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November 10, 2007

Travel to Okinawa, another Japan



<사진: 오끼나와의 恨의 碑>


오끼나와를 다녀와서

오끼나와를 다녀오기 위하여 집을 나설 때에는 마음이 무거웠다. 비행기를 타는 것이 많이 귀찮고, 또 오끼나와의 평화 운동가들이 미국의 거대한 밀리터리즘과 맞서 싸우는 모양이 편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타이페이를 거쳐 오끼나와 나하 공항에 저녁 시간에 도착했다. 타까시 미즈노씨가 공항에 마중을 나와 우리는 반갑게 5년 만에 해후하였다. 그는 평화봉사단원으로 일본에 왔던 영국 퀴이커와 결혼하여 그의 삶 대부분을 필라델피아 접경 뉴져지에 있는 농장에서 평생을 산 사람이다. 가을 농사를 끝내면 오끼나와로 돌아와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친구들과 사귐을 가지다가 겨울이 다가오면 다시 뉴져지로 돌아가는 일을 수년 동안 하고 있다.

그를 알게 된 이후 그는 미국 퀘이커들의 인종갈등 위원회의 회원으로 봉사하면서 그가 겪는 일들을 내게 늘 알려왔고, 오끼나와 평화 운동가들의 활동에 대한 자료들을 보내주었다. 이런 인연들이 있어서 그가 이번에는 오끼나와의 현실을 보고 그곳의 평화운동가들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을 한 것이다. 오끼나와는 생각보다 덥지 않았다. 상쾌한 바닷 바람이 불고 거리는 깨끗했다. 하늘은 구름으로 덮여 있었지만 이곳저곳의 숲들은 매우 평화로워 보였다.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타까시와 함께 인근 식당에서 식사를 한 후 우리는 조용한 찻집에서 오래 환담하였다. 퀘이커 영국인과의 삶에서 그가 경험해온 일들에 대하여, 삶과 죽음에 대하여, 그리고 평화운동에 대하여 우리는 의견을 나누었다. 나는 나의 “theology of dispowering" 대하여 나의 생각을 나누었다. 오끼나와에 머무는 동안 그는 비폭력 평화주의 운동과 권력지향성의 포기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여러 차례 depowering 혹은 dispowering에 대한 이해에 대하여 되물었다.

둘째 날 아침 일본 오끼나와 평화단체의 젊은 멤버인 지에가 자동차를 가지고와 하루 종일 오끼나와를 함께 둘러 보게 되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후 일본으로 돌아와 직장 생활을 하면 평화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조용하고 예의바른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끼나와의 구석구석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먼저 카데나 미 공군 기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우리나라의 오산 미군 비행장이 있지만 이곳 기지는 실로 엄청나게 큰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자동차로 근 삼십분을 가는 동안 우리는 여전히 한쪽이 철조망으로 가려진 기지 주변을 달리고 있었다.

미군이 오끼나와로 진주할 때 일본 정부는 오끼니와 주민들에게 포로가 되어 수치를 당하지 말고 자살할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무사들은 해변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나와 서로 죽였고, 많은 이들이 바닷가 절벽에서 투신을 하였다 한다. 국가주의가 국민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다. 일본 문부성은 이 사실을 역사 교과서에 기록하는 것을 방해하고, 심지어는 역사에 대한 서술을 점점 줄여 최근에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종전을 앞두고 오끼나와인들의 대량 학살과 자살을 불러왔던 천황의 명령에 대한 역사적 기록 자체를 말살 은폐하려 하고 있다. 이런 사실에 항거하여 오끼나와 전체 인구의 10%가 넘는 10만명 이상이 모여 시위를 했던 사실을 지애가 설명해 주었다.

일본 본토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오끼나와의 사람들은 일본 군국주의와 군사주의의 희생물이 되어 온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하며 일본의 재무장, 일본의 우파 국가주의를 매우 강하게 비판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국의 정부에 의하여 버림을 받고 죽임으로 내 몰린 세대들의 비극을 그들을 가슴에 묻고 있는 이들이기도 한 까닭이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한국인들의 전쟁 성노예나 강제노동으로 끌려온 수십만의 한국 청년들의 고통을 쉽게 알아보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 본토보다 한국인들의 억압과 수탈의 경험에서 자신들과의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 같았다. 더구나 오끼나와 섬의 10분의 1을 미군에게 내주어 아시아에서 가장 거대한 미군 기지를 세우게 한 일본정부는 수백명의 오끼니와 인들이 대대로 살아오던 땅을 강제로 빼앗아 미군에게 내어주었다며, 타카시는 아직도 보상받기를 거절하고 농토의 반환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나는 평택 대추리가 바로 이런 과정에 편입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끼나와 지방 정부에서 지었다는 반미군기지 운동본부 건물에 올라가 카덴나 미 공군기지를 내려다보니 광활한 평야 위에 무수한 바라크들이 그리고 전투기 격납고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활주로에는 B29 폭격기가 항시 대기하고 있고 무수한 전투기들이 이착륙을 하고 있어 수시로 굉음들이 하늘을 갈랐다. 지에로부터 시도 때도 없이 수시로 이륙하는 비행기 소음으로 인해 오끼나와에서는 여름에도 집집마다 문을 닫고 살아야 하는 답답함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외부의 공격에 대비해 수시로 사이렌을 울려대는 바람에 늘 소음에 시달리며 사는 오끼나와 인들의 분노를 나는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일본정부의 묵인아래 행해지는 미군 병사들의 치외 법권적 범죄는 오끼니와인들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주었다.

무려 60년이 넘게 지속되어온 낮선 점령군인 미군들과의 강제 동거는 무수한 오끼나와 여인들의 강간과 성희롱를 불러와 오끼니와인들에게 수치를 안겨주었고, 일부 가난한 오끼나와 여성들은 직간접적인 미군들의 위안부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거대한 미공군 기지와 유류 저장소를 바라보면서 엄청난 제국의 폭력의 힘을 느꼈다. 제국주의는 거대한 무력을 드러내 보이는 것만으로도 피지배자들의 자발적인 복종과 협력과 동의를 얻어낸다는 알렌잔드로 콜라스의 제국의 질서 개념이 떠올랐다. 누가 감히 초현대 무기로 무장한 이 거대한 공군 기지를 향하여 싸움을 걸겠는가? 오끼니와 인들의 좌절이 느껴져 내게도 깊은 억압의 감정들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제국은 강한 강제력으로 복종과 동의를 유도하고 자신들의 질서로 정복자들을 편입시키므로 토착민들의 자유와 희망을 빼앗는다. 간혹 이들은 안전을 보장한다는 명분으로 우리의 안전을 송두리째 자신들의 질서 개념에 볼모잡는 것이다. 자동차를 타고 그곳을 떠나오는 동안 끝없이 쳐진 긴긴 철조망을 바라보면서 도무지 저 철조망에서 벗어나지 못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마치 내가 미군들의 철망 안에 갇힌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이어 지애와 타까시는 나를 “한(恨)의 비(碑)“로 안내했다. 일본군에 징용으로 왔던 한국의 젊은이들의 죽음, 강제노동으로 불러온 무수한 조선인들의 죽음, 그리고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온 조선 여인들의 한을 기억하며 이곳 오끼나와 평화 운동가들이 세운 ”한의 비”이다. 골목마다 오래 전에 붙여 놓았을 것 같은 낡은 안내판이 바람에 흔들거리고, 키 높은 갈대들이 부는 바람에 스산하게 머리카락을 날리는 듯한 둔덕을 지나 공동묘지 지역으로 들어갔다. 휘휘한 버려진 숲, 화산재들이 엉켜있는 둔덕 한 편 커다란 나무 밑에 한의 비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이 일본 땅에서 일본 군국주의에 의하여 생명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인간의 존엄이 짓밟혀 죽어간 오빠들과 누나들의 한이 엉켜있는 큰 덩어리를 보는 듯 했다. 나는 묵념을 한 후 한의 비 옆에 새겨진 시를 큰 목소리로 읽었다.

이 시는 아사토 에이코씨가 쓴 것이다. 일부만 옮긴다.

....
오끼나와 사람들은
아직도 군화에 짓밟힌 채로 있는
오빠 언니들의 영혼에
깊이 머리를 숙인다.

일본군 성노예로서 짓밟힌 언니들
징용자로서 희생당한 오빠들께 깊이 머리를 숙인다.
머지않아 굳게 맺힌 봉선화씨가 터져
서로 바다 건너 꽃피우기를 믿으며

오빠언니들이여 그대들이 겪어 오신 고난을 전해가며
지구상에서 전쟁과 군대를 뿌리 뽑을 것을
이 땅에서 돌아가신 오빠언니들의 영혼 앞에서
우리는 맹세한다.


화산재들이 엉킨 땅 한 편에 누운 듯 세워진 한의 비를 바라보면서 나는 약소국 국민의 서러움과 더불어 한 인간으로서의 못다 산 삶의 한을 깊이 느꼈다. 둔덕에는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고 있었다. 이 한의 비 앞에서 타카시는 오끼나와 인들이 이 한의 비를 세운 1 주년을 기념하며 만든 자료집 “희망(希望)”을 내게 건네주었다. 서문을 보니 “일본은 아시아태평양 전생과 오끼나와 전쟁 당시 조선반도에서 100만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강제 연행했으며, 이들을 일본군의 성노예로, 혹은 전쟁을 위한 일꾼으로 노역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우리는 사람이 찾지 않아 잡초가 무성한 둔덕을 내려와 차를 타고 오끼나와 인들의 대량 자살로 몰고 갔던 벼랑가에 세워진 등대로 향했다. 미군이 오끼나와에 상륙하기 직전 천황의 명에 의하여 어른들은 스스로 자결할 수 없는 어린 아이들을 죽이고 자신들은 자결하거나 해변 벼랑에서 몸을 던져 죽음을 택했던 곳이다. 우리는 해변으로 향하는 넓은 사탕수수 밭을 지나 흰 물보라가 날리는 화산암이 널리 펼쳐진 해변에 도착했다. 등대에 오르니 양편으로 해안이 검게 펼쳐져 있고 거대한 바다는 흰 물보라를 흩으며 요란하게 파도를 벼랑으로 내 몰고 있었다. 지에는 바로 저 곳에서 많은 오끼나와 인들이 투신을 강요받아 온 가족들이 죽음으로 내몰렸던 곳이라고 일러주었다. 바라보기에도 무서운 검은 벼랑에 선 그들이 도대체 무슨 힘에 의하여 자신들을 바다로 내 던질 수 있었는지 생각하니 한없는 참담함이 울컥 목을 메운다.

때 마침 오끼나와 섬에서는 축제의 날이 시작되었다. 그 현의 시의원이자 평화운동가인 쇼이치 지바나씨를 만나니 손수 구운 고구마를 건넨다. 그는 타카시의 친구이기도 하다. 고구마 속이 자줏빛 푸른색이어서 신기했지만 맛은 동일했다. 그는 젊은 축제 때 국기 게양대에 달려 있는 일장기를 떼어내 불태웠던 사람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지방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이 되었으니 오끼나와 사람들이 일본의 국가주의에 동조하지 않는 성향을 다소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집에서 잠을 자고 아침식사를 나누며 오끼나와 평화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평화운동은 평화가 아닌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운동이라고 했다. 나는 그와 대화를 나누며 오끼나와 인들을 향한 미군에 의한 대지의 점령, 하늘의 점령, 그리고 의식의 점령을 느꼈다. 그들의 조상 대대로 농사짓던 땅을 몰수 당하고, 맑고 아름다웠던 평화의 섬 오끼나와 하늘은 미군 전투기들의 무대가 되고, 수시로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그들의 일상의 의식을 정지시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신지체인 딸을 두고 있었다. 그녀는 스물이 넘은 나이임에도 지능은 매우 낮아 어린 애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사람이란 불행 할 수록 불행한 이를 헤아려 알아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바나씨는 지체아를 둔 불행을 넘어 미국의 군사주의에 의하여 점령된 오끼나와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싸우는 일에 앞장서왔다. 무수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없을 때 그는 이 싸움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지만 멈출 수 없는 싸움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의 평택 대추리 사람들 소식을 듣고 알고 있다며 내일 한국에서 반미군기지 운동을 하는 이들이 일주일간 오끼나와를 방문하기 위하여 그의 집으로 온다고 한다. 이곳에 와 보니 미군기지가 남기는 오끼나와 인들을 향한 보이는 보이지 않는 피해가 참으로 막대하다는 것은 느꼈다. 평택에 미군기지가 건설되면 그 땅에서 우리는 또 어떤 곤경들을 겪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 온다.

그 집을 떠나려니 지바니 씨의 어머니가 손수 만든 전화기 링을 두 개 건네주며 하나는 옥상에게 가져다주라고 하신다. 한국의 어머니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는 차이보다 같음이 더 많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어 오끼나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예배 후 가진 대화모임에서 나의 강연과 대화가 이루어 졌다. 교회에는 약 2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였는데 대부분 나이가 든 분들이었다. 그 중에는 영어를 하는 분들이 여러분 계셔서 내심 놀랐다. 나의 영어 강연을 일본어로 통역한 분은 그 지방 대학의 교수였다. 사람마다 자기를 소개하며 오래된 친구같이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모임 이후 그들은 한결 같이 한국의 드라마에 대하여 이야기했고, 드라마 덕분에 누구나 한 두마디씩 한국말을 하고 있었다. 아시아 어디를 가나 한국 드라마는 늘 화제거리가 되곤 한다.

오끼나와를 떠나기 전 타카시는 나를 토착 영화관으로 데리고 가서 내게 일본 단편 영화를 보는 기회를 마련했다. 주일 오후라서인지 영화관은 거의 만원이었는 데, 상영되는 영화들은 아마츄어 작가들이 만든 것으로서 그 주제는 평화였다. 거친 언행과 무력을 사용하는 편과 평화스러운 태도와 언어와 행위를 하는 이들 간에 일어나는 에피소드들을 엮는 것들이었는데 매우 인상적이었다. 폭력을 가하는 이에게 비폭력적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장면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폭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더 큰 폭력을 사용하는 우리의 일상의 허를 찌르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장면을 어린 소년의 눈으로 읽어내고 있었다.

공항에서 타까시와 헤어지면서 우리가 또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지는 못하지만 언제 어디에서든지 다시 만날 기회를 가지기를 약속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이박 삼일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나의 가슴에 남는 것들은 많았다. 책의 세계에서처럼 정리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삶과 생명, 그리고 자유와 평화를 지키려는 오끼나와 사람들의 연대와 노력들이 그들의 평범한 일상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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