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anuary 4, 2021

동정과 연대 나누기 Sharing Compassion and Solidarity

 연대 나누기

1. 새해를 맞으면서 제 마음에 내상이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검찰에 의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가족 괴롭히기가 법원 1심에서 불의하게 합법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조국 장관을 공격하는 윤석열 검찰의 공공연한 법의 오용과 남용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마음이 1심 판결로 인하여 또 크게 상처를 받았습니다. 판사의 성향을 분석하고 있었던 검찰은 검찰을 편드는 판사와 그렇지 않은 판사를 나누고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판사를 공정치 못한 판사라는 단서를 달아 교체시키는 교활함도 보였습니다. 불의한 검찰의 꼭두각시가 된 법원의 실상도 보았습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이 성탄절을 전후하여 일어나는 것을 목도하면서 제 마음에 있었던 상식과 정의의 기준이 부정되는 것이 느껴져 한동안 도무지 마음이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민주사회가 판사에게 법적 심판을 맡긴 것은 그가 헌법과 법률과 양심에 따라 판결할 것이라는 민주사회 구성원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고, 판사는 그 믿음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의무를 질 것이라는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판사들은 우리의 믿음과 신뢰를 조롱했습니다. 판결문은 판사가 이미 답을 정해놓고 좌충우돌 억지 논리를 더해놓은 꼴입니다. 결과적으로 현 정권의 개혁 의지를 가로막고 훼방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이런 조야한 정치적 판결을 접하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저는 이 나라의 법원이 정의와 공정의 보루가 아니라 수구 질서를 옹호해오던 장치에 지나지 않았다는 의구심이 확신으로 굳어지는 것이 느껴져 깊은 좌절감에 무척 힘들었습니다. 이젠 검찰과 법원이 손만 잡으면 누구든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는 무서운 세상이라는 느낌에 두려움까지 다가옵니다.
우리 사회에는 일제의 끄나풀에서부터 이어진 100년 묵은 검찰과 법원이 불의한 언론-정치 세력과 손을 잡고 4겹으로 된 줄로 꼬아진, 정의와 공정사회를 가로막고 수구 세력의 이익을 지키는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민으로부터 선출되지도 않은 세력인데 실질적으로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특히 검찰과 법원의 구성원들은 지난날 권력자들과 손을 잡고 자신들만의 특권행사 방식, 전관예우라는 초법적 횡포를 유통하며 굽은 판결을 주고받고 권력과 돈을 가진 자들의 편에서 축재해온 자들을 그들의 상관, 선배로 모시고 있습니다. 이 집단의 비리를 근절하려는 개혁자들이 이들과 조우하는 최전선에서 온갖 모욕과 상처를 입고 있던 셈입니다. 노무현, 한명숙, 조국, 정경심, 추미애,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 바로 이들에 의하여 치명상을 입은 분들입니다.
저는 이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앞으로 문재인 대통령이나 개혁을 외쳐온 일련의 인물들의 안전조차 어느 누구도 담보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기득권을 거머쥔 검찰 세력, 법원 세력, 언론 세력, 정치 세력의 연대를 과연 누가 깰 수 있을까요? 문재인 정권이 과연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요? 아무리 보아도 역부족입니다.
민주 시민들은 개혁을 약속한 이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개혁하겠다는 정당에 180석 의석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수년이 지나는 동안 민주 시민들의 피부에 와 닿는 개혁의 정도는 너무 약하고, 오히려 수구 세력에게 멱살 잡혀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무능한 모습을 보여 한동안 내심 불만스럽고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니 지금 우리가 싸우고 있는 상대가 생각보다 무서운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보이지 않는 전선에서 4겹줄로 엮여 100년 동안,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정의와 공정한 사회를 가로막아온 집단과 싸우고 있습니다.
이 싸움은 동족을 학살하기도 하고, 모함하여 죽이기도 하는 냉혹한 무리를 상대로 하는 싸움입니다. 어떤 이의 말대로, 농담 삼아 웃으며 “너 그러다 죽는 수가 있다.”라고 하던 이들이 이제는 사법 농단을 저지르는 세력의 손에 걸리면 얼마든지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세상이라는 두려움까지 느끼게 된 것입니다.
수구 특권 세력은 정치, 언론, 검찰, 법원 곳곳에 숨어서 개혁의 선봉에 서있는 이들을 교묘하게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치명상을 입히고 있습니다. 이런 수구 세력이 과연 종교, 교육계, 감사원, 경찰, 군대 등등 사회 곳곳에는 없을까요? 나는 이런 세력이 국민이 선출한 정권도 무력하게 만들고, 민주사회의 인권의 보루인 법치도 제 손아귀에 놓고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상대의 성향을 조사 분석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민주 세력의 개혁 동력을 멈춰 세우려 합니다. 이들은 심지어 개혁 성향의 정치가의 처와 자식, 친척까지 볼모로 삼고 수사와 기소, 판결로 보복의 칼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많은 분은 상당수의 선한 검사, 판사들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들 역시 지난 역사 속에서 불의한 제도와 조직에 몸담고, 불의한 자들에 의해 법절차가 오용되고 있는 현실을 못 본 척하면서 부귀와 영달을 누리며 비굴하게 살아온 이들이기도 합니다.
일부 타협주의자들은 박근혜와 이명박을 감옥에 보낸 것으로 족하니 이제 그 선 이상 더 가지 말자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요구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 사회는 다시 수구 세력의 수중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결국 개혁 정권에서도 정치가 정의와 공정을 압도하고 지배하는 세상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정치가 법치를 압도하는 세상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 시대로 끝나야 하지 않나요? 죄를 지은 자들에 대한 최종심 판결도 나오지 않았는데 벌써 사면을 요구하는 소리가 나오는 까닭은 바로 이런 타협주의자의 어설픈 현실 인식과 판단 기준 때문입니다. 이런 소리가 개혁과 공정과 정의를 주장해 오던 민주당 대표의 입에서 나온 것이기에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2.
저는 한 기독교인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일이 무척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명실공히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는가?” 스스로 물어보아도 “그렇다”라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기독교가 참된 기독교가 아닌 악성 변종이 되어 세상에 치이고 삶에 지친 이들을 포로로 잡아 오직 교회만 섬기는 교회의 종으로 만드는 집단이 되고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생명을 섬기는 생명의 하나님 교회가 아니라, 생명이 교회를 섬기고, 마치 교회의 하나님을 기독교의 하나님으로 변이 시켜 놓은 것 같습니다. 교회라는 집단이 거대한 집단 이기성에 매몰되어 기득권 세력이 되고, 심지어 정의와 공정을 짓밟는 불의한 사회를 편들고 있다는 생각은 저만의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최근 저는 시민운동을 하는 한 선배로부터 정의의 문제는 정치가에 맡기고 우리는 정직 운동만을 하자는 요지의 문자도 받았습니다. 과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할까요? 이는 마치 일제 식민지배 아래에서 ‘신앙인은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은 하지 말고 오로지 정직 운동만 해야 한다’라는 논리와 하등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종교와 정치를 분리해온 이들이 과연 정치가들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사회의 정의와 공정을 염원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종교 그 자체를 지키기 위해 수구 세력의 미움을 받을 일을 멀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습성에 빠진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세계 교회 협의회가 정의로운 사회질서에 대한 책임을 논구하기 시작했던 때가 지금부터 70년도 더 지난, 암스테르담 회의가 열렸던 1948년이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불의한 정치, 포악한 군부, 탐욕스러운 기업가들이 하나님 백성의 존엄성과 권리를 마구 짓밟는 현실을 교회가 외면하지 말고 함께 책임을 지자고 외쳤던 것이지요.
참된 양심의 빛이 살아 있다면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 삶에서 종교와 정치는 공존해야 합니다. 종교도 마땅히 정치의 과제, 즉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이루어 나가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지난 70년 동안 깨어 있었다면 오늘의 4겹 줄 수구 세력이 저렇게 겹겹이 강고하게 자리를 잡았을까요?
3.
저는 종교 개혁 시대 전후에 피어난 특이한 신비주의자 집단의 사상을 접한 적이 있습니다. 이들은 라인지역에 모여 살던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명 독일어로 라인지역 신비주의자(Rhineland Mystiker)라 불렸던 이들입니다. 이들의 삶과 사상의 자취를 살피면서 저는 정의와 공평의 기준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종교가 인류사에서 이 세상의 다른 영역보다 영성이나 도덕적으로 더 높은 정신세계를 간직한 영역으로 그 지위를 인정을 받아온 까닭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종교가 종교의 영성 속에서 새로운 세상, 새로운 질서, 더욱 참된 정의와 평화에 대한 상상력을 키워내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인강 주변에 살던 신비주의자들은 영육을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영과 육을 하나로 바라보는 비이원론적 사유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육을 하나로 바라보는 전통은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적인 영성과 질이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성 신비주의자들은 순수 영성의 세계를 찾아 세상, 부모, 가족, 심지어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떠나 물성을 초월하는 영성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현실을 버리고 떠나면 떠날수록 이들은 영육 이원론적 세계관에 갇혀서 자기 부정, 육체성의 부정, 욕망의 부정을 위해 모든 수단을 다해 싸웠습니다. 결국 자기 자신을 부정하기 위해 삶과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그러나 라인지역에 살고 있었던 신비가들은 정신과 몸, 육체와 영혼이 나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부장적 신비가가 버리고 떠나간 곳에서, 자연에서, 우리 몸에서, 모든 생명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했지요. 이들은 차이를 강조하며 순수 영혼을 찾아 길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차이가 아니라 모든 것이 동질의 것,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가 담겨있는 피조물로서 등질성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남성 신비가들은 천사를 흠모하고 인간의 육체를 혐오하거나 물질을 멀리했지만, 이들은 아주 사소한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창조 신비를 예찬했습니다. 새나 나무나 시냇물조차도 이들의 눈에는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형제요 자매라 여겨졌습니다. 여기서 위대한 사랑의 힘이 솟았습니다. 형제와 자매의 아픔, 사람의 아픔만이 아니라 자연의 아픔도 들여다볼 줄 아는 깊은 동정과 연대의 영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여성이었던 그들은 생명을 낳아본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했습니다. 여성의 몸으로 낳은 생명은 바로 자기 분신이었기 때문이지요. 아기의 아픔이 엄마의 아픔, 피조 세계의 신음이 바로 하나님의 신음이었기 때문입니다.
4.
어느 신앙인에게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초월적인 영성의 세계에 비하여 하찮고 비영성적인 것이라 여겨져 버리고 떠나가는 것이었지만, 이들에게는 그 모두가 소중한 하나님의 피조물, 자기 자신과 같은 피조물이므로 형제자매로 받아들여져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되었습니다. 나무도, 새도, 심지어 흐르는 시냇물을 향해서 이들은 형제요 자매라 불렀습니다. 여기서 세계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 “세계 내적 신비주의” 영성이 피어났습니다.
이들은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나 자기 주변에 있는 약한 생명을 향한 강력한 동정과 연대의 영성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바로 이 연대의 영성에서 이들은 약자를 위한 정의와 공평을 요구하고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약한 생명과의 연대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약자를 괴롭히며 희생시키는 불의한 힘의 제거, 곧 정의의 요구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연대감과 정의의 요청은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습니다. 암울한 가운데 맞는 새해, 우리는 한동안 펜데믹으로 인한 어려움과 더불어 불의한 세력의 횡포를 겪으며 어둡고 답답한 시간을 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픔이 그들의 아픔이 되고, 그들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으로 느껴지는 연대(solidarity)의 마음이 우리에게 살아 있다면 더욱 정의롭고 공평한 세상을 향한 우리의 염원은 멈추지 않고 쑥쑥 자랄 것입니다.
다시 일어서서 더욱 정의롭고 공정한 세상을 상상하면서 다시 희망을 가슴에 품어야 하겠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장로교 신학자 알렌 보젝은 포악한 자들에게 외면당해 땅에 버리어진 진리는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진리는 진리이기 때문에 생명력이 있어서 언젠가 다시 하늘로 높이 솟구친다고 했습니다.
불의하고 포악한 자들은 언젠가 역사 속에서 제거되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연대를 나누는 이들에게는 아직 희망의 지평이 열려 있습니다. 새해 아침, 좌절과 우울의 시간을 잘 이겨내고 다시 일어서야 하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이미지: 식물, 꽃, 나무, 실외,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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