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진함이여 안녕...
우리 존재는 정황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what is"와 “what should be"사이에 놓여 있다. 현재의 삶의 조건에 대하여 만족하는 이가 가지는 희망은 현재의 안일함과 평화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일 게다. 그러나 현재의 삶의 대하여 자신이 바라는 바와는 달리 만족하지 못하는 이는 현재의 지속성을 거부하고 부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에른스트 블로흐는 의식을 가진 존재는 결핍을 느끼는 존재이며, 끊임없이 보다 나은 자기 정체성을 찾아 나간다고 보았다. 한 자리에 자신을 정위시키고 현재에 집착하며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살아가는 이에게는 천박한 만족은 있을지 몰라도 꿈과 변화가 결여되기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만족이 불러오는 나태와 변화 없는 삶의 무료함을 달래려 무엇인가 다른 천박한 만족을 찾게 된다. 그것이 물질적 풍요를 의미하는 성공이든, 권력을 휘두르며 다른 이 위에 군림하는 오만을 즐기는 것이든, 육체적 쾌락을 낭만화하며 정당화하는 왜설이든 그 본질은 같다. 그러므로 꿈이 없는 이를 만나는 길은 이미 타락과 퇴락의 길에 들어 선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종차별이 폐지된 남아공에서 백인들이 사람이 먹는 음식에 자신의 오줌을 넣어 흑인에게 먹이는 행위를 한 사실이 동영상을 통해 알려졌다. 인간이 자신의 배설물을 다른 동료인간에게 먹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자신이 인간됨의 권위를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사이존재이며 더불어 존재한다. 자신과 자신의 측근을 제외하고 다른 동료인간을 유희의 대상으로 보며 그 인격과 존엄함을 희롱하는 것은 도덕적 범죄다. 이런 도덕적 범죄는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인종차별, 성차별, 계급차별, 그리고 성적 소수자 차별, 장애인 차별 등등의 사건들은 사실 우리 사회의 인간됨의 지표를 드러내는 수치다. 지난 2008년 2월 27일 미국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교 이사회는 여성 학자인 Serena Jones(전 예일 대 교수)를 유니온 신학대학교 총장으로 선출했다. 한쪽에서는 백인들이 흑인에게 자신의 오줌을 먹이는 야만 행위를 하는가 하면, 한 쪽에서는 백인이 주류인 사회에서 역사적으로 차별받아 온 여성을 자기들의 대학의 총장으로 선출한 것이다. 차별의식을 극복한 같은 백인들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다른 존재들이다. 차별주의자들은 영원히 후진적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차별주의자들은 구차한 이유를 들어 고귀한 인간에게 집단적으로 비열한 관계의 폭행을 가한다.
나는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 과정을 지켜보면서 미국 민주당의 도덕적 저력을 느끼고 있다. 그들은 이미 여성인 힐러리와 흑인 남성인 오바마중 한 사람을 그들의 대통령으로 세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누가 후보가 되든지 미국의 역사를 바꾸는 일이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성이 대통령 후보가 되는 일은 미국의 건국 역사 이래 한 번도 없었다. 더구나 흑인이 대통령 후보로 폭넓은 지지를 받아 온 역사도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우 손쉽게 미국 제국주의를 들먹이며 미국을 비판한다. 그들의 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이미 막강하여 약소국가들과의 자유로운 경쟁 그 자체가 불공정한 구조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정치 영역에서도 우리는 미국의 지배구조를 신제국주의라고 비판한다. 이런 비판을 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 결여될 때 나는 이런 비판에 동조하기가 매우 어렵다. 도덕적 통전성이 결여된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의 공정성과 투명성에 비하여 한없이 불투명한 권력구조를 가진 우리 사회를 갱신하려는 의지 없이, 권력 오용을 비판할 자기 성찰이 결여된 이들이 마치 정의의 투사처럼 대외적인 공정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참으로 우스꽝 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물 안의 독선적 개구리처럼 외부의 개입에 대해서는 자율권을 주장하며 저항적 투사가 되다가 우물 안에서는 무서운 독재자의 얼굴을 하고 주어진 권력을 제국주의자들보다도 더 천박하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나는 제국주의에 대하여 반대한다. 동시에 우리 내부의 반민주주의적 독선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제 3세계에 빈빈한 권력 카르텔을 통한 권력 장악 행위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반대의 이유는 내가 권력을 가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오만한 권력이 만들어내는 불화와 독점이 불러오는 사회적 비용이 엄청나기 때문이며, 동시에 보다 나은 세계를 위해서 일해야 할 학문적 성실성과 도덕성의 훼손 때문이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살아온 이들이 상대의 사소한 실수를 침소봉대하며 나무라는 행위를 바라보는 것 역시 역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결국 하나님 앞에서 서야 할 벌거벗은 자기 존재를 감추는 행위이며, 진실하지도 않을 뿐 더러 정직하지 못한 공적 위선이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질 것을 예감하며 제자들과 길을 걷던 예수는 권력투쟁에 나선 제자들을 나무라셨다. “내가 가르친 것은 그게 아니다”라는 요지였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이 가진 권력은 그것을 행사하며 동료 인간을 지배하는 권력이지만, 내가 가르쳐온 것은 그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밝히셨다. 기독교인으로 소명을 받아 신학의 길을 걷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권력투쟁에 나서는 일은 본질을 망각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지난 2월 내가 미국의 휴스톤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찾았을 때 나는 박물관 입구에 세워진 하나의 포스터를 보았다. 무참한 인간 학살이 일어난 정황을 드러내고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 입구이기에 그 포스터는 더욱 의미 심장 했다. 그 포스터에는 역사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세 가지 역할에 대한 상징적 삼각형이 담겨 있었다. Triangle: Rescuers, Bystanders, Perpetrators: Which role do you choose? (삼각형: 남을 구하는 이들, 방관자들, 나쁜 짓을 행하는 자들: 그대는 어느 자리를 선택하고 있는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교리화한 이들은 영적인 구원이라는 개념으로 삶을 몰수해 왔다. 그러나 성서의 예수는 분명 이 삼각구도 안에서 살아가던 분이었고, 이 삼각구도가 우리 삶의 범주임을 명확하게 밝히신 분이다. 예수는 방관자가 아니라 참된 구원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우리에게 그런 삶을 가르치셨다. 더구나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몰려 다니며 악행을 하며 약한 자들을 괴롭히는 무리들에 우리가 들 것을 경고하시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을 로마 제국주의와 분리시키기 위하여 삶의 지평에서 퇴각시키고 영육이원론에 종속시킨 신학자들 자신들은 제국주의의 권력자들과 나란히 세상의 부와 권력을 향유하곤 했다. 이단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렇듯 예수의 가르침을 축소 왜곡시키는 자들인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인로 하여금 사회문제를 인식함에 있어서 유아기적인 존재로 남겨두고 영원히 후견하려 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존하는 것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습성을 버려야 한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서의 메시지는 현실인식에 대한 명료한 판단을 거친 후에 일어나야 할 고백이다. 예컨대 히틀러가 1100만의 생명을 학살하고 있을 때, 식탁에 둘러앉아 그들의 통치자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을 기도하고, 감사의 눈물을 흘린다면 이는 신앙인이 아니라 악마적 낭만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빗어내는 불의로 인하여 무수한 생명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현장에서 억압자의 감사는 위선이며 순진함으로 가장한 영적 타락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지금 현존하고 있는 질서를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신앙의 기준을 먼저 가져야 한다. 하나님 나라 지평을 잃어버린 신학과 신앙은 조금 과격하게 말한다면 쓰레기에 불과하고, 칼 막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종교라는 아편일 수밖에 없다. 사실상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란, 그것이 보수주의적인 것이든 진보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사회 윤리적 가치판단의 객관적 검증이 없이면 매우 위험한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우리에게 일러준 가장 깊은 비밀 중의 하나는 보수주의자건, 자유주의자건 한결 같이 죄의 유혹과 위협 앞에 존재하기 때문에 악의 정체를 파악할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면 “순진한 악행자“이거나 종교적 교의에 세뇌를 받은 ”확신범“들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남아공의 알렌 보잭(Allan Bosak)은 사회윤리 의식이 결여된 순진함에 대하여 “순진함이여 안녕“이라고 작별을 고했다. 소설 부활에서 순진한 처녀가 교활한 네흘류도르프의 천박한 유혹을 사랑으로 착각한 순간 그녀는 자신의 삶 전부를 농락당하고 만다. 자신의 성과 인격을 값싸게 팔아넘기는 도덕적 미성숙도 어찌보면 순진함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순진함의 대가는 평생 자기 자신 앞에서 그늘진 자기 존재를 부정하거나 감추어야 하는 비극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학문하는 이들이 고귀한 학문적 열정을 손쉽게 현실주의적인 가치와 타협해 버리는 행위도 어쩌면 삶의 가치와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채 팟죽과 장자권을 맛바꾸는 어리석은 행위가 될 것이다. 목회일선에 나선이들 역시 소명을 받아 불타던 처음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커다란 떡만을 쫒아 목회의 길을 걷는 것도 악마의 눈에는 유혹하기 손쉬운 순진한 이들이 될 것이다.
순진한 만족과 감사를 넘어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일까? 그 하나님 나라는 정의와 자유와 평화와 생명 가치가 그 본유의 빛을 발하는 나라일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낼 수는 없지만, 그 하나님 나라를 닮아가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할 책임과 소명을 부여받은 존재들이다. 오직 하나님 나라를 앞당기려는 이들에 의해서만, 현재에서 만족하지 않는 이들에 의하여 현재를 넘어서는 보다 나은 미래가 열리게 된다. 생명의 역사에서 보다 나은 세계의 도래는 바로 이런 역사의 동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로부터 오는 강한 빛을 받아야 한다. 이 빛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망각하게 하는 우리의 미성숙한 순진함을 향하여 작별을 고해야 한다. 이 미성숙을 안고 가는 한 우리는 죄의 유혹에서 벗어날 길이 없고, 악의 조롱과 희롱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이런 길을 가는 한 우리는 예수를 등지며 살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현존하는 우리의 삶의 조건들(what is)을 하나님 나라(what should be) 빛에서 바라볼 때만 우리는 진정한 예언자가 될 수 있다. 보이게 보이지 않게 직간접적인 폭력구조에 참여하면서 누군가를 피해자로 만들면서 순진한 예언자인체 하는 것은 종교 사기꾼이 되어 하나님 없이 자기 만족에 놀아나는 헛된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는 이 삼각형 속에서 어느 편을 택하고 있는가?
Wednesday, March 5, 2008
Let's say Farewell to Innocence...
Posted by
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at
10:38 AM
Subscribe to:
Post Comments (Atom)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