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uly 24, 2018

서평 사랑과 정의. 본질과 현상에 게재

월터스트로프의 사랑과 정의(정의를 품은 사랑)


오랜 동안 다양한 기독교 사상가들이 고민했던 주제는 사랑과 정의의 관계였다. 사랑과 정의는 그 동기에 있어서 다르고, 그 방향과 목적에 있어서 다르기 때문이다. 사랑은 정의의 요구에 눈을 감는 성격이 있고, 정의는 사랑을 포기하는 성격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사랑과 정의 둘 중 양자택일을 하는 경우 어느 한 편은 치명적으로 손상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 갈등 문제는 어거스틴과 같은 위대한 사상가나 종교 개혁자도 피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대부분의 기독교 사상가들은 한 연원을 둔 두 개의 다른 영역을 가진 규범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선택했다. 어거스틴의 두 도성설이나 마르틴 루터의 두 왕국성이 함축하고 있는 기독교 사회 윤리적 동기 역시 다름 아닌 사랑과 정의의 영역을 제각기 고려하는 것이었다.
월터스트로프는 그동안 논의되었던 정의 이해를 심화하면서 이미 두 권의 책을 통해[Until Justice and Pece Embrace(1983/94), Justice: Rights and Wrongs(2008)] 그의 기독교적 정의에 대한 생각을 밝혀왔다. 그가 이해하는 정의는 전통적인 철학적 정의론에서 다루던 질서 보전적 정의라든지, 교정적 정의라는 개념 이전에 인간이 자연적으로 지니고 있는 선천적인 권리로서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선에 가깝다. 이런 점에서 그가 이해하는 정의는 집행적 정의가 아니라 정의롭게 대우받을 권리로서 배려와 사랑과 용서를 요구한다. 다만 불의한 정황을 바로잡을 수 있는 정치 사회적 차원의 교정적이며 응보적인 정의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논의를 전개하지 않았다.

<사랑과 정의>는 어쩌면 그가 그간 펼쳐온 정의론의 후속 편이라고 볼 수 있는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정의의 문제를 다루면서 정의와 사랑을 긴장관계 속에서 파악해온 전통의 오류에서 벗어나 정의와 사랑을 온전한 조화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보다 성서적인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주제는 기독교적인 사랑과 정의의 관계를 새롭게 해명하는 데 초점이 모아져 있다.
월터스트로프는 윤리학의 과제를 선한 삶 혹은 선이 있는 삶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다. 선하고 옳은 삶의 가치를 논의하는 윤리학의 과제는 그에게 있어서 자신을 비롯한 타인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좋은 것이라 여기고 그렇지 않는 것은 나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정의가 누군가의 본원적인 권리를 평등하게 누리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말하고 있는 아가페 사랑은 타인의 삶에 수혜를 주어 안녕과 번영의 풍요로움을 끼치는  성격을 가진다.
그런데 그동안 주요 사상가들은 정의와 사랑을 이해함에 있어서 왜 동시적 혹은 협력적 관계로 보기보다는 갈등관계로 파악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왈터스토르프의 답변은 그의 책 1부에서 이기주의, 행복주의, 공리주의에 대한 그의 철학적 윤리학과의 대화, 키에르케고어, 라인홀드 니버, 그리고 니그렌의 사랑과 정의에 대한 기독교 윤리학적 이해에 대한 그의 비판적 분석에 담겨있다. 이기주의가 그 성격상 자기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복주의는 자신의 선이 증진되는 경우에 한하여 타인의 선을 도모한다. 반면 공리주의는 평균적 선을 증진하기 위하여 누군가의 선을 희생시키는 것도 불사한다. 이런 점에서 이기주의나 행복주의 그리고 공리주의로 이웃 사랑의 자비가 가득한 기독교적인 아가페 사랑을 대신하기 어렵다.
세속적 윤리이론이 제시하는 사랑의 한계를 넘어 기독교적 사랑, 즉 아가페 사랑을 해명했던 죄렌 키에르케고어, 안더스 니그렌, 그리고 라인홀드 니버는 월터스트로프의 관점에서 보면 현대 아가페즘의 한계와 오류를 보이고 있다. 특히, 니그렌은 비기독교적인 사랑을 모두 에로스, 즉 자기 중심을 요구나 끌림에 의하여 일어나는 사랑으로 보고 오직 아가페적 사랑만이 참된 사랑의 지평을 연다고 생각하여 일종의 아가페 사랑 지상주의를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아가페적 사랑은 결과적으로 그 사랑을 관철하려는 맹목에 빠져 마침내 정의의 요구를 훼손한다. 정의와 갈등이 일어날 경우 아가페적 사랑은 정의의 요구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어 역시 참된 사랑은 오직 아가페적 사랑이라고 여긴다. 아가페는 자기애나 호혜적인 사랑, 정의의 집행을 요구하는 힘의 개입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 결과 구체적인 삶의 선, 번영과 안녕에 대한 관심 지평이 아가페 사랑의 추상적 개념을 지키기 위하여 사라진다. 이들은 한결같이 아가페를 이웃사랑으로 규명하곤 했지만 정작 이웃의 정의는 회복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월터스토르프는 기독교적 사랑을 “이웃사랑”이라는 개념보다 “아가페 사랑”이라는 용어(p.51)를 선택한다.
월터스토르프는 라인홀드 니버의 아가페적 사랑에 대해서 그가 인간의 이기성에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기성을 극복하고 바로잡기 위한 강제력의 사용을 정의에게 넘기고 아가페로부터 정의를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보았다. 따라서 타인을 위한 아가페적 사랑은 정의를 집행하라는 요구와 갈등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렇듯 무한한 이웃 사랑의 과제를 안고 있는 아가페는 정의로운 폭력을 요구하는 현실 속에서 니그렌이나 키에르케고어처럼 정의를 무시하거나, 니버처럼 정의 뒤에 그 아가페적 사랑을 후위시키고 말았다는  평가를 면치 못한다. 이런 결과는 왈터스트로프의 입장에 의하면 아가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결국 정의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지 못한 셈이다.
그렇다면 월터스트로프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과 정의는 어떤 것인가?  그가 이해하는 아가페는 “삶-선(life-goods)”에 대한 권리로서 정의로 이해되고, “안녕-선(wellbeing –goods)의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사랑(140)이다. 성서적으로 말한다면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되고 있으며 삶- 선, 안녕-선(좋은 삶과 좋은 평화로 해석할 수 있다)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할 경우 자기도, 이웃도, 하나님도 모두 아가페 사랑의 대상이 된다. 아가페 사랑은 정의의 요구, 즉 선천적으로 부여된 권리에 맞게 이웃을 대하는 행위와 갈등할 수 없다. 따라서 왈터스트로프는 정의의 부재 상황을 전제한 라인홀드 니버와는 달리 사랑 안에서 수행되는 정의를 생각한다. 그는 ”내가 당신의 가치에 걸맞는 방식으로 당신을 대한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을 정의롭게 대하는 것“(166)이라고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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