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November 19, 2008

섬짓한 감사와 아름다운 감사

섬짓한 감사와 아름다운 감사

감사한다는 말은 매우 가벼운 말이기도 하고, 매우 무거운 말이기도 하다. 고마워 한다는 뜻은 자기 존재를 향하여 넘치게 주어진 은총과 사랑과 관심에 대한 응답적 표현일 경우에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다른 이들의 고난과 고통을 앞에 두고 자신만의 감사를 생각할 때에는 이기적이고 천박한 감사가 되기도 한다.
어느 영화에서 본 장면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성탄절을 맞은 나치장교들이 성탄절 찬송을 부르며 구세주의 강림을 묵상하며 감격해하는 장면은 내게 경이로운 공포를 불러오기도 했다. 유태인들을 학살하는 이들의 입에서 찬양과 감사가 울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뿐인가? 아프리카 연안에서 백인들에 의하여 사냥되어 잡혀온 흑인들을 시장에 팔아온 백인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노예상선 이름을 크라이스트 라고 지어 붙이기도 했다. 그들은 항해하면서 기도를 했고, 노예 장사가 잘되기를 기원했을 뿐 아니라 노예 장사를 통해서 번 돈을 가지고 십일조를 드리는 충실한 기독교인들이었다. 천인 공로할 범죄자들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셈이다.
어느 분의 설교에서 들은 예화다. 어느 주일날 아침 예배 시간 갑자기 동네 공터에서 날아온 야구공이 성전의 유리창을 깨고 날아 들어와 어느 장로님 곁에 앉았던 권사의 이마를 때렸다. 그 순간 놀란 장로님은 자신도 모르게 “주여 감사합니다”라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날아 들어온 공이 자기 이마에 맞지 않고 곁에 앉았던 권사의 이마를 때린 까닭이다. 그 장로는 자기 곁에 앉았던 권사의 불행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것이다. 장로라서 하나님이 지켜주셨다고 생각한 것일까? 다른 이의 불행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이들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는 사례다.
한 신학생이 주일학교 학생들을 위한 설교 파우어 포인트 파일을 내게 보내면서 코멘트를 부탁해 왔다. 그는 추수감사절을 맞아 감사의 조건들을 나열하면서 아이들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는 이 아이들보다 행복하고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으니 감사하자. 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이 숨을 헐떡이는 장면을 보여주며 우리의 건강에 대해 감사하자는 식의 내용들이 이어졌다. 나는 이런 류의 감사는 매우 비인도적이며 냉혹한 이들의 감사라고 평가했다. 다른 이의 불행을 보며 그들의 불행에 연대하고 가슴아파하며 그 고통을 적게 하려는 뜻과 의지와 행동보다 앞선 자기보호본능에 예민한 까닭이다. 다른 이의 불행을 보고 자기의 행복을 느끼는 이들은 가학적인 감사자들이다.
기독교의 오랜 역사를 살펴보면 예수의 삶과 그의 가르침에서 떠난 흔적이 역력하게 들어나는 순간이 있다. 어거스틴이 로마 제국의 콘스탄틴 황제와 손을 잡고 로마제국을 기독교화하면서 로마제국의 정치권력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 수간부터 기독교는 패배나 고난을 모르는 승리와 정복과 성공의 종교가 되었다. 로마 제국주의의 확대과정을 따라 기독교 선교가 가능했고, 기독교회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보다 로마 제국의 정치권력의 보호를 받았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정당한 전쟁 이론(just war theory)이라는 이론을 만들어 로마제국의 모든 전쟁행위를 거룩한 전쟁 혹은 정당한 전쟁이라고 인정해 주었다.
전쟁을 쉬지 않았던 로마 제국의 손아귀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수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러나 교회의 역사가들은 로마제국 치하에서 기독교는 번성하고, 성공했으며, 전 유럽을 기독교화하는 데 성공했다고 했다. 소위 기독교 세계(Chritendom)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루어진 평화를 로마의 평화라고 한다. 이 로마의 평화는 약소국 국민들에게는 피로 물들여진 평화였다. 11세기의 우르반 II세가 벌린 십자군 전쟁이 바로 그런 역사적 사실을 입증한다. 십자군들은 이슬람 문화권을 하나님의 적이라고 간주하고, 아말렉을 진멸하듯이 토착민들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잡아 죽였다. 그들이 승리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았다. 피로 물들인 전쟁을 미화하는 역사는 그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이런 피에 젖은 감사가 진정한 감사일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삶에서 살아남고, 건강하며, 성공하고, 승리한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와 동시에 우리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 이들을 망각하고, 건강하지 못하여 고통을 겪는 이들을 잊으며, 실패한 낙오자들을 버리고 온 우리의 삶, 나의 승리를 얻기 위하여 내가 패배를 안겨준 이들을 잊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을 건강과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이들의 하나님으로 바꾸어 놓는다. 어거스틴이 했던 일과 동일한 일을 하는 셈이다.
예수의 비폭력 평화주의적 가르침을 버리고 제국주의적 국가 폭력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미화했던 어거스틴처럼, 우리도 그의 뒤를 이어 승리의 하나님, 정복자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성공과 부귀영화를 주시는 하나님으로 찬양하며 감사하고 감격해 한다. 그러나 단연코 말한다면 이런 하나님은 성서의 하나님이 아니다. 성서의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의 단을 쌓는 행위는 결국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는다. 감사의 마음가짐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많은 부분이 죄에 깊이 오염된 감사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러므로 “누가” “누구에게” 감사를 드리는가를 우리는 되물어야 한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 마틴 부버는 우리에게 인간이란 무수한 만남을 가지는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해 주었다. 그는 우리의 만남이 그릇될 경우 우리는 만남의 대상을 물화시켜서 영성적 관계로부터 단절된 사물의 세계로 전락 시킨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나와 그것(I -It)의 관계가 형성될 뿐이다. 이런 관계는 마치 손이 닿은 것마다 황금으로 만들어 버리는 마이다스의 손처럼 모든 것을 산술적인 계산을 통해 환산해 낼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사랑하는 이도, 교회도, 하나님도, 벗들도 모두 만지기만 하면 그 순간 나의 의지와 생각과 요구에 따라 움직이는 ”그것”으로 바뀐다.
그 순간 생명이 살아있는, 영성이 살아있는, 사랑이 살아있는 관계의 죽음이 찾아온다. 이런 죽음으로 이루어진 관계 속에서 제아무리 풍요를 노래하고 감사한다 한들 그것이 어찌 감사일 것인가? 이미 죽음이 아닌가? 우리의 만남들이 죽음을 불러오는 만남들이 될 때 부버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한다. 그런 삶에서는 하나님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이다. 도구적 이성, 산술적 이성, 쾌락지향적인 가치, 그리고 성공과 번영에 눈이 먼 삶에는 이런 죽음의 문화가 깃들이게 된다. 거기에는 살아있는 것들이 존재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죽은 자들의 감사가 아닌, 산자들의 감사가 여기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부버는 나와 그것의 관계를 넘어서서 나와 당신(I-Thou)의 관계가 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시딤적 전통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바 있는 부버는 일상의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그대“를 만나려면 경이로움의 인식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소유와 성공에 앞서서 이미 우리 존재가 살아있음이 충만한 경이로움인 까닭이다. 거기에는 감격이 있다.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고통하거나 즐겁거나,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라는 얄팍한 계산을 넘어서 이미 우리 존재에 마주해 있는 당신, 하나님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은 부유함과 성공과 힘과 권능을 자랑하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와 나그네 된 자들 곁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을 일상에서 만나고, 그와 동행하는 삶에서 나오는 감격과 감사가 있는 삶,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경험했던 하나님이다. 그들을 포악에서 건지셨으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악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용서하심을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용서하며 살아야 할 의무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니, 우리의 주변에 있는 이들이 우리에 의하여 용서를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포악을 행해서는 안될 대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생명 그 자체에서 우리가 경건과 경이를 느끼기 때문이다. 영성적 삶의 감사는 이렇듯 모든 관계를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닌 나와 그대/당신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나와 그것의 관계 속에 함몰되어 있으면서 드리는 감사란 무의미한 것이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인간이 삶에 깊이 배어든 보호본능은 하나님을 향한 영성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으로 벽을 쌓고 자기를 지키는 사람, 정치나 국가권력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자기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 강한 군대를 조직하고 군대가 자기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삶의 근거를 상실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헤셀은 깊은 영성이란 정의로운 것이라고 믿는다. 정의로움이 없는 영성은 그에게 있어서 거짓된 영성이다. 거짓된 영성에 사로잡히면 우리 삶에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들인 경이로움의 체험을 천박한 교리나 신조로 만들어 암송하게 함으로써 영성과 정의를 대치한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이런 종교는 참된 종교가 아니다. 정의 없는 영성이 반복하는 제의는 하나님에게는 구토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참된 영성의 길을 가려는 이들은 정의를 행하라는 명령에 복종해야만 한다. 정의를 행할 때 우리는 행함의 경이로움(wonder of doing)을 깨닫게 된다. 사랑을 하면 사랑의 경이를 깨닫게 되고, 자유를 살면 자유의 깊음을 알게 된다. 깊은 동정의 삶을 행하면, 그 행함을 통하여 우리는 더 깊은 영성적 동정(compassion)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영성적인 삶이 되려면 성서가 명하는 바 사랑과 정의의 행함이 있어야 한다. 사랑과 정의에 의하여 동기화되지 않은 삶은 결국 이기와 불의가 가져오는 혜택의 유혹을 떨칠 수 없다고 한다. 이기와 불의를 통해 얻은 것으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은 가인의 제단처럼 비극을 초래한다. 하나님으로부터의 거절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부버와 헤셀이 일러주는 “나“는 영성적 존재다. 물질에 의하여 좌우되고, 산술적 계산에 의하여 풍요와 빈곤이 헤아려지는 존재가 아니다. 종교와 제의와 교리와 신조를 옷입은 존재도 아니다. 살아있는 영성적 존재, 늘 살아있음과 존재하는 것들 속에서 경이로움을 깨닫는 영적 감수성이 주어진 존재다. 그러므로 진정한 영성이란 우리가 무엇을 얻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영성은 우리에게 참된 세계를 ”보게”하는 힘이고, 경이로움을 “깨닫게”하는 능력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부버와 헤셀은 동일하게 영적 자각능력을 인간 실존의 가장 깊은 요소라고 생각한다. 이 영성이 살아있는 이들의 감사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감사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루터나 칼빈의 교리주의적인 감사, 즉 나를 십자가에 달려 구원하였으니 감사하다는 감사의 윤리는 이론적 형식으로 전락할 수 있다. 영성적 자각이 없는 존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바로 만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내가“ 누구인가라고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지상에서 성공, 승리, 개발, 확장, 팽창, 정복의 이정표를 가리키면서 신앙의 경주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들은 우리들을 식민지배자로, 제국주의적인 정복자들로 만들고, 우리의 이웃을 정복해야 할 대상이나 식민지화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게 만든다. 거기에는 평화가 없고 전쟁이 있을 뿐이다. 기독교 나치들이나, 기독교도인 노예상인들이 생겨났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진정한 영성은 나와 너를 나누지 않고, 형제자매로 만나게 한다. 참된 영성은 진정한 평등과 정의와 연대를 이루어내는 힘이기 때문이다.
섬짓한 감사가 아니라 아름다운 감사를 드리려면 어떤 하나님에게 드리는 감사인가라고 한번쯤을 스스로 물어야 한다. 승리와 정복의 노획물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신가? 성공과 번영을 즐기시는 하나님이신가? 성서의 하나님은 계약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사이에 맺은 언약을 지키는 것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성서적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백성답기를 요구하신다. 그 하나님 백성다움은 “인자함, 깊은 동정을 가지는 데” 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하시는 하나님 가난한자와 나그네된 자를 돌보라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를 업신여기는 승리주의자를 기뻐하실 리가 없다. 가난한 이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성공한 기업가를 즐거워하실 리가 없다. 원자폭탄을 만들어 두고 언제라도 상대를 초토화시키겠다는 이들을 바라보며 웃으실 하나님이 아니다. 막강한 군대를 만들어 두고 평화를 외치는 이들을 비웃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사를 드려야 할 하나님은 “지극히 적은 자”에 대한 배려와 경외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을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이다. 아름다운 감사는 그러므로 물질적인 드림이 아니라 지극히 적은 자를 돌보는 행함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다. 영성이 살아있는 이들만이 행하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욕심을 덕지덕지 붙이고, 세상의 속물들이 다 되어 온갖 명패와 명예를 다 걸머쥐고, 무수한 사람들의 인권과 희망을 짓밟으면서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다. 이런 감사는 헛된 감사다. 나치들처럼 동료인간의 생존권을 박탈하고, 추방하며, 집단으로 괴롭히는 이들이 드리는 감사도 있다. 이런 감사는 섬짓한 감사다. 영성이 결여된 이들의 영혼이 없는 감사인 까닭이다. 이런 감사는 종교라는 무대 위의 배우처럼 하나님을 기만하는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드리는 감사가 아니라 자기 시위의 행위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물어야 한다. 나의 영혼은 깨어 있는가? 나의 삶이 과연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경이로움에 노출되어 있는가? 경이로움이 나의 영혼을 타고 내 가슴에 전해져 오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의 생명에서 경이로움과 고귀함을 깨닫고 있는가? 영성이 무디어지고, 깨어지거나 증발한 가슴에는 온갖 탐욕과 오만들이 깃들어 우리의 영성의 통로를 차단한다. 아름다운 감사는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과의 원초적인 약속의 지평을 잃지 않는 데에서 나오는 감사다. 가난한자, 지극히 적은 자, 사회적 약자, 나그네 된 자들을 돌볼 수 있는 따스한 가슴을 가진 이들이 드리는 감사가 아름다운 감사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감사하는 이들인 까닭이다.
성서에 보면 하나님과의 근원적인 약속을 잊은 이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보내어 메시지를 전달하신다. 이 메시지에는 경고가 들어 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 이외의 것에서 안전을 찾지 말라는 경고다. 그러나 오늘의 종교는 권력과 물질과 쾌락과의 연대를 통하여 폭력을 생산하고 있다. 하나님보다 권력을 더 사랑하는 정복주의적 종교,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게 만드는 번영의 종교,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게 만드는 성공신화를 만들어 내는 종교, 하나님보다 국가와 군대의 힘을 더 믿게 만드는 종교는 예언자들을 잡아 죽이고 추방한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듯이 오늘도 거짓된 종교는 예언자들을 못살게 하고, 추방하며, 그들을 옥에 가둔다.
이렇게 폭력화된 종교 안에서 드리는 감사는 나치들이 드리는 감사예배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섬짓한 감사다. 그러므로 정의와 사랑을 명하는 예언자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이들의 회개를 담은 감사가 아름다운 감사다. 고난을 겪는 이웃의 불행을 못 본 척 지나쳐 버리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종교가 드리는 감사는 거짓된 것이다. 그러나 강도만난 이웃을 들쳐 업고 그의 생명을 지키고 돌볼 수 있음을 기뻐하며 드리는 어느 사마리아인의 감사가 정말 아름다운 감사다. 다른 이의 불행을 보고 나의 우월함을 기뻐하여 드리는 감사가 아니라 고난 받는 이웃들과 함께하는 삶을 기뻐하는 감사가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참된 감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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