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없이, “하느님 나라”없이 메시아 앞에
전에 올렸던 글입니다만, 다시 퍼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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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없이, “하느님 나라”없이 메시아 앞에
김강기명
1.
이 글은 논찬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의 발제문을 제대로 검토할 시간 없이 급하게 써야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슨 “논찬”을 할 만큼 벤야민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토론이 재미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말하자면 “흥행”을 위하여, 우리 - “진보개혁”과 “좌파”와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컬” 모두 - 의 현재가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에 빚지고 있는 것들을 몇 가지 덧붙이는 보조 발제를 해 볼까 합니다. 벤야민에 대해 “썰을 풀만큼” 이론적으로 알진 못하지만, 그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가 제게 준 감동에 대하여서만큼은, 너무나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2.
“파시즘이 승산이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 적들이 역사적 규범으로서의 진보의 이름으로 그 파시즘에 대처하기 때문이다.”(8테제)
우리가 그에게 무엇을 빚지고 있냐구요? 무엇보다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진보’라는 허황된 역사철학에 기대어 메시아(들)의 도래에 눈을 감고 있다는 것입니다. 벤야민은 이 글에서 당시 독일의 사회민주당과 노조 지도부가 갖고 있었던 진보 이념이 파시즘에게 승리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비판합니다. 안타깝게도 이 글은 하나의 ‘유서’가 되고 맙니다. 이 글을 쓴 그 해에 그는 피레네 산맥을 넘다가 고독하게 죽어야 했고, 파시즘은 수천만을 희생시킨 전쟁을 치르고서야 끝나게 됩니다. 제게는 오늘날, 그리고 지난 10년간의 소위 “진보 개혁”이라는 사람들, 또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운동권, “성서한국”이니 “통일시대”니 하는 복음주의 운동의 모습이 벤야민이 비판하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모습과 묘하게 겹쳐집니다. “오늘날 이명박이 승산이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 적들이 역사적 규범으로서의 진보의 이름으로 이명박에게 대처하기 때문이다.” 저는 이렇게 바꿔 쓰는 데에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앞서의 목록을 “진보주의자”라고 잠정적으로 이름 붙여 봅시다. “진보주의자”들은 지난 50여년, 짧게는 지난 20여년의 역사를 이렇게 이름 붙였습니다. “민주화”라고.(기독교인들은 여기에 “하느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표현을 덧붙입니다.) 그들에게 역사는 “발전의 과정”, 즉 “진보”였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진보”이념이 적들의 “진보”이념, 즉 “선진화”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진보했습니다. 지지리도 가난하던 시절을 지나 국민소득 2만 불을 훌쩍 넘어갔고, 독재는 ‘민주화’ 되었으며, 최근 삐끗하고 있긴 하지만 남북화해가 가까워지고 있으며, 교회의 ‘하느님 나라’운동은 더욱 활발해져 가고 있으며, 무엇보다 우리는 ‘김연아’를 갖게 되었습니다.2) 그러나 정말 우리는 “진보”했을까요? 혹은 “누가” 진보했을까요?
Nein! 벤야민은 말합니다. “억눌린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비상사태’(Ausnahmezustand, 예외상태)가 상례임을 가르쳐준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비상사태가 아주 가시적으로 드러난 모습을 ‘용산참사’를 통해 극명하게 보아야 했습니다. “진보주의자”들은 아직도 “이 모든 것이 이명박 때문이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10만 민중대회”를 하자고, “지방선거에서 심판하자”고 떠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이명박 때문 아닙니다. 너희들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지난 10년이 “억눌린 자”들에게 어땠는지 너희들은 좀 곱씹어 봐야 합니다. 대우자동자 공장 앞에서, 부안에서, 여의도에서, 울산에서, 차디찬 아스팔트와 한겨울의 굴뚝 위에서, 황새울 들판 위에서, 그리고 각종 재개발/재건축 현장에서 지난 10년 동안 억눌린 자들이 무엇을 겪었는지 말입니다. 그들에겐 지난 10년도 지금과 같은 “예외상태”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겪는 고난에 대해 떠들 때 지난 10년의 “진보주의자”들은 “이거 촌스럽게 왜 이래? 여기 ‘대한민국’이야. 민주사회라고.”라고 넘겨버렸을 뿐이었지요. 그리고 마침내 그 ‘민주화’도 촌스럽게 생각한 대중은 “선진화”를 꿈꾸며 이명박에게 달려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 그래요. 저도 ‘너희들’에 들어갑니다. - 지난 10년간 너무도 큰 착각을 했던 겁니다. “그래 여전히 권력이 지랄 맞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그래도 역사는 발전하고 있잖아? 지난날을 생각해 봐.”라고 말이죠. 그러나 우리의 진보란 결국 클레의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가 경악하며 목도하고 있는, 하늘로 치솟는 ‘잔해 더미’에 불과했던 것입니다.(9테제)
3.
“우리는 이(상례화된 예외상태)에 상응하는 역사의 개념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진정한 비상사태를 도래시키는 것이 우리의 과제로 떠오를 것이다.”(8테제, 강조는 필자)
벤야민에게 역사는, 또 과거는 “구성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이 구성의 장소는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지금시간”(Jetztzeit)으로 충만한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과거를 읽는 다른 시각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과거를 하나의 “희미한 메시아의 시간”(2테제)으로 읽는 것입니다. 벤야민에게 역사는 “진보해 온” 시간이 아닙니다. 그에게 역사는 무수한 구원의 “사건”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단선적으로 진보해 온 과정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섬광처럼 지나간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를 붙잡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가 “원래 어떠했는지”를 인식하는 일이 아니라 이루어졌던 충만한 구원의 시간, “지금시간”을 붙잡는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적들은 이 시간을 “진보의 시간”으로 가져가려 한다는 것입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광주에서 섬광처럼 지나간 메시아의 도래를 붙잡아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민주화”라는 도정 속에 기입했습니다. 커다란 기념탑을 세우고, 매년 국가 기념행사를 열고, ‘유공자’들에게 보상을 해줌으로써만 말입니다. “노동운동”은 “전태일”이라는 “희미한 메시아”를 애도함으로써 그를 “민주노조운동”의 역사 속으로 성공적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메시아’는 간 데 없고, ‘조직’만 나부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광주를 기념하는 그 국가는 여전히 민중을 압살하고, 전태일을 기념하는 그 조직은 한 여성 노동자에 대한 성폭력을 은폐하며 “진보”와 “민중”을 이야기합니다.
“성서한국”이니, “통일한국”이니 하는 복음주의 운동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그들은 애초에 이러한 “희미한 메시아”에 대한 기억조차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강력한 주권자, 혹은 “꼰대 하느님”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네들이 그토록 상례화된 예외상태를 겪고 있는 민중들과 직접 마주하기보다, ‘통일운동’이나 ‘공명선거운동’에 매진하는 이유는, 그리고 그 운동형식도 “위에서 아래로”의 운동인 이유는 아마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요.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건 오직 “꼰대 하느님”의 명령/약속으로서의 “하느님 나라 확장”이라는 진보이념일 뿐입니다.
때문에 메시아는 구원자로서만 오지 않습니다. 그는 “적그리스도”를 극복하는 자로서 옵니다.(6테제) 메시아는 자신들이 메시아인 채 하는 “진보주의자”의 시간을 중단시키며 도래합니다. 민중신학자 안병무가 1970년의 전태일과 70년(마가복음의 집필시기)의 오클로스들에게서 본 것은 바로 그런 메시아였습니다. 그는 당시의 ‘민중론’이나 80년대 이후의 민중신학이 민중을 어떻게든 정의하고 개념화하려는 것에 대해 끝까지 반대했습니다.3) 그가 말하는 “살아 있는 실체”로서의 메시아-민중은 사건과 분리될 수 없는, 사건적 존재였습니다. 역사는 ‘진보’해 온 것이 아니라, 작은 문을 뚫고 들어온 메시아에 의해 ‘구원받아’온 것입니다. 과거를 이렇게 사유하지 않는다면, 우리 미래의 매초 매초는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문(부기 2)이 아니라 언제나 닫혀진 문, 그리하여 벗어날 수 없는 강제수용소(지르오지오 아감벤)의 시간이 되고 말 것입니다.
4.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듣는 목소리들 속에는 이제는 침묵해버린 목소리들의 메아리가 울리고 있지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과거 세대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는 은밀한 약속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세대와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함께 주어져 있는 것이고, 과거는 이 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2테제)
가장 가까운 과거의 순간을 하나 짚고, 이 ‘보조 발제’를 마칠까 합니다. 5월 2일, 그리고 6월 1일의 새벽. 갑자기 거리로 뛰쳐나온 소녀들의 시간을, 물대포를 맞으며 모두가 섞여 있던 그 시간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그 시간은 분명 “촛불집회 기간”이라는 지속의 시간으로 묶어낼 수 없는 사건적 시간이었습니다.
촛불이 터져 나왔을 때 “진보주의자”들은 온갖 찬사를 쏟아놓고, 그들을 “민주화”의 새로운 도정에 기입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촛불이 사그라지자 이번엔 온갖 “비판적 평가”를 내 놓으며, 촛불이 중산층 이슈에 갇혔네, “민중”과 연대하지 못했네 하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그러한 찬사와 평가 중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경험했던 그 시간이 ‘메시아의 시간’이었음을 기억할 때, 그리고 “진보주의자” 혹은 “지도부”가 그 시간을 닫아놓고 말았음을 기억할 때, 우리의 미래는 다시금 “희미한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열려진 작은 문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시간이야 말로 우리가 지금 벤야민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고, 스파르타쿠스에게, 뮌쩌에게, 상퀼로트들에게, 파리꼬뮨의 전사들에게, 로자와 그녀의 동료들에게, 쿠바의 민중들에게, 베트남 전사들에게, 사파티스타에게, 3.1절의 민중들에게, 광주꼬문의 시민군들에게, 전태일에게, 5월 2일의 소녀들에게, 또 이름 없는 수많은 촛불들에게, 그리고 “예수”와 예수의 오클로스들에게, 그 수많은 메시아(들)에게 빚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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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혹은 “역사철학테제”
3) “서구의 학문은 모든 것을 개념화해서 파악하죠.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아요. 민중을 설명하면 개념이 되고, 개념이 일단 성립하면 그 개념은 실체와 유리된 것이 되어버려요. 그 다음에는 살아 있는 실체가 아닌 죽은 개념하고의 싸움만 남거든요. 그래서 나는 끝끝내 민중을 개념화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박충구 :: [2009/04/27] 신학대학에서 좋은 대학을 나온 강사들을 부르면
그들은 내면적으로 신학생들을 경멸하면서 가르칩니다.
자기들의 가지고 경험했던 의식, 사유, 능력에 비하여
현저히 저질인 학생들을 만날 때 가지는 태도이지요.
학생들은 그런 선생에게서도 많은 것을 배우고,
그 선생의 제자인 것을 자랑하고, 또 그 선생의 이론을
도입합니다. 그리하여 오만할 수 없는 이들이
오만한 자의 논리를 가지고 자기를 경멸하기도 하지요.
반신학의 테마에서는 발터 벤자민과 안병무가 만날 수 있겠지만,
벤쟈민이 보는 유태인과 안병무가 보는
민중은 결코 만날 수 없는 이들이 아닌가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나는 벤쟈민을 더 높이 평가하고 싶어요.
하지만 유태주의 사상의 특징,
그들이 가진 역사에 대한 불신이 인간(민중)에 대한 불신으로,
진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신비주의적인 유물론적 초월성을 기다리게 만들지요.
그 대표적인 예가 에른스트 블로흐라고 볼 수 있어요.
나는 그런 입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유태주의가 가진 깊은 배타성에 물든,
배타주의가 덧입혀지는 것을 많은 이들이 잘 모르고
동시에 자기 우월성의 오만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헤셀이나, 부버, 그리고 아렌트나 레비나스의
언어를 부검해 보면 그들은 또 하나의 인종주의적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요.
그래서 나는 유태인을 의심많은 눈초리로 쳐다봅니다.
저들이 하는 멋진 주장들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묻곤 하지요.
나는 김강선생이 벤야민과 같은 의식을 가지고 한국의
현실을 볼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왈터 벤자민이 진보주의자들을 업신여기는
오만과 우월성에서 비롯되는 불편함은
역사 안에서 국외자로 살아온 이들이 가졌던
냉소주의나 자위적 정신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벤자민을 스팔타쿠스에서 쿠바의 민중이나
베트남 전사들, 예수의 오클로스를 비롯한
역사적 저항자들을 감싸는 사상가로 보는 것이
정말 가능할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리도 많은 유태적 지식인들이 있지만
오늘의 이스라엘을 어떻게 보아야 할런지....
그들의 사상은 자기 역사를 구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부정함으로써 자기를 확인할 뿐입니다.
안병무는 민중을 개념화하지 않았다고 했지만,결국
그는 서남동의 개념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고,
민중신학을 자기의 독창적인 것이라고 주장했지요.
이 문제는 후에 오랜 시간 더 논의 해야 할 문제입니다.
지금은 내일 강의를 준비해야 할 시간입니다.
박충구 :: [2009/04/28] 어설프게 강의 준비를 끝내고 돌아 왔습니다.
서구 역사 속에서 그 존재를 거절당해 온 오랜 경험과 기억을 가지고 있는
유태인들은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문명, 그리고 자신들을 향한 증오를
품고 있는 서구적 진보를 경멸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초월적인 하나님,
질문을 할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해 신앙을 가지면서 사실은 자신들 존재의
아이러니를 경험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하나님은 타민족의 하나님일
수 없다는 생각이 그들을 지켜온 것이기도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역사도 경멸의 역사를 불러오고 있지요.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이들이 새로운 홀로코스트를 만들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들은 무엇보다 미국과 유럽에서 유대-기독교 전선을 구축하고
온갖 전쟁과 폭력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타자란 오로지
동족의 눈빛 안에서만 보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팔레스타인이나
아시아 인은 낮선 존재요 교도의 대상이요, 진보이전의 존재들입니다.
이런 점에서 마틴 부버도 팔레스타인 점령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지요.
진보를 부정한다고 하여 그들이 진보를 거부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요. 진보를 누리면서 진보를 거부하는 이중성, 누리는 것은 그들안에서
언제나 정당화될 수 있는 축복이고, 그렇지 않은 이방인들의 것은
불경건한 것이라 할 수 있어요.
진보를 부정하고, 민주화를 거부하는 것은 일직선상의 진보사관을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기들을 억압하는 타자의 진보인 까닭입니다.
그럼에도 진보를 조롱하고 민주적 합의와 원칙을 무시하는 메시아니즘이란
참으로 허개비같은 허구이지요. 메시아니즘이나 하나님 나라 표상은
유태적 현실부정의 원리로서 혁명적인 위대한 부정의 힘을 가지지만,
그들이 가지고 힘을 얻었을 때에는 억압의 원리로 둔갑하곤 했습니다.
그들은 희년법을 만들어 기존 권력을 그렇게 조롱하더니, 자신들도
한번 지키지 않았지요.
나는 그렇기 때문에 메시아니즘을 현실적 구원으로 이해하는 뮨처의 실패,
다양한 역사적 실험들이 실패한 이유는 다름아닌 역사적 과정의 중요성을
간과한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추모할 수는 있어도 예찬할 수는
없습니다. 유태인들은 다른 종족을 믿지 못하도록 교육받았고, 선민이라는
믿음 때문에, 스스로 달라야 했고 그래서 다른 종족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하고
간혹 다른 종족들을 업신여겼지요.
그런 강한 종교적 자기 정체성에서 비롯된 종교적 비약, 그리고 민족적 배타성이
어쩌면 홀로코스트의 깊은 원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릴 뿐 메시아의 도래는 믿지 못하거든요. 이런 점에서 하나님 신앙을 가지지 않었던
세속 유대인, 한나 아렌트가 훨씬 더 정당합니다. 유태인이나 독일인이나 막론하고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함정인 악은 '비판적 의식"의 결여에서 생성된다는 보편적
선언은 사실 독일인만이 아니라 유태인들이나 민중을 향한 비판이었지요.
한국 사회와 같이 왜곡된 권력이해에 찌든 이들에 의하여 민주적 권리가 짓밟히는
세상에서 진보를 믿지 않거나, 민주화를 추상적 개념이라고 주장하는 논리는
진보나 민주화의 불철저성을 비판하는 것으로는 알아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보나 민주화 일반을 매도하는 비판은 정당하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Tuesday, April 28, 2009
왈터 벤자민의 급진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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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April 27, 2009
하늘과 땅의 심부름
[종교인 오체투지 순례를 보며]
▲ 이현주 목사는 "지리산에서 여기까지 온 세 사람이 오늘 그 길을 다시 걸어 임진각까지 갑니다. 저 세 아들이 이것을 할 때 마치 저희들이 한 것처럼 착각하지 말게 하소서. 세 사람을 몸을 빌어 이렇게 하는 것을 어리석은 사람들이 깨닫게 하여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사진은 오체투지 순례 54일차 3월28일 2009년 순례를 신원사 중악단에서 출발한 오체투지순례 보고서 중에서 이현주 목사)
“경제를 살리겠다”는 약속으로 다수 국민의 표를 얻어 이명박 정권이 수립된 지 일년 반이 되어간다. 그 사이에 우리는 무엇을 확인했나? 과연 이 정권의 약속대로 경제가 살아났는가? “그렇다”고, “죽어가던 이 나라 경제가 살아났다”고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 싶다.
오히려 우리는 경제라는 게 몇 사람이 뜻을 모아 살리려고 노력한다 해서 살아나는 물건이 아니라는 진실을 지금 어렵게 배워가는 중이다. 하루아침에 곤두박질하는 주가와 시간 단위로 오르락내리락하는 환율을 지하 벙커에서 작전 지휘하듯이 몇 가지 인위적 방법을 동원하여 안정시킨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바람 부는 날 요동치는 바다의 파도를, 치솟는 물결은 내리누르고 곤두박질하는 물결은 떠받치는 방식으로 잠재워 보려는 시도만큼이나 우습고 같잖다.
작년 미국에서 일기 시작한 이른바 ‘금융대란’이라는 태풍이 그게 다름 아니라 몸 하나 꼼짝 않고 앉은자리에서 돈으로 돈을 벌겠다는 터무니없는 욕심과 저쪽 투자자들이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초간 단위로 눈을 굴려야 하는 이쪽 투자자들의 불안심리와 거기서 파생되는 총체적 두려움의 합작품인데, 어느 정부 어느 경제팀이 무슨 재주로 그것을 평정할 것인가?
지금 누굴 탓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사실 아무도 고의로 잘못하지 않았다. 다만 어리석었을 뿐이다. 너무 어리석어서 자기가 누군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걸 몰랐을 뿐이다. 어떤 사람들이 당을 만들고 세상일을 자기 뜻대로 운영해 보고 싶어서 “경제를 살리겠다”는 구호를 내걸었을 때, 그것이 얼마나 근거 없고 허망한 약속에 지나지 않는지를 알지 못한 채 박수 치고 지지하는 우를 범했을 뿐이다.
아무도 경제를 죽이겠다는 뜻을 품지 않았고, 아무도 국민을 속이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았다. 다만 어리석었을 따름이다. 너무 어리석어서 자기가 지금 무슨 엉터리 약속을 하고 있는지 그걸 몰랐고, 자기가 지금 무슨 터무니없는 말에 속고 있는지 그걸 몰랐을 뿐이다.
아니다. 몰랐을 뿐 아니라, 아직도 여전히 모르고 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사람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사람 마음에서 나오는 것임을 모르고, 경제 안정이든 경제 불안이든, 태평성세든 전쟁 난리든 그게 모두 사람 마음의 작용임을 모르고, 엉뚱한 곳에서 잃은 물건 엉뚱한 데서 찾아 헤매는 어리석음을 곱빼기로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하늘 아버님과 땅 어머님이 당신 자식들의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더 두고 볼 수 없으셨던가? 이른바 ‘종교인’이라는 찌지를 이마에 달고 살아가던 세 아들(규현, 수경, 종훈)을 특별 차출하여, 온몸을 땅바닥에 내어던지고 내어던진 그 몸을 하늘 향해 일으켜 세우고 다시 그 몸을 땅바닥에 내어던지는 ‘오체투지’를 시키신다.
그들은, 하늘 아버님과 땅 어머님이 어리석은 이 백성에게 주는 절박한 훈계를 전하기 위하여 온몸을 땀과 고통으로 절이며 이 나라 국토를 관통하는 심부름꾼들이다. 그들이 전하는 천지 부모의 메시지는, 바람 부는 날 바다의 파도처럼 널을 뛰는 온갖 경제지표들의 공갈에 더 속지 말고,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하늘로 땅으로 귀의하라는 것이다.
하늘은 누군가? 자신은 어디에도 없으면서 모든 것을 있게 하는 가없는 허공이다. 땅은 누구인가? 가장 낮은 곳에 처하여 저에게로 오는 모든 것을 취사선택 없이 받아주는 바탕이다. 거기, 사람들이 하늘과 땅의 품에 자기를 귀의시켜 하늘과 땅을 닮아가는 바로 거기에 참 생명이 숨 쉬고 참 평화가 피어나리라.
이현주/목사 한겨레 2009/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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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April 25, 2009
나는 노무현보다 대한민국 검찰이 더 슬프다
I.
노무현의 비리를 캐는 검찰의 잣대가 예사롭지 않다.
한 때 권력을 가졌던 자가 권력을 잃었을 때
그를 조롱하는 또 다른 권력이 나타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왜 노무현을 국민들이 선택했던가?
그가 성인군자 같아서 뽑았던가?
아니다.
인간다움의 가치를 가지고 눈물을 흘리고,
그에게서 탈권위적인 신념이 보여서,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판단이 분명하여
많은 이들이 그를 반가워했었다.
과거 우리가 경험했던 정치는 국민을 통치하는 정치였다.
결코 그것들을 국민을 섬기는 민주적인 것이 아니었다.
군사문화 안에서 길러진 권위주의적인 교도정치,
한국사회의 혈연, 지연, 학연으로 뭉친 파당정치,
권력을 쥐기만 하면 권력을 私用하는 권력권위남용정치,
반민주, 권위적, 파당정치로 인해 학생시절 우리는 거리에서
참으로 많은 날들을 구호를 외치며 항의했다.
삼십년이 지난 오늘 촛불집회를 나가는 제자들을 바라보며
나는 저들을 거리로 불러내는 또 하나 권력의 반역을 보았다.
청와대 뒤뜰에서 촛불들을 바라보며 반성하던 그가
새롭게 마음을 뒤집어 먹은 모양이다.
국민의 권력이 억압과 통제와 위협으로 국민에게 맞선다.
개인의 입을 막고, 인터넷을 검열하며, 언론에 재갈을 먹인다.
나는 이 시대착오적인 현상을 바라보며
이 문제는 노무현의 비리캐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노무현이 일으켰던 바람, “탈권위적 민주주의“라는
그 바람의 근원을 “비리”로 몰아 부치는 것이다.
커다란 착각이다.
한반도 근대 역사에서
주류임을 자처하며 오랜 기간 독재정권, 군사정권에서
복무하던 무리들이 민주와 민간의 위장을 하고
시대의 변화의 정신를 거부하고 있다.
그들이 국민에게 약속한 것은 777公約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空約이었다.
과거 역사 속에서 주류를 이루던 배운 자, 가진 자,
권력을 휘두르던 자들이 다시 뭉치면서,
앙갚음과 보복의 악순환을 불러내려는 명분을 쌓고 있다.
권력을 항구화 하겠다는 의지가 너무나 노골적이다.
노무현은 우리에게 자기를 버려달라고 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과연 노무현을 알았던가?
그를 믿은 것은 그가 부끄러운 정치 유산이 무엇인지,
무엇을 척결해야 할 것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민주주의“의 길을 지지했던 것이고,
그의 “탈권위”를 사랑했다.
그의 세련되지 못한 어투, 그의 경제정책의 오류,
보수언론에 의하여 끝없이 이어지던 조롱과 모함,
그리고 그의 주변이 맑지 못했다고 하여,
우리가 믿던 “민주주의“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
II.
나는 노무현보다 대한민국 검찰이 더 슬프다
민주사회는 법치사회이어야 한다.
법치사회는 법이 인간의 권리를 지켜주는 사회를 의미한다.
법치사회의 근간이 되는 가치는 인간다움을 범하는 악으로부터
국민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지키도록 위임을 받은 권력에게 맡겨져 있다.
국민의 자유, 정의, 평등, 평화, 생명 가치를 지키기 위하여
민주사회는 법치의 권한을 정부, 특히 사법부에 맡긴 것이다.
그런데 사법부가 인간의 평등권, 곧 인권을 공공연히 침해하고,
공복이 되라고 맡겨준 권력을 정치적 술수로 이용한다면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언로가 재갈 먹여지고, 정의가 실종한다.
권력의 비호를 받아 특권을 누리는 자와
권력에 버림받은 자들이 나누어지는 사회는 평등사회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은
노무현 개인의 비리를 대문짝만하게 연일연야 광고하는 조중동,
그리고 그 광고주는 검찰이라는 것이다.
보편적 인권선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검찰의 몰인권성이 현저하고
추정적 판단을 가지고 공적 세계에 최후의 심판을 선언하는
몰지각한 검찰이 정권의 홍위병처럼 시퍼런 칼을 휘두르고 있다.
여권의 대표조차 이런 수사는 처음 본다고 할 정도다.
참으로 혀를 찰 일이다.
민주사회는 인간이 내리는 법적 판단의 부정확성으로 인해
법정조차 삼심제를 두고 최종 판결이 나기까지
무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재판도 없이 검찰이 여론몰이를 수단 삼아
연일 연야 전직 대통령을 공개처형하고 있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나는 온갖 혐의를 뒤집어 쓰고 있는 노무현보다
전직 대통령을 향하여 야비한 개처럼 달려드는 검찰이 더 슬프다.
고시에 매달려 독서를 못하고 교양을 쌓지 못한 자들의 패륜적 행태를 볼 때
나는 저들이 민주사회의 보루라고 믿으려해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이런 세상에서 필부들이 법정을 향하여
정의를 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시대착오적인 검열과 처벌의 논리를 앞세우는 현 정권은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목적이 아니라
현 정권에 대한 저항 세력을
차단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촛불집회나 수입쇠고기 사태에 대처하는 정권의 행태는
그리고 언론장악을 위한 수쓰기로 이어지면서
전 국민을 향한 억압과 공포를 불러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국민이 두려운가보다.
나는 우리 사회가 민주사회인줄 알았는 데,
작금의 현실을 바라보며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다.
대한민국 검찰이 전직 대통령을 저렇게 물어 뜯는 데,
이름없는 일반인들을 저들이 어찌 대하겠는가?
정권이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다.
정의와 자유 평등과 평화의 가치가 억압되고 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니라 민주주의가 억압받고 있다는 증거다.
동아시아 후진국들의 선망 모델이 되었던 이나라가
정권이 바뀌더니 갑자기 보수세력들이 권력의 카르텔을 이루고
국민의 사고와 행동의 자유를 통제하려 든다.
나는 노무현보다 대한민국 검찰이 더 슬프다.
인권의 파수꾼이 되어 달라는
그 존재이유를 까맣게 잊은 것 같기 때문이다.
섬겨야 할 대상을 알아보지 못하는 권력이란
미친 것과 다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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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유시춘의 글에 공감하여 여기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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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무현이로소이다" [펌-유시춘]
(서프라이즈 / 유시춘 / 2009-04-24)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者)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하고
능욕(凌辱)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烟氣)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 한용운, ‘당신을 보았습니다’ -
지난 보름여 간 우리는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매일매일 검찰이 공급하고 언론이 생중계하는 ‘노무현비리’를 듣고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이 나있습니다. 오죽하면 ‘적진’ 핵심부에서 ‘이런 수사 처음 보았다’고 할까요? 드디어 회갑선물로 받았다는 고급시계 이야기까지 대문을 장식합니다. 입 달린 사람들은 다 한마디씩 거듭니다. 저 혼자 깨끗한 척하더니 꼴좋다고.
그 숱한 검찰수사가 구속으로 이어지고 마지막 법정에서 유죄판결로 결론나는 비율이 몇 퍼센트일까요? 전문가가 아니므로 수치를 말하지 않겠습니다. 직무상 알게 된 ‘알려진 비밀’을 실토하겠습니다. 2001년 국가인권위가 출범하고 3년간 진정 받은 2만여 건 중에 너무도 많았던 것이 검찰의 편파, 왜곡, 늦장수사와 관련한 억울함의 호소였습니다. 그 진정인들이 모두 피해자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연 하나하나는 그들 나름으로 너무 간절했습니다. 수사권도 강제력도 없는, 그저 ‘권고적 효력’만 있을 뿐인 국가인권위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억울한 사연들이 모래알처럼 많음을 실감했습니다.
그때 여러 날을 뒤척이며 잠을 못 이룬 적이 많습니다. 진실과 정의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일은 그토록 지난한 일입니다. 국가권력이 한 무력한 남자를 간첩으로 몰아 수렁에 빠뜨린 후, 진실이 밝혀지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을 우리는 드레퓨스사건을 통해 보았습니다.
‘이 가방 안에 공산주의자의 명단이 들어있다’라는 허언으로 시작된 매카시즘 광란은 지구상의 가장 선진적 문명국인 미국을 야만과 불신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그 이후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매카시의 가방은 빈 가방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진실’은 그토록 해저 3만리처럼 먼 곳에 파묻혀 때로 인간의 이성과 도덕과 용기를 시험합니다. 진실 여부를 다투지도 않은 피의사실을 브리핑하는 법치(?)국가.. 노무현이라는 한 자연인을 따른 것이 아니라 그가 지향하는 가치를 동의하고 지원했던 사람으로서 이즈음 일어나고 있는 이 일련의 사태에 대해 너무나 참담합니다.
검찰은 국가권력을 집행하는 기관이므로 불편부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라야 아름답고 신성합니다. 그러나 불행한 우리의 현대사는 이를 권력의 ‘하수인’으로 이용해왔습니다. 이를 입증하는데 긴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노무현은 이 파행을 되돌려 제자리로 돌려놓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의 권위를 송두리째 놓아버리고 평검사와의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저는 그때 그 일이 몹시 못마땅했습니다. 그런 후에 검찰은 당시의 살아있는 권력이라 할 사람들을 많이도 기소하고 단죄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검찰은 이제 죽은 권력이 된 이들을 향해 무소불위의 거침없는 칼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아직 법정에서 진실 여부를 다투지도 않은 사안, 피의사실을 버젓이 브리핑하는 것이 과연 법치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 수사기관은 수사권을 위임받기도 했지만 또한 이와 함께 관련자의 기본적 인권을 존중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즈음 저는 정말 가슴이 많이 아픕니다. 광주학살과 군사반란, 그리고 5000억이라는 단군이래 최대규모의 뇌물사건으로 사법적 단죄를 받은 전두환 노태우와 비교하는데 이르러서는 그저 말문이 막혀버립니다. 저에게는 노무현이 한 자연인이 아니라 우리 시대가 지향해야 할 가치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을 지냈지만 노무현 또한 범인과 다름 없이 그 한계와 결점을 지닌 자연인입니다. 거꾸로 매달아서 먼지털이로 샅샅이 털어도 나올 먼지가 없었다면 더 좋았겠지요. 또한 여와 야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로 자금을 살포한 기이한 기업인과 인연이 아예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저는 국가인권위 재직 시절 ‘이라크파병 반대선언’을 주도해 노무현 대통령에게 드러내놓고 반대하기도 했고 한미 FTA를 강행하는 그의 본심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 적도 있습니다. 그는 또한 기득권의 중심네트워크인 조중동을 향해서도 아무 전략 없이 그저 ‘말’로만 비판했습니다. 그 결과로 ‘되’로 주고 ‘말’로 받았습니다. 제가 보는 그는 이해타산에 밝거나 능수능란함과는 거리가 먼 허술한 이상주의자입니다. 그런 그가 한 시대를 끌고나갈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그가 지향하는 가치가 21세기 한국이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라 봅니다.
심각한 파탄에 직면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경제
그런데 이제 그와 함께 그가 가리키던 가치마저 송두리째 매장당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를 지지했던 이들은 다 저와 같이 참담할 것입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같다’는 단세포적 냉소와 불신이 우리 사회를 뒤덮지나 않을지요.
슬프고 아픈 가슴으로 뒤척이다가 떠오른 생각이 위의 만해의 시편입니다. 겉으로는 윤리, 도덕, 명분이라는 달콤한 포장을 하지만 그 속에 탐욕과 불의를 감춘 현상들이 이 부조리한 세상에는 너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문명은 꾸준히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확대하고 신장하는 방향으로 부단히 진보해왔습니다. 고달프고 신산스러운 우리의 현대사 역시 만난을 거듭하면서도 국민의 풍요로운 생활과 민주주의의 확립을 향해 전진해 오지 않았습니까? 만해의 ‘당신’은 만해의 상징어인 ‘님’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타락한 사회, 치욕적인 삶 속에서 윤리, 도덕, 법률은 사실상 권력과 돈에 봉사하는 기만적 허상일 수 있습니다. 식민통치의 어둠 속에서도 그랬고 유신왕조와 5공의 피묻은 권력 내에서도 그랬습니다. 법률이름이 ‘긴급조치’ ‘국가보안’일 뿐 기실 ‘권력한테 대드는 이놈 너 뜨거운 맛 좀 봐라’였습니다.
7,80년대의 피뜨거운 일군의 청년 학생들의 정의감은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희생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불철주야 노동현장을 지키는 근면한 노동자들의 힘으로 우리는 세계 굴지의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모두 심각한 파탄에 직면했습니다. 민생은 거덜나는 중이며 민주주의는 뚜벅뚜벅 후진중입니다. 세계의 공인을 받은 남북평화공존정책은 유리그릇마냥 박살나려하고 있습니다. 부조리하고 그릇된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개선광정하려는 집단의 노력만이 현실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검찰의 무소불위 권력이 반복된다면 이는 국가적 불행
만해의 ‘당신을 보았습니다’ 시편은 회의하고, 흔들리는 우리들에게 주는 잠언이요, 경구입니다. 저 역시 때로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하는 도저한 유혹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홈페이지를 폐쇄할 작심을 하는 노무현의 글을 읽고 잠들지 못했습니다. 잠시 눈을 감은 비몽사몽 간에 필설로 표현하기 힘든 악몽에 쫓겨 다녀야 했습니다.
지금 살아있는 권력인 이명박 정부도 언젠가는 죽은 권력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경전에서는 ‘권력은 눈 위에 새긴 발자국’이라고 합니다. 만약에 검찰의 이와 같은 전방위의 무소불위 권력이 반복된다면 이는 국가적 불행이요, 국민을 불안하고 슬프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진정으로 바라건대, 저는 이명박 정부가 이렇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의 가치관과 생각과는 너무나 다르지만 어쨌든 국민이 선택한 정부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될 수 있을지 회의가 듭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만해와 동시대를 살았던 홍사용 시인은 식민통치 시대의 불행과 위선을 향해 비탄과 애상으로 일관했습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이 세상 어디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다 왕의 나라이로소이다.
무력한 지식인의 반어와 냉소와 절규는 답답한 마음을 대변해 주었지만, 현실의 한 모서리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동일한 현실을 대하는 두 시인의 통찰과 행동은 이렇게도 달랐습니다.
이제와 돌아보니 노무현 세력은 모두 가난뱅이였습니다. 집 한 칸 없이 전세나 월세로 사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청와대에서 일하는 후배들을 만날 때면 오히려 백수인 제가 차를 산 적이 많습니다. 또한 그들은 우리 사회의 주류로부터 멀리 떨어진 변방의 사람들입니다. 그들 역시 모두 나름대로 많은 한계와 결함을 지닌 갑남을녀입니다. 털면 모두 먼지가 나옵니다. 다만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가치’를 중심으로 모였습니다. 참여정부에서 임명직을 맡거나 녹을 먹지 않았지만 저 역시 그들 중 한 사람입니다.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가치를 품고 있는 우리 모두는 여전히 ‘노무현’
작금의 이 현실이 너무 모욕적이고 고통스러워 모든 걸 잊고 어디 멀리 벽지에 숨어 상추 심고 꽃 구경하고 풉니다. 그런 저의 덜미를 잡는 것이 만해입니다. 그리고 비록 그 행동 양식이 만해의 반대편에 서 있지만 너무 절절한 홍사용의 표현을 빌어 자신을 정의해봅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노무현이로소이다’
끝으로 여러분께 하나 알리고픈 사실이 있습니다. 이미 아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1980년 12.12군사반란으로 권력의 기초를 단단히 다진 전두환 신군부 일당이 정치적 반대자를 일거에 몰살시키기 위해 소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날조합니다. 모두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갔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하 취조실에서 6월 중순에서야 ‘광주항쟁’ 사실을 알고 까무러치고 오열합니다.
그리고 군사법정은 김대중에게 광주항쟁을 배후조종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합니다. 사형을 선고받은 김대중은 최후진술을 합니다. 저는 그 최후진술문을 읽고 그의 지도자됨에 경탄했습니다. 무한한 존경심이 우러나왔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자신의 사후에 결코 정치보복을 하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된 이후 그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형언할 수 없는 고초를 주었던 전두환을 사면하고 진실로 용서합니다. 격동기의 지도자로서 가진 참으로 거인다운 면모가 아닐 수 없습니다. 김 대통령은 작금의 현실에‘서글프다’고 하십니다.
정말 서글프고 슬프고 아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가치를 여전히 품고 있는 우리 모두는 여전히 노무현입니다. 노무현은 우리를 보고 이제 자신을 버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어쩔 수 없이 되뇝니다.
“나는 노무현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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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April 22, 2009
에딘버러 1910 선교대회를 돌아보며
“한국 교회의 기독교 윤리학적 성향과 그 문제점: 1910 에딘버러 선교대회 100주년을 돌아보며“ (Social Ethical Tenants of Korean Christianity and Their Problematics: Restrospecting the Edinburgh Mission Conference 1910.)
박충구 (감신대, 기독교 사회윤리학)
1. 들어가는 말
1884년 외래종교로서 미국 선교사들에 의하여 유입된 개신교는 근 5백년에 걸친 조선 유교사회와 연속/불연속성을 가지면서 한국인의 의식과 사회변동 과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쳐왔다(유동식, 1992 : 379). 이 영향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을 것이지만 기독교 선교 120년을 지나면서 한국 기독교는 전 세계적으로 경이로운 성장을 이루어 우리나라 인구의 근 20%에 달하는 신자를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 말을 기점으로 하여 기독교의 성장은 정체되기 시작했고(이원규, 1994 : 195), 최근에 발표된 "2008년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 조사 분석 보고서"(김병연, 2008)에 따르면 한국 개신교에 대한 신뢰도는 급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개신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는 12.1%에 지나지 않는다.
개신교에 대한 신뢰도 추락 원인에 대한 논의는 다양하다. 이런 논의에서 한국 교회의 도덕적 미성숙, 물량주의, 집단 이기성, 배타주의, 강압적인 전도, 언행불일치 등이 지적되고 있지만(김병연, 2008 : 18) 한국교회의 신학적 병리를 지적 비판하는 견해는 매우 드물다. 이 연구 보고서는 한국교회가 잃고 있는 사회적 신뢰도의 추락을 알리는 경종을 울리고 있지만, 무엇이 정작 한국 개신교의 사회적 신뢰도의 추락을 불러오는 진정한 원인인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밝히지 못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은 신학적이며 기독교 사회윤리학적인 관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본고의 관심의 초점은 ‘무엇이 한국교회로 하여금 도덕적 및 사회적 신뢰를 상실하게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이에 대하여 기독교 사회 윤리학적인 해명과 아울러 하나의 답변을 제시하는 데 있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나는 일단 기독교 일반에 대한 개념적 이해를 탈피하고, 한국 사회에 유입된 기독교의 특수성, 즉 한국에 유입된 기독교의 성격이 서구 기독교의 선교적 전략에 따라 축소되거나 생략된 복음(박충구, 2002 : 274이하)이었다는 가설적 전제를 가진다. 따라서 본고는 서구 사회의 구조와 맞물려 진화해 온 기독교 사상체계가 기독교 선교라는 도구적 통로를 통하여 한국 및 아시아에 유입될 때부터 이 문제는 이미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라는 가설적 판단을 전제하고, 이 판단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이런 전제가 옳다면 한국 개신교의 신뢰도 추락의 문제는 단순한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해결책을 통하여 극복될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신학적 사유모형의 변화(theological paradigm change)를 요구받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 논의 과정에서 지난 120년 동안 한국 개신교는 한국 사회 안에서 자발적 오리엔탈리즘과 자발적인 종교적 식민지화를 통한 자기 정체성의 혼란을 거듭해 왔을 뿐 아니라, 이런 혼란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 사회 안에서 기독교 선교에 대한 기독교 사회 윤리적 정당성 확보에 많은 부분 실패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와 더불어 아시아, 한국인의 문화적 정체성을 파괴하고 망각해 온 한국 기독교의 혼란스러운 문화적 자기 정체성과 더불어 4세기 이후부터 기독교가 수용해 들인 제국주의적 논리와 식민주의적 정복주의와 승리주의의 허상이 한국교회의 내적불화, 소외, 그리고 한국 사회를 향한 사회윤리학적 영향력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지적될 것이다.
2. 서구 기독교 선교의 정체성
기독교 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4세기를 지나면서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 체제, 혹은 구조를 상대할 수 있는 조직적 사고가 필요했고, 이 필요에 따라 기독교 안에서 현실주의적인 타협과 순응(accommodation)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 순응의 프로젝트는 간혹 선교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고 교회의 지상권을 확보하기 위한 교회정치라는 다양한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기독교 초기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밝혀주던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상의 조명아래 펼쳐지던 평화주의적 사회윤리 사상(Yoder, 1972)이 퇴조하고, 로마 제국의 질서에 순응하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형성되었다. 로마 제국을 거룩한 질서로 간주하는 중세 기독교 신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 로마 제국의 확장은 곧 이교도들에게 기독교를 전하는 선교 영역의 확장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이미 초기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던 정체(停滯)적 기독교의 변화와 혁신의 결정적 기회로 여겼던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는 대신 교회 지상주의적인 선교 과제가 지상 최대의 과제로 여겨졌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땅 끝까지 구원의 소식이 전해지기까지 유보되는 한편 기독교 세력 확장과 팽창이 교회의 주요한 존재이유로 받아 들여졌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한 대망은 교회의 성장, 팽창 그리고 확대의 과제 이면으로 잠복했다.
여기서 기독교 윤리의 핵심 주제는 더 이상 예수의 평화 사상이 아니었다. 그 대신 지상권을 획득하려는 교회의 선교과제가 강조되었고, 교회는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대행하는 유일한 기관이라고 주장 되었다. 이런 맥락을 따라 억압과 폭정으로부터 인간의 자유, 정의와 평화를 이루기 위한 윤리적 노력은 교회의 선교적 과제에 비하여 차선의 것으로 간주되었다. 서로마(509 BC-476 AD)의 멸망을 거쳐 동로마 비잔틴 제국의 몰락(1453 AD)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샬레망 대제에서 비롯된 신성로마제국(800-1806 AD)과 더불어 기독교는 교회지상주의에 손상이 가지 않는 한도 안에서 로마제국의 사회질서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이렇게 제국과 손을 잡은 기독교는 16세기 이후 콜럼부스의 북아메리카 탐험이후 시작된 서구 열강의 식민세력의 정신적 후원자로 자리를 잡았다. 식민적 팽창정책은 기독교인들에 의한 식민 지배를 통해 취할 수 있는 제국의 정치 경제적 이익관계와 연계되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 8)는 선교적 명령을 위탁받은 교회와 신자들의 의무와 사명을 돕는 과제로 이해되었다. 그리하여 아프리카, 중남미, 그리고 아시아, 즉 비기독교 세계를 향한 기독교 세계의 선교가 16세기 컬럼부스 이후 수백 년 동안 식민주의적 정복과 더불어 영적 정복주의가 병행되는 기독교 선교 프로젝트로 가동되었던 것이다. 이 선교 프로젝트의 특징은 피선교지인들을 향한 정치 경제적 타자화와 더불어 종교적 타자화를 통하여 서구 기독교인들의 자기 정체성을 정복적 주체로 확립하는 작업이었다.
로마 제국의 절대 권력이 지배하는 영역 안에서 기독교는 단순한 하나의 종교로 기능한 것이 아니라 절대불변의 종교적 세계관으로서 자리를 잡았다. 이 세계관은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서구 문명사를 형성해 온 중요한 문화적 상수(常數)가 되었다. 즉 서구 기독교는 기독교 세계(Christendom)을 형성한 경험을 가진 기독교로서 기독교 세계의 문명을 지배해 온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19세기 말 서구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발견되어 선교의 대상으로 간주된 피선교지의 성격은 서구 사회에 비하여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가 당연한 사회적 규범의 원천이 되고 있는 서구 사회의 기독교 문명권에 비하여 다양한 종교가 공존해 온 비서구(非西歐), 특히 아시아의 피선교민들은 서구 기독교의 세계관을 수용할 역사적 경험과 종교적 여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서구 기독교의 유입과정에서 자의적 혹은 타의적인 선택과 생략이 일어났다. 선교주체의 문명권과 선교 객체 문명권 사이에서 선교주체들은 그들에게 있어서 실천 가능한 공통분모를 찾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엔리크 두셀(Enrique Dussel)은 서구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의 성격을 피식민지인들을 향한 지배, 수탈, 그리고 정복, 성애(sexuality)로 특징지었다(Dussel, 2001 : 48이하). 피식민지인들에게 소외와 타자화를 불러온 서구 식민세력과 더불어 존립했던 기독교 선교 전략이 선교지의 사회적 현실과 도덕적 가치와 부딪치게 되자 선교사들은 일종의 회피나 생략의 전략을 가지게 되었다. 한 편으로는 자신들의 선교활동을 보장해 주는 제국주의의 폭력에 대하여 관용하거나 당연시 하는 동시에 토착세계를 향해서는 기독교 복음의 비정치화, 즉 복음의 탈사회성과 탈윤리성이 일어난 것이다. 기독교 선교의 탈윤리성이 서구 식민세력의 정치 경제적 지배와 착취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 능력의 상실을 의미한다면, 탈역사성이란 서구 사회에서 길들여진 기독교 신앙이 제국의 역사적 우월성에 대한 자긍심에 지나쳐 피선교지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들의 토착종교의 역사적 의미와 그 중요성을 간과하거나 비하하는 데에서 일어났다. 서구 기독교 선교사의 관점에서 볼 때 피선교지의 모든 것이 열등하고 야만적이며, 미신적이고 비열해 보였으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서구인들의 우월한 힘과 종교는 언제나 하나님의 축복이었으며 늘 정당했던 것이다.
여기서 기독교 선교에 의하여 피선교지는 탈역사화되어 타자화 되고, 전통문화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오던 피선교민들의 도덕적, 문화적 정체성은 근본적으로 훼손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기독교화란 이런 과정을 일면 필연적으로 의미하는 것이었다. 기독교 선교는 서구화된 기독교인으로 변형되는 것을 의미했으며, 동시에 토착민들의 문화, 사회, 그리고 역사적 경험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서구 문명의 우월성으로 무장한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하여 토착민들에게는 끊임없는 회개가 강요되었고, 이 요구는 기독교의 죄론을 통하여 토착민들의 문화와 종교적 불완전성을 뿌리부터 파헤쳤다. 이렇듯 제국주의적 선교의 여파는 피선교지인들에게 자신들의 문화, 종교, 사회적 정체성에 커다란 혼란을 불러왔다. 외양적으로나 문화 종교적으로 결코 서구인이 될 수 없는 토착민들을 향한 기독교 선교는 피선교지인들의 존재적, 질적 개별성과 차이를 불신앙으로 파악했고, 이 불신앙을 극복하는 길은 결국 아시아인(한국인)의 종교적 자기 정체성의 포기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종한 기독교인들은 개종과 더불어 황인종이 백인종으로 물리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문화, 종교, 윤리, 사회적 관계의 얼개들은 고스란히 남아 서구 기독교인들과는 달리 자기 분열적 토착민의 모습을 드러냈다. 문화적 우월성을 간직한 선교사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토착민들은 영원히 미성숙과 혼란 속에 머무는 존재로 평가되었고, 일면 그들 속에서 서구인들이 굳게 믿어온 기독교 신앙의 보편성에 일치하는 양태를 보일 때에는 서구 선교사들에게 기쁨과 감격을 주는 존재였다. 이런 과정에서 “신앙인들(fideles)과 비신앙인(infideles)들로 사람들이 구별되었고, 신앙은 오직 기독교인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 어느 누구도 유대 신앙 혹은 이교적 신앙이라고 말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타종교는 의식(ritus), 미신(superstitio), 오류(error), 또는 법(lex)으로 간주되고 일컬어졌다”(Kahl, 1978 : 20; 브라운, 2003). 깊고 깊은 문화적 차별의식이 기독교 서구세계의 종교적 우월성과 더불어 서구 선교사들의 인식구조에 깊이 각인되었고, 이러한 관점은 종교적 식민지화의 과정을 통하여 토착민들에게 그대로 이식되었다.
어거스틴 이전, 선교의 객체였던 서구인들이 선교의 주체가 된 시점부터 제국의 힘을 지닌 기독교 선교는 피할 수 없이 자기절대화, 서구기독교 문화의 우월성, 비서구 세계에 대한 동정과 차별, 그리고 폭력적 회심, 타문화와 종교에 대한 비하의 논리를 제국주의자들과 식민지배자들의 정신세계 속에 심었다. 이런 점에서 서구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세력의 오랜 정신적 후원자는 기독교였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어거스틴 이후 기독교는 구교나 신교 모두 형식적으로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 원칙을 지키는 것 같은 논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신학적 이해구조 안에서는 정치권력의 포악성을 지적 비판하기보다는 정치권력의 포악성을 이용한 기독교 선교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있었다. 구원받지 못한 이교들을 향한 서구 기독교인들이 가한 포악은 영혼이 죽어 있는 이교도들의 몸에 대한 포악이었으므로 그리 큰 죄책을 느끼지 못했다.
제국의 선교사들이 비기독교 세계인을 기독교화 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했던 것에 비하여 피선교지인들은 스스로의 문화, 종교, 사회에 대한 정체성을 버림으로써 기독교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요구를 거절할 경우 기독교는 흔히 기독교적 영혼구원의 관점에서 차별과 비하의 태도를 유발시켰다. 기독교 신앙을 고백할 때까지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채 머무는 미완성된 존재,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라 여겨진 까닭이다.
3. 식민적 선교 프로젝트
서구 기독교가 1910년 스코트랜드 에딘버러에서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를 향한 뜨거운 영적, 선교적 의무를 강조하며 열었던 선교사 대회는 그 시점부터 시작하여 한 세기 이상 서구에 의한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를 향한 기독교 선교 프로젝트의 출발점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선교대회는 전 세계에서 각 선교단체가 파견한 약 1500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는 데 영국에서 약 500명, 미국 대표가 500명, 유럽 대표들이 170명, 그리고 나머지는 신흥 교회들이 파견한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당시 한국인으로서는 윤치호가 참가했다. 하지만 이 대회에서 신흥 교회들의 대표들이 특기할만한 목소리를 내었다든지 혹은 독특한 공헌을 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이 선교 대회의 회장이 되어 모든 일정을 주관한 모트(John R, Mott)가 제 1 분과 위원장을 겸하였기 때문에 그의 신학적 견해가 이 대회의 중요한 성격을 여러모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 선교대회는 서구 기독교 문명의 관점에서 형성된 영적인 측은지심을 가지고 비기독교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담고 있다. 이 대회의 특성을 일러 죤 모트는 “세계의 선교문제들에 대한 최초의 조직적이고 세밀한 연구를 위한 시도”(Walls, 2002 : 59)였다고 회상했고, 헤드룬트(Roger Hedrund)는 “19세기의 고전적 개신교 선교의 종식과 더불어 20세기의 지구적 복음화 운동의 출발점”(Hedrund, 1997 : ix)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선교 대회는 2년의 사전 연구 과정을 거쳐 8가지 주제, 즉①모든 비기독교 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② 선교 전장에 존재하는 교회, ③ 국가적 삶의 기독교화와 관련된 교육, ④ 비기독교 종교들과의 관련성과 선교적 메시지, ⑤ 선교사들의 준비, ⑥선교 기지, ⑦ 선교와 정부, ⑧협력과 일치의 증진(Anderson, 1910)이라는 주제로 나누어 심도 깊은 연구를 종합 발표 토론하는 내용으로 이루어 졌다. 이 대회가 가진 또 하나의 특성은 기독교 선교를 위한 전(前) 세기적 경험과 역량, 그리고 정보를 수합 분석함으로써 20세기 기독교 세계 선교를 위하여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일치된 전략과 광범위한 협력을 이루어 냈다는 데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에딘버러 대회는 20세기에 중요한 피선교 지역으로 간주된 지역을 향한 서구 교회의 선교적 전략과 방침, 그리고 그 이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여기 드러난 기독교 선교의 방향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서구 기독교 진영의 선교적 목적을 위하여 참가자들은 일체의 신학적 토론과 혼란을 불러오지 않기로 전제했다. 그 이유는 피선교지를 향한 선교적 긴급과제가 강조되었기 때문에(Anderson, 1910 : 5) 선교적 목적에 혼란을 불러오는 각론을 피하기로 사전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교주체와 객체 사이에 놓여 있었던 문화 교차적 신학적 논의는 유보되었다. 선교적 과제를 위하여 문화 신학적 담론을 제한했던 것이다. 이 문제는 세계 교회협의회의 1948년 암스테르담 회의를 거치면서 신학적 자기비판과 선교개념의 오류를 지적함으로써 다소 수정되었다.
둘째, 이들이 표방한 바 기독교 세계(Christian world)와 비기독교 세계(non-Christian world)에 대한 문화 대립적인 선교적 공략을 지향하는 시각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 기독교 세계가 주체화되고 비기독교 세계가 대상화됨으로써 비기독교 세계가 일방적으로 해석 이해되었다. 여기서 기독교 세계의 보내는 교회와 비기독교 세계의 받는 교회가 나누어지고, 보내는 교회의 우월성과 영웅주의적인 선교의식이 찬양 고무되었다. 그리하여 서구 기독교 사회의 교회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기독교적인 세계로 긍정하는 오류를 낳았고, 서구의 교회 안에서는 마치 선교적 과제가 완성된 것 같은 오해를 불러 왔다. 이 관점은 20세기에 서구 사회의 세속화와 비기독교화의 과정을 통하여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로 남게 되었다.
셋째, 교회제국주의의 연장으로서의 선교제국주의적 입장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이끌어 감으로써 선교사들을 영적 군사들로, 선교를 위한 전략, 상황분석, 등의 군사적 표현들이 비판 없이 사용되어 서구의 선교전략적인 공략의 대상으로 아시아를 비롯한 비기독교 세계들이 묘사되었다. 에딘버러 대회에 보고된 한국 리포트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모든 전술한 이유들을 들어 선교협회에게 한국의 즉각적이고 철저한 복음화를 위하여 군대를 진군시켜 줄 지혜와 필요를 요구합니다“(Anderson, 1910 : 81). 따라서 에딘버러 대회 이후 서구에 의한 비기독교 세계를 향한 선교는 선교 제국주의적 성격이 농후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넷째, 서구, 특히 미국의 자본주의 문화가 가져온 풍요, 과학기술의 발달과 식민주의적인 정치적 팽창을 기독교 선교확장을 위한 중요한 자원과 기회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풍요와 과학기술 발달에 대한 지나친 긍정의 태도가 앞섰고, 서구 제국주의와 식민정책에 대한 자기비판이 취약 했으며, 오히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정책을 기독교 선교전략을 위하여 이용하려 했다는 점에서 사회윤리학적인 자기 비판적 시각이 심각하게 결여되었다. 따라서 에딘버러 1910년 선교대회는 하나의 식민적 기획(colonial project)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선교는 세계 정복을 의미하는 깃발 아래 있게 되었다. 실제에 있어서 ‘세계’는 주로 신학적 개념이 아니었고, 지리적 그리고 역사적 개념이었다. ‘세계’는 기독교 세계와 비기독교 세계 두 가지 구성요소로 구분되었다. 근본적으로 이 두 세계의 관계는 사도적 제국주의 것이었다. 기독교 세계가 비기독교 세계를 정복해야 했다. 예로서 이러한 제국주의 개념은 에딘버러 대회에서 사용된 군사적 용어들을 통해 드러나는 데, 즉 ‘군인들’, ;세력‘ 전진, 군대, 부흥단, 행진명령, 전쟁협의회, 전략, 그리고 계획과 같은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보쉬, 1980 : 190).
4. 교파주의의 전략과 진리담론
20세기 기독교 선교의 지평을 열어 나간 1910 에딘버러 선교대회는 반세기 이상을 걸쳐 그 영향력을 미쳤으며, 그 이후 개최된 무수한 선교대회의 근본성격을 규정지었다. 1951년 스코트랜드 총회에 보고된 외방선교 위원회의 보고서는 “‘에딘버러 1910‘선교 대회의 결실은 아직도 맺히고 있습니다. 그 열매중 얼마만큼은 1950년에도 맺혔습니다”(Anderson, 1910 : 369)라고 보고함으로써 에딘버러 선교대회 이후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 정신이 이어지고 있음을 시사했다.
트뢸치는 기독교 역사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통하여 세 가지 신앙의 유형론을 제시한 바 있다(Troeltsch, 1960 : 328이하). 소종파, 신비주의, 그리고 교회유형이 바로 그것들이다. 그는 소종파는 자기 집단의 정체성에 관심하는 데 비하여 신비주의는 개인주의적인 내면의 자각과 체험을 중시했다면 교회유형은 정치권력과 경제 권력에 순응함으로써 그 종교 집단의 확장과 성장을 도모하는 속성을 지닌다고 해명하였다. 나는 에딘버러 선교대회를 이끌어간 서구 기독교인들의 전략적 자기이해는 에른스트 트뢸치(Ernst Troeltsch)가 분류한 세 가지 신학적 입장들 중에서 순수한 복음을 사회 정치 문화적 요인들에게 순응시켜온 교파주의적 신학에 채색된 성격으로 규정한다. 교파주의적 기독교 유형의 신학적 특징은 성과 속간의 현실주의적인 거래와 타협에 있다. 즉 정치와 종교의 긴장관계가 협력관계로 바뀌고, 종교에 의한 영적우위의 권력 장악이 일어나며, 국가권력을 배후로 한 선교가 가능하다면 교회의 확장과 성장을 위한 타협을 받아들이곤 했기 때문이다. 교회의 성장과 팽창을 우선시하는 교파주의 신학은 제국주의와 손을 잡기 위하여 타협적 태도를 선택했다. 이러한 변화는 초기 기독교의 종말론의 퇴조와 더불어 기독교 신앙을 역사화한 어거스틴(Shinn, 1964 : 32) 이후 로마 제국에 순응하기 시작했던 기독교에서 비롯된 바, 가장 성공적인 통합은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로마제국과 기독교의 통합은 서구 세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세력으로서 두 세력 간의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통해 제국의 확장과 기독교 선교의 보편화를 이루어 내는 요인이 되었다. 비록 구교(舊敎)와의 신학적 견해 차이로 인하여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기독교 내부의 분열이 있었을지라도 기독교적 주체와 비기독교적 객체에 대한 차별과 구별의 논리는 개신교에서도 변함없이 적용되었다. 유대인들을 박해해 온 기독교 역사가 서구 문명사를 관통해 오다가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 사건(Holocaust)으로 이어진 사실은 비기독교인들을 향하여 가졌던 기독교인들의 차별적 편견의 깊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준 사례일 것이다. 비록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서구 문화 속에 깊이 배인 서구우월주의와 비기독교 세계에 대한 차별적 편견은 심지어 기독교 문명구조에 의하여 박해를 받아왔던 유대인들에게서도 드러난다. 즉 기독교는 기독교 안에서, 그리고 기독교 문명권 안에서 비기독교적 세계에 속한 이들을 차별해 왔다. 이 차별의 적극적 표현은 기독교 선교를 통한 개종이었고, 개종을 거절하는 이들을 향해서는 저주와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거나, 심판의 집행자로서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Ellis, 2008).
어거스틴은 기독교 제국 “경계선 너머의 이교도들을 군사적으로 정복함으로써 복음 선포를 위해 그들을 준비시키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그렇게 되면 제국의 박애적인 보호 아래에서 복음 설교가 평화롭게 진행될 수”(보쉬, 1980 : 134) 있을 것이라고 낙관했기 때문이다. 세례는 군사 정복의 2차적인 결실이었으므로 이교도들을 개종시켜 세례를 주기 위해서는 군사적 정복이 필요했다. 이렇듯 기독교의 선교는 제국의 조직과 힘과 군대를 이용하여 선교적 확장을 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언제나 이를 이용해왔다. 이러한 정복주의적 사역의 당위성을 이들은 누가복음 14: 23절, 즉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예수의 성서적 명령에서 찾았다.
특히 에딘버러 선교대회는 서구 과학기술의 진보를 이용하여 비기독교인들을 향한 정복과 선교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는 데 매우 고무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이전의 시대와는 달리 전기, 전신전화, 기차, 자동차, 증기기관의 상업화를 통하여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 깊어졌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불러오는 풍요는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선물과 섭리로 여겨졌고, 이러한 섭리와 은총을 받은 이들은 당연히 복음을 증거 하는 과제 앞에 감격해 하며 성실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세기를 거쳐 20세기에 전개된 기독교 선교는 종말론적인 구원보다, 미래지향적인 변화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를 한층 더 부풀리게 되었다. 20세기 초 유럽의 교회들은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미래를 향한 기대와 희망의 정서가 많이 위축되어 있었지만 미국의 교회들은 이런 낙관적 분위기를 1950년 이후까지 가지고 있었다(Bosch, 2005 : 338). 따라서 미국적인 교파주의 신학과 19세기 낙관적인 현실주의적인 실용적 가치가 진리논쟁을 좌우하게 되었고, 이에 선교적 영웅주의와 비기독교 세계를 향한 영적 동정심이 더해 져 제 3세계를 향한 기독교 선교의 불을 붙였던 것이다. 동시에 교파주의적 신학은 타 문화권을 만나며 새로운 인식의 확장을 도모할 수 있는 기회를 여는 진리담론보다 교회의 정복주의적 세력확장을 통한 이교도들의 영혼구원에 목적에만 두는 경향을 지녔다. 진리담론은 자신들의 신학 안에 이미 완료되어 내장되어 있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파주의 선교신학에서 진리에 대한 새로운 담론 형성 가능성은 철저히 부정되고 거절 되었다.
5. 선교제국주의와 한국교회의 윤리의식
1) 윤리에 우선하는 기독교 선교
한국에서 제국의 폭력, 과학기술의 진보와 자본의 힘을 동원한 기독교 선교는 3중적 전략을 가지게 되었다. 이 전략은 피선교지 정치 세력과의 관계, 교육 및 의료 기관 설립, 그리고 교회 세우기로 요약될 수 있다. 중앙화된 정치권력의 협력과 도움을 얻는 선교 방식은 피선교지의 정체세력을 압도할만한 군대와 우월한 힘을 나열하고 과시할 수 있어야 했다. 자국의 정치권이 우월한 지위를 점한 상태에서 맺은 제국주의적 협약을 통하여 선교사들은 선교의 자유와 기회를 직 간접적으로 확대해 나갔다. 즉 피선교지 자국의 정치권력이 선교사 자국과 외교적 협약을 맺을 때 외래의 선교적 세력에 대하여 내린 피선교지의 금지령을 제거하거나, 유보시키거나, 최소한 명문화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취했던 것이다. 여기서 최소한 두 가지 방향의 서로 다른 목적이 드러난다. 정치 세력은 경제적 이익관계를 관철시키는 것, 그리고 선교사들은 선교적 자유와 기회를 획득하려는 목적이다. 형식적으로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키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서구 기독교는 서구 정치세력을 앞세워 선교의 자유와 권리를 획득했던 것이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조선의 국내정치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들은 먼저 교육과 의료사업 같은 사회사업을 하고 후에 전도 사업을 시작했다. 전도사업은 때때로 방해를 받았으나 전체적으로 조선 정부에 의해 묵인되었다(백종구, 2002 : 78).
서구의 막강한 권력과 부를 산출한 실용주의적 학문에 대한 긍정적 이해는 조선말기의 관료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었고, 이러한 논리는 정치적 이해관계와 연계되어 선교사들의 도움을 배제하기 어려웠다. 이때부터 피선교지에서는 서구 세계 지향적인 발전, 성장, 변화의 요구가 강력하게 일어났다. 선교사들은 피선교지의 민족의 이해보다 자신들의 선교적 이해를 앞세웠기 때문에 조선의 자주권을 상실한 한일합방이 이루어졌어도 그들의 선교 사역은 그리 큰 지장을 받지 않았다. 이런 과정은 선교 초기만이 아니라 일제 치하에서도 유지되었다. 여기서 형성된 선교사들의 판단양식은 기독교의 확장이 조선 민족의 이익이나 자주권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2) 군사문화의 수용
20세기를 절호의 선교적 기회로 포착하고 교회의 확장을 기해 온 제국주의적 선교 기획은 선교지를 공략하는 전략을 군사적 메타포들을 사용하여 세웠을 뿐 아니라 선교사들을 영웅주의적인 영적 군병들로 이해하였다(Bosch, 2005 : 335) 기독교 초기 비폭력 평화주의적인 예수의 가르침은 이제 제국의 종교로 변모하면서 종교와 정치의 거룩하지 못한 연대와 야합을 허용하게 되고, 마침내 정치적 폭력성을 종교가 거듭 거듭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정치는 종교를 이용하여 사회의 일치를 도모하고, 종교는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교회의 영역을 넓히고 강화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적 이익과 종교적 이해관계의 영역밖에 있는 이들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는 무관심 내지는 적대적 동조의 토대를 유발했다. 이는 평화보다 교회의 존립과 성장을 우선시하는 교파주의 신학이 낳은 하나의 결과다.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교파주의 신학은 교파적 이해관계를 침해하는 세력과 조건을 악마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한편,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한 일제, 독재, 군사정권과 타협 해 왔다.
서구 제국의 군함을 타고 온 기독교 선교사들은 제국의 위력을 승인해 온 정당전쟁이론(just war theory)을 비판할 능력이 없었다. 오히려 제국의 힘은 늘 정당하고 당연했으며, 제국의 팽창은 선교의 긴급한 과제를 교회에게 안겨주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군대를 동원한 위협과 정복은 성서의 명령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마태복음 28: 19)는 명령과 더불어 “땅을 정복하라”(창세기 1: 28)는 명령에 대한 응답으로서 기독교인들의 당연한 태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제국의 군대와 조직은 기독교 선교의 통로였으므로 제국주의적 폭력에 의한 억압과 착취와 포악에 대한 비판은 거의 불가능했고, 오히려 제국의 폭력을 선한 도구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박충구, 2008 : 156이하).
이렇듯 한국에서 정치와 야합해 온 선교 신학은 지난 역사 속에서 이념 대립을 조장하며 전쟁을 찬양하고, 경쟁과 성장과 번영을 축복으로 선언하며 배타와 증오를 가르치는 습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노선을 따르는 일부 기독교가 초 대형교회들을 이루어가게 되었고, 초 대형적인 목회적 성공은 마치 하늘의 재가를 받은 것같이 인식되어 신학적 및 사회 윤리학적 자기 비판과 반성을 거부해 왔다. 이들은 서구 선교사들이 벌려온 제국주의적 선교방식을 그대로 본받아 동일한 영적 전쟁을 전개하는 방식으로 해외에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있으며, 급기야는 지난 2005년 아프칸 단기 선교 사건을 불러 오기도 했다.
3) 현실주의적 도덕 폐기론(antinomianism)
20세기 아시아 선교역사를 살펴볼 때 우리는 진리 및 도덕 담론이 간과되며 전개된 기독교 선교의 배후에는 언제는 서구 열강의 강한 군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고, 이러한 현상은 오늘도 여전히 대형 보수 교회 목사들에 의하여 전승되고 있다. 현실주의적인 힘의 정치가 종교의 은신처가 된다는 것은 결국 기독교가 하나님보다 현실적인 정치세력을 더 과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런 현상은 나아가 현실적인 정치세력 안에 하나님이 역사하고 있다는 신학적 착각을 불러 오게 만들기도 한다.
특히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조용기 목사의 경우 19세기 초 형성된 현대 근본주의 신앙을 필두로 하여 오순절 성령운동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여기에 더하여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을 오중복음과 삼박자 축복(조용기, 1998)이라는 명칭을 붙여 재구성한 보수신앙을 앞세운 복음지상주의를 주창해 온 결과 세계에 유래 없는 성공적인 교회성장을 거두었다. 교회의 확장과 성공은 신도들에게 하나님의 승인과 축복으로 해석되는 한편 막대한 헌금을 수납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어져 축적된 물적 토대를 이용하여 새로운 영역에서의 교세확장의 수단으로 이어진다.
선교지상주의가 주창해온 선교와 전도의 긴급성에 밀려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며 도덕적 성찰과 비판의 기회를 가지지 못한 한국교회는 마침내 제어할 수 없는 도덕적 아노미 현상을 직면하게 되었다. 서구 사회가 기독교화된 문명세계를 자랑했으나 20세기 후반부터 탈 기독교화하는 동시에 비기독교적 문명(being de-christianized)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고, 1960년대 이후에는 서구 신학이 지닌 사회 윤리학적 모순으로 인해 해방신학이 대두되어 교회 안에 편만하게 기생하고 있는 교회내적 악을 지적 비판했다. 선교주체들의 신학이 안고 있었던 무수한 문제들이 비판을 거쳐 폭로된 것이다. 그러나 피선교지로 자리매김해 온 우리 한국 기독교 안에서는 성장 최면에 걸려 서구 선교신학의 제국주의적 선교의 포기라는 방향 전환의 의미를 애써 무시하고 있는 현실이다. 반면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성차별주의, 전근대적 권위주의, 비민주주의, 물량주의, 천박한 성공주의, 도덕적 성숙없는 성장주의, 물질만능주의를 조장해 온 사실로 인해 시민사회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으며(이원규, 1994 : 53이하) 급기야 기독교의 성장의 정체가 일어나고 동시에 시민사회와 대중으로부터 유례없는 저항과 저평가를 받고 있다.
4) 배타적 보수주의의 몰인권성
기독교 서구 세계가 비기독교 세계를 향하여 영적 의무를 느끼는 동시에 선교 전략의 대상으로 삼은 아시아 대륙은 이슬람, 불교, 힌두교, 유교, 도교 등 오랜 시대에 걸쳐 인류의 종교적 요구에 응답해 온 종교적 유산들을 담고 있는 대륙이다. 이 대륙을 향하여 에딘버러 선교대회는 비기독교적인 종교에 대한 연구를 심도 있게 다루기보다는 단순히 전략적인 공략의 대상으로 삼았다. 동시에 그 선교대회는 기독교 세계와 비기독교 세계를 나누고 비기독교 세계를 향한 기독교 세계의 선교적 책임을 강조하는 한편, 비기독교 세계는 서구 세계의 방식을 따라 회개와 개종을 해야 하는 세계로 이해했다. 에딘버러 대회에서 시작된 20세기 선교의 거대한 흐름은 선교자와 피선교자, 주체와 객체로 분리되어 이해된 세계를 전제하고 있어서 사실상 하나의 세계로서 상호긍정과 대화의 요구를 외면한 것이다.
그 결과 기독교 선교는 선교사들의 영웅적 행위를 기리는 정복주의적인 것이 되었다. 기독교 선교사들에게는 서구 종교의 우월성과 더불어 과학기술적 우위성이라는 두 도구로 무장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의 관점에서 볼 때 비서구 세계는 열등하였다. 서구의 우월성은 기독교 신앙의 결과로 이해되었고, 아시아 특히 한국 사회의 후진성과 열등함은 아시아 종교의 책임으로 간주되었다. 독립협회 운동 실패 후 독립신문 경영권을 인수했던 영국인 선교사 엠버리(H. Emberley)는 “한 나라의 문명진보는 교화로부터 오고 교화는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온다”(백종구, 2002 : 160)고 주장했고, “하나님을 존경하고 천도를 조종하는 나라들은 세계 각국 중에 반드시 문명하고 반드시 부강할 것”(백종구, 2002 : 161)이라고 단언했다. 따라서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는 개종과 회개의 대상이었고, 토착민들의 종교적 풍습과 관행은 미신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에 의하여 기독교 신앙을 전수받은 토착민들도 선교사들과 동일한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의 타다 시로시 목사는 로버트 스피어 박사(Robert E. Speer)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하였다.
물질주의와 세속주의가 우리의 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신에 관한 기독교적 교리와 그리스도의 근본적인 복음에 반대하는 우리나라의 다양한 종교도 역시 우리의 적입니다(브라운, 2003 : 370).
비기독교 세계의 후진성과 열등함은 군사문화와 과학기술을 다루는 우월한 기독교 세계의 현실적인 능력과 대비되었고, 이러한 대비는 토착종교에 대한 무시와 비하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런 토착문화 속에 자리를 잡고 살아온 토착민들에 대한 비하의 논리를 자연스럽게 불러왔다.
한국의 종교적 의식은 이 수많은 귀신들을 달래거나 속이려는 애처로운 노력이다. 공포에 싸인 사람들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있다. 무시무시한 모양으로 조각된 머리 입술과 볼과 눈썹을 칠한 장승이 마을 입구를 지키고 서 있다. 집 근처에는 말뚝 하나가 땅에 박혀 있는 데 드러나 있는 부분은 짚에 싸여 있으며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말을 적어 놓은 흰 종이가 끝에 붙어 있다. 이것은 터주 신을 달래는 것인데, 터주 신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제물과 헌물을 함께 바치는 것이다...(브라운, 2003 : 38).
한국에서 전통종교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와 이해가 주어지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일부 토착 신학자들의 노력에서 두드러졌지만, 선교지상주의적인 태도는 이러한 경향을 무시했다(백종구, 2002 : 182-250).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기독교 선교라는 틀 안에 제약시키려 했던 선교사들의 신학적 편협함은 한국 기독교를 편협한 종교로 전락시켜 제국주의적 종교의 이류라는 낙인이 찍히게 만들었고, 지성적이며 합리적인 대중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형편에 처하게 하였다. 사회윤리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토착민들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무시하는 선교, 선교사와 신교대상 간의 근원적인 평등관계가 설정되어 있지 않았던 선교, 그리고 서구 종교 우월주의적인 선교라는 풍토에서 자라온 한국 개신교의 보수주의 성향은 근대 세계가 보편적으로 수용하기로 약속한 인권에 대한 이해능력의 결핍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기독교 보수주의의 색체가 강하면 강할수록 근대적인 인간의 자유와 평등, 존엄에 대한 이해가 취약해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5) 비정치화의 보루가 된 교회
일제 강점기에 복음의 절대 진리를 외쳤던 선교사들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경제적 자립은 강조하면서도 한국 사회의 변화는 일제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 민족의 독립과 자주 그리고 교회의 개혁 능력을 지원하는 방법보다는 일제를 도구로 삼는 것이 그들이 목적한 기독교 서구화의 속도가 가속화될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박순경, 1986 : 70). 그리하여 이들은 개신교 선교 초기에는 복음화를 위한 지상의 과제를 비정치화와 개인구원에 치중하는 경건주의에 초점을 맞추는 선교 전략을 선택했다. 그러나 실상 선교사들은 이미 서구 자본주의적 사유방식과 부르주아적인 삶의 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일면 그들의 자국과 상대적으로 오랜 외교적 관계를 맺고 있는 일제와의 관계에서 더욱 안전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기회가 있는 대로 자국의 사업가들을 위하여 조선의 다양한 광산 채굴 사업의 이권을 매개해 주고, 일부 사업가는 그 권리를 일제에 팔아 넘겼다(Harrington, 1973; 박순경, 1986 : 94).
교파주의 신학에 깊이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의 신학적 상상력은 자본주의적인 양적 성장과 팽창에 지나친 관심을 둔 나머지 기독교 복음의 예언자적인 전통을 약화시키거나 생략했다. 더구나 조선 왕실과의 관계와 한일합방 이후 일제와의 관계를 희생시키면서 이루어 낼 선교적 과제는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철저히 기존질서 유지적인 사회윤리 의식을 한국 교회에 이식했다. 그리하여 이들에 의하여 생략된 복음은 성서가 담고 있었던 출애굽의 해방적 지평, 계약법전의 약자보호법 정신, 희년법의 혁명사상, 예언자들의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앞세운 정의 실천의 요구, 정치권력의 억압적 현실에 대한 해방과 평화와 생명의 복음에 대하여 침묵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비정치화 프로그램은 한국에서의 선교사역에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조선이 일제에 의하여 강점을 당해도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놀라운 회개운동이 일어났으며, 교회가 급성장하고 있다는 보고를 그들의 본국 선교국에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순경은 이 정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서양의 세력에 굴복한 한국인들은 기독교가 서양나라들의 종교라고 서양과 동일화시키고서 서양을 흠모했던 것이며, 구원의 모델로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이 오류가 바로 기독교 선교의 결실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기독교와 서양문화의 동일화의 결과였다. 그 오류가 바로 민족의 문제로부터 한국 기독교가 이탈해 온 과정의 시초였다(박순경, 1986 : 94).
정치, 사회적 환경을 선교의 도구로 삼아 온 교파주의 유형의 기독교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비정치적 선교를 지향함으로써 비정치적 정황이 기독교 복음을 확장하는 데 가장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다. 그리하여 사회, 정치, 경제적 정의와 평화를 위한 복음적 노력은 생략하고 오직 영혼구원을 위한 개인주의적 회개를 요구했으며, 기독교는 정치적 정황에 개입할 수 없다는 정교분리 원칙을 체질화 했던 것이다.
민족이 망해도, 가난해도, 전쟁을 겪어도, 기독교는 부흥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는 데 한국교회의 어줍지 않은 경이로움이 있었다. 에딘버러 대회의 의장이었던 모트는 1907년 극동 아시아 지역을 여행한 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만일 한국에서 같이 일하고 있는 여러 선교부가 응분의 지지를 받고 당장 사업을 확장한다면 한국은 비기독교 세계에서 최초로 기독교 국가가 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 나는 선교 사업의 투자에 비하여 한국에서와 같이 크고 견실한 성과를 얻은 피선교지를 알지 못한다”(박순경, 1986 : 98)고 했다. 민족의 현실에 개의치 않는 기독교 선교는 한국 기독교인들을 한국의 사회 정치 경제적 현실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능력, 즉 기독교 사회윤리학적인 사유능력을 봉쇄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은 한국 기독교를 사회윤리학적으로 무능하게 만든 근본 요인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한국 기독교의 도덕적 신뢰성의 추락을 불러온 가장 커다란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런 한국교회를 향하여 김용복은 이렇게 비판했다.
한국 기독교는 배타적이고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사이비 메시아적․쇼비니즘적이다. 한국 기독교는 배금주의 종교로 전락하였다. 한국 기독교는 차별주의를 허용하는 가부장적 권위주의 종교다. 한국 기독교는 독선적이고 분열주의적 종교집단이다. 한국 교회는 성서를 오독(誤讀)하며, 기복적 물신주의에 만연되어 있고, 종말론적인 환상주의와 도덕적으로는 위선주의에 물들어 있다(김용복, 2001).
김용복의 비판적 시각은 오늘의 한국 기독교가 얼마나 기독교 사회윤리학적 자기 이해에 있어서 왜곡되어 있는지를 밝혀주고 있다. 에딘버러 대회 이후 한국 개신교 선교 100년이 지나는 오늘날 우리 사회 구성원의 약 20%를 점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의미하는 사회윤리학적인 의미는 결국 한국사회의 보수성, 전근대성, 차별주의, 가부장성, 배금주의, 물신주의와 위선주의의 오염도를 증가시키는 인자들이 되고 있다고 판단해도 큰 오류가 없을 것이다. 이 판단이 그릇되지 않다면 오늘의 기독교는 우리 사회의 정의, 자유, 생명, 평화의 확대과정에 커다란 장애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진지한 의혹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6. 나오는 말
한국세계선교협회의 통계에 따르면 에딘버러 1910 대회 이후 한국 개신교의 위상은 피선교지 교회에서 1만 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로 바뀌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 교회는 2005년도 통계를 미루어 볼 때 약한 신흥 교회의 위상에서 한국 사회 구성원의 18.3%를(장석만, 2007) 차지하는 강력한 종교로 변모했다. 한국 기독교는 물량적으로나 인적 자원으로 보나 이제는 힘을 부여받은 종교(empowered religion)로서 과거에 비하여 그 위상을 달리하고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 기독교가 보이고 있는 일반적인 특징에는 정치 세력화된 기독교, 보수적이며 배타적인 기독교, 종교 제국주의적인 지배세력을 지향하는 성향들이 있다. 여기서 나는 서구 기독교 역사가 반복했던 오류, 즉 종교와 정치의 거룩하지 못한 연대가 반복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가지게 된다.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려면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하나의 건전한 종교로서 자기 정체성을 가지기 위해서 여러 가지 극복해 내야 할 과제들을 가지고 있다.
이런 과제는 일단 서구 세계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피선교지로 규정되던 한국교회가 자기 혼란을 벗고 진정한 한국 교회의 정체성을 찾는 과제가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서구 기독교의 제국성을 옷 입고 있는 오늘의 한국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보다 보편적인 정의와 자유와 평등의 촉진자로 그 존재의미를 찾으려면 나는 먼저 유대 기독교적 예언의 영성과 더불어 아시아인들의 고난의 역사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아시아적 영성과의 정직한 만남과 대화가 불가피하다고 본다.
이 과제를 풀어 나가기 위하여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한 세기 전 서구 기독교 선교사들이 걸어놓은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그리고 정복주의적 선교 기획의 마법에서 해방되어 민족과 더불어 평화, 생명과 자유의 증진을 불러 올 수 있는 새로운 선교 지평을 열어 나갈 수 있는 신학의 패러다임이 찾아야 한다. 이 새로운 신학의 패러다임의 윤곽은 제국주의적인 종교적 영성으로부터의 해방을 거쳐 아시아의 대중이 지닌 영성과 만나는 생명, 자유, 평화의 지평에서 지배와 정복의 신학이 아니라 섬김과 겸비(kenosis)의 신학을 지향하는 방향에서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Abstract
“Social Ethical Tenants of Korean Christianity and Their Problematics: Restrospecting the Edinburgh Mission Conference 1910”
By Choong Koo Park, Ph.D
Professor of Christian Ethics of the Methodist Theological University
Korean Christianity is presumed as a product of the mission project of the West deliberately designed in the Edinburgh mission conference of 1910. Unlike western Christian churches, the subject of the Christian mission, Korean churches were formulated in accordance with the process of omittance of the gospel that happened when western missionaries strove to Christianize Korea without confronting the possible conflicts which could have emerged from Korea’s social, political and cultural milieu. As a result, the gospel introduced by the western missionaries was accordingly de-politicized, and ignored the religious and cultural reality of Korean people.
The gospel brought to Korea by western missionaries was contaminated by the compromised spirit that Ernst Troeltsch well articulated in his perception of denominationalism. The tradition of Christian denominationalism in the West was formulated though the realistic accommodation of worldly realities such as politics and economics at the cost of the eschatological, Judao-Christian prophetic spirituality revealed in the teaching of Jesus. The basic nature of the compromised spirit held within denominationalism tends to be more conservative than revolutionary. In this vein the Korean church became unable to find a balance between the ideal and the real, and lost its power to transform the unjust reality of Korean society.
The more the Korean church is empowered, the more it misuses its power to ally with status quo because it has been nurtured through the imperialistic dominating spirit of the western Christianity associated with the spirit of imperialism. This is why one can easily experience of the practice of sexism, materialism, hegemonies, and prosperity theory within Korean churches. This essay concludes that unless Korean Christianity overcomes the spirit of the empire transmitted from western missionaries, it is hardly possible to serve the Korean society with a liberating spirituality of freedom, justice and equality. In order to achieve an authentic Korean Christianity, the Korean churches should reappraise Asian spirituality, where it may find the power to overcome the imperialistic dominant spirituality of the W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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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April 20, 2009
"MB정부·보수언론 미네르바에 사죄해야"
진중권
"검찰의 MBC
기사입력 2009-04-20 오후 7:14:59
진중권 중앙대학교 겸임교수가 20일 서울중앙지법이 1심에서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박대성(31) 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을 두고 "이명박 정권과 보수언론은 미네르바에게 사죄해야 한다"고 성토했다.
진중권 교수는 이날 진보신당 당원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보수적인 대한민국 법원조차 미네르바에게 죄가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판결의 내용도 확실하다. 첫째 허위에 대한 의식이 없었고, 둘째 설사 그런 의식이 있었다 하더라도 공익을 해칠 목적이 없다는 것"이라며 "한 마디로 대한민국 검찰의 완패"라고 꼬집었다.
진 교수는 "미네르바 사건은 대한민국 법치의 수준을 만방에 드러낸 국제 망신이었다"면서 "지금이 무슨 나치 시절도 아니고… 그나마 이번 판결이 조국 대한민국의 명예를 더 큰 망신으로부터 막아준 셈이 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아무리 법원이 보수적이라 하더라도, 판결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형식, 최소한의 요건이라는 게 있다"면서 "유죄판결을 내리고 싶어도 말 되는 건덕지가 하나라도 있어야 한다는 얘기"라고 했다.
그는 "검찰 측에 완패를 안겨준 이번 판결은 미네르바에 대한 검찰의 기소 자체가 법리적 판단이 아니라, 정권의 주문에 응한다는 차원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행위였음을 강하게 시사한다"면서 "앞으로 MBC
이어 그는 "
그는 "문제는, 이 어처구니 없는 코미디 때문에 미네르바라는 자연인이 아무 죄 없이 몇 달 동안 인신을 구속당하는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라며 "이 역시 하나의 합법적 폭력, 합법적 범죄"라고 질타했다. 그는 "미네르바는 무죄로 풀려나지만, 그 동안 당했던 피해와 고초는 어디서 보상받느냐"며 "바로 이것이 MB 정권에서 내세우는 '법치'의 심오한 목적이다. 구속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법 허무주의나 조장하는 이런 못된 관행을 통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 MB 정권이다. 지금 당장 공론화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합법을 가장한 폭력의 가장 큰 책임은 물론 강만수를 비롯한 MB 정권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미네르바의 신상까지 파헤쳐가며 그를 매도하는 데에 앞장 섰던 보수언론들도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서 "그들은 미네르바에게 전문대 출신의 백수라고 폄하하면서, 그에게 인터넷 폐인의 이미지를 뒤집어 씌웠다. 나아가 그의 가족까지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그의 사생활까지 온통 헤집어 놓기도 했다. 그때 보수언론의 태도는 사디스트 변태성욕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고했다.
그는 "정부와 여당, 그리고 보수언론은 미네르바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한다"며 "지금 필요한 것은 'if'나 'but'이 없는 깨끗한 사과"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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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의 요비니안의 몰락
어거스틴, 제롬, 요비니안은 각기 성(sexuality)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제롬의 금욕주의에 의하여 독신과 결혼을 동격으로 보았던 요비니안이 교회로부터 이단척결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거스틴은 제롬과 요비니안 사이에 엉거주춤 서서 제롬을 지지하는 속내를 보이면서 동시에 대중의 기호에 적절한 답변을 제시 했습니다. 이중 기준을 가진 셈이지요. 아래 서평은 요비니안을 다룬 저작에 대한 서평입니다.
Bryn Mawr Classical Review
Tuesday, February 24, 2009
2009.02.46
David G. Hunter, Marriage, Celibacy, and Heresy in Ancient Christianity: The Jovinianist Controversy. Oxford Early Christian Studies. Oxford/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Pp. xix, 316. ISBN 9780199279784. $99.00.
Reviewed by Shawn W.J. Keough, Katholieke Universiteit Leuven (shawn.keough@theo.kuleuven.be)
In the latter half of the fourth century the monk Jovinian became the center of a bitter ecclesiastical controversy regarding the relative value of asceticism, particularly sexual renunciation. Jovinian's principal opponents were Pope Siricius, Ambrose, and Jerome, the latter publishing a particularly vicious attack against Jovinian in two books. Although condemned as a heretic for his views at synods in Rome and Milan in 393, the controversy surrounding Jovinian and his views continued, drawing Pelagius, Augustine and other writers into its orbit, writers who would seek to temper Jerome's harsh critique of the condemned 'heretic'. David Hunter's monograph is the only full-scale treatment of Jovinian in English, providing a comprehensive investigation and analysis of Jovinian and his opponents, the background to their debates, and the late Roman social context in which rival versions of orthodoxy and heresy clashed.
Hunter divides his book into three parts: the first part, 'Jovinian and his World', comprises two chapters. The first chapter is an exercise in 'Reconstructing Jovinian': as Jovinian's own writings have perished (the lamentable result of his condemnation as a heretic), it is necessary to sift through the writings of his opponents in an attempt to piece together Jovinian's authentic views. Although the most important source for this critical enterprise is Jerome's extensive refutation of Jovinian, Hunter begins with an examination of Pope Siricius and Ambrose on chronological grounds: the earliest mention of Jovinian is found in Siricius' letter reporting the condemnation of Jovinian by a Roman synod, while Ambrose writes that Jovinian had fled to Milan following his condemnation in Rome, thereby indicating that the synod in Milan followed the synod in Rome. However, when Jerome published his attack on Jovinian in the spring of 393 he did not mention either synod, although he did refer to Jovinian's condemnation in Rome in a letter regarding the reception of his work the following year. That Jerome does not mention Jovinian's condemnation by the Roman and Milanese clergy indicates to Hunter that the synods took place at roughly the same time as Jerome was writing, that is, the spring of 393 (earlier scholarship had suggested a date of 390 for Jovinian's condemnation). Having established the chronology of the controversy, Hunter moves on to an exposition and analysis of the central 'four propositions' of Jovinian as reported by Jerome, whose refutation of Jovinian provides many direct quotations from his opponent. The four propositions are as follows (p. 26):
1. Virgins, widows, and married women, once they have been washed in Christ, are of the same merit, if they do not differ in other works. 2. Those who have been born again in baptism with full faith cannot be overthrown by the devil. 3.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abstinence from food and receiving it with thanksgiving. 4. There is one reward in the kingdom of heaven for all who have preserved their baptism.
Hunter's discussion of these four propositions underlines the 'sacramental and ecclesial foundation' of Jovinian's criticism of contemporary asceticism and sexual renunciation. In these four propositions ascetic merit is displaced by the common gift of salvation to which all Christians have access through the sacrament of baptism. A common baptism, rather than degrees of ascetic performance, therefore exerted decisive influence on Jovinian's conception of salvation. It was this emphasis on the equality of all the baptized, and its concomitant rejection of an ascetically-determined hierarchy, that Jovinian's opponents found so objectionable.
Hunter's second chapter, 'Jovinian and Christian Rome', examines the more public and social aspects of Jovinian's critique of asceticism within the context of late-fourth century Rome. This chapter begins with a survey of fourth-century criticisms of asceticism and monasticism, noting that as the fourth century neared its close the monastic rejection of marriage posed problems to pagans and Christians alike. Hunter describes the manner in which sexual renunciation necessarily entailed a rejection of the aristocratic elite's social values; even aristocratic Christians would look askance on the celibate as a threat to 'the continued vitality of civic life'. Hunter demonstrates the way this 'novelty' of asceticism, however, was adopted by the Roman aristocratic elite in a process of 'assimilation and accommodation' that would allow ascetic behaviour and ascetic piety to serve specifically Roman principles and values, resulting in a situation in which asceticism and aristocratic culture each shaped the other (e.g., the well-known wealthy 'ascetics' who had renounced marriage or embraced virginity while continuing to live as only those who owned extensive properties and numerous servants could).
The second part of the book, 'Jovinian, Heresy and Asceticism', begins with a chapter devoted to the background of the Jovinianist controversy, surveying Christian traditions of asceticism and heresy in the first three centuries, beginning with Jesus and Paul, and continuing with the Pastoral Epistles, Irenaeus, Tatian, and Clement of Alexandria. Noteworthy is the manner in which Hunter demonstrates that by the end of the second century, largely as a result of the influence of writers like Irenaeus and Clement, Christian 'orthodoxy' was inseparable from a rejection of radical encratite ideals (encratite theology taught that sexuality originated as a result of the introduction of sin into the world and was never a part of God's original creation: the rejection of sex thus supported the quest to regain 'the pristine purity of paradise') and the acceptance of marriage. And yet Hunter traces the manner in which this second-century settlement would be largely overthrown by the third-century writers Tertullian, Cyprian and Origen, who introduced key features of encratite theology into their own treatments of marriage and sexuality, and who exerted significant influence on figures such as Ambrose and Jerome. The result was three streams of tradition: radical encratism completely rejected sexual activity, while moderate encratism allowed marriage and sexual intercourse even as their value was severely limited, and those following in the tradition of the Pastoral Epistles, Irenaeus and Clement of Alexandria rejected radical encratism as a heresy, maintaining that sex and marriage were both fundamental to a Christian understanding of creation and redemption. The second chapter of this section examines the relationship between encratite theology and heresiology in the fourth century, paying particular attention to the actual spread of Manichaean Christianity and the manner in which 'Manichaean' had become a stock accusation in the heresy-hunter's arsenal, as well as the works of the prominent heresiologists Epiphanius of Salamis and Filastrius of Brescia. The chapter concludes with an examination of Ambrosiaster's treatise 'On the Sin of Adam and Eve', which, along with the writings of Epiphanius and Filastrius, served to indicate the extent to which questions of the body, sex, marriage and original sin were still disputed in the fourth century, while also figuring prominently in accusations of heresy against the promoters of ascetic piety. In this regard Hunter makes it plain that Jovinian would have been promoting his own critique of ascetic piety within an established and recognizable heresiological tradition, a tradition which rejected the radical encratite assertion 'that sex was a symptom of original sin'. The final chapter takes up the question of 'Mary Ever-Virgin': Jovinian had called Ambrose a Manichaean for defending Mary's virginitas in partu (the doctrine that Mary's virginity remained physically intact even in the act of giving birth to Jesus), indicating again to Hunter something of Jovinian's anti-heretical concerns in disputing questions of ascetic piety. Hunter traces the development of this doctrine, demonstrating the extent to which biblical apocrypha, such as the Odes of Solomon and the Ascension of Isaiah, but above all the Protevangelium of James, provided the basis for subsequent doctrine regarding Mary's perpetual virginity. Hunter also nicely connects the themes in these texts to classic radical encratism, so that Mary becomes the perfect fulfillment and model of the encratite ideal. And while the doctrine of Mary's virginitas in partu did not have widespread support in the first three centuries of Christian tradition (appearing mainly in the apocryphal works mentioned above and being criticized by Tertullian and Origen, who wished to emphasize the fully human character of Jesus' birth), it had certainly begun to feature prominently in Ambrose. Hunter's analysis shows that Ambrose had made Mary's virginity a pervasive feature of his soteriology and ecclesiology, so that virginity became the model for humanity's redemption from sin and stood atop a hierarchy of ascetic merit. This hierarchy of ascetic merit, with virginity at the top, was sure to conflict with Jovinian's claim that by baptism all Christians share a common ecclesial holiness.
The final section of Hunter's book, 'Jovinian and his Opponents', begins with a chapter examining the critiques that Siricius, Ambrose and Jerome leveled against Jovinian. From Hunter's investigation it emerges that each of these three writers had their own unique reasons for rejecting Jovinian's four propositions: Siricius was mainly interested in bolstering clerical authority and enforcing the discipline of clerical celibacy, and while Ambrose shared this concern he also demonstrated a particular interest in female virginity, and Hunter suggests that Jovinian's views may have threatened the prominent authority of a bishop active 'in the recruitment, veiling, and supervision of consecrated virgins'. Finally, Jerome, unlike Siricius or Ambrose, was interested not simply in the sexual renunciation of clergy following their ordination, but rather in promoting the prestige of the monk-priest: Siricius was reluctant to accept monks immediately to the episcopate (preferring instead the usual progression through the clerical cursus honorum), while Jerome felt that the bishop's easy acceptance of many married men into the clergy already demonstrated a level of laxity unbefitting the ordained ministry. As a result, Jerome's ruthless attack on Jovinian was interpreted by many as of its first readers as a scandalous treatment of marriage, if not quasi-heretical. The response to Jerome's repudiation of Jovinian forms the subject of Hunter's final chapter, in which he traces the development of a mediating position between Jovinian and Jerome in the following decade. Figuring prominently here are Pelagius and Augustine. Interestingly, while Pelagius departs from Jerome by rejecting the radical encratite notion that sex is somehow bound up with sin and the Fall, he nevertheless explicitly opposes Jovinian on the matter of an ascetic hierarchy, promoting the view that virginity, sexual continence and marriage all merit different rewards in heaven. Augustine, on the other hand, in his two small treatises De bono coniugali and De sancta virginitate (Hunter follows Hombert in dating both to 404 rather than 401) introduced a new element into the discussion of a hierarchy of ascetic merits. While agreeing that celibacy was superior to marriage (against Jovinian), and yet insisting that marriage was indeed something good (against Jerome), Augustine destabilized the utility of a sexually focused ascetic hierarchy by positing the existence of virtues superior to sexual renunciation, such as readiness for martyrdom.
Hunter's study of the Jovinianist controversy is an admirable contribution to the study of late antique Roman society. Contemporary scholarship has developed quite an elaborate literature on asceticism and sexual renunciation in late antiquity, as well as on the development of orthodoxy and heresy. Hunter's monograph provides invaluable--indeed, required--reading on both counts. While past scholarship on Jovinian tended to wear its prejudices on its sleeves, Hunter's treatment moves beyond the partisan readings that characterized previous treatments by Protestant and Roman Catholic scholars and provides a nuanced, balanced and comprehensive treatment of Jovinian's background, opponents, and legacy, while also providing the definitive exposition and analysis of Jovinian's own theological and heresiological aims. In doing so Hunter has not only advanced our understanding of 'Marriage, Celibacy and Heresy in Ancient Christianity'; he has also provided us with a wonderful example of what the best scholarship in late antique Christianity ought to look l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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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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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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