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uly 24, 2018

동성애를 바라보는 그대의 시각

동성애 문제에 대하여 경박한 입장을 취하는 이에게
(주의: 긴 글이니 안 읽으셔도 됨)

1. 동성애 문제는 여러 사람에게 상당히 껄그러운 문제가 되고 있다. 동성애를 정죄하자는 극단적인 입장부터, 직접 나서지는 않지만 동성애자를 두려워하는 부류, 동성애자는 무엇인가 비인간이라고 여기며 동성애자를 정죄하자는 소리를 듣고서도 모른 척 하는 부류도 있다. 대부분 침묵하고 있지만 동성애자가 조롱과 비난을 받고 있는 현장에서 물끄러미 바라다보면서 내심으로는 저런 취급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상당히 많다. 정죄론자부터, 분리주의자, 소극적 방관자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 잘 모른다.

2. 동성애 문제는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오랜 동안 동성애에 대하여 정죄의 문화를 형성해온 전통이 겹겹이 싸여있는 문제다. 미개한 아프리카에서는 동성애자라는 것이 확인될 경우 사형을 시키는 나라도 있다. 이렇듯 동성애자는 향한 증오는 오랜 과거에서부터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증오의 뿌리는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범주를 형성하고 동성애자를 비정상으로 분류하는 습성을 낳았다. 비정상은 우리에게 두려운 것이며, 무서운 것이고, 기이한 것이라는 생각에 빠지게 만든다.

3. 혐오가 권력 구조를 옷 입게 되면 폭력이 된다. 혐오는 언제나 그렇듯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향해 가지는 감정이다. 약자의 강자 혐오는 폭력화되기 어렵지만 강자 집단의 혐오는 이내 폭력화되고, 행사되는 강자의 폭력은 정당한 것으로 간주된다. 혐오를 불러오는 대상에게서 우리는 불쾌를 느낀다. 왜 혐오와 불쾌를 느끼고, 왜 우리는 증오의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오랜 기간 학습되어온 정상 비정상의 범주에 우리가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정상/비정상이라는 규정은 약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늘 강자가 약자를 향해 범주화 해온 것이다. 이런 습성을 버리는 일은 쉽지 않다. 약자 편에 서려는 결단 없이 할 수 없다.

4. 예컨대 “동성애자는 항문성교를 하고 더럽다.” “동성애자는 에이즈를 퍼드린다.” “동성애자는 치유될 수 있다” 는 이런 규정화된 표현들은 강자 집단인 이성애자 집단이 동성애자를 규정하는 범주적 표현이다. 동성애는 남성 동성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 동성애도 있는 데 비판자들은 여성 동성애에 대해서는 혐오적 표현을 하기 어려우니 언급을 피한다. 이들은 이성애자는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인격적으로 사람을 사랑하지만, 동성애자는 짐승같은 존재라고 규정하곤 한다. 이성애자 중에는 난잡한 성생활을 하는 이도 있고, 구강 성교만이 아니라 항문 성교를 하는 이도 있건만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모른 체 한다. 이성애자는 다양하고 개별적으로 상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동성애자를 향한 비판자의 규정은 동성애자를 기이하고, 추하고, 더럽고, 부도덕하다는 규정으로 일괄하여 일반화 한다. 이렇듯 편견을 조장하면서 편견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이들이 병든 자다.

5. 이는 마치 백인이 흑인 남성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흑인에 대한 백인의 공포는 흑인은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며, 본능적이어서 백인 여성을 강간할 수 있는 잠재적 범죄자라고 여겨온 역사의 산물이다. 백인이 흑인에게 가한 제도적 폭력, 행정적 폭력, 심지어 인격적 폭력이 엄청남에도 불구하고 백인은 흑인 남성을 두려워한다. 흑인 개인의 인격이나 덕목이나 교양이나 학식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흑인 일반에 대한 괴이한 대상화는 흑백 갈등의 원죄적 구조를 생산해 왔다. 이런 기이한 대상화로 인하여 오랜 기간 흑인들의 인권이 박탈되고 비인간 취급을 받아왔지만, 아직도 여전히 한 해에도 수백 수천명의 흑인들이 인권을 유린당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이슬람에 대한 공포도 그 성격은 마찬가지다. 이슬람을 범죄 집단화하는 논리를 경건한 자들이라 자칭하는 이들이 전파시키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나는 동성애자를 향한 온갖 험담을 유포하는 일반의 공포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6. 동성애자를 향하여 심판하고 저주하며, 비인간화하는 기독교인들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이들은 동성애자의 인격과 삶과 사랑과 눈물은 보지 않는다. 그저 동성애자는 비정상이라는 범주적 이해를 가지고 그들은 규정할 뿐이다. 그들이 자기 자신과 동일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점에서 동성애자가 병든 것이 아니라, 편견에 쩔어 자기와 다른 이의 인격과 삶을 매도해 버리려는 이들이 병 들었다고 생각한다. 병든 집단이 다수이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병 들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동성애자를 향하여 불쾌와 증오와 혐오를 가지는 자기 자신이 동성애자를 두려워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7.나는 열광적으로 혐오를 나타내는 이들은 범죄적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사유의 결핍을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경박한 이들이다. 자신과 다른 존재를 보면 경악하는 가벼운 존재인 셈이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그들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와 전통 속에서 생산된 감정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할 능력이 없다.  누군가를 정죄함으로써 이들은 자신의 순수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순수는 이미 혐오와 비인간성으로 오염된 것이다. 비열한 증오의 유산을 나누면서 증오의 유포자, 생산자가 된 이들은 자신들이 보다 순수한 신앙의 보존자라고 여긴다. 이런 자들은 그저 비인간화된 교조주의자 아류일 뿐이다.

8. 나는 비인간화된 교조주의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사유능력이 취약하고, 오류를 인식할 능력이 취약하여 교육이나 설득에 의하여 쉽게 수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교조주의자들이 동성애자들을 향하여 던지는 포악한 매도, 비인간화를 못 본 체 하는 부류들이 더 무섭다. 이들은 교양과 평화를 지키고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인즉 포악한 교조주의자들에게 포악한 행위를 하도록 조장 방조하는 관객이다. 관객이 많을수록 저들은 더욱 포악해 진다. 결국 이들도 포악의 확산을 조장하며 내심 편안해 하는 것이다. 다소 지성적이고, 다소 인격적인 제스쳐를 취하고 있지만 이들의 내면은 교조주의자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혐오하는 혐오스러운 이들이다.

9. 나는 동성애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그럴 권리가 내게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성애자들이 동성애자를 못살게 구는 것은 도덕주의가 아니라 명료한 범죄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포악함은 마치 나치가 아리안인의 순수인종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다양성을 비정상이라고 여기고, 그 다양성을 제거해야 순수 아리안 민족 혈통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포악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이웃이 동성애자라 하여 두려운가? 두려워하는 그대가 인식과 실천에 있어서 멍청한 것이다.  동성애자 때문에 근심스러운가? 그렇다면 그대도 나치와 다를 바 없다. 획일화된 인간 범주를 따라 스스로를 정상 상대편을 비정상이라고 내심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대는 두렵고 근심스러운 것이다.

10. 다양성과 다름을 수용할 수 없다면 그대는 병든 인간이다. 아무리 교양과 신앙으로 위장하고 있어도 그대는 기독교 나치와 다를 바 없다. 사람을 차별하고, 매도하고, 심지어 추방하고, 권리를 빼앗고, 인격적인 살해를 마다하지 않는 그대가 나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공포와 근심은 결국 그대의 비인간성이 불러오는 것이고, 그런 성향을 지닌 그대는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된 편견에 무비판적으로 동의해온 가벼운 사람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만일 동성애자가 범죄를 저질렀다면 이성애자와 동일하게 그를 법적으로 심판하면 될 일이다. 다만 성적으로 그대와 같지 않다고 하여 그들을 비인간화할 권리는 나에게도 그대에게도 없다.

11. 소수자를 편드는 일은 포악한 다수에 의해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된다. 나는 성서의 예수는 소수자들 편에 서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구약의 계약법전의 약자 보호법도 사회적 소수를 옹호하고 있지 않은가? 성서가 이성애자들만 편들고 있다고 나는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의 다양성은 이성애자만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섭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는 악어나 맹수류와도 우리는 더불어 살아야 한다. 인류의 존속을 위하여. 동성애자가 소수라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까 생각할 때도 있다. 어찌 생각하면 하나님은 더 많은 이성애자를 내시는 것 같으니 말이다.

12. 동성애자가 동성애를 하는 것이 개인적 의지의 선택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퍽 많다. 그대라면 그대와 같은 포악한 자들의 비난과 정죄의 대상이 될 그런 존재가 되고 싶은가? 그들이 동물적인 성적 쾌감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보는가? 그런 견해는 그대의 추악한 상상력의 결과일 뿐 사실과 다르다. 그대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면서 왜 그들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는 모두 고귀한 인간이다. 성적 취향과 성향이 비록 달라도 피차 고귀한 인간으로서 상대를 바라보는 것이 보다 기독교적인 것이다. 이성애에서도 행위자의 인격에 따라서 다양한 표현이 나온다. 배반도 있고, 난봉꾼도 있고, 심지어 성폭행범도 있다. 그런가하면 신실한 사랑을 하는 이도 있다. 이성애자들의 세계나 동성애자들의 세계 나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내 잣대를 가지고 선/악, 정상/비정상으로 나눌 권한이 없다고 생각한다.

13. 나는 성애와 관련하여 정말 나쁜 것은 일방적인 성행위, 곧  성추행과 성폭행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비열한 속임수를 행사하며 상대를 인격적으로 배반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이성애자 목사가 불륜을 밥먹 듯 하고, 동료 목사의 아내를 성폭행하고, 위협 공갈로 성폭행을 수년간 저질러 온 사례도 있다. 이런 비열한 행위를 한 자가 동성애를 비난함으로써 스스로를 순수한 신앙의 옹호자로 자처하거나 인정받으려 하는 것은 매우 엮겹고 추악한 일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개인의 성향과 기호에 따라 다르다. 다만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범주 안에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만적이거나 폭력적인 성애는 가장 비인간적인 행위다.

14. 교회는 증오의 공급자나 공모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이라면 증오를 신앙으로 미화하는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동성애를 증오한다고 하지 않으면 동성애를 지지하느냐고 묻는 천박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동성애자들은 지금 그대의 재판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아야 할 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대와 같이 자유로운 인격이고, 인간이며, 정의와 평화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이들이고, 무엇보다 이성애자들보다 훨씬 고된 사랑을 하는 이들이다. 그대들 앞에서 그들은 자신을 숨겨야 하고, 위협과 공포를 느끼고 있는 이들이다. 혐오와 증오를 품고 있는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런 소수자를 향하여 돌을 드는 그대가 내 눈에는 비인간이다.

15. 마지막 이야기로 이 두서없는 글을 마치려 한다. 2016년 독일 출판협회의 평화상을 수상한 사람은 여성이며 동성애자다. 그녀의 이름은 캐롤린 엠케, 기자이자 철학자이며, 작가로서 살아오면서 국가 폭력, 정치적 폭력에 희생된 이들을 취재하여 기사를 써왔다. 독일 쉬피겔 잡지에 가장 많은 기고를 해온 그녀는 독일의 최고 지성에게 수여하는 독일 출판협회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대들 같으면 동성애자라 하여 돌을 던져야 할 대상에게 독일 지식 사회는 지성인에게 수여되는 상 중에서 가장 영예로운 상을 준 것이다. 이 상은 오래 전 칼 야스퍼스가 받았던 상이다. 왜 그들은 동성애자를 정죄하기는커녕 그에게 최고의 평화상을 수여 했을까?

16. 이 평화상을 수여받는 자리에는 독일 대통령도 참석했다. 상을 주는 출판협회 회장은 엠케가 독일 사회에서 증오의 문제를 깊이 다루고 다원성의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었다고 했다. 이 상을 받는 자리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를 획일적으로 바라보며 염려하는 이들이 증오를 생산한다.” 나는 한국 기독교가 우물안의 개구리들을 양산하는 나쁜 기독교에서 어서 벗어나기를 기대한다. 엠케의 책 중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은 " 증오에 반대한다"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혐오사회>라 번역되었다.  동성애를 증오하는 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사랑을 배운 기독교인이라면 증오의 확산자가 아니라 증오와 부단히 싸워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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