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용의 윤리학(Utilitarian Ethics)
얼마전 노방 전도자 한사람이 한 손에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십자가를 들고 노숙자들을 위하여 급식소를 운영하고 있는 두타스님이 시주를 청하는 자리에 와서 담대히(?) 두타 스님의 머리에 손을 대고 기도를 했습니다. 아마 그는 그것이 그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이 사진을 보고 기독교의 무례함과 매우 무식한 일방성을 비난했습니다. 합리적 설득이나 대화가 불가능한 일방적인 전도행위는 기독교를 비합리적이고 미성숙한 종교로 보이게 하는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의 가슴을 닫게 만들기도 하지요. 성폭력이나 성희롱의 경우에서 보듯이 사랑의 행위도 동의 없이 행하면 상대에게는 폭력입니다. 이런 전도 방법은 일종의 종교적 폭력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런 행위는 열광적인 승리주의적 신앙을 가진 이에게는 무용담이 되거나 자랑거리가 될 수도 있으나 참된 기독교인들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가장 효과적으로 사랑의 계명(agape)을 수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 효용의 윤리학입니다. 사람이 가치 판단을 하는 데 있어서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으로서 가지는 공동성의 문제일 것입니다. 서로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공유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한 편이 다른 한 편을 자신과 동일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경우 관계의 지속은 매우 불안정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 편이 한 편을 신분적으로 차별하거나 무시하게 되면, 다른 편은 무시를 당하거나 차별당하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그 관계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서양에서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던 일상의 오류( common fallacy)가 수정되기 시작한 것은 퀘이커들이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며 노예 제도가 그릇되었다는 사실을 주장하기 시작했던 17세기부터입니다.
17세기 이전에는 사람들이 노예제도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노예도 노예로서의 삶을 받아들여야 그 사회 안에서 생존할 수 있었지요. 칸트의 인격주의적인 윤리사상이 이런 불평등을 근본적으로 해체하게 한 윤리이론을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론을 받아들여 실천 했던 사람은 초기에는 소수였습니다. 전통적인 교리와 사회제도에 대하여 의심을 하던 퀘이커들이 제일 먼저 믿는 바에 따라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윤리적 자각과 비약은 삶에 대한 철학적 사색이나 신학적 인식에서 촉발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인식하게 되면 자신이 소중하고, 또한 다른 이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여 더욱 다른 이를 존중하고 소중히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13세기에 라인지역 신비주의자들로 알려졌던 여성 신비가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피조된 모든 존재들에 대한 동정과 평등을 인식하고 실천하려 했습니다. 이런 경우는 깊은 의무와 숭고한 삶의 가치를 직관적으로 자각하거나 인식하는 데 크게 힘을 입습니다.
이러한 의무론적 윤리나 덕의 윤리에 비하여 효용성의 윤리는 인격적인 관계보다는 물질적이며 사회적인 관계에 가장 적용되기 좋은 이론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효용성의 윤리는 “무엇이 가장 효율적인 것인가?”를 묻고, “효율성이 높은 것은 좋은 것이다“라는 도덕적 가치를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이웃을 사랑을 한다면 어떤 사랑이 가장 효율적인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모든 이웃을 공평하게 최선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 옳다”라고 말할 수 있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최대 다수에게 최고의 행복을 가져오는 방법이야말로 가장 기독교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효용성의 윤리는 주어진 정황에서 깊이 현실을 체득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현실에 대한 경험적 데이터가 가리키는 지표를 중시하게 됩니다. 따라서 효용성의 윤리는 경험을 통하여 내리는 판단을 중시합니다. 한번 실패한 것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경험의 충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만일 어느 행동이 다수의 사람들 중에 몇몇 사람에게만 특혜를 주는 것이라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혜택을 주는 방법에 비하여 편파적이며, 공정치 못한 것이라고 비판하게 될 것입니다. 소수보다는 다수를 행복하게 하는 행위가 더 크게 인정을 받고, 소수나 개인만을 위한 행위는 집단 이기나 혹은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평가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효용성의 윤리란 다수를 위한 효용가치(utility)를 극대화하는 방법이 가장 윤리적인 옳고 선한 방법이라는 결론을 불러옵니다. 따라서 우리의 경험을 총 동원하여 효용가치를 떨어드리는 방법보다는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결과를 불러 올 방안들을 찾는 것이 보다 책임적이며 옳은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보다 많은 이들을 위해, 그리고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안(the highest good, the highest number)을 찾는 것 이것이 효용성의 윤리가 가진 근본적인 원칙입니다.
따라서 효용성의 원리는 행위의 동기나 과정보다 목적을 이루어 얻는 결과에 초점을 두고 윤리적 평가를 내린다는 점에서 칸트의 동기와 원칙의 윤리학과는 다소 갈등 하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칸트의 관점에서 본다면 행위의 선함은 행위의 결과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순수한 동기에서 결과와 상관없이 평가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합니다. 반면 효용성의 윤리는 다양한 행위 중에서 보다 효율적인 행위를 찾으려면 결과가 확실히 유익해야 그 행위가 정당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정당전쟁 이론(the Just war theory)에서 전쟁행위가 정당하려면 무엇보다 악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폭력을 사용한다는 것은 결국 그 악을 극복할 수 있을 때만 정당하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효용성의 가치
효용성의 윤리는 일면 개인의 가치보다 전체 사회의 유익이라는 측면에서 적용될 소지가 많습니다. 이런 점에서 동기와 원칙을 중시하는 윤리적 판단 형식들은 개체 인격과 인격과의 관계에 우선 적용하는 이론 이라면 행위의 결과를 중시하는 이론은 사회적인 선을 도모하는 차원에서 정치, 사회, 경제, 군사적 판단에 적용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따라서 제도적 가치를 추구하는 이론적 특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집단의 논리나 전체를 중시하는 전체주의자들은 다른 어떤 이론보다 효용성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히틀러도 나치 정권의 정당성을 “독일 민족의 번영”을 위하여 라는 기치를 늘 내 세웠습니다.
이런 점에서 개인의 도덕적 판단을 유예하고 집단의 논리에 충실하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결과는 효용성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재고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효용성의 윤리가 사회를 더욱 살맛나고 좋은 사회로 만들 수 있는 원칙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지만, 소수자를 무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도 있습니다. 전체주의적 속성은 언제나 개인의 요구를 간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효용성의 윤리를 제창한 밴담(Jeremy Bentham, 1748-1832)은 우리는 가능하다면 우리 사회 구성원의 즐거움(pleasure)을 높이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 했습니다. 소외나 박탈감보다는 참여와 성취감을 불러오는 것이 훨씬더 많은 이에게 즐거움을 안겨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코통을 줄이고 쾌락을 확대하는 방안이 보다 윤리적으로 정당한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 쾌락, 혹은 즐거움이란 가치는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지만 그 지속성은 길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가 의미한 즐거움이란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기쁨이기도 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더 높고 숭고한 기쁨과 즐거움을 생각하지 못하는 일종의 “돼지의 쾌락” 같은 것이 아니냐고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존재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밴담의 아들 격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은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삶의 효용성은 즐거운 쾌락(pleasure)을 넘어선 정신적인 행복(happiness)라고 주장했습니다. 비록 고되고 힘들어도 삶의 오랜 목표를 이루어 냄으로써 얻는 행복이야말로 보다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인간다운 가치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행복이라는 가치는 다양한 해석의 지평을 열었습니다. 여기서는 고통이나 아픔을 무가치하게 보았던 밴담과는 달리 보다 나은 행복을 위하여 희망을 가지고 인내할 수 있는 것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밀은 밴담과는 달리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쾌락보다는 그 지속성이 길고 의미가 깊은 행복을 더욱 중요한 행위의 목표로 삼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쾌락이나 행복을 추구하는가에 따라 우리가 얻는 즐거움이나 행복의 지속성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관점입니다.
이들에 비하여 밀 이후의 사회철학자들은 밴담이나 밀보다도 더욱 추상적인 가치들이 더 심원한 행복의 조건이라는 점을 주장했습니다. 무어(G.E. Moore, 1873-1958)는 삶의 효용성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 정의, 미, 지식과 같은 이념들( ideals of freedom, knowledge, justice and beauty)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상이 사라진 사회는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회라는 것은 19세기 초 전체주의와 전쟁을 통하여 분명하게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념들이 가진 가치를 어떻게 셈하고 펴가할 수 있을지의 문제는 남게 됩니다. 소중한 가치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지만 효용성의 관점에서 가치를 평가 하기에는 너무나 추상적인 까닭입니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스탠포드 대학의 애로우(Kenneth Arrow)는 본유의 가치란 우리들이 선호하는 것(preferences)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효용성의 가치에 인간이 자유를 가지고 그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결정권까지 포함시킨 것이지요. 따라서 인간이 가진 선호도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다원성, 자결성, 그리고 선택권들을 존중하는 사회의 형성이 효용성의 윤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라는 것입니다. 개체인간의 감정과 합리적 목적, 그리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과 정의가 보장된 사회, 나아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다양하게 인정하는 가치, 그것이 선호성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입장에서는 행복을 가져오는 가치들이 다양하기 때문에 개인의 선호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다는 다원적 사유와 더불어 개인이 모든 가치를 다 향유할 수 없다는 한계성 또한 인정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오늘날 인권개념의 확장을 불러와 인권보장을 위한 법적 사회적 의무를 확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운리학과 산술적 계산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이런 다양한 이론의 적용은 다양한 논리를 결과했지만 가장 실질적인 차원에서 효율성의 윤리는 정책입안이나, 경제적 계획, 그리고 대외적인 외교적 관계에 많이 적용될 이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치밀하게 적용되는 것은 행위가 불러올 효과에 대한 손익 계산(calculus of benefits and costs)입니다. 합리적으로 해가 될 것을 미리 예측하고, 또한 유익할 것을 미리 예측하여 손익 계산을 하는 것은 효용성의 윤리에서는 매우 당연한 절차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계산은 산술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가치들만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본질적인 가치, 존재론적인 가치들은 가치로 환산하기도 어렵고, 그 가치의 효과를 계산해 내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남과 북의 공동 경제구로서 개성공단을 적극 활성화 시킬 경우 막대한 재원이 들어가지만 향후 수년이 지나면 그 경제효과가 매우 클 것이라는 판단은 수치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북이 피차 호전성을 버리고, 평화를 얻게 된다면 그 평화는 양측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군사적 대립을 유지해 온 비용을 절감하게 되어 더 큰 시너지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효과에 대한 계산은 수치를 통하여 셈해 낼 수 있지만 평화라는 가치는 일정한 양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가치이므로 재화로 환산해 내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 국사독재에 의하여 경제개발이 촉진되고 있을 때 나라의 부를 확장해 나가기 위하여 무수한 노동자들의 인권을 짓밟았습니다. 하루에 1달러도 안 되는 임금을 받고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일하던 노동자들의 고통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습니다. 군사정부는 외국의 기업들을 유치하기 위하여 저임금 정책을 도입하였고, 노동운동을 압살했습니다. 이런 군사독재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가치는 매우 악성화된 효율성의 윤리를 적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인권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시각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효용성의 윤리는 내면적 가치, 보이지 않는 가치, 추상적 가치, 인격적 가치와 같은 것들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수치로 환산되거나 수치로 작용해서 이윤을 불러오거나 극대화된 재생산 구조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고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권사상의 확대 발전을 통하여 현대 사회에서는 인권과 신뢰도 중요한 무형 자산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견해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미래의 결과를 예측하고 행동양식을 정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효용성의 윤리는 매우 전략적이며 의도적인 행위를 지향합니다. 여기서 산술적인 계산을 필연적으로 도입하게 되는 데 주로 측정하는 방법은 수치의 증가나 저하에 따라 쾌락, 행복, 이념, 선호성 등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행복의 지수를 떨어뜨리는 고통, 불편, 혼란, 통제, 억압 등의 요건들을 최대한 제거하고 행복의 조건을 확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산술적 계산의 목표입니다. 여기서 쉽게 평가할 수 없는 가치, 행복, 사랑, 배려, 동정, 가족, 정직 등의 가치들은 산술적으로 계산하기 어려워 소홀히 처리되기 쉽습니다. 더구나 힘의 문제를 다루는 정치나 물질적 행복을 다루는 경제적 영역에서는 추상적인 가치들은 자연스럽게 배제될 수 있습니다. 생산성과 물질적 재화를 높이는 데 일단 목적을 두거나, 힘의 강화를 위하여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방편을 동원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러한 효용성의 윤리는 우리 주변에서 우리 스스로 가장 많이 적용하는 보이지 않는 윤리 이론입니다. 우리의 선호도를 결정하는 동기와 계기는 사실상 효율적인 가치판단을 따르는 경우가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옷을 하나 사도, 문구점에 가서 연필을 고를 때도, 컴퓨터를 구입하거나 심지어는 시장에서 장을 보는 사람의 의식에서는 이런 계산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셈입니다. 연애를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직장을 선택하거나 심지어는 성직자가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이런 가치판단의 구조를 운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무엇이 우리 삶을 가장 효율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인가?“ 라는 질문은 개인, 가정, 사회, 정부, 그리고 모든 단위의 사회적 제도를 움직여 나가는 목적 지향적인 윤리적 질문으로서, 성공적인 결과를 추구하기 위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무엇이 진정한 의미에서 성공인가는 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행위/원칙 효용성의 윤리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가장 효용성을 극대화한다는 측면에서 두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하나는 행위중심으로 효용성을 생각하는 입장( Act-Utilitarianism) 이고 다른 하나는 원칙(Rule- Utilitarianism)입니다. 단순하게 말하여 행위 효용주의란 개인이 효용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행위를 선택하는 경우를 이르는 것이고, 원칙효용주의란 효용을 극대화하려면 기본적인 원칙은 지켜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따라서 전자가 수단과 방법을 정하지 않고 효용의 극대화를 기한다면, 후자는 효용의 극대화를 위한 일반적인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상적인 예를 들어 설명해 보도록 하지요.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매우 천재적인 과학자 K 박사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인류의 에너지 위기 문제에 대하여 연구해 온 사람으로서 그의 연구내용이 완성될 경우 인류의 에너지원 고갈에 따른 위기에 대처할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퇴근길에 테러를 당하여 병원으로 급히 옮겨져 확인된 결과 그의 심장에 손상이 되어 심장 이식 수술을 받지 않으면 2-3일 이내 죽을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내려졌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병원 응급실에 식물인간 상태로 급히 후송되어 임종을 기다리는 온 신원을 알 수 없는 A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A의 조직을 검사한 의사는 그의 심장이 K박사의 신체적 조건이 생물학적으로 맞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 의료진은 K박사를 살릴 유일한 방법은 A의 죽음을 서둘러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K 박사도 죽고, A 도 역시 조만간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의료진은 모든 것을 비밀리에 하기로 하고 A의 심장을 꺼내 K 박사에게 이식하여 K 박사의 생명을 건졌습니다. 다만 A의 죽음을 서두른 것에 대해서는 죽을 때까지 침묵 하기로 했습니다.
이 경우 행위 실용주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 커다란 유익을 가져올 행위를 한 의료진은 좋은 선택을 한 것으로 ‘잘 했다’고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죽을 사람의 심장을 꺼내 죽어가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그의 생존으로 인하여 인류사회가 더 커다란 유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판단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적은 희생을 치렀지만 얻을 수 있는 예상되는 유익은 지극히 막대한 것이었습니다. 행위실용주의는 이와 같이 특정한 행위의 결과에 대하여 유무익을 판단하는 입장을 가집니다. 이런 논리는 요즈음 스템셀 연구에서 그 정당성 유무를 논할 때 적용될 수 있습니다. 비록 태아나 혹은 복제된 생명의 죽음을 고의적으로 파괴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더 많은 이들을 불치병에서 구하는 것은 선한 일이라는 주장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원칙효용주의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경우는 “의료진이 사람을 죽여도 된다“는 논리를 일반적인 원칙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 거절됩니다. 의료진이 비밀리에 사회적 약자를 죽이거나, 혹은 인간을 귀천을 따져 서열화하여 귀한 사람을 위하여 천한 사람을 버리는 행위를 한다면 의료행위에 대한 신뢰의 원칙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A 환자와 의료진과의 신뢰의 관계가 다른 이익관계로 인하여 기만되고 파괴되는 까닭입니다. 더구나 A의 심장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사람의 죽음을 앞당기는 행위는 고의적인 살해행위로서 ”생명에 대한 해악 금지“의 원칙을 포기한 행위로 평가되어 도덕적 및 법적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원칙효용주의란 결과론적인 효용성만을 따지는 논리의 비원칙성을 보완하는 의미에서 효용성을 극대화하되 지켜야 할 룰이 있고, 그 룰을 어길 경우 전체적인 효용성은 저하될 수 밖에 없다는 견해입니다. 행위 효용주의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효용성을 극대화 할 수 있을 경우 매우 중요한 도덕률을 어길 수도 있다는 입장을 지지합니다. 그리하여 어떤 특수한 경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위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 폭탄 투하를 결정한 미국 트루만 대통령의 결정도 일면 행위효용성을 따른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살고 있었던 무죄한 십여만명의 보편적인 인간의 권리를 묵살한 것이지요. 하지만 원칙효용주의자는 보편적인 인간의 권리를 부정하는 행위가 불러오는 효용성은 인간의 존엄함을 부정하는 행위로 인하여 결코 큰 것일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최소한의 보편적인 도덕원칙을 전제하고 그 위에 효용성의 논리를 적용하라는 것이 원칙효용주의의 입장입니다.
효용성의 윤리에 대한 비판
결과지향적인 효용성의 윤리는 무조건 좋은 결과를 초래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우리로 하여금 사로잡히게 할 수 있습니다. 바로 2007년 아프카니스탄 사회선교를 위하여 파견되었던 샘물교회 교인들이 아프카니스탄 근본주의자들에 의하여 볼모가 되어 죽음의 위협을 받았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배운 이 23명의 기독교인들은 깊은 절망 속에 빠져 있다가 결국 두 명이 아깝게도 희생을 당한 비극적인 사건으로 결말이 지어졌습니다. 이들은 테러리스트들이 요구하는 요구를 들어주면 그들이 모두 살아 돌아 올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그들 중에는 죽임을 당할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위협을 받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국적으로 근본주의적인 기독교에 대하여 많은 이들의 분노가 표출 되었는 데 그 소이를 따지고 보면 테러리스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결과적으로 많은 이들이 희생될 수도 있다는 위협을 국민들이 경험했고, 또 그 결과에 대하여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던 많은 국민들이 도덕적 책임을 느껴야 하는가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렇게 강요된 상황이라 할지라도 행위 효용주의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프카니스탄 과격분자들의 그릇된 요구도 들어주며 그들에게 협력해야 한다는 논리를 결과합니다. 나치 치하의 협력자들 역시 생존의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나치에 협력할 수도 있다는 판단을 불러오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런 점에서 효용성의 윤리는 책임의 지평이 취약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효용성의 윤리가 가지는 기회주의적인 요구의 문제입니다. 더 좋은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면 기존의 논리와 원칙을 포기하고 새로운 방법을 찾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도덕적 원칙과 정직함이 유지될 경우는 개선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인격적인 배반이나 혹은 지켜야 할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 더 큰 효용적 가치를 얻기 위하여 자신의 인격적 통전성(integrity)을 포기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면 이는 인격적 신뢰나 정책적 신뢰를 받기 어려운 정황에 처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효용성의 윤리만을 앞세운다면 우리는 우리의 인격이나 도덕적 책임의 통정성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좋은 결과라는 쾌락을 즐기기 위하여 거짓말을 한다면 쾌락을 얻을 수는 있어도 인격적 정직성을 상실하고 신뢰를 받지 못하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일면 효용성의 윤리는 인격적 책임성과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양보하지 않는 칸트의 원인과 동기 중심의 윤리학과 충돌할 수 있습니다. 결과 지향적인 가치판단은 행위의 동기 자체의 순수함을 중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효용성의 윤리는 앞선 K 박사와 A 씨의 경우에서 우리가 본 바와 같이 누구의 편에서 손익 계산을 하는가의 문제가 남습니다. 의료진은 엘리트들로서 엘리트인 K 박사 편에서 가치판단을 계산했습니다. A씨는 그 가치판단의 희생자가 된 셈입니다. 이와 유사한 논리는 요즈음 학문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논란이 많은 신자유주의, 제국주의, 신식민지주의 논쟁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과연 어느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인가를 물어야 하고, 어느 나라의 효용 가치를 높이는 것인가? 제국주의적 사고가 어떤 유형의 억압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제국주의자들과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는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비판적으로 논의되는 경우에서 정치, 경제적인 손익 계산의 논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도 밝혀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럴듯하게 포장된 논리 속에서 지속적인 억압과 착취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그의 책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개인의 도덕적 선택은 자기 희생적일 수도 있고 덕스러울 수도 있지만, 집단의 판단은 개인에 비하여 매우 부도덕적인 이기성에 이끌려진다는 점을 밝혔습니다. 이 경우 우리는 그 집단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효용성의 윤리가 개인보다는 집단에게 더 잘 적용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집단의 이익을 논할 때, 우리는 그 집단에 속한 이들일 경우와 아닐 경우를 나누어 보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행위의 유익에 참여할 수 있는 이들인가 아닌가도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서구사회의 제국주의의 역사는 서구사회 구성원들에게는 유익을 가져 왔을지 몰라도, 아시아인이나 아프리카인에게는 치욕과 착취를 불러왔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회정책이나 집단의 논리 속에 차별의 논리가 배제되어야 한다는 원칙효용주의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사회 윤리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1948년 유엔에서 선언된 보편적 인권선언의 기본가치와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가치들은 효용성의 윤리의 집단이기성이나 특수한 이익을 취하려는 기회주의적 행위의 한계를 원칙적으로 드러내는 기본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그 기본 가치들이란 어떤 개인적, 집단적 행위라 할지라도 법적 토대위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법은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책무를 가지며, 그 책무는 인간의 자유, 정의, 평등, 평화, 연대의 가치를 확산해 나가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원칙을 지키면서 효용의 극대화를 기하는 것은 보다 인간화된 사회를 이루어 나가려는 인류의 도덕적 합의일 것입니다.
Saturday, November 17, 2007
Utilitarian Ethics and Its Crit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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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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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7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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