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7, 2008

불안

불안의 출처는 무엇일까? 하이덱거는 기투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 했다. 우리 존재가 의무와 인식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인 까닭이다. 블로흐는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우리 존재는 항상 열려있어 불안하다고 했다. 희망의 정서가 위협을 받을 때 우리는 불안하다. 그런데 알랑 드 보통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은 존재의 불안이 아니라 관계의 불안이라는 것이다.

"엄청난 축복을 누리며 살아도 전혀 마음이 쓰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보다 약간 더 나을뿐인데도 끔찍한 괴로움에 시달리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한다. 우리의 준거집단에 속한 사람들만 선망한다는 것이다.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다."

인간의 사회 정치 경제적 지위에 대한 민감한 반응이 불안을 불러 온다는 그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단순한 삶의 범주에 제한된 시야와 이해의 협소한 공간안에 포로가 되어 있는 우리 감정의 체계는 사실 오래된 습관의 결과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기보다는 시기와 질투와 경쟁 속에서 자기를 확인하는 습관을 가진 까닭이다. 불안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의 길은 이러한 불안한 관계로부터 자기를 해방시키는 길이다. 보통은 철학과 예술, 정치와 종교, 그리고 방랑의 길에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주 단순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철학과 예술과 종교는 얼마나 다양하고 상대적이며 따라서 불안한가? 그것들은 우리를 새로운 열등감으로 불러들이는 통로들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를 왜곡함으로써 우리를 불안에서 해방시키던지, 관계로부터 이탈시킴으로써 불안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희랍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 처럼 우리가 사는 동안 불안을 벗어나 살 수는 없을 것이라고 본다. 종교를 비롯한 그 무엇도 우리의 불안한 삶을 안정되게 정박시키는 평화의 닷이 될 수 없다.

다만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과 상대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존중의 눈으로 가까운 이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사는 길만 남아 있다. 나와 너를 극단적으로 분리시켜온 주체의 불안을 벗어나는 길은 나의 주체 속에 너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고도의 밀도 높은 감정을 가질 때 가능한 사랑이 아닐까? 이것은 부버의 thou라거나, 타자의 얼굴에서 소외를 이겨내는 레비나스의 이해이기도 하고, 헤셀의 행함의 경이로움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런 길에서 장애가 되는 것은 너를 버리고, 나의 성공을 바라는 것이고, 나의 성공을 나만의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너에 대하여 오만해지는 것이다. 우리 삶의 무수한 비극은 여기서 온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되면 처절한 경쟁과 배제의 싸움에서 피투성이가 된 자신만 남는 것이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밤새 고투한 노인이 건져올린 거대한 고기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앙상한 고기의 뼈대만이었다는 이야기는 바로 우리 삶의 종국이 이러한 장면으로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경쟁과 성공의 논리에서 벗어난 거리 만큼 우리는 덜 불안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벗어나려 노력하다가 다시 그 논리로 돌아갈 때의 비참함은 우리를 더욱 초라하게 할 것이므로 벗어나려는 노력조차 안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와 철학, 일시적 방랑과 유희를 택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한다. 기존의 자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자기가 있는 셈이다. 아니면 자기를 바꾸어 놓고 싶은 자기가 있는 것이리라.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긍지를 가질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남과 비교함으로써 우월함의 근거를 가지고 자긍한다. 그 근거가 박약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든지 혹은 아프리카 사람이 아닌 한국인이라든지 혹은 병든 친구와 같지 않은 자기, 남보다 조금 나은 자기를 인식함으로써 자긍하기 때문이다. 남보다 조금 혹은 훨씬 낫다는 생각때문에 평화를 느낀다면 우리는 얼마나 가학적이며 폭력적인가?

오늘 아침 AFN에서 로벗 슐러의 설교를 들으면서 "proud of yourself!"를 외치는 장면을 보았다. 적극적 사고방식이 겸손과 오만을 어떻게 교활하게 연계시키는지를 느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거대한 힘을 가진 제국의 구성원들에게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목사가 설교한다면, 그들이 범한 무수한 죄악을 회개할 필요도 없고 또한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이 아닐까? 과연 이런 종교에서 불안이 극복될 수 있을까? 더 큰 제국의 폭력을 부추기는 소리로 들려 내 마음이 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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