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March 26, 2008

Park No Ja's view of "색과 계"

친일파도 "매력남"일 수 있다

만감: 일기장 2008/03/26 02:48

/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중국 정부가 영화 <색, 계>의 주연 여우이었던 탕웨이 (湯唯)에게 "영화에서 애국자들을 모독하고 친일파들을 찬양했다"는 죄목 (?)으로 차후 영화 출연을 금지시키는 강제로 영화계에서 퇴출시키고 말았다고 합니다 (http://www.cbc.ca/arts/film/story/2008/03/08/lustcaution-ban-tangwei.html?ref=rss). 글쎄, 티베트 독립 시위를 유혈 진압한 일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중국의 실체를 참 분명하게 보여주는 일입니다. 극단적 자본주의로 대다수 민중에게 이루 다 말하기 어려운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중국의 공식 이데올로기 역시 극단적 민족주의입니다. <색, 계>의 죄악 (?)이란 바로 이 극단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작지만 큰 도전장을 던졌다는 것이지요. 이 영화에서는 주역이란 두 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이지요. 한 명의 남자인 친일파 리 (易默成)가 또 한 명의 남자인 애국 학생 쾅유민 (鄺裕民)에게 "조국 배신자"로 지목돼 제거의 대상에 오르지만, 결국 그 반대로 친일파 리가 애국자 쾅을 잡아 죽이고 맙니다. 애국자 쾅이 배신자 리를 제거시키기 위해 여학생 원 쟈지 (王佳芝 , 탕웨이 배역)에 접근하여 그녀를 애국적 수사로 자극시켜 "미인계"의 주인공으로 만들려 하지만, 원 쟈지와의 섹스에 탐닉하게 된 반민족 분자 리가 결국 선물 공세 등의 방법으로 원 쟈지로부터 자백을 끌어내 원 쟈지를 포함한 일체 그룹을 다 총살케 하고 만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며는, "친일"과 "애국"의 차이야 있지만 원 쟈지를 "미끼"로 사용하려 하는 쾅도 그녀와의 섹스를 십분 즐긴 뒤에 그녀의 자백을 이용해 애국자들을 일망탕진한 리도 다 한 명의 여성을 이용한 남성들뿐입니다. 두 남성의 이데올로기야 서로 상반되지만 "배신자 제거를 위해서" 내지 "섹스와 지하 운동 관련 수사를 위해서" 여성을 마음대로 이용해도 된다는 생각은 친일파와 민족주의자에게는 똑같습니다. 원 쟈지가 리에게 자백을 한 이유 중의 하나가 뭔가요? 그의 선물 공세에 넘어간 측면도 있지만, 남성 "애국자"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있는 "인간 미끼", "인간 병기"로서의 자신의 신세가 가련하기도 했던 것이지요. 결국, 민족과 반민족을 넘어서 이 영화의 남성 주인공들은 일단 근본적으로 여성을 함부러 이용하는 마초들입니다. 민족주의라고 해서 여성을 꼭 자율화시키는 것은 아니지요. 오히려 이 영화에서처럼 "민족적 대의명분"의 도구로 잘 이용하는 것은 더 전형적입니다. 이 영화는 그러한 측면에서 민족주의의 남성우월주의적 본색을 고발하는데, 중국 정권으로서는 이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정권인지는 알 만한 일이지요.

중국 정권의 입장에서 보면 반민족 분자 리가 탕웨이와 "맛이있는 섹스"를 누리는 것은 아주 비위에 거스르는 일입니다. 친일 반민족 분자라면 마땅히 극악무도한 고문 기술자로만 묘사돼야 하는데, 탕웨이와 아주 환상적인 체위를 두루 다 실험해보고 선물을 마구 갖다주는 리는 차라리 "매력남"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원 쟈지의 자백이 나오자마자 당장 탄압자로 돌변하지만 말씀입니다. 어쨌든 친일파와의 섹스가 너무 좋아 즐거운 비명이 나오는 장면이란 중국 정권의 입장에서 "불순한" 것입니다. 원 쟈지를 "인간 미끼"로 만들려는 애국자 쾅의 공명심, 야망이 보이는 부분도 그렇고요. 그런데 조금 넓게 보면 "진보"는 꼭 인간적으로까지 완벽해야 하고 "반동"은 꼭 인간적으로까지 패악하기만 한, 거기에다 여성에게 즐거움을 줄 줄 모르는 무능력한 인물이어야 합니까? 글쎄, 그러한 등식은 없는 것 같습니다. "진보"란 역사 발전의 논리를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파악하여 이 논리대로 운동하는 걸 의미하고, 반동은 이 논리를 거역하는 걸 의미하는데, 역사의 논리도 꼭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이를 따르는 이들도 꼭 선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 시대 치고는 김옥균과 서재필, 그리고 그들의 행동대이었던 이규완은 "진보"이었지만 갑신정변 때에 그들이 궁궐에서 보수파 대신들을 도륙했던 장면은 잔인하기만 했지요. 인간적으로 봐도 김옥균이나 서재필은 "자비심"보다 공명심과 성취욕, 야심 등은 훨씬 많았습니다. 반대로 보수파 최익현은 훨씬 더 충직하고 충실한 인물로 보입니다. 레닌은 인간적으로 아름답기만 한 사람이었나요? 천만의 말씀, 똑똑하고 민주적 성품이었지만 권력욕과 야심도 아주 컸습니다. 이완용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만인의 증오 대상이지만, 이재명 의거 때에 자신을 몸으로 막아 결국 이재명의 칼에 죽은 인력거꾼 박모의 가족에게 아주 후한 보상을 주는 등 "의리파"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역사적 행위를 변명하려는 건 절대 아닌데, "역사적 행위"와 그 행위자로서의 "인간"의 관계는 아주 미묘하고 복잡합니다. 역사의 죄인은 꼭 유교적인 "역신전"에서 보이는 패륜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색, 계>에서는 여성을 "미끼" 내지 "성적 괘감의 도구"로 삼은 남성들도, 그 남성들에게 이용 당했다가 바보스러운 "반란"으로 모든 것을 마감한 여성도 "완전히 긍정적인" 인물들이 아닙니다. 선과 악이 뒤섞인 것이지요.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은 "회색"을 민족주의자들이 아주 싫어합니다. 민족주의자들에게는 흑과 백 이외의 색깔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CK's comment: 박노자씨의 글 제목은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민족주의자나 친일파나 한결같이 마쵸적 본성에 물들어 있으면서 동시에 비인간적이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으니까요. 여성의 몸을 쾌락과 정치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남성문화의 단면을 잘 드러냄으로써 친일파가 아니라 사적 이해관계와 민족적 이해관계를 두고 피나게 싸우는 마쵸들의 세계를 보여준 것이 아닐까요. 박노자씨의 글 제목은 결국 남성 마쵸들의 세계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글 제목을 통하여 관능과 쾌락을 따라 사는 동양 여성의 가벼움과 어리석음을 비난하고 있는 또 하나의 야유가 아닐런지....

Tuesday, March 18, 2008

Rosemary Ruether and Her Liberation Theology


해방신학 이야기 3


로즈메리 류터의 해방신학

지난 3월 8일은 여성의 날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여성 참정권 운동의 출발점을 기념하여 여성의 날을 제정한 후 꼭 100년이 된 셈이다. 지난 2008년 2월 27일 미국 뉴욕의 유니온 신학대학교 이사회는 예일 대학 신학부 여성 교수인 죤스(Serene Jones)교수를 총장으로 선임했다. 그리고 미국 민주당은 2008년 대선 후보로 힐러리 클린톤을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 중의 하나로 추대했다. 이런 사례는 미국의 대학과 정치 세계에서 여성을 차별 배제하는 악습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뚜렷한 징후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런 변화는 성차별의 역사에 저항해온 지난 100년의 여성운동에 크게 힘입었다. 미국 여성신학의 흐름을 주도해 온 신학자들 중에서 특히 로즈메리 류터(Rosemary Ruether)는 다른 여성신학자들과 달리 여성과 신학이라는 협소한 학문적 범주를 넘어 전 세계의 해방신학자들과 연대하면서 성차별, 인종차별, 계급차별 등의 폐지를 위하여 해방의 지평을 넓혀 온 학자다. 이 글은 지난해 10월 미국 베일러 대학에서 열린 해방신학 컨퍼런스에서 발표한 류터의 논문에 근거하여 그녀의 해방신학에 대하여 살펴본다.

위기의 기독교
서구 사회 위기론은 신학과 철학 그리고 역사학 등의 분야에서 2차 대전 이후 거듭 제기되어 온 주제다. 서구 사회의 위기에 대한 비판철학의 해명은 도구적 이성의 비도덕적 오용이라는 주제를 드러냈지만, 여전히 이성은 정치와 도덕이 나누어진 현실에 깊이 개입되어 있다. 비판철학이 도구적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고 비판이성을 동원해도 인간의 도덕적 정당성은 보장되지 않았다. 끊임없는 순환적 비판을 통하여 자기점검을 요구하는 소리도 있었지만 세계는 여전히 합리적 이성이 납득 할만한 수준에서 도덕성이 결여된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오늘의 세계 현실 한 가운데에서 약자들에 대한 지배와 착취와 억압과 소외를 불러오는 현실이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현대 신학과 철학의 주제는 정치와 권력에 대한 비판이 주된 흐름을 이루어 가고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제기한 오리엔탈리즘 논쟁에 이어 후기 식민주의 논쟁, 그리고 제국주의 비판이론들이 대두된 것은 이런 현대의 정신사적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류터의 신학적 사고는 이런 서구의 현대 지성사적 흐름에 정통해 있다.
그동안 서구 중심의 역사가 계속 진보할 것인가 아니면 몰락할 것인가에 대한 불안한 조망들이 여기저기서 논의 되어 왔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21세기에 들어서서 인류역사에서 전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악의 출현을 들어 서구 사회의 위기를 지적한 바 있다. 그녀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상대적으로 방해받지 않고 지속되어 온 서구문명의 근 삼천년의 전통의 흐름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서구 문화의 모든 구조가 몰락하여 그것이 담지하고 있었던 믿음, 전통 그리고 판단기준들이 비틀거리며 우리 머리 위로 무너져 내렸다”고 했다. 서구 사회의 위기를 언급하며 아렌트가 전거로 드는 것은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악의 현실, 곧 홀로코스트 경험이다. 나치의 거대하고 잔악한 악이 출현했을 때 서구의 철학, 신학, 역사학, 윤리학과 예술들은 침묵했고, 방조했으며, 심지어 협력했기 때문이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근 오천만 명이 죽음을 당했고, 나치에 의해서는 1,100만 명의 생명이 죽임을 당했다. 그 중에 600만 명은 유태인이었고, 그 나머지 500만은 사회부적응주의자들로 낙인찍힌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등이었다. 기독교 서구사회에서 일어난 이 학살 사건은 기독교 신학에 대한 비판적 의심을 초래했다.
사실상 서구사회의 위기는 서구 사회의 사상과 법과 도덕적 판단의 초석이 되어 온 기독교의 위기였다. 기독교는 거대한 악의 출현을 인지하지도 못했고, 그 악의 현실을 신의 뜻으로 오역하기도 했다. 이런 위기를 맞으면서도 2차 대전 이후의 기독교 역시 자기 성찰적 비판에 게을렀다. 해방신학 운동이 신학 자체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촉구한 것은 신학적 담론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다. 신학이 인간의 역사와 삶의 전체성을 상실하고 그 일부만을 재현하곤 했던 습성에서 벗어나려면 신학적 방법론의 혁명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기독교는 개인적 영성과 사회악을 분리시키고, 개인과 교회의 영역에 적용 가능한 신학적 방법에 몰두해 온 결과 교회들은 교회주의의 팽창을 불러왔다. 그러나 그 교회들은 다양한 차별의 악을 인식하는 데 대부분 실패했다.

신학의 비판으로서의 해방신학
1971년 구티에레즈는 그의 책 해방신학에서 이런 과거의 오류로부터 신학 자체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신학은 역사와 정치, 그리고 인간의 구원을 함께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정치와 역사를 배제한 신학은 그 유효기간이 종료되었음을 선언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따라서 해방신학은 교리중심의 단일한 체계를 가진 하나의 신학이 아니라 역사,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인종, 성을 중심하여 다양한 해방 담론을 불러오게 되었다. 비록 해방신학이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 경제적 현실에서 발아되었다 할지라도 해방신학을 시간과 공간에 한정된 단일한 하나의 신학으로 이해하는 것은 커다란 오해다. 해방신학은 억압과 착취와 차별이라는 불의를 지속시켜온 과거에 형성된 교리와 교회의 역사를 배우는 학습과정이 아니라, 그 과거의 교리로부터 해방되어 바른 실천으로 나가는 정행(orthopraxis)이라는 방향을 지향한다. 따라서 해방신학은 억압과 착취와 온갖 차별로부터의 해방을 기독교적 실천 과제로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남아프리카의 해방신학은 이런 의미에서 종교적 전통과 문화 그리고 피부 색깔의 다름을 이유로 인간을 차별하고, 이 차별이 사회 전반에 차별적 구조 악으로 자리잡아온 인종차별주의의 역사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였다. 악이란 모든 권력구조에 기생하면서 차별과 배타와 착취와 억압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하고 모든 인간의 권리를 박탈하는 묵시적 힘을 가진다. 그러나 이 악은 마치 바이러스처럼 그 생존과 번식을 위하여 생체세포를 필요로 한다. 그것이 인간이요 인간의 집단이며 인간의 역사다. 비판적 인식이 결여되고, 자기 반성적 비판 능력이 취약한 모든 개인이나 집단은 깊은 악을 재생산 해 내는 숙주가 될 수 있다. 이 악은 간혹 종교 경전의 이름으로, 사회와 국가의 이름으로, 그리고 도덕적 정당성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위장한다.
따라서 해방신학의 대두는 기존의 기독교 신학의 위기를 의미한다. 그 위기의 원인은 신학담론 속에 담긴 사회 윤리학적 오류에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해방신학은 다분히 사회윤리학적 관점을 응용하여 불의한 기독교의 위기를 드러낸다. 이런 정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해방신학이 기독교를 훼방한다고 간주하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주장이며 아전인수라 아니 할 수 없다. 사실상 기독교의 위기를 드러내는 것은 해방신학 그 차제가 아니라 기독교 신학 그 자체가 다양한 차별의 악을 조장하거나 받아들이는 악의 숙주 역할을 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포로가 되어 있는 기독교는 위기를 직면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논리를 따라 기독교가 자신들의 부유함을 향유하기 위하여 가난한 생명들을 구조적으로 착취하며 외면하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성차별의 숙주가 되어 있는 기독교도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 성차별주의적인 기독교는 어머니와 누이들을 차별하는 남성성을 통해 남성적 권위를 옹호하는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주장하기 때문이다. 인종을 차별하고 약자를 차별하는 기독교는 사실상 성서의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기독교이기도 하다.
21세기 신학 교육을 위하여 공공의 신학 이론을 제기해 온 신학자들이 역어 낸 책 “21세기 공공의 신학 (Public Theology for the 21st Century" 은 현대 신학적 담론이 억압, 착취, 차별, 배제, 분리, 지배를 옹호하던 논리에서 벗어나 어떻게 인간의 자유, 정의, 평등, 인권, 다원성 등의 주제들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이 논의의 핵심을 요약한다면 신학적 부분들만으로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에 보다 향후 신학 교육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관점과 규범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해방신학은 부분(fragments)에 만족하지 않고,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대변하는 신학에 대해서는 비판신학이기를 망설이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차별과 착취와 억압을 받아온 약자의 경험에서 전통신학에 대한 재고를 요구하는 해방신학은 여성들의 피억압자 체험에서 생성된 여성 해방신학에 연대하고, 약자의 체험을 이해하는 데에서, 그리고 정통주의 신학의 오류에 대한 비판에서 방법론적인 상호연관성을 가진다.

해방주의 신학자 로즈메리 류터
사회윤리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류터의 여성신학 형성에 크게 영향을 준 사상적 배경은 최소한 네 가지를 언급할 수 있다. 첫째, 무엇보다 먼저 그녀가 박사학위 과정을 공부했던 미국 클레아몽트 신학대학이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학문풍토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 전통이다. 성서와 예수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그녀로 하여금 교부신학이 형성한 교리적 체계의 위선과 허위를 넘어서서 콘스탄틴 신학의 오류를 날카롭게 비판적 시각을 형성하게 했다. 둘째, 그녀가 학위 취득이후 10년 동안 가르쳤던 미국 워싱톤 DC의 하워드 대학에서 조우하게 된 흑인 해방신학에 대한 그녀의 지지와 공감이다. 흑인 해방 신학은 그녀로 하여금 여성 해방적 시각을 더욱 공고히 해 주었다. 셋째, 예수에 대한 해방주의적 이해위에서 그녀가 영적 구원자를 넘어서는 해방주의적 예수를 주장하게 된 것은 성서 본문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비롯된 하나님 나라 사상과, 그 사상을 촉발시켜 온 예언자 신학과 메시아사상의 적극적인 수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류터에게 미친 이 세 가지 신학적 흐름은 그녀의 신학적 작업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성차별로부터 여성해방, 인종차별로부터 흑인해방, 그리고 반유태주의로부터의 해방을 학문적이며 실천적인 과제로 삼게 해주었다. 이에 더하여 넷째, 전형적인 남성 중심적인 교리체계를 가진 가톨릭교회 안에서 여성으로 살아온 그녀의 경험이 19세기를 전후하여 발아된 여성신학적인 비판 작업으로 이어지면서 그녀로 하여금 여성해방주의자가 되게 하였다. 이런 점에서 나는 그녀를 1980년대 저작에서 보이는 여성 해방적 관심을 넘어서서 해방신학자들과 실천적 관심을 나누는 해방주의적 신학자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류터의 신학과 사상에서 지난 1900년 동안 기독교 안에 숨어 있었던 성차별, 인종차별, 소수자 차별의 악을 제거하기 위한 비판적 작업이 중추적인 관심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차별의 기독교적 뿌리
일반적으로 여성해방운동의 출발점은 기독교 안에서 시작되었다. 그 출발점은 여성의 성서(Women's Bible)가 출간된 1895년이라고 볼 수 있다. 여성의 성서를 출간한 캐디 스탠턴(Elisabeth Cady Stanton)은 성서를 고쳐 읽는 것의 중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초기부터 성서는 구약과 신약에 기록된 “하나님에 의해 위계 지워진 영역”에 여성을 붙잡아 두기 위하여 이용되었다. 경전과 시민의 법; 교회와 국가; 사제들과 집정관들; 모든 정치 정당과 종교적 정파들은 여성을 남성에 후위 하도록, 남성의 소유가 되도록, 그리고 남성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열등한 존재,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라는 생각을 가져왔다. 신조들이나 법전, 성서 그리고 규칙들을 포함한 모든 것들은 바로 이러한 생각에 근거하고 있다. 유행이나 형식, 축제, 사회의 관습, 교회의 직제와 훈련도 모두 이러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녀는 사회적 존재로서 여성을 긍정하지 못했던 전통적인 신학적 이해와 가르침은 성서 그 자체보다 성서를 기록하고 해석해 온 가부장적 문화의 산물이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앞서 1872년 윌스톤크라프트( Mary Wollstoncraft)의 인류의 역사 속에서 부정되어 온 여성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여성의 권리 옹호>를 출판 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기독교 여성들에 의하여 주도되었고 마침내 다차원적인 해방을 촉진하고 연대하는 운동으로 이어졌다. 노예제도 폐지와 인종차별 폐지운동은 역사 속에서 억압받아온 여성의 관점에서 당연히 연대를 나누어야 할 중요한 해방운동으로서 동일한 요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여성해방운동적인 맥락에 서서 류터는 그녀의 대표적인 책 <성차별주의와 신론: Sexism and God-Talk: Toward a Feminist Theology>에서 죄스런 인간들의 이해관계에 의하여 채색된 성서적 지침들이 어떻게 성차별과 억압의 역사를 불러왔고 신학적으로 체계화되어 왔는지에 대하여 밝혔다. 그녀는 이 책에서 기독교 안에서 여성차별과 억압을 조장해 온 신학적 사고는 여성의 몸과 자연에 대한 비하의 전통을 지녀왔으며, 하나님을 가부장적, 위계 질서적, 제국주의적 언어와 밀접하게 연계시킴으로써 다른 한 편을 차별적 존재, 하위적 존재, 그리고 피지배적 존재로 귀착시켜 왔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평화와 생명의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생명과 평화를 파괴하게 하는 지배와 억압의 길로 치달았다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열등한 본질을 가진 존재로 간주된 이들이 분류되었고, 그 결과 여성들의, 백인이 아닌 인종과 자연의 권리가 가부장적 위계질서 안에서 박탈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신학적 사고는 “역사 안에서 여성의 종속이란 여성의 열등한 본성과 죄책에 대한 징벌“로서 당연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류터는 가부장적 남성 중심적 시각에 의하여 포로가 된 하나님 이해는 예언자적 혼을 상실한 신학적 구조 안에서 기존질서에 편입되어 버린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 주의적 기독론을 형성했다고 규명한다. 이런 맥락에서 가부장적으로 이해된 그리스도는 여성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고 그녀는 단언한다. 왜냐하면 가부장적이며 위계 질서적이며 제국주의적 그리스도론은 현실세계에서 여성/몸/자연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당연시하고, 지배의 대상으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왜곡된 하나님 이해, 왜곡된 기독론의 수정은 류터에게 있어서 필수 불가결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러한 신학적 수정 작업은 하나님 신앙의 회복과 더불어 일어나야 하는 우상타파(iconoclasm)적 작업이다. 이 우상타파적 작업은 성차별, 인종차별, 계급차별, 제국주의적 억압과 통치로부터의 해방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적 실천은 온갖 종류의 억압과 착취와 차별로부터의 해방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며, 그러한 해방작업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러한 해방적 전통의 맥락 안에서 억압적이며 차별적 현실을 긍정해 온 신학을 비판 해체하고, 성서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예수와 예언자적 전통을 재현하는 작업을 전개해 왔다. 사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억압은 인류의 길고 긴 역사와 함께 해 왔다. 남성의 사랑과 연모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억압과 차별의 대상이 되어 온 여성 존재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는 흑인에 대한 차별보다 더욱 심원한 뿌리를 가지고 있어서 가히 신학과 교회에게 있어서 자기모멸적인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차별구조를 조장해 온 신학에 대한 그녀의 이런 비판적 시각은 북미만이 아니라 그 앵글이 넓혀질 때마다 아시아와 팔레스타인을 비롯하여 전 세계적인 정황을 분석 비판하는 폭넓은 신학적 시각으로 진화해 왔다.

전통신학으로부터의 해방
류터는 대학에서 고대사를 연구하고 1965년 미국 클래아몽 대학 대학원에서 고전학과 교부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어 그녀는 아프리카-아메리카인 들이 많이 공부하는 워싱톤 DC의 하워드 대학 종교학부에서 10년 동안 가르쳤다. 이 기간에 류터는 흑인 해방신학에 깊이 관심하여 1970년대에는 시민운동과 평화운동에 참여했고, 여러 차례 감옥에 갇히는 경험을 했다. 교회의 가부장주의에 절망하여 교회를 떠난 메리 댈리(Mary Daly)와는 달리 류터는 가톨릭 신자로서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여기에는 가톨릭 교회내 개혁 운동을 전개해 온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이나 그레고리 바움(Gregory Baum)과 같은 운동가들과의 친분이 크게 작용했다.
류터의 첫 책 <스스로에게 적대적인 교회>(The Church Against Itself)가 1967년 출판되었는데, 이 책에서 그녀는 가톨릭교회의 성윤리를 형성하고 있는 교리에 대하여 비판을 제기하였다. 그녀의 학문적 노력은 기독교 고전과 교부학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초기 기독교의 교리 형성과정에서 벌어진 인종, 계급, 성역할 그리고 생태계에 대한 기독교의 편견을 드러내는 데 기여했고, 특히 기독론과 반유대주의(Anti-semitism)의 관계를 해명하는 데 기여했다. 그녀는 가톨릭교회가 기독론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기독론적 원형인 유대 메시아사상과의 연관성과 불연속성을 규명하는 작업을 통해 “믿음과 형제살해 (Faith and Fratricide)"라는 책을 1974년 출간했다. 여기서 그녀는 유태인들이 가졌던 메시아사상을 제거하고 유일한 하나님의 구원자라는 개념을 형성함으로써 기독교 신학이 유태인들의 메시아사상을 이단시하게 되었다는 점을 밝혔다. 결국 근친적 종교적 전통을 모두 제거(살해)하는 배타적인 기독론이 결과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전통이 지시하는 선과 악, 우월과 열등의 분리도식에서 악(evil)이란 일종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배척하는 대상들이 된 것이다.
류터는 기독교의 기독론적 성취라는 사상이 콘스탄틴 대제 이후 어떻게 기독교의 이념적이며 동시에 제국주의적인 보편성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이 책에서 밝혔다. 결국 제국주의화된 가톨릭교회는 섬기는 종교가 아니라 지배하는 종교로서 자신을 정위시키고, 노예와 여성과 자연을 지배하는 종교가 되었다고 보았다. 기독론적 성취론에 근거하여 발전한 가톨릭교회의 교설은 가부장적이며, 위계질서적이고, 자연 파괴적인 면모를 지니게 되었으므로 류터는 참된 예수를 다시 만나는 데에서 새로운 희망을 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녀는 “일단 메시아로, 전통적인 남성적 상상력과 더불어 거룩한 로고스로 그려진 예수에 대한 신화가 벗겨내져야 비로서 공관 복음서에서 말하는 예수가 페미니즘과 주목할 만하게 공존할 수 있는 인물로 인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다시 만난 예수는 우상타파적인 예언자로서 기존의 차별적인 사회질서의 전폭적인 변화를 지향하며 가부장주의의 겸비(Kenosis of patriarchy)를 드러낸다고 한다. 그러므로 교리적 예수가 아닌 성서의 공관복음이 드러내고 있는 참 예수는 새로운 또 하나의 억압적 사회질서 형성에 관심을 가진 이가 아니라, 전적으로 억압이 해체된 해방지평을 우리에게 가리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예수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계급차별이 결코 예수와 나란히 공존할 수 없다.
류터는 기독론적 해방의 지평만이 아니라 성서적 전거를 통하여 성서의 메시지를 예언자적 전통의 빛에서 재조명한다. 제프리 시커(Jeffrey S. Siker)는 류터의 성서해석 방법을 분석하면서 그녀가 구약과 신약 성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매우 명료하게 설명해 주었다. 제프리의 분석에 따르면 류터는 구약성서에서 창조와 타락, 레위기의 희년 사상, 지혜문학 전통, 그리고 예언자들의 문서를 중요한 성서 신학적 근거로 삼았다. 또한 신약성서에서 류터는 다섯 가지 그룹의 텍스트를 중시하는 데, 그것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전통, 남성을 향한 여성의 복종을 지시하는 전통 (고전 11장, 에베소서 5장, 그리고 디모데전서 2장), 그리고 보다 평등주의적인 양성간의 관계를 지시하는 전통(갈 3: 28, 행, 2장),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 (눅 10: 38-42)등이다.
이상과 같은 성서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류터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메시지와 이에 반하는 반-유대주의, 노예제도, 전쟁, 그리고 권력의 오용, 가난한 자에 대한 부유한 자들의 오류들을 지적하고, 기독교인의 실존을 예언자적 성품과 연관 시킨다. 류터는 성서를 인간의 실존을 하나님과 연관시켜 이해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와 계약사상, 그리고 출애굽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거역, 그리고 하나님의 예언자의 음성을 들려주는 전거로 이해한다. 죄스런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예언자들의 음성에 깊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에게 있어서 예언자적 혼을 상실한 기독교는 참된 기독교가 되기 어렵다.
한 사람의 로만 가톨릭 교인으로서 그녀는 기독론적인 구원론이 아니라, 예언자적 기독론을 강조해 왔다. 이는 유대교와 차별화된 기독교 안에서 가부장주의를 옷 입고 교리화 된 예수의 해체와 더불어 공관복음서에 그려진 하나님 나라의 선포자로서의 예수를 재조명함으로써 이루어진 결과라 볼 수 있다. 하나의 성서를 가지고 두 가지 종교가 이루어 진 셈이다. 기존의 질서와 타협하여 억압과 지배의 종교가 된 체계, 그리고 기존의 질서를 비판하는 예언자 정신이 살아있는 종교이다. 물론 류터는 후자에서 기독교의 진정성을 본다. 따라서 그녀는 해방신학적 전통이 담고 있는 예언자적 정신을 공유하고 있다.

해방신학은 죽었는가?
류터는 그녀의 논문에서 해방신학을 향하여 이단시하며, 그것의 죽음을 당연시하는 북미나 유럽의 신학자들을 향하여 “비록 피상적인 관점이지만 해방신학이 죽었다고 선언하는 데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해방신학이 살아있었던 것을 결코 보지도 못했거나 혹은 처음부터 해방신학이 죽어버리기를 열렬히 기다렸던 이들”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해방신학의 출현이나, 그 전개과정을 인정하지 않았던 유럽의 교조신학은 해방신학을 거절하고 기존의 질서와 타협한 교회유형의 신학만을 정통한 것이라고 주장해 온 까닭이다. 또한 유럽 신학자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해방신학은 신학의 파괴자요 그들이 만들어 온 배타적 기독론에 대한 부정인 까닭이다. 하지만 류터의 관점에서 본다면 해방신학의 출현은 복음의 회복이며, 누가복음 4장 18절 이하에 나타난 예수의 소명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해방의 과제가 있는 곳에서 복음은 해방적 복음으로 나타나고, 예수에게 해방적 사역의 소명을 불러일으켜온 예언자적 전통의 부활이다.
신학의 유럽중심주의(Eurocentrism)를 비판하며 해방신학 전통을 강력하게 수용해 온 류터는 해방신학의 현대적 전개를 분석적으로 해명하면서 라틴 아메리카 신학의 새로운 형태로서 지난 20년간 나타난 온 신학운동에는 페미니즘, 토착민들, 아프로-캬라비안, 아프로-브라질 인들에 의하여 전개된 생태신학과 다소 낮선 진기한 신학들의 출현이라고 소개한다. 이러한 신학들은 대부분 그들의 인간됨의 존엄함을 지켜온 토착 종교적 관심, 그리고 해방신학이 불러온 경제적 분석과 비판을 동시에 수용하고 있는 신학들이다.
이 신학들은 과거 근 500년 동안의 식민지주의 그리고 근래의 신식민지주의에 의하여 착취를 받아온 땅에서 꽃핀 것으로서 착취당해 온 그들이 정녕 필요로 하는 것은 다른 인간과 자연을 또다시 착취하는 “개발”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아울러 착취와 억압의 대상이었던 자신들이 또다시 그것들의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억압과 착취의 관계의 해체가 필요한 것이라고 우리에게 일러주는 신학임을 밝힌다. 따라서 새롭게 형성되어 온 해방 신학은 억압과 착취로부터의 해방의 지평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여성해방신학을 포함하여 현대 해방신학은 다양한 차별들- 인종차별, 성차별, 계급차별, 자연에 대한 차별들이 불러오는 착취와 파괴의 해체와 종식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빈곤과 억압에 대한 관심
그러나 류터는 남미 대륙은 서구 세계를 모방하는 개발주의, 서구세계의 권력구조에 의지하고 있는 식민 파시즘, 토착 엘리트들과 손잡고 있는 외국자본의 이익에 봉사하는 권력, 시민사회를 억죄고 있는 국가보안법, 노동운동과 학생운동, 그리고 농민들의 연대운동을 진압해온 억압적 전체주의 사회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제 3세계에서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이들 대부분이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정치적인 지원을 받으며 국가보안법을 만들고 이를 마치 기독교 문명을 수호하는 것인 양 여긴다는 점이다. 억압적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극 보수주의 연대를 형성하고,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구조를 조장하면서 동시에 공산주의에 의한 국가 전복을 막아내고 기독교 문명권을 수호하는 선의 도구인양 자신들을 위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파적 연대를 통하여 민중을 억압하는 권력의 남용과 오용이 일어날 경우 해방신학은 혁명적인 사유를 통하여 신 식민지적 억압구조에 대한 비판과 해방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류터는 그녀의 논문에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남미의 정치적 상황을 개관하면서 미국에 의한 신신민주의(neo-colonialism)에서 벗어나려는 남미 국가들의 노력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남미의 상황에서 일어난 해방적 변화는 1970년 칠레의 막시스트 사회주의 정권은 남미 가톨릭교회의 사회주의 연대를 주장하는 사제들의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미국 CIA의 지원을 받던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몰락하고 말았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스 정권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온 독재자 소모사정권을 몰락시키고 문맹퇴치, 국민 건강보험제도, 토지 개혁 등을 통해 니카라과의 개혁을 도모했다. 새로운 개혁을 위해 싸웠던 엘살바도르에서도 내전이 일어나 75,000 명이 살해되는 등 피에 젖은 진압사태가 벌어졌다.
이렇듯 국가보안(national security)을 앞세워 국민들의 인권을 탄압하고 억압해온 정권이 있는 남미 나라들의 교회는 어쩔 수 없이 민중과 더불어 국가안보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연대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양심적인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런 정황에서 민중을 억압하고 고문하며 살해해 온 잔인한 정권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고 해방하는 사역을 긍정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점들을 살펴볼 때 1970년 대 남미의 상황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온 지배계급과 엘리트들이 장악한 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민중적 저항을 불러왔으며, 따라서 해방신학은 제국주의와 반민주적인 독재정권에 대한 신앙적 저항과 비판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제 3 세계의 민중들은 하루 생활비 1달러도 안 되는 극빈의 정황에 처해있다. 아시아 대륙도 무수한 민중들이 극심한 가난을 겪고 있고, 정치적 억압으로 인하여 고난을 겪고 있다. 이 가난의 대륙 아시아 곳곳에서는 서구 다국적 기업들이 3세계 민중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있다. 2006년 내가 필리핀 다국적 기업 네슬레의 부당한 착취적 경영에 저항하는 노동운동가를 만났을 때, 그의 전임자 두 명은 살해 되었고, 그 자신도 공안당국의 눈으로부터 숨어 지내고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 필리핀에서는 스위스의 다국적 기업인 식품 회사 네슬레가 필리핀 노동자들을 매 6개월마다 대량으로 해고하고 있었다. 6개월 이상 임시직으로 쓰면 불법이라는 노동법 때문이었다. 지속적으로 노동자가 필요하다면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하는 데, 네슬레는 노동자들을 전임으로 쓰면 더 많은 임금과 복지혜택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6개월 고용했다가 무참하게 대량 해고시키는 악습을 일삼고 있었다. 필리핀 노동자들은 극심한 고용불안과 가난으로 인해 미래의 희망을 상실하고 있었다.
서구기업들이 자국의 고용인들에게는 매우 높은 차원에서 인권을 보장하고 복지혜택을 주면서 제 3 세계 노동자들에게는 극심한 저임금과 해고에 시달리게 하고 있는 것은 결국 인종차별의 또 다른 형태라 아니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필리핀 정부는 이런 부당하고 불의한 정황에 저항하고 비판하는 이들을 반사회적, 반정부적인 정치범으로 몰아 영장 없이 인신을 구속하고, 심지어는 수년간 재판도 없이 구금하는 등 자국민에 대한 극심한 인권유린을 조장하고 있었다. 권력을 독점한 소수 지배자들이 제국주의적인 정치 및 경제적 지배구조에 편승하여 자국민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극도로 훼손하는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아시아 인권사무소에서 낸 보고서를 보면 2006년 한 해 동안 필리핀에서는 무수하게 많은 인권운동가들이 살해되거나 실종되었고, 법정은 피해자들의 인권을 옹호하고 정의를 집행하는 데 무관심하고 방관하고 있다는 정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남미의 정치 경제적 지배구조가 기독교(가톨릭)도들에 의하여 장악되었듯이 필리핀도 동일한 종교적 정황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아시아의 비기독교적인 사회인 스리랑카, 네팔, 등등의 나라들의 실정도 필리핀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서구 기독교 세계만이 아니라 아시아 땅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의 권리가 부정되고, 그들의 존엄성이 유린되는 현실이 있기에, 애급의 포악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신 하나님의 해방적 사역은 필연적인 역사적 요청으로 이해되고 있다. 남미와 아시아 대륙은 억압과 가난으로 인하여 무수한 민중들이 신음하고 있는 땅이다.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면서 오히려 이 가난의 땅을 시장으로, 지배의 대상으로 보는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와 제국주의 논리 이면에서 작용해 온 기독교 신학의 오류와 죄악을 류터는 자신의 논문에서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교황청의 보수적 정책과 해방신학
1980년대 남미의 상황을 분석해 보면 일면 희망이 새롭게 소생하는 시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잔혹한 진압의 시대였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남미의 지식인들은 민중 속에서 소생하는 희망을 짓밟았고 보다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대안적 비전을 외치는 소리들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현존 체제 질 서적 억압에 가톨릭교회도 동참했다. 류터가 이해하는 해방신학의 자리는 바로 이러한 억압과 해방의 힘들이 부딪치고 있었던 1970-80년대의 정황이다.
이런 혁명적 정황에서 과연 가톨릭교회는 무엇을 했는가를 살펴보려면 1978년 선출된 교황 바울 2세(Paul II)의 남미 정책을 살펴보아야 한다. 교황은 진보적인 사제들을 보수적인 사제들로 교체하고, 사제들의 교육을 당당하며 해방신학적 작업을 해오던 연구소들의 문을 닫게 하였다. 예컨대 부라질 북동부의 진보적 감독이었던 헬더 카메라( Helder Camera)는 은퇴를 하고 동시에 보수적인 우파 감독으로 교체되었다. 새로 임명받은 감독은 성직자 교육기관을 폐쇄하고 해방신학적 성향이 있는 모든 교수들을 해고했으며 전통적인 신학교로 전환시켰다. 이 때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는 사제직을 버리고 평신도로 돌아갔고, 파블로 리챠드(Pablo Richard)와 힌켈라머트(Franz Hinkelammert)는 코스타 리카에 개신교가 세운 에큐메니칼 기관으로 적을 옮겼다. 1980년대에 일어난 해방신학의 퇴조는 바로 이런 정황이 왜 벌어졌는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바로 이해하기 어렵다.
1980년대 말에 이르러 동구권이 자유를 얻기 시작하고 마침내 1991년 구소련이 몰락하면서 냉전 체제가 해체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미국은 공산주의적 전복으로부터 남미의 국가들을 지키려는 전략을 대대적으로 수정했다. 그리하여 남미의 상황에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일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미국의 관심이 적어진 남미에서는 조금씩 제한적인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미국의 대외적 관심은 남미에서 중동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남미의 국가들은 냉전체제 안에서 지켜오던 국가안보 이데올로기 대신 자본주의적 개발과 경제문제에 관심하기 시작하면서 이번에는 경제적으로 미국에 의존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칠레나 아르헨티나, 과테말라는 민주화 되었고, 구소련의 지원을 받던 쿠바 같은 나라들은 경제적으로 더욱 깊이 고립되었다. 그리하여 한 편에서는 미국의 경제적 영향력은 증대되는 반면, 다른 편에서는 미국 제국주의 권력에 대한 비판 의식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류터는 이런 변화 속에서 해방 신학 운동은 대중운동을 통하여 확산되어 왔다고 평가한다. 이 운동은 남미에서의 여성참정권 운동으로 번져갔고, 페미니즘 운동으로 이어지고 생태운동으로 번져 갔다는 것이다. 그 결과 남미의 대부분 나라에서 1919년에서 1955년 사이에 여성들의 참정권이 인정되었다. 류터는 인간의 권리가 박탈당한 여성들의 해방운동은 필연적으로 가부장적 사회에서 볼 때 급진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회적 성(gender)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평등에 기반 한 사상의 대두는 결국 가부장적이며 남성 중심적으로 위계질서 지워진 사회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급진성을 거부한 가톨릭교회는 결국 그들의 전통적 가부장적 신학의 고수와 보수라는 과제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류터는 바로 이들이 해방신학은 죽었다고 간주하려 하는 이들이며, 이들의 눈에는 해방신학이란 교회의 근간을 흔드는 반기독교적인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에 아예 해방신학의 생명력조차도 인정하려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오는 말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면서 많은 이들이 해방신학이 퇴조하거나 죽은 것이 아니냐는 물음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신학이 대두된 1970년대에는 해방 신학에 영향을 받은 많은 사제들이 해방 전선에 따라 나서기도 했다. 부분적인 성취가 있었지만 이런 시도들은 많은 경우 진압되고 말았다. 그러나 1990년대를 전후하여 자유/사회 및 공산주의간의 이념적 대립이 붕괴된 이후 냉전체제하에 형성되었던 국가 안보 이데올로기의 경직성이 조금씩 사라지게 되고, 냉전적 대립보다는 새로운 경제적 지배구조의 억압성이 비판적으로 논의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남미나 아시아에서 많은 국가들이 부분적으로 민주화를 성취했고, 일부는 정치적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냉전체제가 붕괴된 이후 자본주의적 지배가 새로운 식민지배 구조를 형성하고 있어서 북반구와 남반구 사이의 경제적 불평등은 더욱 깊어지고, 남미와 아시아 대륙의 민중들은 또 다른 억압과 가난에 맞서게 되었다. 류터는 이런 맥락에서 해방신학은 죽지 않았으며 오히려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새로운 참여와 응답의 구조들을 불러오고 있다고 믿고 있다. 류터는 해방신학 운동이 도처에서 살아 있음을 밝히고서 다음과 같이 그녀의 논문을 매듭지었다.

“해방신학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죽지 않았다. 오히려 해방신학은 남미민중들의 다양성에 응답하는 업적을 내고 있다. 남미 해방신학은 지구적인 경제 지배에 대립하여 국제적인 대화의 일환으로 경제적 분석을 새롭게 하고, 남미의 독립과 복지를 위한 새로운 투쟁의 단계에서 남미 지식인들과 대중지도자들을 위하여 그 투쟁의 기초를 놓아왔다.”

기독교 복음의 근본적인 과제는 영혼과 삶을 위한 해방적 사역에 있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소명에 대한 선언은(눅 4: 18-19)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구절이다. 억압받아 감옥에 같인 이에게 자유를, 가난한 이에게 자유의 복음을,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하는 복음은 다름 아닌 억압과 가난과 캄캄한 절망으로부터의 구체적인 해방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억압받은 이들이 있다면, 가난한 이들이 있다면, 그리고 앞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면, 해방의 과제는 정황에 따라 지체될 수는 있을지언정 폐기되거나 무화될 수는 없는 일이다.
여성 신학적 작업에서 출발한 류터의 신학적 여정은 그 신학의 장을 넓혀 남미 해방과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 억압, 인종차별, 그리고 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대한 비판을 넘어 신자유주의가 또다시 새로운 경제 제국주의적 지배를 불러오고 있는 현실 비판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오늘날 이렇듯 해방신학은 신학과 현실세계간의 이분법적인 사고를 넘어서 인간의 권리와 존엄함을 지키는 사역의 기초를 놓고 있다. 만일 해방신학이 죽어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도래하여 억압과 소외와 착취가 사라지고 더 이상 가난과 억압에 의하여 고난을 겪는 이들이 없는 세상에 우리가 머물거나, 아니면 복음의 해방적 능력을 상실한 기독교로 전락하거나 양자 중의 하나의 경우가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류터는 그녀의 논문을 통하여 해방신학의 현대적 존재이유를 밝히고 그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존재증명을 밝힌 것이다.

Friday, March 14, 2008

Peace with Compassion!!




사순절 언덕길에서 모두들 평안하신지요?

오늘 저는 미국에서 온 초로의 부부 Marge와 Ken을 만났습니다. 이 분들을 미국 필라에 있는 퀘이커들의 명상과 연구를 위한 수도원인 펜들힐에서 스탶으로 일했던 분들입니다.

박성준 박사(한명숙 전국무총리 부군)께서 경복궁 근처에 인문사회과학 서점인 길담서원을 내셔서 거기서 모두들 만났습니다. 펜들힐과 한국인들의 인연은 무엇보다 함석헌 선생님이 뿌린 씨앗의 열매들입니다. 그 분이 군부독재에 바른 말 하다가 일을 당할 것 같으니까 퀘이커들이 미 국무부를 통해서 함 선생님을 초청하여 1962년 경 한 해 다녀오셨습니다.

그 당시 함선생님께서 잠간 독일에서 공부하던 안병무 선생을 만나 보러 가셨었는 데, 어느날 "한국에 가고싶다"고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이야기도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함선생님이 고국으로 돌아 오셔서 당시 서울 퀘이커 모임에 나오던 이행우 선생을 후발 주자로 보낸 데에서 이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행우 선생은 당시 어느 중고교 교사였지만 펜들힐에 가셨다가 거기에 그만 주저 앉으셨고, 그간 여러 한국 사람들을 펜들힐과 이어주셨지요.

그렇게 펜들힐을 다녀 오신 분 중에 박성준(성공회대) 교수와 한명숙 선생이 계십니다. 박성준 박사께서는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서 십여년 옥살이를 하신 분입니다. 이 행우 선생께서는 지금 칠십이 넘은 노인이 되셨습니다. 저도 그 분의 도움을 받아 2005/6년 일년동안 펜들힐에서 퀘이커들의 삶을 배우며 지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만난 이 두 분은 제가 거기서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펜들힐에 가기 직전 이 분들은 그곳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이 분들로부터 저의 펜들힐에서 지낸 2005년 겨울의 어느 순간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2005년 겨울 저는 당시 이라크에 평화팀으로 가서 평화봉사를 하던 Tom Fox 일행이 이슬람 과격파들에게 납치되어 죽임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귀환을 바라며 매일 아침 침묵으로 기도했었습니다.

얼마후 그는 여러 발의 총을 맞고 살해되어 바그닷 근교에 버려지고 말았지만 평화팀으로 그와 동행했던 세 사람은 살아 돌아왔고, 그들이 퀘이커 공동체 모임에 전한 톰의 최후에 대한 이야기를 오늘 전해 들은 것입니다. 그가 죽임을 당해 버려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기도의 무능을 깊이 느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게 된 것입니다.

톰은 자기를 구금하고 있었던 이슬람 과격파 사람들 중 한사람이 발목을 삐어 고생하는 것을 보고 그의 고통을 자기 고통처럼 느끼면서 그의 발목의 치유를 빌며 어루만져 주곤 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자기 생명이 위협받고 있는 자리에서 다른 이의 발목이 삔 것을 염려했다니요. 그는 위협이나 공포를 느낄 겨를도 없이, 담담히 자기를 묶어두고 학대하는 이들의 안전을 오히려 염려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반대 편에는 거대한 미국이 서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경복궁 역 가까이 있는 에코식당에서 저는 밥을 먹다가 말고 수저를 놓은 채 그 이야기를 들었지요. 그리고 그의 따스함과 동정(compassion)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삼년의 유랑를 마치고 돌아온 저는 요즈음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교회에서나 학교에서 자기 생각과 삶으로 예수로부터 배운 바대로 사는 사람을 거의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자꾸 확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소수의 사람들만이 예수가 그린 인간다움을 사는 것이로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얼마전 작은 애가 요즘 미국에서 베스트 셀러인 "루시퍼 효과"라는 책을 제게 건네며 이거 재미있으니 한번 읽어보시라 하여 받아 두었는 데, 사람이 악해지는 것은 루시퍼같은 이들이 주변에 많아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조차 루시퍼같은 이는 많은 데 예수를 사는 이들은 희박하니
우리 교회와 사회의 앞 날이 걱정됩니다.

40년 전 이 부부가 청춘이었을 때 평화봉사단원이 되어 한국에 와서 3년 가량 지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나이 칠십이 가깝도록 자신이 믿는대로 평화를 위해 무엇인가 하면서 살아온 이 부부가 톰의 최후에 대하여 전하는 말을 들으며 참 많이 부러웠습니다. 펜들힐 겨울 동산에서 톰의 귀환을 바라던 저의 기도는 톰의 생각과 달랐던 것 같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귀환보다 거대한 제국과 마주 서 있는 이들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사람을 수단삼아 잔인하게 죽이던 과격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분노에 찬 비이성적인 사람들로만 여겼던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기도의 무능을 받아들였던 그 때의 마음을 오늘 슬며시 지웠습니다.

Wednesday, March 12, 2008

Be careful brutal dogs!

개(犬) 조심!



인간이 가진 습속(habits)은 다양한 조건들의 집합이다. 시대마다 환경마다 그리고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으나 우리 한국 사회가 보여주는 습속은 가히 "절망적"이다. 이번 안기부 도청사건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안기부의 것이라고만 여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절망적인 정황은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표리부동한 습속의 일각이라는 생각이 나를 더 절망스럽게 한다. 간혹 나는 우리사회와 교회가 전근대 이전의 종족사회가 아닌가 하는 착각을 가질 때가 있다. 겉은 현대사회인데 속은 종족적 편견과 가치, 종족의 이익관계가 모든 가치체계의 기준이 되어버린 사회, 그리하여 정의와 평등과 자유에 대한 담론이 재갈 물려진 사회나 집단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국가 안전을 위하여 부여받은 권력을 가지고 비밀업무를 하던 이들이 주요 경제 정치인들의 대화를 비밀리에 엿듣고 녹음한 후 그 자료를 축적해 둔 행위는 국가안보와 사회 안전을 위한 예방적 조치라기보다는 권력주변부에 있는 이들의 약점을 잡고 있다가 비열한 공격을 위한 자료로 삼으려 했다는 데 그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들은 불법적인 행위를 목격 경청했으면서도 그 불법을 묵인하고 방임해 왔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진 자가 우리 사회의 정의집행 과정을 임의로 조작한 것이리라. 이들이 밝힌 일각의 정보에 의하면 정치·법조·언론간의 유착을 상징하는 불법적인 뇌물수수가 백억 대를 상회한다하니 권력자들이 스스로의 발등을 찍으며 그 진상을 다 밝힐지 의문이다. 삼성의 비자금 공여에 연루된 정관계의 비리의 고리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나는 정말 궁금하다.

일부 서울대 공대 교수들이 연구비 사용에 대한 허위 영수증을 제시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하였고, 그 중의 한 분은 16억원에 이르는 연구비를 착복을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학술 진흥 재단에서 500만원짜리 연구비 하나 얻으려면 국민학생 숙제하듯 연구 계획서를 써내야 하는 일반 인문학 교수들의 현실에 비하여 너무나 엄청난 특권을 누려온 그들은 제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까지 착복하는 파렴치한 이들었다. 권력의 개입을 금기시하며 학문과 도덕의 자율성을 보장해 준 대가가 이러한 탐욕과 부정직함의 노골화로 나타난다면 앞으로 대학사회의 도덕성과 진실성은 누가 담보할 수 있을 것인가? 외국 대학의 경우 공금을 개인 돈 쓰듯이 하며 보스처럼 행세하는 총장이 하루가 멀다 하고 보직자들과 회식을 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권력을 가진 이에게 공과 사의 경계가 애매한 힘 있는 자의 재량권을 허용하는 대학 사회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끊임없는 이해관계를 둘러싼 갈등으로 인하여 바람 잘 날 없는 한국 교회의 실상도 마찬가지이다. 선거 때마다 측근을 지원하기 위하여 돈 봉투를 돌리는 목사들과 장로들, 종교권력을 쟁취하려는 파벌싸움에 개나 도나 모두 말려드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러한 집단 안에서 진정한 도덕적 반성과 비판담론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의심한다. 개인적으로는 정의와 진실을 설교하던 이들이 정작 정의와 진실을 왜곡하고 조작하는 데 앞장서는 경우만이 아니라 정의와 진실을 지키려 하는 이들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무수히 보아왔기 때문이다. 먼 곳의 것들을 비판하지 않고 자기 집단의 비리와 불의를 지적하는 행위는 종족주의적 집단의 공격 대상이 된다. 그러나 눈 앞의 도둑을 놓아두고 먼 산을 보고 짓는 개가 어찌 명견일 수 있을까?

종교나 학계나 정치계에서도 동일한 논리가 이어지고 있다. “우리사회는 외면상과는 달리 이면에서는 이해대립에 따라 입에 담지 못할 정도의 아첨, 중상모략, 질투,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돈의 연속 이었다.” 안기부 불법 도청 팀장이었던 공운영씨가 오늘 아침 한겨레에 한 말이다. 표리부동한 가치체계에 적응하는 습속들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에서 끝나는 것일까? 이 비정상적인 습속과 가치들을 뒤집는 행위가 일어나면 그것이 비정상이 되고 집단의 명예와 이익을 반하는 반사회적인 존재로 규정되어 고발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정의에 대한 신념과 정직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심약한 자들은 개처럼 꼬리를 흔들며 권력을 가진 자에 경쟁적으로 다가서며 아첨하고, 적을 향하여 중상 모략함으로 충성심을 고백하는 방편을 택해야 하는 것이리라.

비열한 도청행위를 한 그 조차도 도청을 당하는 자들의 행태에 혐오와 구토를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동일한 도청 행위를 한 자들 중에는 그와 같이 혐오를 느끼기 보다는 유희삼아 남의 사적 대화와 비밀을 들여다보는 데 흥미진진함을 느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아첨, 중상모략, 시기와 질투가 통하는 사회는 공정한 룰이 깨어진 사회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공정한 룰에 따른 결정보다는 권력을 가진 자가 임의적으로 너무나 많은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비합리적 구조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세계에서는 사적이익을 위하여 공적인 권력을 악용하는 것을 당연시하며 방임 동조 이용하는 풍토가 만연하게 된다. 정직을 비웃고, 진실을 배반하는 아첨군들의 공범 조장행위의 결과이다. 그들은 비판을 비방으로 해석하고 분노한다. 나 역시 이런 현실에 대하여 거의 절망할 지경이다.

절망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넘겨주지 않으려면, 우리는 사적 이익을 위하여 권력을 남용하는 자들을 부단히 고발할 수밖에 없다. 권력을 오용하는 행위를 저지르는 자들은 사회의 지도층이 아니라 공공의 적이라는 점을 명시적으로 지적해야 한다. 권력 남용과 오용을 방임하는 집단은 족장에게 너무나 많은 특권을 부여하던 전근대적인 가부장적, 부족주의적 습성을 벗어나지 못한 까닭이다. 바로 이러한 습성에 물들면 교회이든, 사회이든, 정치계이든, 권력을 가진 자가 너무나 쉽게 전근대성의 권력구조로 안주한다. 권력자는 아첨과 중상모략의 수단을 사용하며 경쟁적 질투를 보이는 자들을 권력유지의 도구로 삼을 수 있고, 누군가가 권력자를 비판하면 그 주변의 아첨꾼들은 충성을 다하는 개처럼 비판자에게 달려드는 것이다. 이런 개들을 조심하고 이런 개가 되지 않도록 주의할 일이다.
(2007.7.27)

Thursday, March 6, 2008

Hey, Mr. No Mu Hyun! Please Come Out!

[김선주칼럼] “노무현씨, 나와 주세요.”


지난 주말에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살고 있는 봉하마을엔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전임 대통령을 보려고 몰려온 관광객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노 전 대통령이 나오지 않자 한 사람의 구령에 맞추어 하나 둘 셋 하더니 일제히 “노무현씨∼ 나와 주세요∼”라고 소리쳤다. 텔레비전 카메라는 엊그제까지 대통령이었던 사람을 노무현씨라고 부르고는 재미있고 신기해 죽겠다는 듯이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표정을 죽 비춰 주었다.
한참 만에 모습을 드러낸 노무현 전 대통령은 관광객들이 밥 먹을 곳이 없다고 불평을 하자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나도 매일 똑같은 것만 먹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어떤 아주머니는 큰 소리로 “우리가 밥 사드릴게요”라고 외쳤다.

지난 5년 동안 노무현 전 대통령은 우리 사회에서 혐오감의 대표적인 인물로 비쳤다. 이래도 밉고, 저래도 밉다, 이래도 노무현 탓, 저래도 노무현 탓이었다. 언론권력과 기득권 세력이 힘을 합쳐 만들어낸 이미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캐릭터도 작용한 듯하다. 가까이서 그를 지켜본 사람은 대통령이 그렇게 비정치적이었는지 몰랐다며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힘들었다는 뜻이다. 또한 부끄러움이 많고 스킨십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했다. 정치의 정점에 서 있는 대통령이 정치적이지 못하고 스킨십이 부족하다는 것은 결정적인 단점이다. 그러나 정치적이라는 말의 부정적인 요소를 생각하면 그것은 장점으로 볼 수도 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했다. 영혼이 잠식되면 이성이 마비되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다. 후보 시절부터 노골적으로 적의를 보였던 거대 언론은 사회 각 계층의 기득권 세력들과 힘을 합쳐 대통령을 신나게 왕따시켰다. 길들여지지 않을 뿐 아니라 누구를 길들이려고도 하지 않는 노무현이라는 독특한 캐릭터가 불안했기 때문에 이성이 마비된 탓이다.

이미지를 걷어내고 나면 실체가 보인다. 그 이미지 때문에 제대로 평가할 수 없었던 노무현 정권에 대한 평가는 그러니까 이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그가 어떤 정책을 폈느냐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어떤 국민도 100% 입맛에 맞는 대통령을 가질 수는 없다. 사람마다 평가 기준이 다르고 처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남북문제, 복지정책, 부동산과 세금정책 순으로 대통령을 평가한다. 그 점에 관한 한 60점은 넘지 않았나 싶다.

언론의 절대적인 지지와 호의로 당선된 이명박 대통령은 후보의 이미지를 벗고 나니 인간 이명박이 뚜렷하게 보인다. 인수위가 내놓은 정책들과 그가 지명한 장관 후보, 고위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그의 실체가 드러난다. ‘끼리끼리 논다’든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외치더니 그동안 재산을 원 없이 불렸으면서 뭘 잃었다는 건가’라는 비난이 터져나오는 것은 너무 빨리 이미지를 벗어던진 탓이다. 언론도 더는 호의적이지 않다. 이미지를 쇄신하든지 구체적인 정책으로 극복을 하지 않는 한 여론은 싸늘하게 식어갈 것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스스로 약속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꼭 두 사람, 검찰총장과 한국방송공사(KBS) 사장에게는 전화를 걸지 않겠다고. 외압으로 비칠까봐 그랬다는데 그는 그 약속을 지켰다고 한다. 이 말을 듣는 자리에서 한 사람은 감동을 했지만 한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 무능한 사람이라고 혀를 찼다. 권력이 있지만 권력을 사용하지 않았던 대통령을 우리 국민은 가졌던 것이다. 우연히 길에서 만나서 ‘밥 살게요’ 하면 ‘좋지요’ 하고 따라나설 것 같은 전임 대통령을 가진 것은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는 노무현 시대를 거치며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절대권력의 시대를, 그 강을, 건넜다고 할 수 있다.


< 내가 좋아하는 김선주씨의 칼럼입니다. 몇해 전 그녀를 만났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어디에 숨어 있는 듯 싶었는 데 다시 칼럼을 쓴다니 가슴에 봄이 온 것 같습니다. >

Wednesday, March 5, 2008

100 Years for New Wave of Justice...

1908년 미국 여성 참정권 운동은 여성을 정치적인 존재로 보게 하는 운동의 본격적인 출발점이었습니다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유엔은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정하고 여성차별과 여성을 향한 모든 폭력의 제거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여성을 향한 차별과 다양한 폭력을 조장해 온 것은 다름 아닌 종교요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교회가 품고 있는 악의 자식, 성차별이라는 폐습은 하루 바삐 버려져야 합니다. 그래야 새롭고 창조적인 관계로 정의롭게 거듭날 수 있습니다.

Let's say Farewell to Innocence...





순진함이여 안녕...

우리 존재는 정황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what is"와 “what should be"사이에 놓여 있다. 현재의 삶의 조건에 대하여 만족하는 이가 가지는 희망은 현재의 안일함과 평화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일 게다. 그러나 현재의 삶의 대하여 자신이 바라는 바와는 달리 만족하지 못하는 이는 현재의 지속성을 거부하고 부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에른스트 블로흐는 의식을 가진 존재는 결핍을 느끼는 존재이며, 끊임없이 보다 나은 자기 정체성을 찾아 나간다고 보았다. 한 자리에 자신을 정위시키고 현재에 집착하며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살아가는 이에게는 천박한 만족은 있을지 몰라도 꿈과 변화가 결여되기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만족이 불러오는 나태와 변화 없는 삶의 무료함을 달래려 무엇인가 다른 천박한 만족을 찾게 된다. 그것이 물질적 풍요를 의미하는 성공이든, 권력을 휘두르며 다른 이 위에 군림하는 오만을 즐기는 것이든, 육체적 쾌락을 낭만화하며 정당화하는 왜설이든 그 본질은 같다. 그러므로 꿈이 없는 이를 만나는 길은 이미 타락과 퇴락의 길에 들어 선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종차별이 폐지된 남아공에서 백인들이 사람이 먹는 음식에 자신의 오줌을 넣어 흑인에게 먹이는 행위를 한 사실이 동영상을 통해 알려졌다. 인간이 자신의 배설물을 다른 동료인간에게 먹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자신이 인간됨의 권위를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사이존재이며 더불어 존재한다. 자신과 자신의 측근을 제외하고 다른 동료인간을 유희의 대상으로 보며 그 인격과 존엄함을 희롱하는 것은 도덕적 범죄다. 이런 도덕적 범죄는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인종차별, 성차별, 계급차별, 그리고 성적 소수자 차별, 장애인 차별 등등의 사건들은 사실 우리 사회의 인간됨의 지표를 드러내는 수치다. 지난 2008년 2월 27일 미국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교 이사회는 여성 학자인 Serena Jones(전 예일 대 교수)를 유니온 신학대학교 총장으로 선출했다. 한쪽에서는 백인들이 흑인에게 자신의 오줌을 먹이는 야만 행위를 하는가 하면, 한 쪽에서는 백인이 주류인 사회에서 역사적으로 차별받아 온 여성을 자기들의 대학의 총장으로 선출한 것이다. 차별의식을 극복한 같은 백인들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다른 존재들이다. 차별주의자들은 영원히 후진적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차별주의자들은 구차한 이유를 들어 고귀한 인간에게 집단적으로 비열한 관계의 폭행을 가한다.

나는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 과정을 지켜보면서 미국 민주당의 도덕적 저력을 느끼고 있다. 그들은 이미 여성인 힐러리와 흑인 남성인 오바마중 한 사람을 그들의 대통령으로 세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누가 후보가 되든지 미국의 역사를 바꾸는 일이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성이 대통령 후보가 되는 일은 미국의 건국 역사 이래 한 번도 없었다. 더구나 흑인이 대통령 후보로 폭넓은 지지를 받아 온 역사도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우 손쉽게 미국 제국주의를 들먹이며 미국을 비판한다. 그들의 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이미 막강하여 약소국가들과의 자유로운 경쟁 그 자체가 불공정한 구조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정치 영역에서도 우리는 미국의 지배구조를 신제국주의라고 비판한다. 이런 비판을 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 결여될 때 나는 이런 비판에 동조하기가 매우 어렵다. 도덕적 통전성이 결여된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의 공정성과 투명성에 비하여 한없이 불투명한 권력구조를 가진 우리 사회를 갱신하려는 의지 없이, 권력 오용을 비판할 자기 성찰이 결여된 이들이 마치 정의의 투사처럼 대외적인 공정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참으로 우스꽝 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물 안의 독선적 개구리처럼 외부의 개입에 대해서는 자율권을 주장하며 저항적 투사가 되다가 우물 안에서는 무서운 독재자의 얼굴을 하고 주어진 권력을 제국주의자들보다도 더 천박하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나는 제국주의에 대하여 반대한다. 동시에 우리 내부의 반민주주의적 독선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제 3세계에 빈빈한 권력 카르텔을 통한 권력 장악 행위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반대의 이유는 내가 권력을 가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오만한 권력이 만들어내는 불화와 독점이 불러오는 사회적 비용이 엄청나기 때문이며, 동시에 보다 나은 세계를 위해서 일해야 할 학문적 성실성과 도덕성의 훼손 때문이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살아온 이들이 상대의 사소한 실수를 침소봉대하며 나무라는 행위를 바라보는 것 역시 역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결국 하나님 앞에서 서야 할 벌거벗은 자기 존재를 감추는 행위이며, 진실하지도 않을 뿐 더러 정직하지 못한 공적 위선이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질 것을 예감하며 제자들과 길을 걷던 예수는 권력투쟁에 나선 제자들을 나무라셨다. “내가 가르친 것은 그게 아니다”라는 요지였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이 가진 권력은 그것을 행사하며 동료 인간을 지배하는 권력이지만, 내가 가르쳐온 것은 그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밝히셨다. 기독교인으로 소명을 받아 신학의 길을 걷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권력투쟁에 나서는 일은 본질을 망각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지난 2월 내가 미국의 휴스톤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찾았을 때 나는 박물관 입구에 세워진 하나의 포스터를 보았다. 무참한 인간 학살이 일어난 정황을 드러내고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 입구이기에 그 포스터는 더욱 의미 심장 했다. 그 포스터에는 역사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세 가지 역할에 대한 상징적 삼각형이 담겨 있었다. Triangle: Rescuers, Bystanders, Perpetrators: Which role do you choose? (삼각형: 남을 구하는 이들, 방관자들, 나쁜 짓을 행하는 자들: 그대는 어느 자리를 선택하고 있는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교리화한 이들은 영적인 구원이라는 개념으로 삶을 몰수해 왔다. 그러나 성서의 예수는 분명 이 삼각구도 안에서 살아가던 분이었고, 이 삼각구도가 우리 삶의 범주임을 명확하게 밝히신 분이다. 예수는 방관자가 아니라 참된 구원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우리에게 그런 삶을 가르치셨다. 더구나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몰려 다니며 악행을 하며 약한 자들을 괴롭히는 무리들에 우리가 들 것을 경고하시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을 로마 제국주의와 분리시키기 위하여 삶의 지평에서 퇴각시키고 영육이원론에 종속시킨 신학자들 자신들은 제국주의의 권력자들과 나란히 세상의 부와 권력을 향유하곤 했다. 이단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렇듯 예수의 가르침을 축소 왜곡시키는 자들인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인로 하여금 사회문제를 인식함에 있어서 유아기적인 존재로 남겨두고 영원히 후견하려 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존하는 것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습성을 버려야 한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서의 메시지는 현실인식에 대한 명료한 판단을 거친 후에 일어나야 할 고백이다. 예컨대 히틀러가 1100만의 생명을 학살하고 있을 때, 식탁에 둘러앉아 그들의 통치자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을 기도하고, 감사의 눈물을 흘린다면 이는 신앙인이 아니라 악마적 낭만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빗어내는 불의로 인하여 무수한 생명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현장에서 억압자의 감사는 위선이며 순진함으로 가장한 영적 타락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지금 현존하고 있는 질서를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신앙의 기준을 먼저 가져야 한다. 하나님 나라 지평을 잃어버린 신학과 신앙은 조금 과격하게 말한다면 쓰레기에 불과하고, 칼 막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종교라는 아편일 수밖에 없다. 사실상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란, 그것이 보수주의적인 것이든 진보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사회 윤리적 가치판단의 객관적 검증이 없이면 매우 위험한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우리에게 일러준 가장 깊은 비밀 중의 하나는 보수주의자건, 자유주의자건 한결 같이 죄의 유혹과 위협 앞에 존재하기 때문에 악의 정체를 파악할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면 “순진한 악행자“이거나 종교적 교의에 세뇌를 받은 ”확신범“들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남아공의 알렌 보잭(Allan Bosak)은 사회윤리 의식이 결여된 순진함에 대하여 “순진함이여 안녕“이라고 작별을 고했다. 소설 부활에서 순진한 처녀가 교활한 네흘류도르프의 천박한 유혹을 사랑으로 착각한 순간 그녀는 자신의 삶 전부를 농락당하고 만다. 자신의 성과 인격을 값싸게 팔아넘기는 도덕적 미성숙도 어찌보면 순진함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순진함의 대가는 평생 자기 자신 앞에서 그늘진 자기 존재를 부정하거나 감추어야 하는 비극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학문하는 이들이 고귀한 학문적 열정을 손쉽게 현실주의적인 가치와 타협해 버리는 행위도 어쩌면 삶의 가치와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채 팟죽과 장자권을 맛바꾸는 어리석은 행위가 될 것이다. 목회일선에 나선이들 역시 소명을 받아 불타던 처음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커다란 떡만을 쫒아 목회의 길을 걷는 것도 악마의 눈에는 유혹하기 손쉬운 순진한 이들이 될 것이다.

순진한 만족과 감사를 넘어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일까? 그 하나님 나라는 정의와 자유와 평화와 생명 가치가 그 본유의 빛을 발하는 나라일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낼 수는 없지만, 그 하나님 나라를 닮아가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할 책임과 소명을 부여받은 존재들이다. 오직 하나님 나라를 앞당기려는 이들에 의해서만, 현재에서 만족하지 않는 이들에 의하여 현재를 넘어서는 보다 나은 미래가 열리게 된다. 생명의 역사에서 보다 나은 세계의 도래는 바로 이런 역사의 동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로부터 오는 강한 빛을 받아야 한다. 이 빛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망각하게 하는 우리의 미성숙한 순진함을 향하여 작별을 고해야 한다. 이 미성숙을 안고 가는 한 우리는 죄의 유혹에서 벗어날 길이 없고, 악의 조롱과 희롱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이런 길을 가는 한 우리는 예수를 등지며 살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현존하는 우리의 삶의 조건들(what is)을 하나님 나라(what should be) 빛에서 바라볼 때만 우리는 진정한 예언자가 될 수 있다. 보이게 보이지 않게 직간접적인 폭력구조에 참여하면서 누군가를 피해자로 만들면서 순진한 예언자인체 하는 것은 종교 사기꾼이 되어 하나님 없이 자기 만족에 놀아나는 헛된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는 이 삼각형 속에서 어느 편을 택하고 있는가?

Sunday, March 2, 2008

The Cry of the former Japanese Military Forced Sex Slaves





삼일절 기념행사에서 이 대통령이 “과거를 털고 가자”고 선언했다. 과거 규명에 집착하는 것은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실용적이라는 말이 유행이 되어 버린 요즈음 많은 이들이 가치판단에 있어서 혼란을 느끼고 있다. 실용적인 것이면 그것이 선한 것이고 좋은 것인 것처럼 여기저기서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문 기자들도 실용주의의 허점에 대하여 논하기보다는 마음으로 호응하는 태도들을 보이고 있다. 실용주의가 가져올 그 무엇에 대한 환상들이 만들어 지고 있는 것이 나는 내심 불안하다.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일본군 성노예로 징발되어 아름다운 젊은 날을 굴욕과 수치로 살아왔던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며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무려 19년 동안이나 시위를 벌여 온 뜻을 묵살하듯 이 대통령은 이제 “과거를 털고 가자”고 선언했다. 과거를 털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실용 정신이 아니라 피차의 인간다움을 보장하는 인간 본유의 존엄한 가치를 상호 인정하고 보장하는 정신이 앞서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가해자와 피해자를 향하여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이제 털고 가자는 논리에 다름이 아니다.

실용주의적 가치는 존재론적인 가치를 동반하지 않을 때 너무나 쉽게 천박한 장삿꾼의 논리로 전락한다. 이 대통령의 경제를 살리겠다는 약속을 믿기보다 나는 그의 가치관에 대하여 점점 깊은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이미 대통령 선거 당시부터도 그러했지만 이번 삼일절 기념행사에서 그의 주장을 들으면서 나는 경제는 있지만 민족 자존과 영혼이 결핍된 것을 느꼈다. 그가 말하는 “털고 가자”는 말에서 “가자”는 곳이 과연 어디일까? 인간다움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수년간 젊은 여성의 몸과 인권을 유린한 증거와 증언들이 즐비한데 이를 넘어서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나는 이명박 대통령의 주장에서 일본군 성노예로 한 많은 삶을 구차하게 살아온 할머니들의 정신와 요구조차 경제논리로 묵살해 버리며 일본 정부의 환심을 사려는 천박함을 느꼈다. 그는 한글 철자법을 번번이 틀리게 사용하면서도 인수위를 앞세워 영어의 중요성을 주장하여 많은 이들을 황당하게 만들었다. 경제적 효용성을 불러올 수만 있다면 대한민국의 존재론적 가치와 국민의 혼이 담긴 국어조차도 외국어로 대치할 수 있다는 논리는 영어의 기능적 중요성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참으로 해괴하기만 하다.

오래 전 고려장이라는 악습이 있었다. 나이들고 쓸모없는 노인들을 깊은 산속에 산채로 버려두는 것이다. 문명사회라면 생존 조건이 열악한 당시에 노동할 수 없는 소모적인 존재인 노인들을 산채로 내다 버리는 논리는 받아들여 질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 동아시아 일본군 성노예로 붙잡혀 갔던 네델란드 인이나 대만인들은 일본인들이 사적 차원에서 성금을 거두어 경제적 보상하겠다는 것을 경제논리로 받아들였지만 우리 할머니들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며 이를 거부해 온 분들이다.

그것도 민족의 자주와 자존을 지키려 분연이 일어섰던 삼일절 아침 일본군 성노예로 인간다움을 부정당한 기억을 안고 있는 할머니들의 저항과 항의를 묵살하듯 “이제는 털고 가자“는 이 대통령의 주장은 존재론적인 가치를 상실한 실용주의의 한계를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 아닐 수 없다. 가치란 실용주의적 가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움의 가치를 지켜주는 존재론적인 가치, 인가다움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깊은 의무를 동반한 가치도 있고, 경제논리와 상관없이 자신을 성찰하며 의와 진실과 덕을 지키기 위하여 물질적 필요를 최소화하며 살아가게 하는 가치도 있다.

개인이나 사회를 막론하고 인간다움의 의무와 덕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경우 필경 천박한 상업주의에 빠져 스스로의 가치를 교환할 수 있는 시장의 가치로 셈하여 영혼을 잃고 마는 개인이나 집단이 될 수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앞에 두고 인간의 존엄함과 권리를 존중해야 하는 원칙을 포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인류사에 남은 무수한 오류를 망각한 논리이거나 처사일 수밖에 없다. 최소의 비용을 들여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법이란 경제와 정치를 이용하여 다른 이의 권리를 빼앗거나 묵살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근래 역사만 돌아본다 하여도 히틀러가 독일 경제 부흥과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천백만의 생명들을 희생시켰던 나치의 전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역사를 망각한 이들이 저지른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그리고 이락전쟁의 배후는 여전히 경제논리를 앞세운 전쟁 이데올로기였다. 이런 역사적 오류를 불러온 장본인들은 언제나 경제를 외쳤으며, 약자들을 희생시켰다. 악마들은 무덤가나 습지에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부정하며 돈과 권력을 사랑해 온 집단이나 개인의 영혼을 먼저 점령한다.

악마에게 사로잡힌 이들은 스스로의 인간다움이나 타인의 존재가치를 망각한 존재가 되어간다. 이 경우 악마의 유혹에 빠진 이들은 스스로 악의 대행자가 되는 것을 지혜로 여기거나 성실한 것으로 판단한다. 이들은 대중적 지지를 얻기에 능하여 지혜롭기까지 하다. 온갖 교활함을 순진함으로 가장하거나, 대중의 감탄과 지지를 얻기 위하여 스스로의 성실성과 열심을 입증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인간의 존재론적 가치를 업신여기는 것이며, 특권을 누리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 아무도 모르게 분리되는 것이다.

히틀러에 의하여 차별받아 학살당한 600만의 유태인 외에도 유럽 전역에서 성적 소수자, 정신박약인, 장애인, 그리고 집시들이 집단으로 학살당했던 기억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마태복음 25장에 그려지고 있는 최후 심판의 비유를 잊어서는 안 된다. 지극히 적은 자를 업신여기는 이들, 더구나 자신의 동료나 이웃을 해하는 이들은 하늘의 시민이 될 수 없다. 업적을 나열하며 항의하는 한 편의 사람들은 실용주의 노선을 택한 사람들로서 예수의 긍정을 받지 못했다. 오직 지극히 적은 소자(小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지키는 이들만이 참된 예수의 벗이 되는 것이다.

못난 정치가들이 빼앗긴 나라의 수치스러운 운명을 온 몸으로 견디며 일본군 성 노예로 팔려가 무수한 낮과 밤 몸과 마음을 철저히 유린당한 기억을 가진 할머니들의 울부짓음에 귀를 막고, 천연덕스럽게 경제논리를 주장하는 대통령에게 나는 결코 지지를 보낼 수 없다. 어느 할머니가 “네가 그리도 수치스러운 내 삶을 살았느냐? 왜 네가 나서서 나를 대변하며 ‘털고 가자“ 하느냐”는 항의는 매우 정당한 것이다. 국가는 국민의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존엄성을 지켜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경제는 인간다움의 조건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필요충분조건은 결코 아니다. 민주주의 원칙을 존중할 의무가 있는 정치권력이 얍삭한 경제논리을 앞세워 존엄함을 평생 짓밟힌 이들 가슴에 맺힌 한의 외침을 묵살한다면 그 권력은 이미 악마를 닮아가는 것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