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March 12, 2008

Be careful brutal dogs!

개(犬) 조심!



인간이 가진 습속(habits)은 다양한 조건들의 집합이다. 시대마다 환경마다 그리고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으나 우리 한국 사회가 보여주는 습속은 가히 "절망적"이다. 이번 안기부 도청사건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안기부의 것이라고만 여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절망적인 정황은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표리부동한 습속의 일각이라는 생각이 나를 더 절망스럽게 한다. 간혹 나는 우리사회와 교회가 전근대 이전의 종족사회가 아닌가 하는 착각을 가질 때가 있다. 겉은 현대사회인데 속은 종족적 편견과 가치, 종족의 이익관계가 모든 가치체계의 기준이 되어버린 사회, 그리하여 정의와 평등과 자유에 대한 담론이 재갈 물려진 사회나 집단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국가 안전을 위하여 부여받은 권력을 가지고 비밀업무를 하던 이들이 주요 경제 정치인들의 대화를 비밀리에 엿듣고 녹음한 후 그 자료를 축적해 둔 행위는 국가안보와 사회 안전을 위한 예방적 조치라기보다는 권력주변부에 있는 이들의 약점을 잡고 있다가 비열한 공격을 위한 자료로 삼으려 했다는 데 그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들은 불법적인 행위를 목격 경청했으면서도 그 불법을 묵인하고 방임해 왔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진 자가 우리 사회의 정의집행 과정을 임의로 조작한 것이리라. 이들이 밝힌 일각의 정보에 의하면 정치·법조·언론간의 유착을 상징하는 불법적인 뇌물수수가 백억 대를 상회한다하니 권력자들이 스스로의 발등을 찍으며 그 진상을 다 밝힐지 의문이다. 삼성의 비자금 공여에 연루된 정관계의 비리의 고리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나는 정말 궁금하다.

일부 서울대 공대 교수들이 연구비 사용에 대한 허위 영수증을 제시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하였고, 그 중의 한 분은 16억원에 이르는 연구비를 착복을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학술 진흥 재단에서 500만원짜리 연구비 하나 얻으려면 국민학생 숙제하듯 연구 계획서를 써내야 하는 일반 인문학 교수들의 현실에 비하여 너무나 엄청난 특권을 누려온 그들은 제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까지 착복하는 파렴치한 이들었다. 권력의 개입을 금기시하며 학문과 도덕의 자율성을 보장해 준 대가가 이러한 탐욕과 부정직함의 노골화로 나타난다면 앞으로 대학사회의 도덕성과 진실성은 누가 담보할 수 있을 것인가? 외국 대학의 경우 공금을 개인 돈 쓰듯이 하며 보스처럼 행세하는 총장이 하루가 멀다 하고 보직자들과 회식을 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권력을 가진 이에게 공과 사의 경계가 애매한 힘 있는 자의 재량권을 허용하는 대학 사회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끊임없는 이해관계를 둘러싼 갈등으로 인하여 바람 잘 날 없는 한국 교회의 실상도 마찬가지이다. 선거 때마다 측근을 지원하기 위하여 돈 봉투를 돌리는 목사들과 장로들, 종교권력을 쟁취하려는 파벌싸움에 개나 도나 모두 말려드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러한 집단 안에서 진정한 도덕적 반성과 비판담론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의심한다. 개인적으로는 정의와 진실을 설교하던 이들이 정작 정의와 진실을 왜곡하고 조작하는 데 앞장서는 경우만이 아니라 정의와 진실을 지키려 하는 이들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무수히 보아왔기 때문이다. 먼 곳의 것들을 비판하지 않고 자기 집단의 비리와 불의를 지적하는 행위는 종족주의적 집단의 공격 대상이 된다. 그러나 눈 앞의 도둑을 놓아두고 먼 산을 보고 짓는 개가 어찌 명견일 수 있을까?

종교나 학계나 정치계에서도 동일한 논리가 이어지고 있다. “우리사회는 외면상과는 달리 이면에서는 이해대립에 따라 입에 담지 못할 정도의 아첨, 중상모략, 질투,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돈의 연속 이었다.” 안기부 불법 도청 팀장이었던 공운영씨가 오늘 아침 한겨레에 한 말이다. 표리부동한 가치체계에 적응하는 습속들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에서 끝나는 것일까? 이 비정상적인 습속과 가치들을 뒤집는 행위가 일어나면 그것이 비정상이 되고 집단의 명예와 이익을 반하는 반사회적인 존재로 규정되어 고발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정의에 대한 신념과 정직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심약한 자들은 개처럼 꼬리를 흔들며 권력을 가진 자에 경쟁적으로 다가서며 아첨하고, 적을 향하여 중상 모략함으로 충성심을 고백하는 방편을 택해야 하는 것이리라.

비열한 도청행위를 한 그 조차도 도청을 당하는 자들의 행태에 혐오와 구토를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동일한 도청 행위를 한 자들 중에는 그와 같이 혐오를 느끼기 보다는 유희삼아 남의 사적 대화와 비밀을 들여다보는 데 흥미진진함을 느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아첨, 중상모략, 시기와 질투가 통하는 사회는 공정한 룰이 깨어진 사회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공정한 룰에 따른 결정보다는 권력을 가진 자가 임의적으로 너무나 많은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비합리적 구조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세계에서는 사적이익을 위하여 공적인 권력을 악용하는 것을 당연시하며 방임 동조 이용하는 풍토가 만연하게 된다. 정직을 비웃고, 진실을 배반하는 아첨군들의 공범 조장행위의 결과이다. 그들은 비판을 비방으로 해석하고 분노한다. 나 역시 이런 현실에 대하여 거의 절망할 지경이다.

절망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넘겨주지 않으려면, 우리는 사적 이익을 위하여 권력을 남용하는 자들을 부단히 고발할 수밖에 없다. 권력을 오용하는 행위를 저지르는 자들은 사회의 지도층이 아니라 공공의 적이라는 점을 명시적으로 지적해야 한다. 권력 남용과 오용을 방임하는 집단은 족장에게 너무나 많은 특권을 부여하던 전근대적인 가부장적, 부족주의적 습성을 벗어나지 못한 까닭이다. 바로 이러한 습성에 물들면 교회이든, 사회이든, 정치계이든, 권력을 가진 자가 너무나 쉽게 전근대성의 권력구조로 안주한다. 권력자는 아첨과 중상모략의 수단을 사용하며 경쟁적 질투를 보이는 자들을 권력유지의 도구로 삼을 수 있고, 누군가가 권력자를 비판하면 그 주변의 아첨꾼들은 충성을 다하는 개처럼 비판자에게 달려드는 것이다. 이런 개들을 조심하고 이런 개가 되지 않도록 주의할 일이다.
(2007.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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