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ne 27, 2019

“성직자 편의주의: 교회의 세력화와 관련하여...”

성직자 편의주의: 교회의 세력화와 관련하여...”


한국교회의 민낯
2018년 한 해 기독교와 관련된 뉴스들을 빅 데이터로 분석한 결과를 살펴보았다. 네이버에 실린 전체 뉴스, 15개 주요 언론사, 그리고 5개 주요 교계 언론사가 다룬 뉴스를 모두 모아 분석한 것이다. 각종 뉴스 중 가장 빈도가 높았던 기독교 뉴스는 (1) 대형교회 부자간 세습 문제, (2) 한반도 평화 무드에 대한 이견, (3) 동성애 비난 논란, (4) 성직자에 의한 여신도 성폭력, (5) 이슬람 난민 유입 거부 순이었다. 그 외에도 (6) 목사의 그루밍 성폭력, (7) 기독교 보수 세력의 가짜 뉴스 생산 행태, (8) 대형 교회 목사에 관한 법원의 유죄 판결 등이 우선순위를 이루었다.
이상 열거한 뉴스 항목들은 대체로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선 모든 뉴스의 성격은 비록 기독교라는 통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기독교를 대표하거나 대변하는 집단, 즉 성직자들이 야기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대부분의 기독교 관련 뉴스의 성격이 기독교에 대한 밝고 긍정적인 평가가 아니라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서 무엇인가 부정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수만 명의 신도를 거느린 대형교회의 목사가 교회를 자기 자식에게 물려주는 행위라든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노력을 낡은 반공주의적 관점에서 평가한다든지, 대형 교회 목사가 수백억 원 대의 비자금을 숨겨두고 있었거나 수백억 원의 교회 자금을 퇴직금이나 공로금으로 챙겨왔다는 사실, 그리고 성직자들이 여신도를 파렴치하게 상습적으로 성폭행 해왔다는 등등의 뉴스는 종교에서 높은 도덕성을 기대하는 일반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지난 2017년 한국기독교언론포럼이 발표한 한국교회에 대한 언론인 인식조사를 살펴보면 우리 사회 언론인들은 한국 교회가 지난 날 우리 사회의 여성, 교육, 사회 문제 등의 영역에서 크게 기여해 온 점은 높이 평가하지만, 오늘날에도 그러한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64.9%가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특히 한국 언론인들은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를 성직자의 자질과 저급한 윤리 의식에서 찾았다. 성직자의 자질과 윤리의식에 만족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들은 겨우 6.2%였다. 나아가 일반기자 52.7%, 교계기자 42.6%가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성직자의 물욕과 성장지상주의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내용은 2017년 기독교윤리운동실천본부가 발표한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에서 밝힌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 이렇듯 한국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초래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권력자의 편의주의
간혹 나는 초기 인류의 삶을 생각한다. 벌거벗은 채로 문명의 이기(利器)도 없이 생존해야 했던 초기 인류의 삶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을 것이다. 자연이 그들을 품어주고 생존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기도 했지만 자연이 그들을 죽이기도 했다. 자연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죽었다. 굶주려서 죽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서 죽고, 상처를 치료할 방법을 몰라서 죽었다. 그들의 생존 기간은 오늘날 우리의 것에 비하면 절반도 안 된다. 16세기의 미셀 드 몽테뉴는 38세에 고위 법관직에서 스스로 은퇴하여 노년의 삶을 누리려 했고, 19세기 말에 태어난 헤르만 헤세도 오십이 채 안 된 나이에 늙음에 대한 고뇌를 담은 글을 썼다.

19세기가 지나기까지 보통 사람이 편한 마음으로 삶을 즐긴다는 것은 대체로 불가능했다. 시간의 질은 거의 균등했고, 오직 태생적 소수만 특권을 누렸다. 소수의 특권은 정치권력과 그 정치권력을 지원하고 연대를 나누어온 종교 권력에게 장악된 것이었다. 정치권력은 혈통을 통하여 특권을 취득하고, 종교권력은 정치권력을 위한 질서와 권위 관념을 생산해 줌으로써 특권을 얻었다. 그리고 이 두 집단은 거의 예외 없이 결정권을 행사하면서 자신들의 이익관계를 앞세웠다. 이렇듯 특권 집단이 누린 이익관계 이면에서 종교집단 역시 이익을 도모하는 종교 편의주의를 키워왔다.

스스로 높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여긴 종교(宗敎)는 일단 권력종교로 자리를 잡으면 이 편의주의의 구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수많은 현자들이 정치의 본질, 종교의 본질에 대한 논의를 전개했지만 제도화된 정치와 종교는 거의 예외 없이 현자들의 사상을 추종하지 않았다. 오늘의 한국 기독교가 예수의 사상을 흠모하고 예수를 따라 사는 성직자나 신자들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
 
종교의 이익과 편의주의
형식상 민주화된 사회는 혈통에 따른 신분제를 인정하지 않음으로 모든 특권을 폐지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의미에서 특권 의식은 폐기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민주적 절차와 과정, 그리고 민주적 가치를 체득할 수 있는 기간이 매우 짧았던 우리 사회는 민주적이라는 이름은 있어도 모든 면에서 특권을 가진 이들의 편의가 우선인 사회다. 민주사회의 평등성을 보장해야 할 법치주의는 전관예우와 친소관계에 의하여 특권을 유통시키고, 권력재민주의는 권력의 주체가 국민이라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에 의하여 권력 숭배 문화로 이어져 대를 잇는 부패한 정치가들이 활개를 치는 정치풍토를 만들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보다 앞서 민주화의 길을 갔던 선진 사회가 정치와 종교에서 재래의 전근대적 특권을 폐기해온 수준에서 본다면 우리사회에서의 정치와 종교에서의 특권의 해체 과제는 여전히 미완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특권의 해체는 특권의 비합리성을 지속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합리적 비판 능력과 제도 개선 능력을 통해 일어난다. 비합리적 특권이 해체되지 않은 속성을 가진 사회에서는 특권을 가진 자들에게 온갖 편의를 제공하는 비합리적 사회 구조가 지속된다. 더 심각한 것은 전근대 후진 사회의 특징인 비합리적인 구조가 정치 영역보다 종교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제 1 계급의 지위를 누리며 온갖 특권을 향유하던 고위 사제들이 혁명세력이 규정한바 제 1의 타도 대상이 되었던 것은 종교의 보수성과 기존 체제를 보수 유지하려던 의식에서 당대의 종교가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대의 종교만이 아니라 오늘의 종교 역시 입으로는 화려한 언설을 사용하지만 실상에 있어서는 부패한 정치 세력과 연대하고, 경제적 특권층을 옹호하곤 했다. 리챠드 니버(H. R. Niebuhr)가 기독교의 분파(分派) 연구를 마치면서 종교는 종교의 형성 과정에서 창시자의 뜻보다 경제적 이익관계에 더 많이 지배를 받아왔다”라고 언급한 것은 매우 적절한 평가다.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종교는 기존 질서에 집착하는 특권 보수층과 이익관계를 나누는 파트너가 됨으로써 기존의 질서로부터 다양한 편의를 제공받는 한편, 다른 편으로는 특권 기존 질서를 신적질서로 옹호해 줌으로써 권력층의 영적 보호자 노릇을 자처해 왔다. 16세기 이후 계몽주의의 조명을 받은 서구 사회는 점차 비합리적인 정치적 특권을 비판 해체할 수 있었지만 종교 영역에서의 비합리적 특권은 일반이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제의와 계시, 그리고 성직주의를 뒷받침 하는 교리와 영성에 가리어져 있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합리적 비판의 대상으로 설정하기 매우 어려운 종교의 속성은 결과적으로 종교 집단 내에서 성직자의 자의(恣意)를 너무나 쉽게 유통시키도록 만든다. 신적 질서의 해석자는 종교 그 자체일 뿐, 다른 영역에서의 해석은 그저 세속적인 것으로 간단히 치부된다. 왜냐하면 종교는 세속의 이성이 침투할 수 없는 비판의 무풍지대를 언제나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의 다양한 신비와 계시와 영성의 본질을 들어내지 않고서는 종교를 비판적으로 해체할 수도 없다. 종교의 보수성을 정치적 보수 집단이 옹호하고, 정치적 보수를 종교 집단이 옹호해주며 공생해온 역사는 정치적 특권의 폐지나 교정도 어렵지만 종교적 특권의 폐지나 교정은 더욱 어렵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결국 종교 영역 안에서의 편의주의는 특별한 결정권을 가진 성직자의 이해관계와 그의 자의적 편의를 확장하는 데로 이어지게 되었다.
 
성직자의 자의와 편의주의
종교가 바람직한 기능을 할 수도 있다면, 그것은 속된 인간을 종교의 영성과 윤리를 통하여 변화시키는 종교 본유의 능력을 행사할 경우다. 그 변혁의 능력을 제공하는 것은 종교의 영성과 윤리에 담겨있는 내재적이며 초월적인 힘이다. 내재적인 종교의 힘은 역사 안에서 모든 비인간성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통해 정화된 가치를 이루어내는 것이라면, 초월적인 종교의 힘은 종교 스스로를 포함하여 인간의 모든 성취를 미완의 것으로 상대화함으로써 부단한 자기비판과 자기부정을 불러오는 것이다. 역사를 이끌어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내재적인 힘, 그리고 인간의 성취를 단호하게 부정하는 초월의 힘은 종교가 인간 사회 속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된다. 참된 종교인이라면 어느 한 순간에도 무책임한 나태나 불실에 빠져서도 안 되고, 혹은 자기 성취에 매몰된 자긍과 자만에 빠져서도 안 되는 긴장을 요구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섬기는 종교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 하려 한다면 종교는 내재적인 능력과 초월적인 능력을 모름지기 견지해야만 한다. 하지만 종교는 매우 쉽게 타락할 수 있다. 내재적인 능력이 취약하고, 초월적인 능력이 희미해지면 종교는 그저 신을 빙자하여 특정한 인간 집단의 수단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종교는 자기 개혁과 부정의 능력을 상실하고 역사를 변혁시킬 능력을 잃게 되어 역사 진보에 기여하기는커녕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만다. 기독교의 지난 역사는 이러한 과정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1517년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유도 알고 보면 기독교라는 종교의 내재적 능력과 초월적 능력을 되찾기 위한 정화의 요구에 있었다. 종교개혁자가 교회는 항상 스스로를 개혁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ecclesia semper reformanda) 명제를 내세운 것도 바로 종교의 초월적 능력 없이는 자기 부정을 통한 갱신과 정화조차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종교 개혁 이후 서구 기독교 역사는 종교의 내재적 능력과 초월적 능력을 오용했다. 무수한 분파로 나뉜 기독교는 초월적 능력에 의한 자기 부정과 비판보다 내재적 정당화의 길을 걸었다. 교파마다 경쟁적으로 집단 이기성에 매몰되었고, 개교회주의에 빠진 성직자는 자기 성취를 위한 노력을 기독교 선교와 동일시했다. 교파들은 서로 경쟁과 다툼에 빠졌고 그들의 성취와 업적을 들어 하나님이 자신들 안에 내재하시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업적과 성취는 교권의 장악, 경제적 성취, 그리고 교세의 확장을 의미했다. 신자들의 헌물의 양, 희생과 봉사, 그리고 신자의 수가 곧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내재적인 능력의 증거로 제시되곤 했던 것이다.
 
권력종교 지향
더 많은 신자를 가진 권력종교가 되기 위하여 종교가 신학적 체질을 바꾼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크게 보아 제 1차 신학적 패러다임의 변화는 5세기 어거스틴에 의한 기독교의 제국화에서 일어났고, 2차 신학적 패러다임의 변화는 종교개혁 이후 일어났다. 1차 변화에서는 반제국주의적인 기독교가 제국주의와 타협했고, 이어 기독교는 제국의 종교가 되는 길로 방향을 바꾸었다. 2차 변화에서는 로마 제국의 몰락과 더불어 분권화된 세계에 적응하기 위하여 기독교는 개신교 분파주의를 탄생시켰다. 이와 동시에 종교의 초월적인 자기 비판과 부정의 힘은 갈라진 종교의 수에 따라 1/n로 약화되었다.

초월적 능력의 약화는 교회가 제후의 정치권력에 복속되고, 제후들이 성직자의 신분과 지위의 특권을 보장해주는 관계를 허락하게 만들었다. 이어 봉건제가 붕괴되자 권력종교의 성직자들은 제후들의 품을 떠나서 새로운 권력인 자본주의 세력과 결탁하여 물신주의, 개인주의, 쾌락주의, 제국주의를 수용했다. 이런 현실에 대하여 리쳐드 호슬리는 기독교는 제국의 산물이다. 역사의 아이러니 중의 하나는 제국의 강고한 종교가 반제국주의 운동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라고 평가했다. 정확한 평가다.

초기 개신교에서는 신의 내재성과 신의 초월성이 군주의 정치권력 안에 제한되었고 지역 종교, 혹은 분파 종교의 협소한 틀 안에서 해석되었다. 이를 긍정적으로 본다면 성부와 성자의 시대를 지나 성령의 시대의 도래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나 초월성을 상실한 성령에 대한 해석은 종교를 위한 종교,’ ‘혹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는 종교를 생산했다. 종교의 이런 성향은 결과적으로 민족주의, 인종주의, 물신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초월적 비판 능력을 상실하고 그것들을 하나님의 선물로 수용하게 만들었다. 종교가 권력종교의 지위를 가지기 위하여 분권화된 세속적 가치들과 타협한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관의 대두와 더불어 물신주의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쾌락은 하나님의 백성이 누려야 할 권리와 선물로, 제국주의는 신의 섭리에 따른 통치 방식으로 정당화된 것이다. 한국교회는 충실하게도 이 전통을 답습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와 종교 편의주의
1884년 경 한반도에 전래된 기독교는 이렇듯 기독교 신앙의 초월성이 상쇄되어 종교를 위한 종교의 도구’, 즉 분파적 교파주의와 교회지상주의의 속성을 가진 서구 기독교의 변종이었다. ‘종교를 위한 종교의 성향을 가진 한국교회는 성직자의 편의주의와 성직자의 자의를 벗어날 수 없었다. 종교의 내재적 저항과 비판의 힘, 그리고 인간의 성취에 대한 부정과 갱신을 통한 정화 요구는 교회에서 가장 많은 결정권을 가진 이의 세력화, 곧 교회의 확장과 성장을 지향한 성직자의 욕망에 가리어졌다. 한국 교회의 성직자들은 기독교 사상의 전파과정에서 한 편으로는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 성취했던 근대적 가치들(자유, 평등, 연대, 정의)을 생략하고, 다른 편으로는 기독교 복음을 전근대 사회의 현실에 적합하도록 영적 구원의 종교로 축소시켰다. 그 결과 기독교 복음은 비정치화, 비사회화 되었다.

종교를 위한 종교는 이렇듯 종교의 본질조차도 종교 자체의 세력화, 성장과 발전을 위하여 변질시킨다. 교회마다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여 자기 종교의 확장, 성장, 성취를 이루기 위하여 매진했다. 전근대 사회에서 벗어난 한국사회는 정치적으로는 전근대 세력의 저항을 극복하며 민주화의 길을 열었고, 산업화의 과정을 통하여 경제적 성취를 이루어 갔지만, 한국 교회들은 경쟁적으로 소규모 종교 기업화의 길을 걸었다. 선교 100주년을 지날 무렵 한국 기독교는 5만개 이상의 교회를 가지게 되었고 교인 수는 800만을 넘었다. 그리고 약 20년 후, 선교 120주년을 맞을 때에는 세계 10대 초대형교회 중 절반이 한국에서 생겨났다. 대형화된 교회들은 대부분 성직자에게 비민주적으로 장악되어 있고, 최근에는 성직자 부자간 전근대적으로 세습되고 있다. 명실 공히 성직자를 위한, 성직자에 의한, 성직자의 교회가 된 셈이다.
 
스캔들에 빠진 한국 교회
서구 기독교 역사에서 제국주의는 그에 부수하는 물신주의, 쾌락주의와 더불어 종교를 물질과 욕망과 권력을 가진 종교로 키워주고 보호해주던 자원이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가졌던 변혁과 자기 부정의 힘은 제국주의나 제후의 권력 앞에서 제대로 작동할 수 없었을 뿐만이 아니라 성직자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교회의 성장과 성취에 장애가 되었다. 이런 성향은 종교가 종교의 편의를 위하여 종교의 초월성을 담아온 윤리를 버리는 풍토를 낳았다. 마치 면역 기재가 붕괴한 에이즈 환자와 같이 종교는 비윤리성의 침투를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 것이다. 서구 교회의 잘못된 길을 모델로 삼아 신봉해온 한국 교회 역시 오늘날 면역력이 붕괴된 거인처럼 부정한 면모를 여기 저기 드러내고 있다.

교회 안에는 끝없는 분쟁, 교단장 금권선거, 성직 세습, 50가지가 넘는 비성서적 헌금 강요, 성직자 권위주의, 성차별주의, 반민주성, 탐욕의 우상화, 권력숭배 문화가 만연하고 신자들은 매일 새벽기도, 주일 예배, 저녁 예배, 수요 예배, 금요철야 예배, 부흥회, 남선교회, 여선교회 등등의 회집에 의무적으로 참여하기를 요구받는다. 모든 헌금과 집회를 요구하는 주체는 교회의 성장과 그 성장을 통해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성직자이며, 이런 헌금과 집회문화는 한국 기독교의 변종적 전통으로 자리 잡아왔다.

한국 기독교의 변종적 성격은 세계 최대의 대형 교회라 불리는 여의도 순복음에서 정점을 이룬다. 한국 오순절(펜테코스탈) 신학의 대명사가 된 조용기 목사가 기독교 복음을 해석한 틀은 오중복음과 삼박자 구원이다. 오중복음이란 '거듭남', '성령충만', '치유', '축복', '재림'을 중심으로 해석된 복음을 뜻하는 데 그것의 증거는 영적 축복, 사업의 축복, 그리고 몸의 축복’, 곧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를 낳는 번영 신학으로 귀결된다. 젊은 시절 가난하여 폐결핵에 걸렸다 살아난 그가 이끄는 교회는 1960년대 극빈에 처했던 가난한 민중을 대상으로 축복을 결과하는 신앙을 자극하며 무섭게 급성장했다. 그가 세운 여의도 순복음 교회는 7년 전 그가 은퇴할 때 세계 최대의 교회로 85만 명의 등록 신자와, 한 해 1,000억 원의 헌금 수입, 그리고 400명 정도의 성직자가 활동하는 교회가 되었다.

이런 성취 이면에는 한국교회의 문제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는 독직과 공금 횡령으로 여러 차례 검찰에 기소되었고, 그의 아내는 순복음 교회 재단이 세운 대학의 총장이 되었으며, 그의 장남은 순복음 교회가 세운 국민일보 지의 이사장으로, 그의 장모는 순복음 기도원을 소유한 자산가가 되었다. 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신도들이 낸 헌금을 가지고 세운 수 천 억 원대의 기관을 그의 가족이 주인이 되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은퇴하면서 교회로부터 200억 원의 퇴직금을 받았고 그 외에도 다양한 명목으로 600억 원의 특별 선교비를 수령했다. 그는 한동안 성적(性的) 일탈자로 회자되었고, 교회 돈 131억 원을 배임한 혐의가 법원에서 확정되어 장남과 함께 징역 26개월, 집행유예 4년 형을 받았다. 이런 범죄 사실은 그의 교단 안에서의 지위와 신분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순복음 교회의 원로목사로 강단에 서고 있고, 신자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종교는 법과 도덕을 초월하기도 하고, 간혹 그 기준에 미달하기도 한다. 종교에는 법규범이나 윤리 도덕보다 높은 영적 가르침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동시에 종교 안에서 형성되는 비합리적인 신앙 전통은 법규범 이하의 행동이나, 보편적인 도덕적 수준 이하의 행위조차 너무나 쉽게 유통시켜 준다. 갱신과 정화를 요구하는 종교의 초월성을 약화시킨 종교는 신자에게 삶의 어두운 측면을 외면하는 습성을 가르침으로써 긍정적이고 밝은 측면만 바라보도록 의식화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성향은 종교가 스스로를 개혁하거나 변혁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봉쇄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교회 민주화 과제
한국교회는 개신교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타락의 성향, 즉 교회내 가장 많은 결정권을 가진 성직자 편의주의의 늪에 빠져있다. 한국 교회는 보다 높은 인간성의 고양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에 근접한 사회를 이루려는 노력에서 그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하고 성직자의 욕망과 신도들의 욕망을 충족하기에 급급한 종교로 퇴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퇴행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서구 교회의 실패와 그 대안적 사례를 참고할 수도 있다. 성직자 편의주의가 철저히 봉쇄된 연합감리교회(UMC)는 성직자가 지배하기 좋은 교회 내 신분제(평신도 직제)를 제거했고, 교회의 대표는 목사가 될 수 없으며, 성직자나 그의 가족은 교회재정이나 인사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없다. 따라서 당연히 목사의 독점적 교회 점유나 부자 세습이 일어날 수 없다. 독일 개신교회(EKD)는 목사나 교회가 재정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종교세를 받아 투명하게 운영한다. 교회 운영을 책임지는 장로제가 있기는 하지만 유한한 임기제여서 매년 위원회 1/3이 교체된다. 즉 성직자의 편의주의나, 일부 소수의 장로와 결탁한 성직자의 전횡은 아예 일어날 수 없는 제도를 만든 것이다.

나는 한국교회가 진정한 종교개혁의 후예라면, 또한 북미의 선교를 받아들인 교회라면 이제는 독일의 사례와 미국 교회의 사례를 받아들여 성직자에게 너무나 많은 결정권을 주어 성직자에 의한, 성직자를 위한, 성직자의 교회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과제는 병든 한국교회를 살리는 처방, 곧 교회 내 모든 계급과 특권을 제거하고 성직자의 편의주의를 해체하는 교회 민주화의 과제다. 이 과제는 성직자들이 스스로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들이 해결할 수 없다. 그러므로 평신도가 이루어 내야 하는 교회의 개혁 과제일 수밖에 없다. 성직자의 욕망에 편승하여 교회의 대형화와 권력 종교를 원하는 허영에 찬 평신도가 주류를 이루는 교회가 아니라 진정한 복음의 회복을 바라는 평신도의 교회가 가진 과제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성직자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면, 오늘날의 교회 개혁은 민주적 의식을 가진 평신도들에 의한 것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

(잡지 <본질과 현상, 2019 봄호>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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