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November 30, 2007

The Tragedy of the Decadent Liberals


<마카오 포대에서>


퇴폐적 자유주의자들의 비극

보수와 진보간의 갈등은 어느 사회, 어느 집단에서든지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보수는 기존의 현실에 대하여 점진적 개혁을 원하고, 기존의 가치가 급속도로 바뀌는 것을 기질적으로 싫어한다. 반면 진보는 기존의 질서와 가치에 혐오를 느끼고 가능한 한 신속히 변화가 이루어질 것을 요구한다. 건강한 보수와 진보사이의 갈등은 일면 서로가 지향하는 목표나 방향에 대한 비판적 긴장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어느 한편의 전횡이나 타락과 추락을 막는 시너지 효과도 불러온다.

우리 사회와 같이 사회 경제적인 변화가 빠른 사회 안에서 일부 지식인들 중에는 자유의 이름으로 보수와 진보사이를 오가는 이들이 있다. 자유라는 이름이 거의 방종에 가까운 원칙상실의 퇴폐까지 불러오게 되면 이 경우는 구제불능이다. 세속적 자유주의자들은 진보의 이념을 입으로는 표방하면서 구시대의 특권을 즐기는 일에 능숙하다. 보수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성실성을 자유의 이름으로 비웃고, 진보주의자들의 개혁의지에는 참여하지 않는 데카당트 지식인들이 바로 이들이다.

도덕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자유주의자들의 진면목을 파악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새롭고 화려한 용어와 가치들을 주장하는 그들의 사고는 빈약한 지식인들에게는 신조어를 공급하는 루트가 된다. 보수주의자들은 신조어를 만들어 내는 일이 취약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은 신조어를 만들어 내는 자유로움을 행사한다. 따라서 그들의 지적 설득력은 화려한 수사와 유행에 민감하며, 개인적 자유를 자극하는 용어들이 있으므로 매우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의 공동의 가치를 변화시키려는 연대와 실천의 과제를 수행하는 일에는 매우 인색하다. 그런 과제들로 인해 그들만의 특권과 자유를 빼앗긴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반면 이들은 개인주의적인 자유를 연장하여 방종과 타락도 자유의 이름으로 옹호한다. 방종과 타락이란 개인의 쾌락원리를 쫒아 사회규범의 구속력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이들의 단골메뉴이다. 그러나 이들이 가지는 전형적인 도덕적 오류는 자신의 자유를 방종과 도덕적 타락으로 연장시키는 이들이 다른 이의 자유를 훼손하고 무시하는 특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은 반사회적이고, 공동성을 자유의 이름으로 파괴하는 이들이다. 이들이 감추고 있는 이중성은 바로 그들의 이기성에 의하여 정당화된다. 나의 경우는 자유이지만 너의 경우는 규범 이탈이라고 을러대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의 이름이 지시하듯 이들은 과거의 규범으로부터 대부분 자유하기를 원하는 이들이다. 여기에는 얼마간의 정당성이 있다. 왜냐하면 과거의 가치 판단 구조들은 과거의 권위, 억압을 구조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의 가치판단 구조 모두가 그렇게 억압적인 것은 아닌 까닭에 과거의 가치판단 구조에는 가슴에 새겨둘만한 중요한 가치들도 담겨있다. 정직과 성실성과 책임성 그리고 인격성을 삶의 공동성 안에서 해석하는 까닭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반적으로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은 성실성과 책임성에 있어서 자유주의자들보다 훨씬 낫다. 이런 까닭에 사회는 다소 보수적인 흐름에 잠겨있는 것이다.

이기적 욕망을 중시하여 사회적 책임에 둔감한 퇴폐적 자유주의자들의 비극은 그들 스스로 보수주의자들의 과거 지향적 시대 착오성을 비웃으면서도 정작 과거의 가치보다 더 나은 가치창출로 나가지 못하는 무책임함에 있다. 이들은 전형적으로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초래할 새로운 사회 가치의 창출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낮추며 복속시키는 것을 두려워하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이미 자유주의를 선택한 그들은 보다 나은 새로운 사회적 가치에 대한 기여가능성을 아마 일찍부터 포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을 일반에게 불러온다.

일부 현대 소설들을 읽다보면 바로 이런 자유주의자들의 퇴폐를 인간미로 채색하려는 소름끼치는 허무를 본다. 그들의 인간다움의 가면을 벗기면 절제하지 못한 온갖 추한 욕망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허무하게 보이는 까닭은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이들처럼 스스로 맺은 사회적 약속들에 대한 무책임한 망각을 당연시 하는 데 있다. 그들은 사소한 쾌락을 위하여 자신의 인격도 사회적 책임도 망각한다. 여기서 일어나는 오류는 삶의 내면적 긴장과 정신적 고양의 가치를 무기력한 것으로 여기고, 오직 자기 존재를 상대화시키며 순간의 쾌락과 만족에 스스로의 넋을 팔아넘기는 자유의 오용이다.

사실상 인류가 추구해온 자유의 정신은 무제한의 비약을 허용하는 것으로서 무서운 상대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즉 상대에 의하여 규정되는 자기를 거부하는 규정받지 않음의 자유이다. 정치적으로는 억압, 경제적으로는 착취, 사회적으로는 차별을 거부하는 것이 자유의 골격이다. 그러므로 자유란 숭고한 인간의 존엄함을 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책임을 통해 균형이 잡혀야 한다. 하지만 타락한 자유주의자들은 그들만의 자유는 줄기차게 요구하면서도 그 자유의 보편적 적용을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차별과 억압을 생산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소한 쾌락을 위하여 기존의 약속 관계를 붕괴시키는 것이다.

지식인의 도덕적 타락과 방종은 그들이 지닌 천박한 정신의 발현일 뿐 해방적 실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유는 해방을 불러오는 혼이므로, 그 혼을 지키려면 자유의 보편정신을 지키려는 책임을 요구 한다. 이 책임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존재로서 나와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자유주의자들은 이 공동 책임의 영역에 선듯 나서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본질이 이기적이며 쾌락주의적인 까닭이다. 자유에 대하여 예민한 지식인들이 퇴폐적 쾌락을 추구하는 까닭은 결국 과거 특권층들이 구가하였던 본디 이기적이며 차별적인 특권을 향유하려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입으로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진정한 해방적 과제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반사회적이며 이기적인 퇴폐적 쾌락과 자학적인 방종을 불러 들인다. 따라서 그들의 삶은 깊은 허무의 그늘로 덮여 있다. 이 허무의 그늘을 벗겨내려면 우리 역시 필연적으로 책임의 공동성을 수납하는 길로 나가야 한다. 그것은 오랜 종교들이 가르쳐온 사랑의 길이며 자비의 길이고, 인(仁)의 길이다.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 잔재하고 있는 낡은 가치들을 청산하는 과제는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낡은 가치들이라 하여 도매금으로 폐기하려는 것은 어린 아기를 목욕시킨 후 목욕물을 버리려 하다가 아기까지 내던지는 격이 될 수도 있다.

퇴폐적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역사적 억압의 피해자라 항변하며 억압 기재에 대한 증오를 당당히 주장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정작 그들의 삶의 고귀한 품격이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의 피해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삶 그 자체가 숭고하고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억압이 해체된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는 우리 인간다움의 조건을 지키기 위한 노력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만일 그들이 해방 이후에 진실과 정직, 그리고 책임과 성실성에 미달할 경우, 그들은 방종과 추악함을 너무나 쉽게 불러 들이는 비극을 연출한다.

저항적 기질을 가진 해방적 지식인은 보다 나은 정의와 자유를 꿈꾼다. 정의와 자유로움을 꿈꾸는 이들은 인간성을 모욕하는 행위와 가치와 제도에 대하여 분노하게 되고, 이에 저항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타락한 자유주의자들의 약점은 오직 "자신들만"의 정의와 자유를 구가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그들은 해방적 지식인들의 저항에 연대하지만 “우리“의 정의와 자유를 위한 투쟁에는 나서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 혁명 세력들이 부패하는 까닭은 바로 이런 사이비들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특권을 누리려 하는 이들은 공공의 세계를 어려워 한다. 왜냐하면 협소한 특수의 자리에서 그들이 누리는 쾌락에 집착하여 보다 넓은 책임과 보편성의 가치들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이비 퇴폐 지식인들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모름지기 정의와 자유에 기초한 인식과 실천의 지평을 보편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자유의 개념이 브르죠아들의 것으로 고착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퇴폐적 자유주의자들은 그들의 생래적 이기성으로 인하여 아는 대로 실천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 만족적인 쾌락을 선호하기 때문에 보편적 가치보다는 특수한 가치를 선호하는 귀족적 특권과 기질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까닭에 그들은 위선적이다. 인류의 역사는 종교 및 정치권력 귀족들의 특권을 부정한 프랑스 혁명을 넘어, 보편적 인권의 지평을 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스스로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적어도 이런 류의 데카당트 자유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얼마만금 진보적인 목사들에게서도 이런 이중 규범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들은 입과 글로는 정의와 평등을 외치면서도 여전히 그들의 몸과 정신은 자신들의 이기적 특권과 이권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입이나 글만 보지 말고 그들이 살아가는 삶을 보아야 한다는 주장은 옳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런 이중적 위선을 벗어나는냐 못벗어나느냐의 문제는 그가 사상적으로 견고한 인식을 가진 자인지, 아닌지에 달려있다. 성직자로서 권력을 탐하고, 치부하며, 권위를 부리는 자들은 사상적 진보를 이용하며 신도들을 깨우치면서, 자기 스스로는 구원의 길과는 다른 저주의 길을 가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퇴폐적 행위를 행하면서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값싼 즐거움에 스스로 영혼을 파는 일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누리는 소유의 특권과 쾌락은 결국 누군가의 존엄함을 유린하는 행위와 연계된다. 따라서 그들은 바로 해방적 작업에 참여하던 얼굴과는 다른 흉측한 또 다른 얼굴을 사적 영역에 내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킬과 하이드를 통하여 인간의 이중성의 적나라함을 드러내 보인 바 있지만 이는 결국 삶의 공공성을 소화해 내지 못하는 자유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퇴폐적 개인주의의 진면목일 것이다. 이것이 비극인 것은 그들의 이중성으로 인해 자신에게도 그리고 사회에도 해악을 끼칠뿐 아무런 선을 이루지 못하는 허무에 지배를 받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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