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인의 생명" 을 보고
오늘 나는 중국 비자를 받기위해 시내에 나갔다가 영화를 한 편을 구입해 돌아왔다. 제목은 “타인(他人)의 생명(Das Leben der Anderen)" 원작이 독일어라서 독일어로 보았다. 이 영화는 1984년을 배경으로 동독의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한 작가인 게오르그 드라이만과 아름다운 배우 크리스타 마리아의 사랑, 그리고 그들을 감시하던 베테랑 정보원 게르트 위슬러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그렸다.
냉혹한 도청 및 취조 기술자인 위슬러는 자유주의 사상을 드러내는 작가 게오르그의 반사회적 언행에 의심을 가지는 윗선의 명령에 따라 게오르그의 집에 도청장치를 설치하고 하루 24시간 감시한다. 그의 상관은 인간이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을 가진 자이다. 위슬러는 게오르그와 그의 애인 마리아의 삶을 엿본다. 감시자의 눈을 가지고 그들의 대화와 일상을 엿보던 위슬러는 점차 게오르그와 마리아를 향한 감시자의 눈을 버리고 은밀한 보호자로 변해 간다.
게오르그와 그의 친구들이 모여 반정부 문서를 작성 발표하기로 모의하고 그들은 문서 작성을 게오르그에게 맡긴다. 이 과정을 엿들어 온 위슬러는 게오르그에게 불리한 사실들을 도청 보고서에 담지 않는다. 마침내 반정부 문서가 작성되어 발표되었을 때 정보국은 발칵 뒤집히고 문서작성자를 색출하기 위하여 이 문서를 작성한 타자기 색출 작업에 나선다. 그것은 게오르그 집 마루 밑에 감추어져 있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위슬러는 정보국장의 의심을 받게 된다.
마침내 정보국장은 마리아를 잡아들여 위슬러에게 취조를 맡긴다. 위슬러의 취조를 받은 마리아는 위기가 가까이 다가 왔음을 알고 체념하여 그 타자기가 집안에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윽고 정보원들이 들이 그들의 아파트에 들이 닥쳐 그 타자기가 있던 자리를 지목하는 순간 게오르그는 마리아에게 강한 의혹의 눈빛을 보낸다. 마리아는 게오르그의 눈길을 피한다. 타자기가 있던 바로 그 자리를 색출자들이 들쳐냈을 때 거기 있어야 할 타자기는 없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지 못한 마리아는 숨겨둔 타자기가 발각되어 게오르그가 체포될 것을 알고 거리로 뛰쳐나가 트럭에 치인다. 피투성이가 된 마리아를 품에 안은 게오르그는 그녀를 의심했던 눈초리를 보냈던 자신을 후회하며 마리아에게 용서를 구한다.
한편 정보국의 의혹을 받게 된 위슬러는 좌천되어 미래를 잃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베를린 장벽이 마침내 무너졌다는 방송을 듣게 된다. 그나마 정보원 직을 잃은 위슬러는 우편배달부가 되어 편지를 배달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어느날 게오르그는 전직 고관을 만나 자기의 아파트가 완벽하게 도청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그는 자기의 아파트 곳곳에 설치된 도청장치들을 뜯어내며 놀라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를 도청한 자료들을 찾아내 그것들을 읽어 가면서 HGW XX/7이라는 암호명을 가진 그 도청자가 바로 자기를 지켜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게오르그는 그 도청자의 이름이 위슬러라는 것을 알아내고, 그를 찾아가 그가 편지를 배달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다.
어느 날 위슬러는 편지를 배달하다가 게오르그가 쓴 신간, “선한 사람의 소나타“ (Eine Sonata des guten Menschen) 포스터를 보고 서점에 들어가 그 책을 펼쳐본다. 그 책 표지를 넘기다가 "이 책을 HGW XX/7에게 바칩니다“라는 구절을 발견한다. 그는 ”선물로 포장 할까요?“라고 묻는 점원에게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나를 위해 산거예요.”라고 말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 영화는 언어보다 의미있는 순간과 표정들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영화이다. 한 정보원의 가슴에 따듯하게 움튼 인간에 대한 관심, 타자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려는 배려는 사실과 정직의 세계를 넘어 간다. 위슬러의 차가운 표정 이면에 담긴 따스한 인간애는 제도도 이념의 장벽도 이미 넘어선 것이었다. 누군가를 배려하고 관심을 가지는 행위가 스스로에게 커다란 위험이 될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위슬러가 게오르그와 마리아를 지켜주기 위하여 손에 들고 있었던 보고서를 감추는 장면에서 영화의 반전이 시작되고 그가 잔인한 고발자가 아닌, 한 아름다운 인간임을 드러낸다.
누군가의 감시를 받고 있는 삶은 언제나 위기에 처한다. 감시자의 보고서에 의해 그 존재가 결정되고,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는 우리는 일거수 일투족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오르그와 마리아를 바라보면서 감시자 앞에서 여지없이 그러나는 그들의 벌거벗은 모습에서 거듭 거듭 위기를 느낀다. 그러나 감시자가 그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안도하게 되지만, 그 감시자를 감시하고 있는 또 다른 감시의 힘을 인식하고 더 크고 조직적인 감시의 힘에 불안해 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게오르그의 편에 서 있다가, 다시 그를 감싸는 감시자의 안전을 염려한다. 그 더 큰 감시자는 일사불란한 색출자들을 앞세운 냉혹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삶의 이중성, 천진난만한 삶을 감시자의 눈으로 볼 때 위급하기 짝이 없다. 삶의 모든 권리를 빼앗길 위험에 처하는 피감시자를 바라보는 감시자의 눈, 그 눈이 인간성으로 옷입을 때 그 눈은 더이상 잔인한 감시자의 것이 아니라 따스한 보호자의 눈이 된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생각했다. 이 영화에서 위슬러에게서 느낄 수 있듯 개인은 인격성에 기반한 인간다움을 자기희생을 마다않고 지킬 수 있으나, 제도와 집단의 권력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인간은 인간다움보다 이해관계에 치밀하다는 니버의 생각은 일면 옳고 정당하다.
그러나 개인은 잔인한 집단의 위협에 처할 경우 자기희생보다는 자기보존의 생존을 모색하기도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나는 이 영화에서 그리도 서로 사랑하는 게오르그와 마리아 사이에 일어나는 배반과 의혹의 이중주를 보았다. 위험을 예견하며 감시자의 눈을 의식하고 살아가던 마리아는 정보국에 연행되어 갇혀 있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라 생각하고 타자기가 있는 곳을 밝힌다. 위기를 견디며 사랑해 온 게오르그에 대한 배반이다. 반면 색출자들이 들이 닥쳤을 때 게오르그는 자기가 사랑해 온 여인 마리아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낸다. 배반과 의혹,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그것들 보다도 훨씬 크고 진한 것임을 우리는 안다. 존재의 위기를 불러오는 강요된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일식인 까닭이다.
그녀의 배반이 그녀의 사랑인 게오르그를 위험에 빠뜨리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그녀로 하여금 견딜수 없는 존재의 폭발을 불러왔다. 트럭에 치인 사랑하는 여인을 품에 안고서 게오르그는 끝까지 신뢰하지 못한 그의 의혹에 대하여 용서를 빈다. 한 사람은 목숨을 한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잃는 순간이다. 사랑한다는 것만으로 모든 배반과 의혹이 없어야 한다는 우리의 기대를 이 영화는 충족시켜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에 배반도 의혹도 있으나 그 배반과 의혹은 그들의 진실한 사랑의 힘에 의해 뻔뻔스러움으로 이어지지 않고 결국 고통으로 되돌아 온다. 그들의 사랑은 배반과 의혹을 넘어 진실했기 때문이다. 정작 그들이 배반과 의혹의 힘을 막아 준 사람은 바로 위슬러였다. 그가 타자기를 치워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하나님의 눈을 생각했다. 그 분의 눈 앞에 비치는 우리들의 삶은 얼마나 위험한 곡예와 같을 것인가. 이 삶의 고비 고비 마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그런 우리는 바라보는 하나님의 눈은 징벌과 색출의 눈을 가진 감시자가 아니라, 우리가 예지하지 못하는 삶의 위기에서 우리를 감싸고 지키주시는 따스한 눈이 아닐까. 그러므로 나는 사랑의 하나님이란 어거스틴이 말한 바, 사랑이 하나님의 속성이기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죄스러운 실존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인간을 향한 연민과 사랑을 가지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며 감시자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감시를 받기도 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 처럼 감시자의 눈이 냉혹한 시선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따스한 인간의 눈이 될 때, 오히려 그 감시자가 우리의 허물을 감추어 주는 은밀한 수호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리라. 누군가가 우리를 지켜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어려운 정황에 처해 있을 것이다. 그가 나의 어머니이든, 나를 사랑한 사람이든, 아니면 하나님이든...
취조전문가로 명성을 날리던 위슬러의 가슴이 따스해 질 때 그는 잔인한 취조자가 아니라 타인의 생명을 배려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구원한다. 게오르그가 위슬러를 통하여 구원을 받은 것은 인간성을 되찾은 위슬러의 변화가 먼저 이루어진 까닭이다. 나는 나의 삶을 지금까지 가리고 지켜준 HGW XX/7는 누구일까 생각해 본다. 집단의 이름을 앞세워 개인의 삶을 파괴하던 차가운 취조자, 감시자, 고발자의 길보다는 따스한 가슴을 가지고 타인의 생명을 지켜주는 길이 바로 스스로의 인간다움을 지키는 길이라는 하나의 진실을 이 영화는 조용히 보여 주고 있다.
Tuesday, November 20, 2007
The Lives of Others...
Posted by
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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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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