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와 정치, 그리고 강단의 권위”
기독교와 정치의 관계는 기독교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그리고 다양한 주제이다. 기독교 사상은 다양하게 정치에 영향을 주어왔고, 또한 정치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했다. 교회의 전통에 따라서 혹은 신학적 입지에 따라서,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기독교는 정치와의 상관성을 다양하게 형성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와 정치와의 상관성은 언제나 예수의 삶과 사상의 빛에서 숙고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기독교적인 정치와 교회의 관계를 벗어나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로서 혹은 신자로서 교회의 정치적 관련성을 생각해 보려면 우리는 “오늘의 한국 정치 상황 한 가운데에서 만일 예수가 여기 있다면 무엇을 말씀하실까?” 이렇게 내심 묻는 것이 매우 옳은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현장에서 말씀하는 듯 한 직접적인 예수의 말씀과 뜻을 구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와 성례와 기독교인의 삶의 근거를 밝혀온 신학적 논의로 관심을 옮길 수밖에 달리 길이 없다.
선거가 다가오고 있는 이 때 개신교 성직자들이 소위 비정치적인 정치적 발언을 이곳저곳에서 하고 있다. 비정치적인 정치적 발언이란 정치적인 발언이지만 사실은 비정치적인 종교적인 권위와 지위를 이용하여 성직자들이 신자들에게 정치적인 요구를 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다. 기상에서는 지난 늦봄 설교와 정치에 관한 토론도 벌렸다. 하지만 최근 성직자들의 정치적 발언은 신학적이기 보다는 매우 정치색이 짙은 선동적인 성향이 강하다. 바로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앞두고 일련의 목사들이 중심이 되어 목회자 70인이 현 정부의 대북 평화정책을 비난하고 거짓평화를 추구하는 좌파 정권에 대한 경고를 던지는 레이블을 붙여 주었다. 이런 양태에 반하여 진보성향의 목사들은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현정부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는 입장을 표하기도 하는 등 기독교 진영 내부에서도 좌우의 편향성이 두드러진 양상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2007년 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교계의 우파성향을 가진 성직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개신교 장로의 대통령 론”을 주장하며 신도들에게 지지를 직간접적으로 강요하고 있다. 심지어는 어떤 부흥사는 막말을 섞어가며 신앙적 차원에서 구원의 조건이라도 되는 양 누구를 찍지 않으면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울 것이라고 을러대는 이도 있는 모양이다. 참으로 가관이며, 비신학적이고, 아전인수가 아닐 수 없다. 그런가하면 많은 성직자들은 “기왕이면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느냐는 논리를 당연시하는 풍조를 만연시키고 있다. 결국 하나님의 교회를 기독교 집단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이익집단으로 만드는 행위이다. 교회를 편협한 종교적 편견으로 물들임으로써 기독교인이 아닌 대통령 후보들에게는 노골적인 종교적 차별을 가하겠다는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역대 기독교 장로 대통령에 대한 기억
지난 역사를 되돌아 볼 때 감리교 장로였던 이승만은 대한민국 국운의 초석을 놓아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깨닫지 못하고 독재와 부정부패로 점철하다가 젊은 학생들의 혁명에 의하여 권좌에서 축출되었다. 그런가하면 장로교 장로였던 김영삼은 군부독재자들의 권좌를 이어받았던 노태우와 협력하며 정권을 잡았으나 군부 독재자들과 방불한 권위주의적 행태를 드러내다가 그의 아들을 통한 천문학적인 정치자금을 모아 두는 등 참으로 부패한 기독교인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순진한 한국 기독교인들이 가지는 기독교인 장로 대통령에 대한 참신한 기대를 외면한 채 그들 스스로 깊은 이율배반을 남겼다. 이렇듯 반민주적이고 부패한 정권의 상징으로 전락하고만 이승만과 김영삼은 과연 한국 기독교의 선교에 도움을 준 것일까.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뻔뻔스러운 부정부패의 대명사가 된 기독교 정치인들을 향한 일반의 불신을 증폭시켜 기독교인들의 인격과 도덕적 성실성에 의혹을 던지는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을 뿐이다.
나는 이런 기독교 공동체의 기대와 실망의 이중주를 바라보면서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와 정치에 대한 공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을 심각하고 결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대만에는 대만 전역을 돌아보아도 감리교회가 거의 없다. 오직 대만 장로교회만이 백삼십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대만 기독교회의 중심에 서있다. 그런데 감리교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살펴보면 도나 시마다 하나 정도는 있는 데 그 힘이 매우 약하다. 현실을 살펴보니 대만 장로교회의 역사는 카나다 장로교회의 선교사들이 대만에 상륙한 이후 대만 교회와 더불어 대만의 민주화를 위하여 여러모로 공헌해 온 데 비하여 감리교회 선교는 장개석 총통이 중국 본토로부터 쫓겨 오면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장게석은 중군본토와 대립각을 세우며 반공이라는 이념을 전면에 내세우는 동시에 강압적 독재정치를 이어오다가 그의 권력을 그의 아들에게 승계시키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대만에서 감리교회는 독재자들의 교회로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이런 연유에서 대만의 감리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 막대한 지장을 받아와 감리교회의 부흥을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기독교 정치가의 오류가 교회의 선교를 가로막은 경우이다.
교회와 정치에 대한 역사적 기억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정치가에 대한 기대를 가지는 습성은 기독교의 오래된 고질병이다. 어거스틴은 콘스탄틴 대제의 개종을 통하여 로마 제국의 기독교 국교화를 내심 반가와 했지만 정치권력의 본질은 기독교화 될 수 없다고 보았던 인물이다. 그는 정치권력은 하나님의 영원한 평화를 가르치는 교회에 비하여 그 본질이 악마적인 것이라고 보면서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에는 도무지 속할 수 없는 악마의 도성(civitas diaboli)에 속하는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권력의 폭력성과 기독교의 평화론은 본질적으로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만일 어거스틴을 존경하는 성직자가 있다면 그는 정치와 종교의 본질을 혼동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일 것이다. 몇몇 부흥사들이 순간의 기지를 빌어 정치적 발언을 하며 신도들에게 권력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힌 이들을 하나님의 도성의 지도자들로 혼동시킨다면 그 성직자의 영성은 매우 혼탁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는 사실상 정치권력에 아부해온 속성이 강했다. 어거스틴 이후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정치란 폭력성을 벗어날 수 없으며 이권과 권력욕에 지배를 받는 세속적 판단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 여겨 거룩한 교회에 비견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오죽 했으면 로마 황제가 눈 내리는 겨울 교황이 머무르고 있는 가놋사 성문 앞에 주저앉아 교황의 용서를 빌며 밤이 새도록 눈을 맞으며 고해를 했겠는가? 그러므로 로만 가톨릭 교회는 교회의 권위와 성례의 권위를 이용하며 세속 정치가들을 높이는 어리석은 행위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교회와 정치간 영적인 본질적 차이를 신학적으로 깊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교회는 정치권력의 무모한 요구를 수용한 흔적이 많다. 2차대전 당시 히틀러는 가톨릭 교회의 예배에 주기적으로 참여하여 성찬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개신교 성직자들은 권력자를 향한 아부와 첨언만이 아니라 독재와 합작한 역사적 기억을 많이 남기고 있다.
교회가 정치권력과 적절히 타협한 흔적을 우리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가톨릭 교회의 신성함을 부정하는 한편, 정치권력의 세속성보다 정치적 기능성을 높이 평가한 사람이었다. 그는 기독교 역사상 초유로, 기독교 정치가들인 독일의 귀족들을 높여 “정의를 집행하는 하나님의 왼손“이라 치켜세웠다. 성례를 행하고 구원을 선포하는 교회가 하나님의 오른 손이라면 정치가들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그 권위를 위임받아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일 하는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것이다. 루터가 이렇게 정치권력의 본질을 하나님의 것으로 높인 바로 그 전통은 결국 4세기 후 독일 기독교인들에게 히틀러조차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위자라고 굳게 믿도록 만든 신학적 오류였다. 루터는 자신의 종교개혁 의지를 살려주고 교황의 권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귀족들을 부추겨 세워 자신의 전위대로 삼기도 했지만, 그의 행위와 사상은 독일 교회에 인류역사상 가장 흉악한 대량 학살을 불러온 히틀러 나치정권을 교회가 묵인하고 심지어는 협력했다는 치명적인 오욕을 남겼다.
루터의 보수적 정치해석을 수정한 이는 칼빈이다. 제네바에서 포렐과 종교개혁 작업을 하던 칼빈은 제네바 시의회 정치가였던 평신도였다. 그러므로 그는 성직자라기보다 평신도로서 교회의 개혁을 주창했다. 그는 하나님의 정치라는 성서해석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선포하는 교회는 정치가들에게 심원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었고, 만일의 경우 정치가들이 교회의 거룩함을 훼손할 경우 교회는 기독교인의 그리스도의 주권에 자신을 맡기는 신앙양심에 따라 이에 저항할 수 있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 소위 그리스도 주권을 통한 저항권 행사 가능성을 설파한 것이다. 이런 칼빈의 입장은 개혁교회 전통의 좌파에 사회개혁 이상을 불러오는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칼빈 역시 정치권력에 대하여 신자들이 정치적인 의도를 신앙적 저항으로 위장하는 태도에 대하여 강한 비판과 경고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강조해 온 그의 신학은 죄인들의 항변이 매우 그릇될 수 있다는 점에 더 큰 강조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빈의 저항권 사상은 기독교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고, 불의한 정권에 항거할 수 있는 신학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개신교회 정치윤리의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남아있다. 현대 정치신학, 민중신학, 남아공의 해방신학은 일종의 칼빈 좌파적인 저항권의 적용, 즉 정치신학적 산물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한국 교회 안에서 칼빈 우파적 교회들은 사실상 군사독재 시절 침묵을 일관해 왔고, 정치와 종교의 분리설에 기댄 흔적이 역력하며, 심지어는 독재자들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수시로 열고 아부와 첨언을 일삼았던 역사적 기억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일제에 의한 강점기 때에는 일제의 태평양 전쟁을 지지하며 교회의 동종까지 떼어 내 군수물로 징발하는 데 협력하기도 했다. 독재정권하에서는 침묵과 아부로 일관하던 교회들이 문민정부 이후 소리를 내기 시작하더니 작금에 와서는 신학적 기초 상식에도 맞지 않는 정치적 요구들을 강단에서 하나님 말씀처럼 선포하기도 한다. 성직자들이 설교자의 권위를 남용하는 강단의 타락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과연 이런 행태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독교의 자기 정체성을 밝혀온 신학적 사유와 어떻게 연관이 되는 것일까 스스로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세계 2차대전 직전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을 때 독일 교회들이 그를 환영하는 소리를 높이는 것을 보고 일련의 개혁교회 대표들은 1934년 바르멘에 모여 정치를 교회중심에 불러오는 행위에 대한 신학적 경고를 제기하였다.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 이외의 모든 수단을 하나님의 계시에 준하는 것으로 여기는 행위를 비신앙적인 것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독일의 대부분의 교회는 그들의 소리를 경청하지 않았다. 기독교 신학자, 그리고 독일 사회의 중심에 서있었던 성직자들이 히틀러 정권에게 기대를 걸고 그의 권력을 환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들은 히틀러의 범죄에 대하여 침묵하거나 동조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독일 교회는 종전 후 니뮬러를 중심하여 슈트트가르트 죄책선언(Stuttgart Schuldbekennis)을 하게 되었다. 이 두 개의 문서들은 그 후 기독교와 정치의 상관관계를 매우 명료하게 밝혀주는 문서로 자리를 잡았다.
강단의 정치화는 영적인 오류
이 문서들의 항목마다 깊이 묵상할 의미가 깊이 배어 있지만 나는 강단을 정치화하려는 성직자들의 오류를 지적하기 위하여 두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는 기독교 신앙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주님으로서의 주권을 세상의 다른 권위와 섞거나 혼동하는 어리석음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행여 그럴듯한 정치가가 나온다 하여도 우리는 그를 그리스도를 대리하거나 그에 버금가거나 혹은 그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주권이 더욱 확장될 것을 기대함으로써 거룩하지 않는 것을 거룩한 것이라 착각하게 하는 모든 가르침을 배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 독일 기독교인들은 히틀러 세력을 하나님의 것으로 착각함으로써 기독교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죄악에 동참하고, 전후 그 책임을 져야 했던 고통스러운 기억을 가지게 된 까닭이다.
물론 우리는 정치를 통하여 우리 사회가 보다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인간의 존엄성이 확장된 사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신앙과 정치를 혼동하여 이를 섞는 행위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세워진 교회의 거룩함을 권모술수를 통하여 권력 장악에 궁극적 목표를 가지는 세속정치와 혼동하는 신학적 혼란과 영적 혼란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런 혼란에 대하여 폴 레만은 기독교는 메시아니즘적 정치, 즉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앞당기는 평화의 정치를 지향하지만 세속 정치와 연계된 타락한 교회는 정치적 메시아니즘, 즉 정치가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영적 혼란을 불러온다고 지적한 바 있다. 나는 이 지적은 매우 타당한 것이라고 본다. 성직자들이 기독교 정치가들을 통하여 무엇인가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정치에 영적인 권위까지 부여하겠다는 정치적 메시아니즘의 본색을 드러내는 매우 이교적인 행위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만연한 “장로이니 대통령으로 세우자“ 혹은 ”이왕이면 기독교인을 찍자“라는 매우 단순한 편파적 발상은 기독교인이라는 단순한 전제만으로 정치적 신뢰를 던져주자는 매우 어리석은 구호이다. 기독교회는 모든 인간은, 나아가 성직자라 할지라도 죄스러운 경향을 벗어날 수 없는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를 받아야 하며, 오직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신앙고백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가를 종교인으로 착각하거나, 설혹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영적 신뢰를 던지며 신도들에게 특정한 정치가를 편들게 하는 것은 성직자 권위의 오용일 뿐 아니라 남용이며 심각한 영적인 범죄가 될 수 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혼동하는 행위는 한국 교회 안에 영적인 혼란을 초래하고, 나아가 교회의 권위를 초라한 인간 정치가에게 위탁함으로써 하나님의 교회의 권위와 신뢰를 추락시켜 기독교 선교의 커다란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와 성직자는 어떠한 정치적 행위도 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다 정치적 행위는 신앙고백의 차원이 아니라 이성적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라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정치와 경제는 이성의 영역이 현실이지 계시와 신앙과 신앙고백의 영역이 아니다. 교회는 궁극적인 관심의 빛에서 세상을 보게 하지만, 정치는 교회가 가진 궁극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보지 않는다. 즉 강단과 정치가들의 활동무대는 다른 것이다. 그런데 강단에서 성직자가 정치가들을 편들고 그들을 대변한다면 이는 곧 강단의 세속화와 정치화를 의미할 뿐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빛에서 이루어져야 할 정치, 곧 하나님의 정치와 세속 권력 장악을 지향한 이해관계에 동기를 부여받은 세속 정치가들의 정치를 뒤섞는 행위가 된다. 그리하여 성직자들은 스스로의 영적권위를 포기하고 정치가들을 시중들고 편드는 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정치가들의 종노릇을 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성직자가 이런 행태를 반복하게 될 경우 교회의 정치적 다양성은 성직자 개인이 선호하는 편견에 지배를 받아 신학적 조명을 받기 보다는 정치적 의도를 품은 설교들이 남발되는 영적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이 경우 정치적 신념과 이해를 달리하는 신도들 간의 분쟁이 일어나고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에 대한 혼란이 가중되어 교회는 하나님 현존에 대한 인식보다 정치적 의도와 의식들이 지배하게 되어 세속화될 수밖에 없는 불행을 겪게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 말씀을 앞세우고 서야 할 강단에 선 성직자가 특정한 이의 정치적 욕망을 거룩한 것에 버금가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정치설교는 강단을 어지럽히는 일이며, 신학적 기준을 잃은 처사이므로 당연히 삼가야 한다. 더구나 교단적 일치와 에큐메니칼한 대의 기관들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성직자들이 개별적 선호도에 따라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특정한 편견이 가득한 시국선언문을 낭독하고 특정 정치집단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는 것은 성직자로서의 권위를 오용하는 것이며 심각한 타락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교회와 성직자는 현실 세상에 대한 사회참여 없이 방관하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교회와 성직자들의 사회 참여는 교회와 성직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밝힐 분명한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사회 참여에 적극 나설 수 있어야 한다. 신학적 숙고 없이 정치참여를 일반화하는 것은 개인의 경우라면 방관하거나 개인의 선호도 문제로 간과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교회와 그 교회의 영적 책임을 맡고 있는 성직자는 자기 규명에 있어서 분명한 신학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속되고 경박한 정치적 행위를 교회의 이름으로 혹은 성직자의 신분을 이용하여 강단에서 대변함으로써 하나님의 교회를 욕되게 하고 하나님의 선교의 장애를 불어오는 불행한 결과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의 정치적 책임에 대하여
둘째, 위의 두 선언문들은 정치와 교회의 관계를 밝히면서 기독교인의 정치적 책임의 과제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교회는 정치권력을 시중드는 일이 없어야 하며, 오히려 정치권력의 자기 의화를 비판하고, 그 한계를 지적할 수 있는 영적 권위를 가져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다음 몇 가지 사회윤리적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1) 교회는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존엄성을 지키는 행위에 참여할 수 있다. 만일 특정한 정치권력이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을 극도로 훼손한다면 교회는 적극적으로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는 전사들의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복음이 명하는 이웃사랑의 행위로서 이웃의 생명과 권리와 그들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을 지키는 책임에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정황에 따라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는 역할, 억압으로부터 인권을 지켜주는 역할, 그리고 인권의 확대를 위하여 연대를 나누며 노력하는 역할은 신앙공동체에게 위탁된 사회적 책임의 가장 구체적인 과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교회는 특정한 정권획득에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 다만 정치권력에 대한 예언자적 사역을 중요한 정치적 사역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예언자적 기능이란 하나님의 나라의 빛에서 현존하는 사회를 비판하고 격려하여 보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회로의 진보와 변혁을 촉구하는 역할이다. 이런 사역을 감당하려면 교회는 무엇보다도 사회가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도덕성보다 더 높은 도덕적 권위를 지녀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조명과 성령의 도우심을 통하여 끊임없는 자기 개혁의 전선에 서 있는 신앙공동체이므로 일반사회의 도덕적 상식을 초월하는 높은 도덕적 이상을 정치 영역과 사회 일반에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강한 자보다는 약자들의 편에서, 힘의 정치보다는 정의와 평화의 정치 편에서, 권력에의 집착보다는 억압적 권력의 해체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교회는 위선적 예언자 집단이 되어 사회의 조롱을 받을 수밖에 없다. 보수적인 교회들이 여성을 억압하는 차별공동체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공공의 세계에서 보편적인 정의를 주장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매우 우스꽝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3) 교회는 사회내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과 내용에 대한 정보를 분석하고, 우리 사회의 정치적 결정들이 보다 민주적으로 평화롭고 평등하며 자유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되도록 감시하고 감독하는 기능을 담당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과제는 매우 전문적인 분석과 비판을 요하는 것이므로 다양한 정책기관과의 협의와 토론을 통하여 합리적인 판단을 얻는 태도를 요한다. 성서는 오늘의 세계현실 안에서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한 직접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설령 간혹 있다 해도 매우 추상적이며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그 명료함이 취약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학적 혹은 윤리적 해석학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하여 간학문적인 통찰들을 받아들여 교회의 사회적 이해능력을 높여야 한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사회 문제 이해에 있어 불성실하여 간혹 지적 무능력을 드러내며 과거의 판단기준만을 강요한다면 하나님의 교회는 시대착오적인 집단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대사회적인 문제들, 특히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한 교회의 관심과 개입은 성직자 개인의 선호에 따라,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기회를 기습적으로 이용하는 임의적 자기주장의 차원이 아니라, 교단적 차원에서 각 정치가들과 정당의 정치수행 능력을 다양하게 평가하거나 그들의 정책의 현실화 가능성을 검토 분석 비교한 정보들을 공유함으로써 신앙 공동체 구성원 개인들의 올바른 정치적 판단을 돕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 방법이다.
4) 교회의 예언자적 기능은 오늘날 목회자 개인의 정치적 소신을 선포하는 데 있지 않다. 이는 선거철의 과제가 아니라 국가사회의 정의와 평등과 평화의 근간을 지지하는 민주적 법질서 형성을 위한 노력이라는 항구적인 과제와 직결되어야 한다. 즉 우리 사회의 인권과 평화를 지키는 신앙 공동체로서 억압적 법조항의 폐지 및 보편적 인권의 확장을 기하는 입법 청원을 지향한 연대적 과제에 교회들이 예언자적 정신을 가지고 참여하고 앞장 서는 것이 필요 하다. 나아가 기독교 신앙 공동체들은 국내 문제만이 아니라 이웃 아시아 나라들과 아프리카 남미 등 전 세계 안에서 보편적인 인권의 향상과 평화 형성을 위한 노력, 그리고 그 확장을 위한 노력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악한 전쟁에 대해서도 사회과학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분석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때 비로소 하나님의 교회는 그 선교의 지평을 정치적 책임이라는 영역으로 확장해 나갈 수 있다.
이런 일들은 국내 및 세계 교회들과의 연대를 필요로 하는 것일 뿐 아니라, 보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오늘의 사회책임의 문제는 정치 경제적인 문제들을 넘어서서 생명공학과 인간의 미래, 환경오염과 생태계의 변화 등에 관한 교회책임의 지평까지 열려 있다. 평소 이런 과제와는 전혀 상관없이 지내던 성직자들과 부흥사들이 선거철을 만나 특정 후보자의 선전원 노릇을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 공동체 구성원들의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을 무시하고 희롱하는 행위와 다를 것이 없다. 가톨릭 교회와는 달리 개신교는 성직자의 교도권을 스스로 포기하고 신앙인의 개인적 결단과 합리적인 합의 능력을 존중하는 신앙 공동체를 지향해 온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개별 성직자들의 설교자로서의 권위의 남용은 매우 심각한 영적인 오염을 불러오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
민주사회에서 기독교인 개인은 정치가가 될 수도 있고, 개인적인 정치적 견해를 밝힐 자유가 있다. 언론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 안에서 정치적인 소신을 피력하는 것은 현대 민주 사회가 보장하는 매우 중요한 인간의 권리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는 그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에 혼동과 혼란을 주는 행위들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보다 성숙한 신학적인 비판을 통해 보다 책임적인 기독교적 실천 지평을 열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선거철에 이러 저러한 자리에서 성직자들이 정치적, 파당적 발언을 일삼는 것은 교회의 미래를 생각할 때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개인의 정치적 견해와 강당에서 선포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은 질적으로 구별되어야 한다. 이런 까닭에 강단에서 설교하는 성직자들은 교회의 신앙고백과 신학적 전통에 따라 역사적으로 검증된 건전한 신학적 기반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한다.
급변하는 사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행위는 결코 개인의 사리사욕이나 정치적 관심에 동기화된 것이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특정인을 지지하기 위하여 설교자로서의 권위를 이용하는 것은 매우 커다란 영적인 범죄다. 신앙 공동체의 중심에 서 있는 성직자는 교회안의 다양한 정치적 이해나 관심을 넘어서서 보다 심원한 복음의 지평에서 모든 교회 구성원들의 정치적 관심을 보다 하나님의 나라에 접근하는 것으로 이끌어 올릴 의무가 있다. 이런 의무를 망각하고 특정한 세속 정치가를 편드는 행위는 교회의 성례를 어지럽히는 행위이며 신앙공동체의 일치를 깨는 행위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의 정치 사회적 책임은 결국 성직자들의 사회의식의 수준과 인권과 평화에 대한 신념에 따라 그 높이가 다를 수 있지만, 교단적 차원에서의 정치적 책임 인식의 정도는 오늘날 그 교단에 대한 일반의 신뢰와 직결되는 결과를 불러온다. 교단적 차원에서 민주사회의 사회 정치적 책임의 지평을 찾아 확대하고, 교회 구성원들의 사회적 판단능력을 높이는 일이야 말로 참된 의미에서 교회의 정치참여의 중요한 과제 이다. 만일 개체 교회의 성직자들이 그 신도수를 표밭으로 여기며 개인적인 정치적 이해관계를 주장하며 정치적 발언을 거듭 할 경우 그러한 비정치적인 정치적 발언으로 인하여 우리 사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교회가 세속적인 이해관계에 밀착된 정치 집단으로 전락되고,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한 복음적인 사명이 가려지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일반의 신뢰가 무너지고 세상으로부터 조롱과 비판을 초래할 수도 있다. 세상의 비판이 그 세속성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일부 성직자들의 신학적 판단능력의 오류의 결과에 대한 비판으로서 매우 합리적인 것일 경우 그 피해는 막심하다. 이 경우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들이 소수 몇몇 성직자들의 정치적 발언으로 인하여 시대착오적인 후진 집단으로 매도 되거나, 합리적인 비종교인들로부터 비판과 교정을 받는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2000년에 걸치는 장구한 역사적 기억을 가진 종교이다. 정치와 종교에 대한 무수한 신학적 논의들은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고 교회의 예언자적 기능을 바로 잡아온 전통을 형성해 왔으며, 간혹 지나간 오류들에 대한 비판과 다가올 일들에 대한 경고를 포함하고 있다. 일부 성직자들이 품고 있는 현 정부의 성향에 대한 분노가 지나쳐 교회의 강단을 정치적 발언의 자리로 바꾸는 행위는 신학적으로 매우 그릇된 것이다. 신학적으로 본다면 죄의 현실은 기독교 비기독인을 떠나 보편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정치의 영역은 보다 이성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절차이므로 영적인 권위를 가진 이들이 정치를 대변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 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교회의 영적 권위와 순수성을 해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시대의 어둠이 깊을수록 오직 그리스도의 주권을 높이는 겸손한 신앙고백과 더불어 복음의 빛이 더욱 밝아지는 강단들이 되어야 한다. 강단의 권위를 이용하여 특정한 정치가를 높이는 일은 옳지 않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 뿐이며, 강단의 권위는 오직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 그 존재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 12월 잡지에 실릴 글이므로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은 삼가해 주십시요.
Monday, November 12, 2007
Church, Politics, and the Authority of Pulpit
Posted by
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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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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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ctuary of Lutheran Theological Seminary in Hong K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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