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pril 22, 2009

에딘버러 1910 선교대회를 돌아보며

“한국 교회의 기독교 윤리학적 성향과 그 문제점: 1910 에딘버러 선교대회 100주년을 돌아보며“ (Social Ethical Tenants of Korean Christianity and Their Problematics: Restrospecting the Edinburgh Mission Conference 1910.)

박충구 (감신대, 기독교 사회윤리학)
1. 들어가는 말
1884년 외래종교로서 미국 선교사들에 의하여 유입된 개신교는 근 5백년에 걸친 조선 유교사회와 연속/불연속성을 가지면서 한국인의 의식과 사회변동 과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쳐왔다(유동식, 1992 : 379). 이 영향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을 것이지만 기독교 선교 120년을 지나면서 한국 기독교는 전 세계적으로 경이로운 성장을 이루어 우리나라 인구의 근 20%에 달하는 신자를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 말을 기점으로 하여 기독교의 성장은 정체되기 시작했고(이원규, 1994 : 195), 최근에 발표된 "2008년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 조사 분석 보고서"(김병연, 2008)에 따르면 한국 개신교에 대한 신뢰도는 급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개신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는 12.1%에 지나지 않는다.
개신교에 대한 신뢰도 추락 원인에 대한 논의는 다양하다. 이런 논의에서 한국 교회의 도덕적 미성숙, 물량주의, 집단 이기성, 배타주의, 강압적인 전도, 언행불일치 등이 지적되고 있지만(김병연, 2008 : 18) 한국교회의 신학적 병리를 지적 비판하는 견해는 매우 드물다. 이 연구 보고서는 한국교회가 잃고 있는 사회적 신뢰도의 추락을 알리는 경종을 울리고 있지만, 무엇이 정작 한국 개신교의 사회적 신뢰도의 추락을 불러오는 진정한 원인인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밝히지 못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은 신학적이며 기독교 사회윤리학적인 관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본고의 관심의 초점은 ‘무엇이 한국교회로 하여금 도덕적 및 사회적 신뢰를 상실하게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이에 대하여 기독교 사회 윤리학적인 해명과 아울러 하나의 답변을 제시하는 데 있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나는 일단 기독교 일반에 대한 개념적 이해를 탈피하고, 한국 사회에 유입된 기독교의 특수성, 즉 한국에 유입된 기독교의 성격이 서구 기독교의 선교적 전략에 따라 축소되거나 생략된 복음(박충구, 2002 : 274이하)이었다는 가설적 전제를 가진다. 따라서 본고는 서구 사회의 구조와 맞물려 진화해 온 기독교 사상체계가 기독교 선교라는 도구적 통로를 통하여 한국 및 아시아에 유입될 때부터 이 문제는 이미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라는 가설적 판단을 전제하고, 이 판단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이런 전제가 옳다면 한국 개신교의 신뢰도 추락의 문제는 단순한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해결책을 통하여 극복될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신학적 사유모형의 변화(theological paradigm change)를 요구받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 논의 과정에서 지난 120년 동안 한국 개신교는 한국 사회 안에서 자발적 오리엔탈리즘과 자발적인 종교적 식민지화를 통한 자기 정체성의 혼란을 거듭해 왔을 뿐 아니라, 이런 혼란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 사회 안에서 기독교 선교에 대한 기독교 사회 윤리적 정당성 확보에 많은 부분 실패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와 더불어 아시아, 한국인의 문화적 정체성을 파괴하고 망각해 온 한국 기독교의 혼란스러운 문화적 자기 정체성과 더불어 4세기 이후부터 기독교가 수용해 들인 제국주의적 논리와 식민주의적 정복주의와 승리주의의 허상이 한국교회의 내적불화, 소외, 그리고 한국 사회를 향한 사회윤리학적 영향력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지적될 것이다.

2. 서구 기독교 선교의 정체성
기독교 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4세기를 지나면서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 체제, 혹은 구조를 상대할 수 있는 조직적 사고가 필요했고, 이 필요에 따라 기독교 안에서 현실주의적인 타협과 순응(accommodation)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 순응의 프로젝트는 간혹 선교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고 교회의 지상권을 확보하기 위한 교회정치라는 다양한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기독교 초기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밝혀주던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상의 조명아래 펼쳐지던 평화주의적 사회윤리 사상(Yoder, 1972)이 퇴조하고, 로마 제국의 질서에 순응하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형성되었다. 로마 제국을 거룩한 질서로 간주하는 중세 기독교 신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 로마 제국의 확장은 곧 이교도들에게 기독교를 전하는 선교 영역의 확장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이미 초기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던 정체(停滯)적 기독교의 변화와 혁신의 결정적 기회로 여겼던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는 대신 교회 지상주의적인 선교 과제가 지상 최대의 과제로 여겨졌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땅 끝까지 구원의 소식이 전해지기까지 유보되는 한편 기독교 세력 확장과 팽창이 교회의 주요한 존재이유로 받아 들여졌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한 대망은 교회의 성장, 팽창 그리고 확대의 과제 이면으로 잠복했다.
여기서 기독교 윤리의 핵심 주제는 더 이상 예수의 평화 사상이 아니었다. 그 대신 지상권을 획득하려는 교회의 선교과제가 강조되었고, 교회는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대행하는 유일한 기관이라고 주장 되었다. 이런 맥락을 따라 억압과 폭정으로부터 인간의 자유, 정의와 평화를 이루기 위한 윤리적 노력은 교회의 선교적 과제에 비하여 차선의 것으로 간주되었다. 서로마(509 BC-476 AD)의 멸망을 거쳐 동로마 비잔틴 제국의 몰락(1453 AD)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샬레망 대제에서 비롯된 신성로마제국(800-1806 AD)과 더불어 기독교는 교회지상주의에 손상이 가지 않는 한도 안에서 로마제국의 사회질서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이렇게 제국과 손을 잡은 기독교는 16세기 이후 콜럼부스의 북아메리카 탐험이후 시작된 서구 열강의 식민세력의 정신적 후원자로 자리를 잡았다. 식민적 팽창정책은 기독교인들에 의한 식민 지배를 통해 취할 수 있는 제국의 정치 경제적 이익관계와 연계되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 8)는 선교적 명령을 위탁받은 교회와 신자들의 의무와 사명을 돕는 과제로 이해되었다. 그리하여 아프리카, 중남미, 그리고 아시아, 즉 비기독교 세계를 향한 기독교 세계의 선교가 16세기 컬럼부스 이후 수백 년 동안 식민주의적 정복과 더불어 영적 정복주의가 병행되는 기독교 선교 프로젝트로 가동되었던 것이다. 이 선교 프로젝트의 특징은 피선교지인들을 향한 정치 경제적 타자화와 더불어 종교적 타자화를 통하여 서구 기독교인들의 자기 정체성을 정복적 주체로 확립하는 작업이었다.
로마 제국의 절대 권력이 지배하는 영역 안에서 기독교는 단순한 하나의 종교로 기능한 것이 아니라 절대불변의 종교적 세계관으로서 자리를 잡았다. 이 세계관은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서구 문명사를 형성해 온 중요한 문화적 상수(常數)가 되었다. 즉 서구 기독교는 기독교 세계(Christendom)을 형성한 경험을 가진 기독교로서 기독교 세계의 문명을 지배해 온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19세기 말 서구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발견되어 선교의 대상으로 간주된 피선교지의 성격은 서구 사회에 비하여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가 당연한 사회적 규범의 원천이 되고 있는 서구 사회의 기독교 문명권에 비하여 다양한 종교가 공존해 온 비서구(非西歐), 특히 아시아의 피선교민들은 서구 기독교의 세계관을 수용할 역사적 경험과 종교적 여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서구 기독교의 유입과정에서 자의적 혹은 타의적인 선택과 생략이 일어났다. 선교주체의 문명권과 선교 객체 문명권 사이에서 선교주체들은 그들에게 있어서 실천 가능한 공통분모를 찾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엔리크 두셀(Enrique Dussel)은 서구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의 성격을 피식민지인들을 향한 지배, 수탈, 그리고 정복, 성애(sexuality)로 특징지었다(Dussel, 2001 : 48이하). 피식민지인들에게 소외와 타자화를 불러온 서구 식민세력과 더불어 존립했던 기독교 선교 전략이 선교지의 사회적 현실과 도덕적 가치와 부딪치게 되자 선교사들은 일종의 회피나 생략의 전략을 가지게 되었다. 한 편으로는 자신들의 선교활동을 보장해 주는 제국주의의 폭력에 대하여 관용하거나 당연시 하는 동시에 토착세계를 향해서는 기독교 복음의 비정치화, 즉 복음의 탈사회성과 탈윤리성이 일어난 것이다. 기독교 선교의 탈윤리성이 서구 식민세력의 정치 경제적 지배와 착취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 능력의 상실을 의미한다면, 탈역사성이란 서구 사회에서 길들여진 기독교 신앙이 제국의 역사적 우월성에 대한 자긍심에 지나쳐 피선교지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들의 토착종교의 역사적 의미와 그 중요성을 간과하거나 비하하는 데에서 일어났다. 서구 기독교 선교사의 관점에서 볼 때 피선교지의 모든 것이 열등하고 야만적이며, 미신적이고 비열해 보였으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서구인들의 우월한 힘과 종교는 언제나 하나님의 축복이었으며 늘 정당했던 것이다.
여기서 기독교 선교에 의하여 피선교지는 탈역사화되어 타자화 되고, 전통문화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오던 피선교민들의 도덕적, 문화적 정체성은 근본적으로 훼손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기독교화란 이런 과정을 일면 필연적으로 의미하는 것이었다. 기독교 선교는 서구화된 기독교인으로 변형되는 것을 의미했으며, 동시에 토착민들의 문화, 사회, 그리고 역사적 경험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서구 문명의 우월성으로 무장한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하여 토착민들에게는 끊임없는 회개가 강요되었고, 이 요구는 기독교의 죄론을 통하여 토착민들의 문화와 종교적 불완전성을 뿌리부터 파헤쳤다. 이렇듯 제국주의적 선교의 여파는 피선교지인들에게 자신들의 문화, 종교, 사회적 정체성에 커다란 혼란을 불러왔다. 외양적으로나 문화 종교적으로 결코 서구인이 될 수 없는 토착민들을 향한 기독교 선교는 피선교지인들의 존재적, 질적 개별성과 차이를 불신앙으로 파악했고, 이 불신앙을 극복하는 길은 결국 아시아인(한국인)의 종교적 자기 정체성의 포기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종한 기독교인들은 개종과 더불어 황인종이 백인종으로 물리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문화, 종교, 윤리, 사회적 관계의 얼개들은 고스란히 남아 서구 기독교인들과는 달리 자기 분열적 토착민의 모습을 드러냈다. 문화적 우월성을 간직한 선교사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토착민들은 영원히 미성숙과 혼란 속에 머무는 존재로 평가되었고, 일면 그들 속에서 서구인들이 굳게 믿어온 기독교 신앙의 보편성에 일치하는 양태를 보일 때에는 서구 선교사들에게 기쁨과 감격을 주는 존재였다. 이런 과정에서 “신앙인들(fideles)과 비신앙인(infideles)들로 사람들이 구별되었고, 신앙은 오직 기독교인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 어느 누구도 유대 신앙 혹은 이교적 신앙이라고 말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타종교는 의식(ritus), 미신(superstitio), 오류(error), 또는 법(lex)으로 간주되고 일컬어졌다”(Kahl, 1978 : 20; 브라운, 2003). 깊고 깊은 문화적 차별의식이 기독교 서구세계의 종교적 우월성과 더불어 서구 선교사들의 인식구조에 깊이 각인되었고, 이러한 관점은 종교적 식민지화의 과정을 통하여 토착민들에게 그대로 이식되었다.
어거스틴 이전, 선교의 객체였던 서구인들이 선교의 주체가 된 시점부터 제국의 힘을 지닌 기독교 선교는 피할 수 없이 자기절대화, 서구기독교 문화의 우월성, 비서구 세계에 대한 동정과 차별, 그리고 폭력적 회심, 타문화와 종교에 대한 비하의 논리를 제국주의자들과 식민지배자들의 정신세계 속에 심었다. 이런 점에서 서구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세력의 오랜 정신적 후원자는 기독교였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어거스틴 이후 기독교는 구교나 신교 모두 형식적으로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 원칙을 지키는 것 같은 논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신학적 이해구조 안에서는 정치권력의 포악성을 지적 비판하기보다는 정치권력의 포악성을 이용한 기독교 선교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있었다. 구원받지 못한 이교들을 향한 서구 기독교인들이 가한 포악은 영혼이 죽어 있는 이교도들의 몸에 대한 포악이었으므로 그리 큰 죄책을 느끼지 못했다.
제국의 선교사들이 비기독교 세계인을 기독교화 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했던 것에 비하여 피선교지인들은 스스로의 문화, 종교, 사회에 대한 정체성을 버림으로써 기독교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요구를 거절할 경우 기독교는 흔히 기독교적 영혼구원의 관점에서 차별과 비하의 태도를 유발시켰다. 기독교 신앙을 고백할 때까지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채 머무는 미완성된 존재,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라 여겨진 까닭이다.
3. 식민적 선교 프로젝트
서구 기독교가 1910년 스코트랜드 에딘버러에서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를 향한 뜨거운 영적, 선교적 의무를 강조하며 열었던 선교사 대회는 그 시점부터 시작하여 한 세기 이상 서구에 의한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를 향한 기독교 선교 프로젝트의 출발점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선교대회는 전 세계에서 각 선교단체가 파견한 약 1500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는 데 영국에서 약 500명, 미국 대표가 500명, 유럽 대표들이 170명, 그리고 나머지는 신흥 교회들이 파견한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당시 한국인으로서는 윤치호가 참가했다. 하지만 이 대회에서 신흥 교회들의 대표들이 특기할만한 목소리를 내었다든지 혹은 독특한 공헌을 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이 선교 대회의 회장이 되어 모든 일정을 주관한 모트(John R, Mott)가 제 1 분과 위원장을 겸하였기 때문에 그의 신학적 견해가 이 대회의 중요한 성격을 여러모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 선교대회는 서구 기독교 문명의 관점에서 형성된 영적인 측은지심을 가지고 비기독교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담고 있다. 이 대회의 특성을 일러 죤 모트는 “세계의 선교문제들에 대한 최초의 조직적이고 세밀한 연구를 위한 시도”(Walls, 2002 : 59)였다고 회상했고, 헤드룬트(Roger Hedrund)는 “19세기의 고전적 개신교 선교의 종식과 더불어 20세기의 지구적 복음화 운동의 출발점”(Hedrund, 1997 : ix)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선교 대회는 2년의 사전 연구 과정을 거쳐 8가지 주제, 즉①모든 비기독교 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② 선교 전장에 존재하는 교회, ③ 국가적 삶의 기독교화와 관련된 교육, ④ 비기독교 종교들과의 관련성과 선교적 메시지, ⑤ 선교사들의 준비, ⑥선교 기지, ⑦ 선교와 정부, ⑧협력과 일치의 증진(Anderson, 1910)이라는 주제로 나누어 심도 깊은 연구를 종합 발표 토론하는 내용으로 이루어 졌다. 이 대회가 가진 또 하나의 특성은 기독교 선교를 위한 전(前) 세기적 경험과 역량, 그리고 정보를 수합 분석함으로써 20세기 기독교 세계 선교를 위하여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일치된 전략과 광범위한 협력을 이루어 냈다는 데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에딘버러 대회는 20세기에 중요한 피선교 지역으로 간주된 지역을 향한 서구 교회의 선교적 전략과 방침, 그리고 그 이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여기 드러난 기독교 선교의 방향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서구 기독교 진영의 선교적 목적을 위하여 참가자들은 일체의 신학적 토론과 혼란을 불러오지 않기로 전제했다. 그 이유는 피선교지를 향한 선교적 긴급과제가 강조되었기 때문에(Anderson, 1910 : 5) 선교적 목적에 혼란을 불러오는 각론을 피하기로 사전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교주체와 객체 사이에 놓여 있었던 문화 교차적 신학적 논의는 유보되었다. 선교적 과제를 위하여 문화 신학적 담론을 제한했던 것이다. 이 문제는 세계 교회협의회의 1948년 암스테르담 회의를 거치면서 신학적 자기비판과 선교개념의 오류를 지적함으로써 다소 수정되었다.
둘째, 이들이 표방한 바 기독교 세계(Christian world)와 비기독교 세계(non-Christian world)에 대한 문화 대립적인 선교적 공략을 지향하는 시각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 기독교 세계가 주체화되고 비기독교 세계가 대상화됨으로써 비기독교 세계가 일방적으로 해석 이해되었다. 여기서 기독교 세계의 보내는 교회와 비기독교 세계의 받는 교회가 나누어지고, 보내는 교회의 우월성과 영웅주의적인 선교의식이 찬양 고무되었다. 그리하여 서구 기독교 사회의 교회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기독교적인 세계로 긍정하는 오류를 낳았고, 서구의 교회 안에서는 마치 선교적 과제가 완성된 것 같은 오해를 불러 왔다. 이 관점은 20세기에 서구 사회의 세속화와 비기독교화의 과정을 통하여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로 남게 되었다.
셋째, 교회제국주의의 연장으로서의 선교제국주의적 입장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이끌어 감으로써 선교사들을 영적 군사들로, 선교를 위한 전략, 상황분석, 등의 군사적 표현들이 비판 없이 사용되어 서구의 선교전략적인 공략의 대상으로 아시아를 비롯한 비기독교 세계들이 묘사되었다. 에딘버러 대회에 보고된 한국 리포트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모든 전술한 이유들을 들어 선교협회에게 한국의 즉각적이고 철저한 복음화를 위하여 군대를 진군시켜 줄 지혜와 필요를 요구합니다“(Anderson, 1910 : 81). 따라서 에딘버러 대회 이후 서구에 의한 비기독교 세계를 향한 선교는 선교 제국주의적 성격이 농후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넷째, 서구, 특히 미국의 자본주의 문화가 가져온 풍요, 과학기술의 발달과 식민주의적인 정치적 팽창을 기독교 선교확장을 위한 중요한 자원과 기회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풍요와 과학기술 발달에 대한 지나친 긍정의 태도가 앞섰고, 서구 제국주의와 식민정책에 대한 자기비판이 취약 했으며, 오히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정책을 기독교 선교전략을 위하여 이용하려 했다는 점에서 사회윤리학적인 자기 비판적 시각이 심각하게 결여되었다. 따라서 에딘버러 1910년 선교대회는 하나의 식민적 기획(colonial project)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선교는 세계 정복을 의미하는 깃발 아래 있게 되었다. 실제에 있어서 ‘세계’는 주로 신학적 개념이 아니었고, 지리적 그리고 역사적 개념이었다. ‘세계’는 기독교 세계와 비기독교 세계 두 가지 구성요소로 구분되었다. 근본적으로 이 두 세계의 관계는 사도적 제국주의 것이었다. 기독교 세계가 비기독교 세계를 정복해야 했다. 예로서 이러한 제국주의 개념은 에딘버러 대회에서 사용된 군사적 용어들을 통해 드러나는 데, 즉 ‘군인들’, ;세력‘ 전진, 군대, 부흥단, 행진명령, 전쟁협의회, 전략, 그리고 계획과 같은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보쉬, 1980 : 190).

4. 교파주의의 전략과 진리담론

20세기 기독교 선교의 지평을 열어 나간 1910 에딘버러 선교대회는 반세기 이상을 걸쳐 그 영향력을 미쳤으며, 그 이후 개최된 무수한 선교대회의 근본성격을 규정지었다. 1951년 스코트랜드 총회에 보고된 외방선교 위원회의 보고서는 “‘에딘버러 1910‘선교 대회의 결실은 아직도 맺히고 있습니다. 그 열매중 얼마만큼은 1950년에도 맺혔습니다”(Anderson, 1910 : 369)라고 보고함으로써 에딘버러 선교대회 이후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 정신이 이어지고 있음을 시사했다.
트뢸치는 기독교 역사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통하여 세 가지 신앙의 유형론을 제시한 바 있다(Troeltsch, 1960 : 328이하). 소종파, 신비주의, 그리고 교회유형이 바로 그것들이다. 그는 소종파는 자기 집단의 정체성에 관심하는 데 비하여 신비주의는 개인주의적인 내면의 자각과 체험을 중시했다면 교회유형은 정치권력과 경제 권력에 순응함으로써 그 종교 집단의 확장과 성장을 도모하는 속성을 지닌다고 해명하였다. 나는 에딘버러 선교대회를 이끌어간 서구 기독교인들의 전략적 자기이해는 에른스트 트뢸치(Ernst Troeltsch)가 분류한 세 가지 신학적 입장들 중에서 순수한 복음을 사회 정치 문화적 요인들에게 순응시켜온 교파주의적 신학에 채색된 성격으로 규정한다. 교파주의적 기독교 유형의 신학적 특징은 성과 속간의 현실주의적인 거래와 타협에 있다. 즉 정치와 종교의 긴장관계가 협력관계로 바뀌고, 종교에 의한 영적우위의 권력 장악이 일어나며, 국가권력을 배후로 한 선교가 가능하다면 교회의 확장과 성장을 위한 타협을 받아들이곤 했기 때문이다. 교회의 성장과 팽창을 우선시하는 교파주의 신학은 제국주의와 손을 잡기 위하여 타협적 태도를 선택했다. 이러한 변화는 초기 기독교의 종말론의 퇴조와 더불어 기독교 신앙을 역사화한 어거스틴(Shinn, 1964 : 32) 이후 로마 제국에 순응하기 시작했던 기독교에서 비롯된 바, 가장 성공적인 통합은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로마제국과 기독교의 통합은 서구 세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세력으로서 두 세력 간의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통해 제국의 확장과 기독교 선교의 보편화를 이루어 내는 요인이 되었다. 비록 구교(舊敎)와의 신학적 견해 차이로 인하여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기독교 내부의 분열이 있었을지라도 기독교적 주체와 비기독교적 객체에 대한 차별과 구별의 논리는 개신교에서도 변함없이 적용되었다. 유대인들을 박해해 온 기독교 역사가 서구 문명사를 관통해 오다가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 사건(Holocaust)으로 이어진 사실은 비기독교인들을 향하여 가졌던 기독교인들의 차별적 편견의 깊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준 사례일 것이다. 비록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서구 문화 속에 깊이 배인 서구우월주의와 비기독교 세계에 대한 차별적 편견은 심지어 기독교 문명구조에 의하여 박해를 받아왔던 유대인들에게서도 드러난다. 즉 기독교는 기독교 안에서, 그리고 기독교 문명권 안에서 비기독교적 세계에 속한 이들을 차별해 왔다. 이 차별의 적극적 표현은 기독교 선교를 통한 개종이었고, 개종을 거절하는 이들을 향해서는 저주와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거나, 심판의 집행자로서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Ellis, 2008).
어거스틴은 기독교 제국 “경계선 너머의 이교도들을 군사적으로 정복함으로써 복음 선포를 위해 그들을 준비시키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그렇게 되면 제국의 박애적인 보호 아래에서 복음 설교가 평화롭게 진행될 수”(보쉬, 1980 : 134) 있을 것이라고 낙관했기 때문이다. 세례는 군사 정복의 2차적인 결실이었으므로 이교도들을 개종시켜 세례를 주기 위해서는 군사적 정복이 필요했다. 이렇듯 기독교의 선교는 제국의 조직과 힘과 군대를 이용하여 선교적 확장을 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언제나 이를 이용해왔다. 이러한 정복주의적 사역의 당위성을 이들은 누가복음 14: 23절, 즉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예수의 성서적 명령에서 찾았다.
특히 에딘버러 선교대회는 서구 과학기술의 진보를 이용하여 비기독교인들을 향한 정복과 선교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는 데 매우 고무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이전의 시대와는 달리 전기, 전신전화, 기차, 자동차, 증기기관의 상업화를 통하여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 깊어졌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불러오는 풍요는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선물과 섭리로 여겨졌고, 이러한 섭리와 은총을 받은 이들은 당연히 복음을 증거 하는 과제 앞에 감격해 하며 성실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세기를 거쳐 20세기에 전개된 기독교 선교는 종말론적인 구원보다, 미래지향적인 변화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를 한층 더 부풀리게 되었다. 20세기 초 유럽의 교회들은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미래를 향한 기대와 희망의 정서가 많이 위축되어 있었지만 미국의 교회들은 이런 낙관적 분위기를 1950년 이후까지 가지고 있었다(Bosch, 2005 : 338). 따라서 미국적인 교파주의 신학과 19세기 낙관적인 현실주의적인 실용적 가치가 진리논쟁을 좌우하게 되었고, 이에 선교적 영웅주의와 비기독교 세계를 향한 영적 동정심이 더해 져 제 3세계를 향한 기독교 선교의 불을 붙였던 것이다. 동시에 교파주의적 신학은 타 문화권을 만나며 새로운 인식의 확장을 도모할 수 있는 기회를 여는 진리담론보다 교회의 정복주의적 세력확장을 통한 이교도들의 영혼구원에 목적에만 두는 경향을 지녔다. 진리담론은 자신들의 신학 안에 이미 완료되어 내장되어 있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파주의 선교신학에서 진리에 대한 새로운 담론 형성 가능성은 철저히 부정되고 거절 되었다.

5. 선교제국주의와 한국교회의 윤리의식
1) 윤리에 우선하는 기독교 선교
한국에서 제국의 폭력, 과학기술의 진보와 자본의 힘을 동원한 기독교 선교는 3중적 전략을 가지게 되었다. 이 전략은 피선교지 정치 세력과의 관계, 교육 및 의료 기관 설립, 그리고 교회 세우기로 요약될 수 있다. 중앙화된 정치권력의 협력과 도움을 얻는 선교 방식은 피선교지의 정체세력을 압도할만한 군대와 우월한 힘을 나열하고 과시할 수 있어야 했다. 자국의 정치권이 우월한 지위를 점한 상태에서 맺은 제국주의적 협약을 통하여 선교사들은 선교의 자유와 기회를 직 간접적으로 확대해 나갔다. 즉 피선교지 자국의 정치권력이 선교사 자국과 외교적 협약을 맺을 때 외래의 선교적 세력에 대하여 내린 피선교지의 금지령을 제거하거나, 유보시키거나, 최소한 명문화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취했던 것이다. 여기서 최소한 두 가지 방향의 서로 다른 목적이 드러난다. 정치 세력은 경제적 이익관계를 관철시키는 것, 그리고 선교사들은 선교적 자유와 기회를 획득하려는 목적이다. 형식적으로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키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서구 기독교는 서구 정치세력을 앞세워 선교의 자유와 권리를 획득했던 것이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조선의 국내정치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들은 먼저 교육과 의료사업 같은 사회사업을 하고 후에 전도 사업을 시작했다. 전도사업은 때때로 방해를 받았으나 전체적으로 조선 정부에 의해 묵인되었다(백종구, 2002 : 78).

서구의 막강한 권력과 부를 산출한 실용주의적 학문에 대한 긍정적 이해는 조선말기의 관료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었고, 이러한 논리는 정치적 이해관계와 연계되어 선교사들의 도움을 배제하기 어려웠다. 이때부터 피선교지에서는 서구 세계 지향적인 발전, 성장, 변화의 요구가 강력하게 일어났다. 선교사들은 피선교지의 민족의 이해보다 자신들의 선교적 이해를 앞세웠기 때문에 조선의 자주권을 상실한 한일합방이 이루어졌어도 그들의 선교 사역은 그리 큰 지장을 받지 않았다. 이런 과정은 선교 초기만이 아니라 일제 치하에서도 유지되었다. 여기서 형성된 선교사들의 판단양식은 기독교의 확장이 조선 민족의 이익이나 자주권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2) 군사문화의 수용
20세기를 절호의 선교적 기회로 포착하고 교회의 확장을 기해 온 제국주의적 선교 기획은 선교지를 공략하는 전략을 군사적 메타포들을 사용하여 세웠을 뿐 아니라 선교사들을 영웅주의적인 영적 군병들로 이해하였다(Bosch, 2005 : 335) 기독교 초기 비폭력 평화주의적인 예수의 가르침은 이제 제국의 종교로 변모하면서 종교와 정치의 거룩하지 못한 연대와 야합을 허용하게 되고, 마침내 정치적 폭력성을 종교가 거듭 거듭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정치는 종교를 이용하여 사회의 일치를 도모하고, 종교는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교회의 영역을 넓히고 강화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적 이익과 종교적 이해관계의 영역밖에 있는 이들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는 무관심 내지는 적대적 동조의 토대를 유발했다. 이는 평화보다 교회의 존립과 성장을 우선시하는 교파주의 신학이 낳은 하나의 결과다.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교파주의 신학은 교파적 이해관계를 침해하는 세력과 조건을 악마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한편,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한 일제, 독재, 군사정권과 타협 해 왔다.
서구 제국의 군함을 타고 온 기독교 선교사들은 제국의 위력을 승인해 온 정당전쟁이론(just war theory)을 비판할 능력이 없었다. 오히려 제국의 힘은 늘 정당하고 당연했으며, 제국의 팽창은 선교의 긴급한 과제를 교회에게 안겨주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군대를 동원한 위협과 정복은 성서의 명령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마태복음 28: 19)는 명령과 더불어 “땅을 정복하라”(창세기 1: 28)는 명령에 대한 응답으로서 기독교인들의 당연한 태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제국의 군대와 조직은 기독교 선교의 통로였으므로 제국주의적 폭력에 의한 억압과 착취와 포악에 대한 비판은 거의 불가능했고, 오히려 제국의 폭력을 선한 도구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박충구, 2008 : 156이하).
이렇듯 한국에서 정치와 야합해 온 선교 신학은 지난 역사 속에서 이념 대립을 조장하며 전쟁을 찬양하고, 경쟁과 성장과 번영을 축복으로 선언하며 배타와 증오를 가르치는 습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노선을 따르는 일부 기독교가 초 대형교회들을 이루어가게 되었고, 초 대형적인 목회적 성공은 마치 하늘의 재가를 받은 것같이 인식되어 신학적 및 사회 윤리학적 자기 비판과 반성을 거부해 왔다. 이들은 서구 선교사들이 벌려온 제국주의적 선교방식을 그대로 본받아 동일한 영적 전쟁을 전개하는 방식으로 해외에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있으며, 급기야는 지난 2005년 아프칸 단기 선교 사건을 불러 오기도 했다.

3) 현실주의적 도덕 폐기론(antinomianism)
20세기 아시아 선교역사를 살펴볼 때 우리는 진리 및 도덕 담론이 간과되며 전개된 기독교 선교의 배후에는 언제는 서구 열강의 강한 군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고, 이러한 현상은 오늘도 여전히 대형 보수 교회 목사들에 의하여 전승되고 있다. 현실주의적인 힘의 정치가 종교의 은신처가 된다는 것은 결국 기독교가 하나님보다 현실적인 정치세력을 더 과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런 현상은 나아가 현실적인 정치세력 안에 하나님이 역사하고 있다는 신학적 착각을 불러 오게 만들기도 한다.
특히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조용기 목사의 경우 19세기 초 형성된 현대 근본주의 신앙을 필두로 하여 오순절 성령운동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여기에 더하여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을 오중복음과 삼박자 축복(조용기, 1998)이라는 명칭을 붙여 재구성한 보수신앙을 앞세운 복음지상주의를 주창해 온 결과 세계에 유래 없는 성공적인 교회성장을 거두었다. 교회의 확장과 성공은 신도들에게 하나님의 승인과 축복으로 해석되는 한편 막대한 헌금을 수납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어져 축적된 물적 토대를 이용하여 새로운 영역에서의 교세확장의 수단으로 이어진다.
선교지상주의가 주창해온 선교와 전도의 긴급성에 밀려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며 도덕적 성찰과 비판의 기회를 가지지 못한 한국교회는 마침내 제어할 수 없는 도덕적 아노미 현상을 직면하게 되었다. 서구 사회가 기독교화된 문명세계를 자랑했으나 20세기 후반부터 탈 기독교화하는 동시에 비기독교적 문명(being de-christianized)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고, 1960년대 이후에는 서구 신학이 지닌 사회 윤리학적 모순으로 인해 해방신학이 대두되어 교회 안에 편만하게 기생하고 있는 교회내적 악을 지적 비판했다. 선교주체들의 신학이 안고 있었던 무수한 문제들이 비판을 거쳐 폭로된 것이다. 그러나 피선교지로 자리매김해 온 우리 한국 기독교 안에서는 성장 최면에 걸려 서구 선교신학의 제국주의적 선교의 포기라는 방향 전환의 의미를 애써 무시하고 있는 현실이다. 반면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성차별주의, 전근대적 권위주의, 비민주주의, 물량주의, 천박한 성공주의, 도덕적 성숙없는 성장주의, 물질만능주의를 조장해 온 사실로 인해 시민사회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으며(이원규, 1994 : 53이하) 급기야 기독교의 성장의 정체가 일어나고 동시에 시민사회와 대중으로부터 유례없는 저항과 저평가를 받고 있다.

4) 배타적 보수주의의 몰인권성
기독교 서구 세계가 비기독교 세계를 향하여 영적 의무를 느끼는 동시에 선교 전략의 대상으로 삼은 아시아 대륙은 이슬람, 불교, 힌두교, 유교, 도교 등 오랜 시대에 걸쳐 인류의 종교적 요구에 응답해 온 종교적 유산들을 담고 있는 대륙이다. 이 대륙을 향하여 에딘버러 선교대회는 비기독교적인 종교에 대한 연구를 심도 있게 다루기보다는 단순히 전략적인 공략의 대상으로 삼았다. 동시에 그 선교대회는 기독교 세계와 비기독교 세계를 나누고 비기독교 세계를 향한 기독교 세계의 선교적 책임을 강조하는 한편, 비기독교 세계는 서구 세계의 방식을 따라 회개와 개종을 해야 하는 세계로 이해했다. 에딘버러 대회에서 시작된 20세기 선교의 거대한 흐름은 선교자와 피선교자, 주체와 객체로 분리되어 이해된 세계를 전제하고 있어서 사실상 하나의 세계로서 상호긍정과 대화의 요구를 외면한 것이다.
그 결과 기독교 선교는 선교사들의 영웅적 행위를 기리는 정복주의적인 것이 되었다. 기독교 선교사들에게는 서구 종교의 우월성과 더불어 과학기술적 우위성이라는 두 도구로 무장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의 관점에서 볼 때 비서구 세계는 열등하였다. 서구의 우월성은 기독교 신앙의 결과로 이해되었고, 아시아 특히 한국 사회의 후진성과 열등함은 아시아 종교의 책임으로 간주되었다. 독립협회 운동 실패 후 독립신문 경영권을 인수했던 영국인 선교사 엠버리(H. Emberley)는 “한 나라의 문명진보는 교화로부터 오고 교화는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온다”(백종구, 2002 : 160)고 주장했고, “하나님을 존경하고 천도를 조종하는 나라들은 세계 각국 중에 반드시 문명하고 반드시 부강할 것”(백종구, 2002 : 161)이라고 단언했다. 따라서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는 개종과 회개의 대상이었고, 토착민들의 종교적 풍습과 관행은 미신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에 의하여 기독교 신앙을 전수받은 토착민들도 선교사들과 동일한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의 타다 시로시 목사는 로버트 스피어 박사(Robert E. Speer)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하였다.

물질주의와 세속주의가 우리의 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신에 관한 기독교적 교리와 그리스도의 근본적인 복음에 반대하는 우리나라의 다양한 종교도 역시 우리의 적입니다(브라운, 2003 : 370).

비기독교 세계의 후진성과 열등함은 군사문화와 과학기술을 다루는 우월한 기독교 세계의 현실적인 능력과 대비되었고, 이러한 대비는 토착종교에 대한 무시와 비하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런 토착문화 속에 자리를 잡고 살아온 토착민들에 대한 비하의 논리를 자연스럽게 불러왔다.

한국의 종교적 의식은 이 수많은 귀신들을 달래거나 속이려는 애처로운 노력이다. 공포에 싸인 사람들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있다. 무시무시한 모양으로 조각된 머리 입술과 볼과 눈썹을 칠한 장승이 마을 입구를 지키고 서 있다. 집 근처에는 말뚝 하나가 땅에 박혀 있는 데 드러나 있는 부분은 짚에 싸여 있으며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말을 적어 놓은 흰 종이가 끝에 붙어 있다. 이것은 터주 신을 달래는 것인데, 터주 신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제물과 헌물을 함께 바치는 것이다...(브라운, 2003 : 38).

한국에서 전통종교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와 이해가 주어지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일부 토착 신학자들의 노력에서 두드러졌지만, 선교지상주의적인 태도는 이러한 경향을 무시했다(백종구, 2002 : 182-250).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기독교 선교라는 틀 안에 제약시키려 했던 선교사들의 신학적 편협함은 한국 기독교를 편협한 종교로 전락시켜 제국주의적 종교의 이류라는 낙인이 찍히게 만들었고, 지성적이며 합리적인 대중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형편에 처하게 하였다. 사회윤리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토착민들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무시하는 선교, 선교사와 신교대상 간의 근원적인 평등관계가 설정되어 있지 않았던 선교, 그리고 서구 종교 우월주의적인 선교라는 풍토에서 자라온 한국 개신교의 보수주의 성향은 근대 세계가 보편적으로 수용하기로 약속한 인권에 대한 이해능력의 결핍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기독교 보수주의의 색체가 강하면 강할수록 근대적인 인간의 자유와 평등, 존엄에 대한 이해가 취약해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5) 비정치화의 보루가 된 교회
일제 강점기에 복음의 절대 진리를 외쳤던 선교사들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경제적 자립은 강조하면서도 한국 사회의 변화는 일제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 민족의 독립과 자주 그리고 교회의 개혁 능력을 지원하는 방법보다는 일제를 도구로 삼는 것이 그들이 목적한 기독교 서구화의 속도가 가속화될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박순경, 1986 : 70). 그리하여 이들은 개신교 선교 초기에는 복음화를 위한 지상의 과제를 비정치화와 개인구원에 치중하는 경건주의에 초점을 맞추는 선교 전략을 선택했다. 그러나 실상 선교사들은 이미 서구 자본주의적 사유방식과 부르주아적인 삶의 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일면 그들의 자국과 상대적으로 오랜 외교적 관계를 맺고 있는 일제와의 관계에서 더욱 안전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기회가 있는 대로 자국의 사업가들을 위하여 조선의 다양한 광산 채굴 사업의 이권을 매개해 주고, 일부 사업가는 그 권리를 일제에 팔아 넘겼다(Harrington, 1973; 박순경, 1986 : 94).
교파주의 신학에 깊이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의 신학적 상상력은 자본주의적인 양적 성장과 팽창에 지나친 관심을 둔 나머지 기독교 복음의 예언자적인 전통을 약화시키거나 생략했다. 더구나 조선 왕실과의 관계와 한일합방 이후 일제와의 관계를 희생시키면서 이루어 낼 선교적 과제는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철저히 기존질서 유지적인 사회윤리 의식을 한국 교회에 이식했다. 그리하여 이들에 의하여 생략된 복음은 성서가 담고 있었던 출애굽의 해방적 지평, 계약법전의 약자보호법 정신, 희년법의 혁명사상, 예언자들의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앞세운 정의 실천의 요구, 정치권력의 억압적 현실에 대한 해방과 평화와 생명의 복음에 대하여 침묵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비정치화 프로그램은 한국에서의 선교사역에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조선이 일제에 의하여 강점을 당해도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놀라운 회개운동이 일어났으며, 교회가 급성장하고 있다는 보고를 그들의 본국 선교국에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순경은 이 정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서양의 세력에 굴복한 한국인들은 기독교가 서양나라들의 종교라고 서양과 동일화시키고서 서양을 흠모했던 것이며, 구원의 모델로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이 오류가 바로 기독교 선교의 결실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기독교와 서양문화의 동일화의 결과였다. 그 오류가 바로 민족의 문제로부터 한국 기독교가 이탈해 온 과정의 시초였다(박순경, 1986 : 94).

정치, 사회적 환경을 선교의 도구로 삼아 온 교파주의 유형의 기독교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비정치적 선교를 지향함으로써 비정치적 정황이 기독교 복음을 확장하는 데 가장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다. 그리하여 사회, 정치, 경제적 정의와 평화를 위한 복음적 노력은 생략하고 오직 영혼구원을 위한 개인주의적 회개를 요구했으며, 기독교는 정치적 정황에 개입할 수 없다는 정교분리 원칙을 체질화 했던 것이다.
민족이 망해도, 가난해도, 전쟁을 겪어도, 기독교는 부흥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는 데 한국교회의 어줍지 않은 경이로움이 있었다. 에딘버러 대회의 의장이었던 모트는 1907년 극동 아시아 지역을 여행한 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만일 한국에서 같이 일하고 있는 여러 선교부가 응분의 지지를 받고 당장 사업을 확장한다면 한국은 비기독교 세계에서 최초로 기독교 국가가 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 나는 선교 사업의 투자에 비하여 한국에서와 같이 크고 견실한 성과를 얻은 피선교지를 알지 못한다”(박순경, 1986 : 98)고 했다. 민족의 현실에 개의치 않는 기독교 선교는 한국 기독교인들을 한국의 사회 정치 경제적 현실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능력, 즉 기독교 사회윤리학적인 사유능력을 봉쇄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은 한국 기독교를 사회윤리학적으로 무능하게 만든 근본 요인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한국 기독교의 도덕적 신뢰성의 추락을 불러온 가장 커다란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런 한국교회를 향하여 김용복은 이렇게 비판했다.

한국 기독교는 배타적이고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사이비 메시아적․쇼비니즘적이다. 한국 기독교는 배금주의 종교로 전락하였다. 한국 기독교는 차별주의를 허용하는 가부장적 권위주의 종교다. 한국 기독교는 독선적이고 분열주의적 종교집단이다. 한국 교회는 성서를 오독(誤讀)하며, 기복적 물신주의에 만연되어 있고, 종말론적인 환상주의와 도덕적으로는 위선주의에 물들어 있다(김용복, 2001).

김용복의 비판적 시각은 오늘의 한국 기독교가 얼마나 기독교 사회윤리학적 자기 이해에 있어서 왜곡되어 있는지를 밝혀주고 있다. 에딘버러 대회 이후 한국 개신교 선교 100년이 지나는 오늘날 우리 사회 구성원의 약 20%를 점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의미하는 사회윤리학적인 의미는 결국 한국사회의 보수성, 전근대성, 차별주의, 가부장성, 배금주의, 물신주의와 위선주의의 오염도를 증가시키는 인자들이 되고 있다고 판단해도 큰 오류가 없을 것이다. 이 판단이 그릇되지 않다면 오늘의 기독교는 우리 사회의 정의, 자유, 생명, 평화의 확대과정에 커다란 장애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진지한 의혹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6. 나오는 말
한국세계선교협회의 통계에 따르면 에딘버러 1910 대회 이후 한국 개신교의 위상은 피선교지 교회에서 1만 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로 바뀌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 교회는 2005년도 통계를 미루어 볼 때 약한 신흥 교회의 위상에서 한국 사회 구성원의 18.3%를(장석만, 2007) 차지하는 강력한 종교로 변모했다. 한국 기독교는 물량적으로나 인적 자원으로 보나 이제는 힘을 부여받은 종교(empowered religion)로서 과거에 비하여 그 위상을 달리하고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 기독교가 보이고 있는 일반적인 특징에는 정치 세력화된 기독교, 보수적이며 배타적인 기독교, 종교 제국주의적인 지배세력을 지향하는 성향들이 있다. 여기서 나는 서구 기독교 역사가 반복했던 오류, 즉 종교와 정치의 거룩하지 못한 연대가 반복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가지게 된다.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려면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하나의 건전한 종교로서 자기 정체성을 가지기 위해서 여러 가지 극복해 내야 할 과제들을 가지고 있다.
이런 과제는 일단 서구 세계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피선교지로 규정되던 한국교회가 자기 혼란을 벗고 진정한 한국 교회의 정체성을 찾는 과제가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서구 기독교의 제국성을 옷 입고 있는 오늘의 한국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보다 보편적인 정의와 자유와 평등의 촉진자로 그 존재의미를 찾으려면 나는 먼저 유대 기독교적 예언의 영성과 더불어 아시아인들의 고난의 역사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아시아적 영성과의 정직한 만남과 대화가 불가피하다고 본다.
이 과제를 풀어 나가기 위하여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한 세기 전 서구 기독교 선교사들이 걸어놓은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그리고 정복주의적 선교 기획의 마법에서 해방되어 민족과 더불어 평화, 생명과 자유의 증진을 불러 올 수 있는 새로운 선교 지평을 열어 나갈 수 있는 신학의 패러다임이 찾아야 한다. 이 새로운 신학의 패러다임의 윤곽은 제국주의적인 종교적 영성으로부터의 해방을 거쳐 아시아의 대중이 지닌 영성과 만나는 생명, 자유, 평화의 지평에서 지배와 정복의 신학이 아니라 섬김과 겸비(kenosis)의 신학을 지향하는 방향에서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Abstract

“Social Ethical Tenants of Korean Christianity and Their Problematics: Restrospecting the Edinburgh Mission Conference 1910”
By Choong Koo Park, Ph.D
Professor of Christian Ethics of the Methodist Theological University

Korean Christianity is presumed as a product of the mission project of the West deliberately designed in the Edinburgh mission conference of 1910. Unlike western Christian churches, the subject of the Christian mission, Korean churches were formulated in accordance with the process of omittance of the gospel that happened when western missionaries strove to Christianize Korea without confronting the possible conflicts which could have emerged from Korea’s social, political and cultural milieu. As a result, the gospel introduced by the western missionaries was accordingly de-politicized, and ignored the religious and cultural reality of Korean people.

The gospel brought to Korea by western missionaries was contaminated by the compromised spirit that Ernst Troeltsch well articulated in his perception of denominationalism. The tradition of Christian denominationalism in the West was formulated though the realistic accommodation of worldly realities such as politics and economics at the cost of the eschatological, Judao-Christian prophetic spirituality revealed in the teaching of Jesus. The basic nature of the compromised spirit held within denominationalism tends to be more conservative than revolutionary. In this vein the Korean church became unable to find a balance between the ideal and the real, and lost its power to transform the unjust reality of Korean society.

The more the Korean church is empowered, the more it misuses its power to ally with status quo because it has been nurtured through the imperialistic dominating spirit of the western Christianity associated with the spirit of imperialism. This is why one can easily experience of the practice of sexism, materialism, hegemonies, and prosperity theory within Korean churches. This essay concludes that unless Korean Christianity overcomes the spirit of the empire transmitted from western missionaries, it is hardly possible to serve the Korean society with a liberating spirituality of freedom, justice and equality. In order to achieve an authentic Korean Christianity, the Korean churches should reappraise Asian spirituality, where it may find the power to overcome the imperialistic dominant spirituality of the W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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