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ly 26, 2018

박충구의 죽음의 윤리 2 “인간 죽음의 역사”


박충구의 죽음의 윤리 이야기 2
                  “인간 죽음의 역사”

“우리는 죽음을 재앙이나 회피해야 할 것이나 심지어 낯선 것이라 여기는 생각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 레비스 토마스(Lewis Thomas)

대만 타이난 신학대학에서 강의하던 2015년 가을 나는 한 대만 교수로부터 대만의 어느 부족은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 부친의 시신을 자신의 안방에 묻어 장사지냄으로써 초월적 존재가 된 부친의 영적인 가호를 받는다고 믿는 풍습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의 지난 역사에서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자식이 삼년 동안 상을 지내야 효자라고 여겼으니 이 또한 죽은 자와의 관계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행위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효행은 산자와의 관계에서 그치지 않고 죽은 자와의 관계를 넘어 자신과 자식 그리고 주변인에게까지 그 의미가 연장되어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곡은 효(孝)를 참된 인간됨의 본질적 요소라고 여겼고, 윤성범은 효의 연장에서 성(誠)의 신학을 구상했다. 이렇듯 인간의 죽음에 대한 태도나 생각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는 역사적 행위와 연관성을 가진다. 
인간이 인간의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은 시공간을 초월하기도 하지만, 시공간의 조건 속에 한계 지어진 인간의 삶을 드러내기도 한다. 죽음의 역사에 대한 연구자들은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그 시대 사람의 삶을 읽어냈다. 연구자마다 견해가 다양하고 인류의 역사가 다양하니 그 이해의 방식도 다양하여 몇 가지로 종합하기에는 어려움이 적지 않다. 하지만 다양한 시각을 종합하여 나는 인간이 인간의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수렵채취를 하며 살아가던 시대에는 죽음이란 폭력적이며 급작스러운 것으로 이해되었고, 군집적 농경사회를 이루기 시작한 인류사회는 죽음 이후에 대한 강렬한 관심과 더불어 신화적 죽음이해로 그 의미를 확장했으며, 근세 자연과학적 지식을 가진 현대인은 재래의 죽음 이해에 더하여 생물학적인 죽음 이해가 겹쳐지는 죽음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죽음이 역사성을 가진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죽음의 의미가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생명의 역사는 무려 54억년에 이르지만 오늘날의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것은 지구의 오랜 나이에 비한다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현생 인류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탄생은 죽음 없이 일어나지 않았다. 무수한 생명이 태어나고 죽어가는 과정을 거쳐 오늘의 우리가 존재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미국의 저명한 시인 홀(Donald Hall)은 “나의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나는 나의 대체자가 지상에 도착했다는 느낌으로 인하여  전율을 느꼈다.”라고 했다. 죽음이 없다면 새로운 세대도 없을 것이고, 죽음이 없다면 생의 의미도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다. 장구한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생명은 죽음으로 종말을 맞고 새로 태어난 생명이 앞서 살아가던 이의 자리를 채워왔다. 
인류학자들은 문명 이전의 오랜 기간을 지나 오늘날의 인간처럼 인류가 직립보행을 하며 사유능력을 행사하여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시점에서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약 250만년의 시간을 거쳐 인류는 지구라는 환경에 최적화된 생존능력을 가진 존재로 진화해 온 것이다. 긴 시간에 걸쳐서 인간은 지구에 생존하는 생명체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의식을 가진 존재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나는 이 과정을 하나님의 인류 창조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무수한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서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는 존재는 인간이 당연 최고다. 인간이 자신들의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은 역사 발전 과정 속에서 다른 지혜와 더불어 축적되어 왔다. 죽음은 어느 시대에서나 일어나고 있었지만 죽음의 의미는 인류가 형성해온 문명의 구조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기 때문이다. 수렵채취 생활을 하던 고대 인류는 오늘날 현대인이 죽음을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죽음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 원초적인 죽음 이해는 최초의 인류사회에서는 보편적인 것이었지만 오늘의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다소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들의 죽음은 예상할 수 없는 질병이나 물리적 공격에 의하여 급작스럽고도 폭력적으로 죽음을 맞는 것이었다. 다른 생명을 추적하여 잡아먹고 살던 그들은 이런 죽음을 자연스러운 것이라 여겼다. 

자연스러운 죽음
원시상태의 인간은 대부분 기아와 고통, 그리고 질병과 신체적 기형, 영양결핍, 자연재난, 급작스러운 사고로 인하여 죽었다. 이 시대의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사나운 육식 동물의 공격이나 질병, 적의 공격, 그리고 사고로 인하여 일어나는 일상의 사건이었다. 우연한 사고와 포악한 자의 습격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던 시대에서 죽음이란 정글에서 동물이 포식자에게 잡혀 죽는 것과 유사하게 급작스럽고도 폭력적인 것이었다. 이런 죽음은 폭력적이며 급작스런 생존의 종말을 초래했다. 요즈음처럼 늙어서 죽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초기 인류는 이런 급작스러운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인류학자들은 이 시대의 사람들은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제의도 가지지 않았고, 죽은 자를 애도하는 시간도 길지 않았다고 한다.  
폭력적 죽음에 관한 고고학적인 증거는 미 대륙의 그랜드 캐년(Grand Canyon) 계곡에 살던 원주민의 유골에서 그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으며, 호주 원주민 유적에서도, 그리고 브라질이나 베네수엘라 정글에 거주하던 원시인의 유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상당수 유골의 두개골은 외부의 타격에 의하여 깨져 있었다. 성인 남성 두개골의 약 30%가 돌이나 망치 같은 것에 타격을 받은 것처럼 부셔져 있었던 것이다. 이런 고고학적인 증거를 통하여 우리는 고대사회의 생존방식과 죽음의 형식을 어렴풋이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하여 수십 명 단위의 군집 생활을 하며 수렵채취 생활을 했다. 수렵채취로 생존하던 집단은 먹을 것을 충분히 얻지 못할 경우 다른 집단을 습격하여 자기 집단의 생존을 도모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단계를 거쳐 집단이 집단에 대한 생존 투쟁을 벌이던 시대다. 역사적 예증을 든다면 우리는 고대 그리스에 형성되었던 근 200여개의 도시 국가 시대를 지목할 수 있을 것이다. 생존을 위하여 이들은 야만적 전사(戰士) 문화를 기렸고, 자기 집단을 유약하게 만드는 요인을 제거했다. 유약하게 태어난 사내아이들을 내다 버리는 관습도 있었고, 태어난 아기가 여아일 경우 유기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태어난 아기가 장애를 지니고 있거나 기형일 경우 산모에게는 그 아기를 제거해야만 한다는 책무까지 부과 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오랜 동안 인류의 역사가 생존 지향적 삶의 가치를 따라 죽음을 이해했다는 사실을 일정하게 가리키고 있다. 
이 시대의 죽음은 약자가 혹은 약한 공동체가 강한 자나 강한 집단에 의하여 급작스럽게 그리고 폭력적으로 죽임을 당하는(sudden and violent death) 결과였다. 홉스(Thomas Hobbes)는 그의 책 리바이어던 『Liviathan』에서 이 폭력의 시대를 일러 문명사회 이전의 상태라고 규정하고 그 시대의 사람들은 자연의 법에 따라 만인이 만인에 대한 적대적 관계 속에서 “외롭고, 궁핍했고, 더러웠으며, 잔인했고, 짧은” 생애를 살았다고 요약했다. 이들은 피차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소규모 단위의 공동체를 형성 했고, 그 공동체를 강화하기 위하여 소모적이거나 유약한 자들을 제거해 버리는 관습을 만들었던 것이다. 살기위해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수렵채취 시대를 지나 비교적 생존환경이 안정된 농경사회로 진입하면서 인류사회는 인간의 죽음에 관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죽음의 궁극성 부정
사유는 생존을 넘어서 형성된다. 일반적으로 인류사회가 정착생활을 하게 된 연대는 신석기 시대를 거쳐 청동기 시대 정도로 추정된다. 기원전 250만 년 전부터 기원전 3,300년 경 청동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친 시대를 지나면서 야만적 생존 방식에서 벗어난 인류사회는 인간의 죽음에 대하여 몸의 죽음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 가축을 키우고 농작물을 재배하면서 비교적 정착된 삶을 영위하기 시작한 인류사회는 사회적 안전의 폭을 넓히기 위하여 이전보다 더 큰 사회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그 결과 사회 계층이 형성되었다. 이 시대에서도 평범한 사람의 죽음은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지배자의 죽음은 공동체의 강력한 결속을 약화시키는 사건이었고,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지배자의 죽음을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죽음 앞에서 기존의 삶이란 하나의 환상과 같은 것으로 상대화되고, 죽음 너머에 보다 더 소중한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런 사고는 다양한 제의(祭儀)를 낳았다. 특히 공동체 안에서 특정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이의 죽음에 대한 태도에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졌다. 
죽음의 역사를 연구한 스펠만(W. M. Spellman)은 이런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일어나기 시작한 시점을 약 3만 년 전 쯤으로 추정했다. 일종의 원시 제의적인 행태는 죽음 자를 모셔두는 방법에서 과거에 이해하던 죽음 이해를 넘어서는 새로운 의미를 낳았다. 구석기 시대에서는 죽음이란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죽은 자에 대한 제의나 특별한 애도의 시간을 가지지 않았지만 신석기 시대 이후로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죽음 이전과 이후의 이중성을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삶을 정지 시키는 죽음이라는 종말 너머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죽은 자와의 동거, 교류, 관계를 상정했고 이러한 생각은 의 매개를 통하여 산자와 죽은 자 간의 교류가 일어나는 제의의 형식으로 발전했다. 
고고학자들은 석기 시대에 그려진 동굴의 벽화나 유적들, 대표적으로 남서 프랑스 라스코(Lascaux) 벽화에서 이런 특징을 읽어 냈다. 죽음에 관한 고대의 벽화에는 그 시대를 살아가던 이들의 삶에 대한 이해가 담겨 있었다. 융엘(Eberhard Jüngel)은 죽음이란 인간의 생명에 대한 질문과 마주 닿아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 시대의 사람은 현존을 넘어 죽음 이후까지 연장되는 의미를 찾았다. 죽음을 넘어서 보다 진실한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플라톤의 이데아 설은 아마도 이러한 사유를 담고 있는 하나의 이론일 것이다. 죽음 이후를 생각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원시 인류가 받아들였던 죽음의 궁극성 혹은 종결성을 부정하는 의식을 가졌던 셈이다. 
죽음의 종결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죽음 너머의 관점을 가지고 현재의 삶의 의미를 해석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허망하게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현실을 넘어선 초월의 세계를 담아내는 다양한 종교 사상의 출발점이 되었다. 윤회설로 죽음 이후를 그려내는 것이나, 죽음 이후에도 이어질 영원한 생명에 대한 종교적 믿음은 자연의 법에 따라 죽음으로 종료된 인간의 삶을 바라보던 과거의 관점을 넘어 죽음 이후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듯 죽음 이후의 삶(afterlife)에 대한 종교적 해석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종교와 장례문화의 배경이 되었다. 
칠레의 친초로(Chinchorro) 유적이나 이집트 피라미트 문화 유적은 죽은 자의 몸을 미이라로 박제하여 다음 생을 준비시킨 흔적을 남기고 있다. 삶이 살아있는 현상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넘어 초월적인 세계로 이어진다는 의식은 결국 죽음을 생의 최후(finality)라고 보는 과거의 관점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렇듯 석기 시대 말경부터 인류는 죽음을 수용하되 죽음 너머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죽은 자는 죽음으로 그의 존재 의미가 종료되지 않고 그의 영혼이나 신적 능력이 다음 생으로 이어지거나, 살아있는 이들과 관계를 가진다는 생각은 문화 전통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고 상이한 제의의 형식을 낳았다. 

죽음의 개인화
아리에스(Pillipe Ariès)는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는 죽음이란 일종의 순화된 죽음으로서 현재의 생을 마치고 영원한 세계로 귀향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사람들은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의 죽음을 이해하는 것이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중세 후기로 들어서면서 삶과 죽음을 공동성 속에서 이해하던 시각이 서서히 사라지고 점차 “개인의 죽음”, 혹은 “나의 죽음”이라는 관점으로 죽음을 이해하는 시각이 좁혀졌다고 주장했다. 개인주의의 발현과 더불어 종교적 실존에 대한 개인적 평가 사상이 형성되면서 강한 최후 심판 사상이 강조되고, 이교(異敎)에 대한 정죄 문화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종교개혁 사상에 의하여 분열된 기독교 세계는 개인적 선택과 영혼의 구원과 영생이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죽음에 대한 개인주의적 이해를 강화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렇듯 인류 역사가 문명사회를 형성하면서 죽음의 궁극성을 부정하는 태도는 내세에 대한 구원과 희망과 결부되어 현생을 가늠하고 평가하는 삶의 원칙을 낳았다. 신의 심판대에 설 준비를 하는 삶, 혹은 현세는 영원한 구원을 향한 여정이라는 생각, 그리고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천상의 삶에 대한 소망은 신실한 신자들에게 죽음의 문턱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들었다. 죽음은 자연스럽고, 친숙했으며, 두려운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지나야 할 구원과 자유의 문이라 여겨졌던 것이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죽음의 준궁극성(pen-ultimate)을 넘어 보다 궁극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희망을 가지고 죽음을 받아들였다. 
물론 이러한 주류의 흐름과는 달리 입증할 수 없는 종교적 희망을 따르지 않고 원자론적인 집합으로서의 생명현상과 그것의 해체로서의 죽음을 이해하는 데모크리투스(Democritus) 부류의 전통도 있었다. 에피큐러스(Epicurus)나 루크라테스(Lucrates)로 대별되는 자연주의적인 죽음 이해는 인류 초기 수렵채취 시대의 죽음 이해를 보다 합리적으로 바라보려는 죽음 이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견해는 일부 비종교적인 현대인의 사생(死生)관으로 남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죽음 이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세기 이후 자연과학적이며 생물학적인 생명이해와 더불어 새로운 차원의 죽음 이해의 지평을 열었다.

금기시 된 죽음
20세기 현대인이 지니고 있는 죽음 이해의 주조는 일종의 금지된 죽음(forbidden death)이다. 금지된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가급적 피하고 싶은 주제이며 거론조차 하지 않으려는 금기 사항이 됐다. 끔찍하고 무서운 죽음을 아예 대변하고 싶어 하지 않으므로 많은 사람이 병원에 격리된 채 죽으며, 심지어 죽는 본인 자신도 모르는 새에 기술적으로 처리되어 버리곤 한다. 죽음은 금지 사항이 됐다. 이것이 소위 금지된 죽음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현대 세계는 금지된 죽음의 문화가 지배하는 세계가 되었을까? 여기에는 사회문화적 요인과 의료과학 기술적 요인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폭력적 급습에 의해 죽음을 맞던 야만 시대를 지나, 삶을 넘어선 사후의 삶을 생각하던 시대에서의 죽음은 공동적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던 죽음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비록 권선징악적인 최후의 심판 대상으로 간주되는 개인이 두드러졌지만 적어도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인간의 죽음은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를 지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전통적으로 삶의 공동성의 근간을 유지하던 종교 및 사회적 풍습의 고리가 깨지고 산업화된 사회는 과거의 가족 중심적 삶의 공동성조차 해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여기서 가족은 핵가족화 되고, 종교에서 이탈한 개인은 삶의 공동성을 상당부분 상실했다. 삶의 공동성에서 벗어난 개체화된 인간의 죽음은 비극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하여 공공의 시선으로부터 가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죽음을 금기시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죽음을 금기시하는 문화를 초래한 또 하나의 요인은 의료과학 기술에 의한 죽음 지배 현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의료과학 기술은 인간을 개별화 했을 뿐만이 아니라 기계론적으로 신체를 분화시켜 죽음의 요인을 밝혀냄으로서 죽음과의 전투를 벌려왔다. 특히 프레밍(Alexander Fleming)이 페닌실린을 발견한 이후 인간의 생존 기간이 길어지기 시작했고, 신체 기관의 각 기능에 대한 생물학적 이해와 더불어 생명 유지를 위한 최적의 영양학적 제안들은 평균수명 40세를 조금 넘던 인류의 생존기간을 거의 배나 연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죽음은 이제 자연적인 것도 아니고, 영원한 생명으로 넘어가는 단계도 아닌, 거부하거나 싸워 극복해야 할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죽음의 가시를 제거하기 위하여 고도화된 의료체계가 준비되었고, 죽어가는 이는 삶의 현장에서 생명현상을 종식시키는 죽음의 가시들을 뽑아내는 전문 의료인에게 의탁되어 병원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특히 1차 대전과 2차 대전과 같은 세계 대전에서 무수하게 죽어나간 이들은 대부분 일반의 시선이 가려진 자리에서 처치되었다. 전문화된 의료적 저치능력과 장례문화가 인간의 죽음의 일상성을 삶의 자리에서 추방하여 떼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수명이 연장된 노화된 인간은 무수하게 병원을 오가며 죽음과의 거리를 최대한 벌리며 싸우고  있는 것이다.  

선택하는 죽음
생명 현상에 대하여 충분히 해명 받지 못했던 시대의 사람들은 죽음을 운명이나 신의 뜻으로 여겼지만 생물학적인 생명 현상을 파악한 현대인은 생존의 의미를 다시 묻기 시작했다. 생존의 의미를 찾지 못한 이들이 스스로 생명을 단축시키는 살기를 포기하거나 거부하는 자살이 과거에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회는 자살을 반사회적이거나 반생명적인 것으로 금기시 했고 오래 동안 이를 범죄시 했다. 그러나 비록 일부지만 오늘의 세계에서는 법적으로 죽을 권리를 인정하는 새로운 죽음 이해, 즉 선택할 수 있는 죽음에 대한 이해가 일어나고 있다. 물론 죽을 권리를 인정하는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생존이 고통을 겪는 것이 되어버린 말기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앞당기려는 권리를 행사하려 할 때 이를 승인하는 차원에 머무르고 있지만 스위스와 네델란드에서는 더 이상 생존하기를 거부하는 “종료된 삶”(completed life)까지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2018년 5월 10일 CNN은 한 호주 식물학자가 스위스 바젤의 조력자살 기관 액지트(EXIT)에서 친지에게 둘러싸여 죽음을 맞는 장면을 보도했다. 그의 이름은 굿올(David Goodall) 나이는 104세였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앞당기기 위해 처방된 약을 스스로 삼킬 수 없어서 치명적인 약 대신 혈관 주사를 처방받았다. 그는 호주 정부가 죽기를 원하는 자신의 요구를 받아주지 않아 스위스까지 와서 삶을 마치게 된 사실에 대하여 유감을 표시하고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Ode to Joy)를 들으며 그의 마지막 순간을 평온하게 맞았다. 
죽음을 받아들이기 직전 그는 “나는 나의 이야기에서 무엇인가 긍정적인 결과가 있기를 바라고, 다른 나라에서도 조력자살에 대하여 조금 더 자유주의적인 입장을 채택하게 되기를 바란다. 노인이 자기의 죽음을 선택할 자유를 주는 도구로서 내가 기억되기를 바란다. 나는 내 육체적인 능력과 시력을 상실하고 있어서 이런 상태로 더 이상 생존하고 싶지 않다”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스위스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살하는 이를 합리적으로 돕는 행위는 범죄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자살하는 이를 돕는 행위는 오직 합리적이고 간접적인 행위여야 한다. 따라서 굿올은 의사 앞에서 자신의 정신이 온전함을 입증하고, 자신의 죽음을 결과할 마지막 행위, 즉 혈관 주사 수액이 자신의 몸으로 투입되도록 튜브를 개방하는 행위를 스스로 시행했다. 그의 손자와 오랜 동안 그를 돌보았던 간호사가 그의 마지막을 지켰다. 
전 세계적으로 보아 조력 자살을 허용하는 나라나 주는 약 15개다. 미국에서는 오리건주, 버몬트, 워싱턴주,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하와이 그리고 워싱턴 디시에서만 허락되고 있다. 몬타나주를 제외하고 주정부나 의료기관은 조력자살을 하는 이에게 어떤 재정적 지원도 하지 않는다. 인간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하는 이들은 조력자살 법제화를 맹렬히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고령화된 사회에서는 조력자살을 허용하는 국가가 하나 둘씩 늘어나고 있다. 조력자살을 입법화한 나라에서는 조력 자살이란 단순한 자살이 아니라, 죽음을 앞둔 말기환자가 고통을 더 이상 겪지 않으려 비참하게,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하고,  비인간적인 상황에서, 홀로 고독하게 자살하는 일이 빈번한 상황에서 “법적으로 정당하게, 인간답게, 그리고 가족들과 깊은 유대 속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마감할 수 있는 선택권”이라고 여긴다. 

나오는 말
생존이 보장되어 있지 않았던 야만 사회에서의 죽음은 매우 급작스럽고도 폭력적인 공격에 의한 죽음이 대부분이었다. 죽음의 주된 요인은 원인을 규명할 수 없는 질병이거나 외부의 폭력이었다. 초기의 인류는 이러한 죽음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그 후 인류사회가 생존능력을 확보하고 문명 시대를 연 이후 근래 생물학적 생명현상이 과학적으로 규명되기까지 죽음이란 삶과 죽음 이후를 건너는 문턱과도 같이 이해되었다. 그리고 사후 영생에 대한 믿음을 일러주는 죽음 이해는 기독교적인 서구사회에서 하나의 보편적인 죽음 이해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고도의 의학적 지식을 겸비한 현대인은 죽음을 거부하거나 죽음을 감추며 자신의 죽음을 직면하기를 꺼려한다. 죽음의 수용보다는 죽음을 금기시하는 문화와 가치에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현대인은 생물학적이고도 의학적인 지혜로 죽음을 미루는 데 성공하여 배나 연장된 수명을 향유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사람들이 젊어서 죽던 시대와는 달리 대부분 그 어느 시대보다 더 오래 살아 노화된 인간이 되어 죽음을 맞는다. 여기서 삶과 죽음의 의미는 다시 새롭게 물어지게 되었고, 삶의 의미 없는 고통스러운 생존이 과연 인간다운 것인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참된 생명의 의미인지 묻게 되었다. 이런 질문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삶의 의미와 죽음을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한 번 더 깊이 숙고해야만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사상 2018년 연재중)

Tuesday, July 24, 2018

서평 사랑과 정의. 본질과 현상에 게재

월터스트로프의 사랑과 정의(정의를 품은 사랑)


오랜 동안 다양한 기독교 사상가들이 고민했던 주제는 사랑과 정의의 관계였다. 사랑과 정의는 그 동기에 있어서 다르고, 그 방향과 목적에 있어서 다르기 때문이다. 사랑은 정의의 요구에 눈을 감는 성격이 있고, 정의는 사랑을 포기하는 성격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사랑과 정의 둘 중 양자택일을 하는 경우 어느 한 편은 치명적으로 손상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 갈등 문제는 어거스틴과 같은 위대한 사상가나 종교 개혁자도 피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대부분의 기독교 사상가들은 한 연원을 둔 두 개의 다른 영역을 가진 규범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선택했다. 어거스틴의 두 도성설이나 마르틴 루터의 두 왕국성이 함축하고 있는 기독교 사회 윤리적 동기 역시 다름 아닌 사랑과 정의의 영역을 제각기 고려하는 것이었다.
월터스트로프는 그동안 논의되었던 정의 이해를 심화하면서 이미 두 권의 책을 통해[Until Justice and Pece Embrace(1983/94), Justice: Rights and Wrongs(2008)] 그의 기독교적 정의에 대한 생각을 밝혀왔다. 그가 이해하는 정의는 전통적인 철학적 정의론에서 다루던 질서 보전적 정의라든지, 교정적 정의라는 개념 이전에 인간이 자연적으로 지니고 있는 선천적인 권리로서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선에 가깝다. 이런 점에서 그가 이해하는 정의는 집행적 정의가 아니라 정의롭게 대우받을 권리로서 배려와 사랑과 용서를 요구한다. 다만 불의한 정황을 바로잡을 수 있는 정치 사회적 차원의 교정적이며 응보적인 정의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논의를 전개하지 않았다.

<사랑과 정의>는 어쩌면 그가 그간 펼쳐온 정의론의 후속 편이라고 볼 수 있는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정의의 문제를 다루면서 정의와 사랑을 긴장관계 속에서 파악해온 전통의 오류에서 벗어나 정의와 사랑을 온전한 조화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보다 성서적인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주제는 기독교적인 사랑과 정의의 관계를 새롭게 해명하는 데 초점이 모아져 있다.
월터스트로프는 윤리학의 과제를 선한 삶 혹은 선이 있는 삶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다. 선하고 옳은 삶의 가치를 논의하는 윤리학의 과제는 그에게 있어서 자신을 비롯한 타인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좋은 것이라 여기고 그렇지 않는 것은 나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정의가 누군가의 본원적인 권리를 평등하게 누리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말하고 있는 아가페 사랑은 타인의 삶에 수혜를 주어 안녕과 번영의 풍요로움을 끼치는  성격을 가진다.
그런데 그동안 주요 사상가들은 정의와 사랑을 이해함에 있어서 왜 동시적 혹은 협력적 관계로 보기보다는 갈등관계로 파악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왈터스토르프의 답변은 그의 책 1부에서 이기주의, 행복주의, 공리주의에 대한 그의 철학적 윤리학과의 대화, 키에르케고어, 라인홀드 니버, 그리고 니그렌의 사랑과 정의에 대한 기독교 윤리학적 이해에 대한 그의 비판적 분석에 담겨있다. 이기주의가 그 성격상 자기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복주의는 자신의 선이 증진되는 경우에 한하여 타인의 선을 도모한다. 반면 공리주의는 평균적 선을 증진하기 위하여 누군가의 선을 희생시키는 것도 불사한다. 이런 점에서 이기주의나 행복주의 그리고 공리주의로 이웃 사랑의 자비가 가득한 기독교적인 아가페 사랑을 대신하기 어렵다.
세속적 윤리이론이 제시하는 사랑의 한계를 넘어 기독교적 사랑, 즉 아가페 사랑을 해명했던 죄렌 키에르케고어, 안더스 니그렌, 그리고 라인홀드 니버는 월터스트로프의 관점에서 보면 현대 아가페즘의 한계와 오류를 보이고 있다. 특히, 니그렌은 비기독교적인 사랑을 모두 에로스, 즉 자기 중심을 요구나 끌림에 의하여 일어나는 사랑으로 보고 오직 아가페적 사랑만이 참된 사랑의 지평을 연다고 생각하여 일종의 아가페 사랑 지상주의를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아가페적 사랑은 결과적으로 그 사랑을 관철하려는 맹목에 빠져 마침내 정의의 요구를 훼손한다. 정의와 갈등이 일어날 경우 아가페적 사랑은 정의의 요구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어 역시 참된 사랑은 오직 아가페적 사랑이라고 여긴다. 아가페는 자기애나 호혜적인 사랑, 정의의 집행을 요구하는 힘의 개입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 결과 구체적인 삶의 선, 번영과 안녕에 대한 관심 지평이 아가페 사랑의 추상적 개념을 지키기 위하여 사라진다. 이들은 한결같이 아가페를 이웃사랑으로 규명하곤 했지만 정작 이웃의 정의는 회복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월터스토르프는 기독교적 사랑을 “이웃사랑”이라는 개념보다 “아가페 사랑”이라는 용어(p.51)를 선택한다.
월터스토르프는 라인홀드 니버의 아가페적 사랑에 대해서 그가 인간의 이기성에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기성을 극복하고 바로잡기 위한 강제력의 사용을 정의에게 넘기고 아가페로부터 정의를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보았다. 따라서 타인을 위한 아가페적 사랑은 정의를 집행하라는 요구와 갈등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렇듯 무한한 이웃 사랑의 과제를 안고 있는 아가페는 정의로운 폭력을 요구하는 현실 속에서 니그렌이나 키에르케고어처럼 정의를 무시하거나, 니버처럼 정의 뒤에 그 아가페적 사랑을 후위시키고 말았다는  평가를 면치 못한다. 이런 결과는 왈터스트로프의 입장에 의하면 아가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결국 정의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지 못한 셈이다.
그렇다면 월터스트로프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과 정의는 어떤 것인가?  그가 이해하는 아가페는 “삶-선(life-goods)”에 대한 권리로서 정의로 이해되고, “안녕-선(wellbeing –goods)의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사랑(140)이다. 성서적으로 말한다면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되고 있으며 삶- 선, 안녕-선(좋은 삶과 좋은 평화로 해석할 수 있다)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할 경우 자기도, 이웃도, 하나님도 모두 아가페 사랑의 대상이 된다. 아가페 사랑은 정의의 요구, 즉 선천적으로 부여된 권리에 맞게 이웃을 대하는 행위와 갈등할 수 없다. 따라서 왈터스트로프는 정의의 부재 상황을 전제한 라인홀드 니버와는 달리 사랑 안에서 수행되는 정의를 생각한다. 그는 ”내가 당신의 가치에 걸맞는 방식으로 당신을 대한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을 정의롭게 대하는 것“(166)이라고 선언한다.    









 


행복의 기원. 본질과 현상에 게재

박충구의 책읽기

『행복의 기원: 삶의 과정을 바라본 복지학』(The Origins of Happiness: the Science of Well-Being over the Life-Cours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8, 325p).

이 책은 파리 경제학 대학원 교수 Andrew E. Clark, 영국 런던 경제학 대학원 교수 Sarah Flèche,  동 대학 원로교수이자 『번창과 행복』 (Thrive and Happiness)의 공동저자인 Richard Layard, 그리고 위릭 경영대학(Warwick Business School) 행동과학분야 교수이자 『행복의 방정식』(Equation of Happiness)의 저자인 Nattavudh Powdthavee, 그리고 메사츄세츠 공대의 박사후보생 George Ward를 포함해 모두 다섯 명의 사회과학자들이 공동 집필했다. 이 책은 영국, 미국, 독일 , 그리고 오스트리아에서 생산된 생애 단계별 사회과학적자료를 분석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종래의 지엽적 행복론에 비하여 이 책의 내용은 다분히 종합적이고도 입체적인 이론을 결과하고 있어서 흥미를 가지기에 부족함이 없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찾으면서도 정작 자신이 찾고 있는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심지어 행복에 관한 다양한 이론이 담겨있는 책을 읽어 보아도 행복에 관한 충분한 지식을 얻기가 쉽지 않다. 이처럼 행복에 대한 이해가 어려운 까닭은 여러 이론들이 각기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별개의 이론을 전개해 왔기 때문이다. 아마도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오늘날까지 설득력을 가지는 행복 이론은 인간의 주관적 감정을 중시하는 지복주의(hedonism)라 할 것이다. 지복주의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얻으려는 삶의 목적을 주관적인 즐거움(pleasure)에서 찾으려 했다. 여기서 행복한 삶이란 즐거운 감정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극소화하는 길에서 찾을 수 있다는 보편적인 공리가 나왔다.
그러나 지복주의의 그 주관적인 즐거움에 대한 이해는 금욕적인 이해에서부터 일시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등 그 폭과 다양성이 상당하여 행복에 대한 보다 합리적인 이해를 찾으려는 노력이 있었다. 18세기 이후 형성된 욕망 충족 이론이다. 이 이론은 우리의 오랜 경험에서 형성된 삶의 욕망 목록에 따라 그것을 성취하는 데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여겨 비교적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인 행복이론으로 알려져 있다. 행복이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데에서 얻어진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 이론은 지복주의가 주관적인 행복의 총량을 중시하는 데 비하여 과거의 경험에서 나온 행복 목록에 제한받고 있다는 약점이 있다.
근래 들어 재래의 이론들에 더하여 보다 의미론적이며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행복을 규명하려는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다. 다니엘 헤브론(Daniel Haybron)의 감정 상태이론(emotional- state theory)이나 다니엘 카네만(Daniel Kahneman)의 객관적인 행복이해의 구조는 바로 이런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지복주의가 즐거운 삶(pleasant life)에서 행복을 찾았다면, 욕망이론은 좋은 것과의 관계(good life)에서, 그리고 심리학적인 감정을 중시하는 이론은 의미있는 삶(meaningful life)의 구현에서 행복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이 세 가지 행복론을 종합하여 보다 근원적인 행복을 “충만한 삶”에서 찾으려는 흐름도 생겨났다.
이 책은 이런 재래의 행복 이해와는 다소 성격이 다른 방법으로 인간의 행복을 찾는다. 행복이 무엇인가를 찾는 연역적 방법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축적되어 있는 과거의 경험적 데이터를 분석함으로써 보다 객관적인 양적 언어로(2쪽)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성향을 규명 했기 때문이다.

색다른 종합적 관점
저자들은 재래의 행복론으로 만족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하여 과거의 행복론은 각기 특정한 관심에 제한된 행복이론이라는 성격과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인간의 행복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인을 개별적으로만이 아니라, 그리고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무엇이 인간에게 행복을, 삶의 만족을 느끼게 하는가에 대하여 질문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방법은 삶에 대한 만족도, 자신의 불만이나 만족을 담고 있는 감정이나 기분을 계량화함으로써 다분히 지복주의적인 평가 기준을 적용했다.
따라서 이 책은 방법론적 측면에서 몇 가지 매우 흥미로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이 책을 쓴 다섯 명의 공동 저자들이 전통적인 이론에 대한 사유와 분석보다 실질적인 오랜 기간 동안 축적된 사회적 데이터를 분석했다는 점이다. 이 책은 특히 1970년에 태어난 집단, 그리고 1991년에서 1992년에 태어난 아이들을 추적한 영국의 출생집단연구 자료(Birth Cohort Studies)를 제공받아 분석했으며, 이 밖에도 미국, 독일,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호구조사 및 사회 집단에 관한 다양한 자료를 분석함으로써 행복이 무엇인가 라는 관념적 개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라는 경험적 자료를 살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둘째, 이와 같이 이 책은 이미 연구된 사회과학적 자료를 분석했지만 그 결과는 다분히 이전의 행복론 보다 종합적인, 그리고 객관적으로 수치화한 평가를 통하여 심리학적인 행복의 비밀을 찾고 있다는 데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이 행복의 신비는 개인의 전 생애에 걸쳐 사회적 환경과 상호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 이 책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다분히 개관적으로 규명하여 하나의 행복 지도를 그려내고 있다는 데 커다란 장점이 있다. 그 결과 이 책은 마치 유전자 지도를 보고 유전자 치료를 하듯 사람의 행복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들을 표적으로 삼아 새로운 실험을 시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이 규명하고 있는 인간의 행복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들은 각기 행복의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에 이런 요소들을 규명한 행복 지도를 이용하여 사람들이 보다 많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회 정책을 세워나간다면 결과적으로 개인이나 사회에서 사람이 누리는 행복의 총량을 늘여나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안내 표지로 기능할 수 있다. 이 책은 단순히 인간의 행복을 총체적으로 규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처럼 사회 정책적 관점에서 사람들이 보다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구상할 수 있는 행복의 사회 공학적 지평까지 그 관심의 폭을 넓혔다.

구조와 내용
이 책에는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이 전제되어 있다. 즉, “인간의 생애 주기 동안 - 유아기에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무엇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15쪽)라는 질문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행복을 결과하는 우리 삶의 요소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저자들은 이 책의 1부에서 어른의 삶에서 행복을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살피고 있다. 앞의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이 책은 1970년생 영국의 출생집단연구 자료를 분석하며 그 답을 찾았다. 분석 항목은 어른의 삶의 만족도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들로서 소득, 교육의 정도, 직장, 배우자와의 관계, 마음과 몸의 건강, 범죄, 사회규범과 제도, 노후의 행복 등을 선정했다. 이런 요소를 분석하면서 이 책은 어떤 요소가 삶의 만족을 가져오는 데 더욱 큰 영향을 끼치는가를 살폈다. 그리고 각 요인들을 분석하면서 각 요인의 영향을 가감하는 요소로서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비교의식과 적응능력도 살폈다.
성인의 행복을 분석한 결과(Adult- outcomes), 저자들은 기존의 행복이론이 가지고 있었던 관점과는 상당히 다른 요소를 찾아냈다. 사실 오랜 동안 사회정책의 관점에서 인간의 행복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치는 것은 경제력, 곧 금전으로 간주되어 왔었다. 하지만 근래에 이르러 사람들은 경제 성장이 인간의 행복과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소득이 아닌 보다 더 깊은 요인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개인 생활의 주된 목표를 부의 획득이나 소유에 두었던 태도를 버리고 우리가 얼마나 삶을 즐기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행복을 평가하려 하였다. 따라서 국민의 행복을 창출하고 불행을 극소화하는 데 관심을 가진 정치가나 사회 정책 입안자들은 이런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관심은 두 가지 측면에서 명료한 답을 얻는 데 실패했다. 첫째는 경제적 요인이 인간의 행복과 상관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무엇이 행복을 증진하는 가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삶을 향유하는 데에 행복이 있다고 본다면 삶의 향유에 대한 평가기준이나 조건이 보다 명료하게 밝혀져야 했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둘째는 새로운 대안적 사고를 찾으면서도 사회 정책 입안자들은 여전히 그 평가 기준을 돈(비용)과 효용성이라는 관계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 정책의 유불리를 효용론적인 측면에서 분석할 수밖에 없지만 그 평가 기준은 삶을 향유하는 것 자체가 아닌 돈이라는 기준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소득을 증대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교육에 투자하고, 더 나은 소득을 얻는 데 많은 관심을 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인간이 찾는 행복의 기원이 보다 더 높은 소득을 얻는 데 있을 것이라는 일반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한다는 연구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성인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의 크고 작은 요인들을 살피면서 얻은 소결론은, 적어도 성인의 삶에서 행복은 단순한 소득의 증대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성인에게 가장 지대하게 영향을 끼치는 요인은 성인의 정신세계를 형성해온 뿌리였다. 그것은 성인이 어렸던 아동기에 받아 형성되어온 정신적 건강이었다. 정신적 건강은 일반적으로 신체적 건강 보다 더욱 큰 영향력을 가진 것으로 판명이 되었다. 아이의 정신 건강에 심원한 영향을 끼치는 요소는 1차적으로 어머니의 정신 건강, 그리고 이에 더하여 초, 중등 학교생활과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영향이었다. 결국 성인의 정신 건강에 근원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은 아동기에 받은 정신 건강의 질이라는 것이다. 이 책 1부는 아동기부터 형성된 성인의 정신 건강이 행복의 연원일 것이라는 하나의 결론에 이르고 있다.

이 책 2부에서는 어린이가 행복을 느끼는 요인을 부모의 사회적이며 심리적인 특성에서 찾았다. 예컨대 부모의 소득, 교육정도, 양육방식, 조화로운 가족, 그리고 좋은 정신 건강 등이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아이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 다분히 학교생활과 교사와의 관계에서 행복을 느끼거나 그렇지 못하는 등 교육환경에 영향을 받게 되는 데 이 연구는 이 영향을 매우 중차대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영향(에 유전적 요인을 더하여)은  아이가 자라면서 세 가지 주요한 삶의 차원 – 즉 지적, 행동적, 그리고 정서적 발달을 형성하난 데 크게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이렇게 형성된 것을 일러 이 책은 “아동기의 결과물”(child outcomes)이라고 개념화 하였다. 아동기의 행복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부모가 지난 사회적 특성들과 학교생활인 것이다.
사실 그동안 인간의 행복에 대한 이론은 대부분 성인의 즐거움, 성인이 생각하는 행복 리스트, 혹은 유의미한 삶의 가치 등과 같이 대부분 성인 중심적인 것이었다. 이와는 달리 이 책은 부모가 아이의 행복, 행동, 그리고 학문적 수행 능력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하여, 그리고 학교와 선생님들은 부모와 비교하여 어떻게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는가에 대하여 아이가 가지고 있는 기분과 감정을 분석했다. 앞선 1부에서 성인의 전체 삶의 각 단계에서 행복을 느끼게 하는 요인을 추적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아동기의 정신건강이 성인의 행복에 다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에 이른 것이다.
성인의 경우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조건들은 교육, 수입, 직장, 배우자와의 관계, 범죄유무 등이었던 반면 아이들이 행복을 느끼는 구조는 가족의 수입, 일하는 부모, 부모역할과 부모의 정신적 건강, 가족갈등, 그리고 학교생활 등 이었다. 따라서 어린 시절 아이의 행복을 가늠하게 하는 것은 가정의 경제적 정도, 아버지의 취업 상태, 부모의 육아 유형, 그리고 가족관계의 안정성과 엄마의 정신건강이었다. 가정의 경제적 여건은 아이의 지적발달에 상당부분 영향을 주게 되는 데 좋은 가정의 경제적 조건은 부모의 높은 교육과 상관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의 행동발달은 개인적 삶과 친밀성에 영향을 받으며, 아이의 정서적 발달은 가족 구성원의 정신적 및 육체적 건강이 주요한 동인(動因)이 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러한 내용을 이 책은 성인기의 결과(Adult outcomes)에 상응하는 아동기의 결과(child outcomes)라고 명명하고 있다. 아동기에 결과하는 아이의 행복은 다분히 어른들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이어서 일종의 사회적 유전자 결정론에 가까운 이해라고 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아이는 자신이 선택하기에 앞서 특정한 사회, 경제적 및 정신적 조건을 가진 부모에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반면 부모 밑에서 형성된 어릴 때의 정신 건강은 아이가 어른이 되어 가지는 정신 건강의 성격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다. 이런 이유에서 심리학자들은 11살 정도 아이를 보면 그 아이의 미래의 삶을 대략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 아동기는 부모에게 깊이 영향을 받고, 어른은 자신의 아동기의 정신적 건강에 행복의 연원을 두고 있는 셈이다.

이 책 3부에서는 앞서 논의한 모든 정보에 근거하여 보다 행복한 어른, 행복한 아이가 살아갈 수 있는 요인들을 강화하기 위한 사회 정책 형성 과제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사회 정책 입안자가 어떤 시각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사회 정책의 방향은 크게 달라진다. 영국 수상이었던 대쳐(Margaret Thatcher)는 영국인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부를 증진시키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신자유주의 정책의 선봉장 노릇을 했다. 그 결과 그녀는 사회 정책을 입안하면서 부를 증대시킬 수 있는 수단인 기업을 편들었고 국민의 건강, 아동보호, 노인 복지, 법과 질서 유지, 환경 개선 등에 사용되는 복지 예산을 소비성 경비라 간주하여 축소시키는 정치가가 되었다.
반면 독일 총리 메르켈(Angela Merkel)은 대처의 방법과는 달리 “국민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가”에 따라서 사회정책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211쪽), 그 결과 3선에 성공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다분히 메르켈의 관점을 응용하여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생애 주기를 걸치며 무엇에서 행복을 느끼고 중요하게 여기는가를 과거의 경험적 데이터를 살핌으로써 그 행복의 뿌리를 찾으려 했던 것이다.
사회 정책 입안자나 정치가의 입장에서 이 연구가 밝히고 있는 행복의 장단기적 요인들을 규명하고 그 개별 요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격에 따라 긍정적인 측면을 강화하고, 부정적인 측면을 지양하는 목표에 따라 사회정책을 입안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개인이 얻는 행복은 개인의 노력이나 기여에 앞서 일종의 주어진 요소, 즉 가정환경이나 부모의 정신적 건강, 그리고 사회적 자원에도 다분히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동시에 한 인간의 행복을 형성하는 요인을 사회 정책으로 수정하거나 교정할 가능성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행복은 오늘날 개인의 영역만이 아니라 국가나 사회 정책의 과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맺는 말
일반적으로 부유하면 더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은 일종의 환상인 셈이다. 행복은 돈으로 사거나 학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행복은 어릴 때부터 행동발달 과정에서 정서적 안정감을 누리며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자란 사람이 성인이 되어 누리는 열매와 같은 것이다. 물론 행복은 돈도, 사회적 지위도, 관계의 안정성도 모두 필요로 한다. 하지만 행복을 불러오는 요소로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릴 때부터 형성해온 정신적 관계, 즉 부모에게, 특히 어머니, 학교생활 그리고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정신적이며 관계적인 영향이라고 이 책은 주장하고 있다.
만일 이러한 이해구조를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더욱 증진시키기 위하여 삶의 주기 각 단계에 어떻게 우리가 행복 요인에 개입하거나 조정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성인기에 우리는 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하여 각 행복의 요인들을 어떻게 통제하고 조정하거나 개입할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혹은 아동기에 형성되는 결과에서 보다 긍정적인 요소를 증대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아이들의 삶에 개입할 수 있을까도 생각해 봐야 한다. 혹은 아이의 가족관계나 학교생활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을 것인가 등을 고민하며 우리는 교육, 사회, 정치적인 차원에서 보다 나은 정책을 세우는 과제를 효율적으로 수행해야 할 과제를 직면해야 한다.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새로운 시각은 돈과 교육중심의 정치-교육 철학보다 한 아이의 정서적 건강을 잘 가꾸어 주는 집안, 사회, 나라가 더 건강하고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게 한다는 것이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영향을 받는 아이의 정신세계는 성인이 되어 얻는 행복의 연원인 셈이다. 이 책을 읽으며 느낀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저자들이 사용한 원 자료가 비교적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선진국에서 얻은 것이라는 점이다. 경제적 안정과 사회 복지가 잘 구비된 사회에서의 행복론과 가난한 나라의 행복론은 유사성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충분히 교육받지 못한 부모에게서, 좋은 사회적 자원을 가지지 못한 세계에서 태어난 이들의 행복은 어떻게 분석되고 이해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박충구의 죽음의 윤리 1. 기독교사상 연재

박충구의 죽음의 윤리 이야기 1

“통계로 본 현대인의 죽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 시편 90: 12

죽음에 대한 기억
나에게는 인간의 죽음에 관한 여러 기억이 중첩되어 있다. 내가 사람의 죽음을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무렵이었다. 우리 집 건너 방에는 뇌졸중으로 몸의 절반이 마비된 외할머니가 늘 앉아 계셨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오면 나는 제일 먼저 할머니 방으로 가서 인사를 드리곤 했다. 할머니는 인사를 받으실 때마다 함박웃음을 보이시곤 했는데 그 때마다 할머니 입에서 침이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는 침을 가제 수건으로 닦아 드리면 할머니는 행복해 하셨다. 내게 손녀가 생긴 이후에야 왜 할머니가 나를 그리도 반기며 즐거워하셨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할머니 방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슬픈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온 몸으로 직감했다. 어른들은 내가 할머니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그 후 할머니가 늘 머무시던 그 방은 텅 비어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죽음이란 슬픈 것이며 자리를 텅 비우는 것이라는 느낌을 가졌었다. 할머니는 나의 어머니에게 슬픔을 남기고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다.
그 후 나는 내가 살던 동네에서 이따금 어느 집 대문 앞에 등불이 켜지고 짚신과 음식이 놓여있는 것을 보면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초상난 집 마당에는 멍석이 깔리거나 텐트가 쳐지고 문상 온 이들이 모여 음식을 나누는 것을 보았다. 동네마다 누군가가 죽으면 장례 절차를 처리해주는 장의사 집이 있었고, 아이들은 그 장의사 집 근처에 가는 것을 꺼려하곤 했다. 요즈음에는 이런 풍습이 거의 사라져 볼 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신학교를 다니던  1970년  대까지만 해도 이런 풍경은 낯설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누군가의 장례를 치른 것은 1979년 2월경이었다. 신학 수업을 마치고 첫 목회지로 부임했던 경기도 가평 북면의 목동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동네에서 폐결핵을 오래 앓던 이가 세상을 떠났는데 아무도 그의 시신을 수습하는 이가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가 병을 앓기 전에 교회에 나온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나는 교인들과 의논한 후 그의 장례를 치러주기로 결정했다.
그가 살던 오두막을 찾아 갔더니 그의 주검이 숨진 모습 그대로 차가운 방에 누어있었다. 그가 폐결핵을 앓았다는 이유로 아무도 나서질 않아 내가 직접 그의 몸을 알코올로 닦아내고 수습을 했다. 그의 장례에는 손님도 없었고 천막도 쳐지지 않았다. 음식을 마련하여 대접하는 이도 없는 쓸쓸한 장례식이었다. 뒤늦게 아우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그의 형과 의논한 후 여러 절차를 생략하고 그의 시신을 화장했다. 나는 그의 장례를 치르며 인간의 삶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깊이 느꼈다.
죽음 중에는 허망함보다 편안한 죽음도 있다. 2006년 나는 미국 필라델피아 근교에 있는 퀘이커 수도원에서 한 학기 동안 머물고 있었다. 성탄절이 가까운 어느 날 어머니가 위중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귀국했다. 나는 공항에서 어머니가 머물고 계시던 동생 집으로 달려갔다. 저녁 늦은 시간 내가 야위고 야윈 어머니의 차가운 손을 잡았을 때 나는 어머니에겐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온 것을 알았다. 어머니는 말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평생 하나님 신앙으로 살아오신 나의 어머니는 내가 목사 안수를 받자 그 때부터 나에게 하대를 안 하시고 존대를 하셨던 분이다. 그러지 마시라 해도 나를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주의 종이라 여기시는 신앙으로 사신 분이다. 나를 바라보시는 어머니의 눈은 깊고 맑았지만 나는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밤 나는 어머니와 작별을 해야 할 시간이 다가 온 것을 느꼈다. 하여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어머니, 이제 하나님 나라 가실 마음의 준비가 되셨어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나를 바라보시면서 조용히 고개를 끄떡이셨다. 그날 밤 어머니는 잠자듯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 가셨다. 2006년 성탄절 이브였다. 죽음도 하나님 신앙 안에서 받아들인 나의 어머니는 타오르던 촛불이 더 탈 것이 없어 스스로 꺼지듯 숨을 거두셨다. 나도, 나의 어머니도 받아들인 조용한 이별이었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후 나는 나의 의식 속에서 나의 죽음이 멀리 바라다 보이는 느낌을 가지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에는 그 분들에 의하여 나의 죽음이 내 시야에서 가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멀리 있는 나의 죽음을 내가 보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10년이 지나 나는 감신대 기독교 윤리학 교수직에서 정년 은퇴했고, 은퇴와 더불어 나는 나의 죽음에 대하여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그리고 지난 3년간 인간의 죽음에 관한 책들을 읽었다. 이런 독서의 결과를 기상 독자들과 함께 나누려 이 연재를 시작한다.

태어난 생명은 죽음을 맞는다.
인간이 살아있다는 말은 인간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무수한 죽음의 위협을 겪는다. 시편 기자가 “내가 사랑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가 두려워하지 않음은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지키시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은 그가 험난한 삶을 살아내면서 무수한 죽음의 계곡을 지나왔다는 성찰을 담은 것일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 졸지에 사고를 겪어 세상을 떠난 이의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간혹 우리 중의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는 고통스러운 슬픔도 겪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자기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스치듯 여러 번 지나다가 언젠가에는 각기 “자신의 죽음“을 만날 것을 아는 것이다.
오늘도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있다. 지구에서는 일 년이면 약 1억3천만 명 정도가 태어나고 약 5천500만 명이 죽음을 맞는다. 오늘도 이 지구에서는 약 30만 명 정도가 태어났고 약 12만 6천 명 정도가 세상을 하직했을 것이다. 태어나는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새로운 죽음도 추가된다. 우리나라에서는 2,017년 한 해 동안 약 357,700명이 태어났고, 약 285,600명이 사망했다. 사망자가 가장 많은 연령층은 주로 80세 이상의 고령자들이 주를 이루었다. 하루로 환산하면 매일 약 782명 정도가 죽음을 맞는다. 대부분은 우리가 모르는 이들의 죽음이지만 게 중에는 간혹 우리가 아는 이, 혹은 우리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있다.
과거와는 달리,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익숙한 삶의 현장에서 먼 곳, 사람들의 시야에서 가려진 곳에서 만난다. 누군가가 죽음을 맞을 것 같으면 그는 황급히 병원으로 옮기고, 낯선 의료진에게 맡겨진다. 낯선 자들에게 둘러 싸여 마지막까지 사투를 벌리다가 병원 침대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것이다. 이렇듯 대부분의 현대인이 죽어가는 마지막 자리는 자신이 살아가던 익숙한 세계, 함께 삶을 살던 이들의 곁이 아니라, 낯선 병원이 된다. 아리에스(Philippe Ariès)는 과거의 사람들은 죽음을 일상에서 만나 죽음에 길들여지고 익숙했지만 오늘날에는 죽음이 숨겨지고 가려져서 낯설고 무서운 죽음이 되었다고 했다. 과거에는 죽어가는 이 곁에 가족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의료진이 그 역할을 한다. 의료진은 죽어가는 이에게 죽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모든 수단을 강구하다가 그들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에는 죽어가는 이를 두고 병실을 떠난다. 이런 현대인의 죽음을 일러 일종의 의료화된 죽음(medicalized death)이라고 부른다.

신학적 죽음 이해
인간 생명에 대한 최초의 성서적 진술은 창세기 2:7절에 담겨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성서는 하나님께서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어주심으로 최초의 인간이 산자가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니 생명에 대한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다고 여긴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최초의 진술 역시 창세기 2:17절에 기술되어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브와 아담은 뱀의 유혹에 빠져 엄중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선악과를 따먹었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가 정하신 범주를 벗어난 인간에 대하여 로마서 6: 23절은 이렇게 선언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인간의 죽음을 이해하는 기독교적인 방식은 죽음이란 형벌이며, 죄의 값이라는 것이다.
성서는(전도서 12:7)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은 하나님께로 되돌아간다고 언급하고 있어서 사람의 죽음은 오래 전부터 육체의 죽음과 영의 죽음으로 나누어 이해되었다. 사람을 몸과 영혼으로 나누어 이원적으로 생각하는 신학적 전통은 육체의 죽음을 잠정적인 죽음이라 여겼다. 루터(Martin Luther)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이란 실제로 진짜 죽는 것이 아니라 달콤하고 짧은 잠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하여 참된 죽음은 영의 죽음과 파멸과 관계된다.
칼빈(John Calvin)은 죽음의 위협을 매우 현실적인 것이라 여기는 경향을 보였다. 그에게 있어서 육체의 죽음이란 죄를 지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구속받은 이는 죽음의 심연과 저주에서 해방된다. 따라서 죄로 인하여 초래된 인간의 죽음의 위협은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하여 제거된다. 칼빈은 로마서 6장 4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신자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고 가르쳤다. 이 맥락에서 볼 때 칼빈은 영혼의 죽음과 육체의 죽음을 상정하고 있고, 마지막 부활의 날에 몸의 부활이 있을 것을 굳게 믿는다. 결국 죄는 영과 몸의 분리를 통하여 영의 죽음과 육체의 죽음을 불러왔지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는 온전한 영과 육체의 부활을 희망하게 된 것이다.
죽음이 죄의 삯이며 하나님의 분노와 저주의 결과라는 이해는 기독교적 죽음 이해에있어서 그리스도 없는 죽음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죽음 사이에 커다란 간격을 만든다. 한 편은 하나님의 저주의 분노의 결과로 몸과 영혼의 파멸을 초래하지만, 다른 편에서는 부활의 날에 영과 몸의 구원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없는 죽음은 무(無)와 파멸이고, 저주와 심판으로 이어지는 통로다. 따라서 몸과 영혼의 구속이 일어나지 않는 죽음은 저주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죽음은 영원한 축복의 통로가 된다.
죽음은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근심과 두려움을 불러오지만 칼빈은 그것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죽으시고 장사지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음이란 비록 현실적으로 가장 큰 악이지만, 믿는 자는 그 죽음을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하게 되는 데, 그 까닭은 바로 죽음을 거쳐서 우리는 완전한 축복에 이르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주장이다.
이런 교의학적인 죽음 이해는 현대인의 죽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두 가지 결정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오늘날 우리는 “죽음“에 대한 해석 그 자체 보다 더 중요한 주제가 되어버린 ”오랜 동안 죽어가는 몸과 고통“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수명이 길어진 현대인에게 있어서 죽어감에 대한 이해는 죽음에 대한 정의나 이해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둘째, 죽어감의 과정에서는 삶만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까지도 관리해야 하는 과제에 대하여 신학적 죽음 이해는 여지를 남겨주지 않는다. 죽음을 죄의 삵으로 간주하는 신학적 이해는 죽음 자체를 관리해야 하는 현대인의 마지막 과제에 대한 이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사실 죽음은 우리 몸에서 일찍 시작된다. 우리 몸에서는 20대 전후에서부터 오랜 시간에 걸친 죽어가는 과정이 실존적으로 일어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잘 관리해야 하는 책임에 더하여 오랜 기간 죽어가는 과정 역시 인간의 신실한 책임 영역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리 틀린 것이 아니다. 삶과 죽음을 나누고, 삶에 대한 책임만을 다루던 종래의 신학적 이해에 더하여 몸의 죽음과 죽어감에 대한 보다 적극적이며 새로운 이해가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죽어감이 길어진 죽음
그러면 우리 몸의 죽음이란 무엇인가? 신학적인 죽음에 대한 해석 이전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죽음은 하나의 현실적이며, 육체적이고 또한 생물학적인 사건이다. 생명은 우리 몸의 여러 기관의 기능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어서 몸의 기능에 이상이 생기면, 그 결과 생명의 정지, 곧 죽음을 맞게 된다. 과거에는 예기치 못한 감염이나 사고로 인하여 생명이 손상을 쉽게 입어 사람의 수명이 무척 짧았다. 로마 시대에 평균수명이 21세에 불과했던 것은 5세 미만의 아이들의 죽음이 너무나 빈번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5세 이전에 죽지 않고 살아남았을 경우 사람들은 대부분 40세 이상까지 살았다.
이런 경향은 중세기를 거쳐 18세기에 이르도록 이어졌다. 18세기 유럽인의 평균수명이 40-45세로 알려진 것만 보아도 로마 시대나 18세기나 사람의 수명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생명에 대한 과학적 대처방안이 늦었던 우리나라에서는 1940년대 한국인 평균 수명이 남자는  36.4세, 여자는 38.5세에 불과했다. 약 70년 전 까지만 해도 높은 유아 사망률이 사람들의 평균수명을 크게 낮추었던 것이다. 하지만 2018년 현재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수명은 유럽 선진국과 크게 다를 바 없이 거의 80세를 상회하고 있다. 따라서 40세 이전에 죽음을 맞던 시대의 죽음 이해와 80세 이후에 죽음을 맞는 오늘날의 죽음 이해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인류의 장구한 역사에서 수명의 연장이라는 변화는 사실 지난 한 세기 동안 급격하게 일어난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평균 수명은 100년 전과 비교하면 거의 두 배로 늘어났다.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후진국에서는 아직도 평균 수명이 매우 낮은 나라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에이즈가 창궐했던 스와질랜드의 경우 2,011년 평균수명이 31.88세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평균 수명이 80세를 상회한다. 현재 평균 수명이 가장 긴 나라는 일본으로 82.25세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30년대가 되면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수명이 긴 나라가 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수명 연장이라는 변화는 양질의 공중보건, 건강한 식생활, 그리고 의료과학 기술의 발전이 불러온 것이다.
수명이 길어졌다는 것은 단순히 오래 산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인간의 몸은 16세에서 24세 정도에서 성숙의 정점을 이루고 그 이후부터는 신체 각 장기에서 노화가 시작된다고 한다. 현대인은 수명이 길어져 오래 살지만, 또한 오래 오래 늙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쟝 아메리(Jean Ameri)는 “젊어서 죽지 않는다면 우리는 늙어서 죽는다”고 했다. 비록 좋은 위생환경과 좋은 식생활을 누린다 하여도 우리는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노화와 질병의 위협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칼빈보다 24년 늦게 태어난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는 프랑스 대법관을 지냈다. 하지만 그는 37살에 서둘러 은퇴를 하고 평안한 노후를 맞으려 했다. 그가 살던 16세기에는 30대 후반이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야만 했던 그런 시대였다. 그는 나이든 노인의 죽음을 일러 진귀한 죽음이라고 생각했고, 우리가 나이 들어 몸이 노화되는 과정에서 실인즉 우리 몸의 절반이나 삼분지 이는 이미 죽어왔으며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우리는 삼분지 1의 죽음을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서는 16세기의 몽테뉴가 진기한 죽음이라 여겼던 그런 죽음이 너무나 흔한 것이 되어 죽음의 문화 자체를 바뀌고 있다.

노인의 죽음
과거의 죽음 이해는 일반적인 인간의 죽음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 현대인의 죽음, 즉 나이가 들어가고, 몸이 노화되어 신체적 기능이 서서히 주저앉아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가 죽어가는 죽음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노화와 죽어감에 대해서도 진지한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다. 2016년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남성은 70대에, 여성은 80대에 가장 많이 사망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고, 고령 노인의 약 28%가 암으로 사망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지표는 기대수명과 건강수명의 편차에서도 나타나는 데 한국인의 기대수명이 평균 82세인데 비하여 건강수명은 73세다. 한국인은 평균 9년간 앓다가 죽음을 맞게 된다는 의미다. 누군가 오래 오래 건강한 삶을 누리고 있다면 누군가는 더 오래 앓다가 죽음을 맞는다.  
크고 작은 질병에 시달리는 유병기간은 여성이 남성에 비하여 더 길다.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기간은 남성의 경우 약 15년, 여성은 20년에 이른다. 이 유병기간 노인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통로는 노화의 결과로 일어나는 각종 암, 뇌혈관 질환, 그리고 순환기 질환을 포함한 3대 중증 질환과 점점 증가하고 있는 치매로 인한 죽음이다. 이런 현상은 고령화 사회의 전형적 특징이다. 우리나라도 작년에 65세 이상의 노인이 전체 인구의 14%를 상회하는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고령화된 사회에서 급증하는 질환은 치매다. 치매는 유병기간이 평균 9-12년으로 말기에 이르면 자신의 인격과 기억, 인지능력을 모두 상실한 채 몸만 살아있도록 만든다. 치매 역시 남성에 비하여 수명이 더 긴 여성에게서 발병률이 높다.
생애 후기에 도달한 노인들의 경우 자신의 몸과 정신 건강을 관리할 수 있는 여건은  노후 삶의 의미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내는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선진국에 비하면 우리나라 노인들의 노후 대책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우리나라는 OECD 35개 국가 중 66세 이상 노인 빈곤률 1위다. OECD국가 평균 노인 빈곤률이 2,017년 기준 12.6%인데 비하여 우리나라는 근 4배에 이르는 49.6%나 된다. 네델란드 노인 빈곤률이 2% 정도인 것에 비한다면 우리나라는 최악의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런 최악의 상태에 처한 노인 중 일부는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삶의 의미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상실한 채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길을 택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노인 자살률은 우리나라 20대 자살률의 5배, 65세 이상 자살률은 미국의 3.5배다. 독일 노인 1명이 자살하는 동안 우리나라 노인은 4명이 자살하고 있다. 특히 2,016년 80대의 자살률은 놀랍게도 83.7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령화될수록 자살률이 높아지는 것은 경제적 곤궁(40.3%)과 건강문제(24.3%), 그리고 외로움(13.3%)을 극복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노인들이 지배받고 있기 때문이다. 노인의 생명을 보호하는 안전망 사각지대가 우리 사회 도처에 자리 잡고 있다.

나오는 말
40대 전후하여 자신의 죽음을 맞던 시대에 형성된 죽음에 대한 이해는 죽음을 필연적인 자연적 과정,  일종의 저주, 혹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여겼다. 전통적인 신학적 죽음 이해 역시 하나의 사건으로서 죽음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의 수명이 배나 길어진 오늘날 과거의 죽음 이해만으로 현대인의 죽음을 바라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하나의 “사건”으로서의 죽음보다 “오랜 죽어감의 과정”과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우리 신체의 변화, 즉 노화와 질병, 고통에 대하여 보다 심원한 이해와 신학적 해석이 있어야 한다는 요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죽음에 대한 통계는 현대인의 죽음에 관하여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대부분 노화되어, 즉 노인이 되어 죽음을 맞을 것이라는 사실과 그 죽어감의 시간 속에서 우리 중 50% 정도가 각종 중증질환을 겪게 될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과거의 사람들과는 달리 오랜 기간 고통을 겪게 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삶에 대한 책임만이 아니라 우리의 죽음의 과정에서 짊어져야 할 마지막 책임이 무엇인지 보다 깊이 규명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동성애를 바라보는 그대의 시각

동성애 문제에 대하여 경박한 입장을 취하는 이에게
(주의: 긴 글이니 안 읽으셔도 됨)

1. 동성애 문제는 여러 사람에게 상당히 껄그러운 문제가 되고 있다. 동성애를 정죄하자는 극단적인 입장부터, 직접 나서지는 않지만 동성애자를 두려워하는 부류, 동성애자는 무엇인가 비인간이라고 여기며 동성애자를 정죄하자는 소리를 듣고서도 모른 척 하는 부류도 있다. 대부분 침묵하고 있지만 동성애자가 조롱과 비난을 받고 있는 현장에서 물끄러미 바라다보면서 내심으로는 저런 취급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상당히 많다. 정죄론자부터, 분리주의자, 소극적 방관자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 잘 모른다.

2. 동성애 문제는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오랜 동안 동성애에 대하여 정죄의 문화를 형성해온 전통이 겹겹이 싸여있는 문제다. 미개한 아프리카에서는 동성애자라는 것이 확인될 경우 사형을 시키는 나라도 있다. 이렇듯 동성애자는 향한 증오는 오랜 과거에서부터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증오의 뿌리는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범주를 형성하고 동성애자를 비정상으로 분류하는 습성을 낳았다. 비정상은 우리에게 두려운 것이며, 무서운 것이고, 기이한 것이라는 생각에 빠지게 만든다.

3. 혐오가 권력 구조를 옷 입게 되면 폭력이 된다. 혐오는 언제나 그렇듯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향해 가지는 감정이다. 약자의 강자 혐오는 폭력화되기 어렵지만 강자 집단의 혐오는 이내 폭력화되고, 행사되는 강자의 폭력은 정당한 것으로 간주된다. 혐오를 불러오는 대상에게서 우리는 불쾌를 느낀다. 왜 혐오와 불쾌를 느끼고, 왜 우리는 증오의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오랜 기간 학습되어온 정상 비정상의 범주에 우리가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정상/비정상이라는 규정은 약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늘 강자가 약자를 향해 범주화 해온 것이다. 이런 습성을 버리는 일은 쉽지 않다. 약자 편에 서려는 결단 없이 할 수 없다.

4. 예컨대 “동성애자는 항문성교를 하고 더럽다.” “동성애자는 에이즈를 퍼드린다.” “동성애자는 치유될 수 있다” 는 이런 규정화된 표현들은 강자 집단인 이성애자 집단이 동성애자를 규정하는 범주적 표현이다. 동성애는 남성 동성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 동성애도 있는 데 비판자들은 여성 동성애에 대해서는 혐오적 표현을 하기 어려우니 언급을 피한다. 이들은 이성애자는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인격적으로 사람을 사랑하지만, 동성애자는 짐승같은 존재라고 규정하곤 한다. 이성애자 중에는 난잡한 성생활을 하는 이도 있고, 구강 성교만이 아니라 항문 성교를 하는 이도 있건만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모른 체 한다. 이성애자는 다양하고 개별적으로 상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동성애자를 향한 비판자의 규정은 동성애자를 기이하고, 추하고, 더럽고, 부도덕하다는 규정으로 일괄하여 일반화 한다. 이렇듯 편견을 조장하면서 편견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이들이 병든 자다.

5. 이는 마치 백인이 흑인 남성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흑인에 대한 백인의 공포는 흑인은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며, 본능적이어서 백인 여성을 강간할 수 있는 잠재적 범죄자라고 여겨온 역사의 산물이다. 백인이 흑인에게 가한 제도적 폭력, 행정적 폭력, 심지어 인격적 폭력이 엄청남에도 불구하고 백인은 흑인 남성을 두려워한다. 흑인 개인의 인격이나 덕목이나 교양이나 학식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흑인 일반에 대한 괴이한 대상화는 흑백 갈등의 원죄적 구조를 생산해 왔다. 이런 기이한 대상화로 인하여 오랜 기간 흑인들의 인권이 박탈되고 비인간 취급을 받아왔지만, 아직도 여전히 한 해에도 수백 수천명의 흑인들이 인권을 유린당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이슬람에 대한 공포도 그 성격은 마찬가지다. 이슬람을 범죄 집단화하는 논리를 경건한 자들이라 자칭하는 이들이 전파시키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나는 동성애자를 향한 온갖 험담을 유포하는 일반의 공포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6. 동성애자를 향하여 심판하고 저주하며, 비인간화하는 기독교인들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이들은 동성애자의 인격과 삶과 사랑과 눈물은 보지 않는다. 그저 동성애자는 비정상이라는 범주적 이해를 가지고 그들은 규정할 뿐이다. 그들이 자기 자신과 동일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점에서 동성애자가 병든 것이 아니라, 편견에 쩔어 자기와 다른 이의 인격과 삶을 매도해 버리려는 이들이 병 들었다고 생각한다. 병든 집단이 다수이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병 들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동성애자를 향하여 불쾌와 증오와 혐오를 가지는 자기 자신이 동성애자를 두려워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7.나는 열광적으로 혐오를 나타내는 이들은 범죄적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사유의 결핍을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경박한 이들이다. 자신과 다른 존재를 보면 경악하는 가벼운 존재인 셈이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그들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와 전통 속에서 생산된 감정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할 능력이 없다.  누군가를 정죄함으로써 이들은 자신의 순수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순수는 이미 혐오와 비인간성으로 오염된 것이다. 비열한 증오의 유산을 나누면서 증오의 유포자, 생산자가 된 이들은 자신들이 보다 순수한 신앙의 보존자라고 여긴다. 이런 자들은 그저 비인간화된 교조주의자 아류일 뿐이다.

8. 나는 비인간화된 교조주의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사유능력이 취약하고, 오류를 인식할 능력이 취약하여 교육이나 설득에 의하여 쉽게 수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교조주의자들이 동성애자들을 향하여 던지는 포악한 매도, 비인간화를 못 본 체 하는 부류들이 더 무섭다. 이들은 교양과 평화를 지키고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인즉 포악한 교조주의자들에게 포악한 행위를 하도록 조장 방조하는 관객이다. 관객이 많을수록 저들은 더욱 포악해 진다. 결국 이들도 포악의 확산을 조장하며 내심 편안해 하는 것이다. 다소 지성적이고, 다소 인격적인 제스쳐를 취하고 있지만 이들의 내면은 교조주의자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혐오하는 혐오스러운 이들이다.

9. 나는 동성애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그럴 권리가 내게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성애자들이 동성애자를 못살게 구는 것은 도덕주의가 아니라 명료한 범죄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포악함은 마치 나치가 아리안인의 순수인종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다양성을 비정상이라고 여기고, 그 다양성을 제거해야 순수 아리안 민족 혈통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포악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이웃이 동성애자라 하여 두려운가? 두려워하는 그대가 인식과 실천에 있어서 멍청한 것이다.  동성애자 때문에 근심스러운가? 그렇다면 그대도 나치와 다를 바 없다. 획일화된 인간 범주를 따라 스스로를 정상 상대편을 비정상이라고 내심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대는 두렵고 근심스러운 것이다.

10. 다양성과 다름을 수용할 수 없다면 그대는 병든 인간이다. 아무리 교양과 신앙으로 위장하고 있어도 그대는 기독교 나치와 다를 바 없다. 사람을 차별하고, 매도하고, 심지어 추방하고, 권리를 빼앗고, 인격적인 살해를 마다하지 않는 그대가 나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공포와 근심은 결국 그대의 비인간성이 불러오는 것이고, 그런 성향을 지닌 그대는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된 편견에 무비판적으로 동의해온 가벼운 사람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만일 동성애자가 범죄를 저질렀다면 이성애자와 동일하게 그를 법적으로 심판하면 될 일이다. 다만 성적으로 그대와 같지 않다고 하여 그들을 비인간화할 권리는 나에게도 그대에게도 없다.

11. 소수자를 편드는 일은 포악한 다수에 의해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된다. 나는 성서의 예수는 소수자들 편에 서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구약의 계약법전의 약자 보호법도 사회적 소수를 옹호하고 있지 않은가? 성서가 이성애자들만 편들고 있다고 나는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의 다양성은 이성애자만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섭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는 악어나 맹수류와도 우리는 더불어 살아야 한다. 인류의 존속을 위하여. 동성애자가 소수라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까 생각할 때도 있다. 어찌 생각하면 하나님은 더 많은 이성애자를 내시는 것 같으니 말이다.

12. 동성애자가 동성애를 하는 것이 개인적 의지의 선택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퍽 많다. 그대라면 그대와 같은 포악한 자들의 비난과 정죄의 대상이 될 그런 존재가 되고 싶은가? 그들이 동물적인 성적 쾌감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보는가? 그런 견해는 그대의 추악한 상상력의 결과일 뿐 사실과 다르다. 그대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면서 왜 그들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는 모두 고귀한 인간이다. 성적 취향과 성향이 비록 달라도 피차 고귀한 인간으로서 상대를 바라보는 것이 보다 기독교적인 것이다. 이성애에서도 행위자의 인격에 따라서 다양한 표현이 나온다. 배반도 있고, 난봉꾼도 있고, 심지어 성폭행범도 있다. 그런가하면 신실한 사랑을 하는 이도 있다. 이성애자들의 세계나 동성애자들의 세계 나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내 잣대를 가지고 선/악, 정상/비정상으로 나눌 권한이 없다고 생각한다.

13. 나는 성애와 관련하여 정말 나쁜 것은 일방적인 성행위, 곧  성추행과 성폭행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비열한 속임수를 행사하며 상대를 인격적으로 배반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이성애자 목사가 불륜을 밥먹 듯 하고, 동료 목사의 아내를 성폭행하고, 위협 공갈로 성폭행을 수년간 저질러 온 사례도 있다. 이런 비열한 행위를 한 자가 동성애를 비난함으로써 스스로를 순수한 신앙의 옹호자로 자처하거나 인정받으려 하는 것은 매우 엮겹고 추악한 일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개인의 성향과 기호에 따라 다르다. 다만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범주 안에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만적이거나 폭력적인 성애는 가장 비인간적인 행위다.

14. 교회는 증오의 공급자나 공모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이라면 증오를 신앙으로 미화하는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동성애를 증오한다고 하지 않으면 동성애를 지지하느냐고 묻는 천박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동성애자들은 지금 그대의 재판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아야 할 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대와 같이 자유로운 인격이고, 인간이며, 정의와 평화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이들이고, 무엇보다 이성애자들보다 훨씬 고된 사랑을 하는 이들이다. 그대들 앞에서 그들은 자신을 숨겨야 하고, 위협과 공포를 느끼고 있는 이들이다. 혐오와 증오를 품고 있는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런 소수자를 향하여 돌을 드는 그대가 내 눈에는 비인간이다.

15. 마지막 이야기로 이 두서없는 글을 마치려 한다. 2016년 독일 출판협회의 평화상을 수상한 사람은 여성이며 동성애자다. 그녀의 이름은 캐롤린 엠케, 기자이자 철학자이며, 작가로서 살아오면서 국가 폭력, 정치적 폭력에 희생된 이들을 취재하여 기사를 써왔다. 독일 쉬피겔 잡지에 가장 많은 기고를 해온 그녀는 독일의 최고 지성에게 수여하는 독일 출판협회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대들 같으면 동성애자라 하여 돌을 던져야 할 대상에게 독일 지식 사회는 지성인에게 수여되는 상 중에서 가장 영예로운 상을 준 것이다. 이 상은 오래 전 칼 야스퍼스가 받았던 상이다. 왜 그들은 동성애자를 정죄하기는커녕 그에게 최고의 평화상을 수여 했을까?

16. 이 평화상을 수여받는 자리에는 독일 대통령도 참석했다. 상을 주는 출판협회 회장은 엠케가 독일 사회에서 증오의 문제를 깊이 다루고 다원성의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었다고 했다. 이 상을 받는 자리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를 획일적으로 바라보며 염려하는 이들이 증오를 생산한다.” 나는 한국 기독교가 우물안의 개구리들을 양산하는 나쁜 기독교에서 어서 벗어나기를 기대한다. 엠케의 책 중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은 " 증오에 반대한다"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혐오사회>라 번역되었다.  동성애를 증오하는 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사랑을 배운 기독교인이라면 증오의 확산자가 아니라 증오와 부단히 싸워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