체화시키기 보다는 생명으로 만난다. 객체화된 그것의 세계는 분열과 분리의 세계다. 그것의 세계의 극단은 폭력이다. 그러나 그것 없이는 우리가 생존할 수 없기에 그것은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그것의 세계에서만 산다면 우리는 사물을 사용하되 나까지도 사물이 되는 지경에 처하게 되어 폭력과 포악이라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결국 가해와 피해라는 악순환의 일부로 전락한다.
부버는 그의 초기 인격주의를 지나 점차 회심과 대화라는 주제를 그의 사유 안에 받아들였다. 이런 변화는 엘리스 교수에 의하면 “부버가 무아적이고 피안적인 신비적 종교성으로부터 나와 다른 이들과의 만남과 공동체 세우기에 초점을 맞추는 현세적 영성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바로 이런 전환을 일러 부버는 회심이라고 불렀다.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이후 부버는 회심에 대한 논의에 대화를 추가했다. 그가 대화의 신학을 전개한 것은 홀로코스트 이후 화해와 평화를 위한 유일한 가능성은 진실한 대화에서 얻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부버는 자신의 동족 600만을 살해한 독일인들을 향하여 악과 타협하고, 악 앞에서 불안해하며 순응했던 이들을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밝혔다. 반인간적인 행위에 맞서는 길은 인간적인 행위일 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헤셀에게서 우리는 홀로코스트의 고통을 겪은 또 한사람의 유럽 출신 유대인을 만나게 된다. 부버와 가깝게 지냈던 헤셀은 하시디즘 전통의 후예로서 믿고 느끼는 바를 진실하게 실천으로 옮기는 사상가였다. 그는 홀로코스트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 1972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뉴욕에 있는 유대인 신학교에서 윤리학과 신비주의 교수로서 활동했다. 헤셀은 홀로코스트 이후에도 홀로코스트 이전의 신앙과 전통을 지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루벤슈타인에 의하여 과거지향적 종교적 감성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헤셀에게 있어서 홀로코스트와 같은 절망의 그림자가 내리어져도 한 인간이 하나님과 친해지고, 하나님에게 가 닿은 체험이 일어난다는 믿음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징하는 안식일에 대한 묵상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화폭위에 신비하고 장엄한 창조의 절정을 그리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니 우리도 그리 해야 한다.” 고 했고, 안식일이 없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어지므로 자기만 알거나 사물로 뒤바뀐 하나님만을 알거나, 하나님을 세계로부터 분리시키는심연만 아는 세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홀로코스트는 하나님 없는 인간의 영적인 재난으로 인해 초래된 것이었다고 믿었다. 이와 유사하게 현재의 종교들을 향하여 “우리는 거룩함을 팔아 편리함을 샀으며, 충성 대신에 성공을, 사랑 대신에 권력을, 지혜 대신에 졸업장을, 기도 대신에 설교를, 지혜 대산에 정보를, 그리고 전통 대신에 유행을 산다”고 비판 했다.
헤셀은 죽음을 맞기 직전에 행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사회정의를 자신의 마음 속에서 가장 우선적인 것으로 보며, 또한 유대교의 영성의 핵심이라고 본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그는 성서에서 보이고 있는 가장 큰 관심은 동료 인간에 대한 불의, 피흘림이라고 보았다. 유일하게 예언자들만이 전쟁이 사라지고 평화가 올 것이라고 꿈을 꾸었듯이 그는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다양한 사회참여 활동에 나섰다. 비록 유대인이었지만 그는 마틴 루터 킹과도 연대했으며,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에 나서며 ”하나님은 영적인 문제에만 관심하시고 사회정의나 불의에 대하여 무관심한 분은 아니라“고 가르쳤다. 정의란 그 분의 명령일 뿐 아니라, 그 분의 방식이라는 생각, 다른 사람들이 불의를 저지를 때 그것이 단순히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 적대적이 된다는 것, 인권이란 단지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장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한 이익이라는 생각이 그를 지배했다.
한나 아렌트는 독일 태생 유대인이었지만 비종교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그녀는 2차 대전 직후 뉴요커(New Yorkers) 잡지사의 부탁을 받고 전범 루돌프 아이히만 재판 과정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는 데 이 보고서
결국 위젤은 아이히만과 나치가 감정적 죄를 저지른 것으로 보았고, 아렌트는 그들이 논리의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본 것이다. 아렌트의 관점에 의하면 그런 범죄는 유태인들의 협력 없이 일어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당시 유태인 평의회는 나치를 도와 유태인들을 위한 게토를 만드는 일을 담당했고, 이러한 그들의 협력은 마침내 유태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데까지 내 몰아 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아렌트의 글을 읽은 유대인 공동체는 아렌트에게 분노하며 그녀를 그들 공동체에서 추방하다시피 했다.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그들에게 있어서 냉철한 이해를 제시한 아렌트보다 위젤의 분노와 이스라엘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담고 있는 보고서가 마음에 들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사회철학자로서 아렌트는 오직 정치적인 것만이 인간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세속적 정치적 감수성이 인간의 자유와 생존을 확보하는 데 꼭 필요한 보호를 제공하고 공공사회와 종교에 대한 충성심을 제한해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렌트는 전체성을 향한 운동은 설사 최선의 의도를 가진 것이라 할지라도 다중성(multiplicity)을 잘라버리는 것이며, 최초의 발의, 경이, 그리고 재생을 막아 버리는 것이라고 보았다. 불의를 중단시키며 대안의 길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도록 공적인 말과 행동에 다중성을 꼭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전체성이 다스리는 곳에서는 개인의 권리는 필연코 중단되고 만다.
엘리 위젤은 항가리 출신 유대인으로서 1944년 그의 가족과 함께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그것에서 어머니와 누이를 잃은 후 아버지도 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나보내는 고통을 겪었다. 그는 그의 수용소의 경험에 근거하여 쓴 소설 <흑야, 1956>로 일약 유명해 졌고, 198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 워싱톤 DC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 건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국가 이스라엘의 재건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그는 이스라엘 유대주의에 대한 호혜적 태도가 공정성을 잃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추방하고 그곳에 이스라엘 정착촌을 건설하는 사업이 지닌 불의를 간과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위젤의 기억은 언제나 홀로코스트에 정위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홀로코스트는 그이 주제이며, 목표이고, 가장 큰 관심이다. 그리하여 이미 지나간 과거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억이 그를 지배한다. 따라서 위젤을 따라가면 그 학살의 현장과 기억이 드러나고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상처가 남아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위젤과는 달리 루벤슈타인은 홀로코스트는 유대인들의 고통만이 아니라, 근대성의 폭력의 산물로 이해된다. 따라서 루벤슈타인에게 있어서 홀로코스트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대량학살이 근대성의 한 결과, 즉 오늘날의 관료주의, 사회적 조직과 기술문명의 발전에 힘입은 악이라는 점에 있다고 본다. 진보는 결국 대량 학살을 불러오게 되는 까닭이다. 그에게는 홀로코스트란 유대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류의 한 부분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위젤에게 있어서 홀로코스트는 농축된 유대인들의 고난이다.
위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동행하겠다고 약속했던 하나님은 계약에서 보증되었었다. 하지만, 위젤은 “이 계약은 더 이상 인간과 하나님 사이 혹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과 그 고통과 죽음의 기억들 사이, 하나님과 의미 사이의 계약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홀로코스트에서 살해된 이들을 망각하는 것은, 혹은 다른 잔혹한 피해자와 견주는 것은, 혹은 그들에 대한 기억 없이 살아가는 것은 위젤에게 있어서 세계 안에서 유대인들의 결정적인 위치와 사명을 내버리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이런 의미에서 위젤은 유대인의 보편성보다는 특수성을 더욱 중시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바로 이 입장에서 위젤은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을 이름하여 순교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엘리스 교수는 이런 입장을 비판하기를 홀로코스트를 넘어서지 못하는, 과거에 매인 이스라엘이 힘을 부여받게 되니까 과거의 피해자였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을 가해하는 동력으로 홀로코스트를 낭만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부버나 아렌트와 같이 레비나스도 유럽에서 태어났다. 그는 선각자들이 세상을 떠난 자리에 우둑 서 있는 20세기 유태 사상가로서 다양한 기여를 해 왔다. 그의 타자(Others)에 대한 철학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사상구조에서 엘리스 교수는 결정적인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한다. 그의 타자의 철학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서구중심주의와, 그의 서구 중심주의안에서 볼 수 있는 유대중심주의적 관점이다. 그는 국가의 형성과 존립을 위하여 악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능력으로서 폭력을 피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국가들의 폭력성을 배제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그의 입장은 폭력의 한계를 규명하지 않을 경우 그는 이스라엘이 행하는 팔레스타인을 향한 국가폭력을 비판하기에 애매한 입장을 취하게 된다.
그의 1957년의 글에서 레비나스는 이렇게 주장한 바 있다: “유태인의 행동, 언어, 그리고 사상은 여러 세계들을 파괴하거나 부흥시킬 수 있는 강력한 권위를 가진다. 그리하여 유태인의 정체성은 조용한 자기 보존의 의미를 가지기보다 책임감과 이에 따르는 인내, 혹은 그 무게로 인해 지치기도 하고 무감각해지기도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마치 우주를 지탱하고 있는 굳은 의지와 같다. 이 같은 근원적인 경험은 비록 그 과정에서 정치와 국가주의로 변질되기는 하지만 시오니즘을 통하여 보다 감당할 수 있는 형태로 된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보편적인 민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특수하며, 선택된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표현이다. 그는 시오니즘이 팔레스타인에서 어떻게 상생의 길을 파괴하고 팔라세트안인들을 제물로 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불행하게도 그의 철학 안에서 너무나 중요한 개념인 “이웃”은 자아가 의무의 대상으로 삼게 되는 명령의 소리는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고 있다고 엘리스 교수는 비판한다. 서구 철학자나 신학자들이 무심코 범하는 서구중심주의적 사고가 레비나스와 같은 위대한 철학자에게서 극복되지 않았다는 점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아마도 서구 문명에 세례를 받은 현대의 지식인들조차, 종족살해를 경험한 유태 지식인조차 깊이 배어있는 인종차별적 서구우월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심지어 아프리카나 아시아인들을 향한 비하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이런 입장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이스라엘을 영웅화하기에 급급해하거나, 그것의 종교 및 정치적 담론에 매료되는 경향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진보적 지식인들이 가진 한계들은 철학과 신학의 진보성이 아니라 평화와 평등의 실천을 중시하는 양심적 유대인들의 사유가 더욱 믿을 수 있고, 그들의 사유와 실천 속에서 보다 나은 미래를 찾아가는 것이 더욱 현명할 것이라고 보는 엘리스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나가는 말
기독교, 이슬람 그리고 유대교를 낳은 위대한 전통 속에서 깊은 종교적 영향을 받아 온 유대민족은 국가 없이 지낸 2000년의 역사 속에 살아남았지만, 무려 1500년간 기독교 서구인들에 의하여 미움과 추방과 베제의 역사를 겪었다. 마침내 기독교에 의한 이러한 미움의 역사는 전대미문의 고통스러운 악, 홀로코스트를 초래했다. 홀로코스트로 인해 죽어간 유대인들은 유럽 유대인들의 2/3이다. 유럽 유대인들은 셋 중에 둘이 나치의 캐스실에서 이슬로 사라져갔다. 이런 무서운 국가 폭력을 경험한 유대인들은 2차 대전 직후 자구책을 찾아 이스라엘 국가를 재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에서 요단강까지 이르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대대로 살아오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평화를 깨고 그들의 삶을 자리를 빼앗은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 졌다.
그들은 그들의 거리에서 쫒겨 났고, 홀로코스트를 겪었던 유대인들에 의하여 게토화 되었으며, 다윗의 별을 달고 기관총으로 무장한 이스라엘 헬기의 공격을 받았다. 대대로 살아오던 땅에서 그들의 집은 이스라엘 블도저에 의해 산산히 부셔지고 그 자리에는 이스라엘민들의 정착촌이 건설되어 왔다. 과거의 피해자가 오늘의 가해자가 되고 있는 이 현실에 대하여 정통 유대인들이나 진보적 지식인들조차 침묵해 왔고, 미국과 유럽의 유대인 세력은 암암리에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평화를 거부하는 이슬람 회교도들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해 왔다. 그리하여 오늘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 인들에 의한 또 다른 홀로코스트를 겪고 있다. 사실상 이스라엘의 건국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있어 재난이 된 셈이다.
엘리스 교수는 구약 토라의 근본정신인 성서의 계약법 정신에 근거하여 이러한 이스라엘의 대외 정책을 종교, 사회, 정치적으로 분석하며 비판하고 있다. 유대학 교수로서, 그리고 한 양심적 지성인으로서의 유대인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밝히면서 그는 유대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을 경험하며 이 시대에 예언자들의 정신을 지키려면 추방과 유배를 면할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로 그 유배의 길에서 엘리스는 계약의 하나님, 예언자들의 하나님을 만나 동행하는 길이 열린다고 고백한다. 종교와 정치가 야합하여 포악을 벌리는 이 시대에 마크 엘리스 교수의 이번 강연은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유대 지식인들의 진면목이 드러나고, 이 불안하고 어두운 시대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인지를 밝혀줄 것이다. .
Thursday, October 30, 2008
Talking about God in an era of anxiety and atrocity
Posted by
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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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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