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October 9, 2009

헌법 제 1 조

지난해 촛불을 천민민주주의니 선동포퓰리즘이니 하면서 집시법 등의 위반이니 모두 구속하자는 자들에 대항해 헌법 1조를 노래했을 때만큼 헌법에 대한 사랑이 큰 적이 있을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90년 전의 독일 헌법 1조를 그대로 옮긴 이 조항에 대해 당시 독일의 브레히트는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권력이 과연 어디로 가고 국민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물으며 1조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슬프게 노래했다. 그의 노래대로 독일 헌법 1조는 민주공화국이라는 이름 아래 국민을 짓밟고 결국은 ‘나치’로 끝났다. 나치가 끝난 뒤 헌법은 바뀌었다. 지금 독일 헌법 1조는 “인간의 존엄성은 침해할 수 없다.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기구의 의무다”라는 것이다. 브레히트가 살아 있다면 이 조항도 환상이라고 비웃을지 모르겠지만 나치에 의해 짓밟힌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한 것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우리 헌법 1조를 노래한 우리도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혔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헌법 1조는 환상이 아닐까? 그 1조에 의해 무엇이 이루어졌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혀 무자비하게 붙잡혀 간 것 외에 무엇이 남았을까? 그것은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고작 1년이 지난 지금 환상의 신기루로 착각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차라리 독일 헌법 1조처럼 바꾸는 것이 옳지 않을까? 개헌 논의가 야단법석이지만 그 중 헌법 1조를 바꾸자는 주장은 없다. 제헌헌법부터 지금까지 61년간 변한 적이 없다.

인간의 존엄성 짓밟는 권력

앞으로도 촛불을 들 때 우리는 1조를 노래해야 할까?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히고 무자비하게 붙잡혀가야 할까? 나 같은 자들이 수년간 아무리 외쳐도 무시된 것이 헌법재판소 한마디에 바뀌는 것을 보면 대단한 힘을 가진 듯한 헌법재판소가 헌법 1조를 근거로 삼아 촛불을 헌법합치라고 인정하는 결정을 내리는 세월이 언제 올 수 있을까?(그러나 나는 헌법재판소의 다른 결정에는 대부분 반대한다.) 이미 야간집회를 금지한 집시법은 헌법불합치라는 묘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잘못이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니 그것을 이유로 잡혀간 사람들은 모두 당장 풀어주고 집시법 적용도 당장 그만두어야 헌법이 나라의 근본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온 나 같은 자들의 체면, 존엄성이 아니라 최소한의 체면이라도 서지 않겠는가? 아니 최소한의 인간성을 모독당했다는 굴욕감을 느끼지는 않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나는 여전히 추상적인 냄새가 나는 독일 헌법 1조보다 더욱 구체적인 프랑스 헌법 1조가 좋다. “프랑스는 비종교의, 민주의, 사회의, 나눌 수 없는 공화국이다.프랑스는 출신, 인종, 종교의 구분 없이 모든 시민에 대해 법 아래 평등을 보장한다.” 우리 헌법에도 9조에 유사한 평등조항이 있지만 분명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평등이 헌법 1조에 규정된 것은 우리와는 큰 차이가 있다. 나아가 평등은 그 앞에 ‘민주 사회공화국’이라고 한 사회민주주의라는 정체의 가장 중요한 원리라는 점이 더욱 더 큰 차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사회민주주의라고 해도 국가보안법을 들먹일 정도로 천박한 인간들이 지금도 있지만 그것은 이미 61년 전 제헌헌법에서부터 우리 헌법의 원리였다. 물론 그런 원리에도 불구하고 그 실천은 전혀 반대였다. 헌법에 충실했던 조봉암 같은 사회민주주의자가 대통령 선거에서 두 차례나 이승만을 위협하자 간첩이라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졌다. 지금은 그 정도로 야만일 수는 없지만 권력이 저지른 용산참사를 권력이 아닌 당사자 문제라며 모른 체하고, 국가명예훼손이라는 이유로 시민운동가에게 엄청난 액수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몰염치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문제는 그나마 지난 10년의 이른바 두 ‘진보’ 정권이 평등권을 보장하는 사회민주주의 흉내를 처음으로 겨우 조금 내려 한 것을 두고 야단법석이고 그 흉내조차 깡그리 부정하면서 불평등의 나라로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환상

이를 두고도 헌법재판소가 헌법 1조 위반이라고 결정할 시대는 오지 않으리라. 아니 그런 시대는 차라리 오지 않는 것이 좋다. 어둠이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다시 촛불을 켜는 것 외에 아무런 대안이 없다.

<박홍규 | 영남대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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