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rch 2, 2008

The Cry of the former Japanese Military Forced Sex Slaves





삼일절 기념행사에서 이 대통령이 “과거를 털고 가자”고 선언했다. 과거 규명에 집착하는 것은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실용적이라는 말이 유행이 되어 버린 요즈음 많은 이들이 가치판단에 있어서 혼란을 느끼고 있다. 실용적인 것이면 그것이 선한 것이고 좋은 것인 것처럼 여기저기서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문 기자들도 실용주의의 허점에 대하여 논하기보다는 마음으로 호응하는 태도들을 보이고 있다. 실용주의가 가져올 그 무엇에 대한 환상들이 만들어 지고 있는 것이 나는 내심 불안하다.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일본군 성노예로 징발되어 아름다운 젊은 날을 굴욕과 수치로 살아왔던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며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무려 19년 동안이나 시위를 벌여 온 뜻을 묵살하듯 이 대통령은 이제 “과거를 털고 가자”고 선언했다. 과거를 털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실용 정신이 아니라 피차의 인간다움을 보장하는 인간 본유의 존엄한 가치를 상호 인정하고 보장하는 정신이 앞서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가해자와 피해자를 향하여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이제 털고 가자는 논리에 다름이 아니다.

실용주의적 가치는 존재론적인 가치를 동반하지 않을 때 너무나 쉽게 천박한 장삿꾼의 논리로 전락한다. 이 대통령의 경제를 살리겠다는 약속을 믿기보다 나는 그의 가치관에 대하여 점점 깊은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이미 대통령 선거 당시부터도 그러했지만 이번 삼일절 기념행사에서 그의 주장을 들으면서 나는 경제는 있지만 민족 자존과 영혼이 결핍된 것을 느꼈다. 그가 말하는 “털고 가자”는 말에서 “가자”는 곳이 과연 어디일까? 인간다움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수년간 젊은 여성의 몸과 인권을 유린한 증거와 증언들이 즐비한데 이를 넘어서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나는 이명박 대통령의 주장에서 일본군 성노예로 한 많은 삶을 구차하게 살아온 할머니들의 정신와 요구조차 경제논리로 묵살해 버리며 일본 정부의 환심을 사려는 천박함을 느꼈다. 그는 한글 철자법을 번번이 틀리게 사용하면서도 인수위를 앞세워 영어의 중요성을 주장하여 많은 이들을 황당하게 만들었다. 경제적 효용성을 불러올 수만 있다면 대한민국의 존재론적 가치와 국민의 혼이 담긴 국어조차도 외국어로 대치할 수 있다는 논리는 영어의 기능적 중요성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참으로 해괴하기만 하다.

오래 전 고려장이라는 악습이 있었다. 나이들고 쓸모없는 노인들을 깊은 산속에 산채로 버려두는 것이다. 문명사회라면 생존 조건이 열악한 당시에 노동할 수 없는 소모적인 존재인 노인들을 산채로 내다 버리는 논리는 받아들여 질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 동아시아 일본군 성노예로 붙잡혀 갔던 네델란드 인이나 대만인들은 일본인들이 사적 차원에서 성금을 거두어 경제적 보상하겠다는 것을 경제논리로 받아들였지만 우리 할머니들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며 이를 거부해 온 분들이다.

그것도 민족의 자주와 자존을 지키려 분연이 일어섰던 삼일절 아침 일본군 성노예로 인간다움을 부정당한 기억을 안고 있는 할머니들의 저항과 항의를 묵살하듯 “이제는 털고 가자“는 이 대통령의 주장은 존재론적인 가치를 상실한 실용주의의 한계를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 아닐 수 없다. 가치란 실용주의적 가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움의 가치를 지켜주는 존재론적인 가치, 인가다움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깊은 의무를 동반한 가치도 있고, 경제논리와 상관없이 자신을 성찰하며 의와 진실과 덕을 지키기 위하여 물질적 필요를 최소화하며 살아가게 하는 가치도 있다.

개인이나 사회를 막론하고 인간다움의 의무와 덕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경우 필경 천박한 상업주의에 빠져 스스로의 가치를 교환할 수 있는 시장의 가치로 셈하여 영혼을 잃고 마는 개인이나 집단이 될 수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앞에 두고 인간의 존엄함과 권리를 존중해야 하는 원칙을 포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인류사에 남은 무수한 오류를 망각한 논리이거나 처사일 수밖에 없다. 최소의 비용을 들여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법이란 경제와 정치를 이용하여 다른 이의 권리를 빼앗거나 묵살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근래 역사만 돌아본다 하여도 히틀러가 독일 경제 부흥과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천백만의 생명들을 희생시켰던 나치의 전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역사를 망각한 이들이 저지른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그리고 이락전쟁의 배후는 여전히 경제논리를 앞세운 전쟁 이데올로기였다. 이런 역사적 오류를 불러온 장본인들은 언제나 경제를 외쳤으며, 약자들을 희생시켰다. 악마들은 무덤가나 습지에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부정하며 돈과 권력을 사랑해 온 집단이나 개인의 영혼을 먼저 점령한다.

악마에게 사로잡힌 이들은 스스로의 인간다움이나 타인의 존재가치를 망각한 존재가 되어간다. 이 경우 악마의 유혹에 빠진 이들은 스스로 악의 대행자가 되는 것을 지혜로 여기거나 성실한 것으로 판단한다. 이들은 대중적 지지를 얻기에 능하여 지혜롭기까지 하다. 온갖 교활함을 순진함으로 가장하거나, 대중의 감탄과 지지를 얻기 위하여 스스로의 성실성과 열심을 입증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인간의 존재론적 가치를 업신여기는 것이며, 특권을 누리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 아무도 모르게 분리되는 것이다.

히틀러에 의하여 차별받아 학살당한 600만의 유태인 외에도 유럽 전역에서 성적 소수자, 정신박약인, 장애인, 그리고 집시들이 집단으로 학살당했던 기억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마태복음 25장에 그려지고 있는 최후 심판의 비유를 잊어서는 안 된다. 지극히 적은 자를 업신여기는 이들, 더구나 자신의 동료나 이웃을 해하는 이들은 하늘의 시민이 될 수 없다. 업적을 나열하며 항의하는 한 편의 사람들은 실용주의 노선을 택한 사람들로서 예수의 긍정을 받지 못했다. 오직 지극히 적은 소자(小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지키는 이들만이 참된 예수의 벗이 되는 것이다.

못난 정치가들이 빼앗긴 나라의 수치스러운 운명을 온 몸으로 견디며 일본군 성 노예로 팔려가 무수한 낮과 밤 몸과 마음을 철저히 유린당한 기억을 가진 할머니들의 울부짓음에 귀를 막고, 천연덕스럽게 경제논리를 주장하는 대통령에게 나는 결코 지지를 보낼 수 없다. 어느 할머니가 “네가 그리도 수치스러운 내 삶을 살았느냐? 왜 네가 나서서 나를 대변하며 ‘털고 가자“ 하느냐”는 항의는 매우 정당한 것이다. 국가는 국민의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존엄성을 지켜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경제는 인간다움의 조건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필요충분조건은 결코 아니다. 민주주의 원칙을 존중할 의무가 있는 정치권력이 얍삭한 경제논리을 앞세워 존엄함을 평생 짓밟힌 이들 가슴에 맺힌 한의 외침을 묵살한다면 그 권력은 이미 악마를 닮아가는 것이 아닐 수 없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