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의 낙태죄 위헌 결정과 그리스도인의 과제”
지난 2019년 4월 11일 헌법 재판소(이하 헌재로 표기함)는 현행 자기 낙태죄(형법 269조)와 의사낙태죄(형법 270)조가 헌법 10조가 명시하고 있는 인간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2020년 12월 31일까지 입법자인 국회가 새로운 법을 제정하기까지 한시적으로만 유효하다는 요지의 내용을 헌법재판관 7:2로 결정했다. 헌재의 결정에 대하여 찬반의 명료한 견해들이 나오면서 낙태를 둘러싼 논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런 시제에 평화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 자문하게 되었다. 이 글은 이러한 내면의 물음에 대하여 하나의 견해를 밝히는 의미를 가진다.
헌재 결정의 배경
사실 기존의 낙태금지법은 모자보건법이 담고 있는 예외적 낙태 허용 기준에 의하며 그 실효성이 상당부분 약화되어 있었다. 낙태를 일률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낙태금지법은 일제의 영향을 받아 1953년에 제정되었으나 1970년대 박정희 유신 정권은 인구증가 속도를 조절하기 위하여 산아제안 정책을 입안하는 동시에 낙태 허용범위를 명시하고 있는 모자보건법으로 낙태금지법을 사실상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오늘에 이르기까지 낙태죄의 법적 위하력은 그 실효성을 상당부분 상실한 반면, 낙태의 불법화로 인한 부작용이 매우 컸다. 1년에 최소 35만 건 ~ 50만 건 정도로 음성적인 불법 낙태가 성행하고 있으며, 불법 낙태 시술로 인하여 임모의 생명과 건강에 직접적인 위해의 정도가 매우 심각했기 때문이다.
형법상 낙태금지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낙태의 근절이 요원할 뿐 아니라, 오히려 불법낙태 시술로 인한 부작용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낙태법의 존재 의미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다. 낙태금지법이 여성들에게 임신과 출산을 강제하여 짐을 지우고, 불가피한 경우 불법 낙태 시술이라는 궁지로 모는 현상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서구 사회와 가까운 일본 및 대만 사회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났던 일이다. 하여 미국은 1973년 대법원에서 그동안 낙태를 금지해오던 법이 여성 개인의 사생활과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는 위헌적인 것이라고 판결함으로써 낙태금지법을 사실상 폐기했고, 영국은 1967년에 <여성건강옹호법>을 만들어 임신 28주 이상의 낙태에 대해서만 중벌에 처하게 함으로써 28주 이내의 낙태를 사실상 허용했다. 이어 1990년 인간 수정 및 배아법을 제정하여 그 허용 기간을 24주 이내로 수정했다. 독일은 1974년, 프랑스도 1974년 사실상 낙태 금지법을 폐지했다.
가톨릭 국가라 할 수 있는 아일랜드나 칠레 역시 엄격한 낙태 금지법을 유지하다가 근래에 낙태금지법을 완화시켰다. 칠레에서는 성폭력에 의해 임신했을지라도 임모가 14세가 넘었을 경우에는 낙태를 할 수 없도록 강제하는 낙태 처벌법을 존치시키다가 2015년에 그 영령을 16세로 다소 상향 조정했다. 국민의 88%가 가톨릭교도인 아일랜드에서는 2018년까지 불법 낙태를 할 경우 임모에게 14년까지 실형에 처하는 강력한 낙태 금지법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낙태 금지법으로 인한 산모의 사망 사건이 잇따르자 2018년 낙태죄 존속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를 한 결과 66.4: 33.6으로 낙태금지법을 폐지했다. 우리나라도 낙태죄에 대한 헌재의 위헌 결정 이전에는 비록 모자보건법이 예외적인 낙태를 허용하고 있었지만, 그 허용범위가 좁아 여성의 자유와 자기 결정권을 외면한 것으로 현실과 맞지 않다는 비판이 있었다. 헌재는 이번 결정으로 낙태죄를 폐지한 세계 각국의 변화에 발을 맞추어 “태아를 보호하는 원칙과 더불어 여성의 자유와 자기 결정권을 동시에 보호하는 원칙”을 적용하되 임모의 “긴급 상황이나 사회경제적 곤경이 분명할 경우 태아의 생명권에 앞서서 임모의 건강권과 자기 결정권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원칙에 무게를 실어 준 것이다.
반대 주장의 문제
기존의 법체계는 사실상 낙태를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낙태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법감정을 가진 것이었다. 여기서 “태아의 생명권 옹호”라는 대원칙 아래 아주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태아의 생명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관점이 지배했다. 이런 관점은 낙태죄 존속을 원하는 이들뿐만이 아니라 낙태죄 폐지를 원하는 이들 모두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생명윤리적인 가치를 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양자의 차이는 낙태죄폐지를 반대하는 이들은 태아의 생명으로서의 지위를 이미 출생하여 온전한 한 인간으로 존재하는 모체의 생명과 동일시하는 입장에서 태아의 지위를 지나치게 높여 과장한다. 그 결과 수정란의 지위를 온전한 인간과 동등한 것이라고 고백하는 성서의 신앙고백적 구절들을 인용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현실세계에서 객관적으로 승인받기 어렵다.
수정란이 영혼을 가진 인간이라면 수정된 후 모체에 착상되지 못하고 자연 배출되는 6-70%의 수정란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매우 난감해 진다. 교회는 자연 배출되는 수정란의 영혼에 대한 목회적 배려나 신학적 논의를 한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사변에서 나온 논리, 즉 인간은 수정 후 40일(남아), 혹은 80일(여아)이 지나야 영혼이 주입된다고 보아 영혼 주입이 없는 단계에서는 인간이라 볼 수 없다는 주장(emsoulment theory)을 교회가 오래 가르치기도 했었다. 이런 이론은 성서적 근거도 없는 매우 성차별적인 견해다. 이렇듯 교회가 가르쳐온 규범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실정법은 태아의 생명권을 이미 출생하여 살아있는 사람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보고 있고, 성경의 출애굽기 21장 22절에서도 태중의 태아의 생명가치와 기존 인간의 생명가치를 동일하게 보지 않는 실정법적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태아를 낙태케 했을 경우 금전적 배상을 할 의무를 지우면서도 일반인의 생명을 손상시켰을 경우에는 보복의 법을 적용하여 생명에는 생명으로 되갚을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문명화되어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아진 사회에서 낙태죄가 폐기되고 있는 것은 낙태죄가 여성의 자유와 몸을 억죄는 기능을 해왔기 때문이다. 낙태죄가 있든지 없든지 전 세계에서 1년에 약 5천6백만 건의 낙태가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약 60%는 낙태를 허용하는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고, 40%는 낙태를 여전히 금지하고 있는 데도 일어나고 있다. 낙태를 허용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임모인 여성이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임신상대 유지, 출산, 수유와 육아 등에 대하여 책임적인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낙태를 금지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은 무시되고 법으로 임신상태를 유지하고, 출산하며, 수유 양육할 책임을 여성에게 지우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낙태를 금지하는 법을 가진 사회에서 더 많은 낙태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엠네스티 인터내셔날에서 낸 보고서에 따르면 금지국에서는 가임여성 1000명중 37명이 낙태하고 있는 반면, 허용국에서는 34명이 낙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UN의 2014년 보고서에 의하면 낙태죄를 존속시키는 사회에서 14~19세 청소년의 출산율이 매우 높은 반면, 안전하지 않은 낙태로 인한 여성의 사망률은 허용국에 비하여 3배 이상 높다. 여기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문제는 허용국에서는 여성의 몸과 재생산권이 법적으로 보호를 받으며 안전한 낙태 시술을 받을 수 있는 반면, 금지국에서는 여성들이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동시에 불법시술로 내몰리고 있다는 점이다. 낙태법 존속이 태아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임신한 여성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 법이라고 보는 이유다. 반대론자들은 이 문제를 간과한다.
심지어 모 대학의 이 모 교수는 헌재의 결정이 마치 “미친 좌파들의 짓”인 양 사실을 왜곡 악의적으로 비난하고 있는 글을 <성산의료윤리연구소 홈페이지>에 버젓이 올려 두고 있다. 지식인의 합리성을 버린, 경박하기 짝이 없는 무지한 곡해다. 그렇다면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가까운 일본, 작년에 낙태죄를 폐지한 아일랜드의 결정도 모두 좌파의 짓이란 말인가? 이 분을 앞세우고 있는 한기총의 성명서를 보면 더욱 기가 막힌다. “낙태죄가 태아의 생명권뿐만이 아닌 여성의 건강권과 자기결정권을 지켜주고...” 운운하는 그들의 성명서는 낙태 현실에 대한 진지한 이해 없이 마구잡이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낙태죄 존치를 주장하는 한기총의 평가가 옳다면 왜 선진 사회 대부분 낙태죄를 폐기했겠는가?
반대 주장을 하는 이들은 낙태죄를 존속시켜야 낙태가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도 틀린 것이다. 전 세계, 특히 기독교 세계에서는 20세기 중반을 넘도록 사실상 낙태죄를 존속시키고 있었지만, 그 실효성이 없었고, 오히려 임모의 건강을 해하는 부작용이 너무 커서 폐기한 것이다. 다시 말해 여성인 임모의 몸을 법과 종교와 교회가 지배한다고 하여 원치 않는 임신이 줄어든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경우 1973년 낙태죄가 위헌 판결을 받은 후 1984년까지는 합법적 낙태 빈도가 높아 졌다가, 오늘날 낙태죄를 존치시켰던 그 당시 보다 낙태 빈도가 낮아졌다. 낙태죄가 낙태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몸에 대한 존중의 문화가 깊어야 원치 않는 임신이 줄고, 결과적으로 낙태 빈도가 낮아지는 것이다.
헌재의 결정의 의미
헌재의 결정문에는 낙태죄 폐지라는 의미에 앞서 인권을 지켜주는 국가의 의무를 담고 있다. 국가도 헌법이 명시하고 있는 개인의 인격권, 자유권, 자기 결정권, 행복 추구권이라는 기본권에 저촉하거나 위배되는 결정이나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몇몇 종교 단체는 종교의 이름으로 여성의 인격권, 자유권, 자기 결정권을 침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현대 인권사상을 이해하지 못하여 나오는 반헌법적인 것이다. 종교집단이 반헌법적인 주장을 관철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기존의 법에 대하여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과 감정을 일치시키고 새로운 정황에 대한 합리적 판단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근래에 우리나라에서 호주제 폐지, 간통죄 폐지에 이어 또다시 낙태죄가 헌법 불일치 결정에 의하여 폐지 순서를 밟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나는 우리 사회가 그동안 너무나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적 가치를 앞세워 사회 규범을 만들고 지켜왔지만, 이제는 남성 우월적인 관계가 아니라 양성평등한 관계로 발전되어 나가야 한다는 요구에 응답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평화는 억압적인 관계에서는 체험할 수 없는 것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여성을 객체화한 남성 중심적 가족관계는 당연히 해체되어야 했고, 국가가 개인의 침실까지 들여다보면서 부부관계까지 개입 판단하는 것은 지나친 사생활 침해이며, 또한 여성이 자기의 몸에서 일어나는 임신과 출산 여부에 대하여 스스로 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법이 강제하는 것은 여성의 몸에 대한 국가의 지배를 뜻하는 것이므로 여성의 인권을 침해하여 온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낙태죄 폐지는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태아의 생명권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물을 것이다. 태아의 생명권을 존중한다면 낙태로 종식되는 원치 않는 임신을 극소화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원치 않는 임신은 여성만의 책임이 아니라 남성도 책임을 져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여성의 몸을 존중하는 관계, 여성의 자유와 결정권을 존중하는 사랑, 그리고 임부가 두려움 없이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생명공간의 확대와 같은 방책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을 존중하는 윤리를 확산하는 방법이다. 헌재는 태아의 생명권보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는 여성의 결정권을 존중하라는 헌재의 결정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태아살해의 문화, 1년에 전 세계에서 5천 6백만 명의 태아가 임신중절 당하는 현실, 우리나라에서는 낙태금지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년에 약 35만 명~50만 명의 태아가 죽음을 당하는 현실이 있다. 낙태법 존치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나고 있는 비참한 현실을 타개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나는 태아의 생명권이 훼손당하는 광범위한 현실을 생각할 때마다 비참한 인류사회의 어두움을 생각하게 된다. 사랑의 행위가 태아살해의 길로 이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이런 비참한 현실, 임모에게 태아를 택할 것인가 버릴 것인가를 고뇌하게 만드는 현실, 그것은 바로 원치 않는 임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원치 않는 임신은 일부 무지에서, 그리고 대부분 피임의 실패에서 일어난다. 아무리 좋은 피임 수단을 사용해도 실패율은 8% 정도이고, 가장 불완전한 피임 수단은 무려 28%의 실패율을 보이고 있다. 이런 현실 때문에 기혼 여성들이 더 많이 낙태 시술을 받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낙태를 하는 여성을 일종의 살인자로 보아 교회에서 축출할 대상으로 간주하지만, 독일 교회는 오히려 목회적 돌봄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독일 교회는 태아의 생명권을 부정하는 낙태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임이 분명하지만, 사회 경제적으로 특정한 상황(Notfall)일 경우 피치 못하여 낙태를 하는 여성을 법으로 가로막거나 비난하기보다는 의료적 지원과 목회적 배려의 대상으로 보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마치는 말
낙태는 이미 갈등상황을 초래한 현실에 대한 궁여지책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갈등상황의 극소화할 수 있는 방향이 우리 기독교인이 참여해야 할 생명윤리의 실천 지평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기독교인은 평상시에는 생명의 파수꾼으로서, 갈등 상황에서는 인권을 지키는 생명의 변호사로서, 그리고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전사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갈등의 골이 깊어 두 가지 이상의 가치가 대립할 경우,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더 적은 악, 동시에 어느 것이 더욱 큰 선인가를 잘 헤아려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낙태는 상대적으로 더 적은 악이지, 결코 하나의 적극적인 선이라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양자택일의 비참한 선택을 해야만 하는 막다른 길로 여성을 내모는 원치 않는 임신이 일어나지 않도록 교회와 모든 기독교인은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여성의 자유를 법으로 제한하고 임신과 출산을 강제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여성의 인격과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평화교회연합회 기고문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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