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일
사회이론학회 발제문
분노에 대한 기독교 신학적 고찰
1. 분노(Anger, Wrath)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감정중의 하나다. 유쾌하지 못한 감정의 색조를 지니고 있는 분노는 심리적이면서 육체적인 긴장을 불러온다. 분노는 일종의 보복적 감정이기도 하다. 분노로 인한 정신적, 심리적, 육체적 긴장의 해소는 보복적 행위를 충동 유발시키기도 한다. 분노가 내면으로 향할 때는 고뇌와 분노, 좌절, 우울, 죄책감 등의 감정을 유발하지만 외적으로 타인을 향해 표출될 때는 폭력적이거나 공격적인 행위를 촉발하는 까닭이다.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는 분노란 자기 파괴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서 분노조절(anger management)의 대상으로 보는 경향이 짙다.
2. 서구에서 인간의 성품에 관심을 가졌던 이들은 분노에 대하여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전적인 철학자들은 불의를 인지함으로써 일어나는 분노에 대하여 다소 긍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분노의 본질은 무엇인가 올바르지 않은 동기에 의하여 촉발된, 과도하거나 모자라는 덕의 결과, 즉 악덕의 하나로 간주했다. 정제되지 않은, 절제가 결여되어 야기하는 산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스토익주의자나 에피큐러스도 분노를 “신으로부터 축복받은 삶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Ep. Herodot,77)이라 여겨 역시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으로 이해했다. 세네카 역시 “분노를 일러 광기로 이어지는 것”(Ep. Mor. 18.12)이라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분노란 참된 행복에 이르는 조화롭고 덕스러운 삶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3. 이러한 입장은 서구에서 기독교 수도원주의와 닿아 있다. 고대 그리스의 지복주의적 전통을 이어받은 기독교 초기 사상에서도 분노는 긍정적으로 평가되지 않았다. 4세기 경 이집트의 에바그리스수(345-399)는 분노를 포함하여 대죄를 논하기 시작했고, 이어 카시아누스(360-435)는 그의 책 “The Monastic Institutes”에서 서방 수도원주의의 경건을 위한 실천적 덕을 논하면서 분노를 “분노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으로 대죄 중의 하나로 발전시켰다. 8세기 그레고리 대제는 분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건주의 사상을 일반 교회에 적용함으로써 분노는 기독교인의 삶에서 멀리해야 할 하나의 악덕으로 일반화되었다. 이런 이해는 성서본문(창 4: 4-8; 마 5: 22; 갈 5: 20-21)과 함께 성서적인 원칙으로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여기서 내릴 수 있는 소결론은 분노는 통제해야할 악이라는 것이다(신원하, 2012: 86.).
4. 13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서적 전통과 그리스 철학 전통을 종합하면서 분노를 이중적으로 해석했다. 아퀴나스는 인간이 가지는 감정을 크게 나누어 열망하거나 분노하는 것으로 (concupiscible/irascible) 나누어 이해했다. 열망하는 감정이란 사물에 대하여 선호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감정을 유발된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이 무엇인가에 의하여 차단되었을 때 일어나는 감정이 일종의 분노의 감정이다.
일단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감정은 존재의 목적, 즉 생명을 지키고 행복을 누리려는 것에 의하여 선호가 갈린다. 아퀴나스는 인간이나 동물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 목적을 일러 행복이라고 여긴 맥락에서 인간이 행복을 느끼고 생명에 대한 존중과 경외를 불러오는 것, 혹은 그런 의도에 대하여 느끼는 선호의 감정(사랑, 증오, 욕망, 염오, 기쁨이나 슬픔 등)이 일어난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감정은 단순히 정신적이거나 심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우리 육체에도 변화를 불러온다.
따라서 근원적인 목적(telos), 행복을 향한 우리의 감정이 차단되거나 방해를 받을 경우 일종의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분노의 감정은 열망하는 감정(concupiscible emotions)의 수호자나 완성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분노는 전통적인 철학자들이나 종교적인 부정적 이해와 크게 다르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인간이 사물을 인지하고, 자신의 경험을 기억으로 축적하고 있는 존재로서 사물에 대한 종합적이며 지성적 판단을 한다 할지라도 분노의 감정을 이성으로 통괄하지 못할 경우 원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행위, 즉 죄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ST. I-II. 23.).
이런 논의에서 아퀴나스는 분노를 다시 둘로 나눈다. 하나는 전통적인 부정적 이해로서 파괴적이고, 이기적이며, 보복적인 감정이나 행동을 유발시키는 감정으로 보았던 수도원적 악덕이다. 이러한 분노는 존재의 목적에 일치하도록 돕는 이성의 도움을 받아 최선을 다해 잘 다스려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불의에 대한 저항과 항거의 동기가 되는 감정으로서 일종의 의분(righteous wrath)을 말하는 데 이러한 의분은 사회적 악과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로운 상태를 회복하는 힘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ST I-II. 23.1; I. 81.2.).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이해를 자기 사상의 한 축으로 받아들인 아퀴나스의 이성적 해명에 의하면 분노는 도덕적으로 덕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5. 루터(1483-1546)는 어느 수도사의 이야기를 통해(Luther, Weimar Edition 1, 465) 인간의 성정에 분노가 깊이 배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분노를 다스리기 위한 수도사적인 삶의 중요성을 그도 인정했다. 하지만 루터는 분노의 필요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간혹 적절한 분노를 품을 필요도 있다고 그는 생각했는데 그 적절성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사랑에 의하여 동기화된 분노로서 죄를 적대하면서도 당사자에게는 친절한 것으로 어느 누구도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분노”일 경우다. 루터는 우리 자신을 위한 분노를 요구받지 않으나 하나님을 위한 분노는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우리의 품성은 죄로 인해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한 분노를 품는다는 것 자체도 매우 위험하다고 보았다. 오직 성령께서 우리의 품성과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실 때에만 바르게 분노를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분노가 잘 조절되고, 바르고 적법한 용법아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심성에 심어주신 자연적인 감정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루터는 분노란 하나님의 창조적인 행위와 목적에 연원을 두는 것이지 인간의 죄성에서 기인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본 것이다. 그는 주장하기를 “내가 글을 쓰고, 기도하며 설교를 잘 하려면 나는 분노보다 더 좋은 방책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분을 품어야 한다. 그리고 내 몸의 모든 피를 쏟아 분노를 신선하게 하고 나 마음은 예리하게 함으로써 모든 유혹을 떨쳐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설교자로서 지녀야 할 악과 죄를 향한 의분을 영적 지도자의 덕목으로 여긴 듯 하다.
6. 칼빈(1509-1564)은 인간의 죄스러움에 대한 깊은 인식으로 인해 분노를 품는 삶의 위험을 더욱 강조했다. 그는 감정이나 욕망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우리의 감정을 억압하고, 재갈물리며, 묶어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바울 서신 주석(Commentaries on the Epistles of Paul to the Galadians and Ephesians, 281-82)에서 분노의 세 가지 형태를 논한 바 있다. 분노는 1)사소한 원인이나 개인적인 손실 혹은 공격행위에서 비롯되거나, 2) 주어진 한계를 넘어 절제하지 못하여 과도하게 행동하는 데에서, 그리고 3) 우리 자신 혹은 우리의 죄를 향한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제시한 대 원칙은 에베소서의 말씀대로(엡 4: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라는 것이었다. 칼빈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심어 주신 감정의 하나로 분노를 이해하면서도 인간의 죄성으로 인하여 마땅한 분량을 넘어서지 않도록 경고했다.
7. 요한 웨슬리(1703-1791)는 분노를 완악하고 부패한 심성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온유함의 반대로 간주했다. 비록 온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분노를 경험할 수는 있지만 분노를 발하는 것은 죄라고 여겼다. 진정으로 온유하고 겸손한 이에게는 분노가 자리를 잡을 곳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모든 분노가 모두 악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특히 개인의 성결과 성품의 온전함을 강조해온 완전주의적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전통에서는 사회 정치적 불의에 대한 저항과 비판을 금기시하는 경향을 보이는 비정치적 입장을 강화하기도 했고, 이러한 경향은 교회와 정치의 건전하지 못한 연대 속에서 묵인되어 왔다.
8. 이렇듯 주요 개신교 사상가들은 인간의 죄성으로 인하여 분노를 재갈 물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었다. 다만 그 분노의 방향이 자기반성, 죄악, 그리고 사회적 불의를 향할 때 긍정적 측면이 있을 수 있으나 인간의 죄스러운 성품에 의하여 지배받게 될 것을 우려했다. 이러한 속성은 라인홀드 니버가 일찍이 지적했던바 기독교 정통주의 전통은 인간의 어두운 죄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인간이 지난 정의를 향한 가능성을 극소화하는 결과를 불러왔고, 그 여파로 18세기 이후 야기하는 민중의 분노와 혁명의 역사 속에서 소극적이거나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게 하여 기독교가 사회 정치적인 역사적 책임에 대하여 방관자가 되거나 소극적이었다는 평가를 남겼다.
9. 18세기를 지나면서 분노를 정의와 연관하여 재평가하기 시작한 이들이 소위 자유주의신학자들이었다. 크리스토프 불룸하르트, 레온하르트 라가츠, 왈터 라우센부쉬 같은 이들은 성령의 역사가 개인의 성품을 변화시키는 것과 같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분노에 대한 정신분석학적인 이해는 인간의 생존과 삶의 가치를 지키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힘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특히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 서남동의 한의 신학(민중신학), 베버리 해리슨의 여성신학 등 일련의 정치신학은 분노가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동기적 능력이 될 수 있다고 재평가했다. 이러한 이해는 지난 역사 속에서 사회, 정치, 젠더, 경제적 억압기재로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억압, 차별, 착취적 관계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는 정의로운 분노로 이해되었다.
10. 초기 기독교 전통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예언적 신학적 사유 속에는 언제나 개인적 성결이나 경건을 넘어 사회정의와 평등, 평화를 요구하는 강한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그러나 성서에 담겨있는 예언적 메시지는 현실 정치와의 타협 속에서 대부분 침묵 속에 가두어졌다. 이러한 예언적 메시지의 토대는 “하나님의 분노“ 혹은 ”예수의 분노“에 대한 성서적 증언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아모스나 호세아의 메시지 속에 담긴 내용은 하나님의 분노는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할 것이며, 심판 이전에 정의로움을 회복하라는 것이 주요 요지였다. 그러나 예언자적 전통이 아닌 제사장적 전통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를 종교적으로만 해석하여 사회 정치적 정의가 아닌, ”종교적으로 충실한“ 구원의 조건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 결과 하나님의 분노는 단순한 종교적 분노로 이해되고 현실사회로부터 멀어지는 대신 정의롭지 못한 인간을 향한 구원론 혹은 속죄론에서 해소되었다. 이러한 경향을 벗어 버리지 못하는 개신교적 전통은 오늘날 소위 ”근본주의적 보수주의“로 자리잡고 있다.
11.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분노의 문제는 “사랑에 의해 동기화된 분노,“ 혹은 ”믿음에 의하여 동기화된 분노“로 해석되기 시작했는데 이런 논의의 지평에 참여한 이들은 폴 틸리히, 에밀 부룬너, 그리고 라인홀드 니버 같은 신학자들이었다. 이들의 논의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한결같이 ‘온유함을 요구하는 사랑’과 ‘불의에 대한 저항을 유발하는 분노’에 의하여 촉발된 정의를 향한 갈망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보다 기독교적인 것인가라는 물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견해를 포괄적으로 이해한다면 사랑과 정의가 존재론적으로나 혹은 관계론적으로 연계되어야만 정의를 향한 분노가 보다 하나님의 정의에 근접한 것으로 신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12. 하나님의 분노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로움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인간의 분노의 분량은 인간의 상대적 정의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인간의 정의는 언제나 하나님의 정의에 미달하는 것일 수밖에 없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정의나 분노는 인간의 정의를 향한 분노의 근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언제나 인간의 정의를 심판하는 종말론적인 테제가 된다. 여기서 인간의 분노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최선의 정의를 지향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정의로부터 소외된 인간의 정의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인간의 분노를 하나님의 분노와 동일시함으로써 인간의 신격화, 혹은 (인간의) 정치의 신성화라는 신성모독적인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종교는 정치적 목적에 의하여 악용될 수 있다. 하나님의 정의는 인간의 정의를 변형시키는 것이지 동일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3. 이러한 이해를 통하여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분노란 언제나 치명적인 죄가 아니라는 것, 오히려 분노는 인간의 생존과 생명 가치를 지키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모든 해방의 동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긍정적 이해가 교회 안에서 오랜 동안 간과되어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근대적 사회 조건 속에서 기독교가 겸손과 희생과 봉사를 강조해온 습성을 우리가 면밀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분노를 치명적인 죄로 간주해 왔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방향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하나의 사회적 조건 속에 담겨있으며, 그 사회적 조건의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의 분노와 인간의 분노를 우리는 언제나 새롭게 해석해야할 과제 앞에 서있기 때문이다.
14. 5세기의 어거스틴은 일찍이 이런 말을 남겼다. “희망은 예쁜 두 딸을 두고 있는 데 그들의 이름은 분노와 용기다. 분노는 현존하는 것들을 향한 것이고 용기는 현존하는 것들이 그대로 존재하지 않기를 꿈꾸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기존의 것을 향한 분노와 새로운 것을 향한 기투적 용기에서 비로소 희망이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본 셈이다. 희망의 철학자 블로흐 역시 분노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며 새로운 것을 향한 충동이라고 보았다. 분노의 어두운 자기 파괴적인 힘을 제어하면서 긍정적인 새로움을 향한 충동으로 운용해 나간다면 분노는 새로운 희망, 보나 나은 것을 향한 미성의식(Noch Nicht Bewusstsein)의 산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분노의 부정적 측면을 넘어서서 분노의 긍정적 기능은 새로운 것을 향한 희망으로부터 치솟는 정의로운 생명력을 담은 것으로도 재평가되어야 하리라 본다. -끝-
Saturday, January 28, 2017
분노에 대한 신학적 고찰
Posted by
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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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8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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